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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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서스 임펠에서 가장 유명한 과일 가게, 그러나 아무도 모르는 가게 안의 비밀실.
중앙에 놓인 작은 테이블 주위에 네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은 사내들의 어깨에 비스듬히 떨어져내렸다. 네 명의 사내들은 모두 테이블 위에 놓인 지도와 서류 뭉치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서류를 집어들어 살펴보거나 다 읽은 서류를 옆 사람에게 건네거나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침내 한 사람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칼은 힘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이해할 수가 없군. 이게 말하는 뜻은…….”
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자크는 피식 웃었다.
“보쇼, 칼, 명령을 내리는 장군은커녕 명령을 받는 병사도 되어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도 이게 무슨 뜻인지는 짐작할 수 있어요. 그러니 그렇게 머뭇거리지 말아요. 뭣하시다면, 내가 정리해 드릴까?”
칼은 우울한 표정으로 자크를 바라보았다. 자크는 손가락을 내밀어 지도를 짚었지만 그 눈은 자신의 손가락이 아니라 칼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자 크는 입을 열었다.
“자이펀은, 총공격 태세입니다.”
칼은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른쪽에 앉아 있던 샌슨은 이를 북북 갈면서 지도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확실하군요. 병참의 이동을 보든, 군단 배치를 보든…………. 최정예라 불릴 만한 부대는 전부 한곳에 집결시켰군요. 전선의 공백을 무시하면서까지. 하 지만 왜 이러는 걸까요? 이건 누가 봐도 도박입니다.”
칼은 샌슨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자크를 바라보았다.
“함 씨를 압박하는 거라도 있나, 자크 군?”
칼은 적국의 국방 대신을 친구 이름이라도 부르는 것처럼 불렀다. 자크는 눈을 크게 떴다.
“압박이라니요?”
“전쟁을 질질 끌고 있는 것 때문에 그의 자리가 위험하다거나…….”
자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없어요. 우습지만, 함의 지위는 아무도 원하지 않아요. 다른 명가들은 함이 그 자리를 맡아줘서 고마워한다면 모를까 그 지위를 압박하지 는 않을 거요. 난 정말 이 나라를 이해하기 어렵수.”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사내가 자크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로넨 휴리첼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울 것까진 없소, 자크 군.”
“무슨 말씀이시죠, 백작님?”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이 백작이라는 호칭은 야유가 되었을 것이다. 휴리첼 가문은 백작의 지위를 몰수당했으며 엄밀하게는 바이서스 왕가의 적이 다. 즉 쫓기는 범법자의 입장이다. 하지만 자크가 부른 ‘백작님’이라는 칭호에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로넨 휴리첼은 미소를 지었다.
“자이에서 군권은 그렇게 매력적인 권력이 아니오. 몇몇 예가 증명하지만, 자이펀에서 반란은 불가능하오. 적어도 군권을 등에 업은 형태의 반란 은.”
“흐음?”
“어떤 자이펀의 장군이라도 반란을 시도할 수는 있을 거요. 국방 대신에게든 장군에게든, 자이펀의 무인들에게는 거의 완벽한 지휘권이 주어지니 까. 원한다면 하탄을 향해 칼을 들 수는 있소. 하지만 하탄에게는 닐림의 날개가 있소. 하탄은 손수 반란을 제압할 필요도 없지. 명가들이 나서게 될 거요. 그리고 명가들이 나서면 그 다음날로 반란군은 궤멸이오. 명가들의 소환이 있으면 어제의 병사들은 모두 장군을 버리고 자신이 속한 가문으로 돌아가게 되니까. 게다가 그들은 그것을 배신이라 생각하지 않고 명예로운 선택으로 여기오.”
“하아…………. 그렇습니까?”
“그래요. 자이펀에서는 가문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면 반란은 시도조차 될 수 없소. 자이펀의 무인들은 엄밀하게 말해서는 명가들로부터 병사를 위탁받아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이오.”
“헤헷. 우습군요. 그렇게 말한다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잖아요? 우리나라 장군들도 국왕으로부터 지휘권을 받아 국왕의 병사들을 지휘하는 거니 까.”
“국왕은 하나지만 명가는 다수요. 자크 군. 어떤 자이펀 장군이라도, 수하의 부하들로 하여금 한 명의 하탄을 배신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많은 명가들을 동시에 배신하게 만들 수는 없소.”
자크는 탄복한 눈으로 로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왼편에서는 샌슨이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칼은 두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빙긋 웃다 가 웃음을 지우며 지도와 서류가 가득 쌓인 테이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런 게로군. 역시 무인의 접근은 다르군요, 휴리첼 씨. 나는 그들이 하탄에 대해 감히 반기를 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로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럼, 자이펀의 국방 대신은 한직이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최소한 자기 지위에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직위라는 말이 되겠군요?”
“그렇소이다. 위탁받은 병사들을 데리고 전쟁을 수행하느니 만큼, 우리나라에서 생각하는 장군보다 직업적인 성격이 훨씬 강하다 볼 수 있소. 우리 의 군사적 관점으로 보면 불합리한 체제이오만 자이펀에서는 그런 체제로도 원활하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모양이오.”
“불합리하다? 무엇 때문이지요?”
로넨은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병사는 충성의 대상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칼은 입을 다문 채 충성의 대상을 잃은 무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로넨의 말은 단조로운 어조로 계속되었다.
“엄격한 명령 체계, 위계 서열. 그런 것들은 전쟁을 능률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소. 실제로 그렇기도 하오만, 본질은 좀 다르오. 그것 은 병사들에게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이오. 뚜렷한 충성의 대상은 어떤 강훈련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병력의 질을 높이는 요인이지요. 예를 들자면, 정예군과 도적떼들의 싸움의 승패는 항상 빤하오. 그것은 어느 쪽이 더 잘 훈련되어 있고 어느 쪽이 더 잘 체계화되어 있느 냐의 문제가 아니오. 가족과 고향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정예군과 약탈을 위해 싸우는 도적의 차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간혹 도적이나 산적들로 하여 금 정예 병력을 깨뜨릴 수 있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오. 그럴 경우 그런 도적이나 산적에게는 예외 없이 출중한 우두머리가 있소, 충성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그럴듯하군요.”
“내 생각으로는 자신과 고락을 같이하는 장군이 아닌 배후의 명가들을 위해 싸우는 자이펀 병사들의 사기가 바이서스 군에 비해 높을 것 같지는 않 소이다. 하지만 자이펀은 지금까지의 현상이 입증하는 바 최소한 밀리지 않는 전투를 해내고 있소. 그것은 자이펀 병사들 개개인의 높은 자부심에 관 련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하오만. 그러니까 병사들 개개인의 질이 우리보다 훨씬 우수하기 때문이지요.”
“흐음. 그런가요. 좋습니다. 그럼 자이펀의 국방 대신은 직업인이며 무리의 우두머리라기보다는 군대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전쟁이라는 업무를 치르 는 전문가라고 생각해도 될까요?”
“나는 반대하지 않겠소.”
“그럼 이 친구는 공명심이나 야망을 원천적으로 봉쇄당했다고도 생각해도 되는 겁니까?”
“그의 공명심을 만족시키는 것은 하탄께 받는 상찬이 전부일 것이오. 정복자의 위명이나 승리자의 영광은 자이펀의 무인에게 있어 그렇게 큰 원동 력은 되지 않을 것이오.”
칼은 잠시 호흡을 조절하고는 빠르게 말했다.
“그럼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을까요?”
“타인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아닐 것입니다. 따라서 말하기 어렵소.”
칼은 두 손을 깍지 끼고는 엄지손가락들을 세워 이마를 받쳤다. 그러고는 손가락 끝으로 천천히 이마를 톡톡 찔렀다. 샌슨은 그런 칼의 모습을 보다 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저, 한 마디 해도 될까요?”
칼은 손을 멈추고는 샌슨을 돌아보았다.
“프림 양? 퍼시발 군?”
“……………전자입니다.”
“해보세요, 프림 양.”
샌슨은 맥이 탁 풀린 표정이 되더니 책을 읽듯이 프림 블레이드의 말을 받아 읊었다.
“저, 칼, 난 검이에요. 전쟁터를 많이 돌아다녔지요. 이건 군인들이 말하는 위력 시위가 아닐까요?”
자크는 샌슨이 ‘난 검이에요.’라고 말하는 부분부터 키들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넨 휴리첼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도를 들여다보았다가 다시 샌슨 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웃음기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레이디?”
샌슨은 이제 무릎에 얼굴을 박고 킬킬거리는 자크를 보며 붉으락푸르락했다. 하지만 그의 책임감 넘치는 입은 충실하게 프림의 말을 반복하고 있었 다.
“느낌이에요, 여자의 육감이랄까?”
“푸흐허핫하하!”
자크는 기어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샌슨은 그런 자크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뭔가 그럴듯한 설명을 기대하고 있던 로넨 역시 조금 한심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조금 딱딱해진 어조로 말했다.
“위력 시위로 볼 수는 있을 거요. 실제로 이 배치는 공백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배치니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그때 칼이 말했다.
“잠깐, 나는 비전문가니 만큼 이해심을 가지고 조금만 설명해 주시겠소? 공백이 있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무슨 말이지요?”
로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지도를 가리켜 보였다.
“보시오. 실제로 최정예가 집결한 지점은 푸른 산맥을 가장 빠르게 넘을 수 있는 칼피아 호 연안이오. 그리고 이런 병력 이동을 시도함으로써 구멍 이 생긴 곳은 로발 강 유역, 나브라, 다위너의 세 군데라고 할 수 있겠군요. 다른 곳에서도 조금씩 전력 유출이 있소만 그것은 일단 넘어갑시다. 그런 데 로발 강의 경우, 보시오. 칼피아 호에서 흘러나오는 강이오. 강변을 따라 걷는다면 이곳의 군대 이동은 쉬울 테고, 따라서 로발 강을 점령한 바이 서스 군은 칼피아 호에 집결된 최정예 부대에 의해 보급선을 절단당할 우려가 클 것이오.”
“흐음. 그렇군요.”
“나브라의 경우는 더 고약하군요. 이곳은 점거해 봐야 소용이 없소. 나브라는 대사막의 입구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곳을 점거해 보았자 사막에 익숙 하지 않은 바이서스 군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거요. 다위너의 경우는 항구 도시요. 항구 도시의 공략은 육해 양쪽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점령이 상 당히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바이서스에는 해군이 없소. 나브라와 다위너는, 자이펀으로서는 전술적으로 빼앗기고 싶지 않지만 전략적인 가치까지 있 는 전선은 아니오.”
“그럼, 만일 이 세 전선을 점거당하더라도………….”
“이 세 전선을 돌파하려면 바이서스로서는 전선을 분할해야 하오. 전선이 얇아집니다. 그럼 칼피아 호에 집결된 부대는 그 얇은 전선을 쉽게 돌파할 것이오. 꼭 적합한 표현은 아닐지 모르겠소만 이것은 흔히들 말하는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로 설명될 듯하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위력 시위일 가능성이 높군요.”
로넨은 물끄러미 칼을 바라보다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군무에 익숙지 않은 여기 자크 군까지 파악할 수 있는 만큼, 이것은 뻔뻔스러운 총공세 의도를 나타내지요. 바이서스의 장수들은 당연히 파악할 수 있을 거요. 뻔히 보이는 속임수를 펼치는 이유는 위력 시위일 가능성이 높기는 하오. 하지만…………….”
“하지만?”
로넨은 조금 주춤하다가 말했다.
“이것이 위력 시위라면, 공격은 반드시 있을 테지요. 그것도 상당한 전격전이 이루어지겠지요. 그리고 그 후 외교 채널을 통해 강화 제안이 들어오 지 않을까 하오. 강화 제의의 시점은 함 국방 대신의 의도에 따르겠지만, 그가 바이서스에게 어느 정도의 출혈을 요구할지는 알 수 없소. 그 점에서 볼 때, 칼피아 호는 역시 위험한 한 수요.”
칼은 묵묵히 로넨을 바라보았다. 로넨 휴리첼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푸른 산맥이 돌파당하면 이파실, 켄턴까지도 위험해지겠지요. 이파실과 켄턴이 공략당하면 사우스그레이드는 목에 칼을 들이댄 형국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바이서스로서는 대문 밖에 있던 적을 침대까지 끌어들인 격이 될 것이오. 강화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바이서스로서는 너무 큰 피 해입니다. 권토중래는 생각도 할 수 없을 뿐더러, 자이펀에 연공을 바치는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될지 모르오.”
칼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샌슨은 이를 갈아대며 상당히 듣기 불쾌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자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상한데요? 바이서스가 그렇게 불리한 입장이라면 자이펀은 강화를 제의할 필요가 없잖습니까? 그대로 밀어붙여 올라오면…………….”
“아니, 그렇지는 않소, 자크 군. 전격전의 문제점은 그것이 장기화되기 어렵다는 점에 있소. 자이펀이 바이서스의 완전 병탄을 노린다면 그런 전격 전은 곤란할 거요. 이 최정예 부대는 바이서스 국내로 들어선 순간 보급선이 단절될 위험을 가지게 되오. 잊지 마시오. 그들은 적지에서 싸우는 거요. 아무리 최정예라 해도 오랫동안 싸울 수는 없소.”
“아아, 그럼 뭐냐, 한바탕 설친 다음 강화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말이오. 전선도 아닌 후방에서 이런 지도와 서류만 보고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소.”
칼은 다시 엄지손가락으로 이마를 찌르기 시작했다. 그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합리적이군. 전쟁은 끝낸다. 방법은 강화 강화할 수 있도록 최대한 압박. 그리고 강화 체결 시점에서 자국의 이득은 최대한으로, 공격적이면서도 합리적인 전략이군.”
로넨은 싱긋 웃었다. 그런 로넨을 향해 칼은 약간 나른한 시선을 보냈다. 로넨이 칼의 시선에 의아한 느낌을 받게 되었을 때, 칼은 갑작스럽게 말했 다.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휴리첼 씨?”
“뭐요?”
“무료하지 않으신지 궁금합니다.”
로넨은 칼의 화법을 조금씩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로넨은 허튼 소리 하지 마시라고 말하는 대신 똑같이 잡담하듯 대꾸했다.
“무료하긴 하구려. 광대들을 상대하던 저번 일은 별로 재미가 없었소. 무력한 광대들을 괴롭히는 것은 확실히 품격을 높이는 데 도움되는 일은 아니 었소만.”
“함 씨를 상대해 주시겠습니까?”
로넨은 칼에게 대수롭지 않은 어투로 심각한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그는 잠시 대답을 보류한 채 칼을 쏘아보았다. 칼은 이제 엄지손가락으로 턱을 받친 채 로넨을 마주보고 있었다.
“강화에는 찬성합니다만 우리도 역시 잇속을 차려야지요. 함 씨의 계획은 수정 후 통과입니다. 사우스그레이드의 땅은 한 조각도 못 내줍니다. 당신 이 함 씨의 스케줄을 바쁘게 만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말이오.”
“고대로부터 전해져 왔지만 아직도 유효한 전술이죠. 불과 물을 같이 보내는 것.”
로넨은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대로 샌슨을 바라보았다. 샌슨은 얼떨떨한 눈으로 로넨의 시선을 마주 받았고 그런 샌슨을 보던 로넨은 피식 웃었 다.
“샌슨 군의 부관인 거요?”
샌슨은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가 뭔가 놀라움을 표시할 말을 찾기도 전에 칼이 먼저 말했다.
“연장자에게 기분 좋을 제안은 아닙니다만………, 휴리첼 가도 이젠 부활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나로선 반대할 이유가 하나도 없군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어떻게 참전시킬 생각이시오?”
“전시 특례법을 조금 확장해서 적용하면 되겠습니다. 백의종군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자수 말이군요.”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재판소에 들르시기만 하면 됩니다. 티타임 때는 자유의 몸으로 참석하실 수 있을 겁니다.”
로넨은 그만 웃고 말았다.
“놀라운 사람이오, 당신은 뜻밖의 선물도 이 정도라면 놀라기도 어렵군요. 감사히 수락하겠소이다.”
자크는 떨떠름하게 말했다.
“어, 저. 무시되는 기분을 느끼기도 어렵군요. 하지만 분명히 무시라고요. 여기에는 도통 이해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두 분 설명 좀 곁들여서 풀코 스로 말씀하시면 안 될까요?”
칼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자크에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대신 칼은 샌슨에게 말했다.
“퍼시발 군. 휴리첼 씨를 수행하게.”
눈을 껌벅거리던 샌슨은 어쩔 수 없이 불안하게 말했다.
“수행? 저, 어디로요?”
“어디긴, 법무부지. 가서 법무장관을 찾아서 내가 보냈다고 하게. 자네는 악질 반역자 로넨 휴리첼을 감화시켜 그로 하여금 자수하게끔 설득한 것일 세.”
로넨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샌슨은 아직까지도 두 눈을 불쌍하게 끔뻑거리며 말했다.
“아………, 내가 그랬군요.”
이번엔 칼과 로넨, 그리고 자크까지 모두 웃어버렸다. 칼은 미소 띤 얼굴로 샌슨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휴리첼 씨는 백의종군하는 것으로 과오를 씻게 되실 걸세. 무문의 명가 휴리첼 가문의 전사이신 휴리첼 씨의 임지는 저 잔악한 자이펀 과의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사우스그레이드. 저 용맹 무비하며 동시에 비할 데 없는 지혜로움을 한 몸에 겸비한 전사이자 현자인 샌슨 퍼시발 공을 보필하며 저 악랄한 자이펀의 국방 대신 함을 상대로 용전분투하실 걸세. 이해했나?”
샌슨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이럴 때면 차라리 입을 다문 채 프림 블레이드의 설명이 듣고 싶었다. 하지만 프림 블레이드는 낄낄거리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샌슨은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했다.
“한 번만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로넨은 정말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칼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법무부에 도착한 후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5 분도 되지 않았다. 경비 대원들을 피해 다니며 가명을 쓰고 그림자를 찾아다녀야 했던 시절을 어처구니없는 심정으로 회상하며, 로넨은 모든 준비를 마쳐두고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던 법무장관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었다.
법무 장관은 국법 준수 동의서, 사면장, 충성서약서, 휴리첼 가문 소유의 부동산 관계 서류 전부와 인수증 등을 꺼내놓고는 로넨으로 하여금 차례로 사인하게 했다. 읽어볼 틈도 없이 서류들에 사인하면서 로넨은 체포도 되기 전에 사면당하는 기분이었고, 실제로 사태는 그러했다. 수행했던 샌슨 역시 머리를 가로저었다.
“체포도 없고, 재판도 없고, 곧장 사면에 복권이군요.”
법무장관은 피식 웃고는 그들을 더욱 황당하게 만들었다.
“이거 가져가요. 국왕 전하의 명령서요.”
로넨은 법무장관이 내민 서류를 받아들면서도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했다.
“명령……서요?”
“오크 산수 공부하는 소리 모두 빼고 말한다면, 로넨 휴리첼의 과오는 강물에 실어 보내고, 그를 활에 매긴 화살처럼 전선을 향해 쏘아붙인다는 내 용이오. 아, 당신은 모레 오전에 장엄의 홀에서 국왕 전하께 충성을 맹세하게 될 겁니다. 아시겠지요? 충성서약서는 이미 썼지만 그래도 할 건 해야 지요. 그리고 이건 당신 것입니다, 샌슨 씨.”
“이건 뭔데요?”
“131 전선의 키다린 장군 암살 건은 알지요? 당신은 키다린 장군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제12군단의 군단장 자리를 맡게 됩니다. 자의에 따라 참모진 을 구성할 수 있는 사령관의 권한은 로넨 휴리첼 씨에게 가장 먼저 사용하게 되는 거죠. 국왕 전하와 국방장관의 인가는 다 되어 있소. 돌아가는 길 에 국방부에 들러서 국방장관께 인사나 하시오. 임관식 일정은 차후에 결정될 거요.”
“도대체가………….”
말이 안 나온다. 샌슨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로넨 역시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칼은 도대체 언제 이 정도의 영향력을 자유롭 게 행사할 수 있게 되었지? 로넨은 샌슨을 향해 얼빠진 표정을 보내다가 겨우 손을 들어올려 경례를 했다.
“잘 부탁합니다, 사령관 각하.”
“아, 예……………. 예?”
그래서 두 사람은 대략 한 시간 만에 12군단 사령관과 그 수석 참모가 되어 칼과 자크가 기다리고 있는 과일 가게로 돌아오게 되었다. 커피를 마시 고 있던 칼은 들어서는 두 사람의 얼굴을 보고는 그만 커피를 뿜어내고 말았다.
자크의 투덜거림 속에서 얼굴이 빨갛게 된 채 테이블을 닦고 커피 잔을 정리하는 칼을 바라보며, 로넨은 다시 어처구니없는 감정을 느꼈다. 저자가 정말 법무부와 국방부, 그리고 국왕까지도 움직여서 나에게 자유를 돌려주고 함을 상대하게끔 조처한 자인가?
“놀라운 산책이었소, 칼 씨. 산책길에 자유도 줍고 12군단 수석 참모 자리도 줍고 받들어 모실 사령관까지 주웠소.”
“산책? 아아, 그렇군요. 그 정도의 시간밖에 안 걸렸군요.”
로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샌슨 역시 얼빠진 얼굴로 칼을 보며 자리에 앉았다. 빙긋 웃고 있는 칼을 향해 로넨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샌슨 군 역시 이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더군요. 당신이 그 짧은 시간 동안 임펠리아와 귀족원에 구축해 놓은 것이 어느 정 도의 규모일지는 상상도 되지 않소. 다만, 나도 그 재주를 좀 배웠으면 좋겠군요.”
“아아. 행운이 조금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아무나 드래곤 슬레이어의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죠. 게다가 아무나 바이서스 임펠의 밤의 제왕과 친구인 것도 아닙니다.”
칼은 자크를 돌아보며 익살스럽게 말했고 자크는 뿌듯한 심정이 되어 테이블 위에 커피를 쏟아놓은 칼을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로넨은 조용히 말했다.
“각설하고……, 이렇게까지 준비되었다면 당신은 진즉에 나를 사용할 생각이었던 모양이군요. 함의 전격전을 알기 전부터 말입니다.”
“그렇지요.”
“이유는?”
칼은 싱긋 웃었다. 그리고 로넨은 목이 조금 메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복권시켜 주기 위해서요?”
“바이서스로서도 좋은 일입니다. 카뮤나 넥슨의 일이 없었다면 당신은 오래 전에 전선을 질타하고 있었을 겁니다. 능력 있는 전사를 본인과는 상관 도 없는 죄 때문에 기용치 않는다면 손해죠.”
로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런 그를 보며 칼은 다시 웃었다.
“솔직하게 말하죠. 나라고 왜 함과 같은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겠습니까.”
“고맙군요. 솔직해 줘서. 당신이 사용한 카드는 지골레이드인 거요?”
“예. 나는 지골레이드로 압박하여 강화를 제의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강화가 이루어지는 시점에서 보다 많은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 당신과 샌 슨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지요. 함 씨가 나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는 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양자는 강화에는 동의했 지만, 덕분에 땅따먹기는 더욱 힘들어지게 되었군요.”
로넨은 미소 띤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함의 추고, 함은 당신의 추겠군요.”
“추라고 하셨습니까?”
“기나긴 전쟁의 끝에서, 희대의 전략가 두 명이 양국에서 동시에 등장하는 것은 왠지 유피넬의 저울대의 역사처럼 느껴지는구려. 역시 유피넬의 저 울대는 길고, 헬카네스의 추는 무거운 법이지 않겠소.”
“하하. 희대의 전략가라니요. 그것은 저 허즐릿이나 레베카 장군 같은 이에게 어울리는 말이지, 나 같은 독서가에게는 가당치도 않습니다.”
로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몸을 앞으로 내밀며 본질적인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당신이 독서가라는 점에 대해 조금 불안을 느끼고 있기는 하오. 당신이 선택한 12군단 말인데, 쓸 만한 부대인 거요? 군인의 시각과 독서가 의 시각에 차이가 없다고는 말하지 않겠지요.”
“예……, 옳은 지적입니다. 사실은 나는 12군단은 본 적도 없습니다.”
로넨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이보시오. 당신은 샌슨 군과 나로 하여금 그 부대를 가지고서 함이 모아들인 최정예 부대를 상대하게끔 했단 말이오. 검신과 칼자루도 구분하지 못 하는 병사들을 데리고 그런 어려운 일을 할 수는 없어요. 사령관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직 그 직위가 낯설기 때문이다. 샌슨은 자신을 부른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로넨의 말을 듣고 있다가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
“어, 저, 예. 음. 그렇겠지요? 칼?”
칼은 대답했다.
“나는 전사가 아닙니다. 전사의 감식안 같은 것은 없지요. 그래서 내 나름의 방식으로 생각해 본 겁니다.”
“독서가의 방식은 무엇이었소?”
“키다린 장군이 암살된 것은, 그 군단이 자이펀에게 위험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보았지요.”
칼은 퍽이나 단순하다는 듯이 말했고 실제로 그 말은 단순했다. 하지만 로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옳은 말씀이시오. 납득되는군요. 하지만 군단 하나를 가지고 자이펀을 침공하는 일 같은 것은 불가능하오.”
“아, 그 문제 말인데, 이제는 전략 변경입니다. 막기만 하십시오.”
“막으라고요?”
“예. 원래는 국방장관께 간청하여 몇 개 군단을 더 움직여볼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함 씨의 의도가 나의 의도와 같은 것이 밝혀진 이상 땅따먹기 는 포기입니다. 함 씨의 의도를 저지시키기만 해도 성공입니다. 지골레이드께서 강화를 이끌어내실 동안 자이펀 병사는 한 명도 바이서스의 땅을 밟 지 못하게만 해주십시오. 바로 그 점 때문에 다른 전선에서는 절대로 부대를 빼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부탁이 되었습니다만, 가능하겠습니 “까?”
“……애써 보겠소.”
칼은 그 정도로 만족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칼은 고개를 돌려 샌슨을 바라보았다.
“제12군단 사령관 각하. 이해하셨습니까?”
샌슨은 벙글거리며 말했다.
“헷. 그러고 보니 우습군요. 사령관은 저인데, 제 참모한테 먼저 물어보셨군요?”
“말했잖나, 퍼시발 군. 불과 물을 함께 보내는 거라고. 원래 계획대로라면 난 자네에게 기대를 걸었을 거야. 자이펀 영토를 침범하고 강화 시점까지 유지하는 작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뺏기지 않는 것이 중요한 입장이 되었네.”
“아이구! 나는 모르겠습니다. 언감생심 오거가……………, 시끄러! 헬턴트 촌놈이 군단 사령관이라니요. 후치가 들었다면 배를 붙잡고 웃었을 겁니다. 난 지금 12군단의 병사들 앞에서 어떻게 하면 말을 더듬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더 고민입니다. 바보는 원래 고민이 없다 해도…………, 으아아, 정신 통일! 음음. 젠장, 칼, 지나치게 파격적인 인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로넨 씨를 군단장으로 하시면 안 됩니까?”
로넨과 칼이 동시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샌슨 역시 자신의 말이 틀렸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자유인이지만, 한 시간 전만 해도 쫓기는 범법자였던 로넨이 바이서스 군의 군단장을 맡을 수는 없다. 하지만 샌슨의 불만은 끝나지 않았다.
“예, 예, 알겠어요. 하지만 칼, 난 정말이지 군단이라는 것이 어떻게 편성되어 있는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날아가는 비둘기, 창공에…………, 우오옷! 놓 고 말하겠습니다!”
샌슨은 칼자루를 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프림 블레이드를 풀어서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프림 블레이드의 칼날이 떨리며 검집으로부터 웅웅거 리는 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샌슨은 강철 같은 얼굴로 그것을 무시해 버렸다. 하지만 그처럼 굵은 신경을 가지지 못한 칼과 로넨은 찌푸린 얼굴로 소음 을 애써 참았다. 샌슨은 그제서야 당당하게 말했다.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는 부대를 어떻게 지휘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칼?”
“아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으음. 휴리첼 씨께서 많은 조력을 주실 걸세. 그런데, 음…………, 퍼시발 군? 프림 블레이드를 좀 쥐면 안 되겠나? 자 크 군에게도 폐가 되지 않나. 이곳은 자크 군의 가게란 말일세.”
샌슨은 자크를 흘끔 바라보았고, 그러자 자크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 걱정 마슈, 칼,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이 방 안에서 나는 소리는 절대로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되어 있지요. 아무 걱정 마시고 말 씀 나누시죠.”
자크는 그렇게 말하며 방을 나가버렸고 로넨과 칼의 이마에 생긴 주름은 더욱 깊어졌다. 아이고 맙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