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3권 – 7장 멸망은 완성의 귀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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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스스할 정도로 고요해. 네리아는 침울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모든 얼굴들 색깔이 모두 각양각색. 예쁘지는 않아. 궤헤른, 당신 미소 지으면 근사할 것 같은데, 지금의 그런 얼굴로는 어떤 여자에게도 접근할 생각 하지 말아요. 주블킨 할아버지, 당신 무서워요. 저 여자는 뭐지. 흐음. 그 글레이브도 상당히 엑조틱하지만 내 트라이던트가 더 근사해. 와아, 이 기다란 한숨 소리는 뭘까. 운차이?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얕고 긴 한숨 끝에, 운차이는 칼로 자르듯 말했다.
“후작을 죽인다.”
그란의 눈이 재빨리 운차이의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제레인트는 기겁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 운차이……”
“쉽게 생각할 필요가 있는 시간이야. 우리들의 오랜 추적의 목적만 생각해도 결론은 당연하다.”
운차이는 쓰디쓴 표정으로 후작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으며 운차이를 마주보던 신스라이프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버렸다. 부르르 떨며 고개를 다시 돌리는 신스라이프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운차이는 나직하게 말했다.
“Yi youkchi ro nharphe un………, Khai!”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 중에서 자이펀 어를 아는 자들의 얼굴이 가볍게 굳었다. 그러나 주블킨과 콜리의 프리스트들 중에는 자이펀 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주블킨은 두 주먹을 들어올리며 탄성을 질렀다.
“당신의 결정은 정확했소! 여덟 번째 죽음은 아홉 번째 정답을 부를 것이오! 당신은 그 정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는 약속을 이행하게 될 것 이오!”
운차이의 입매가 조금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나직하게 말했다.
“이놈들은 우리가 맡지 올라가서 원하는 것을 해.”
“알겠소! 당신의 밤에 콜리의 가호가 영원하기를!”
광란에 젖어 부르짖는 주븜킨을 바라보며 파하스는 운차이의 말을 해석해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자이펀 어로 이루어진 운차이의 선언에 따른다 면, 신스라이프는 할슈타일 후작보다 그렇게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운차이의 선언을 이해하지 못한 주블킨은 그대로 몸을 돌려 후작을 쏘 아보았다. 그 옆에는 레이저와 루손이 얼떨떨한 표정을 한 채 서 있었다.
궤헤른의 귀 앞으로 급격하게 주름이 생겨났다.
이를 악문 궤헤른은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는 운차이와 그란 등이 무서운 표정을 한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절망을 느꼈다.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후작과 그의 사이에는 흥분한 콜리의 프리스트들이 사람의 벽을 만들고 있고, 등 뒤에는 그들 최고의 악몽이라 불 릴 만한 자들이 칼과 눈빛 양쪽을 모두 맹렬하게 번득이고 있다. 니크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토실토실한 볼 때문에 파묻힌 것처럼 보이 는 두 눈 가득 눈물을 담은 채, 니크는 애써 울음을 참느라 헐떡거렸다. 그리고 가이버는 고개를 떨군 채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블킨 역시 후작의 부하들이 완전히 무력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기에 계단을 올라가는 그의 동작은 여유로웠다.
이제 그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두 명뿐이었다. 루손을 부둥켜안고 있던 레이저는 초조한 표정으로 주블킨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굳어버린 후작을 쳐 다보았다. 정말 이래야 되나? 레이저는 다시 말하려 했지만 주블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비켜라, 올로레인의 후예여.”
레이저는 얼굴을 온통 찡그린 채 주블킨을 쳐다보았지만 주블킨의 얼굴은 완고했다. 레이저는 고개를 숙여 루손을 보았다. 아직까지도 사태를 이해 못한 채 거인에 대한 공포에 빠져 있던 루손이었지만, 그녀 역시 주위를 흐르는 진지한 분위기에 입을 다물고는 레이저를 올려다보았다. 레이저는 루 손을 놓아주며 말했다.
“루손…………, 거인은 사라져야 하겠지?”
“응? 그, 그래. 레이저. 그렇지.”
“따라와.”
레이저는 어깨를 늘어뜨린 채 계단 옆으로 걸어갔다. 루손은 주블킨을 한번 바라보고는 글레이브를 흔들며 레이저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주블킨은 벅찬 심정으로 신스라이프를 올려다보다가 후작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를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후작은 여전히 달려내려 오던 모습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주븜킨은 참을 수 없는 유쾌함을 느꼈다. 그는 후작의 귓가로 얼굴을 가져가 며 나직하지만 열띤 목소리로 속삭였다.
“개인적으로…………, 네놈이 여덟 번째 제물이라는 것에 대해 콜리에게 감사하고픈 심정이다, 후작. 의사를 존중할 줄 모르는 놈은 생명을 존중할 줄 모르는 놈이지. 네 녀석의 생명은 네 스스로 이미 포기한 것이다. 킬킬킬…….”
귓가에 울려퍼지는 주븜킨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할슈타일 후작은 미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 죽어야 하나, 이렇게 멍청하게! 꼼짝할 수도, 말 할 수조차도 없는 이런 무력한 모습으로 이런 놈에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미 죽은 녀석을 위해서!
주블킨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계단 위에 떨어져 있던 경비 대원의 포차드를 들었다. 주블킨은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서는 포차드를 할슈타 일 후작의 가슴에 겨냥했다.
“콜리의 가호 속에!”
후작은 고함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주블킨이 내지른 포차드는 그대로 후작의 복부를 꿰뚫었다. 푸욱! 날카로워질 대로 날 카로워진 후작의 감각은 복부의 피부를 뚫고 근육을 자르며 뱃속을 후비는 포차드의 칼날을 그대로 느꼈다.
“후니이이임!”
니크는 목이 터지도록 울부짖었다. 그리고 궤헤른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집어삼킬 듯이 주블킨을 노려보던 후작의 예리한 눈빛에 순간 얼룩이 번졌다. 손끝이 차갑다. 발이 차갑다. 후작은 빠른 속도로 무뎌져 가는 감각을 느꼈다. 포차드가 다시 빠져나갈 때 후작은 둔한 동통 같은 것만을 느꼈을 뿐이었다.
이제 죽음인가.
무너져내린 바위와 흙더미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깊은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동굴 속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오크는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을 느끼기 엔 그의 현실 인식 능력이 너무 조악했다. 그래서 오크는 조금도 좌절하지 않은 채 한결같은 힘으로 돌을 내리치고 흙더미를 파냈다.
꽝! 꽝! 꽝!
현실 인식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에게는 행운이었고 그의 팔 근육에는 불행이었다. 오크는 무너진 동굴에 갇혔다는 현실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 것이 큰 장애라는 추리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오크는 손도끼로 바위를 내리치고 흙더미를 밀어붙이며 꾸준히 길을 냈다. 그가 땅을 파는 방식은 드워프가 보았다면 수십 대 위의 조상까지 거들먹거리며 지독한 욕설을 퍼부어 댈 만한 방식이었다. 안전 대책이라든지 붕궤의 위험 같은 것은 전혀 고려에 넣지 않은 채, 오크는 다시 손도끼를 바위틈에 끼워 넣었다. 그러고는 두 손에 침을 탁 뱉고 손도끼를 지렛대 삼아 아래로 내리밀기 시작했다. “취, 츄아아아악!”
바위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그를 아는 모든 오크들이 두려워하는 괴력이 최고 수준으로 발휘되었다. 극도로 긴장된 그의 어깨 근육에서는 핑핑 소리 가 울릴 지경이었다. 크게 뒤틀리던 바위가 움직이자 오크는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꽈드드등!
바위가 뽑혀 나오며 어마어마한 충격음이 울려퍼졌다. 땅을 파던 오크의 상체만큼이나 큰 바위가 쑥 뽑혀 나오자 토사와 자갈들이 우수수 쏟아져내 렸다. 바위는 바닥에 떨어져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크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 광부였다면 모든 신의 이름을 부르며 광란스러운 감사를 표해야 할 장면이었다. 이토록 거대한 바위가 뽑 혀나왔는데도 그 위의 바위들은 2차 붕궤 없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서로 맞물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기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오크는 지난 열하루 동안 이런 기적을 수십 차례나 만났다.
하지만 오크는 자신이 얼마나 운이 좋은지 따위는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열하루 동안 굽힘없이 바위를 들어내고 땅을 파게 한 그의 강철 같은 의 지는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이제 더 이상 뜯어먹을 다른 오크의 시체가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동굴 속에서 발견한 오크의 시체는 모두 뜯어먹었고, 이젠 뼈다귀라도 빨아야 될 지경이었다. 그랬기에 오크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바위에 달려들었다.
쩡! 도끼날이 바위에 부딪히며 불꽃이 튀어올랐다. 불꽃 속에서 잠시 드러난 나크둠의 얼굴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킨 크라이라 불렸던 그리폰은 머리를 들었다.
푸드덕. 날개가 무겁다. 킨 크라이는 고개를 홰홰 내젓다가 갑자기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는 캄캄하다. 그리폰은 어둠을 좋 아하지 않는다. 킨 크라이는 불안한 심정으로 부리를 딱딱 부딪치고는 고개를 돌려 날개를 손질했다. 주위에는 깃털이 어지럽게 떨어져 있었다. 건성 으로 날개를 손질하던 킨 크라이는 갑자기 주위에 자욱한 피 냄새를 느꼈다.
킨 크라이는 화드득 놀라면서 몇 큐빗 정도 날아올랐다. 비상이라기보다는 도약이다. 잠깐 펼쳤던 날개를 다시 접으며, 킨 크라이는 밤의 데이든 평 원 위에 도로 내려섰다.
무엇인가에, 맞았다.
킨 크라이는 그것을 떠올렸다. 주인의 다리에 가볍게 머리를 비벼댔을 때였다. 무엇인가가 날아와 머리에 부딪히며 머릿속이 온통 번쩍였다. 지독한 아픔과 공포. 맞았어. 킨 크라이는 다시 고개를 내젓고는 제자리에서 몇 바퀴 돌았다. 뭐였지?
그러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킨 크라이의 머릿속에서 무엇에 맞았다는 의식이 점점 현실성을 잃었다. 아프지 않아. 맞았나? 자신이 공격 당했다는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 가자 그의 머릿속으로는 느리게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
주인은 그에게 이 무거운 안장을 치워주고 씻겨주고 먹이를 가져다주는 존재다. 그런데 그것들이 가장 필요한 이 시점에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 어 떻게 된 거지? 킨 크라이는 다시 뱅글뱅글 돌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둡고 피 냄새만 날 뿐이다. 킨 크라이는 갑자기 피로감을 느꼈다. 그 러자 희미한 사고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갔다. 뭔가를 먹고 잠자리를 찾아야 해.
‘주인을 찾자’
킨 크라이는 자신의 결정에 만족했다. 주인을 찾으면 그가 먹을 것을 주고 안장을 떼어주고 잠자리를 주리라. 주인은……………, 주인의 친구들에게 간 것 일까.
‘주인의 친구. 딤라이트, 무스타파. 어디?”
킨 크라이의 멋진 결정은 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주인의 친구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킨 크라이는 다시 어쩔 줄 모르는 동작으로 부리로 땅을 헤집 고 발톱으로 흙을 긁어대며 빙빙 돌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
그리폰? 사우스그레이드에 웬 그리폰이지?”
킨 크라이는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돌렸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진 아무도 없었는데. 킨 크라이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몸을 낮추며 날개를 좌악 펼쳤다.
어둠 속에 검은 그림자가 서 있었다. 건장한 남자의 그림자. 킨 크라이는 고개를 한껏 낮춘 채 남자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저건 누구지?
킨 크라이를 내려다보던 남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안장? 안장이라니, 넌 길든 그리폰인가? 하지만 그리폰 라이더가 남아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일스의 기사………….”
사내는 흠칫하며 다시 킨 크라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 킨 크라이는 조금 놀랐다.
“킨 크라이? 너 혹시 일스의 기사 그레이 휠드런의 그리폰인 킨 크라이인가?”
킨 크라이는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몰랐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과 주인의 이름이 연달아 불리자 킨 크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조금 쳐들었다. 남자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킨 크라이를 내려다보다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쥐었다.
“소, 솔로처도 돌아오셨지. 설마, 설마 그렇다면…, 천공의 기사도 부활했단…………. 부활!”
남자는 갑자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킨 크라이가 의아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남자는 정신없는 동작으로 팔다리를 만지며 더듬더 듬 말했다.
“내………… 팔! 내 다리, 남아 있어. 붙어 있어……………. 살아 있어! 나는? 나는 싸웠는데…………. 살아난 건가? 나도 부활한 건가? 오오, 레티여!”
남자는 무릎을 꿇었고 그 갑작스러운 동작에 놀란 킨 크라이는 뒤로 훌쩍 뛰었다. 하지만 남자는 킨 크라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어깨를 감싸쥐고 오열했다.
“맙소사, 되살아났어. 살아났어! 어떻게? 어떻게? 나는………… 나는?”
이름이 없는 레티의 프리스트였건만 그가 죽기 직전 그에게 이름을 붙인 자가 있었다. 레틴드롤스는 부활한 자신의 몸, 그 법칙의 반역물을 그러안 은 채 온몸이 부서져라 떨었다.
론리 시걸의 갑판장 보타는 사납게 외쳤다.
“그, 그 부적 나도 만지게 해줘요!”
“다, 닥쳐! 가까이 오지 마!”
바바라 선장은 으르렁거리며 부적을 꽉 움켜쥐었다. 졸란의 뒷골목에서 암파린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점복가에게 구입한, 도무지 어떤 효용이 있을 지 의심스러운 괴상하게 생긴 부적이었지만 바바라 선장은 부적의 효용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적을 믿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 다. 중갑판에 몰려 있던 다른 해적들 전부가 바바라 선장이 움켜쥔 부적을 간절한 눈초리로, 혹은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공포에 빠져 있던 것은 다른 해적들과 마찬가지지만 그 눈초리를 본 바바라 선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놈들은 어차피 해적인 것이다. 반란을 무 서워할 놈들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그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선장이 가지고 있다면 선장의 머리를 떼는 것쯤이야 생선 머리 떼는 것보다 더 간단 하게 해치울 놈들인 것이다. 바바라 선장은 보타 갑판장의 손이 칼자루 쪽으로 가는 것을 보며 황급히 외쳤다.
“조, 좋아. 내가 부적을 가지고 있으니, 내가 앞장서서 올라가 보겠다. 너, 너희들은 내 뒤만 따라오면 된다. 알았냐?”
해적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들 단순한 해적들은 역시 선장님밖에 없다는 표정으로 바바라 선장에게 찬양을 보내왔다. 바바라 선장은 침을 꿀꺽 삼 키고는 말했다.
“내 뒤를 바싹 따라와라. 알겠냐? 이 부적을 가지고 있으니 나는 너희들을 막아줄 수 있다. 우리는 바다의 신사다! 아, 알겠냐? 귀신 따위 전혀 무서 워할 것이 못 돼! 바바라는 악마도 두려워하지 않아. 내, 내가 놈의 목을 비틀어주지. 그러니까 너희들은 바싹 따라와야 한다. 알았지?”
일방적인 수긍만을 보내온 다른 해적들과 달리 조금 똑똑한 편인 보타 갑판장은 회의적인 눈길로 바바라 선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지금 상갑판 위 에서 기다리고 있을 존재는 보타 갑판장에게도 마찬가지의 공포를 끼치고 있었기에, 보타 갑판장은 어쩔 수 없이 바바라 선장을 믿는다는 몸짓을 해 보였다.
바바라 선장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주승강 계단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해적들은 각자 무기를 움켜쥔 채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그 뒤를 따랐다. 승강 계단을 올라선 바바라 선장은 잠시 멈춰 서서는 뒤를 돌아보았다. 계단 아래쪽에 가득 모인 해적들의 얼굴들은 어서 올라가 라는 표정을 보내오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바바라 선장은 부적을 왼손에 꼭 쥔 채 오른손으로는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자 문을 열 손이 없었다. 바바라 선장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다리를 뒤로 당겼다.
“이야아아아!”
바바라 선장은 있는 힘껏 문을 걷어찼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계단을 데굴데굴 구른 바바라 선장은 긴장된 자세로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해적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해적들은 비명을 지르거나 욕설을 내뱉으며 서로 뒤엉켜 쓰러졌다.
“우아아아! 뭐, 뭐야앗!”
“바바라, 너 이 당나귀 새끼 같으니!”
“어, 어떤 놈이, 으헉! 내 다리! 문을 잠근 거야! 이익, 눈알을 파버리겠다!”
“선장님이 으윽! 아까 자, 잠그라고 했잖아요!”
“내가 나가기 전에 열어놨어야 되잖아!”
해적들은 헐떡이고, 욕설을 내뱉고, 서로의 머리를 짓누르고, 팔꿈치로 옆 사람의 눈두덩을 가격하기까지 했지만, 일어나지는 못했다. 위에서 떨어 졌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일어난 바바라 선장은 빨리 비키라는 선원들의 고함 소리에 허둥지둥 옆으로 비켜났다. 황급히 일어난 바바라 선장은 고개 를 들고, 바로 코앞에 서 있는 보타 갑판장을 발견했다. 보타 갑판장은 다른 선원들과 조금 떨어져 서 있었기에 쓰러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보타 갑판장은 바바라 선장에게 경멸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위로 한껏 쳐들려 있었다. 바바라 선장은 의아한 표정 으로 고개를 돌렸고, 그러고는 굳어버리고 말았다.
주승강구 문이 열려 있었다. 바바라 선장이 걷어차는 바람에 빗장이 박살난 것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푸른 하늘을 등진 탓에 시커멓게 보이는 한 사내가 해적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다리가 움직였다. 뚜벅뚜벅. 사내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뒤엉켜 버둥거리고 있던 해적들은 숨소리마저 멈춘 채, 그러나 지금 까지보다 훨씬 격렬한 동작으로 일어나려고 애썼다. 그와 동시에 해적들은 계단에서 멀어지려고 버둥거렸다. 조용하면서도 격렬한 소란이 일어나는 가운데 사내의 발소리만이 중갑판 전체로 울려퍼졌다. 뚜벅뚜벅.
바바라 선장은 무엇인가가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바바라 선장은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가요!”
그의 귓가로 들려온 보타 갑판장의 목소리는 낮고도 사나웠다. 바바라 선장은 침을 꿀꺽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고 부적을 움켜쥐고 다리도 좀 떨 었지만, 그러나 앞으로 걸어가지는 못했다. 그 동안 일어난 해적들은 모두 바바라 선장의 뒤쪽으로 도망쳐 그의 등 뒤에 숨으려 애썼다. 그래서 다가 오는 사내와 바바라 선장의 사이에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보타 갑판장은 이제 나이프를 뽑아 바바라 선장의 등을 찔러버리고 싶다는 투로 말했다. “서, 선장님! 부적, 부적을 내밀어요!”
“다, 닥쳐! 내가 알아서 한다. 부, 부적을 내밀어서 저 녀석을 화나게 하면 어쩔 거야?”
보타 갑판장은 그 말에 대해 화를 내고 싶었지만, 그때 사내가 멈춰 섰기에 말이 목구멍에 걸려버렸다. 멈춰 선 사내는 물끄러미 바바라 선장을 바라 보았다.
사내는 피식 웃었다.
바바라 선장이 조금 뚱뚱한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등 뒤에 수십 명의 해적들이 다 숨을 수야 없다. 하지만 해적들은 그들 모두가 바바라 선장의 등 뒤에 숨을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서로를 밀어대고 있었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바바라 선장은 이제 최후의 순간이라고 판단해 버렸다. 그래서 바바라 선장은 발작적으로 부적을 들어올렸다. 팔을 너무 세차게 내미는 바람에 하마터면 부적을 놓칠 뻔했지만, 바바라 선장은 다급하게 부적을 움켜쥐며 말했다.
“무, 물러가라! 잡스런 귀신은 물러가라!”
사내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바라 선장을 보다가 그의 손에 쥐어진 부적을 쳐다보았다.
“그건 뭐요? 부적?”
바바라 선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그래! 이건 부적이다. 유,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이름으로, 잡귀는 물러가라!”
보타 갑판장을 위시한 해적 전원들은 경외감에 가까운 감정으로 바바라 선장의 등을 바라보았다. 우리 선장님이 저렇게 유식할 수가! 야, 그런데 헬 카네스가 누구냐? 그 친구 싸움 잘해?
사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귀신이 아니오. 당신이 나를 구했잖습니까?”
“그, 그래. 아니, 그랬지. 하, 하지만…………….”
“하지만?”
바바라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이런 빌어먹을, 넌 뒈졌단 말이다! 구해 내긴 했지. 하지만 넌 결국 뒈졌고 내가 바다에 던졌어. 그런 데 왜? 왜 귀신이 되어 이 배에 기어 올라온 거야. 난 할 거 다 해줬는데 왜 찾아온 거야! 왜 나를 찾아와, 네가 복수해야 할 것은………….
“왜 블루 드래곤에게 가지 않고 우리 배에 온 거요!”
바바라 선장은 몸을 돌려 보타 갑판장에게 입이라도 맞춰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블루 드래곤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사내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지골레이드……………, 지골레이드! 으아아아!”
사내는 미친 듯이 외쳤다. 바바라는 황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그의 등 뒤에는 수많은 해적들이 몰려서 있었기에 조금도 물러날 수 없었다. 그래서 바 바라 선장은 지독한 공포에 빠진 채로 사내의 광분을 마주 지켜봐야만 했다.
“지골레이드! 복수!”
“놈은 어디 있나.”
졸란 정화 대장 사라스는 이를 악물고,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을 둘러싼 시민들은 숨소리마저 죽인 채 광장 중앙을 바라보 고 있었다. 사라스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광장 중앙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내 생애에 이렇게 많은 시선들을 한꺼번에 받은 것 은 이게 처음인 것 같군. 그러나 광장 중앙에 서 있는 또 하나의 사내는 시민들의 시선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는 다시 사라스를 향해 질문했다. “사라스, 대답해! 놈은 어디 있나?”
사라스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경의를 그대에게…………. 신차이 선장을 찾으시는 겁니까.”
“선장? 미치광이 살인마를 찾을 뿐이다. 감히 나에게 검을 겨눌 생각까지 했다니. 놈이 저지르는 해악은 이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어디 있나!” 사라스는 이마를 닦았다. 진득한 땀이 손바닥에 묻어났다.
“그가 당신을 공격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
“뭐야?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사라스?”
“예. 그는 당신을 공격했지요. 저도 압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죠?”
“사라스!”
상대방은 어이없다는 감정을 넘어서서 분노가 어린 말투로 외쳤다. 사라스 역시 자신의 화법이 머저리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사라스는 정화 대원들에게 살짝 눈짓을 보내고는 상대방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예. 그건 신차이 선장도 알고 나도 알고 이 주위에 있는 시민들 모두 잘 아는 사실입니다. 결투했죠.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어떻게 되 었습니까?”
“뭐라고?”
“그 결투 말씀입니다만,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뭐? 그야 그가 날 쳐서………….”
사내의 입은 열린 그대로였으나 더 이상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사라스는 몸을 조금 낮추며 느리게, 그러나 재촉하는 어투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건 수많은 무술 사범들이며 명가의 수장들이 감탄을 표했던 결투였습니다. 강완(强腕)도 그런 강완은 없을 것이요, 신속에 있어서는 비유할 바를 찾기도 어려운 멋진 한 수였습니다. 신차이 발탄은 당신과의 결투 끝에……………, 당신을 죽였죠. 베이론 코다슈.”
베이론은 꼼짝도 하지 않았으나 팔치온을 쥔 그의 손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라스는 메마른 입술을 한번 핥고 나서는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말했다. 감히 그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듯이.
“당신은 죽었습니다. 코다슈의 불길은 꺼졌습니다. 그렇잖습니까, 베이론 코다슈? 그런데,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사라스가 나직하고 간곡한 어투로 보낸 질문의 답은 끔찍한 비명 소리로 되돌아왔다.
“끄아아아아!”
“덮쳐!”
“우우와아악!”
정화 대원들 역시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달려갔고 졸란의 정화대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그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면서도 사라스는 꾸중을 내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가장 커다란 비명을 지르며 베이론에게 달려든 것은 바로 사라스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절망의 색깔은 암흑. 암흑의 비릿한 냄새는 지겨워.
하얀 백색의 공포가 다가올 때, 가장 뜨거운 침묵으로 노래한다.
팔이 어깨 속으로, 어깨가 다시 가슴 속으로 말려들 것 같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차가움.
할슈타일 후작은 눈을 떴다.
소리 없는 아우성들이 후작의 시각을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얼굴들, 표정들, 감정들, 찌르지 마. 찌르지 마. 그런 눈빛으로 찌르지 마. 너무 아파. 제 기랄. 내 눈이 어떻게 된 거지? 내 눈이 ‘듣고 있어. 내 눈이 ‘만지고 있어.
쩡 하는 이명. 귀가 열린 것 같다.
삽시간에 끔찍하도록 많은 소리들이 ‘보였다. 할슈타일 후작은 귀를 틀어막았다. 귀를 틀어막는 손바닥의 색깔은 붉었다. 태양 때문이다. 할슈타일 후작의 입술이 열렸다.
“아아아…………, 아아……………, 아아아아!”
찌르지 마, 태우지 마, 시끄러워! 이 피 냄새는 너무 예리해, 그 소리들은 너무 뜨거워, 그런 색깔들은 너무 시끄러워!
“아아아아! 아아아아! 아아아아!”
덜그렁. 주블킨의 손아귀에서 포차드가 떨어졌다. 그의 동공은 그대로 튀어나올 것처럼 팽창했다. 주블킨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면서도 할슈타일 후작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죽지……, 않아?”
계단 아래에 있던 궤헤른은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분명히 보았다. 주블킨이 내지른 포차드는 후작의 복부를 거의 관통할 정도였 다. 상처에서 뿜어져 나온 피는 지독하게 붉었다. 그 냄새는 아직까지도 그의 코 안에 남아 있었다. 쓰러지는 후작을 보며 니크가 내지른 비명 소리도 아직까지 그의 귀 안을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후작이 일어난 것이다.
누군가가 그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궤헤른은 무력하게 몸을 돌렸고 흥분으로 시뻘겋게 변한 니크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니크의 두 볼은 그 대로 터질 것 같았다.
“살아 계세요! 죽지 않으셨어요!”
“응? 어어, 니, 니크. 그래…………,
응?”
“이런 우라지게 좋은! 후작님이 죽지 않으셨어요! 급소를 피했나 봐요. 이 개 같은 콜리의 프리스트 같으니, 뒈져라! 네놈의 손으로 우리 후작님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세요! 집사님! 보시라고요! 일어나고 계세요!”
니크는 궤헤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면서도 눈으로는 계속해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궤헤른은 니크가 흔드는 대로 흔들리며 혼란스러 운 머릿속을 어떻게든 정리해 보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사고는 갈피를 잃었고 이성은 헤집어놓은 흙탕물마냥 한층 더한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갈 뿐 이었다.
운차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계단 위의 후작을 응시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이제 똑바로 일어섰다. 하지만 두 눈은 꼭 감겨 있었고 두 손은 귀를 단 단히 틀어막고 있었다. 그런 자세로 후작은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죽었을 텐데, 어떻게 죽지 않는 거지? ‘웅’하는 이명이 운차이의 귓속을 가득 채웠다. 이해할 수 없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그때 운차이의 귀를 가득 메운 이명 사이로 나직한 목소리 하나가 흘러들어 왔다.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 하나 들려드릴까요?”
운차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제레인트였다. 제레인트는 똑바로 서서는 오른손에 쥔 디바인 마크를 가슴에 붙인 채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서 운차이는 제레인트의 귀를 바라보게 되었다.
“끝난 두루마리가 다시 펼쳐지고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된답니다.”
“제레인트……?”
“후작의 두루마리도 그렇군요. 후작의 일대기의 맨 마지막 장면은 이랬어요. ‘쓸쓸하고 차가운 북부의 도시에서 한 광신도에게 찔려 죽다. 그리고 끝.’그런데 말입니다, 후작에게 새로운 두루마리가 배당되었답니다. 어쩌겠어요. 비장한 죽음 장면을 바꿔야지요. ‘할슈타일 후작, 다시 살아남..”
운차이는 소스라치는 기분으로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히죽 웃었다. 그는 몸을 조금 돌려서는 파하스에게 경의어린 동작으로 허리를 굽혀 보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파하스를 향해 제레인트는 나직하게 말했다.
“데스나이트도 살아나고, 솔로처도 살아나고, 거인도 살아나고, 파하스 님도 살아났지요.”
파하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제레인트는 고개를 돌려 다시 후작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너무 이상하게 바라보지는 말아요, 운차이.”
“그럼 후작도………….”
“후작도 살아났습니다. 안 죽은 것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나 버린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