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10장 잊혀진 바람을위한 변주곡 3

퓨처 워커 4권 – 10장 잊혀진 바람을위한 변주곡 3


3

아일페사스 역시 다른 이들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는 행동이 이해에 도움이 될 거라고는 전혀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간과 하나가 된다고?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발?”

“시간은 멈추지 않아. 멈추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지. 그렇다면, 시간과 하나가 된다면 신스라이프 역시 멈추지 않게 될 테지. 아까 인간이 시간을 만 들어낸다고 말했지?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시간과 하나가 되려고 하는 거지. 그는 모든 인간들의 아이가 되려는 거지. 어떤 인간의 부모도 되지 않은 채.”

“부모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여자의 몸이 되었어. 그 정신은 남자지. 그는 단일체고 자기 완결 단위이고 생식을 거부해. 그래, 그는 영원한 아이가 되는 거야. 그의 부모인 모든 인간이 시간을 만들어낼 때 아이인 그는 시간을 만들지 않겠다는 거지. 모든 인간들이 결과를 위해 행위를 할 때, 그는 부모의 재산을 받는 자식 처럼 그 결과를 상속하겠다는 거지.”

“울 거야. 모르겠어.”

“미안하구나. 하지만 난 말하련다. 그는 인간들이 행위할 때 즐겨야 할 결과를 혼자 가져가 버릴 거야. 그래서 시간이 멈추는 거야. 결과가 오지 않 는 거지. 그것은 모두 신스라이프에게 돌아가 버리거든. 인간은 영원히 시간을 만들어내고, 그 시간은 신스라이프에게 상속될 거야. 인간 스스로에게 돌아갈 시간은 남지 않게 될 거야.”

“그럼 왜 프리스트들은 구덩이 속으로 자기 몸을 던진 건데요?”

“행위와 동시에 결과를 받을 수 있는…………, 자살이란다. 키스와 춤과 노래와 마찬가지야. 웃기지? 사람이 거꾸로 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데, 그들 은 자기 시간을 되찾기 위해 자기의 삶을 정지시켰단다. 그들은 스스로를 정지시킴으로서 신스라이프에게 위탁했던 자신의 시간을 되찾게 된 거지. 그게 내가 말했던 추측이란다.”

“내 추측으로도 그래.”

아일페사스는 고개를 돌렸다. 느릿하게 걸어온 후작과 미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할슈타일 후작은 다듬지 않아 덥수룩해진 수염 속에서 입술을 꿈 틀거렸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지.”

발레드는 고개를 조금 들어 할슈타일 후작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당신은 그때의 그자……”

“그래.”

“무엇을 찾아온 건가?”

“신스라이프를 죽이기 위해서.”

“불가능해. 조금 전 이 소녀에게 말했던 바고 당신도 동의한 결론에 따른다면, 신스라이프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지.”

“그건 내 취미 생활이야.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

“농담할 기분인 것 같군.”

“농담이 아냐.”

발레드는 다시 힘들게 고개를 들어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할슈타일은 메마른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내 시간을 만들어왔다. 항상 그래왔어. 그렇기에 난 자살한 프리스트들처럼 될 수는 없다. 말해 봐라. 그들은 자살했으되 너는 아 직 자살하지 못한 까닭을.”

발레드는 말없이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속삭이듯 말했다.

“신이지.”

“그래. 콜리…………. 그들에겐 콜리가 있었지. 내겐 없어. 그래서 난 확신이 없어.”

할슈타일 후작은 손을 내밀었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발레드는 그 손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발레 드는 그 손을 마주잡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발레드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잠시 네 신이 되어주지.”

발레드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후작을 바라보았다. 미와 아일페사스 역시 말없이 후작을 보고 있었다.

“내게 경배하고 내 말을 믿도록. 네 추측은 맞아.”

“정말……이오?”

“확신해도 좋다. 그러니 신스라이프에게 위탁했던 네 시간을 되찾아라. 그것은 네 것이다.”

발레드는 형형한 눈길로 할슈타일 후작을 바라보았다. 할슈타일 후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눈길을 마주보았다. 그 눈길은 질문이었고 요구였지만, 동시에 부정이기도 했다. 발레드는 구토하듯이 말했다.

“난…………, 죽고 싶지는 않소.”

할슈타일 후작의 눈썹이 조금 꿈틀거렸다. 발레드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러고 싶지 않아요. 억울하단 말이오!”

“그럼 계속 네 시간을 신스라이프에게 바치겠다는 건가.”

“그렇게라도 해서 살 수 있다면……. 젠장! 그럼 나 또한 영원히 살 수 있단 말이오. 왜 그러면 안 된단 말이야!”

발레드는 갑자기 뒤로 몇 발 물러났다. 비틀거리며 물러나던 발레드는 눈에 미끄러지며 주저앉았다. 할슈타일 후작과 미, 그리고 아일페사스는 각자 다른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길, 제길, 제길! 그럴 수 있어. 그만의 영생이 아니야! 그가 내 시간을 다 가져간다면, 난 시간이 가져올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잖아!”

할슈타일 후작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그럴 경우 너는 영원히 시간을 만들기만 해야 된다는 것을 지적해 주고 싶군. 넌 불모의 들판에 영원히 씨를 뿌려야 하는 것이다.”

“대가가 영생이야!”

“……난 지금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

할슈타일 후작은 발레드에게서 몸을 돌려 크레바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게 신이 되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거부하고 있군. 거기서 계속 네 고민을 끌어안고 있어라. 난 가서 신스라이프를 지금의 시간과 분 리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의 원래의 시간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네겐 영생은커녕 1분의 생명도 남지 않겠지. 이 땅 위에서 네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넌 땅에 쓰러지기도 전에 이미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선행이라고 생각하겠다.”

발레드는 입을 딱 벌린 채 후작을 바라보았지만 후작은 아일페사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길을 부탁하오, 골드 드래곤 아일페사스.”

“후작아, 제발! 펫시라고 불러줘도 되잖아요?”

토라진 소리로 항의를 하면서도, 아일페사스는 곧장 몸을 돌렸다. 항의하고 싶은 마음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항의를 받아줄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 었다. 그때 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잠시만.”

미는 발레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미는 당신에게 제안하겠어요. 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이 있나요?”

“무슨 말이오?”

“당신은 턴빌에서부터 신스라이프를 따라 나왔지요. 그 전까지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었을 거예요. 그러니 그 시점부터 지금까지를 삭 제한 다음 다시 시작해 볼 생각은 없나요. 그때 턴빌의 시청에서, 당신은 신스라이프를 따라 나오지 않은 것으로 하고 말이에요.”

발레드와 할슈타일 후작은 일란성 쌍생아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는 놀라운 표정의 일치를 보여주었다. 경악에 빠진 두 사람 중 발레드가 먼저 입을 연 것은 그가 질문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요. 왜냐하면 당신은 그 시점부터 당신이 만들어낸 시간들을 모두 신스라이프에게 위탁했으니까요. 따라서 그 시간은 당신에게는 없는 것이 나 마찬가지죠. 당신은 그 시간을 살지 않았어요. 그것은 모두 신스라이프에게 갔지요. 그러니 당신은 그 시간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도 없어요. 어쩌 시겠어요?”

발레드는 혼란스러워했고 말을 극심하게 더듬었다.

“당신, 당신들이…………, 정, 정말로 신스라이프를 죽인다, 다면 나, 나는……”

“그렇게 하세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거예요.”

발레드 신스라이프는 생각했다. 반쯤 미쳐버린 늙은 아내와 그를 멀리하는 정부에게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살다가 몇 년쯤 후에 고통 속 에 죽어가야 하는가.

문득 발레드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그가 없다면 늙은 아내는 슬퍼할 것이다.

“하겠소. 어떻게 하면 되오?”

미는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발레드는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의 모습은 넓은 설원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 심지어 눈밭 위에 발자국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생긋 웃고 고개를 돌린 미는 할슈타일 후작의 복잡 무쌍한 표정을 마주하게 되었다. 후작은 신음하듯 말했다.

“나도…………, 그것이 가능한가, 무녀? 아니, 그만두지. 불가능하겠군.”

그리고 후작은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을 향해 그러지 않았던 것처럼, 미는 그의 등 뒤를 향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후작의 등을 보면서 미는 문득 그녀를 강간하려 들던 후작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미는 입을 열었다.

“당신을 존경하게 된 것이 퍽 우스워요.”

후작은 몸을 돌리지 않았지만 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한결같군요. 분노의 대상을 명확하게 정할 줄 알고 모든 힘으로 분노하고 그 분노를 해결하기 위 해선 모든 것을 이용해 버리는,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이용해 버리는 모습. 당신에겐 분노가 제일 순위고, 자신의 보전은 순위가 좀 낮군요. 어이없 고, 경멸스럽기도 하지만, 존경스럽기도 하네요.”

“그건 내 취미 생활이야.”

“그리고 그것뿐이죠.”

“누구는 안 그런가. 아일페사스! 준비는 언제 시작되오?”

갑자기 사라진 발레드에 대해 어떤 종류든 간에 설명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지금껏 입을 다물고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일페사스는 당연히 분노했다.

“이것 봐! 설명을 해요! 제가 저기 있던 목소리 근사한 아저씨는 도대체 어디간 거냐고 질문하기 전에 먼저 제게 그 목소리 근사한 아저씨가 어디로 간 건지 설명해 주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일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

할슈타일 후작은 이 기나긴 문장에서 그가 알고 있는 모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마법사와 사귄 적이 있소?”

“으어? 너, 어, 어떻게? 무슨 마법이에요?”

·관둡시다. 그는 지금쯤은 턴빌의 어느 주점에 친구들과 모여앉아 그날의 희한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듯하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자신이 만들어낸 시간을 자신이 가지기로 했기 때문이오.”

아일페사스는 이 말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생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일페사스는 단념 하고, 골드 드래곤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했다.


창 밖으론 흰 눈이 포근하게 내리고 있었다. 난로 위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는 보글거리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오고 있었고 벽난로에 장작을 집어 넣는 엑셀핸드의 모습도 안온하게 보였다. 엑셀핸드는 다시 장작 하나를 던져 넣은 다음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프라임 미팅이오?”

제레인트는 팔짱을 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머리와 어깨는 약간 높이하고 두 눈은 감고 있었기에 누가 본다면 그냥 생각에 잠긴 것으로 판단하기 좋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하플링과 갈림길의 신 테페리의 총본산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랬기에 아프나이델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에델린을 돌아보고 에델린 역시 입을 벌린 채 놀라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제레인트는 실눈을 떠서 방 안의 면면을 죽 돌아보고는 히죽 웃으며 다시 눈을 감았다.

“하하. 이건 대륙을 공포에 몰아넣을 소식인 걸요. 테페리의 프리스트가 모두 한자리에 모인다면 나라도 그 주위 5펜큐빗 이내에는 접근하고 싶지 않을 텐데요.”

“적극적으로 찬성이야.” 엑셀핸드는 수염을 쓸어내리며 근엄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미치광이들의 모임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두각을 드러낼 녀석을 꼽아보라면, 난 주저 없이 제레인트를 들겠어.”

제레인트와 이루릴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엑셀핸드를 즐겁게 했다. 제레인트는 저 먼 곳으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고 있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건 찬성할 수 없어요, 나만 얌전히 있으면 된다니…………… 대륙의 어느 도시의 어떤 길이든 막고 물어보라고요. 테페리의 프리스트들이 한 자리에 모 인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아프나이델은 잠시 식은땀을 흘렸고, 이루릴은 참 복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주류 반입 금지라니. 그걸 저한테 그렇게 강조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테페리의 이름을 걸고! 나 아니라도 술병 들고 찾아갈 도반들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맹세하겠습니다. 나는 악기를 준비해 갈 생각…………, 으윽! 고함지르지 마세요. 글쎄 아무리 술판 같은 것이 벌어지는 것을 용납하 지 않겠다고 그렇게 강변하신다고 해도…………. 아아, 그런데 이 이야기는 자꾸만 가이너 카쉬냅의 다섯 번째 바퀴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군요. · 제 가 언제 말을 돌렸다는 겁니까? 어쨌든, 우리 종단으로서는 이게 두 번째로군요. 그렇죠? 아, 예. 음. 그럼 프라임 미팅의 목적은 뭐죠?”

그러고 나서 제레인트는 방 안에 있던 이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아, 예…………. 음, 예…………. 오, 예…………. 아니? 예…………. 그런? 예…………… 하! 예…………. 어, 예……………… 휴, 예……………”

잠시 후, 엑셀핸드는 어떤 의심이 부풀어오르는 것을 느꼈고 그 의심 속에서 제레인트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해 냈다. 그래서 엑셀핸드는 노호성을 지르며 도끼를 들어올렸다.

“이놈!”

쿠당탕! 제레인트는 엑셀핸드가 도끼를 들어올리자마자 침대 옆으로 몸을 날렸고, 그래서 잠시 침대 저편으로부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턱이 빠진 채 바라보고 있는 일행들의 눈에 정수리를 문지르면서도 히죽히죽 웃고 있는 제레인트의 얼굴이 침대 저편으로부터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엑 셀핸드는 그 얼굴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언제 끝난 거냐!”

“헤헤. 아마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일 겁니다.”

그란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는 이루릴을 돌아보았다. 그의 예상대로 이루릴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란은 다시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제레인트는 대화가 이미 끝났으면서도 우리들을 약올리기 위해 계속 대화하는 척한 거요. 그렇잖다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몸을 날렸겠소.”

“아, 예……”

이루릴의 특별한 의미 없는 대답에 돌맨은 배를 붙잡고 웃어댔다. 그란은 그런 돌맨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지만 네리아는 입술을 비죽거리며 말했 다.

“자, 제레인트,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말해 봐요. 대답에 따라 들을 준비를 하거나 고문할 준비를 해야 하니까.”

제레인트는 반색하며 말했다.

“말할 수 있는 겁니다만, 어, 고문 종류는 뭡니까?”

네리아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레인트라면 고문에도 호기심을 가질 것이라는 점을 왜 깨닫지 못했지?

“제레인트……!”

“아아, 알겠습니다. 사실 별것 없습니다. 합창단 조직이라고나 할까요.”

“합창단이오?”

“테페리가 대답이 없으시답니다.”

제레인트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했다. 하지만 에델린은 가슴이 철렁하는 표정이 되어 말했다.

“대, 대, 대답이 어, 없어, 없다고요?”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예?”

“바이서스 임펠에 있을 때 기억나십니까? 엑셀핸드께서 하이 프리스트를 만나고 싶다고 하시자 도스펠 씨는 하이 프리스트께서 몹시 중요한 종단의 일을 수행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기억나십니까?”

“아, 예…………. 기억납니다. 그러고 보니 저 역시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하이 프리스트를 뵙지 못했습니다.”

“그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에델브로이를 불러내기 위한 것이었나 봅니다. 하이 프리스트께서는 작금에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대해 여쭤보고자 주 위를 모두 물리치고 밀실에서 몇 날 며칠을 에델브로이를 불러내고 계셨나 봅니다. 하지만 독대하는 데는 실패하신 모양입니다.”

“예?”

제레인트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였다. 오른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제레인트는 불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어느 신께서 최초였는지야 모르겠습니다. 신들께서 대화에 응하시지 않은 거죠. 그런 대화가 자주 있는 일이 아닌 만큼 더더욱 어느 신부터 그랬을 것이라는 점은 알 수 없죠. 어쨌든 에델브로이께서는 비교적 빠른 축이었던 것 같습니다. 폭풍은 강력한 만큼 의외로 약하기 때문에 가장 먼저 고요 해진 걸까요.”

에델린의 얼굴은 트롤의 얼굴이 허락하는 한도를 조금 넘어서면서 파랗게 질렸다. 제레인트는 머리를 떨군 채 계속 말했다.

“저희 쪽에서도 그 사실을 눈치 채고는 꽤나 여러 번 시도했나 봅니다. 하지만 테페리께서는 방문객 사절의 현판을 내거신 것 같다는 결론만 얻어냈 죠. 우리야 한적한 이 북쪽에 있어 모르지만 지금 저 남쪽에서는 난리도 아닌 모양입니다.”

“그런……, 황당한 일이……”

엑셀핸드는 신음하듯 말했다. 운차이는 빠르게 말했다.

“시간 때문이군?”

“그렇겠지요. 시간은 유피넬과 헬카네스의 존재의 원인이니 만큼. 결국 이 사건에는 신들도 손을 댈 수 없게 된 모양입니다. 아까 대화중에는 말하 지 않았지만 저는 알 수 있군요. 우리를 도와줄 신은 이제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림 오세니아를 마지막으로.”

이루릴의 말에 제레인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이루릴은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행은 모두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 밖을 바라보았고, 그 녀가 레드 서펀트 호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운차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루릴은 조용히 말했다.

“최후의 헬카네스, 그분일 수밖에…………. 당연하죠. 그리고 그분도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하고 중간에 돌아오셨군요. 이제야 이해되는군요. 왜 아일페 사스인지……”

제레인트가 그 말을 받았다.

“드래곤 로드이기 때문이군요.”

아프나이델은 고개를 돌려 제레인트를 바라보았다. 제레인트는 차분한 태도로 설명했다.

“아일페사스는 드래곤 로드의 후계자이며, 드래곤 로드께서 대미궁에 칩거하고 계시는 이상 그녀가 실질적인 드래곤 로드의 자격을 가집니다. 드래 곤, 신을 갖지 않은 자들의 수장인 거죠. 이 사건의 결말이 무엇이든 간에 거기에 입회하거나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인간과 드래곤뿐이겠군요. 신과 다 른 모든 종족은 제외됩니다. 시간의 장인인 인간과 그 시간으로부터 비롯되는 신들과 관련이 없는 드래곤만이 이 사건의 결말을 지켜보게 될 겁니다. 드래곤의 대표는 아일페사스. 그럼 인간의 대표는…..”

“할슈타일 후작?”

운차이의 질문에 제레인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차이는 다리를 꼬며 팔짱을 꼈다.

“그럼 미와 신스라이프, 파의 역할은 뭔가.”

“과거, 미래, 교차점.”

“젠장……, 신학이 동원되어야 설명할 수 있는 거라면 설명을 듣는 영광은 포기하지.”

제레인트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운차이의 투덜거림에 대해 미소를 보냈다.

“신학? 글쎄요. 신이 모두 사라질지도 모르는데 신학을 말한다는 것은 우습군요. 멸종한 것들에 대한 학문은 고고학 아닙니까.”

운차이는 자신도 모르게 팔짱을 풀었다. 제레인트의 미소 뒤에 숨어 있는 무섭도록 처연한 감정을 바라본 운차이는 침을 삼켰다.


“뭘 하고 있나요, 파하스?”

“대개 사용되지 않는 질문이지만, 지금 이 광대에게는 ‘무엇을 하지 않느냐?”고 물어주면 좋겠군요. 마이 페어 레이디.”

“무엇을 하지 않고 있나요?”

“모든 것을.”

“엑. 그럼 그냥 아까 질문에 대해 ‘아무것도’라고 말했어도 되잖아요.”

“그 질문을 받은 순간 이 광대의 입술은 ‘아무것도’라는 말보다는 ‘모든 것을’이라는 말을 발음하고 싶어졌기 때문이지요. 어휘의 노예인 시인의 괴 벽 정도로 이해해 주셨으면 하외다.”

“흐음. 내가 사실을 말해 볼까요.”

네리아는 가슴 위로 두 팔을 단단히 팔짱 끼고는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은 내 질문을 받는 순간 당신이 뭔가 하고 있긴 했는데 정확하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래서 생각해 보기 위해 시간을 끌고 싶었고, 그래서 시간을 끌면서 생각한 끝에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 거죠. 자기변호의 기회를 드릴 시간인 것 같군요?”

파하스는 껄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합니다.”

“그럼 내가 가르쳐드리죠. 당신은 허밍하고 있었어요.”

“허밍? 제가요?”

“예. 모르는 노래라서 정확하게 되풀이할 수는 없지만, 무슨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어요.”

“음. 그랬군요. 그래서 뭔가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뭘 하고 있었는지 떠올리지 못한 것이었군요. 그런데 이 외진 곳까지 거동하신 것은 이 외로운 광대를 달래주고자 하는 이유에서일 거라고 제 마음대로 추측해 버려도 될까요?”

“그러세요.”

네리아는 아무렇게나 대답하며 파하스가 앉아 있던 바위에 앉았다. 그러곤 파하스가 뭐라고 말할 틈도 없이 말했다.

“와! 재주 좋네요! 이 바위에 앉으니까 바다가 보이는군요. 주위가 온통 숲인데도. 어떻게 찾아낸 거예요?”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수평선에 감탄하고 있는 네리아의 옆얼굴을 향해, 파하스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뭘 걱정하고 있습니까?”

네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웃음기가 전혀 없는 얼굴이었다. 파하스가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처럼, 거짓 명랑함을 만들어내던 네리아는 풀죽은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것도 당신이 말해 봐요.”

“영광스럽게도, 저에 대한 걱정이겠지요.”

“음음.”

“동료들을 피해 언덕 위나 숲속으로 숨어 다니는 슬픈 얼굴을 한 소심한 광대에 대한 염려가 당신의 심사를 어지럽게 한 것이겠지요. 그래서 손수 이 미천한 시인을 찾아 나선 것일 테고. 동정심은 그 어느 때라도 변치 않을 아름다움을 가진 마음의 모습이며, 네리아 양의 동정심에 감사드립니다.” “자아아알 알고 있네요. 그렇게 잘 알면서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뭐죠? 식사 때 당신을 찾는 것도 지겹고 차 마실 때 있지도 않은 당신 잔까지도 준비해야 되나 고민하는 것도 지겨워요. 우리는 조만간 떠날 텐데 당신은 아직도 여기서 엉덩이를 붙인 채 아무런 계획이 없는 것처럼 구는 것도 보 기 싫고.”

“곧 떠난다고 하셨습니까?”

“예. 에델린이 그랜드스톰으로 연락했고 칼로부터 귀환 명령이 돌아왔어요. 아, 칼 모르시죠? 바이서스 임펠에 있는 우리 친구예요. 제레인트는 테 페리의 프리스트들의 프라임 미팅에 참석해야 하고…………. 어쨌든 우리들은 돌아가야 해요. 그리고 난 당신을 찾아 나온 거고요.”

파하스는 갑자기 손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저 남자가 보입니까.”

“쳉 말이군요. 왜요?”

“저…………, 아무리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짐작되신다고 하더라도 제가 이렇게 손을 들었으니 한 번쯤 저 방향을 봐주시면 좋겠군요.”

네리아는 혀를 조금 낼름한 다음 고개를 돌려 파하스가 가리키고 있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언덕 위의 돌집은 이제 눈에 익은 모습이었고 그 앞에는 쳉이 뛰고 있는 모습이………….., 응? 뛰고 있어?

네리아는 눈썹 위에 손바닥을 세운 다음 언덕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쳉은 언덕 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고 있었다. 왜지? 자세히 본 네리아는 그가 아달탄과 함께 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둘은 헐벗은 언덕 위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 목적을 알기 어려운 동작 들이었다. 네리아는 저들이 뭔가 위험에 처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저러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다. 하지만 파하스는 핏 웃었다.

“정말 재미나게 놀고 있군요.”

“놀고? 어, 놀고 있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쳉은 이제 거의 짐승 비슷한 꼴이 되어 있으니 저건 두 마리 짐승의 즐거운 놀이라고 해야겠군요. 두 마리의 강아지가 그러듯이 그냥 유쾌하게 뛰어다니고 있는 겁니다.”

네리아는 긴가민가하는 심정으로 다시 언덕 위를 주시했다. 그러고는 파하스의 말이 옳다고 느꼈다. 쳉은 아달탄을 껴안고 땅을 구르고, 펄쩍 뛰어 오르고, 한 순간 아달탄을 추적했다가 곧 아달탄으로부터 도망쳤다. 아달탄은 꼬리를 마구 흔들며 그런 쳉에 호응하고 있었다.

‘정말 놀고 있네?”

네리아는 갑자기 겁을 집어먹었다.

“서, 설마……. 이런! 제레인트를 불러올게요. 에델린도. 아, 아프나이델도! 모두들 끌고 와야겠어요. 어서 일어나서…

“아니, 괜찮습니다. 미친 건 아닙니다.”

“하, 하지만 쳉이 저런 짓을 할 리가……”

“할 리가 없다고요? 왜 없습니까. 그는 지금 즐거울 텐데. 저 아무것도 없는 언덕 위에서도 자신의 즐거움을 표현할 방법이 있으니 그렇게 하는 겁니 다.”

네리아는 당황해서 파하스를 보다가 이번에는 수평선을 보았다. 파하스는 다시 웃었다.

“아니, 미 양이 돌아오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쳉은……, 미 양을 기다리는 것이 즐거운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쳉을 보고 있는 것이 즐겁군요.”


쳉은 달리고 뛰어오르고 넘어져 뒹굴었다. 뒹굴다가 갑자기 일어나는 쳉의 동작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동작이었다. 앉아 있 던 야수가 갑자기 일어나는 것처럼, 쳉은 누워 있다가 다음 순간엔 이미 서 있었다. 땅을 짚거나 허리를 일으키는 동작은 없었다. 그리고 쳉은 함성을 지르며 몸을 회전시켰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원심력에 의해 떠오른 두 팔과 커다란 손은 쳉의 몸 주위에 원을 만들었다. 아달탄은 황홀경에 취해서 컹컹거리며 그런 쳉의 주위를 따라 돌았다. 결 국 눈이 홱 돌아버린 아달탄은 개답지 않게도 뒤로 걷기 시작했다. 그 동안에도 쳉은 계속해서 돌았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쳉은 어느새 춤을 추고 있었다. 생에 한두 번, 지상의 모든 것을 깨끗이 잊고 순수하게 하늘을 경배하게 된 인간의 모습으로 쳉은 두 팔로 하늘을 받 치고 춤을 추었다. 쳉의 춤은 느리고 둔탁했다. 하지만 거친 힘으로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회전의 끝에서 쳉은 땅바닥에 몸을 던졌다. 뒤로 걷고 있던 아달탄은 쓰러진 쳉에게 달려들었고 잠시 쳉과 아달탄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서로의 몸 을 핥아대며 낄낄거렸다. 쳉은 아달탄의 귀를 살짝 깨물며 으르렁거렸고 아달탄의 꼬리는 금방이라도 뽑혀나갈 듯이 빙글빙글 돌았다.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즐거워하고 있을 수 있는 걸까요? 누구를 기다리는 일이 설렘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저건 그 정도의 흥 분이 아니라 미칠 정도로 기분 좋다는 것이잖아요. 더군다나 쳉은 감정 결핍이라고요.”

네리아의 이상스러워하는 표정을 대하며 파하스는 잠시 황홀한 느낌을 받았다. 네리아는 긴 속눈썹을 내리깐 채 작은 턱을 쓸어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완된 얼굴 근육은 네리아의 얼굴 윤곽을 부드럽게 만들었고 생각에 잠긴 두 눈은 깊어 보였다. 파하스는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한숨처럼 들리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타오르는 머릿결의 레이디. 이 미련한 광대의 머릿속으로 모든 선한 신들이 보내온 예지의 빛이 번득였고, 그래서 저는 그가 왜 즐거워하고 있는지 에 대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리아는 다시 파하스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기대감에 부푼 눈으로 파하스를 바라본 것이다. 그래서 파하스는 고개를 돌려 나무옹이를 쏘아보며 말 했다.

“쳉은 감정 결핍이며 그가 좋아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퍽 드뭅니다. 좋은 술, 흥미진진한 이야기, 즐거운 노래, 나들이옷으로 성장하고 거리를 걷는 발랄한 아가씨들…………. 보통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쳉을 즐겁게 만들지는 못할 겁니다. 그의 감정은 전부 미 양에게 보내져 있죠.”

“그건 여러 번 들었어요. 그런데?”

“그래서 저는 저것은 서글픈 노력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감동적인 일이기도 하지만……………. 저것은 한 사나이가 가장 아름다워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즐겁습니다.”

“아, 가설이 하나 떠올랐어요. 당신은 마법사예요.”

“…….저는 룬 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가 안 되니 내겐 룬이나 마찬가지예요. 쉽게 말해 봐요.”

“쉽게 말하죠. 그는 미 양을 돕고 있는 듯합니다.”

“미를?”

“끝까지 그녀와 함께 걷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음은 그녀와 끝까지 함께 걷겠지요. 그래서 쳉은 지금 한없이 즐거워하고 있는 겁니다.” 

당신은 마법사 맞아. 쳇. 네리아는 입술을 비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