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처 워커 4권 – 10장 잊혀진 바람을위한 변주곡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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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함 소리와 함께 할슈타일 후작은 앞으로 달려 나갔다. 미는 뜻 없는 소리를 지르며 그를 제지하려 했지만 이 상황의 어떤 국면에라도 영향을 주기 에는 너무 늦은 행동이었다. 눈보라를 일으키며 달려간 후작은 어느새 신스라이프와의 거리를 모두 지워버린 다음 난폭한 내려베기를 시도하고 있었 다.
휘둘러진 롱 소드는 신스라이프가 서 있던 자리를 지나 얼음바닥에 꽂혔다. 손목에 온 충격을 지우느라 잠시 멈칫하던 할슈타일 후작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발을 보았다. 제길! 뒤로 슬쩍 물러나 후작의 검을 피한 신스라이프는 가볍게 발을 들어 후작의 손목을 내려밟았다. 꽈광!
후작은 속수무책으로 무릎을 꿇었다. 후작의 두 손과 칼자루를 한꺼번에 내리밟아 얼음 바닥에 고정시켜 둔 신스라이프는 후작의 정수리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넌 아니라고?”
후작은 눈과 얼음 속에 푹 들어가 버린 두 손으로부터 시선을 들었다.
“그래.”
신스라이프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말했다.
“영웅으로 죽겠단 말인가? 악당 신스라이프를 처단하는 것이 자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처단하고 장엄하게 죽겠다는 건가?”
“아니.”
“아니라고?”
신스라이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돌아온 후작의 대답은 그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후작은 ‘흡!’ 하는 낮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신스라이프의 발을 붙잡아 위로 집어던진 것이다.
맙소사! 레이저는 자신이 본 광경에 놀라 혀를 깨물 뻔했다. 할슈타일 후작이 밟혀 있던 두 손을 만세라도 하듯이 위로 쳐올리자 신스라이프는 쏘아 진 화살처럼 위로 튕겨져 올라갔다. 재빨리 검을 집어든 후작은 하늘을 날고 있는 신스라이프의 몸을 겨냥하여 달리며 외쳤다.
“장엄함 따위 개나 줘버려! 죽음을 제외시킨 반쪽 삶을 치장하는 말 같은 건 내겐 필요하지 않아! 나는 내 온전한 삶을 원할 뿐이다!”
무한한 명암 사이를 빙글빙글 돌며 날아가던 신스라이프는 간신히 몸을 제어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제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었고 후작은 저 아래 에서 그가 떨어질 위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신스라이프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날개가 없는 이상, 신스라이프는 무력한 모습으로 후작의 검에 몸을 던질 뿐이었다. 신스라이프는 다급하게 외쳤다.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망을 파괴하겠다는 거냐!”
“그놈들이 내 소망을 파괴하려 든다면, 난 그놈들 전부를 파괴하겠어!”
설원을 치달리는 후작의 뒷모습을 향해, 미는 안타깝게 외쳤다.
“안 돼요, 후작님! 파를…………!”
“받아라!”
마지막 순간, 할슈타일 후작은 몸을 날렸다.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신스라이프의 목이 그의 목표였고 그의 검은 주위를 떠도는 빛을 무수히 되튀기 며 공간을 잘라들어 갔다. 신스라이프의 눈이 극도로 커졌다.
시축이 진동했다.
회전하고 있던 시축이 다음 순간 수백 배로 넓어졌다. 시축을 형성하며 그 자체로 시축이던 빛들이 무섭도록 회전하며 그 중심부로부터 튀어나왔다. 그 빛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그중 가장 강력하고 가장 빠른 빛들은 할슈타일 후작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시야 전체를 신스라이프로 채우고 있던 할슈타일 후작과 미는 그것을 보지 못했지만, 아일페사스와 레이저는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마법의 이름 아래 사부와 제자인 그들은 동시에 외쳤다.
“조심해!”
검끝이 신스라이프의 목을 꿰뚫기 직전,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과 신스라이프를 감싸는 빛무리를 느꼈다. 그리고 손아귀로부터 전해져 온 감각은 그 를 절망에 빠뜨렸다.
이럴 수는 없어. 할슈타일 후작은 소리 없이 절규했다. 검 끝은 분명히 신스라이프의 목젖을 향하고 있었고 겨냥에는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하지 만 빛들이 그들을 감싸는 순간 그것은 ‘빗나갔다. 그리고 신스라이프의 몸은 검 아래로 떨어져 뒹굴었다.
바닥에 떨어진 신스라이프 역시 낙하의 충격보다 할슈타일 후작의 검이 빗나간 것에 더 경악하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신스라이프는 그의 몸을 뛰어넘은 후작을 바라보았다. 후작은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서서는 다시 검을 돌려 신스라이프를 겨냥했다. 의아한 눈으로 후작의 검을 보던 신 스라이프는 시선을 들어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그 얼굴을 지나 더욱 올라갔다. 신스라이프는 후작의 등 뒤에서 꿈틀거리 고 있는 시축을 보았다.
조금 전, 그 빛은?
신스라이프를 노려보던 후작은 그의 등 너머를 향하고 있는 신스라이프의 시선을 느끼고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 역시 의혹이 가득 담긴 눈으로 시축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저 빛이 우리를 감쌌다. 그리고 검은 빗나갔다…………..
자각은 두 사람에게 동시에 찾아들었다.
“크하하하하!”
신스라이프는 온몸으로 웃었다. 그리고 할슈타일 후작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진 채 웃고 있는 신스라이프를 향했다.
“벌써 여러 번 말했잖아?”
신스라이프는 후작을 향해 두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그들이 나를 만들었어. 그들이 나를 원해. 그렇기에 그들이 나를 지킨다. 알겠나. 그들이 내게 시간을 보내오고 있단 말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호흡을 가누며 생각했다. 그들…………, 죽기를 원하지 않는, 죽음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 그렇군. 저 시축 은 지상의 모든 인간들이 만들어 보내는 시간들의 축이지. 할슈타일 후작은 시축을 바라보았다.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는 모습으로, 어떤 규칙성 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 모습으로 회전하고 있는 광륜 어쩐지 그의 눈에 나무처럼 보였다. 가지도 잎사귀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그것은 하나 은,
의 상록수이자 유일한 나무였다.
할슈타일 후작은 갑자기 피로감을 느꼈다. 너무 길고 너무 황당한 난센스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배역을 맡았어.
“나도 이미 말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검을 좌우로 몇 번 흔들며 말했다.
“그들이 나를 거부하겠다면, 나는 모든 인간들을 상대로라도 싸울 것이라고.”
“아아. 자네는 모든 인간들의 의지를 꺾으려 들 필요는 없어. 나의 의지만을 상대하면 돼. 내 의지가 곧 모든 인간들의 의지거든.”
“그렇다면 이 검을 받아라!”
할슈타일 후작은 노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하지만 신스라이프는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히죽 웃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시축이 다시 거센 회전을 시작했다. 뿜어져나온 빛의 파도는 할슈타일 후작과 신스라이프를 감쌌다. 조금 전과 다를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고.
할슈타일 후작은 생애 동안 수천, 수만 번도 넘게 검을 휘둘러왔다. 하지만 지금의 공격처럼 휘두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후작의 공격은 엄밀한 의 미에서 공격이 아니었다. 공격은 두 사람의 상호 작용이다. 공격자와 방어자가 있는. 하지만 할슈타일 후작의 공격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었고 공 격을 받을 대상 같은 것은 고려되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움직임, 단일한 의미였다.
신스라이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런!”
마지막 순간 신스라이프는 옆으로 쓰러지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몸을 뒤틀었다. 그래서 호되게 땅에 부딪힌 대신 간신히 자신의 목을 구해 낼 수 있 었다. 할슈타일 후작의 칼끝은 신스라이프의 옷깃만을 잘라냈다. 할슈타일 후작은 다시 검을 회수하며 무거운 눈길로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고 신스 라이프는 땅을 굴러 저편에서 일어나며 믿을 수 없는 눈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노려보았다.
“이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할슈타일 후작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던 아일페사스는 알 수 있었다. 키스할 때 누가 누구의 입술에 먼저 닿았는가 하는 순서가 없는 것처럼?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행동하며 동시에 결과를 가지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후작의 공격은 ‘완성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일한 동작 속에 단일한 의미가 단단히 응결되어 있는 행동이었고 그것이 목표를 맞췄는가 맞추지 못했 는가, 즉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 하는 것은 애초부터 의미를 따질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완성된 것이기에.
그때 후작이 천천히 발을 들어 신스라이프와의 거리를 밟아 들어갔다.
그 걸음 하나하나는 지상의 어떤 발 달린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동작이었다. 굳이 찾는다면 차라리 춤과 비슷했다. 목적지를 위한 걸음이 아 니라 하나하나가 목적인 걸음걸이. 그것은 이미 끝났기에 중단될 수 없는 연속이었고, 그 자체로 결말인 원인들이었기에 거칠 것이 없는 걸음이었다.
신스라이프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후작이 전혀 속도를 높이지 않았음에도 신스라이프와 후작의 거리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신스라이프는 괴성을 지르며 주먹을 들어올렸다.
“바다 속으로 꺼져라!”
신스라이프는 몸을 솟구쳤다. 그의 작은 주먹이 얼음 바닥을 후려치는 순간 아일페사스의 몸을 그 위에 얹고도 꿈쩍하지 않았던 얼음이 날카로운 비 명을 토하며 갈라졌다.
콰…드드드득!
얼음이 길게 갈라지며 바닷물이 위로 치솟았다. 검은 바닷물은 현란한 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할슈타일 후작은 가볍게 몸을 띄웠지만 신스라이프는 뒤로 물러나며 계속해서 얼음 바닥을 내리쳤다. 주먹이 내리꽂힐 때마다 산사태에 준하는 굉음이 울려퍼지는 모습은 아일페사스를 아찔하게 만들었 다.
신스라이프는 바닥을 내리치고 뒤로 뛰고 다시 바닥을 내리치는 행동을 반복했다. 갈라진 얼음들은 스스로의 무게에 의해 서로 부딪히며 격렬한 충 돌을 일으켰다. 비산하는 얼음 조각들이 눈이 멀 정도의 빛을 반사하는 가운데, 신스라이프는 유빙과 지독하게 차가운 바닷물이 부딪히는 호수를 만 들어버렸다.
마지막 타격이 끝나자 신스라이프는 피가 흐르는 주먹을 감싸 안고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거렸다. 하지만 그 눈은 경멸을 담은 채 할슈타일 후작을 보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신스라이프를 보며 으르렁거리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아일페사스! 심판하시오!”
그러나 아일페사스의 거대한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인간이 그를 인정했다. 할슈타일.”
“아일페사스!”
“네가 공격했을 때…………. 너도 알지 않느냐? 그것은 그의 힘이 아니라 그를 원하는 인간들의 힘이었다. 그 힘은 네 검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너와 마 찬가지로, 나 역시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잠시 눈을 희번덕거리며 아일페사스를 올려다보던 할슈타일 후작은 갑자기 몸을 돌렸다. 후작은 괴성을 지르며 저편에 앉아 있는 신스라이프를 향 해 롱 소드를 집어던졌다. 하지만 롱 소드는 충돌하며 치솟아 오르는 얼음덩이와 물보라에 휘말려 바다 아래로 사라졌다. 신스라이프는 피맺힌 오른 손을 왼손으로 감싸며 힘겹게 일어났다.
“그, 그래. 후, 후후후. 드래곤이여. 겨, 결정하라. 나는 누구인가.”
아일페사스는 무력한 표정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는…………, 인간의 ……….”
“적자가 아닙니다.”
아일페사스와 할슈타일 후작, 그리고 신스라이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쓰러진 레이저가 물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의 몸을 붙잡고 힘껏 끌어당기고 있는 미의 모습이 있었다. 미는 끙끙거리다가 할슈타일 후작을 보며 말했다.
“저, 후작님. 미 좀 도와주세요.”
할슈타일 후작은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왜 놀랐는지 알 수 없었다. 후작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레이저의 몸을 들어올렸다. 미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건너편에 있던 신스라이프가 외쳤다.
“무녀!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눈과 얼음에 노출된 손을 호호 불면서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미는 곧 얼음이 갈라진 가장자리에 서게 되었다. 미는 얼음덩이와 바닷물이 춤추는 광경을 바라보며 조금 머뭇거렸다. 레이저의 몸을 안아든 할슈타일 후작과 아일페사스는 그런 미의 모습에서 왠지 모를 안타까움과 기대감을 동시에 느꼈다.
미는 자신에게 말하듯이 낮게 속삭였다.
“왠지….., 될 것 같아. 응. 될 거야.”
미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내리누르고는, 그 자세 그대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컹컹거리며 달려드는 아달탄을 힘겹게 밀어낸 쳉의 손이 셔츠 속으로 들어갔다. 쳉은 셔츠 속에서 목에 걸어두었던 작은 주머니를 꺼냈다. 쳉은 땅 바닥에 누운 채 그 주머니를 열었다. 언덕 위를 휘몰아치는 바람이 그 주머니의 내용물을 휩쓸어 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리고 쳉은 오른손에 휘감긴 미의 머리카락을 들어올렸다. 언뜻 보기에 무표정한 쳉의 얼굴엔 형언할 수 없이 많은 감정이 담긴 두 눈이 고요히 빛 나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시야 한구석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지각했다. 그는 고개를 들었고 시축을 휘감아 도는 빛살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 작하는 모습을 보았다. 저건 뭐지? 신스라이프가 또 무슨 장난을 치는 건가? 그러나 이번에는 신스라이프도 당황한 모습으로 시축을 바라보고 있었 다.
시축을 휘감아 도는 빛 중 하나의 빛이 맹렬히 움직였다. 갑작스럽게, 빛은 쏘아지듯 튕겨나와 미를 향해 날아왔다. 할슈타일 후작은 당황하여 외쳤 다.
“조심해, 무녀…..! 어엇?”
미는 물을 밟고 섰다.
그녀의 왼손은 마치 댄스 신청을 받는 레이디의 그것처럼 앞으로 살짝 뻗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시축으로부터 튀어나온 빛 위에 얹혀 있었다. 청년의 손을 붙잡고 무도회장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처녀처럼 미는 빛살에 왼손을 맡긴 채 물 위를 걸어갔다.
광포하게 포효하던 바닷물은 미의 걸음걸이에 따라 차츰 고요해졌다. 미는 거울처럼 고요한 수면 위를 빛의 인도를 받아 걸어갔다.
“누군가가……”
할슈타일 후작은 귓가에 들려오는 아일페사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주인이 거의 전율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할슈 타일 후작은 고개를 들어 아일페사스를 보았다.
“누군가가………….., 그의 시간을 신스라이프가 아닌 미에게 주고 있어…………. 그녀에게 보내고 있어……………”
미는 창백한 월광과 현란한 암흑 속을 걸어갔다. 그녀의 발이 닿을 때마다 건조한 수면 위에 일어나는 파문은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방식으로 빛을 반사했다. 허공으로 떠오른 빛들은 미의 볼과 팔, 그 몸에 부딪히며 미의 몸 주위에 아스라한 빛의 안개 같은 것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안개 속에 서도 시축으로부터 뻗어나와 미를 인도하고 있는 광선은 또렷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당혹에서 깨어난 것은 신스라이프였다. 신스라이프의 얼굴, 파의 얼굴, 그 작고 아름다운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거떻게 죽어 있 는 것처럼 보였다. 부들부들 떨리고 있던 신스라이프의 두 팔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 팔의 움직임은 미의 가벼운 걸음걸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딱딱하고 거칠었지만 할슈타일 후작은 섬뜩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자매였던가. 아냐.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저것은…………….
“가라, 내 이름이여!”
격노한 신스라이프의 외침에 호응하여 시축이 크게 울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천둥이 울렸다고 생각했지만 곧 자신이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것을 깨달았다. 아무 소리도 없이, 단지 거대한 느낌과 함께 시축은 포효했다. 그리고 시축은 조금 전처럼 폭발했다. 허공을 소용돌이치는 월광들이 거대 한 해일처럼 일어나 미를 향해 덮쳐왔다.
“왕이여!”
저 머나먼 일스의 바다 위에서 지골레이드가 하늘을 갈라놓을 듯한 포효를 토한 순간, 북해의 얼음 위에 있던 아일페사스의 몸 위로 타오르는 은청 색이 번득였다. 아일페사스는 몸을 앞으로 날렸고 그 빠른 움직임보다 더 빠르게 벽력을 뿜어냈다. 입이 아니라 온몸으로 토해 낸 벽력은 노도 같은 기세로 월광의 해일에 부딪혀 들어갔다. 할슈타일 후작은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었다.
월광과 벼락은 미의 머리 위에서 부딪혔다. 빛은 차라리 암흑이 되었고 형언할 수 없는 충돌음은 정적이 되었다. 칠흑 같은 빛과 귀가 먹어버릴 듯한 정적 속에서 몸부림치던 후작은 간신히 눈을 떠 미를 찾았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그에게도 그대로 죽을 것 같은 위압감이 있었다. 미는?
월광이 다시 시축 주위를 맴돌고 벽력의 잔재들이 암흑의 공간 위를 미끄럼질치는 가운데 미는 조금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증오 어린 눈으로 미를 보던 신스라이프는 아일페사스를 향해 외쳤다.
“드래곤! 왜 끼어드는가! 이곳엔 네게 할당된 권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너 따위가 감히 간섭할 수 없는 시간과 인간의 일이다!” 아일페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할슈타일 후작은 엉뚱한 것을 느꼈다. 후작은 그의 품에 안겨 있던 레이저를 내려다보았고, 그의 눈꺼풀이 파 르르 떨리는 열리는 것을 보았다.
“자, 이젠 108년 만에 시인이 부활할 차례인가?”
“?”
파하스는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것으로 네리아의 질문에 대답했다. ‘10점 만점에 9점 주겠어요.’ 네리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웃었지만 파하스는 자리 를 박차며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기에 안타깝게도 그녀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네리아는 생각했다. ‘만일 봤다면 그 자리에서 멈춰 섰을 텐데.’ 자신의 생각에 히죽 웃던 네리아는 파하스의 뒤를 따라 달려갔다.
파하스는 지면 30센티미터 상공을 나는 바람처럼 가볍게 달려 언덕을 치달아 올라갔다. 땅에 누워 있던 쳉은 고개만 옆으로 돌려 파하스를 보았다. 언덕 정상을 향해 솟아오른 파하스는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선 그 옆을 지나쳤다. 쳉은 그만이 취할 수 있는 완만함으로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파하스는 해안 절벽 가장자리에 서며 왼손을 어깨 쪽으로 가져갔다. 민첩한 손놀림으로 망토 고정쇠를 푼 파하스는 절벽을 치달아오르던 바람이 그 망토를 가져가도록 내버려두었다. 파라락! 펄럭거리며 날아오른 망토는 영원을 향한 손짓처럼 수평선을 향해 날아갔다. 절벽 끄트머리에 꽂꽂이 서 서 불어 닥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던 파하스는 이윽고 화려한 동작으로 어깨에 걸머진 하프를 들어올렸다.
파하스는 하프를 정성스러운 동작으로 안아든 다음 잠시 오른손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진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허공을 나부끼던 망토는 이제 한 마 리 나비처럼 춤추고 있었고 그의 머리카락들은 모든 방향을 향해 흩날렸다. 그리고 파하스는 기다렸다. 하나의 노래를.
순간보다 길고 영원보다 짧은 기다림은 시작되지 않았던 것처럼 끝났다. 파하스의 손가락들은 어느 샌가 하프의 현 위에 얹혀 있었고 그의 입술은 허공에 키스하듯 꿈틀거렸다.
하지만 노래는 불려지지 않았다.
열리는가 싶었던 레이저의 눈은 다시 무겁게 닫혔고 그 몸은 할슈타일 후작의 팔 안에서 축 늘어졌다. 할슈타일 후작은 잠시 자신이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레이저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해 냈다. 할슈타일 후작은 이를 악문 채 수면 위의 미를 바라보았다.
미는 수면 위에 서 있었다. 그녀는 두 발을 붙인 채 꼿꼿이 서 있었지만 단순히 멈춰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나아가지 않는 모습으로 멈춰 서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가슴이 철렁하는 것을 느끼며 그 모습을 자세히 보았다. 그리고 후작은 미를 이끌고 있던 빛이 깜빡거리 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저 빛이……………, 그녀를 이끌고 있지 않은 건가?’
물결치는 월광 속에서도 환히 빛나며 미를 인도하고 있던 빛은 이제 아지랑이처럼 가물거리고 있었다. 빛은 금방이라도 사그라들 것 같았고 미의 손 가락들은 갈피를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그 빛이 가물거리는 것에 반비례하여 시축을 휘감아 도는 빛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시축은 이제 타오르는 나무처럼 소리 없이 포효했다. 그리고 그 아래 서 있던 신스라이프의 얼굴에는 야수와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은……………, 안 돼!”
안 돼? 아직은 안 된다니, 뭐가? 할슈타일 후작은 신스라이프의 수수께끼 같은 말에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신스라이프는 설명을 덧붙이는 대신 고개 를 들어올려 미에게로 향하고 있는 광선을 쳐다보았다.
“이것은 그 감정 결핍의 시간인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군. 다른 사람들의 시간과 하나되어 움직이지 않는 시간. 다른 자들의 욕망과 꿈에 당 혹을 느끼는 자의 시간. 그래. 그가 너를 거기까지 인도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렇기에 그는 나에게까지 올 수 없다.”
미는 소리 없이 흐느끼며 신스라이프를 바라보았다. 그런 미를 비웃으며 신스라이프는 말했다.
“그는 이 시축으로, 그리고 나에게로 올 수 없단 말이다! 퓨처 워커, 넌 어디로도 걸어갈 수 없다!”
“아냐.”
할슈타일 후작은 하마터면 레이저를 떨어뜨릴 뻔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자신의 품에 안겨 있는 레이저를 내려다보고, 그가 두 눈을 똑똑히 뜨고 있 는 데 다시 놀랐다. 레이저는 분명한 목소리로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냐. 하나라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둘, 셋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분명히 하나는 있을 것이다.”
할슈타일 후작은 잘 열리지 않는 입을 힘겹게 열어 말했다.
“있다니, 뭐가 있단 말인가.”
“나를 내려줘요. 괜찮으니까.”
후작은 고개를 가로저으려다가 다시 한번 레이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레이저를 땅에 앉혔다.
레이저는 두 손을 땅에 짚고는 두 다리를 앞으로 마음껏 뻗은 채 미를 바라보았다.
“나는 믿어. 분명히 있을 거야.”
파하스의 손은 애처롭게 허공을 긁고 있었고 그 입은 숨결 이외엔 아무것도 내놓지 않았다. 파하스는 진저리를 치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에게 다 가가던 네리아는 갑작스럽게 자신을 노려보는 파하스의 눈길에 놀라 걸음을 멈췄다. 파하스는 말했다.
“이젠 내 차례입니다. 부탁이니…….”
“예?”
“내 이름을 불러요.”
네리아는 의아한 얼굴로 파하스를 바라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했다. 왜지? 내가 왜 이러지? 그까짓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뭐 어렵다고.
파하스는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발, 네리아. 내 이름을 불러줘요. 부디.”
네리아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 되어 파하스를 보았다. 왜 이럴까. 그저 그의 이름을 불러달라는 것인데…………
네리아는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왜 안아달라고, 하나가 되어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걸까?”
언제부터인가 파하스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간신히 쓰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파하스는 네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입에서 무의미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 어……”
“부탁입니다.”
금방이라도 뒤로 돌아서서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고 싶었지만 네리아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의 자제력이 강한 것은 아니었다. 도망조차 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네리아는 그대로 졸도하거나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거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거나 파하스에게 달려가 안기고 싶다는 생각들을 동시 에 느끼며 그 생각들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매길 수도 없었다.
네리아는 자신의 몸에서 솟아오르는 열기에 헐떡이며 파하스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파하스는 이제 시체보다도 더 생기 없는 얼굴로 비틀거리고 있었다. 네리아는 왈칵 울고 싶은 것을 참으며 파하스의 이름을 불러보려 했다.
“아, 어……”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말이라기보다는 그냥 소리였다. 네리아는 다시 한 걸음 더 물러났고 파하스는 당장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았다.
갑작스럽게, 네리아는 지독하게 뜨거운 자신의 몸 한곳에서 갑작스럽게 찾아드는 시원함을 느꼈다. 네리아는 힘들게 고개를 돌렸고 자신의 오른쪽 어깨 위에 올려진 크고 두툼한 손을 보았다. 고개를 더 돌려 손의 주인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네리아는 그 손에 감겨 있는 머리카락을 본 순간 다 시 고개를 돌려 파하스를 보았다. 그리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파하스, 나의 시인.”
삭풍이 휘몰아치던 황량한 절벽 위에서 불꽃 같은 노래가 터져나왔다.
레이저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걸어가! 퓨처 워커!”
레이저의 외침 소리와 함께 미는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미를 인도하던 광선이 다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월광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섰 고 신스라이프는 격노하여 외쳤다.
“불가능하다!”
가능했다. 미는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걸음걸이 아래에서 월광에 번득이는 수면은 단단한 길로 바뀌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귓전에 시끄럽게 울리 고 있는 소리가 자신의 호흡 소리라는 사실에 놀랐다. 신스라이프는 다시 외쳤다.
“멈춰! 넌 걸을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다! 네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들고, 네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고 있다! 너는 그럴 수 없어!” 미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을 원해요.”
“닥쳐!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하지 마! 내 이름으로, 가라!”
신스라이프는 다시 두 팔을 휘둘렀고 시축은 전율하며 빛을 토해 냈다. 조금 전에 일어났던 빛의 파도가 무색해질 만큼 거대한 빛이 솟아올랐다. 할 슈타일 후작은 지평선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하늘의 상당 부분 역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빛은 시야의 끝에서 끝을 가득 채 운 채 미를 향해 덮쳐왔다. 아일페사스는 날개를 한껏 펼치며 포효했다.
“크롸롸롸롸!”
아일페사스의 몸 전체가 눈 깜빡할 사이에 황금의 불꽃으로 달아올랐다. 온몸을 감싼 그 불꽃은 아일페사스의 몸을 급속히 타고 올라 그 머리로 집 중되었다. 그리고 아일페사스가 입을 크게 벌린 순간, 백열하는 화염이 월광의 파도를 향해 뿜어져 나갔다.
화르르르르! 화염의 궤적을 따라 빙판이 폭발했다. 박살난 얼음들은 부서지거나 녹을 사이도 없이 그대로 수증기로 화했고 사방은 거칠게 피어오르 는 증기들의 폭풍으로 가득 찼다. 수천 가지의 빛이 폭풍을 물들이는 가운데 화염은 그 모든 폭풍을 앞질러 날아가 미를 엄습하는 월광에 부딪혀 들 어갔다. 소리 없는 충격은 할슈타일 후작과 레이저를 뒤로 날려버렸다.
“크우우욱!”
허공을 날아가면서도 할슈타일 후작은 레이저의 몸을 잡으려 애썼다. 저 녀석은 죽었던 녀석이 아냐, 젠장! 하지만 그 스스로가 가랑잎처럼 나부끼 는 상황에서 레이저를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할슈타일 후작은 욕설로 점철된 비명을 토하며 자유 낙하하는 상황에 빠졌다.
신스라이프의 공격과 아일페사스의 공격이 맞부딪히며 야기된 모든 종류의 빛을 아우르는 폭풍 속에서도, 미는 자신의 손에 닿은 광선을 놓치지 않 았다. 할슈타일 후작과 레이저를 날려버릴 정도로 물리적인 힘을 행사하는 빛의 폭풍은 설원과 암흑의 하늘 전체를 찢어 모든 것을 혼돈으로 몰아가 려 들었지만 미는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가는 걸음 그 자체였고 그 이 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걸어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누구인가.
목적도 없었고 출발도 없는 걸음 속에서 미는 이상한 것을 보았다.
갑자기 그녀의 눈앞에서 그녀를 이끌고 있던 빛이 변화했다. 미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시 가늘게 떠서 보았다. 하지만 빛은 분명히 그 형체를 바꿔 가고 있었다. 먼저 손가락들이 보였다. 그리고 따스하고 커다란 손이, 굴강한 팔이, 그리고 미의 눈에 익은 어깨가 나타났다. 미는 키 큰 남자의 얼굴 을 보기 위해 머리를 조금 들어야 했다. 그리고 그 얼굴, 그녀를 향해 조용히 웃고 있는 얼굴을 향해 미는 미소 지었다.
“쳉.”
웃음 짓고 있던 쳉의 입술이 조용히 열렸다. 그리고 쳉은 미가 했던 말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아이를 가지자.
“그래.”
우리를 향해 칭얼거리고, 우리를 배우고,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떠날 아이를 만들어서, 미. 그 아이를 사랑해 주자. 바보처럼 사랑해 주자. 그러기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것처럼, 헌신적으로 사랑해 주자.
“그래.”
내가 보지 못할 아이를.
“그래.”
네가 안아보지 못할 아이를
“그래.”
너무 빨리 자신의 시간을 끝내야 되는 아이를.
“그래, 쳉. 그래.”
빛이 모여들었다.
노도 같은 빛살들의 무리 가운데서 하나 둘 빛들이 미를 향해 서서히 그 궤적을 비틀었다. 모닥불에서 튀어 오르는 불티 같이 작은 빛들이었지만 그 것은 거센 빛의 파도를 조용히 무시하며 미를 향해 흘러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빛이, 그 다음 빛이. 빛은 허공에 온갖 종류의 거대한 곡선을 만들어 내며 미에게로 수렴되었다. 부드럽게 날아온 빛은 미의 주위에서 주저하듯 잠시 맴돌았고 미는 그 빛들을 향해 비어 있는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빛은 나뭇가지를 찾아드는 작은 새처럼 미의 오른손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 빛이, 그 다음 빛이. 빛은 미의 두 손과 그 팔과 온몸에 휘감겨 들었다. 아일페사스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리고, 웃는 거지.”
광풍(風)에 휘날리며 기절했던 할슈타일 후작의 귀에 무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빛은 깔깔거리고 껄껄거리고 미소 짓고 폭소하고 홍소하고 히 죽거리고 해죽거리고 빙글거리고 싱글거리고 웃고 있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힘들게 눈을 떴고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는 빛에 놀랐다.
화려하던 암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위도 빛이고 아래도 빛이고 모든 방향이 빛이었다. 할슈타일 후작은 벌떡 일어났고 자신이 일어났다는 사실에 다시 놀랐다. 몸이 박살나지 않았나? 그때 저쪽이자 이쪽이며 그쪽인 곳에서 레이저가, 빛에 둘러싸인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방식으로 합시다. 난 당신이 살아 있다고 말해 줄 테니, 내가 한 것만큼만 당신도 내게 해줘요.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그걸 못하긴 하 “지만.”
“당신은 살아 있어.”
레이저는 히죽 웃었고, 그 웃음은 강력한 전염성으로 할슈타일 후작을 엄습했다. 그래서 할슈타일 후작은 도리 없이 웃어버렸다.
망막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지독한 빛은 아예 눈알을 안와 안쪽으로 밀어붙일 것만 같았다. 온몸이 그대로 사그라들 것만 같은 빛 속에서, 신스라 이프는 한결같은 걸음으로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미를 보며 온몸이 떨리는 분노를 느꼈다. 그때 그의 속에서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됐군요,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자신의 내면을 향해 고함질렀다.
“파!”
‘인간은 미에게도 시간을 보내고 있군요. 쳉이 그녀를 안내했고, 그리고 인간이 그녀를 이끌고 있어요.’
신스라이프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비웃는 거야? 그들이 나를 포기했다는 건가? 좋아! 이런, 빌어먹을! 몇몇 얼간이들이 그에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아직 나는 존 재하고 있어! 제기랄, 그건 나를 원하는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아니오’
“아니라니, 뭐가 아니라는 거야? 나를 원하는 놈은 없다는 거냐?”
‘아니오. 그들은 당신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뭐야?”
‘미를 보세요. 신스라이프.’
신스라이프는 어깨로 숨을 쉬며 외쳤다.
“오래 보고 있을 수는 없을 거야. 곧 없애버릴 테니까!”
‘미를 보세요. 부정하지 말고. 그녀는 당신에게 오고 있어요. 뒤로 돌아가고 있지 않아요. 당신을 버리지 않아요.’
“그거야 너 때문이겠지! 어리석게도 너와 내가 분리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가 모를까요.’
신스라이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 속에서 무엇인가가 조용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기도를 타고 넘어가는 빛의 질감을 아프게 느꼈다. 신스라이프는 손을 들어올렸다.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 위해서. 파 는 더욱 낮게 속삭였다.
‘인간은 정말 당신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나에게 찾아오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요.’
신스라이프는 목구멍에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속에서부터 시작된 부서짐은 이제 눈물이 되어 샘솟았다. 신스라이 프는 도르네이를 생각했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알아. 그래, 그들은 알아.”
‘네. 신스라이프. 고마워요.’
“……파. 너는…..”
‘같이 가요.’
“난, 난……”
‘가요. 신스라이프. 나와 같이. 그녀에게 걸어가요.’
신스라이프는 앞으로 걸었다.
얼어붙은 대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광선들이 춤추는 하늘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위를 메운 빛 속에 시축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 겨진 타성이 걸음으로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걷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를 향해 걸어갔다. 미는 미소 지었다. 선망은 인고를 수놓 는 장식이었고 희구는 과거를 위한 이름이었다.
미는 걸어갔다.
신스라이프는 걸어갔다.
파하스는 기어코 하프 현을 다 끊어놓았다.
네리아는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머뭇거리는 쳉의 손을 잡고 미친 듯이 춤추고 있었다.
신차이는 수평선을 향해 파이프 연기를 날려보냈다.
에카드나는 자신의 몸을 꿰뚫는 데스나이트의 검을 향해 욕설을 퍼붓고는, 그 검의 소유주를 향해 부러진 칼을 힘겹게 휘두르다가 그대로 땅에 쓰러 졌다.
칼은 술잔을 들어올려 샌슨의 잔과 부딪치며 껄껄거렸다.
함은 눈앞에 펼쳐진 사막을 향해 희열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시오네는 울었다.
이루릴은 모든 정령을 향해 웃음 지었다.
엑셀핸드는 운차이가 자신을 끌어안으려 드는 줄 알고 기겁했으나, 운차이의 목적이 단지 그의 허리에 매달려 있던 담배쌈지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는 격노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운차이는 제레인트의 팔을 조용히 끌어당겨 엑셀핸드의 주먹을 침착하게 막아냈다. 제레인트는 졸도했다.
아프나이델은 아일페사스를 생각했다.
돌맨은 그란의 품에 안겨 숨이 막히도록 울고 웃었다.
궤헤른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북쪽을 바라보았다. 가이버가 그를 불렀지만 궤헤른은 듣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다시는 부르지 않으려 했던, 그리고 부를 일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름이 흘러나왔다.
“후작님.”
미는 멈춰 섰다.
신스라이프는 멈춰 섰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왼손을 내밀던 미는 푸훗 소리를 내며 웃었고, 그런 미를 보며 신스라이프는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왼손을 내밀었 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