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21화 : 종횡무진(2)
종횡무진(2)
‘역시 여자는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니까. 저런 보물을 안에 숨기고 있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설우진의 시선이 모용설의 가슴에서 떠날 줄 몰랐다.
전생의 그는 어릴 때 어머니의 품을 떠난 탓 인지, 유독 여자들의 가슴에 집착을 하는 경향 이 있었다. 그래서 기루를 찾을 때도 특정 기녀 들만 선호했다.
그 독특한 취향은 새로운 삶을 시작한 지금에 도 그대로 이어졌다.
“이, 이 옷 너무 예뻐. 내가 정말 꿈에 그리던 옷이야.”
설우진이 가슴에 푹 빠져 있는 사이, 옷을 다 갈아입은 모용설이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아이 처럼 좋아했다. 그 마음은 환하게 웃고 있는 얼 굴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귀한 옷을 그냥 받아도 될지 모르겠네. 혹시 원하는 거 없니? 이 누나가 다 해 줄게.” ‘확, 그 자식들 쳐 달라고 할까?’
그녀의 달콤한 말에 설우진은 가장 먼저 대원 포목점을 떠올렸다. 그녀가 속해 있는 모용세 가는 중천오가에 들어가는 거대 세력이다. 본 가가 요녕 땅에 자리하고 있어 무한에 미치는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그래도 대원 포 목점 정도는 충분히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설우진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야. 늑대를 쫓아 내려 호랑이를 우리 안으로 들일 순 없지. 조금 힘이 들더라도 이번 일은 내 선에서 해결하는 게 좋아. 뒤통수 맞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니까.’ 설우진은 애써 머릿속의 상념을 털어 냈다. 그리고 웃는 낯으로 그녀에게 원하는 바를 전 했다.
“누나, 저 다른 거 안 바라요. 그냥 누나가 화 무연에서 당당하게 우승했으면 좋겠어요.”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니. 그래, 우리 우진이가 원하는 대로 이 누나 화무연에서 꼭 우승할게.”
모용설이 거침없이 설우진을 껴안았다. 여자치고는 꽤 큰 키인지라 설우진의 얼굴이 그녀의 가슴골에 자연스럽게 파묻혔다.
그 순간, 설우진의 양쪽 입꼬리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어린애답지 않은 음흉한 미소였다.
설가 포목점이 본의 아니게 임시 휴업을 하고 있을 때, 대원 포목점은 다분히 의도된 특수를 누리고 있었다. 설가 포목점에 선주문을 했다.
기일을 넘긴 고객들이 대원 포목점으로 다시 유입이 된 것이다.
덕분에 대원 포목점주 포대월의 얼굴에선 요 며칠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모 점주, 이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은가?”
포대월이 전과 달리 평대를 사용했다.
기분이 좋다는 반증이었다.
“선주문을 넣었던 사람들 중 절반 이상이 돌 아섰으니, 아마 길어 봐야 보름 정도가 되지 않 을까 싶습니다.”
“후훗, 생각보다 질기게 버티는군. 다른 지원 이 필요한 건 없나?”
“몇몇 상단들이 설무백 부부를 만난 뒤로 눈 에 띄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뒤탈이 없게 하려 면 한 번 더 눌러 주는 작업이 필요할 듯합니다.”
“처음엔 무력으로 눌렀으니 이번엔 돈이 좋겠군. 상명아!”
포대월이 몸종을 불렀다.
잠시 후, 곱상하게 생긴 사내아이가 안이 꽉 채워진 전낭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금전 백 냥일세. 흔들리는 상단주들의 마음 을 재량껏 다잡아 놓게. 절대 설가 포목점이 일 어설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서는 안 되네.”
포대월은 깔끔한 뒤처리를 위해 금전 일백 냥 을 과감하게 투자했다.
지금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본단에서 장로 자리가 하나 났는데 그가 유력 한 후보로 지목된 것이다.
‘설무백, 그간의 노력은 가상하다만 내가 원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선 네가 철저히 짓밟혀 줘야 한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라도 건지고 싶 다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이쪽에서 내미는 손을 잡아라.’
툭툭툭. 툭툭툭.
집무실 안, 설무백이 초조한 얼굴로 책상을 반복적으로 두들겼다.
지난 며칠간 그는 여소교와 함께 포목 상인들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간곡하게 사정 을 설명하고 물건을 내어 줄 것을 청했다.
대부분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렸다.
결국 그 노력이 통했는지 두 상단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들을 수 있었다.
끼익.
문이 열렸다.
설무백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실망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들은 아직도 안 왔나요?”
여소교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설무백은 대답할 기운도 없다는 듯 고개만 주억거렸다.
“설마 또 그들이 손을 쓴 걸까요?”
“이 시간까지 오지 않은 걸 보면 부인의 짐작이 맞을 것이오.”
“정말 너무하네요. 그렇게 철석같이 약속을 해 놓고………….”
여소교가 분한 듯 고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다니면서 처음 보는 이들에게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다. 가게를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의 발로였다.
그런데 돌아온 건 또 한 번의 뼈저린 배신이었다.
“이젠 정말 어떡하죠?”
여소교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설무백을 바라봤다.
‘나도 모르겠소. 이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구려.’
“형님,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풍야시전의 번화가 환천로에 왁자지껄한 사 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중심에는 풍야패의 두령인 호걸륜과 그의 충실한 오른팔 막철이 있었다.
“다들 수고 많았다. 오늘은 우리 조직에 길이 남을 경사니 마음껏 마시고 취해라.”
호걸륜이 혜화루를 통째로 빌려 거하게 술과 안주를 풀었다. 간부급에게는 예쁜 기녀들까지 안겨 줬다.
사흘 전.
풍야패는 기습적으로 진호패의 근거지를 공격했다. 막철의 야습 사건이 대대적인 전면전 으로 비화된 것이다.
두 세력의 규모는 누가 낫다 평할 수 없을 정 도로 비슷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싸 움의 구도는 기습의 묘를 살린 풍야패에 유리 하게 조성됐다.
풍야패는 큰 싸움을 앞두고 미끼를 던졌다. 진호패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한 고간의 술책 이었다.
미끼로 던져진 이는 막철과 그의 심복들이었 다. 진실이 밝혀질 것을 우려한 막철이 자진해 서 나선 것이다.
진호패의 영역으로 건너간 막철 일행은 고간 이 시키는 대로 큰 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신 나게 두들겨 맞았다. 죽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그날 밤.
진호패는 막철을 안주 삼아 거나하게 술판을 벌였다.
경쟁 세력의 부두목을 때려잡았으니 절로 사기가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술자리가 결정적인 실책으로 작용했다.
진호패의 식구들이 술기운에 휘청거릴 무렵, 풍야패의 조직원들이 일거에 들이닥친 것이다. 싸움은 일방적으로 전개됐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진호패의 간 부들이 칼을 들고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두목인 진호가 호걸륜의 손에 붙잡히면서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막철아, 한 잔 받아라. 이번 싸움에서 네 활 약이 정말 컸다.”
호걸륜이 자신의 왼편에 앉아 있는 막철에게 술잔을 건넸다. 막철은 얼굴에 시퍼런 멍이 그 득했다.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본래의 얼굴 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막철은 힘겹게 손을 뻗어 술잔을 받았다.
그리고 그 독하다는 천화주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게 다 곱사등이 꼬마 놈과 얼굴 반반한 그 애새끼 때문이야. 놈들만 만나지 않았어도 이 런 몰골이 될 일은 없었을 텐데.’
풍야패 식구들이 기뻐 날뛸 때, 막철은 속으 로 이를 갈았다. 그는 결코 이런 식으로 활약하고 싶지 않았다. 주먹질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잔도 한 잔 받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고간이 빈 술잔을 내밀었다.
얄밉게 웃고 있는 저 면상을 날려 버리고 싶 었지만 호걸륜이 눈앞에 있는 터라 그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