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1권 – 35화 : 공동 전인(2)
공동 전인(2)
‘아니, 저 양반이 왜 안 하던 행동을 하는 거지?’
설우진은 뒤를 흘낏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 렸다. 그가 알던 팽천호는 저런 살가운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감각도를 배울 때, 목마르다고 노래를 불러도 눈 하나 깜짝 않던 게 전생의 그였다.
그 속내를 떠보려 설우진은 창을 거두고 팽천 호 쪽으로 다가갔다.
“땀이 많이 났구나. 우선 이 수건으로 땀부터 닦아라, 냉수는 그 뒤에 마셔도 되니.”
팽천호가 수건을 눈앞에 내밀었다.
설우진은 엉겁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 이마에 진득하게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그 순간, 묘한 떨림이 가슴에 전해졌다.
전생에는 느껴 보지 못했던 생경한 감정이었다.
“땀 다 닦았으면 수건은 내게 주고, 여기 물마셔라.”
수건에 이어 냉수를 내미는 팽천호.
눈꼬리가 파들파들 떨리는 게, 얼마나 이 상 황을 어색해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거 진즉 그랬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사부가 조금만 친절하게 대해 줬어도 그날 눈물이 봇 물처럼 쏟아졌을 텐데.’
설우진은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옛 기억에 가 슴이 울컥했다.
유난히 달빛이 밝았던 밤이었다.
설우진은 사부인 팽천호와 함께 상단 호위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상행은 순조로웠다.
며칠째 이어지는 비 탓에 길이 진창이 되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인지 상행의 가장 큰 위 험 요소인 산적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상행 마지막 날.
사달이 벌어졌다.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산적 보다 더 위험한 마적들과 조우한 것이다.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졌다.
마적들은 기마의 이점을 살려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낭인들부터 쳤다.
마적들의 파상 공세에 낭인들은 피곤죽이 되어 날아갔다. 몇몇 상급 낭인들이 말을 베어 마적들을 바닥으로 떨구기도 했지만 그 숫자는 많지 않았다.
마적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팽천호가 말을 뺏어 타고 무리의 한가운데로 파고든 것이다. 하지만 마적들은 그의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낭인들도 말을 타기는 하지만 그 수준이 자신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 기 때문이다.
한데, 팽천호의 기마술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양손에 칼을 쥔 채 두 다리만으로 말을 몰았 다. 보통 사람은 고삐를 쥐고도 그 속도를 이기 지 못해 낙마하기 일쑨데, 그는 두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방향까지 자유자재로 전환했다.
그가 마적들 사이를 지나칠 때마다 핏빛 안개 가 피어올랐다.
위기의식을 느낀 마적들은 부랴부랴 진형을 갖췄다.
하지만 진형의 힘으로도 그의 질주를 막지 못 했다. 어떻게 안 것인지, 불완전한 진의 약점을 정확히 파고든 것이다.
그 뒤로, 전황은 역전됐다.
수적인 우위를 지니고 있음에도 마적들은 속 절없이 뒤로 밀리기만 했다.
그런데,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던 팽천호가 갑자기 말 머리를 돌렸다. 상단 행렬 후미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온 바로 그 직후였다. 이에 마적 두목은 남은 수하들을 이끌고 그 뒤를 따라갔다.
행렬 후미에서는 설우진이 낯익은 얼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설우진과 함께 고용됐던 낭인들이었다.
“대, 대체 왜?”
설우진은 깊게 베인 옆구리를 부여잡고 힘겹 게 말을 건넸다.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마적들을 이곳 으로 부른 게 다름 아닌 우리야. 솔직히 상단에 서 받는 돈보다 이쪽이 훨씬 짭짤하거든.”
낭인들이 비릿하게 웃으며 칼을 고쳐 잡았다. 설우진은 힘겹게 칼을 들어 그들의 공격에 대 비했다. 하지만 출혈이 심해서 그런지 자꾸만 눈앞이 흔들렸다.
쉬익.
눈앞으로 칼이 떨어졌다.
피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줄 몰랐다.
‘이대로 죽는 건가.’
죽음을 머릿속에 떠올린 순간, 멀리서 날카로운파공성이 일었다.
텅.
간발의 차이로 칼이 튕겨 나갔다.
당황한 낭인들이 일제히 옆을 돌아봤다. 사나 운 먼지구름과 함께 팽천호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설우진과 한차례 눈을 맞춘 뒤 곧장 말에 서 뛰어내려 칼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다섯 개 의 수급이 피 분수를 뿌리며 바닥으로 떨어졌 다.
“시원찮은 놈. 중급에도 못 미치는 놈들에게 칼침을 맞다니. 어디 가서 내 제자라고 입도 뻥 긋하지 마라.”
“그게 아픈 제자한테 할 소립니까.”
설우진은 칼에 베인 옆구리보다 사부의 그 매 정한 말이 더 아프게 느껴졌다. 그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지 팽천호는 목이 날아간 낭인의 옷을 벗겨 설우진의 옆구리 상처를 동여맸다. 투박하지만 실용적인 응급처치였다.
그런데 마지막 매듭을 묶으려는 찰나.
팽천호가 갑자기 설우진을 옆으로 밀쳤다. 그 힘에 밀려 설우진은 삼장 밖으로 굴러갔다. 그 직후, 화살 비가 쏟아졌다.
“당장 여기서 도망쳐!”
팽천호가 화살을 튕겨 내며 다급히 소리쳤다. 하지만 설우진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사부 를 홀로 남겨 두고 떠나기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 새끼야, 뭘 멀뚱히 쳐다보고 있어. 곧 뒤 따라갈 테니 빨리 가.”
마음이 급할 때면 터져 나오는 사부의 욕설. 설우진은 뒤따라온다는 그 말을 믿으며 뒤돌 아 달렸다. 그렇게 얼마쯤 뛰었을까, 주변이 어 둑해졌다. 설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나무 에 등을 기댔다.
“금방 오겠지…?”
설우진은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지며, 자신이 도망쳐 온 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하지만 달이 중천에 뜨도록 사부는 오지 않았 다.
설우진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감추며 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대지에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설우진은 넋 나간 사람처럼 한곳을 바라보며 걸어갔다. 유난히 화살이 많이 박혀 있는 자리 였다.
“사, 사부…….”
보름달 아래, 한 구의 시체가 처참한 몰골로 누워 있었다.
마적들이 분풀이를 했는지 사지가 찢겨 있고 잘려 나간 머리에는 사부의 칼이 꽂혀 있었다. 그런데, 사부의 주검을 눈앞에 두고서도 어찌 된 일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생각 했던 것 이상으로 사부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컸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끝내 울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