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7화 : 전초전 (1)
전초전 (1)
“신입 관도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 는 황룡의 총관주 사마무기라 합니 다. 본관은 문무겸전의 인재를 길 러 내기 위한 목적으로 오십 년 전 에 설립되어 지금껏 수천 명에 이르 는 졸업생들을 배출해 왔습니다.”
단상에서 인상 좋아 보이는 백발노 인이 환영사를 읊었다.
한참이나 어린 청년들을 상대함에도 그의 말투는 정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악즉참도 사마무기.
그는 한때 절정의 도객으로 강호에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다. 순박해 보 이는 외모와 달리 그가 휘두르는 도 는 사파의 그것과 비견될 정도로 사 납고 거칠었다. 물론 그가 사나운 도를 선보이는 상대는 악인으로 한 정돼 있었다.
사마무기는 오 년 전 강호를 공식 적으로 은퇴하고 황룡학관의 총관 주로 취임했다. 비슷한 시기에 쌍룡 맹에서 수석호법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는 일언지하에 이를 거절하고 후 진 양성을 택했다.
숭고한 그 뜻에 많은 강호인들이 존경의 눈길을 보냈다. 지금 연무장에 모인 신입 관도들처럼.
하지만 모두가 그러한 눈빛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설우진을 비롯한 몇몇 신입 관도들 은 그의 환영사가 길어지자 노골적 으로 싫증을 내비쳤다.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뭐 저렇게 장황하게 늘어놓는 거야. 하여간 감 투 좀 써 봤다고 하는 인간들은 꼭 티를 낸다니까.’
설우진은 얼굴에 한껏 불만을 표출 하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던 와중에 자신처럼 환영사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명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문제의 동기는 산발한 머리칼에 지 저분한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다. 겉모습만 봐서는 영락없는 개방의 새 끼 거지였다.
그런데 설우진은 그의 외양보다는 오히려 그 눈빛에 주목했다.
‘저런 독기 어린 눈빛은 온실에서 자란 화초들에게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데… 대체 어디에서 온 거
지?’
설우진은 계속해서 눈을 마주쳤다. 그쪽도 흥미가 일었는지 설우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둘이 소리 없는 싸움을 치르고 있 을 때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사마무 기의 환영사가 마무리를 향해 치달 았다.
“신입 관도 여러분,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정진하세요. 그 리고 언제든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날 찾아와요. 제 방문은 여러분을 위해 항상 열려 있답니다.”
짝짝짝.
사마무기의 환영사가 끝나고 우레 와 같은 박수가 쏟아졌다. 그 와중 에도 설우진과 이름 모를 동기의 눈 싸움은 계속 이어졌다.
입관식이 끝나고.
명월루에 신입 관도들이 꽉 들어찼 다. 이를 주도한 것은 천 자 조의 백무영이었다. 그는 천하 상단주의 차남으로 황룡삼천의 하나인 중천회 의 회주이기도 했다.
“모두 황룡의 식구가 된 걸 진심으 로 축하한다. 오늘은 이 선배들이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는 후배들 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니 돈 걱정은 제쳐 두고 마음껏 마시고 즐 기도록 해라.”
비대한 몸집의 백무영이 술잔을 치 켜드는 것으로 입관 환영연의 시작 을 알렸다.
사방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평소 받는 용돈으로는 엄두도 못 낼 고급 기루에서 공짜 술을 마시게 됐으니 다들 기분이 들뜰 수밖에 없 었다.
‘이것으로 일단 분위기는 조성됐 고.’
환하게 웃는 후배들을 보면서 백무 영은 전에 없이 날카로운 눈빛을 발 했다. 워낙 짧은 순간에 떠올랐다 사라져서 이를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가 오늘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돈은 물경 금자 수백 냥에 이르렀다. 방 하나도 아니고 명월루 전체를 통째로 빌렸으니 그만한 출 혈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서천이나 남천에 비해서 인지도가 떨어지는 천의 사정상 돈의 힘을 빌 려서라도 쓸 만한 인재를 확보해야 해. 이번에도 기회를 놓치면 당세기 나 소예상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내 주게 돼.’
백무영은 지난 일 년 동안 자신이 이끄는 중천회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중천회는 총회원 수가 이백 명에 달할 정도로 그 세가 대단했지만 실 제적인 무력에 있어선 오히려 서천 회나 남천회에 밀렸다.
왜? 그 이유는 간단했다.
보급형 인재들이 다수 모여 있는 중천회에 비해 서천회나 남천회에는 소수 정예화된 고급형 인재들이 모 여 있었기 때문이다.
술자리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백무 영은 설백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 났다. 그리고 미리 점찍어뒀던 후 배들을 몸소 찾아다녔다. 그 후배들은 모두 소위 명문이라 지칭되는 무가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 었다.
백무영이 열심히 인재 등용에 힘쓰 는 동안 설우진을 비롯한 일부 관도 들은 철저하게 소외받았다. 마음껏 마시고 즐기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설우진이 앉은 자리에는 싸구려 분 주만 계속 채워졌다.
‘저 새끼가 대놓고 사람 차별하네. 이럴 거면 아예 부르지를 말든가.’ 설우진은 쓰디쓴 분주를 목구멍에 밀어 넣으며 속에서 치미는 울화를 달랬다.
바로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극히 평범한 외모의 사내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뭐?”
설우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사내새끼가 왜 이리 빌빌거려, 인 사하고 싶으면 그냥 하면 되지.’
“난 설우진. 나이는 열일곱, 호북 무한 출신.”
설우진이 간략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에 사내가 밝게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내 이름은 조인창. 나이는 너와 같고 호남 장사에서 왔어.”
‘장사 쪽이면 사파 출신인가?’
장사에서 왔다는 말에 설우진은 전에 없던 호기심을 드러냈다.
호남성은 사파의 권역으로 잘 알려 진 곳이다.
특히 호남의 성도인 장사에는 사파 를 대표하는 다섯 개의 세력들이 패 권을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 다. 이를 두고 강호의 호사가들은 장사를 오룡쟁투장이라 불렀다.
“넌 뭐하러 이 전쟁터에 들어온 거 야? 보아하니 마음이 약해서 주먹질 하나도 제대로 못할 것 같은데.” “내 얘기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 겠는데 난 협객이 되기 위해 이곳에 지원했어.”
“사파 출신 아니었어?”
“가문이 사파에 속해 있는 건 맞지 만 그것과 내 꿈은 별개의 문제야. 난 무슨 일이 있어도 협객이 되고 말 거야.”
조인창의 의지는 확고했다.
빌빌대던 첫인상과는 전혀 다른 느 낌을 자아냈다.
“네가 협객이 되면 집에서 좋아할 까? 협의를 실천하는 사파의 후계 자………… 영 안 어울리잖아.”
“아마 불같이 화를 내시겠지. 특히 아버진 가문의 수치라며 족보에서 이름을 파내 버릴지도 몰라.”
“그런데도 협객이 되겠다고?”
“멋있잖아, 불의에 맞서 싸운다는 게.”
‘퍽이나, 말이 좋아 협객이지 요즘 같은 세상에선 딱 굶어 죽기 십상이 라고.’
쌍룡맹과 군림마천의 전쟁이 끝나 고 강호는 평화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 전쟁에 참여했던 협객들 대부분 은 비참한 생활고에 봉착했다.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 그들은 선 두에서 군림마천의 마졸들과 맞서 싸웠다. 이로 인해 수많은 협의 지 사들이 전장에서 숨을 거두거나 치 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 그들의 피 땀 흘린 희생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탐욕스 러운 승냥이들이 뻔뻔스럽게 그 보상을 가로채 버렸기 때문이다.
그 승냥이들이 득실대는 세상이 바 로 지금의 강호다.
‘꿈과 현실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면 저 녀석도 마음을 고쳐먹겠지. 그리고 지금 내가 남의 앞날을 걱정 할 때가 아니잖아. 내 코가 석 잔 데.’
지난 삼 년 동안 설우진은 황룡 학관 입관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정 하고 정신없이 달려왔다. 덕분에 꽤 나 우수한 성적으로 황룡 학관의 입 관 시험에도 통과할 수 있었다.
한데 막상 눈앞의 목표를 이루고나니 막연해졌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이미 전생에 그는 남들이 밟아 보 지 못했던 최고의 위치에 올랐었다.
비록 말석이긴 해도 왕은 왕이었기에.
그 때문인지 몰라도 그에겐 현재의 삶에 대한 절박함이 결여돼 있었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따라갈 뿐. 그래서 지금의 그에겐 새로운 삶의 목표가 필요했다. 끝까지 믿고 나아 갈 수 있는 이정표가.
“너 이 새끼, 지금 나 무시하냐?”
그릇 깨지는 소리와 함께 백무영과 동행했던 인자 조 소속의 하후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 건지 흥분의 여파인지 그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부릅뜬 그의 시선 너머에는 입관식 에서 설우진과 눈싸움을 벌였던 봉 두난발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회주, 이 자식이 날 대하는 거 봤 지? 이런 놈은 회에 들여 봐야 오 히려 분란만 일으킨다고.”
하후령은 명월루에 들어서기 전에 회주인 백무영에게 한 가지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번에 들어온 신입 관 도들 중 가장 대어로 손꼽히는 검귀 남궁벽을 회로 끌어들이라는 내용이 었다.
하후령은 그 임무에 충실히 임했 다. 남궁벽이 앉아 있는 자리에 우 연을 가장해 자연스럽게 합석했고, 그 뒤에는 술을 따라 주며 말을 걸 었다. 하지만 남궁벽은 묵묵부답이 었다.
-적당히 해. 다른 애들이 보잖아. 그리고 남궁벽은 우리 회에 꼭 필요 한 인재야. 기분이 상한 건 알겠는 데, 어떻게든 비위 잘 맞춰서 데려 와. 이번 임무 실패하면 부회주 자 리도 날아간다는 거 잘 알지?
백무영은 하후령의 불만을 가볍게 묵살했다.
그는 철저히 실리를 추구했다. 그 상대가 일 년 넘게 함께 해 온 친 구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내가 얼마나 회에 충성했는데……’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평소 같았으면 그냥 가슴에 묻고 말았을 분노가 사납게 치밀어 올랐 다. 그리고 그 분노는 백무영이 아 닌 눈앞의 남궁벽에게 향했다.
“남궁세가의 잘난 후배님, 어머니 가 이쪽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이야?”
하후령이 풍문으로 떠돌던 남궁세 가의 치부를 끄집어냈다.
남궁벽은 현 가주인 남궁호가 십 년 전에 밖에서 데려온 아들이었다. 누구의 배에서 나왔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지만 남의 말 하기 좋아하 는 이들을 통해 기녀설이 가장 유력 하게 대두되고 있었다.
“왜 말을 못 해? 설마 널 낳아 준 어머니가 부끄러운 거야?”
하후령의 시비는 점점 그 강도를 더해 갔다.
‘저 미친 자식이 무슨 헛소리를 하 고 있는 거야.’
백무영이 하후령을 말리기 위해 황 급히 자리를 옮겼다. 이대로 두면 큰 사달이 벌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 이다.
하지만 그의 대응은 한발 늦었다. 그가 개입하기도 전에 감정이 상해버린 남궁벽이 분신처럼 지니고 다 니던 검을 뽑아 든 것이다.
“지금 그 말 취소해라.”
남궁벽의 시선 끝에 살기가 실렸다. 대답 여하에 따라 진짜 검이라 도 휘두를 기세였다. 한데 술기운 탓인지 하후령은 계속 그 혀를 놀려 댔다.
“네놈이 자초한 일이니 내 손 속이 사납다 원망 마라.”
남궁벽의 손이 검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귓가를 스치는 섬 뜩한 파공성이 일었다. 그때까지도 하후령은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감 지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거 제대로 일 터졌네. 하여간 술 처먹고 개 되는 놈들이 문제라니까’
설우진은 남 일 보듯 태평하게 둘 의 다툼을 바라봤다. 유혈 사태가 뻔히 예상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개입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협객을 꿈꾼다 던 용감한 청춘이 다급히 검을 빼들고 둘 사이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