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2권 – 29화 : 만시지탄(2)
만시지탄(2)
“홍수로 망가진 마을에 마적 떼가 쳐들어왔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아. 그럼 남은 건 누 군가 일부러 마적으로 위장해 일을 벌였다는 건데……….”
남매를 묻고 난 뒤 감정을 어느 정도 추스른 설우진은 마을에 남겨 진 흔적들을 하나하나 면밀히 살피 기 시작했다. 남매를 해친 범인들이 남기고 갔을 사건의 단서를 찾기 위 함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두 시진 넘도록 놈들이 지나간 흔적을 모조리 뒤졌지만 단서가 될 만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놈들이 작정하고 일을 벌인 거라 면 마을에 허투루 흔적을 남겼을 리 없어. 그렇다면 놈들의 긴장이 풀리 는 지점을 노려야 해.’
설우진은 마을 밖으로 나섰다. 어귀에서부터 말발굽 자국이 어지 럽게 이어져 있었다. 그는 말발굽 자국을 쫓아 빠르게 신형을 튕겼다. 그렇게 반 시진쯤 달렸을까.
황하 강변에 야영을 한 흔적이 보 였다. 설우진은 가장 먼저 모닥불에 남아 있는 열기를 확인했다. 불씨가 완전히 꺼져 있는 듯 보이는데 손가락 끝에 온기가 느껴졌다.
‘놈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냈어. 아마도 모든 흔적을 지우려 했 겠지. 저 옷들처럼.’
설우진의 시선이 모닥불가에 고정 됐다. 그곳에는 타다 남은 옷 조각 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설우진 은 그 잔해들을 천천히 뒤졌다. 옷 을 벗는 와중에 흘린 물건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생각은 그대로 적중했다.
옷 조각들에 뒤섞여 작은 동패 하 나가 떨어져 있었다. 설우진은 그것 을 집어 옷소매로 그을린 부분을 깨 끗이 닦아 냈다.
용아龍牙.
동패에 새겨진 이름을 보고 설우진 은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자신이 혈옥불을 찾기 위 해 다녀온 용아보와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가만, 그때 당시에 혈옥불을 손에 넣었던 문파 하나가 그 사실을 감추 기 위해 양민들을 해쳤다고 했는 데………… 설마 그곳이 용아보?’
그가 혈옥불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자의로 혈옥불 쟁탈전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의뢰 를 받고 칼받이로 고용돼서다.
그래도 쟁탈전의 중요한 기점이 된 몇 가지 사건들에 대해서는 비교적 정확히 기억을 하고 있었다.
“용아보, 이 개자식들. 그깟 귀물에 눈이 멀어 그 불쌍한 애들을 해치다 니. 조금만 기다려라, 이 몸이 달려 가서 네놈들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 를 불렀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 마.”
머릿속으로 용아보를 곱씹으며 설 우진은 남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한 시도 지체할 새가 없다는 듯 벽뢰진 천의 뇌기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순 식간에 그의 신형이 시야에서 사라 졌다.
“용아보가 미끼를 물었습니다.”
“그럼 지체 말고 놈들을 진흙탕 속 으로 끌어들여라. 이번 한 수로 쌍룡맹이 섬서에 두고 있는 기반을 모 두 무너뜨린다.”
밀실 안에서 은밀한 대화가 오고 갔다.
어둠 속에 가려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내용만큼은 의미심장했다.
“하하하, 수고 많았다. 역시 내 아 들답다.”
용아보의 중지인 건룡청에서 당대 용아보주인 백기영이 백승천의 공을 치하했다.
그는 군림마천과의 전쟁이 끝으로 다다를 무렵 삼백 명에 이르는 무사 들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었다. 그는 수적 우위를 앞세워 수뇌부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 마천의 잔당을 소탕 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 용아보는 그 공을 인정받아 쌍룡맹의 정식 일원이 되 고 장안의 패주로 거듭났다.
“이것이 혈옥불이란 말이지?”
백기영이 아들에게 건네받은 혈옥 불을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 다.
그는 비슷한 명성을 얻고 있는 강 호의 명숙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내 공이 빈약했다. 정심하지 못한 내공 심법을 익힌 탓이었다. 그래서 아무 리 노력을 해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는 내공이 오르지 않았다.
‘이것만 있으면 날 깔보던 작자들을 단숨에 깔아뭉갤 수 있어. 특히 모용춘 그 작자를.’
백기영은 쌍룡맹의 섬서 지부장을 맡고 있는 모용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전장에 서 함께 싸운 전우 사이였다. 물론 그 관계는 철저히 갑과 을로 엮여 있었다.
당시 섬멸대를 맡고 있었던 모용춘 은 전쟁이 끝날 무렵에 참전한 백기 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손해는 보 지 않고 이득만 챙기려는 그 속내가 괘씸했던 것이다.
결국 전쟁이 끝날 때까지 두 사람은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을의 입장인 백기영은 그 불편한 속 내도 맘 편히 드러내지 못했다.
한데 운명이 얼마나 얄궂은지 전쟁 이 끝난 뒤에 모용춘이 쌍룡맹 섬서 지부로 왔다, 그것도 일개 간부도 아닌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지부 장으로.
그때부터 두 사람의 악연은 더욱 질겨졌다.
“수하들 입단속은 철저히 했느냐?”
“네. 단단히 주의를 주고 금주령까 지 내렸습니다.”
“잘했다. 이 아비는 내일 중으로 폐관수련에 들 것이다. 삼 년 정도 를 예상하고 있지만 그 성과에 따라 더 늦춰질 수도 있다. 하니 내가 자 리를 비운 동안 네가 잘 맡아서 운 영토록 해라. 어차피 십 년 후에 네 가 물려받을 곳이니.”
“바깥일은 걱정 마십시오. 마천이 다시 발호한다면 모를까 이곳 장안 에서 우리 용아보를 위협할 세력은 없습니다.”
백승천은 강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에 백기영은 아들의 어깨를 가볍 게 두들기며 그 자신감을 고취시켰 다.
그런데 둘이 장밋빛 미래를 그리고 있을 때, 용아보 근처로 다양한 복 색을 갖춰 입은 자들이 은밀히 모여 들었다. 그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늘고 있었다.
“자네가 이곳엔 웬일인가? 고릉에 서 예까지 적지 않은 거리일 텐데.”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네. 엉 덩이가 무겁기로 유명한 자네가 이 먼 장안에는 무슨 일인가?”
두 명의 중년 사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였다. 왼편에 선 날렵한 체구의 사내는 청운학으로 고릉 비연보의 보주였고 오른편에 선 우람한 체구의 사내는 곡전해로 위남 패력보의 보주였다.
비연보와 패력보는 정도에 근간을 둔 세력으로 화산의 영향을 많이 받 았다. 그도 그럴 게 두 가문의 초대 시조가 화산속가의 문하였다.
“혹, 혈옥불을 노리고 온 겐가?”
청운학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하지만 곡전해는 수긍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분에 넘치는 보물은 화를 부르기 마련일세.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게.”
“후훗, 그 무모한 자신감은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마천의 졸개들에게 쫓겨 달아나던 게 엊그 제 같은데 말일세.”
“뭐, 뭐라!”
청운학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어졌다.
그날의 기억은 여전히 그에게 지워 지지 않는 상흔으로 남아 있었다.
“십 년 전과 같은 꼴을 당하고 싶 지 않거든 자네야말로 애들 데리고 돌아가게. 자네에게 어디 혈옥불이 가당키나 한가!”
“네, 네놈이 정녕 나와 피를 보자 는 게냐!”
흥분한 청운학이 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곡전해도 그냥 당하지는 않겠 다는 듯 등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았 다.
수장들이 흥분하자 덩달아 뒤따라 온 무사들도 서슬 퍼런 기세로 상대 를 노려보며 각자 허리로 손을 가져 갔다.
“쯧쯧, 나잇살이나 먹고 부끄럽지도 않나? 당과를 두고 다투는 애들 도 아니고.”
어둠 속에서 새로운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내는 학자풍의 외모에 매화 문양 이 화려하게 수놓인 부채를 들고 있었다.
‘화천규!’
그를 본 두 사람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화천규는 서안에 터를 잡고 있는 선풍장의 장주였다. 선풍장은 화산 속가의 하나로 그 규모는 비연보나 패력보에 못 미치지만 무사들 개개 인의 실력이 출중했다. 특히 장주인 화천규의 경우 서안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뛰어난 무 공을 자랑했다.
“화산에서도 혈옥불을 욕심내는 것이오?”
청운학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개인적인 욕심인지 화산의 뜻인지를 가늠코자 한 것이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화산은 지난 군림마천과의 혈사로 큰 피해를 입 었네. 이런 하찮은 일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는 말이지.”
“하면 개인적인 욕심으로 혈옥불을 차지하겠다는 겐가?”
“후훗, 내가 자네들 같은 줄 아는 가. 난 단지 위험한 물건이니 분란 이 일기 전에 회수를 하려는 것뿐이네.”
“말이 좋아 회수지 결국 자네가 갖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곡전해가 노골적인 의심을 드러냈다.
다른 물건도 아니고 무려 마천의 신물인 혈옥불이다. 한데 그걸 순수 한 의도로 회수한다? 솔직히 믿기 어려웠다.
“참 답답한 친구들이로군. 하면 여 기서 나와 실랑이를 하다 다른 이들 에게 혈옥불을 빼앗길 셈인가?”
“그게 무슨?”
“이미 혈옥불이 이곳에 있다는 소 문이 강호 전역에 쫙 퍼졌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소문을 내기라도 한것처럼.”
화천규는 실제 혈옥불에 욕심이 없었다.
스스로의 무공에 대해서 자신이 있 기도 했고 무엇보다 본가인 화산을 침탈한 마천의 물건을 갖고 싶지가 않았다.
한데 이렇게 나선 것은 혈옥불이 나타난 과정이 석연치 않아서였다.
“일단 우리 셋이 힘을 합쳐 혈옥불 부터 찾고 보세. 다른 이가 가져가 면 셋 다 손해가 아닌가.”
화천규가 두 사람을 설득했다.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두 사람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세 무리는 동시에 담을 타고 넘었다.
그들이 떠나고 난 뒤 낯익은 얼굴 이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적안의 노인과 계략을 논하던 중년인 이었다.
“청무, 은밀히 뒤를 따라가 화천규 의 숨통을 끊어라. 놈이 개입해서 혈옥불이 화산의 손에 들어가게 되 면 이제까지의 계획이 모두 틀어진 다.”
“그자는 살생부에 이름이 없는 걸 로 아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큰일을 이루는 데 있어 작은 희생 은 불가피하다. 내 명령이 맘에 들 지 않더라도 대의를 위해 따르도록 해라.”
중년인의 뜻은 완고했다.
청무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리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뭐지, 이 피비린내는?”
전력으로 내달려 불과 반나절 만에 용아보에 도착한 설우진은 담 너머 에서 흘러오는 진한 피비린내에 이 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한바탕할 각오를 하고 찾아왔는데 풍겨 오는 피비린내가 예사롭지 않 았다.
그는 주변의 동태를 살피며 조심스 럽게 담을 타고 넘었다.
바닥에 내려서니 곳곳에 용아보의 무사들이 쓰러져 있었다. 제대로 저 항도 못해 보고 당했는지 시체에 나있는 상처가 깔끔했다.
‘놈들이 신하촌에서 혈옥불을 가져 간 지 불과 사흘도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진 거 지? 신하촌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용아보 쪽에선 철저히 입단속을 했 을 텐데.’
설우진은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좀 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혈옥불을 손에 넣은 사실을 숨기기 위해 한 마을을 몰살시켰던 용아보 다. 한데 그런 용아보가 사흘도 안 돼서 비밀을 유출했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챙챙챙.
바로 그때.
설우진의 귓가에 날카로운 금속음이 전해져 왔다. 그는 다급히 그 소 리를 쫓아 신형을 튕겼다.
싸움은 용아보의 후원에서 벌어지 고 있었다.
한데 특이한 건 그 당사자가 용아 보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네놈이냐, 혈옥불을 가져와 분란 을 일으킨 장본인이?”
화천규가 쉴 새 없이 덮쳐 오는 검기를 철선으로 힘겹게 막아 내며 물었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전력으로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런데 상대는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검기를 날려 보내는 기술은 일반적으로 내력 소모가 심 하다고 알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숨소리가 거칠어지기는커녕 오히려 검기에 실리는 기세가 시간이 갈수 록 더 강해졌다.
‘역시 쉽지 않은 상대군. 속가라고 해도 구룡이라는 뿌리는 변하지 않 으니.’
청무는 내심 화천규의 실력에 놀랐 다.
그가 구사하는 질풍검기는 수호 가 문의 절초 중 하나였다.
내력의 소모를 극단적으로 줄인 무 공으로 검기를 한 번 날릴 때마다 소모되는 내력의 양은 일반적인 무공의 십분의 일에 불과했다.
한데 화천규는 그런 대단한 무공과 정면으로 맞서서 무려 일각여를 버 티고 있었다. 청무가 감탄하는 대목 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대체 목적이 무엇이냐? 사용하는 무공을 봐서는 마천의 잔당은 아닌 듯한데.”
화천규는 속내를 파악하기 위해 체 력적으로 힘든 와중에도 입을 쉬지 않았다.
그 노력이 통했던 것일까.
마침내 청무의 입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