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3권 – 31화 : 비밀 호위 (3)
비밀 호위 (3)
‘이거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군. 뭐, 어차피 수호 가문과 맞서기로 마음먹은 거 제대로 한번 분탕질을 쳐 볼까!’
설우진은 고민 끝에 제갈명의 비밀 호위 제안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당은 최대한으로 뽑아냈 다. 자신의 몸값은 비싸다는 걸 강 조하면서.
황유하의 고희연에는 그야말로 강호의 명사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누구 하나 이름이 안 알려진 이가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은 제갈명을 제외한 천중 오가의 가주들이었다.
먼저, 북리진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들에게 연신 인사를 건넸다. 상대가 누구이 든 개의치 않았다.
그에 반해 남궁대현은 묵직한 존재 감을 드러내며 입을 굳게 다물고 있 었다. 상대가 먼저 인사를 건네 와 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게 전부 였다.
다음으로 모용리와 황보철용은 노 회한 연륜을 드러내며 능숙하게 사람들과 담소를 주고받았다. 덕분에 두 사람 주변에는 사람들이 벌 떼처 럼 몰려 있었다.
“우진아, 긴장 안 되냐?”
연회장의 한가운데 부지런히 접시 를 나르고 있는 설우진에게 제갈윤 이 말을 걸어왔다.
“지금 바쁜 거 안 보여요? 괜히 눈에 띄는 행동하지 말고 저쪽에 가 서 노인네들이랑 인맥이나 쌓으시죠!”
설우진이 손을 휘휘 저으며 제갈윤 을 떨쳐 냈다.
그만큼 일이 바빴다. 어찌나 다들 먹성이 좋은지 음식을 가져다 놓기 무섭게 사라졌다.
“여기 화과육 가져와라.”
“술 다 떨어졌다. 백주 세 통만 더 가져와.”
여기저기서 설우진을 불러 댔다. 천하의 낭왕이 이게 무슨 꼴이냐며 속으로 한탄을 하면서도 그의 손과 발은 부지런히 음식을 날랐다.
“먼 길 찾아와 준 강호 동도들에게 내 술 한잔 올리리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황유하가 술병을 들고 자리에서 일 어났다. 그러고 주변에 앉은 이들에 게 차례차례 술을 따랐다.
“다들 뜻하는 바가 모두 이뤄지길 빌겠네.”
잔이 채워지자 황유하가 술잔을 들 어 건배사를 했다. 이에 주변에 자 리 잡고 있던 장로들이 앞다퉈 술을 들이켜며 그의 고희연을 축하했다.
“맹주님, 만수무강하십시오.”
“강호를 위해 앞으로도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 주십시오.”
건배사로 분위기는 더욱 달궈졌다. 그리고 뒤이어 장로 하나가 자리에 서 일어나 맹주님을 위한 작은 공연 을 준비했다며 한 무리의 사내들을 불렀다.
요란한 화장을 한 광대 무리였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연회장 한가운 데 자리를 잡고 온갖 기예를 펼쳐 보이기 시작했다.
누워서 손과 발을 이용해 여러 개의 접시를 한꺼번에 돌리는가 하면, 잔뜩 날이 선 비수를 마치 공 다루 듯 자유자재로 주고받았다.
그들의 화려한 기예는 연회에 참석 한 이들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았 다.
하지만, 설우진은 그들의 기예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놈들이 언제 움직이려나, 이쯤 분 위기가 달아올랐으면 슬슬 움직임을 취할 때도 됐는데.’
설우진은 부지런히 술과 음식을 나 르면서 황유하의 주변을 살폈다. 아 직까지 수상한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도 암습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 기 때문이었다.
광대들의 기예는 절정으로 향해가 고 설우진의 가슴은 고조되는 긴장 감으로 사납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맹주님, 제가 손수 담근 하수오줌 니다. 오백 년 묵은 백하수오를 넣 어 익힌 것이니 한잔 드시면 흐트러 진 기력을 바로 잡는 데 도움이 되 실 겁니다.”
매부리코가 인상적인 장로 북리철 이 황유하에게 새로운 술을 권했다.
“자네, 그 술을 이제야 꺼내는 겐 가! 지난번 내 회갑연에 그렇게 내어 달라 청을 해도 거절을 하더니.”
북리철 옆에 자리하고 있던 황보준 이 섭섭하다는 어투로 말을 건넸다. “쯧쯧, 일전에 내 분명히 얘기하지 않았었나. 이 술은 오롯이 맹주님을 위해 담은 것이라고.”
“그래도 한 잔 정도는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욕심낼 걸 내게!”
오랜 친구 사이인 두 사람이 하수 오주를 앞에 두고 티격태격했다. 옆 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유하가 중재에 나섰다.
“둘 다 진정하게. 좋은 술이 있으 면 나누면 될 것을 뭘 그리 얼굴을 붉히는가. 자, 우리 함께 마시세.”
황유하가 두 사람의 빈 잔에 하수오주를 따랐다. 그 짧은 순간, 북리 철과 황보준 사이에 의미심장한 눈 빛 교환이 이뤄졌다.
“맹주님도 한 잔 받으십시오.”
술잔을 채운 북리철이 황유하의 술잔에도 하수오주를 가득 채웠다.
“다들 오래오래 건강하세.”
황유하가 먼저 술을 들이켰다. 뒤 이어 북리철과 황보준도 술잔을 비 웠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데, 기분 좋게 술을 들이키던 북 리철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며 비 틀거렸고 때를 같이 해, 황보준이 검붉은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독이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외쳤다.
일순, 주변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많은 이들이 독을 피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강호인들에게도 독은 공 포의 대상이었다.
‘허어, 보기 좋게 당했군.’
황유하는 허탈한 얼굴로 단전을 매 만졌다. 급속도로 내기가 흩어지고 있었다. 한 줌의 진기를 붙잡으려 애를 써 봤지만, 몸 안에 스며든 산 공독의 위력은 예상보다 강했다.
사실, 그는 독에 대해서 크게 걱정 하지 않고 있었다. 화경의 경지를 넘어서며 백독이 무해한 몸이 되었 기 때문이다. 한데, 하수오주를 통해 전해진 산공독은 백독 불침을 무위 로 돌려 버렸다.
적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 준비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맹주님을 보호해라!”
황유하 주변에 은신하고 있던 호위 대용풍이 발 빠르게 그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호위대주 공무혁의 지 시하에 스물이 넘는 인원이 황유하 를 중심으로 둥그런 벽을 쌓았다. 풍륜회진이라 불리는 대인 수호진 이었다.
한데 풍륜회진이 발동하기도 전에 생각지도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애써 구축했던 진의 축이 갑자기 틀어진 것이다.
“칠호, 자리 지켜!”
공무혁이 진축을 맡고 있는 대원에 게 거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그 대원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 는지 진을 그대로 이탈했다.
공무혁은 다급히 신형을 날려 대원 의 앞을 가로막았다.
“너, 이 새끼, 무슨 짓이야!”
“맹주님이 위험합니다. 당장 달려 가서 구해야 합니다.”
대원의 눈빛은 진지했다. 다른 의 도로 이상행동을 하는 것 같지는 않 았다.
‘설마 환시술?’
공무혁의 두 눈이 거칠게 흔들렸 다. 환시술은 눈앞에 보이는 장면을 왜곡시키는 이법이다. 그 무리를 따 져 보면 사파의 섭혼술과 비슷하지 만 다수의 인원에게 한꺼번에 걸 수 있기에 그 효율성은 더 뛰어나다고 볼 수 있었다.
공무혁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대원들에게 환시술을 걸고 있는 이 를 찾기 위함이었다.
소란하게 움직이는 군웅들 사이로, 한 남자가 보였다.
남자는 넓적한 깃발을 바쁘게 흔들 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검을 들고 달려드는 복면인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그걸 본 공무혁은 재빨리 남자를 향해 달려갔다. 부하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원흉을 제거하기 위함이었 다. 한데, 기세 좋게 달려 나가던 그의 걸음이 갑자기 멈칫했다. 뒤이 어 정기가 넘치던 그의 눈빛이 흐릿 하게 변했다.
공무혁이 노리고 달려들던 남자의 등 뒤로 또 하나의 깃발이 떠오른 것이다.
호위대가 환시술에 걸려 허둥지둥 하는 사이, 일련의 무리가 황유하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들은 방금 전 까지 화려한 기예로 연회를 빛냈던 광대들이었다.
“표적은 산공독에 중독돼 한 줌의 내력도 쓸 수 없다. 단숨에 들이쳐 놈의 숨통을 끊어라.”
위험천만한 단검 던지기를 선보였던 우두머리 광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에 광대들이 허리에 감춰 두고 있던 면도를 끄집어내 황유하를 겨 냥했다. 낭창낭창하게 휘어지는 면도가 내력을 머금자 꼿꼿이 머리를 세우며 황유하의 숨통을 조였다.
하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황유하는 내력을 전혀 쓸 수 없음에도 초식의 정순함을 앞세워 광대들의 공격을 무위로 돌렸다. 특히, 팔을 끌어당겨 내치는 이화접목의 수법이 일품이었다.
싸움이 길어지면서 광대들의 얼굴 에 서서히 초조함이 어리기 시작했다.
“이놈들, 어서 맹주님의 곁에서 물러서라!”
바로 그때, 북리철이 황유하의 곁 으로 날아들었다. 그는 맹렬한 기세 로 검을 휘두르며 자객들을 물러서 게 만들었다.
그런데 우연이었을까. 그의 움직임 이 교묘하게 황유하의 시야를 가렸 다. 그리고 마치 짜고 친 화투판처 럼 가려진 시야 너머에서 광대들이 뿌린 암기가 날아들었다.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들어 오는 공격이었기에 이번만큼은 황유 하도 제때 반응하지 못했다.
‘맹주님, 저흴 너무 원망 마십시오. 이게 다 강호의 평화를 위한 일입니 다.’
북리철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번졌 다.
한데, 그 미소는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암기가 황유하의 왼쪽 가슴을 꿰뚫으려는 찰나 벼락처럼 날아든 이가 암기를 잡아채 버린 것이다.
“생각보다 많이 늦었군?”
황유하가 앞을 막아선 넓은 등판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이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답을 전해 왔다.
“시종 일이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 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냥 호위 무사로 위장해 있을 걸 그랬습니다.”
설우진은 일이 터진 상황에 본의 아니게 자리를 비우게 됐다. 공교롭 게도 그쯤에 술이 뚝 떨어져 버린 것이다. 막내 신분이라 안 갈 수도 없고.
“혼자서 감당할 수 있겠나?”
황유하가 무거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부의 동조자만 없다면 가뿐합니다.
설우진이 전음과 함께 눈짓으로 북 리철을 가리켰다. 북리철은 설우진 과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히며 황 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일이 틀어졌 다 판단한 것이다.
그사이 광대들이 설우진의 정면으 로 들이닥쳤다. 시간이 없다 판단했는지 다들 전력으로 공세를 펼쳤다. 쉬쉬쉭.
사위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휘몰아 쳤다. 어찌나 연계가 깔끔한지 설우 진은 반격의 틈을 찾기가 쉽지 않았 다.
‘그래, 어차피 여기선 버티기만 하 면 돼. 시간은 우리 편이잖아.’
설우진은 무리하게 반격을 하지 않 고 뇌망을 활용해 광대들의 파상 공 세를 적절히 끊어 냈다. 그가 맘먹 고 수비에 나서자 광대들은 좀처럼 그 벽을 뚫지 못했다.
소득 없는 싸움이 이어지자 우두머 리 광대는 사납게 일그러진 얼굴로 품 안에서 둥그스름한 물체를 끄집어냈다. 전체적으로 검붉은 빛깔에 진한 화약 냄새가 풍겼다.
‘이 새끼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맹주를 죽이겠다는 심산인가? 벽력 탄도 아니고, 강호에서 사용이 금지 된 굉천뢰를 가져오다니.’
설우진은 한눈에 굉천뢰를 알아봤다.
굉천뢰는 그가 낭인 시절에 딱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지 금과 상황이 비슷했다.
당시 상단주를 호위하는 임무를 수 행했는데 연회 중에 자객들이 들이 닥쳤다. 수백 명의 낭인들이 동원된 상태였기에 누구도 자객들의 출현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데, 자객들이 굉천뢰를 사용하면 서 상황이 반전됐다.
굉천뢰는 벽력탄보다 열 배 이상 강한 화력을 자랑했다. 그 악명이 과장된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듯 엄청난 굉음과 함께 거센 불길이 연 회장을 뒤덮었다.
여유 있는 얼굴로 자객들을 맞이했 던 낭인들은 태반이 그 불길에 휩싸 여 죽어 갔다.
‘굉천뢰의 폭발 반경은 이십 장 내 외. 전력으로 달린다면 그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어.’
설우진은 도주를 결심했다.
그사이, 광대 우두머리가 굉천뢰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심지는 빠르게 타들어 갔다.
“빨리 피하시죠.”
설우진이 황급히 손을 내밀었다. 한데 황유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 위해 그림자처럼 일해 온 친구 들일세. 내 목숨 하나 건지자고 저 들을 외면할 순 없네.”
황유하가 호위대를 눈짓으로 가리 켰다. 그들은 여전히 환시술에서 벗 어나지 못했는지 빈 허공에 대고 검 을 휘두르고 있었다.
“맹주님이 이곳에 남는다고 저들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이 손을 잡으세 요. 정말 시간이 없단 말입니다!” 설우진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 데, 황유하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 았다. 미련스러울 정도로 의리가 넘 치는 양반이었다.
휘익.
실랑이를 벌이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굉천뢰가 날아들었다. 심지가 거의 타들어 가 이젠 피한다고 해도 목숨을 장담키 힘든 상황이었다.
“빌어먹을.”
동공에 가득 차 오는 굉천뢰를 보 며 설우진은 단전에 남아 있던 모든 뇌기를 끌어 올려 칼끝에 응축시켰 다. 굉천뢰의 화력을 폭뢰의 힘으로 상쇄시키겠단 계산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절대 하지않았을 모험이었다. 부르르.
천뢰도가 거칠게 몸을 떨었다. 폭뢰를 사용할 때가 된 것이다.
“흐압!”
설우진이 이를 악물고 천뢰도를 힘 차게 위로 휘둘렀다. 칼끝에서 응축 된 강기 덩어리, 폭뢰가 위로 쏘아 져 날아갔다.
콰콰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굉천뢰와 폭뢰 가 서로 맞닥뜨렸고 사나운 바람과 함께 후끈한 열기가 십 장 이내를 뒤덮었다.
(다음 권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