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왕전생 8권 – 27화 : 판을 벌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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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왕전생 8권 – 27화 : 판을 벌이다 (2)


판을 벌이다 (2)

“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것이냐?” 

“요술이랄 것도 없습니다. 전 그저 먹음직스러운 미끼를 놈의 눈앞에 던졌을 뿐입니다.”

적사호의 물음에 설우진은 밀실 안 에서 위가렴과 나눴던 얘기들을 간 략하게 설명했다.

그 얘기들을 듣고 적사호는 진심으 로 탄복했다.

‘설마하니 그런 식으로 놈을 꾀어 낼 줄이야. 역시 내가 사람 하나는 제대로 골랐어. 이 녀석이라면 분명 그 일도 해낼 수 있을 거야.’

“이제 내가 뭘 하면 되느냐?”

“놈의 방심을 끌어내야 하니 금방 이라도 쳐들어갈 것처럼 부산을 떨 어 주십시오.”

“알았다. 바로 움직이마.”

적사호가 급하게 건물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얼마 후, 통천문의 무사들 이 넓은 마당에 모여 발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원정 을 떠나는 병사들 같았다.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를 들 으며 설우진은 위가렴이 연금된 밀 실로 다시 향했다.

“적사호는 어찌 됐느냐?”

위가렴은 설우진을 보자마자 그의 동태를 물었다.

“저 발소리 안 들려? 아예 작정을 했는지 무사들을 이끌고 급하게 밖 으로 나가던데.”

‘이런,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움직였잖아. 이렇게 되면 한시도 지 체할 수 없겠는걸.’

초조한 감정이 위가렴의 얼굴에 훤 히 드러났다.

그는 다급히 종이와 붓을 청했고 미리 준비해 두고 있던 물건들이라 바로 대령할 수 있었다.

위가렴은 빠른 손놀림으로 서찰을 써 내려갔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마을에 유광 서고라는 오래된 책방이 하나 있다. 그곳으로 가서 주인장에게 이 패와 서찰을 함께 전하면 된다.”

위가렴이 붓을 내려놓으며 서찰과 함께 허리에 차고 있던 은색 패를 건넸다.

은색 패 정중앙에는 바다 위에서 날뛰는 현무의 형상이 정교하게 새 겨져 있었다.

“그럼 몸조리 잘하고 있으라고, 곧 이곳에서 제 발로 나올 수 있게 될 테니.”

서찰과 은패를 받아 챙긴 설우진이 그에게 친근한 작별 인사를 건네며 밀실을 나섰다.

그런데 그가 밀실을 나선 직후 위가렴의 얼굴에 전에 없던 살의가 번 졌다.

“네놈이 그리 웃는 것도 오늘이 마 지막이 될 것이다. 유광 서고의 주 인에게 서찰을 건네는 순간 네놈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곳인가?”

위가렴의 서찰과 은패를 품에 안고 설우진이 발걸음을 멈춘 곳은 허름 해 뵈는 책방 앞이었다.

얼마나 오래 전에 지어졌는지 문짝 은 다 부서져 너덜너덜해져 있었고 유광이라 적힌 문패는 긴 세월의 흔 적으로 중요한 획들이 사라져 있었다.

끼익.

설우진이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문 을 밀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손님이 없었는지 작은 움직임에도 사방에서 먼지가 일었다.

“뉘십니까?”

책장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백발 의 노인이 설우진을 반겼다. 기력이 많이 쇠했는지 노인은 지팡이를 짚 고도 걸음을 옮기는 데 상당히 버거 워했다.

“역천의 푸른 별이 보내서 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노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힘겹게 치켜 떴다.

이에 설우진은 품 안에 손을 넣어 은패를 꺼냈다.

순간 노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굽었던 허리는 꼿꼿이 섰고 흐릿하 게만 보이던 두 눈에선 정광이 번뜩 였다.

“회로 보낼 물건입니까?”

“그렇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니 서 둘러서 전해라.”

설우진이 은패에 이어 서찰을 책방 주인에게 건넸다. 한데 서찰을 읽던 책방 주인의 눈빛에 순간적으로 살 의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잠시만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책방 주인이 서찰을 들고 안쪽 방 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책방 위로 튼실하게 생긴 전서 구 하나가 힘차게 날갯짓을 하며 날 아올랐다.

“은패를 돌려 드리겠습니다.”

전서구를 날려 보낸 책방 주인이 설우진에게 다시 은패를 건넸다. 설우진은 별 의심 없이 은패를 받았다. 그런데 은패를 건네받는 순간 비릿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다.

‘독’

설우진은 단번에 냄새의 정체를 알 아차렸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칼집을 휘둘러 은패를 옆으로 쳐냈다.

‘어쩐지, 너무 순순히 내 말에 따른다 했더니 이런 속셈을 숨기고 있 었군.’

설우진은 위가렴의 면상을 떠올리 며 단전의 뇌기를 깨웠다. 놈들의 공격이 독 하나로 그치지 않을 거란 판단이 든 것이다.

그 판단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역천의 뜻에 반하는 자, 죽음으로 사죄해라.”

독을 통한 암습이 실패로 돌아가자 책방 주인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 로 책장 한 귀퉁이를 세차게 후려쳤 다.

순간 사방에서 자욱한 연기와 함께 고약한 화약 냄새가 코끝으로 파고 들었다.

‘빌어먹을, 화탄이잖아.’

설우진은 입구로 되돌아가지 않고 정면으로 치달았다.

입구 쪽보다는 안쪽이 더 안전할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어딜 도망가려고!”

책방 주인이 설우진의 앞을 막아섰다.

지팡이인 줄 알았더니 날카로운 검 날을 안쪽에 숨기고 있었다.

“걸리적거리지 말고 비켜.”

설우진은 오랜만에 폭뢰를 전개했 다. 그는 위급 상황인 만큼 전력을 다했다.

정면으로 날아드는 가공할 기세에 책방 주인은 급하게 검법을 전개했 지만 검세가 다 펼쳐지기도 전에 폭 뢰가 검을 그대로 부수고 책방 주인 의 머리통까지 날려 버렸다.

타닥.

설우진은 바닥으로 쓰러지는 그의 어깨를 발판 삼아 몸을 앞쪽으로 내 던졌다.

순간 폭음과 함께 바닥에서 사나운 불줄기가 휘몰아쳤다. 그 가공할 열 기는 책장에 꽂혀 있던 고서들을 집 어삼켰다. 때문에 불길은 더 거세졌 고 순식간에 후문까지 들이쳤다.

설우진은 황급히 벽 쪽으로 몸으로 돌렸다. 간발의 차이로 불길이 그의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새끼들, 아주 작정하고 함정을 만들어 놨네. 그 독이 아니었다면 영 락없이 불길에 휩쓸렸겠는걸.” 

설우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너무 방심한 측면이 없잖아 있었다. 막다른 길목에 몰려 있는 위가렴이 딴생각을 품을 여유가 없 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정말 독이 아니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그래도 뭐, 이곳에 온 목적은 달성했으니.”

설우진이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미 전서구는 아득한 점이 되어 사라진 뒤였지만 그는 푸드득거리는 날갯짓 소리를 통해 전서구가 날아간 방향을 정확 히 짚어냈다.

“일단 미끼는 던져졌고, 이제 마천 놈들을 그 덫으로 끌어들이는 일만 남은 건가?”

설우진은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행 보를 그렸다.

위가렴이 보낸 서찰은 전서구를 통 해삼문의 수신무위에 전해질 것이 다.

적사호가 직접 움직였다고 적혀 있 을 테니 아마도 그를 맞이할 만반의 채비를 할 터, 이제 그곳에 마천의 전위대만 데려가면 됐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것을 실현해 내는 건 쉽지 않았다.

마천의 전위대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선 그들을 자극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과연 그 양반이 마천의 전위대에 버금갈 무력대를 구해 놨을까? 은밀 히 창천군을 조직한 걸 보면 그쪽으 로 꽤나 수완은 있는 듯한데………..? ‘

설우진은 오랜만에 만나게 될 쌍룡 맹주 황유하를 떠올렸다.

그가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준비한 미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방금 그의 손에 의해서 던져졌고 나 머지 하나는 쌍룡맹에 가서 얻어야 했다.

웅성웅성.

활활 타오르는 책방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적한 마을에 느닷없이 폭음과 함 께 불길이 치솟았으니 사람들의 관 심이 쏠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기 전에 서둘러 빠져나가야겠군.’

설우진은 후문과 통해 있는 골목길 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정문에 쏠려 있던 터라 그의 모습을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 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허허, 못 본 사이에 신수가 더 훤해졌군.”

설우진과 황유하가 모처럼 만나 인사를 나눴다.

서로에 안 시간은 짧았지만 그 교 감만큼은 결코 가볍지 않았기에 오 랜만에 만났음에도 둘 사이엔 훈훈 한 정감이 전해졌다.

“그 자리에 있기 많이 힘드시죠?”

“솔직히 말하면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네.”

“그래도 끝까지 버티고 계십시오. 어르신이 그 자리를 뜨는 순간 울타 리는 무너지고 그 너머에서 더러운 오수들이 쏟아져 내리게 될 겁니 다.”

“여전히 자네는 말에 거침이 없구먼.”

“타고난 성격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그보다 급하게 오느라 식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밥부터 먹죠.”

두 사람이 만난 곳은 손님들로 북 적이는 정주의 유명한 음식점 소요 각이었다.

그들이 이곳을 고른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바로 쌍룡맹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밥값은 내가 계산할 터이니 마음껏 시키게.”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설우진이 환한 얼굴로 점소이를 불 러 음식을 주문했다.

잠시 후, 둘이서 먹기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많은 양의 요리가 식탁에 깔렸다.

음식을 마주한 설우진은 허겁지겁 젓가락을 놀려 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전력을 다해 정주까지 달려왔다. 미끼의 효력이 다하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다음 계 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주에 도착한 뒤 소요각 기 둥에 붉은 깃발을 올렸다. 황유하를 부르는 신호였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황유하 는 깃발을 올린 지 불과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소요각에 모습을 드러냈 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뿐 둘 사이에 은밀한 전음이 빠르게 오갔다.

-적 문주와 약속한 대로 쓸 만한 무사들을 한 곳에 모아 뒀네. 그곳 에 가서 내 명패를 내보이면 순순히 자네의 말에 따를 걸세.

-믿을 만한 자들입니까?

-모두 천중오가와 연관이 없는 이 들이네. 하니 정보가 샐 염려는 하 지 않아도 되네.

“이 화과육, 정말 별미네요. 입안에 서 사르르 녹는 것 같습니다.” 

전음을 나누던 와중에 갑자기 설우 진이 말을 건넸다. 황유하는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이내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은은하게 마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면, 마천이…………?

-네. 아무래도 맹을 나설 때 꼬리가 붙은 듯합니다.

-이거 골치 아프게 됐군.

황유하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번 일은 무엇보다 보안을 지키는 게 가장 중요했다. 한데 일을 벌이 기도 전에 꼬리가 붙다니.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꼬리 가 붙었으면 그냥 잘라 버리면 됩니 다.

-은밀하게 처리할 수 있겠나?

-가능합니다. 일전에 부업으로 몇번 그쪽 일을 뛰어 본 적이 있거든 요.

설우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황유 하를 안심시켰다.

-이번 일이 계획대로만 진행된다 면 세 세력은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 없이 진흙탕 싸움을 벌이게 될 겁니 다. 맹주님께선 한 발짝 뒤로 물러 나 은밀히 세를 규합하십시오. 그래 야 마지막 승부에 판을 뒤집을 수 있습니다.

-잘 알겠네.

둘 사이에 오가던 전음이 끊겼다. 그것이 신호였는지 설우진은 잘 먹 었다며 인사를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소요각을 나서는 설우진의 등 뒤로 평범한 인상의 사 내가 따라붙었다.


“이놈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지?” 

수풀로 우거진 산속, 설우진의 뒤 를 쫓던 중년 사내가 당황한 얼굴로 이리저리 사위를 살폈다.

그의 이름은 마석진. 군사부 산하 의 흑영전에 속해 있는 자로 무공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타의 추종 을 불허하는 추종술로 마천 내에서 큰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는 황유하가 얼굴을 바꾸고 밖으 로 나섰음에도 단번에 정체를 알아챘다.

그 비결은 코에 있었다. 그는 후각 을 극대화하는 마공을 익혔다. 그 경지가 어느 정도냐면 옷가지에 남 은 채취만을 가지고 그 주인을 단번 에 찾을 정도였다.

‘어디서 알량한 은잠술이라도 배운 모양인데 그래도 내 코를 벗어날 순 없어.’

마석진은 시야에서 사라진 설우진 을 찾기 위해 견후마공을 구사했다. 주변의 수십 수백 가지의 향들이

한꺼번에 콧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는 그 향들 중에서 설우진의 것을 정확히 짚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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