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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63화


일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왕비는 그 날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 전날 정오부터라고 해야겠군요. 그 전날 정오에 왕비는 고심 끝에 ‘내일 아침’이라고 결정을 내렸거든요.

그 전날 정오부터 그날 아침까지 일어난 일은 모두 왕비의 계획대로였습니다. 전체의 구도와 세부의 묘사를 완벽히 조화시킨 거장의 필치였다고 할 까요. 작품은 거의 완성 단계였습니다. 왕비의 마무리 계획은 화가를 순식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었어요. 예. 왕비는 그날 아침 자신의 정체를 폭로할 작정이었습니다. 이미 임신이 확실할 만큼의 접촉이 있었죠. 하룻밤을 더 예언자와 보낸 건, 확률을 더 높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 아서였기도 하고, 그게 더 상징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죠. 화가는 어젯밤까지의 여인인 것이죠.

그런데 그날 아침 뭔가가 바뀌었습니다. 예정에 없는 일이 일어났죠. 그때까지 예언자는 미래를 누구와도 나누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 만 더 이상은 그렇지 않았어요. 그날 아침 눈을 뜰 때부터 왕비는 그걸 깨닫고 있었습니다. 산과 숲을 홀로 가로지른 시냇물들이 모여 강물이 될 때는 멀리서부터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법이죠. 왕비는 물이 합쳐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왕비는 화가 치밀었고 난처했습니다. 그때 예언자의 손가락이 그녀의 등에 닿았죠.

그녀가 처음 받은 구혼이었죠. 사랑하는 왕과 결혼할 때요? 아, 문서로 처리되었죠.

구혼에는 여러 의미가 있지만 자신이 구혼 받을 만한 사람임을 자각시켜주는 의미도 있어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보내는 완전한 인정이라고 할 까요. 이 어두운 황야를 헤매는 당신 앞에 갑자기 떨어져 당신을 드러내는 벼락 한 줄기지요.

왕비는 웃으며 분노했습니다. 화가를 없애버릴 생각이었는데 그 순간 화가는 예언자와 결합하면서 오히려 자신으로 탄생하고 있었습니다. 화가가 나타나면 왕비는 사라져야 하죠. 몸은 하나니까요. 왕비는 화가를 없앨 수 없었습니다.

그날 늦은 오후 예언자의 사고 소식이 그녀에게 전해졌지요. 왕비는 감히 예언자에게 바로 찾아갈 수 없었어요. 두려움에 빠진 예언자는 화가를 불 러낼 테고, 그럼 화가가 나타날지도 몰라요. 왕비는 그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죠. 몇 시간에 걸쳐 화가를 윽박지른 후에야 왕비는 집을 나섰죠. 그곳에서 왕비는 예언자의 집을 나서는 여자를 보았습니다.

그 여자는 결의에 차 있었고 세상의 무엇과도 싸울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구라도 그녀를 적으로 돌렸다간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고통과 분노는 예술의 부모잖아요. 왕비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 후로 계절의 원무가 한 주기를 끝낸 지금, 왕자를 돌보기 위해 온 임시 시녀의 목 위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왕비는 놀랐다는 말도 부족할 만큼 놀랐지요. 그리고 의자에 앉은 채 서로를 마주보게 되자 왕비는 새로운 놀라움을 느꼈어요.

그녀는 유피넬과 헬카네스와 싸우자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대신 ‘언제?’라고 물을 것 같은 일 년 전의 그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대담하게도 궁성에 침입한 것을 보니 그녀는 여전히 투사였지요. 하지만 투사는 투사이되 노병처럼 보였습니다. 걸어온 싸움은 언제든 받아줄 테고 그 싸움에 자 기 자신을 전부 던질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싸움에 만족이나 즐거움, 의의 같은 것을 찾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험한 꼴을 너무도 많이 봤기 때문 ofl.

그 여자가 말했습니다.

“전하. 솔베스에 계셨어요?”

“내 질문에 답하지 않았소.”

왕지네는 대답을 궁리했습니다.

“작년에 그 사람이 전하의 별장을 빠져나갈 때 말이에요. 구출하러 온 사람이 둘이라고 목격자들이 말하지 않던가요?”

“당신 엘프 이루릴과 아는 사이요?”

왕지네는 안도했습니다. 도박이었지만 이루릴과 친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은 좋은 결정이었죠. 왕비의 눈에 경계심이 떠올랐습니다. 대등한, 최 소한 비슷한 수준에서 이야기할 상대가 된 것이었죠.

“당신 이루릴을 위해 일하는 거요? 솔베스와 이곳에 나타난 건 예언자를 감시하기 위해서였소?”

왕지네는 여러 가지 단어는 될 수 있지만 문장은 되기 어려운 정도의 침묵을 말한 다음 말했어요.

“어떻게 전하께서는 솔베스에서 저를 보신 거죠?”

왕비는 지친 표정으로 왕지네를 응시했습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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