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69화
시에프리너는 정신 착란을 일으킨 듯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왕비가 그림자 지우개를 가지고 오는 거야! 춤추는 성좌를 지우고, 추락하지 않는 드래곤을 지우고, 곧 태어날 내 자식을 영원히 태어나지 않게 할 “거야!”
이루릴은 그것이 마법에 의한 원거리 대화라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시에프리너의 기세로 보건대 눈에 보이는 건 무엇이든 물어뜯을 것 같았거든요. “시에프리너. 드래곤 레이디에게 했던 말을 당신에게도 할게요. 프로타이스가 그림자 지우개를 가져오라고 당당하게 말했던 것을 기억해 봐요. 어 쩌면 그에겐 그림자 지우개를 상대할 수단이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프로타이스가아아아?”
시에프리너는 곧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정신이 어떻게 된 것은 아니지만 마법을 원활하게 쓸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 요. 연결은 끊어졌습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솔베스의 언덕에 혼자 남게 된 이루릴은 시에프리너가 남겨놓은 그 엄청난 불신감에 어깨를 움츠렸습니다. 그런 불신감은 이 루릴에게도 있었지요. 분명 프로타이스에 대한 이루릴의 감정은 ‘그럴 것이다.’보다는 ‘그러기를 바란다.’에 훨씬 가까웠습니다. 희망을 걸 만한 것이 프로타이스뿐이라는 것은 그녀에게도 유감스러웠습니다.
걸음을 뗀 이루릴은 갑자기 숨도 쉬기 어려울 만큼의 피로감을 느꼈습니다.
역사책의 첫 열 페이지 안에 나올 만한 과거의 어느 때, 엘프들이 이 세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던 일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 적으로 그들은 그 계획을 포기했으니까요. 이 세계에 남는 대신 엘프들은 이 세계가 보다 견딜 만한 것이 될 때까지 웅크리고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거기서 이루릴의 흥미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루릴은 과거 엘프들이 이 세계를 떠날 방도를 찾아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녀는 동족들의 그 탈주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의했다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세계를 돌아다니던 이루릴은 그 어떤 엘프보다 강력하게 이 세계와 얽히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고대의 영웅들과 함께 전설적인 사건들을 경험했고 드래곤과 마법사들의 비밀스러운 조력자, 혹은 적대자가 되었으며 간섭보다는 참여의 방 식으로 역사의 흐름에 개입했습니다. 결국 이 세계를 떠날 방법을 찾아다니던 엘프는 이 세계와 가장 밀접한 엘프가 되고 말았지요.
그런 본말전도가 이루릴을 괴롭히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엘프들은 이 세계에 남기로 결정했으니까요. 하지만 은거하기로 결정한 엘프들에겐 세계의 변화를 관찰하고 다시 엘프들이 세상에 나가도 되는지 결정할 노련한 관찰자가 필요했습니다. 누구에게 그 일을 맡겨야 할까요? 물론 이루릴이었지 요. 이루릴은 그 타당한 결정을 받아들이고 은거한 동족들에게 돌아가는 대신 다시 세상을 방랑하기 시작했습니다.
긴 세월이 흘렀고, 이제 이루릴에게 엘프는 드래곤이나 인간, 오크 등과 똑같은 하나의 종족이 되었습니다. 한때 자신과 그들이 같았다는 것을 머리 로는 알지만 가슴으로는 느끼기 어려워진 거죠. 그녀를 보며 끈 떨어진 연을 떠올린다면 당신은 아마 소속감과 자의식을 자주 혼동하는 사람일 테고 애국심이 지고의 덕목이라 믿는 사람이겠죠. 이루릴은 모든 종족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라 모든 종족을 똑같이 볼 수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그것은 참 피로한 일이지요. 어렵게 잉태된 후손을 지키고 싶어하는 드래곤과 자기 나라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바이서 스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곤혹스러움 같은 것은 그녀에겐 낯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명백히 이루릴은 바이서스가 파멸해도 좋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로타이스와 시에프리너, 그리고 시에프리너의 자식이 대신 죽어야 한 다는 논리에 찬성하기도 어려웠죠.
‘어느 쪽을……??
갑작스럽게 떠올린 말에 이루릴은 흠칫했습니다.
평범하다 못해 무미건조하기까지 한 그 말이 격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이유를 고민하던 이루릴은 잠시 후 자신이 예언자의 말을 인용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걸 인용이라고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그 말을 인용했는지는 말할 수 없었지만 말이에요.
혼란에 빠져 빗속을 걷던 이루릴은 폭음을 듣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이루릴은 놀라는 대신 찰박거리며 언덕 사면을 뛰어올라갔습니다. 정상에 선 이루릴은 언덕 뒤편의 평원에서 거대한 드래곤이 빗속에 서 있는 것을 보았어요. 빛이 거의 없는 밤하늘에서도 영광스럽게 불타오르는 보석들은 빗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습니다. 들판에 서 있는 것은 도저히 혼동할 수 없는 드래곤, 프로타이스였습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거기까지 온 이루릴은, 그래서 당장 뒤로 돌아 도망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