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그림자 자국 – 83화


왕비는 캇셀프라임을 경멸 어린 눈으로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내렸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드래곤을 불러낸 시에프리너의 심리가 손에 잡힐 듯합니다. 시에프리너는 현대의 젊은 드래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죠. ‘옛 드래곤이라면 그렇게 도망치지 않았을 거야, 이 겁쟁이들아!’

왕비가 생각하기엔 옛 드래곤이라 해서 별로 다를 것 같진 않았어요. 드래곤은 다른 드래곤을 위해 목숨을 거는 생물이 아니지요. 자기를 위해 다른 드래곤의 목숨을 거는 것은 즐기겠지만. 그 옛날 캇셀프라임을 살해한 것도 인간이나 다른 종족이 아니라 같은 드래곤인 아무르타트였지요. 자신을 돕지 않는 다른 드래곤에 실망한 나머지 옛 드래곤들의 환영을 불러낸 시에프리너의 모습에는 드래곤이 드래곤이기에 가지는 최소한의 위엄도 보이 지 않았어요.

‘그런데 시에프리너가 어떻게 그덴산의 거인이나 길시언 왕자를 알고 있는 거지?”

왕비는 다시 환영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시에프리너가 자기 위안을 위해 아무르타트나 캇셀프라임을 만들어낸 것은 이해할 수 있지요. 전설적인 영 웅을 불러낸 셈이니까요. 하지만 시에프리너가 아무리 비참한 상태라 하더라도 고대의 거인이나 고대의 인간 왕자를 불러냈다는 것은 좀 이상했어요.

왕비의 입이 조금 벌어졌습니다.

‘시에프리너가 아니라 이루릴 세레니얼이군!’

그 엘프가 분명했지요. 왕비는 엘프에겐 마법과 다른 신기한 기술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그곳에 그 많은 마법 방어 도구들이 있는데도 환영 이 제멋대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마법이 아니기 때문이었어요.

왕비는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루트에리노 대왕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환영들을 통해 추측해 볼 때 그 엘프의 나이는 바이서스의 역사에 버금가 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녀에겐 마법 방어 도구로도 막을 수 없는 신비한 기술이 있었지요. 장구한 연륜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술은 공포의 조합으 로 최적이라 할 수 있지요. 게다가 그녀는 바이서스에 대해 적대적으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경고인지도 모르지요. 시에프리너에게 더 접근하면 직접적인 물리력을 행사하겠다는.

왕비는 이루릴을 반드시 없애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지금까지 비슷한 결심을 했던 다른 이들과 달리 왕비에겐 그림자 지우개가 있었어요. 이루릴 이 어떤 가공할 세력과 친분을 맺고 있든 그림자 지우개 앞에서는 문제될 것이 없었어요. ‘원래부터 없었던 엘프가 될 테니까요. 복수가 없죠. 왕비 는 난폭한 웃음을 터뜨리고 싶었습니다. 이 환영들도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될 거예요. 경고도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되겠지요.

왕비는 환영을 향해 그림자 지우개를 내밀면서 웃었습니다.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왕비는 그림자 지우개를 내밀었습니다…………

아무 변화도……………

왕비는……………

“왕비!”

흙과 돌이 튀기는 소리와 함께 왕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왕비는 깜짝 놀라서 뒤로 돌아섰어요. 왕이 오고 있었어요. 퍼시발이 언덕을 맹렬하게 치달아오르고 있었지요. 그 뒤로는 근위병들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왕비는 기쁨과 약간의 수줍음, 그리고 사랑을 느끼며 왕을 마주보았어요. 왕비 앞 에 도착한 왕은 퍼시발을 비스듬히 세워두고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산책은 잘 하셨습니까?”

“심려를 끼쳐드렸나 보군요.”

“이곳은 바이서스 임펠이 아닙니다. 나를 따라 이곳까지 와준 것에 대해서는 어떤 말로도 모자랄 고마움을 느끼고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혹 왕비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는 견딜 수 없을 겁니다.”

왕비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습니다. 왕은 자신이 호들갑을 떨었다고 느끼고는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어요.

“하긴 왕비도 많이 답답했을 테죠. 어울릴 만한 귀부인도 없고 왕비의 여흥이 될 만한 것도 없는 딱딱한 전장이니. 내가 미리 살피지 못해 미안합니 다.”

왕비는 가슴이 벅차는 느낌과 함께 자책감을 느꼈습니다. 괜한 일을 한 것이 분명했어요. 이곳은 전장입니다. 왕이 장군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다고 해서 마음대로 산책을 나와버리는 건 어딜 봐도 어리광이었어요. 왕비는 자기 마음속에 ‘내가 밖으로 나가면 왕이 나를 따라오는지 보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절로 얼굴이 붉어질 일이었어요.

왕은 퍼시발을 근위병에게 넘기더니 유모차에서 왕자를 안아 올렸습니다. “그럼 돌아갈까요?”

왕비는 뿌듯함으로 눈을 빛내며 대답했습니다.

“예. 전하.”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