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97화
왕지네는 기겁했고, 그 다음에 눈을 비비며 소총을 끌어당겼고, 그 후에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때문에 정신이 없었죠. 왕지네는 자신이 어디 있는 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어두워서 보이는 것도 없었지요. 정신없이 고개를 돌리던 왕지네는 이루릴의 모습을 지나쳤다가 다시 그녀에 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이루릴은 똑바로 서서 두 손을 가슴 앞에 펼친 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서서 책을 보는 모습과 같았지요. 하지만 그녀의 손엔 책 대신 빛이 일렁 거리고 있었어요. 왕지네가 이루릴을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빛 덕분이었지요.
멍하니 엘프를 보던 왕지네는 갑자기 기억을 떠올렸습니다. 그녀의 몸이 기억을 하고 있었어요. 큰 충격, 지진이 난 것이 아닌가 싶은 충격이 있었지 요. 그녀가 선잠에서 깬 것은 그 때문이었어요. 왕지네는 불안함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대답을 구하듯 이루릴을 다시 보았습니다. 이루릴은 여전히 꿈 쩍도 하지 않은 채 두 손바닥에 담은 빛을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이루릴? 무슨 일이야?”
“어떻게……”
이루릴의 대답은 그것뿐이었지요. 왕지네는 그녀의 팔이라도 비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이루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왕지네는 일단 자리에 서 일어나기로 했지요. 그때 이루릴이 다시 말했습니다.
“……이해하려 하는 걸까, 나는.”
긴 휴지 때문에 두 문장처럼 여겨졌지만 이루릴이 말한 것은 한 문장이었습니다. 왕지네는 그 문장을 머릿속에 재구성해 보고는 이유 모를 격한 슬 픔을 느꼈어요. 그녀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루릴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말했어요. “욕해.”
이루릴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왕지네는 어둠 속에서 그녀를 힘껏 끌어안으며 외쳤어요.
“귓구멍에 철조망 친 것들, 눈동자가 뒤통수 쪽으로 돌아간 것들, 혓바닥으로 맷돌질 하는 것들, 다 꺼져버려!”
이루릴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녀는 왕지네의 어깨를 잡고 살짝 밀었어요. 다시 손바닥에 빛을 떠오르게 한 이루릴은 그것을 위로 톡 쳐올렸습니 다. 빛은 그녀들의 머리 위로 떠올라 연기처럼 퍼졌지만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아요. 나는 실감하기 어렵지만 어쩌면 그건 고결한 것일지도 모르지요. 왕에 대한 충성, 국가에 대한 사랑. 그것도 중요 하고 가치 있는 것이겠지요? 그것이 그들의 선택이라면 존중해야겠지요…………. 명쾌한 기분이 들어야 할 텐데, 내 말이 늪이 되어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군요.”
이루릴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왕지네는 잠자코 들었어요. 지금 필요한 건 그것 같았거든요.
“바이서스 병사들이 하늘을 나는 기계에 폭약을 싣고 직접 조종하여 펫시에게 충돌했어요. 펫시의 입장에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공격이었기에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당한 후 추락했어요. 그 추락의 여파로 시에프리너의 레어를 막고 있던 바위들이 무너졌어요.”
너무도 충격적인 이야기가 연달아 나왔기에 왕지네는 아연실색했죠. 하지만 이루릴은 그녀가 차분하게 질문했다는 듯이 대답했어요.
“펫시는 그 바위들에 깔려 있어요. 상처가 커요.”
“드래곤 레이디가 죽는 거야?”
“모르겠어요.”
이루릴은 당장 녹아내리거나 공중으로 흩어져버릴 것처럼 보였어요. 그녀는 고개를 돌려 코볼드 통로쪽을 살폈죠. 그들이 있는 곳은 코볼드 통로의 광산쪽 입구였어요. 왕비가 그림자 지우개를 가지고 그곳으로 올 것이 분명하다고 예상했기에 이루릴은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 왕 비나 그림자 지우개 같은 건 이루릴의 뇌리에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어요.
“나는 예언자가 아니에요. 펫시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