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자국 – 1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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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서스라는 그럭저럭 괜찮은 나라가 있습니다. 인접국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하지만 그건 어떤 나라도 해낸 적이 없는 일이니 그 때문에 바 이서스를 폄하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 바이서스의 수도 바이서스 임펠에 한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직업은 아내였고, 그 분야에서 나름대로 탄탄 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지요. 그녀는 남편을 사랑했고 남편 또한 그녀를 사랑했으니까요. 남편이 정말 희귀한 직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그들 의 애정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왕이었지요.
그녀는 지금 오른손으로 치마를 살짝 쥐어 올린 채 회랑을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왕비의 그런 체통 없는 행동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목격자들은 오히려 흡족한 미소를 보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전쟁을 끝내고 왕 이 돌아오고 있었거든요. 궁성 내부의 사람들은 왕비가 실내에서 말을 달렸다 해도 이해했을 겁니다.
드래곤 레이디가 바이서스와 발탄의 계속된 불평에 마침내 백기를 들고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한 것은 오래 전의 일이었습니다. 사실 법적으 로, 그리고 전통적으로 드래곤 레이디에게는 그 땅에 대한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소유권을 포기한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지요. 드래곤 레이디 스스로 가 말했듯이 그녀는 카르 엔 드래고니안의 주인일뿐이니까요. 드래곤 레이디가 그 땅을 가진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권위 때문이었습 니다.
자신의 영토를 바라게 된 젊은 드래곤이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 소망을 달성하려면 누구를 찾아야겠습니까? 당연히 드래곤 레이디였지요. 드래곤 레 이디는 그런 ‘젊은이’가 나타날 경우를 대비하여 그 땅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런 땅을 줄 수 없다면 젊은이는 상대하기 벅찬 다른 드래곤 대신 인간을 공격해서 땅을 뺏으려 할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인간들도 드래곤 레이디의 보유를 묵시적으로 인정했지요.
하지만 최근 영토를 요구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젊은 드래곤 티할라카드가 자신은 바다를 좋아한다면서—틀림없이 다른 드래곤들과 부대끼기 싫 다는 것이 본심이었을 겁니다.─육지에서 까마득하게 떨어진 무인도를 자신의 영토로 삼게 되자 드래곤 레이디도 당분간은 그 땅을 바랄 드래곤이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드래곤들의 고립주의는 갈수록 심해졌고 이제 대륙 한가운데 있는 멋진 땅은 바로 대륙 한가운데 있다는 이유로 기피대상이었지요. 드래곤 레이디는 차가운 어조로 바이서스나 발탄이 원한다면 그 땅의 소유권을 그들끼리 확정하라고, 자 신은 거기에 아무 관여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바이서스와 발탄은 유서 깊은 전통에 따라 누가 상대방에게 더 많은 납을 제공할 수 있는지로 소유권을 결정하기로 했습니다.
영웅적인 사건들도 많았고 비열한 사건들도 많았던 전쟁은 왕의 친정까지 감행한 바이서스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그 땅에는 틀림없이 왕의 이름이 붙게 되겠지요. 냉소적인 이들은 친정의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지요. 후대에 남길 만한 업적이 별로 없는 왕이 그 명명권을 노리고 뒤늦게 참전한 거 라고. 하지만 왕비는 그런 말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어요. 그런 이유라면 왕이 자신의 곁을 떠난 것을, 그것도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간 것을 용서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녀는 왕이 나라를 위해 용단을 내린 거라고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왕비는 베란다에 도착했습니다. 공식 행사를 준비하려면 그곳에 있어선 안 되었지만 왕비는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녀는 다가오는 왕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그 순간 왕비는 꽤 격이 높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정의할 수 있었거든요. 그녀는 왕을 사랑하는 여자입니다. 그녀 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녀의 존재 전체가 왕에 대한 희구이며 열망이며 사랑이었습니다.
나팔 소리와 함께 왕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멀어서 아직 희미한 그림자 비슷하게 보였지만 상관없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이 왕이라는 것을 아니까 요. 왕비는 그대로 베란다에서 뛰어나가고 싶었어요. 그래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바람을 타고 둥실둥실 왕에게 날아갈 수 있을 거라는 무 서울 정도로 명확한 확신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왕비는 울음을 터뜨렸어요. 감수성 예민한 소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