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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 자국 – 112화


빛도 소리도 없는 공간 속에서 예언자는 충동과 싸웠습니다.

밀폐된 독방 속의 공기는 그의 체온으로 데워져 미지근했고 돌바닥과 벽은 그의 몸에서 배어나온 땀과 피와 기름기로 끈끈했습니다. 하지만 예언자 는 이제 그런 것들에 신경 쓰지 않은 지 오래였습니다. 그에겐 기다림과, 그것에 부수되는 시간에 대한 저주밖에 없었습니다.

예언자는 거기 더 있을 수 없었습니다. ‘더’라는 것이 어떤 기간인지에 무관하게. 힘껏 억눌렀던 충동이 반발했어요. 예언자는 그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그들이 왔을 때 할 말을 되뇌어보았습니다.

“전쟁 말씀이죠? 그걸 하고 싶으신 거죠? 마음대로 하세요. 승패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바이서스는 패배할 겁니다. 백 년 동안 싸워도 그게 고작입니 다. 그게 알고 싶으셨지요? 이제 내보내주세요!”

이전의 네 번─세 번? 다섯 번?과는 다른 대답이었지요. 그런 대답을 들으면 그들은 예언자를 내보내줘야 합니다. 그들은 전쟁의 결과를 알고 싶 어 했으니까요. 패배도 전쟁의 결과지요. 예언자는 주정뱅이의 토사물이 반짝거리는 골목을 걷고 싶었습니다. 눈만 마주치면 달리던 자세 그대로 멈 춰버리는 고양이와, 그보다는 훨씬 귀족적인 자세로 하수구에서 머리를 내미는 시궁쥐를 보고 싶었습니다. 담벼락엔 문학의 정수를 담뿍 담은 아포 리즘이 가득할 테고 공중에서 나풀거리는 창녀들의 이불에선 음모가 바람에 파르르 떨리겠지요. 그곳은 성소, 춤판, ‘나’의 매점매석이 이루어지는 시장입니다. 마지막의 것은 물론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지요. 하지만 독방엔 그런 가능성도 없습니다. 가능한 것은 ‘나’의 투매뿐이지요. 예언 자는 그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알려주고 저 모든 것을 얻을 겁니다.

나를 가져가. 예언 따위 못하겠다는 멍청한 나를 가져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습니다.

예언자는 흐느끼며 일어났어요. 빛이 있었다면 그의 모습은 경멸감과 절망으로 가득 찬 눈으로 아편 파이프를 향해 뻗어가는 자신의 손을 보는 마약 쟁이처럼 보였을 겁니다. 오직 자극 하나만을 바라며 예언자는 달렸습니다. 이제 곧 벽이 그를 바닥에 메다꽂으며 열락과도 같은 통증을…

예언자는 빛 속에 떨어졌습니다.

눈을 찌르는 빛에 예언자는 몸부림쳤습니다. 책을 읽기도 힘든 미명이었지만 예언자에겐 태양을 직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지요. 괴로워하던 예언자 는 한참 후에야 눈을 제대로 뜨고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살필 수 있었습니다.

그는 ‘바깥’에 있었습니다. 믿기 어렵게도 말입니다. 예언자는 얼빠진 표정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발광할 것 같은 분노를 느꼈습니다. 독방 문의 빗장 이 열려 있었어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요? 언제부터 그는 잠기지도 않은 독방 안에 갇혀 있었던 걸까요? 예언자는 눈에 보이는 첫 번째 생 물을 죽이겠다는 약속을 한 옛이야기의 주인공처럼 험악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습니다.

분노가 순식간에 공포로 바뀌었어요. 예언자가 있는 복도엔 시신들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예언자는 다급하게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없었지요. 발을 헛디딘 예언자는 반쯤 썩은 시체의 얼굴에 정면으로 박치기를 했습니다. 탄력 없이 물컹거리는 시신의 느낌이 그를 몸서리치게 했지요. 예언자는 현기증을 무시하며 일어났습니다. 그러곤 벽을 짚으며 반쯤은 쓰러지고 반쯤은 걷는 동작으로 허우적허우적 방향도 모른 채 걸어갔습니다. 수십 년이 흘렀어요. 예언자는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넓은 공간에 도달했습니다. 그곳엔 시체가 별로 없어서 쓰러지기 좋았어요.

예언자는 바닥에 뺨을 댄 채 헐떡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누리고 있던 그 잠깐의 평안은 실로 불쾌한 소음 때문에 깨지고 말았습니다. 살이 으깨지고 뼈가 부러지는 그런 소리였지요. 예언자는 바닥에 팔꿈치를 짚고 머리를 들었습니다.

드래곤이 있었습니다.

예언자가 있는 곳은 무너진 건물의 홀이었습니다. 천장이나 지붕은 아예 없었고 반파된 벽은 시커멓게 그을린 채 증오받던 거인의 묘비처럼 서 있었 습니다. 바닥엔 쓰러진 기둥들과 무너진 벽돌들이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함께 쌓여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드래곤이 있었습니다.

초록빛의 드래곤은 예언자에게 등을 보인 채 앉아 있었습니다. 워낙 거대한 체구 때문에 예언자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 뒷다리 정도였어요. 하지 만 예언자는 머리를 숙이고 있는 그 드래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드래곤이 그를 돌아보았을 때 그 이빨 사이에 끼여 있는 인간의 상체를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드래곤은 먹던 것을 마저 삼키고는 ‘자, 어떻게 할까.’ 하듯이 예언자를 쳐다보았습니다. 배가 부른 상태에서 선원용 비스킷을 쳐다보는 숙녀처럼 심 드렁했지요. 예언자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된 겁니까, 콰이드레드?”

콰이드레드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습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예언자를 마주보았습니다.

“바이서스도 지고 발탄도 졌군요. 드래곤 레이디가 다시 세계를 지배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실로 대단한 참을성이군요. 바이서스와 발탄이 그 땅 을 두고 백 년 동안 싸워서 양자 모두 약화되길 기다리다니. 드래곤 레이디께서는 백 년 전부터 그럴 계획이었습니까?”

콰이드레드가 입을 열었습니다. 말가루가 투두둑 떨어질 것 같은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요.

“백 년의 기회가 주어졌다고, 너희들은 그걸 시원하게 낭비했다고 말할 순 없을까?”

“유죄를 인정합니다.”

“최근 상황을 모르는 것 같군. 어디 갇혀 있었나?”

“예. 그들은 전쟁의 승패를 알기 위해 저를 독방에 가둬두고 고문했습니다. 저는 예언자거든요. 조금 전에 독방 문이 열려서………

“아, 그래. 자네 이야기를 들어봤어. 드래곤 레이디께서 자네 때문에 염려하셨지. 자네가 드래곤의 공격을 예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셨거든. 자네 가 독방에 갇혔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후에야 드래곤 레이디는 인간과의 전쟁 개시를 결정하셨어. 자네가 여기 있었던 것이군.”

예언자는 웃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웃음 대신 격렬한 기침이 나왔습니다. 콰이드레드가 설명했습니다.

“안됐지만 자넨 중독되었어. 저 아래까지 내려가기 싫어서 독가스를 불어넣었거든. 두꺼운 독방 문이 가스를 좀 막아줬던 모양이야. 그걸 여는 바람 에 자네는 중독되었고. 자넨 곧 죽을 거야.”

예언자는 궁금했습니다. 빗장을 연 자는 예언자가 갇혀서 굶어 죽을까 걱정한 것일까요, 아니면 예언자도 중독되어 죽기를 바란 걸까요? 별로 중요 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예언자는 신경이 쓰였습니다. 하지만 더 생각할 수 없었어요. 콰이드레드가 그를 향해 똑바로 앉더니 엄숙하게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거든요.

예언자는 눈을 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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