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5화 : 그루시아 후작의 욕심 – 2
그루시아 후작의 욕심 – 2
수석 마법사는 단장과 부단장이 탁자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뭔가 숙덕거리고 있던 걸 보고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혹시 회의 중이셨습니까?”
돌아 나가려는 수석 마법사를 그루시아 후작은 제지했다.
“아닐세. 이미 얘기 다 끝났으니 그럴 필요 없네. 이리 와서 앉게나.”
수석 마법사는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으며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재미있는 정보가 한 가지 입수되어서 말입니다. 언데드 떼들이 지하에 매복해 있는 게 토벌의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그중 한 명이 쓸 만한 인재를 추천해 주더군요. 대지마법에 특화된 인물이라면서 말입니다.”
마법에 대한 소양이 별로 없는 그루시아 후작이었지만, 추천받은 인재가 대지마법에 특화되어 있다는 말에 지하에 숨어있는 언데드들을 탐색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루시아 후작은 환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지만, 곧 뭘 생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인재라면 자네 직권으로 당장 차출하도록 하게. 아니, 자네가 굳이 내게 보고한 걸 보면, 혹시 그가 차출하기 어려운 곳에 소속되어 있는 “건가?”
말이 잘 통하는 후작에게 수석 마법사는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 어지간한 곳이라면 제 친구들의 인맥을 동원할 수 있습니다만, 그가 용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게 문제라서 말이죠.”
“용병단?”
순간 그루시아 후작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력 있는 마법사가 왜 용병단에 있는 거지?”
제국 내에서 실력 있는 마법사는 거의 다 국가 기관에 소속되어 있었고, 용병단까지 흘러 들어간 마법사라면 그 수준이 통신용으로 밖에 못 쓸 정도의 수준이라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 그루시아 후작의 의문을 이해하겠다는 듯 수석 마법사 역시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뭐, 저희가 알지 못할 뭔가 이유가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언데드를 탐지하여 퇴치할 때까지만 잠시 쓰고 돌려보내면 되니까요.”
과거가 의심스러운 마법사를 작전에 합류시켜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상황이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만큼 녹록하지가 않았다.
“흠, 실력은 확실하겠지?”
“지인의 말로는 대지마법을 활용한 고블린 사냥에 있어서는 최고 실력자랍니다.”
고블린이라는 말에 그루시아 후작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바뀌었다. 그에게 있어서 고블린은 정말 하찮은 존재였으니까.
후작의 표정을 보고 수석 마법사는 그 마음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단장님께서 왜 그런 반응을 보이시는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사실 고블린은 하급병사라도 간단히 해치울 수 있을 정도로 나약한 몬스터니까요. 하지만 그건 땅 위에서 정면대결을 할 때의 얘기고, 숨어있는 것들을 잡을 때는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지요. 자신이 나약하다는 걸 잘 아는 고블린들은 절대 정면대결을 하지 않습니다.”
수석 마법사는 군집을 이룬 고블린 사냥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개별 전투력은 형편없지만 지하 깊숙이 숨어있는 놈들을 박멸할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게 최대 난제였다. 게다가 보수는 형편없고, 박멸할 때까지 개고생을 해야 하니 용병들에게 있어 절대 맡지 말아야 할 의뢰 중 하나가 고블린 토벌이었다.
“흐음……. 그렇군. 그런 애로사항이 있는 줄은 몰랐구먼.”
“예. 그렇다 보니 아무도 고블린 사냥을 하려고 하지를 않아 용병 길드에서는 각 용병단에 고블린 토벌을 강제로 할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최근 페가수스 용병단에서 고블린 토벌에 묶여있던 부대들이 급작스레 임무를 완수하고 다른 곳으로 재배치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합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용병 길드에서 은밀히 조사를 한 결과 그 인물이 튀어나온 거지요. 지인의 말로는 대지마법에 있어서만큼은 아마 그자가 제국 내에서도 최고의 실력이 아닐까 판단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흠, 기사단에 소속된 마법사들 중에는 대지 마법에 능통한 마법사는 없다는 건가?”
“예, 대지 마법은 주류도 아닌 데다 써먹을 데가 그다지 없는지라 익히고 있는 마법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이런 특별한 경우나 되니까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거죠.”
그루시아 후작은 그제야 이해할 수 있다는 듯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수석 마법사는 멋쩍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자를 데려오려면 단장님께서 힘을 좀 써주셔야겠습니다.”
수석 마법사의 말에 후작은 난처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지만 용병단 쪽에 아는 인맥이라고는 나도 전혀 없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보니, 페가수스 용병단의 일부가 이곳 링카 영지에 고용되어 활동하고 있고, 그 안에 그 마법사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까요.”
수석 마법사의 말에 그루시아 후작은 반색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야 별것도 아니지. 변경백에게 요청을 하면 되겠군.”
부단장인 케니스 럴컨 백작이 슬쩍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두 시간 후에 고위급 작전 회의가 있을 예정인데 그때 요청하면 될 듯합니다.”
그루시아 후작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이제야 뭔가 꼬였던 게 하나씩 풀릴 기분이 드는군.”
후작의 기분이 좋아 보이자 수석 마법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입을 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콘도르 기사단의 라이가 가지고 있는 타이탄에 대한 건입니다.”
죽은 줄 알았던 라이가 사막에서 뜬금없이 타이탄 1기를 주워 왔다는 건 여기 있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적의 장비를 노획했을 때, 그 소유권은 노획한 병사에게 있다는 게 오랜 세월 내려온 군부의 관례다.
하지만 검이나 갑주 같은 거라면 몰라도 타이탄은 그 가치가 너무 엄청났다. 황금 몇 톤에 해당하는 가치를 지닌 엄청난 장비를 아무리 관례라 하지만 노획해 온 병사가 그냥 가지도록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루시아 후작의 입김으로 타이탄의 회수 여부는 모호한 상태로 그냥 놔두기로 내부 정리가 이미 끝난 뒤였다.
타이탄의 가치를 생각하면 군부에서 바로 수거하는 게 맞지만, 혹시라도 그로 인해 라이의 마음이 바뀔까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라이에게서 검법을 뽑아내는 작업이 완료되지 못한 만큼, 그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최대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기사단 전력에 보탬이 될 정도로 성능이 좋은 타이탄도 아닌 만큼, 나중에 검법을 다 뽑아낸 후에 회수해도 충분했다.
그만큼 라이가 가진 검법의 가치가 엄청난 것이라고 그루시아 후작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라이의 이름이 수석 마법사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그루시아 후작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건은 이미 결론을 내렸을 텐데?”
“예, 그랬었지요. 하지만 제 친구인 마르코가 라이의 타이탄에 흥미를 보여서 말입니다.”
“마르코?”
고개를 갸웃하는 그루시아 후작에게 수석 마법사는 마르코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를 설명한 후, 라이의 타이탄을 준다면 그 대신 카르마2
1기를 보답으로 줄 용의가 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수석 마법사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은 어이가 없었다.
타이탄의 가치는 둘째 치고, 카르마라면 최근 교체되고 있는 최신형 타이탄이었기 때문이다.
후작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라,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카르마2를? 그게 사실인가?”
수석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과 지위에 있는 사람입니다.”
“허어…….”
카르마2급 1기를 더 받을 수 있다면 기사단에 엄청난 전력이 증가될 것이다. 그루시아 후작으로서는 굉장히 귀가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눈치 빠른 부단장이 급히 입바른 소리를 했다.
“그러다 자칫 라이가 불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부단장의 조언에도 그루시아 후작의 불타오르는 욕심을 바로 잡을 수 없었다.
그만큼 최신형 카르마2급 타이탄이 가지는 가치가 엄청났으니까.
“그까짓 녀석이 불만을 가져봐야 뭐 어쩔 것인가? 라이놀이 지금까지 보고했던 내용대로라면 기사단에서 현재 해주는 대우에 꽤나 만족해하고 있다지 않나. 사실 적국의 타이탄을 노획했다고 해서 그냥 놔두는 게 말이 안 되지. 아직 어린놈이니 적당한 걸로 보상해 주고 잘 달래도록 해보게.” 라이가 이번에 노획한 장비들 중에서 가장 가치가 높았던 신성도구 2점과 갑옷을 그런 명목으로 회수했다.
갑옷은 콘도르 기사단의 정식 지급품이 아니라는 명목으로 회수하고 대신 새로운 갑옷을 지급해 줬고, 신성도구는 어차피 쓸 수도 없을 테니 적당한 검 한 자루와 바꿔줬다.
라이로서는 엄청 억울할 수밖에 없는 조치였음에도 희희낙락 기뻐했다고 한다. 덕분에 아직 어리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이라고 후작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루시아 후작은 이번 타이탄 건도 그렇게 잘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어설픈 노획물과 타이탄은 그 가치가 다릅니다. 더군다나 타이탄과 정신적인 감응까지 맺었다고 하니 회수한다고 하면 반발이 클 거라 사료됩니다.”
부단장이 계속 반대하자 후작은 인상을 찡그리며 살짝 언성을 높였다.
“나도 알아! 하지만 자네도 최신형 카르마2급 타이탄이 가지는 전략적 가치를 잘 알고 있지 않나?”
“물론 잘 알고 있죠. 그러지 마시고 검술에 대한 정리가 다 끝날 때까지 만이라도 회수하는 걸 유보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설득을 통해 회수하는 시간이 단축되면 더 좋구요.”
“그러다 그 마르코라는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어쩌려고 그러나 우리 기사단의 전력을 강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란 말일세.”
말을 마친 그루시아 후작은 더 이상 부단장과 얘기할 것도 없다는 듯 수석 마법사에게로 시선을 돌려 다급히 물었다.
“자네가 그랬지 않나? 라이가 획득한 타이탄이 엑스시온이 두 개 달린 점이 좀 특이하긴 하지만, 아직 제대로 완성된 타이탄은 아니라고 말이야.” 수석 마법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예, 마르코가 평하기를 양산품이라기보다는 실험작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그 방면의 손꼽히는 전문가의 의견인 만큼,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각하.”
“자네 친구가 흥미를 보이는 것도 그게 새로운 시도이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거래는 상대가 흥미를 가지고 있을 때 후딱 해치워야 하는 거야. 본전 생각이 나는 순간 거래는 끝이지. 안 그런가?”
그루시아 후작의 말에 부단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과연 라이가 수긍하고 받아들일까요?”
“그까짓 꼬맹이 하나 제대로 좌지우지 못 한다면 자네의 역량을 의심할 수밖에 없겠군. 정 걱정된다면 적군의 타이탄이니 만큼 또 다른 타이탄으로 바꿔준다고 하면 녀석도 수긍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 훈련용 타이탄 중에서 그럴듯하게 생긴 거 하나 알아보게.”
훈련용 타이탄 운운하는 걸 보면, 라이에게 그조차도 줄 생각이 없는 게 확실했다.
훈련용 타이탄인만큼, 언젠가는 돌려줘야 하는 것이다. 아마 라이로부터 검술을 모두 뽑아낸 후에는 그 타이탄도 회수할 생각인 것이리라.
부단장은 쓴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각하.”
그루시아 후작은 수석 마법사에게 말했다.
“자네 친구에게 물어보게. 언제까지 타이탄을 건네주면 될지 말이야. 그리고 대체품인 카르마는 언제 받을 수 있는지도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