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1화 : 비밀차원의 징조들
비밀차원의 징조들
카이로의 눈은 하늘을 담고 있었다. 생각나지 않는 무언가를 떠올리려 할 때 습관처럼 나타나는 행동이었다.
그의 눈은 뿌옇게 흐려져 있었고 과거라고 인식되어 있는 시간 가운데서 특정한 하나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몇 개가 연달아 흘러나오며 제자리를 잡더니 그럴 듯한 영상으로 관심을 끌어보려 애쓴다.
대부분 그럴 경우 기억의 편린들을 과장되거나 부풀려 있기 마련이었다. 특별히 부각시키려 하는 부분이나 애써 부인하고 싶은 기억들은 실제와는 달리 상당 부분 왜곡되어 있는 법이다. 새롭게 재편성되고 그럴 듯하게 연출된 그 장문을 대하고 카이로는 희미한 웃음을 입가에 만들며 흐뭇해했다.
그의 의식은 지금 놀라운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파천과 관련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 짓더니 후자의 기억들을 억눌러버린다.
지금 카이로가 떠올리며 집착을 보이는 것은 가장 최근의 시간대에 있었던 사건들이었다.
의식이라고 불릴 만한 것이 생겨난 것이 어떤 순간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긴긴 시간 동안 가장 강렬하게 자의식을 붙잡아놓고 있는 것은 의외로 가장 최근의 기억들뿐이었다.
평범하다 할 수 없는 인간세에서의 추억들은 때로 달콤하고 씁쓸하며 고통과 슬픔이 적당하게 뒤섞여 있었다.
“킥킥 … .”
카이로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범상치 않은 웃음소리를 흘려내자 그와 등을 마주하고 앉아 있던 페리칸이 의아한 듯 돌아본다. 이놈이 갑자기 실성했나? 그렇게 생각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도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기에 그 관심은 즉각 철회되고 자신만의 세계로 빠져 들어간다.
쿠사누스! 제왕의 대지를 다스리던 무력의 상징! 세계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악마처럼, 때론 신의 권능인 양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전설과 신화의 존재들.
그 중의 하나가 자신이란 사실은 당시의 기억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현재의 저에게는 그다지 실감이 가지 않는 먼 얘기처럼 느껴졌다.
현재 자신이 이곳에 온 것이 쿠사누스의 일원으로서 인지 아니면 단순히 파천을 따라온 것인지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어느 쪽이어도 상관은 없다. 하지만 복잡하게 엉켜 있는 자의식만큼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어야 한다.
그런 생각이 왜 갑자기 불현듯 들었을까?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왜 지금 이 순간에 이처럼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는 걸까? 나는 누구라고 불려야 하나? 지금 저들도 나와 같은 고민에 빠져 있을까? 아니면 나만 이런 건가? 페리칸의 뒤엉킨 상념들의 괴롭힘은 꽤나 끈질긴 데가 있었다.
선발대는 파천이 없는 지금 수호자의 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파천과 헤어졌던 바로 그 장소에 머물며 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적으로부터 기습적인 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수호자의 지시가 있었지만 실상 그들 모두는 이런 때가 있었을까 싶었을 정도로 늘어져 있었다.
수호자와 라미레스는 이런 선발대의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한참 심각한 대화에 열중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일에든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과도한 열정을 보일 수 있다는 건 라미레스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납득할 수 없는 일투성입니다. 이처럼 답답했던 때가 또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곳 비밀차원의 지도자란 놈들도 그렇고 파천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 그리고 파천이 경고했던 그 요상한 놈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분명 싸우기 위해 왔거늘, 지금 보십시오. 이게 싸움을 앞둔 자들의 모습입니까? 긴장감이 풀어져서 헤벌어진 모습들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치밉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파천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곳에 대한 정보가 너무도 부족하다. 이런 상태에서 성급하게 움직였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라미레스는 단독으로라도 부딪혀보고 싶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차마 입 밖에서는 내지 못하고 연신 입술만 자근자근 씹으며 불만을 삭였다. 그러던 그가 결심을 굳힌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적어도 이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수호자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라미레스는 끈질겼다. 그의 목소리가 점차 고조되어 가자 그제야 선발대원들의 관심이 그들 쪽으로 향했다.
“잠시 조사만 하고 오겠습니다. 이대로 멍청한 얼굴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가는 심장이 터져 죽을 게 분명합니다.”
“가면 …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게 무슨 … .”
“모르겠나? 이곳엔 나조차 긴장하게 만드는 적들이 즐비하다. 전혀 경험이 없는 기이한 존재들 사이에서 네가 얼마나 버틸지 생각해봤나? 지금 이렇게 모여 있어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거늘 따로 떨어져 행동하겠다고? 답답한 그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절대로 … 용납할 수 없다.”
라미레스는 수호자가 자신보다는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물었다.
“그럼 그 위험이 구체적으로 무언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왜 지금 우리는 안전한지도 덧붙여줬으면 좋겠군요. 적들이 대체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말입니다.”
수호자도 속 시원하게 밝혀줄 만한 근거가 부족했다. 단지 느낌일 뿐이었다. 어둠의 천사들이 느꼈던 마지막 두려움의 감정은 일부나마 메타트론에게서 수호자에게로 전달되었던 것이다.
수호자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치 않은 미지의 적을 밝혀주는 건 어디까지나 파천의 몫이다. 분명치도 않은 사실을 입에 올릴 만큼 수호자는 경솔하지 않다.
“아쉽게도 말해줄 게 없다.”
바로 그때였다.
콰르르르릉
저 멀리서 시커먼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며 온 하늘을 덮어 가고 있었다. 뇌성벽력을 동반한 먹구름은 더 이상 푸른 하늘을 허락하지 않았다. 선발대는 갑작스런 기후의 변화에 아연 긴장했다.
콰르르릉
콰쾅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걸.”
어둑어둑해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라미레스가 뱉어낸 말이었다.
수호자의 시선은 이때 좀더 먼 곳을 향해 있었다. 과연 그가 그런 모습을 보였던 적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얼굴이 빠른 속도로 경직되어 갔다.
라미레스도 그제야 수호자의 그런 변화를 발견했다. 수호자의 입술을 비집고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준비해라.”
이어진 소리는 좀더 컸다.
“적이다. 모두 전열을 가다듬어.”
수호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선발대의 정신을 가차 없이 뒤흔들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이었다. 선발대원들은 수호자의 뒤에 나란히 정열한 채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했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그들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것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온다. 오고 있다. 적이 오고 있다.”
라미레스는 그 동안 억눌러두었던 투기를 한껏 부추겨 올리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이 중얼거렸다.
우우우우우
기분 나쁜 울음소리
번쩍
콰콰콰쾅
뒤 이어 따라오는 뇌성벽력.
고조되어 가는 분위기. 선발대원들은 예전의 나약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영계의 최후정예라 할 만한 강자들이었고 그 자부심 또한 대단했다. 비록 이곳이 처음 대하는 환경이라지만 그들의 투지마저 꺾을 정도는 아니었다. 위축되기보다는 더 기세를 올려 가는 선발대. 철저한 승부사들이라 할만 했다.
하지만 잠시 후, 그들의 눈앞을 가득 메운 것들은 모두를 질리게 할 정도였다.
“이건 … 해도, 해도 너무했군.”
선발대 중 누군가가 자신도 모르게 신음처럼 흘려낸 말이었다. 지평선을 가득 메운 거대한 물결. 시커먼 먹구름을 이끌고 나타난 것은 다양한 모습들의 사람, 사람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들만큼은 괴수나 흉악한 악마들로 치부해도 될만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고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시뻘겋게 충혈된 두 눈, 입 밖으로까지 삐죽 솟아 나와 있는 송곳니, 헝클어져 본래의 윤기를 찾을 길 없는 긴 머리. 그들은 비밀차원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이 차원에 그들 말고도 저렇게나 많은 생명체들이 존재했었단 말인가? 그 의문은 잠시 접어둬야만 했다.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해도 호의적인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곧 자신들을 향해 몰려올 것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굶주린 야수들!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았다.
“우리가 맛있는 먹이로 보이나 보군.”
침마저 질질 흘리고 있는 것을 본 라미레스의 정확한 진단이었다. 아무리 죽음을 각오하고 왔다지만 멀쩡한 정신상태로 집중하기엔 무리가 따랐다. 누구라도 질리게 할 만한 전경이었다. 설마하니 이렇게 많은 수와 싸우게 될 줄이야 선발대원들 중 그 누구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리라.
도무지 수를 헤아린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많았다. 그렇다고 미리부터 겁을 먹거나 기가 죽을 선발대도 아니었다.
우우우우
놈들 중 하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게 울음을 토했다. 그것이 신호였는지 지평선을 가득 채운 야수들이 동시에 울부짖는다. 귀가 멍멍해지고 정신이 아찔해진다.
달랐다. 파천의 언질과, 확신과는 뭔가 많이 다르다. 저런 자들과 싸울 일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어쨌든 예견은 빗나간 것이다. 수호자는 침음했다. 싸울 일이 고민이 아니라 끝없는 소모전의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 걱정이었다.
이 넓은 세계에 존재하는 미지의 생명체 전부를 모조리 죽여야 끝이 날 싸움을 이제부터 시작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해야만 무언가가 결정될 일이라면 차라리 차원 자체를 붕괴시킬 방안을 모색해보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것이 실제로 가능한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 때문이었던지 차라리 두 눈을 감아버린 수호자. 그도 지금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선발대원들이 쑤군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그러게. 저것들 제정신들이 아닌 것 같아.”
“원래 저렇게 생겨 먹은 것들인가?”
“설마 우리랑 싸우자고 몰려 온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 그러지 않으면 화낼 것 같은 얼굴들인데.”
“대화라도 좀 해봐.”
“얼굴을 봐. 대화나 되겠어?”
그다지 긴장한 기색들은 없다. 하지만 정말로 싸우자고 덤빈다면 난감하단 표정 일색이었다. 수호자가 당부를 잊지 않는다.
“섣부른 행동을 해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자제할 것.”
그러고는 라미레스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라미레스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한다. 어쩌라고? 하지만 수호자는 진지하기만 했다.
“가서 알아보고 와.”
“뭘 알아보고 와요?”
라미레스는 이처럼 기가 막히고 황당한 때를 경험해본 적이 단연코 없었노란 표정을 만들어냈다. 화라도 벌컥 낼 것 같다.
“왜 왔는지.”
“지금 그 말 설마 … 진심은 아니겠죠?”
“ … .”
더 이상 말이 없다. 진심이란 소리다.
“허 허허 … 이젠 정말 별일을 다 겪어보네. 날더러 저것들하고 싸우라면 모를까 … 대화를 하고 오라고? 어이없네.”
저 멀리 보이는 정신 나간 야수들을 노려봤다.
“표정 풀고.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그리운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한다면 도움이 될 거야.”
라미레스는 정말이지 앞으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영계에도 별의별 종족이 다 있고 그들 중 일부를 대하는 소감은 솔직히 보기에 흉측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마주서지 못할 정도로 역겨운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저들을 보라. 얼굴 가죽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눈알이 반쯤은 튀어나온 게 태반이다. 거무죽죽한 색깔도 그들을 특정 짓는 특별한 개성이었다.
하필이면 묻힌 곳이 그다지 좋지 않은 곳인데다, 그런 깊숙한 땅에서 막 파낸 부패한 시체를 보는 듯한 느낌. 시선이 닿을 수 있는 전부를 가득 채운 괴물들은 생긴 것만큼이나 듣기 거북한 괴성을 질러대며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말이다.
라미레스는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전혀 위축됨이 없이 앞을 향해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그러자 야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자신에게로 몰려든다. 얼굴이 뜨뜻해져 왔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가까이 다가가도 그들에게서 코를 틀어쥘 정도의 악취는 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가관이었다. 앞줄에 선 놈을 슬쩍 밀면 모조리 엉겨 붙어 한 덩이 진흙 반죽이 될 듯했다.
라미레스는 그들을 좀더 찬찬히 살피다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그들 중 절반은 수컷으로, 절반은 암컷으로 분류해도 될 법한 약간의 상이점을 두고 뒤섞여 있었고 하나같이 서로 짝을 이룬 채 손을 마주잡고 있었다. 순간 라미레스는 무언가가 머리 뒤통수를 휘갈긴 듯한 충격에 빠져들었다.
‘혹시 비밀차원의 사람들이 아닐까? 혹시 그렇다면 왜 이런 모습들이 되었을까? 마음의 준비조차 못하고 어떤 힘에 의해 당했단 말인가? 정말로 그런 일이 … 벌어질 수 있나? 아니야. 그건 좀 억지 같군. 내가 아무래도 이러다 머리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닐까.’
라미레스가 본 비밀차원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해보였다. 그처럼 허망하게 당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라미레스는 그들의 표정에서 어떤 감정인가를 읽는다는 건 시간낭비임을 금세 깨달았다. 표정이란 게 있을 수가 없었다. 단지 줄줄 흘러내리는 물결만이 전부였다. 그래서 물었다.
“그대들은?”
여러 가지 의미가 담긴 물음이었다. 왜 그렇게 됐느냐? 여긴 왜 왔느냐? 우리한테 무슨 용무라도 있느냐? 하지만 상대의 이해력은 고갈되어 있었다. 대답이 없다.
“설마하니 … 우리와 싸우겠다는 건 아니겠지?”
“우오오오.”
정말로 야수다. 더 이상의 어떤 시도도 불필요했다. 이해불가의 표정은 양쪽 다 동등했다. 무리에는 지도자가 있기 마련이다. 방금 괴성을 지른 자를 라미레스는 지도자로 간주했다.
“우리는 너희들과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 우리는 너희 적이 아니다.”
손짓까지 섞어 가며 진지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표정도 그럴싸했을 것이라 라미레스는 자평했다.
“우우우우우우 … .”
이번엔 고개를 젖히고 우는지 웃는지 모를 울부짖음을 토했다. 그러자 모두가 동시에 그 짓을 반복한다. 라미레스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말았다. 놈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뚜렷한 기운이 눈동자에 맺힌 걸 본 것이다. 투지와 적의.
‘이놈들 싸우려고 하는구나.’
이 정도쯤 되면 앞뒤 가릴 것이 없다. 걸어오는 싸움을 거절해본 적이 없다. 하필이면 라미레스를 보냈을까? 수호자의 실책이라 할만했다. 라미레스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다짜고짜 맞고함을 질렀다.
“좋다, 이놈들. 한번 해보자는 건데. 누가 그런다고 겁낼 줄 알았더냐! 나, 라미레스야.”
이쯤 되니 뒤에서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알아채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수호자가 외쳤다.
“아직은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 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저들을 죽여도 좋을지조차 모르겠다. 그러니 아직은 기다린다.”
뭘? 뭘 기다리겠단 말인가? 선발대는 어쨌든 마음의 준비는 해 뒀다. 까짓 싸워야 한다면 싸우는 거다. 겁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수호자의 다음 말이 결정적이었다.
“저들 중 특별히 주목할 기운은 감지되지 않는다. 저들은 이곳 비밀차원에서도 가장 약한 존재들일 것이다. 저런 자들이 저렇게나 많이 몰려왔다는 점. 그리고 그 상태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된 점. 일단은 날 믿고 기다려라. 라미레스, 손을 쓰지 말고 뒤로 빠져라.”
라미레스도 수호자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 뒷걸음친다는 건 그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뭉개버리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주잡은 손이 뭉개져서 하나가 된 그들을 향해 살수를 펼치기엔 그의 마음은 모질지가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점이 좀 찜찜했다.
라미레스의 몸이 공간을 가로지르며 뒤로 쫙 빠져나오자 마치 끈이라도 달려 있는 듯이 무리들이 앞으로 달려 나온다.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수호자의 곁에까지 온 라미레스가 어찌할 거냐고 물었다.
“뒤로 물러서라.”
무슨 생각일까? 질주해 오는 적들을 눈빛만으로 멈추게 할 셈인가?
아무런 대책 없이 태연하게 서 있을 인물은 아니다. 그때다. 수호자의 손. 단지 하나의 손이 정면을 향해 세워졌을 뿐이었다.
후우우웅
파란 색감을 지닌 기운이 동심원을 그리며 전면을 향해 뻗어 갔고 그 물결은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다음에 놀라운 일은 벌어졌다.
거짓말처럼 야수들의 걸음이 멈춰 서버린 것이다. 자의에 의해서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그들의 의지는 여전한데 몸은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괴성은 지금도 멈춤 없이 빽빽거린다.
그걸 지켜본 선발대원들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생각에 확신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젠 어쩌지?”
묶어놓기는 했는데 그 다음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단 수호자의 고백. 다른 이들도 대책이 없기는 매한가지.
하나 분명한 건 저들을 죽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좀더 가까워진 대열을 앞에 두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여길 떠날 수도 없는 입장. 그대로 시간은 흘러갔다.
“우오오오.”
라미레스가 말했다.
“저놈의 입은 막을 수 없는 겁니까?”
“왜, 신경 쓰이나?”
왜 신경이 안 쓰일까?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애처롭다는 감정이 들었다. 어찌된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저들의 현 상태는 정상이 아닌 것으로 보였고 그것마저도 제 의지 하에 놓여 있지 않은 것 같다. 무언가에 조종당하고 있단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것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함부로 살수를 쓸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야수들이 질러대는 괴성에는 듣는 이의 심금을 진동시키는 슬픔이 가득 묻어나고 있었다.
“하여간 좀 듣기 그렇네요.”
선발대는 주변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또 무슨 일이 갑작스럽게 발생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소군이 멀리 시선을 두다 새로운 변화를 발견했다.
처음엔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흘려 보았다. 하지만 다시 주목해 바라보는 순간 소군은 부지불식간에 놀라 부르짖고 말았다.
“저, 저것. 저것 좀 보세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 야수들의 대열 가장 뒷부분쯤 되리라.
멀리서 하늘을 덮고 있는 먹구름보다도 더 시커먼 어둠이 한 공간을 채우며 몰려든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대열 가운데로 빠르게 퍼져 가고 있었다. 허리 아래쯤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암류는 빠른 속도로 야수들 사이를 누볐다. 그러자 야수들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성채를 찾아가던 메타트론과 일행도 선발대와 동일한 상황을 겪고 있었다. 거대한 어둠의 물결은 지평선을 가득 메우고 꿈틀거리며 다가서고 있다.
메타트론의 반응은 수호자와 달랐다. 그는 수하들을 잃은 데 대한 분노와 정체 모를 적에 대한 적개심을 눈앞에서 달려들고 있는 존재들에게 풀고자 했다.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수하들을 지나쳐 앞으로 나서는 메타트론. 그는 사악한 웃음을 흘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모조리 소멸시켜주마. 내게 도전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했던가를 깨닫게 해주겠다.”
메타트론은 곧장 무리 중으로 전진했다. 뒷짐을 지고 유유히 들어선 그의 주변을 새까맣게 뒤덮은 물결. 메타트론은 진흙무더기와도 같은 무리들을 이끌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자력인지 타력인지 모를 힘에 이끌려 그들은 메타트론의 뒤만 쪼르르 쫓고 있었다.
회오리치며 솟아오른 메타트론이 무리에 섞여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높이까지 이르렀을 때였다.
화르르륵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었을 것 같은 거대한 화염의 기둥이 생겨났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메타트론의 손에서 시작된 화염은 동시라 할 만큼 빠른 속도로 무리들에게로 옮겨 갔고 그것은 이내 거대한 화염 기둥을 만들었다. 불바다. 채 솟구쳐 오르지 못한 대다수의 야수들은 아직도 땅을 딛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에게까지 번진 거대한 불길은 영락없는 불바다를 연상케 했다.
“모조리 태워주마.”
메타트론의 외침처럼 야수들은 광포한 몸짓과는 달리 별다른 저항의 수단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메타트론의 손이 화염을 제어하듯 살짝 어루만지자 거대한 기둥은 회오리치며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일대 장관이라며 감탄성을 발했을 법한 전경이었다. 하지만 이내 비정한 현실은 그 타오름의 주체가 무엇인지를 드러냈다.
“카아악!”
“카악, 카악, 카악”
연이어 매캐한 살타는 내음이 천지를 진동한다.
불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들의 표정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 잔인한 광경을 루시퍼와 일행들은 별 감흥 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발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한마디 했다.
“저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로 나약한 자들을 왜 보냈을까?”
발리뿐만 아니라 그들 중 대다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야수들을 비밀차원의 지도자들이 보냈다고 믿고 있었다. 전쟁은 선포되었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기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메타트론이 일으킨 화염은 모든 걸 순식간에 존재 이전의 상태로 돌려놓았다. 생기마저 태워버린 공간에는 이제 아무런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드드드드
쿠구궁 쿵
땅이 흔들렸다. 아직도 하늘 높이 떠 있던 메타트론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했다. 메타트론의 입에서 새로운 명령이 내려져싸.
“전진하라. 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드러난 것이 없는 상태에서 어둠 속에 숨은 적의 꼬리만 뒤쫓는 입장보다는 지금이 훨씬 나았다.
미심쩍은 혼란은 공포감을 동반한다. 자칫 그것에 휩쓸리게 된다면 제대로 된 판단을 기대할 수 없게 되고 그 작은 틈이 패배를 불러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루시퍼와 어둠의 천사, 대마신들은 적의 출현이 되려 반갑기만 했다.
어둠의 흔적이 야수들에게로 흡수된다. 그 장면은 어찌 보면 새로운 개체로의 변이를 보여주는 듯도 싶었다. 수호자의 힘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애먹고 있던 야수들에게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그들의 몸이 녹아들며 대지의 일부가 되어 갔다.
단지 그렇게 밖에 설명할 길이 없는 일이 갑작스럽게 벌어진 것이다. 그 많던 수의 야수들이 한꺼번에 녹아버렸고 곧장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 어, 저 저것?”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선발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어찌된 영문일지는 몰라 연신 두 눈만 끔벅거렸다. 이해할 것도 판단할 필요도 없었다.
곧 이어 변화의 진행이 그들 눈앞에 새로운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으니.
드드드드드
땅의 진동, 그것이 천 번째 징조였다.
선발대가 자리한 곳을 포위한 형태로 대지가 심한 떨림을 보이기 시작했다. 수호자를 비롯한 선발대는 예기치 못했던 급작스런 변화 앞에서도 침착했다. 그리고 사태의 추이를 면밀하게 살폈다.
드드득
쩌적
땅이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부분이 위로 솟아오른다. 합쳐지고 더해져 기괴한 모양들이 되는가 싶더니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형체를 갖춰 나간다. 소군의 반응이 재밌다.
“별 짓을 다하네. 저런 게 통할 거라 믿다니 이곳 수준도 알 만 하군.”
거신족의 일원이기도 한 카이로의 반응은 좀 색다른 것에 흥미를 보이고 있음이 분명했다.
“변인족 흉내를 다 내는군. 저놈들 사람이긴 한 건가?”
카이로의 말 대로였다. 대지 속으로 스며들 듯 녹아 사라졌던 형체들 대신 그보다 수십 배는 더 큰 거대한 신체들이 불쑥 솟아나 있었다.
그 많던 야수들이 뭉쳐서 이루어진 듯 보이는 거인들의 수가 단지 수십여 명에 불과했으니 그 크기를 짐작할 만했다. 좀 특이하다 싶은 건 그들의 발이어야 할 부분은 여전히 대지와 일체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었다. 형체를 완전하게 갖추기가 무섭게 곧바로 공격이 이어졌다.
라미레스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못한 듯 적들 쪽은 무시한 채 태연하게 수호자에게 질문했다.
“이 어줍잖은 놈들을 계속 상대하면서 이곳에 머물러야 합니까?”
“달리 방도가 없지.”
콰쾅
바위산이 쪼개지는가? 선발대원들의 손짓에 따라 거인들의 몸체가 둘로 셋으로 쪼개졌다. 맹렬하게 휘둘러 가던 팔이 몸통에서 분리되어 목표했던 곳을 벗어나 날아가기 일쑤였다. 형태만 그럴 듯했지 선발대에게 전혀 위협을 가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선발대에 감돌던 긴장은 어느새 풀려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