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 175화 : 헤렘의 위험한 약속
헤렘의 위험한 약속
파천의 설명은 끝이 났다. 카오스에 대해 비밀차원에 대해 남김없이 전해들은 선발대원들의 낯색이 어둡다.
수호자도 마찬가지였다. 성격이 다르니 상대하기에 힘이 들었을 것이란 말에도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단 한 번도 지금처럼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파천은 선발대원들에게 다시 한번 확인을 했다.
“조금 전의 공격은 카오스의 시험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위협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고 점점 강도가 세질 거야.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상황이 이처럼 달라졌으니 이제 그만 고집들 꺾으시지, 이런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숨은 뜻이 그런 걸 선발대원들이 어찌 모르랴만 그럼에도 쉽사리 돌아가겠노란 말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럴수록 더 오기가 생긴다. 하지만 그런 오기만으로 견뎌내기엔 벅차다는 것 또한 이번에 절감한 바가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는 선발대를 향해 파천이 한발 물렀다.
“이젠 돌아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카오스의 통제가 시작되었으니 기회를 엿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수호자가 물었다.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니?”
“카오스는 현재 비밀차원 전체를 통제하고 있다. 그의 허락이 없는 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한다. 그와 한 몸이 되었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거야. 그러니 카오스를 제압하지 않고서는 차원의 벽을 허물 수가 없게 된 거지.”
때를 놓쳤다는 의미였다. 차라리 개운한 표정을 짓는 라미레스를 보고 파천은 피식 웃고 말았다. 소군이 근심 가득한 눈길로 파천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럼 이제 어쩔 건데요? 영영 이곳에서 그 지저분한 놈하고 승강이를 해야 하나요?”
“그래야지 어쩌겠어.”
파천이 빙긋 웃으며 한 말에 소군이 귀여운 얼굴이 살짝 찌푸렸다.
“쳇, 괜히 겁주고 있어. 그런다고 겁먹을 줄 알아요? 하여간 뭔가 방법이 있겠죠, 그렇죠?”
“아니, 없는데.”
“네?”
“정말로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요?”
“왜, 이제야 겁이 나니?”
“겁은 … 누가 겁낸다고 그래요? 얼마든지 싸울 수 있어요. 처음 대해보는 이상한 놈이라 그렇지 점차 적응되면 … .”
말하다보니 조금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공격이 전초전에 불과했단 말인데 … 그럼 그놈이 마음먹고 덤비면 어떻게 된다면 어떻게 된다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소군의 얼굴이 수심으로 어두워졌다. 카이로는 그런 소군이 안쓰러웠는지 어깨를 툭 치며 장난치듯 말했다.
“요령족 헤세시의 정령을 품고 있는 대법사가 너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아냐? 그렇게 겁나?”
“겁나긴 누가? 그냥 좀 당황돼서 그러지.”
“얼굴은 그게 아닌데?”
“아니라니까! 난 신경 끄고 댁이나 신경 쓰세요. 아까 보니까 다리까지 덜덜 떨던데 보기 안쓰러웠어.”
쌩긋 웃는 소군을 향해 카이로가 버럭 고함질렀다.
“내가 언제!”
수호자와 라미레스, 아난다가 앞으로 나서고 페리칸까지 가세하는 걸 보고 덩달아 나섰던 카이로가 힘에 겨워하던 걸 소군이 짚은 것이다.
사실 카이로는 별 생각 없이 앞으로 나섰던 것인데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무모한 짓이었다. 만약 파천이 제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크게 망신을 당할 뻔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음 한편에 그런 생각이 있었던지라 소군이 그걸 용케 알아내고 지적하니 얼굴이 새빨개진 것이다.
둘이 아옹다옹하는 사이에도 선발대원들의 질문은 이어졌다. 아직도 티격태격하고 있는 소군과 카이로의 머리통을 페리칸이 쥐어박았다.
“조용히 좀 해봐. 너희들 때문에 집중이 안 되잖아.”
그러고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파천의 말에 집중한다.
“카오스의 특성은 분석이 빠르다는 점이다. 동시적이라고 보는 게 맞을 정도지. 즉각적인 파악을 통한 극단의 대치. 그리고 약점을 파고들어 단숨에 적을 제압한다. 어떤 종류의 힘이든 반대의 성질이 존재한다.
카오스는 그런 성질을 이용해 빠른 변화로서 상대가 적응하긴 전에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다. 자, 이걸 봐라.”
파천이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펼쳐보였다. 그러자 손가락 하나 정도의 굵기가 될까, 붉은빛이 한 자 정도 뻗었다.
다른 한 손을 반대쪽에 놓았다. 붉은빛은 금세 푸른빛으로 변하더니 다시 검은색, 갈색, 암청색, 진홍색 등 갖가지 색깔로 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변화의 속도가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정말로 변화를 보였을까 싶을 정도로 빨랐기에 실상 다 알아보기엔 무리가 있을 정도였다.
둘러선 선발대원들은 뭔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수호자가 전력을 다해 확장시켜 놓은 경계선을 어찌 그렇게 빨리 잠식해 들어왔던가에 생각이 미치고 그 현상이 조금은 이해가 갔던 것이다.
지금 이 변화처럼 전혀 저항을 받지 않는 성질의 힘이 반드시 하나씩 있기 마련이다. 이런 식의 겨룸이 결국 누가 더 빠르게 파악하고 대처하느냐에 달렸지. 카오스는 이런 힘의 성질을 파악하고 거두고 뿜어내는 것이 즉각적이다. 한 가지 물어보자. 소군.”
“네.”
“공간을 파괴할 수 있나?”
무슨 의미의 질문일까? 파천의 질문이 소군은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간을요?”
“그래. 특정한 공간, 그것 자체를 없앨 수 있을까?”
“아마도 … 불가능할걸요.”
“그건 왜 그렇지?”
“그야 … 몰라요. 그러고 보니 왜 그렇죠?”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 잘 들어. 어떤 물리력이 발생하려면 저항하는 성질이 있어야 한다. 특정 공간 안에는 한 가지만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성질이 공존하고 그것들 간의 관계는 언제나 안정적이다.
그 균형을 어떤 경우에도 훼손되지 않는다. 만약 그 규칙성에 불균형을 초래하는 성질이 침투하면 즉각적으로 안정화시키려는 작용도 뒤따른다. 중화시키는 것이지.
그런데 무엇이 파괴되고 변형되었다는 것은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지 못하고 신속하지 않은 상태라는 걸 의미한다. 특정성질로 고착화되어 있어 변화에 대한 대처가 느린 탓이지. 자, 이작은 돌을 봐라.”
작은 돌이 파천의 손 안에서 간단히 으스러졌다.
“부서진 이 돌은 공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불안한 상태라 볼 수 있지. 그래서 부서진 거야.
그 외는 달리 공간은 저항하지 않고 성질을 받아들여 중화시킨다. 안정적이지. 돌을 이루고 있는 단위입자 간의 배열은 공간을 이루고 있는 단위입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성화되기 용이하다. 빠른 환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카오스는 이러한 입자 간의 배열이나 파동에 민감하고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안다. 그래서 강한 것이다. 소군.”
“네.”
“넌 조금 전 공간을 파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렇지?”
“네, 불가능해요.”
“아니다… 가능하다.”
“네?”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건 라미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너희들 중에 한 명만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선발대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수호자에게로 가 멎었다. 수호자가 말문을 열었다.
“단지 … .”
그도 막연했다. 하지만 파천이 무엇을 이르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래, 그것이 공간의 근원마저 파괴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 최소한 그와 비슷한 유형의 공격법은 알고 있다.”
“시도해본 적이 있나?”
“아니. 나나 메타트론이나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런 방식의 공격을 해본 적이 없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마저 도외시한 마지막 방법이기 때문이지.”
“그 원리는 이렇다. 개체와는 달리 공간의 최소단위 입자 간 밀도는 일정하다. 중화될 때 입자간 배열이나 파동의 변화가 뒤따르지만 핵을 이루고 있는 의지의 수와 밀도엔 변화가 없다.
단위입자의 핵을 이루고 있는 의지를 인위적인 방법으로 교란시켜 착오를 일으키게 한다. 그럼 일시적이긴 하지만 입자의 밀도를 의도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게 되고 특정 공간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희박하게 되지.”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소군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파동이 일시적으로 급증하는 이상현상이 뒤따르고 밀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려는 동시적인 시도가 발생한다. 그때 한곳으로 파동이 집중된다.
또한 반대로 주변부에는 입자의 밀도가 다시 희박해진다. 이런 연쇄적인 파동의 급증이 폭발로 이어지고 공간이 대폭발을 일으키는 것이지.”
라미레스가 물었다.
“그런 반응은 끊임없이 연쇄반응을 일으키겠군. 그럼 뭐야? 우주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되는 건가?”
“말도 안 돼.”
“말이 되기는 하지.”
“엄청나겠군.”
여기저기서 놀람의 소리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파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같지만 결과는 다르다.”
“그건 또 왜지?”
“상위개념의 의지가 파동을 통해 즉각 개입하여 조절하기 때문이지. 처음 발단이 된 공간의 크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 폭발은 일정공간을 넘어서지 않는다. 상위의지가 오류를 일으킨 입자를 포함한 공간을 단일입자로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와 수호자와 메타트론이 어느 한쪽이 소멸을 당하게 되면 같은 길을 걷게 되는 이치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카오스를 제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소군이 반색했다.
“있긴 있었네요.”
“완전한 각성을 이루지 못한 카오스의 본체는 세계 안에 자신을 일체화시키지 못했기에 어떤 특정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 그것을 찾아내 봉인을 하는 것이 첫 번째인데, 가장 손쉬운 방법이지.
다른 하나는 조금 전 설명했던 대로 공간 자체를 파괴시켜 완전히 소멸시키는 방법이다. 하지만 여기엔 두 가지 위험성이 따른다. 하나는 카오스가 그것을 인식하기 때문에 역공격을 당할 우려가 있고, 또 하나는 설사 성공한다 해도 카오스의 개입으로 인해 폭발 공간이 확대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비밀차원을 파괴시킨다고 했을 때 잘못되면 영계까지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이지.”
“헉. 그 정도인가?”
“그렇다면 그런 위험천만한 시도는 해서는 안 되겠네.”
파천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카오스의 공격은 이후로 없었다.
그렇지만 어둑어둑한 하늘과 황폐화된 대지, 뭔가 당장이라도 스물스물 기어 나올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만은 여전했다.
파천은 선발대를 이끌고 다니면서 여러 곳을 조사하고 다녔다. 그는 땅에 자주 손을 대면서 골똘하게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카오스의 실체. 그것을 찾으려는 것임을 짐작은 했지만 뭘 알아야 도움이라도 될 텐데 그러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흠 이곳에 파천의 딸이자 루시퍼의 양녀이기도 한 헤렘이 잡혀 있단 말이지. 이것 예기치 않았던 일로 생각 밖으로 일이 잘 풀리겠는걸.”
기대하지 않았던 우연적인 사건이 행운이 된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번뜩이는 제왕들의 감시조차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자의 심정이 지금 그랬다.
파천의 딸, 루시퍼의 양녀! 이용가치가 무궁무진 했다. 게다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입장에서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터였다. 마령의 본주! 그가 하룬을 찾은 것이다. 그것도 헤렘을 구출해내기 위해서.
사실 마령의 보주는 마계와 제왕의 군대를 이용해볼 생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양측 진영을 모두 쓸어버리고 싶지만 그러자면 힘의 소모도 클뿐더러 시간도 많이 걸릴 것이다. 최소한의 개입으로 바라는 구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두 세력 간의 전면적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는 그 일을 획책하고자 마계 본진을 찾아가다 막 하룬을 향해 떠난 헤르파를 만나게 되었다.
자신의 능력이면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는 자가 마계의 지도자란 사실이 얼마나 흡족하던지. 헤르파는 헤르파대로 마령의 본주를 이용해 보호막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와의 협상을 마다할 입장이 아니었다.
거기에 동맹의 조건으로 헤렘의 구출을 단서로 달았으니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을까? 마령의 본주는 흔쾌히 수락했고 헤르파는 안심하고 자신의 본진으로 떠났다.
마령의 본주는 하룬을 제 집처럼 뒤지고 다녔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발견해내는 이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하룬 중심부에 큰 혼란을 야기 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어느 정도의 전력을 지니고 있는지는 모르나 양측이 부딪치면 결과는 아무도 알 수 없겠구나. 이것 생각보다 탄탄하고 허점이 없는걸.’
그는 하룬이 예상보다 정예화 되어 있고 또한 기세가 대단해 마께나 제왕에 군대에 녹록하게 무릎을 꿇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자, 그럼 헤렘이란 말썽꾸러기를 찾아볼까나.’
한편 본진으로 돌아온 헤르파는 라아그와 라넷과 함께 제왕 마르시온을 찾았다.
마령의 본주와의 협상에 대비해 미리 논의해두기 위해서였다. 마르시온은 보호막을 제거할 수 있으리란 것엔 기대감을 가졌지만 마령의 본주와 동맹하게 되었다는 사실엔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자를 믿을 수가 있어야지. 언제든 뒤통수를 칠 수 있는 자이거늘. 그 자의 목적이 뭔가를 생각해보면 이건 너무 위험한 거래인 것 같은데.”
“어차피 그와 우리는 서로의 생각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후의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해도 늦진 않소. 최소한 서로가 이용가치가 있을 때까진 동맹이 유지될 테니 차라리 그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보호막을 제거할 수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요.”
“그가 정말 보호막을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단 말이지?”
“네, 자신하더군요.”
“흠, 정말 위험한 존재인데 … 끌어들여도 좋을지 … .”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되겠지요. 차라리 시야 권에 두고서 감시하는 게 안전할지도 모릅니다.” “그건 그렇지만 … 찜찜한 건 사실이거든.”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그건 그렇고 뒤처리는 어떻게 하려고?”
마르시온은 마령의 본주를 제거할 방법이 있느냐고 물었다. 헤르파는 고개를 저었다.
“메타트론님이 돌아오신다면 모를까, 그 전엔 사실 자신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도 한 가지 생각해둔 게 있었다. 카르마! 그라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마르시온 앞에서 그를 거론할 필요는 없었다.
“좋아. 일단은 받아들이지. 만나보면 알겠지, 어떤 자인지는.”
하룬 사령부를 헤집고 다니던 마령의 본주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넓고 복잡했으며 특별히 포로나 죄수로 보이는 자들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하 감옥은 텅텅 비어 있었고 다른 곳들도 포로를 가둬둘 만한 곳은 없었다.
‘할 수 없군. 한 놈을 족쳐서 알아내는 수밖에.’
마침 전사 하나가 보였다. 뭘 어떻게 했는지 그자는 그 자리에서 퍽 하고 사라져버렸다. 마령의 본주는 벽이나 천장, 바닥에 숨어 다니지 않았다. 한 공간을 두 개의 차원으로 분리시켜 놓은 것처럼 묘한 수법을 썼다.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고꾸라져 있던 전사는 자신의 주변을 지나치는 동료들을 보고 도움을 요청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령의 본주는 그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한참을 그 상태로 있었다. 그것뿐이었다. 아무것도 물어보지도 않았고 겁을 주며 위협하지도 않았다.
전사는 적의 능력이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끄억.”
알고 싶은 걸 모두 얻어낸 마령의 본주는 가차 없이 전사의 머릿속 내부를 파괴시켜버렸다. 그는 시체를 숨겨둘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보이는 곳에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사라진 것이다.
시체가 발견되자 곧장 하룬 내에 비상이 발동되었다. 그것도 사령부 내에서 시체가 발견되었으니 오죽했겠는가? 지도부의 수뇌들이 회의를 하다 말고 뛰어왔다. 로메로는 짚이는 게 있어 외쳤다.
“헤렘, 헤렘이다.”
헤렘을 누군가 구해내려고 침입했단 걸 생각해낸 것이다. 수뇌들은 곧장 헤렘이 갇혀 있는 곳으로 갔다. 문은 열려 있었고 밖을 지키고 있던 전사들은 이리저리 구겨져 있었다. 처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흉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헤렘을 안고 사라진 마령의 본주는 지하 쪽으로 최직단을 택해 떨어져 내렸다. 바닥과 지하통로를 거쳐 하룬 밖으로까지 곧장 떨어져 내렸다.
제왕들이 외부를 감시하고 있다는 걸 마령의 본주는 알고 있었다. 지금부터는 조심해야 한다. 더군다나 헤렘을 대동하고 있으니 더했다. 제왕들의 감시는 그에게도 성가신 것이었다.
이중 삼중의 안전장치를 하고서야 움직였다. 그것도 매우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들의 감시망을 완전하게 따돌리기 전까진 이런 속도를 유지해야만 했다. 그들이 두려운 건 아니다. 하지만 소득 없이 부딪칠 이유도 없었다.
어느 정도 멀어졌다고 판단한 마령의 본주가 속도를 올렸다.
쉬이잉
그제야 그곳으로 서너 명의 제왕들이 모여들었다. 따라 붙기엔 늦었다는 걸 알았다. 추적하기엔 마계 본진이 너무 가까웠던 것이다. 제왕 중 하나가 말했다.
“마계에 저런 자가 있었던가?”
그들은 진정으로 궁금해 했다. 마계의 인물이라면 한 번은 부딪쳐야 할 자였다. 자신들을 긴장시킬 정도의 강자가 마계에 아직도 남아 있단 사실에 놀라워했다.
헤렘이 돌아왔다. 헤르파는 마령의 본주가 장담했던 대로 헤렘을 구출해 오자 날아갈 듯이 기뻐했다. 내심은 그랬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마령의 본주는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결정됐지?”
헤렘에게 손을 내밀던 헤르파가 움찔했다. 마령의 본주가 헤렘을 옆구리에 낀 채 질문을 했기 때문이다. 헤르파는 손을 거두고 침착하게 말했다.
“물론. 누구도 당신과의 동맹에 반대하지 않소.”
“반대하지 않는다? 환영하지도 않는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을 텐데 새삼스럽게.” “그렇긴 하지. 자, 그럼 마르시온이 있는 곳으로 가볼까?”
“헤렘을 먼저 이리로 넘기시오.”
아, 내가 잊고 있었군. 자, 여기 있어.”
헤렘을 인도받은 헤르파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헤렘은 헤르파의 눈길과 마주치자 얼른 외면하며 고개를 숙였다. 헤르파가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한 번뿐이다. 다시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땐 … 너라도 용서하지 않겠다.”
“알 … 았어.”
비밀차원의 여섯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터전을 살피는 중이었다. 망가진 폐허를 보는 심정이 어찌 좋을 수 있겠는가.
무너진 건 다시 세우면 된다. 하지만 상처 입은 자존심은 쉽게 치유되지 않을 것이었다. 헤르바르트가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며 분노를 달랬다.
“이 모든 게 키케로 때문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우왕좌왕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런 꼴을 보이지도 않았을 텐데.”
코모라는 한층 더 강한 어조로 키케로를 비난했다.
“뭐라 그래도 키케로는 배신자다. 그를 먼저 제거해 우리의 위상을 다시 세우자. 그리고 이곳에 침범한 자들을 모조리 소멸시키고 영계를 폐허로 만들어버려야 한다.”
아퀴나스의 눈빛은 평온한 가운데 한번씩 번뜩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이는 건 감출 수 없었다. 심상치 않은 하늘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캄파넬라가 비웃음을 흘렸다.
“카오스가 장난질을 치려는 것 같군. 한층 강해진 건 맞는 것 같은데 이런 정도로 우리를 곤란하게 할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 텐데 말야.” 그 말을 받아 빈델반트가 공간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카오스, 나와라. 우리를 겁내는 것이 아니라면 정당하게 힘을 겨뤄보자.”
“나올 리가 없지. 기껏해야 우리를 이간질 시켜 득을 보려고나 하겠지. 다들 조심들 하라고. 놈의 장기를 잊지는 않았겠지.”
“잊을 리가 있나. 그것만 빼면 두려울 것도 없지.” 바르트와 캄파넬라의 자신만만한 태도와는 달리 아퀴나스는 우려 섞인 말을 했다.
“카오스를 예전의 상태로 생각하다간 낭패를 당할지도 모른다. 놈은 … 강해졌다. 느껴지지 않나? 놈의 힘은 이 세계에 가득 차 있다. 우리를 엿보는 시선에서 살기가 충만하다. 그리고 자신감. 그래, 놈의 예전의 카오스가 아니다.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아퀴나스, 농담하나?”
헤르바르트는 믿을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카오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사방을 옥죄어 오는 압력과 무시무시한 포효, 시선을 현란케 할 정도로 갖가지 형형색색의 불꽃들을 덤덤히 바라보는 시선들엔 약간의 무료함까지 담겨 있었다. 헤르바르트는 무리 중에서 성큼 한 걸음 나서며 호기롭게 외쳤다.
“이런 장난이 통하리라 여기나! 피차 낭비일 뿐이다.”
콰아아아
헤르바르트는 단지 한 발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안에 담긴 위력은 상상을 불허했다. 발바닥에서 시작된 기운의 폭풍은 사방을 한꺼번에 휩쓸며 모든 움직임을 잠재워버렸다. 선발대가 애를 먹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한참 뒤 다시 몰려드는 기운의 세기는 좀 전과는 또 틀렸다. 이번엔 빈델반트가 손을 슬쩍 휘젓는다. 배경에 둔 칙칙한 어둠이 갈라지고 전위에 도사린 맹렬한 불꽃이 사그라졌다. 귀를 멍멍 하게 했던 포효도 잦아졌다. 캄파넬라의 진단은 간단했다.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 같은데.”
아퀴나스가 들으라고 하는 말인 것 같았다.
“가자, 놈을 찾으러.”
아퀴나스가 앞서고 다섯이 뒤를 따른다. 카오스도 숨을 죽이고 지켜볼 정도로 그들의 신위가 놀라웠던 것일까?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마르시온은 마령의 본주와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들었다. 척 보아도 상대가 어떤 자인지를 알 것 같았다.
협상은 순조로웠다. 마령의 본주와 헤르파 사이에 있었던 내용을 다시금 확인하는 절차와 같았다. 마르시온이나 마령의 본주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도 않는다.
마르시온은 사실 보호막만 제거해주고 마령의 본주가 사라져줬으면 하는 심정이었고, 마령의 본주는 마계와 제왕의 군대가 하룬을 향해 힘차게 진군해주면 그만이었다. 굳이 동맹이니 협상이니 이런 말을 할 것도 없는 간단한 협약이었다. 대신 헤르파는 한 가지를 마령의 본주에게서 약속 받고 싶어 했다.
“우리 배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장해줄 수 있소?”
마르시온도 대답을 기다렸다.
“어떻게 해주면 날 신뢰할 수 있겠나?”
마르시온은 속으로 ‘그 어떤 것으로도 널 신뢰할 일은 없을 거야.’ 라고 생각했다. 헤르파는 요구했다.
“보호막을 파괴시킨 뒤에 당신은 항상 우리 앞에 있어야 하오. 어딘가 숨어서도 안 되고, 적의 그림자 속에 자신을 감춰서도 안 되오. 훤히 볼 수 있는 곳, 하룬의 상공에 그대 몸을 나타내보이시오. 그러면 그대를 신뢰하겠소.”
마령의 본주는 그러겠다고 했다. 마르시온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헤르파의 요구를 수용하려면 적의 집중적인 공격에 노출되기 마련이다. 자신의 싸움도 아니건만 그런 수고로움을 감당하겠다는 것이 도시 믿어지질 않았다. 어쨌든 이만하면 결과가 흡족했다.
마르시온은 아까부터 마령의 본주를 살피는 중에 그가 어떤 힘으로 보호막을 제거할 것인지 고민해보았다. 제왕의 힘으로도 불가능한 일을 마령의 능으로 해낸다면 자신보다도 우월하다고 봐야할까? 아니면 보호막엔 자신들이 모르는 약점이라도 있어서 그 힘을 해체하는 것이 마령만이 가능한 걸까?
최후엔 싸워야 할 자였고, 상대가 먼저 칼을 뽑지 않아도 쓸모가 없어지면 해치워야 할 적임엔 분명한 자였으니 미리부터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령의 본주는 수하들을 모두 잃었다는 점이었다. 수족이 잘렸으니 그 하나만 신경 쓰면 되었다. 하지만 마령의 본주에겐 숨겨둔 강력한 군대가 있었고 싸움이 벌어지면 더 많은 수하들이 생겨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과연 마르시온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마령의 본주가 일어서며 말했다.
“준비를 해줬으면 좋겠어. 하룬에 펼쳐져 있는 파천의 힘을 제거하는 순간 보호막은 물론이요, 공중에 떠 있는 하룬의 요새가 땅으로 떨어져 내릴 것이야. 그때를 노려 진격을 하면 큰 소득을 얻을 수 있겠지.”
“그렇게 하겠소. 하룬이 대지의 품으로 다시 안겨드는 때를 공격의 신호로 삼겠소.”
마르시온은 벌써부터 전신이 찌릿찌릿해져 왔다. 그는 싸움을 즐기고 그보다 더 학살을 즐긴다. 하룬엔 그를 흡족하게 해줄 먹잇감들이 많았다. 더군다나 제거해야 할 제왕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었으니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마르시온의 거처를 나온 마령의 본주 앞을 헤렘이 가로막았다.
그녀는 입에 손을 갖다대며 말하지 말라는 신호를 했다. 그리고 손가락을 까닥이며 따라오라고 하고선 앞장서 간다.
마령의 본주 케플러는 헤렘이 자신에게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뭘까 궁금했다. 어느 한적한 곳에 다다라 헤렘이 꺼낸 말을 듣고 마령의 본주는 얼굴을 찡그리고 말았다.
나와도 협상을 하자,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으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어떤 협상을 말인가?”
“헤르파의 생명을 당신이 보호해주면 좋겠어.”
“호,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게 무슨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거늘.”
“그러니 협상하자는 거잖아. 대신 … .”
뭔가 내세울 조건이 있다는 것도 믿기 힘들었고 그것이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시킬 줄은 더더군다나 생각지 못했다.
“비밀 한 가지를 알려주지.”
“비밀?”
“그래, 비밀. 당신은 마르시온을 어찌 생각하지?”
“매우 뛰어난 강자이고 훌륭한 지휘관이지.”
“그런 입에 발린 말을 듣자는 게 아냐. 내가 당신의 능력을 겪어 본 결과 마르시온이나 헤르파 정도는 안중에 두고 있지 않을 것 같거든.”
“그렇다고 해두지, 그래서?”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크게 착각하는 거야. 본계엔 당신을 상대할 비밀병기가 따로 준비되어 있거든.”
이쯤 되면 헤렘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상대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그 비밀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지를.
“자, 이제 협약을 체결할 준비가 되었나?”
“아니, 아직은 충분치가 않아. 그 비밀병기가 뭔지를 듣고 나서. 확인까지 한 뒤라면 모르지만 그 전엔 안 되지.”
“좋아. 루시퍼님에 버금가는 강자가 마계엔 존재한다. 메타트론님을 제외한 누구의 명령도 듣지 않는 초강자가 있지.
그의 이름은 카르마. 그는 당신을 충분히 곤란하게 만들 수 있을 거야.”
“카르마 … 라고?”
“그래, 카르마.”
“좋다. 네 말이 사실이라면 한 번은 헤르파의 위기를 해소시켜 주겠다. 명심해 단 한 번 뿐이니까.”
하긴 그 이상을 요구한다 해서 부리는 종처럼 뒤따라 다니며 도와줄 위인도 못 되었다. 이 정도만 해도 헤렘은 만족했다. 마령의 본주는 카르마를 확인해보고자 헤렘이 가르쳐준 곳으로 향했다.
‘잘한 거야. 카르마의 존재를 비밀에 붙인다 해서 득이 될 게 무언가. 그는 헤르파에겐 아무런 힘도 안 되는걸. 차라리 이게 더 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