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1화 : 난리
난리
“은동아! 내 손을 놓치면 안 된다! 절대!” 비명을 질러대며 쫓겨가는 수많은 군중들. 칼날이 번뜩일 때마다허공에 뿌려지는 선혈. 그리고 죽이는 자와 죽는 자의 핏발 서린 눈동자들.
지옥의 참상이 따로 없었다.
그 사이로 가녀린 두 모자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은동아! 은동・・・・・・!”
마지막 생명줄을 붙잡기 위해 푸드득대다가 결국은 맹수의 붉은입 속으로 사라지고 만 작은 새처럼, 이 내 두 사람의 그림자는 군중들의 발길에 파묻히고 말았다.
뒤쪽에서는 시뻘건 불길이 거대한 혀를 낼름거리며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뒤를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무조건 앞으로만 내달렸다. 아아, 지금 이 순간은 현실인 가, 꿈인가. 아무래도 좋다. 다만 뿌리칠 수 없는, 죽음보다 더한 이 원초적인 공포에서 달아날 수만 있다면…….
“으, 은동아! 소, 손을……!”
여인의 마른 손이 아이의 손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 간힘을 쓰고 있었다.
작고 갸냘픈 체구를 가진 은동은 이리저리 차이고 밀려, 중심조차잡기 어려웠다.
그러나 비록 열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지만, 은동 은 지금 넘어지면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우르르 달려드는 어른들 틈에서, 몸을 제대로 세우 려 애쓰는 것만이 어린 은동이 할 수 있는 능력의 전부였다.
결국 어떤 남정네에 의해 은동의 작은 몸이 와락 떠 밀린 순간, 그때까지 온힘을 다해 꽉 쥐고 있던 어 머니의 손이 허망하게 떨어져 버렸다. 은동은 손을 놓치자마자 몸을 굽혀 어머니의 흙 묻은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러나 그 치맛자락마저도 거센 사람들의 물결에 휘말려찌익 하고 찢겨져 버렸다.
“어머니! 어머니!”
“으, 은……!”
차츰 잦아들던 어머니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은동의 귀에는 공포에 찬 부르짖음과 단말 마의 비명소리만이 웅웅거리고있을 뿐이었다.
은동은 머리를 양팔로 감싸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굽혔다.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군관 으로, 변방으로 파견된 아버지가 돌아오실 때까지 경상도 상주의 외가에 머무르면서 마냥 평화로운 세 월을 보내던 은동에게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걷잡을 수 없는 흐느낌이 은동의 몸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자기가소리를 내어 울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 지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주위는 아수라장이었 다.
수없는 사람들의 발길이 은동의 몸을 치고 지나갔 다. 은동은 귀를 틀어막고 온몸을 더욱 둥글게 말았 다.
그러고는 기다렸다. 이대로 잠깐만 있으면 어머니의 굳은 살 박힌, 그러나 한없이 따스한 손길이 다가오 리라고 믿었다. 은동은 벌벌 떨며 기다렸다.질끈 감 은 눈 속에서 어머니의 손이 어른거렸다. 감서리를 하다가동네 어른에게 잡혀 아버지께 종아리를 맞았 을 때 가장 먼저 은동의붉은 회초리 자국을 쓰다듬 어 준 것도 그 손이었고, 쥐를 잡으려다 간장독을 깨뜨리고는 겁에 질려 구석에 숨은 은동을 따뜻하게 감싸안은것도 바로 그 손길이었다.은동은 어서 그 손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손길을 생각하는 동안, 은동은 뒤켠에서 활활 타오르는불길도, 어른들을 이렇듯 사납게 내모 는 그 어떤 무서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러나 은동의 기다림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누 군가가 은동과정통으로 부딪쳤고, 어찌나 호되게 부 딪쳤는지 은동의 몸은 붕 날아서 다른 사람의 몸에 걸려 앞으로 널부러졌다.
은동은 자기 몸이 뜨는 느낌만 받았을 뿐, 아픔도 놀라움도 느끼지않았다. 은동은 널부러진 자세 그대 로 눈을 꼭 감고 머리를 양팔로 감싼 채 이를 악물 었다.
몸 위로 묵중한 무엇인가가 짓누르고 지나쳤다. 또 다시 누군가의발길이 가슴팍을 밟고 지나갔고, 은동 은 명치에 전해져 오는 고통을참느라 더욱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까짓 거야 참을 수 있다. 얼마 안 있어 어머니가 와서 안아 올릴텐데…………. 그러면 다 괜찮아질 거야. 은동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어 머니가 반드시그래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다.어느 한순간, 은동은 자기의 몸을 차고 밟으며 지나는 것들이 없 어졌음을 깨달았다.
그러자 은동은 오히려 불안해졌다. 자신을 차고 지 나는 발길이 없어졌다는 것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 은동 은 혼자란 말인가?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은? 소름이 등을 훑고 지나갔다. 오뉴월 장마비처럼 쏟 아져내리던 눈물도 그쳤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달려가고 싶었으나 몸이 움직여 지지 않았다. 팔다리가 아예 다른 사람의 것이 된 양 둔했다. 온몸이 욱신욱신 쑤셔왔고, 날카로운 고 통이 등골을 꿰뚫기라도 하듯 엄습해 왔다.은동은 눈을 떠 보려고 했다. 끔찍한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같아 무서웠지만, 계속 눈을 감고 있을 수만 은 없는 노릇이었다.
은동이 애써 눈꺼풀을 치켜뜨려는 순간, 무언가 굉 장히 무거운 것이 몸 위로 풀썩 떨어졌다. 쌀자루 같은 묵직한 느낌이 한동안 숨을쉴 수조차 없게 만 들었다.
은동은 겁에 질려 다시 눈을 감았다가 서서히 떴다. 은동의 눈동자 바로 앞으로, 뻣뻣하게 굳은 중년 남 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마치 은동을 내려다보는 것 처럼 은동의 코앞에 들이대어진사내는 눈이 흰창만 보이게 뒤집혀 있었고 입가에는 핏줄기가 흐르고있 었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지금은 비록 꿈에 볼까 두려운 몰골로 축 늘어져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은동이 알 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물방앗간 집의 박서방이 었다. 항상 허허 웃는 듯한 사람 좋은 얼굴로 방앗 간뒤 짚무더기에서 낮잠을 자곤 하던 바로 그 박서 방이었다.
은동은 소스라치게 놀라 박서방의 몸을 밀치려고 했 으나 이미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 박서방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동이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칠 때마다 박서방의 입에서 흘러내린 피가 은동의 얼굴로 떨어졌다. 그러나 손조차 뺄 수가 없었다.
다음 순간, 은동은 얼른 동작을 멈추었다. 박서방의 얼굴 뒤켠으로시커먼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었던 것 이다.
은동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실눈을 떴다. 활활 타오르는 마을을 배 경으로 시커먼 그림자가 고개를숙이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갑옷에 괴상한 투구. 왜병임이 분명했 다. 그것은 너울대는 불빛을 받아 소름끼치는 귀신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은동은 몸이 얼어붙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불끈 노여움이 치솟았다.
‘저건 귀신이 아냐.’
은동은 마치 자기 자신에게 설명하는 것처럼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깨비도 아냐.’
왜병에 대해선 언뜻 들은 적이 있었다.
며칠 전, 마을 어른들이 향약에 모여 회의를 한다고 했다. 멀리 피난을 가야 하는가, 잠시 산 속에 숨어 있어야 하는가를 결정하기 위한자리였다. 왜병이 쳐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부산포가무너 지고 곧 동래성이 함락됐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 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은 불안한 마음에 어찌할 바 를 모르고 있었지만, 어떤 선비들은 이는 전쟁이 아 니라 조금 많은 수의 왜구가 쳐들어온 것일 터이니 설마 이곳 내륙까지 들어올 리 없다고 했다. 마을 전체가 술렁거리 있는 사이, 조정에서 파견된 수많은 관군이이곳을 거쳐갔다. 비록 정연한 대오를 이루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지나갔지만, 그들을 다 합하면 굉장히 많은 수의 군사였다. 은동의 눈에도 몇천은 족히 되어 보이는 대병력이었다. 그렇게 많 은 수의 군사가 동원되었다면 왜구 따위는 문제 없 을 것이라고 은동은 생각했고,마을 사람들도 다소 안심하는 눈치들이었다.
그러나 하루. 단 하루만에 조선군은 어찌되었는지, 갑자기 왜병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귀신도 아니고 도깨비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얘기해 준 것은 아니었지만, 은동은 그들이 바로 소문으로만듣던 왜병임을 알 수 있었다.
해괴한 차림새들, 연신 지껄여대는 알아들을 수 없 는 말들, 게다가붉게 충혈된 채 번득이는 눈동자들. 그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참혹한 인간 사냥이 시작되 었고, 지금 은동은 이렇게 엎드려 있는 것이다. ‘왜병들이야. 왜병들이 쳐들어 온 거야……. 마을을 불지르고 이렇게 사람들을・・・・・・
그들이
다음 순간, 그림자는 억센 억양으로 지껄이면서 검 은 손을 주욱 뻗었다. 그 손이 자기에게로 다가오는 것 같아서 은동은 얼른 눈을 감았다. 죽음이 눈앞에 서 어른거리는 듯했다.
은동의 얼굴에 축축한 것이 튀어 달라붙었다.
‘뭘까?’
호기심이라기보다는 공포에 질려서 운동은 다시 실 눈을 떴다. 보일듯 말 듯한 시야 속으로, 박서방의 얼굴이 와락 뒤로 젖혀져 목줄기와아랫턱이 보였다. 그리고 서슬 퍼런 것이 그 얼굴 위를 왔다갔다 하 고, 서걱서걱 하는 소리가 났다.
‘윽!’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깨달은 순간, 은 동은 아찔해지면서 뱃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왜병 이 박서방의 코를 칼로 베어내고있었던 것이다. 박 서방의 얼굴은 칼이 오고 감에 따라 조금씩 꺼덕꺼 덕 움직이며 아직 굳지 않은 시커먼 피를 은동의 얼 굴에 튀기고 있었다.저들은 왜 죽은 박서방의 코를 베어내고 있을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은동은 눈물과 함께 욕지기가 터져나오려는 걸 이를 악물고 참았다.
왜병은 박서방의 등 뒤에서 머리카락을 잡아 얼굴을 위로 젖힌 채코를 베어내고 있었다. 그가 앞에서 이 런 짓을 했더라면 은동의 눈에서린 반짝이는 빛을 보았을 터이고, 필경 은동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 다.그러나 은동은 이러한 사실마저 미처 헤아릴 틈 이 없었다. 다만 솟구쳐 오는 슬픔과 욕지기, 천둥 보다 더 크게 울리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죽이느라 이를 악물 따름이었다.마침내 코가 잘라졌는지, 흔 들거리던 박서방의 얼굴이 은동의 머리위로 철썩 떨어졌다. 은동은 눈을 감지 않았다. 박서방의 뒤집힌 눈,썩둑 잘려나가 피가 흘러내리는 민둥코가 은동의 얼굴 위로 떨구어졌다.
은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컥 토악질을 했다. 그러나 구토물은박서방의 얼굴에 부딪쳐 다시 은동 의 얼굴로 쏟아져 내렸다. 참으려 애썼지만 구토물이 자꾸만 악문 이빨 사이로 새어나왔다. 시큼한 맛이 목을 아리게 했다.
‘소리 내면 안 돼.’
은동은 자기 자신을 채찍질했다.
‘소리 내면 안 돼. 소리를 내면 나도 박서방처럼 죽 어서 코 없는 송장이 될 거야.’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났다. 박서방의 코를 베어 낸 왜병이 저만치 걸어가는 소리였다. 얼마 되지 않 는 시간이었지만 그 발자국이 한번씩 들리는 간격은 은동에게 무한정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발자국 소리가 거의 잦아질 때쯤 은동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더러운 오물과 피로 뒤엉킨, 끔찍하게 변한 박서방의 얼굴이 먼저 시야에들어왔다. 아니, 이것은 실제로 보인 것이라기보다는 은동의 마음이 그려낸 상상인지도 몰랐다.
은동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왜병의 눈에 띄 어 죽더라도, 이대로 송장 밑에 깔려 있을 수는 없 었다.
은동은 죽을 힘을 다해 양 어깨와 다리에 힘을 주어 박서방의 송장을 밀어냈다. 한 번 용을 쓰자 송장이 조금 움찔했다. 다시 힘을 주자박서방의 고개가 좌 우로 휘청거렸다. 그럴 때마다 박서방의 죽은 얼굴 이 은동의 얼굴을 부벼댔다. 은동은 온힘을 다 쏟아 위를 향해 팔과다리를 쭉 뻗었다.마침내 송장이 크 게 흔들거리더니 은동의 옆으로 엎어졌다.
은동은 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자, 잠시 멍하 니 누워 있다가한숨을 내쉬고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 다. 왜병들은 보이지 않았다.
은동은 상반신만 벌떡 일으키고는 다시 주위를 둘러 보았다. 저만치에 걸어가는 두 왜병의 뒷모습이 보 였다. 그들의 손에는, 잘라낸 코를꿴 듯한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마을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깔려 있었다.
불바다처럼 화염을 이글거리는 마을에는 온전한 집 이라곤 몇 채남아 있지 않은 듯싶었다. 불길이 비교 적 거세지 않은 지점에 많은 왜병들이 모여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제서야 은동의 귀에 주변의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 했다. 어떤 남정네에게 채여 나동그라진 이후로 물 들어간 고막처럼 윙 하는 소리만 나더니, 비로소 귀 가 뚫린 듯 시끌벅적한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차마 듣고 싶지 않은 소리들뿐이었다. 고음 으로 질러대는여자들의 비명 소리, 집들이 탁탁 불 똥을 튀기며 타다가 이내 우르르무너져 내리는 소 리, 거센 억양으로 울려대는 왜병들의 고함 소리, 그와 함께 밤하늘을 흔들어대는 잔인한 웃음 소리…….
방금 전만 해도 온몸을 욱씬거리게 했던 고통도 싹 달아나 버린 양더 이상 느껴지지가 않았다.
은동은 재빨리 다람쥐처럼 몸을 데구르르 굴려 가까이의 논두렁으로 뛰어들었다. 이제서야 겨우 모내기 가 끝난 논에는 은동의 몸을 가려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은동은 논에 몸을 쳐박고서 진흙을 발랐다. 피와 토사물을 씻어내려고 얼굴에도 진흙을 사정 없이 문질러댔다.
한껏 조심을 기했지만 첨벙거리는 작은 물 소리가 폭포수보다 더크게 들리는 듯했다. 그 소리를 들었 는지 왜병 몇이 술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 이 보였다.
은동은 망설이지 않고 진흙탕에 얼굴을 박고 납작 엎드렸다가 다시 위로 누웠다. 어둠 속에서 흙으로 뒤집어씌워진 자신의 모습이 잘보이지 않을 것이라 고 믿었던 것이다. 은동의 온 몸은 점점 다가오는발 자국 소리와 함께 부들부들 떨리기를 더해왔고 심장 은 물레방아처럼 쿵쿵거리며 뛰었다.
잠시 후 발 소리가 논두덩 바로 위에서 멎었다. 은동은 자기 눈의 흰자위가 빛에 반사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슬그머니 실눈을 떴다. 왜병은 둘이었 다. 그 중 한 놈은 왼손에 긴 칼을들었고 다른 손으로는 사람들의 코를 잘라 꿴 것이 분명한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또 한 놈은 이상하게 생긴 길다란 막 대기를 들고 있었다. 놈들은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여대고 있었는데, 아마도 목소리가 좀더 걸걸한, 막대기를 쥔 놈이 다른 놈을 야단치는 것같 았다. 목소리가 앙칼진 다른 녀석이 불만스런 어조 로 중얼거리더니손에 든 것을 내던졌다.
그 물건이 은동의 바로 앞에 철썩 떨어졌다. 은동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순간적으로 터져나 오려는 비명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방금 전까지 놈 들이 들고 있던 코 묶음이었다. 십여 개가 넘는코들 이 칡덩굴에 꿰어져 있었다.
곁눈질하는 은동의 시야에, 오른쪽 콧날 한쪽에 작 은 점이 있는 코가 보였다. 은동은 숨이 턱 막혔다. 어머니의 오른쪽 콧날에도 작은점이 보일 듯 말 듯 은은히 박혀 있음을 기억해 냈던 것이다.
그러나 은동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냐. 어머니 벌써 도망가셨을 거야.’
은동의 두 눈에 새로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점이 박힌 코가 자꾸만은동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은동은 눈을 감았다.
‘어머니가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은동은 주문이라도 외우듯 계속 마음속으로 부르짖 었다.
머리 위에서 들리는 왜놈들의 억센 억양이 은동의 머릿속을 온통헤집었다. 잠시 후 그들의 말소리가 끝나고 저벅거리는 소리가 멀어져 가기 시작했다. 왜병들의 발자국이 들릴 때마다 은동은 낙인이라도 찍히는 듯 가슴을 움찔거렸다.
다시 고요가 찾아들고, 여기저기서 철 이르게 튀어 나온 개구리들이낯선 침입자들이 물러간 것을 환영 이라도 하듯 울어대기 시작했다.
은동은 눈을 떴다. 밤하늘에 자욱히 깔린 별들이 눈 물로 흐려진 운동의 눈망울에 잠겨 들었다. 은동은 모든 신경이 눈과 귀로 집중되는것을 느꼈다. 은동은 눈물을 훔치고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록 이 세상은 난장판이었지만, 하늘만은 멀쩡했다.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 사이로 별똥별 하나가 길 다란 꼬리를 달고 떨어지고 있었다.
“어머니…..”
은동은 무심코 소리를 내려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 다. 다시금 온몸의 피가 눈과 귀로만 몰리는 것 같 았다. 혹시나 자신의 말 소리를 누가 듣지는 않았을 까 하여, 은동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마을 쪽으로 눈을 돌렸다.
왜병들이 줄을 지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개중에는 보따리와 곡식 가마를 진 자도 있었고, 여 인네를 어깨에 짊어진 자도 있었다.아직도 불타고 있는 한쪽에서는 반쯤 벌거벗은 왜병 하나가 반항하 는 여자의 배에 칼을 꽂는 끔찍한 광경도 보였다. 여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고꾸라졌 다. 젊은 여자였다.여자의 몸이 축 늘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은동은 눈을 감지도, 외면하지도 않았다. 왜병의 비웃음 속에 칼을 맞고 죽어가는 여자………….. 불타는 마을.. 눈을 뒤집고 죽은 박서방……. 잘려 진코 묶음…….
아,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점에 박힌 코는 정말 어머니의코일까? 군관으로 나간 아버지는? 뒷 집에 살던 계집아이 행희는? 글방 친구들은? 그들 도 저런 꼴을 당했을까? 아니, 조선 팔도 전체에서 저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아, 이 잘라진 코는 정말 어머니의 것인가?
‘아냐……. 아닐 거야……아닐 거라구!’
은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리는데도 눈 한번 깜 빡이지 않았다.어느덧 무서움은 달아나고 없었다. 왁자지껄 웃고 떠들며 사라지는왜병들의 모습이 완 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은동은 눈을 부릅뜨고그 광경을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왜병들이 사라지자 은동은 목각인형처럼 뻣뻣하게 일어섰다. 그러고는 다시 상체를 굽히고, 외갓집 쪽 을 향해 무릎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집은 이미 불더미로 화해 이글거리고 있었고, 마당 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외 가로 올 때 아버지가 소중하게 들고 왔던 책 궤짝도 뒹굴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 있던 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아마도 왜병들은 궤짝에 귀중한 것이 들은 줄 알고끄집어냈다가 낡은 책만 있는 것을 보 고는 그대로 팽개쳐 두었으리라.
책을 보자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지금 왜놈 들과 싸우고 계실까? 은동은 무의식중에 책 한권 을 집어 품 속에 넣었다.갑자기 바람이 불어 왔다. 그러자 지붕이 무너지려는지 와르르 하는 소리가 났 다.
은동은 재빨리 아까 몸을 숨겼던 논두렁으로 뛰어들 었다. 코 묶음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아,점에 박 힌 저 코……. 아냐, 절대 아니야,저건 어머니의 것 이 아냐…….
은동은 부르짖었다.
그리고 동이 틀 때까지, 진흙투성이인 채로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주 -실제로 토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豊臣秀 吉)에 의해 코 베기가대대적으로 행해진 것은 정유 재란 이후의 일이다. 그때는 병사 한 명당 코 3개씩 의 의무량이 정해지기도 했다. 그때 베어진 코의 개수는 수십만 개에 달하였는데, 그 모두가 병사의 것 만은 아니었을 것이며일반 백성들의 코도 많이 베어 졌다고 한다. 그러나 은동이 겪고 있는이 당시의 상 황은 임진왜란 때이므로 코 베기의 명령이 왜군에게 정식 하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코 베기로 전공을 보고하는 것은 전국시대를 막 벗어난 당시의 일본에 서는 다소 일상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 런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왜병이 코를 베었다가 다 시버린 것으로 설정한 것이다. 실제의 고증에 어긋 나는 것이라 오해하거나 잘못된 상식으로 받아들일 분이 계시지 않을까 염려되지만, 이런 코 베기는 얼 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