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1권 – 14화 : 조선군의 위기
조선군의 위기
“어떤가?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겠 나?”
강효식이 눈을 감고 무아지경에 들어간 지 한 시진 이상이 지나도록, 신립은 그에게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걸리지않을 것이라던 애 초의 말과는 달리, 강효식은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안색이 여러 차례 변하였다. 혼이 나간 것처럼무아지경에 빠져 버린 강효식의 안 위가 신립은 내내 걱정이었다.그러다가 마침내 안색 이 해쓱하게 질린 채 강효식이 눈을 번쩍 뜨자, 신 립은 반가운 마음에 얼른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장군…….”
“그래. 땀을 많이 흘렸네. 괜찮은가?”
“예… 괜찮습니다. 그리고……”
강효식은 말을 더듬거렸으나, 신립은 그가 기(氣)를 몹시 사용하여그러려니 하고 별 생각 없이 넘어갔 다.
“뭔가?”
“그 일・・・・・・ 심려치 마옵소서. 그다지 적대적이지는 않은 듯하옵니다. 악의를 가지고 탄금대에 진을 치라 권한 것은 아니오니, 오히려복으로 생각하시는 것이 옳을 것 같사옵니다.”
“호, 그래? 그거 다행이로군. 내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정말 수고가 많았네.”
“천만의 말씀이옵니다.”
“피곤하지는 않은가?”
“이 정도는 문제 없사옵니다. 좌우간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아 다행이옵니다.”
“그래, 그래.”
신립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거려 보이며 빙긋 미소 를 짓고는 일어나 강효식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제 우리도 출진 준비를 하세. 새벽까지는 탄금대 에 진을 쳐야할 것이니 말일세.”
“예. 그러면 소장 물러가겠사옵니다. 아무튼 심려 놓으시옵소서.”
“그래. 우리 내일 멋지게 싸워서 왜구들을 모조리 도륙내고 상감께 승전보를 전하도록 하세. 주상께 서 왜구들 때문에 심려가 이만저만이 아니시네.”
“예. 소장, 신명을 다하겠사옵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올린 후 강효식은 신립의 장막을 물러 나왔다.
군막 앞을 지키던 군졸은 강효식의 얼굴이 달빛에 비쳐서인지 한순간 몹시 파리하게 보인다고 생각했 다. 그러나 강효식은 그 군졸의의아해 하는 눈길에 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 서 자신의 막사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한참 점호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병사들은 눈을 비비며 밖으로나와 대오를 맞추고 막사와 진채의 기 물들을 수레에 싣는 등 이동할준비를 마지막으로 끝 마쳐 가고 있었다.그리고 백두산 천지에서 촌각을 다투어 달려온 태을과 흑풍사자,윤걸과 흑호가 조선 군의 진영에 도착한 것은 이동 준비가 거의 끝나가 는 바로 그 시점이었다.
“나는 아무리 둔갑을 한데두 사람들이 저렇게 모여 있는 곳은 별루요. 게다가 내가 싫어하는 쇠 냄새도 너무 많이 나구.”
흑호는 조선군 진영에 도달하였을 때, 자신은 사람들과 직접 마주치기 싫다고 말했다.
“나는 토둔술을 써서 땅 속에 있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겠수? 귀가 밝은 편이니 땅 속에 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수.”
하기는 아무리 둔갑술을 쓴다고 해도 신체가 있는 흑호로서는 병사들이 득시글대는 진중으로 들어가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흑호는토둔술을 써서 땅속 에 들어가 병사들의 동정을 살피도록 놓아두고,태을 사자와 흑풍사자, 그리고 윤걸은 조선군의 진중을 직접 탐방해보기로 했다.
이들 셋은 저승의 기운으로 몸을 싸고 있었기 때문 에 비록 조선군의 진영에 칠천여 명에 달하는 병사 들이 있다고 해도 아무도 그들을볼 수는 없었다. 또 한 사람의 몸에 부딪친다 하더라도 저승사자의 몸은 사람의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버리기 때문에 눈치 채 일 염려도 없었다. 다만 사람도 영이 있는 존재라 저승사자가 통과하게 되면, 그 사람은 웬지 모르게 소름이 돋거나 진저리를 치거나 재채기를 하거나했 다. 다른 존재가 자신의 몸을 통과하는 것에 대해 사람의 신체도 약간이나마 반응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승사자들은 그런 일을 흔하게 겪어 온까 닭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이곳저곳 을 돌아보며 정말 이들이 진을 옮겨 다른 곳으로 갈 것인지 어쩐지를 살폈다. 잠시 돌아다니며 정보를수 집한 결과, 조선군이 탄금대로 진을 옮기려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훌쩍 몸을 날려 어느 막사의 뾰족한 지붕 위 로 올라섰다.천으로 된 가벼운 막사였지만, 무게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이들은 아무 곳에라도 올라 설 수 있었다.
“정말로 진을 옮기려나 보오.”
흑풍사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윤걸도 고개를 끄덕였고, 태을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잘못 되어 가는 것이 틀림없소. 조선군의 대 장은 어쩌다가이렇게 천기를 거슬리는 결정을 내리 게 되었는지 모르겠소.”
윤걸이 태을사자에게 물었다.
“만약 이들이 다른 곳에 진을 치게 된다면 어떤 영향이 있을 것 같소? 저승사자들이 영혼을 회수하는데 곤란을 겪으리라는 것은 차치하고 말이요.”
“영혼을 회수하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소. 그보다 는 천기로 정해진 전쟁의 운명 자체가 바뀔까봐 그 것이 더 저어되는구려.”
“전쟁의 운명이?”
태을사자는 여전히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흑풍사자도 들었겠지만 어제 이판관은 명을 내리셨 소. 아다시피이판관은 천기를 전달해 주는 분이오. 그분은 분명 날이 밝은 후 왜군과 조선군의 전투가 문경새재에서 이루어지며 승패의 비율은 반반이라고 하시었소. 그런데 조선군은 어찌된 일인지 천기를 어기고 탄금대로 진을 친다고 하고 있소. 그렇다면 승패의 비율도 완전히 달라질것이 아니겠소?” 윤걸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고 승패의 결과가 달라질까요?”
“정해져 있는 싸움터가 바뀌었다면 그 싸움의 결과 도 천기와 다르게 흘러가지 않겠소? 우린 이미 수 백에 이르는 영혼을 상주 싸움 때잃어 버렸소. 그리고 내 짐작에는・・・・・・.”
“짐작에는?”
“이 전쟁의 결과가 많이 달라질 것 같소. 그래서 죽 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 오. 아니, 분명 그렇게 될 것 같은예감이 드오. 그 렇게 해서 더 많은 영혼이 실종될지도 모르는 일이 오.아니, 그 편이 훨씬 쉽겠지. 죽지 않아도 될 자 들이 죽은 경우에는 저승사자들도 당황하게 마련이 고, 그러면 영혼들을 빼앗을 기회가 더더욱 많아질 테니까요.”
“그…… 그럼, 이 일도 마수들이 꾸민 것이라는 말 씀이오?”
태을사자는 대답하지 않고 잠시 동안 생각에 몰두했 다. 그러고 나서 태을사자는 말했다.
“지금 이 진중에는 조선 팔도의 병사들이 모두 모여 있을 뿐 아니라, 한양의 근왕병들까지 와 있는 것 같소. 그렇다면 이 부대는 조선의 마지막 보루라 할 수 있을 것이오. 만일 이 부대가 무너지면 한양이 점령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그래서 조선이 패하면………..”
그러자 흑풍사자가 부르짖듯이 말했다.
“명(明)국이오! 왜국은 명국에 쳐들어가기 위해 조 선에 길을 빌려달라고 말했다고 했소.”
윤걸은 놀란 표정을 지었고, 태을사자는 고개를 끄 덕였다.
“그렇소. 명국은 조선보다 수십 배나 크고 인구도 수십 배 많소. 그곳에서 또다시 이처럼 천기에 어긋 나는 전투가 벌어진다고 생각해 보시오. 상주 싸움 에서 잃은 수백의 영혼, 여기 탄금대 싸움에서 잃을 지모르는 수천의 영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만, 수십만의 영혼들이어디론가 사라질 것이오.”
윤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명국은 대국인데 왜국이 과연 이길 수 있을까요? 대적하는 명국의병사가 수십만이 넘을 것이고, 보급 로는 갈수록 길어져서 싸움이 어려워질 텐데요?”
태을사자는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알 수 없지요. 그러나 만약 정체 모를 어떤 힘이 있어서 천기를 어긋나게 만들고 전쟁의 향방을 바꿀 수 있다면, 명국과 왜국의 전쟁 결과도 바꿀 수 있을 것이오…….”
흑풍사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태을사자의 추측이 맞다면 이건 정말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그래서 무엇을 하자는 것일까요?”
“나도 잘 알 수는 없소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시오. 왜국과 명이 전쟁을 치르게 된다면 조선의 모든 장 병도 징집되어 나갈 것이고, 그러면 싸움의 규모도 지금처럼 일,이만이 아니라 수십만의 군세가 맞닥뜨 리는 전쟁이 될 것이오. 그렇다면 죽어 사라지는 영 혼의 숫자도 몇만 몇십만, 몇백만에 이를 것이 아니 겠소?”
“몇십만, 몇백만의 영혼으로 무엇을 한단 말이오?”
“그것은 나도 짐작할 수 없소이다. 어쨌거나 지금 마계의 괴수들이인간의 영혼을 훔쳐 간다는 것은 반 쯤 확실해진 일이 아니겠소?”
윤걸은 얼굴빛이 질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흑풍사자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천기를 어지럽히는 짓을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마계라도 그것은 곧…….”
“그것이라니?”
“그것은 계(界)간의 전쟁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소? 그렇지 않소?”
흑풍사자의 말에 윤걸만이 아니라 태을사자의 낯빛 까지도 질려 버렸다. 생계의 일에 대해서는 거의 감 정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사계의존재들이었지만, 자 신이 속해 있는 사계의 안위에 대해서 걱정하는것은 생계의 존재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저…… 전쟁이라니! 어찌 그러한 일이…………!”
윤걸은 놀라움에 소리를 쳤지만, 태을사자는 침착한 태도를 잃지않고 얼굴빛만 조금 변한 채로 고개를 한 번 끄덕해 보였다.
“일리 있는 말씀이오.”
마계가 이런 식으로 생계의 질서를 깨트리고 천기를 어지럽혀 간다면, 사계도 그냥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마계로 가는법을 아는 자가 없을 뿐 더러, 가더라도 유계와 환계를 통과하여야 할것이 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계와 광계, 신계의 도움을 청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계간의 전쟁이 유발될 수도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래서종국적으로 우주 전체의 전쟁으로 번진다면…….
태을사자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고는, 부근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 말했다.
“좌우간 일단 우리의 할 일을 상의하기로 합시다. 물론 이 일을 사계에 보고해야 하겠지만, 그 전에 좀더 정확한 상황을 알아 볼 필요가있을 것 같소이다만…….”
흑풍사자가 말했다.
“우리 중 하나는 일단 사계로 올라가서 보고를 올리 고, 나머지 둘은 동이 틀 때까지 동정을 살피는 것 이 좋겠소이다.”
“그러면 흑풍사자께서 먼저 가시오. 아무래도 일이 화급하게 돌아갈 것 같소이다. 정말로 조선군의 장 수 신립이 마계의 영향을 받아 진을 옮겨 패배를 자 초하는 것이라면 한시 바삐 이것을 바로잡도록 해야 하지 않겠소?”
윤걸도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그러자 흑풍사자는 둘의 얼굴을 잠시 쳐다본 다음에 말했다.
“진을 옮기지 말도록 신립을 설득한다면 우리도 천 기를 어기게 되는 것이 아니오?”
저승사자를 비롯한 사계의 존재들은 생계에 영향을 주는 행위를하는 것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그 들은 약간이나마 천기를 짚어알 수 있는 존재들이므 로, 그러한 행동을 한다면 그 영향을 받아 천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소지가 있기 때문이엇다. 천 기를 누설하거나 천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는 죄는 그야말로 무거웠고 엄격하게금지되어 있었다. 흑풍 사자가 주저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러나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천기가 어긋나는 것을 바로잡으려 하는 것 일 뿐, 천기를어그러뜨리려는 것이 아니외다. 생각 해 보시오. 홍두오공이 나타나인명을 해칠 때 그것 은 곧 천기를 어그러뜨리는 일이었으므로, 사계와 다른 계의 존재들이 나아가 그것을 잡으려 하지 않았소? 우리가 신립에게 알려 전쟁의 향방을 원래 정해진 천기대로 흘러가게 하는것도 그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하오.
이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다만…….”
태을사자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우리 임의대로 하는 것은 곤란하니 상부의 허락을 받아야 하겠지요.”
그러자 흑풍사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태을사자께서 먼저 가서 사정을 고하시오. 그런 것을 나로서는 잘 설명할 수 없을 것 같구려. 수고스럽더라도 언변에 능하신 태사자께서 가 주 시면, 우리는 신립의 주변에 있다가 허락이 떨어지 는 즉시 신립에게 현몽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 을 강구하여 싸움이 벌어지기 전에 진을 바꾸도록 해 보겠소.”
그러자 윤걸도 한마디 거들었다.
“날이 밝으면 이들은 곧 왜군과 맞닥뜨릴 것이오. 허락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왜군 진지로 가서 소서행장의 진군 속도를 느리게 만들어 보겠소이다.
탄금대에서 진을 거두기도 전에 왜병이 내습해 온다면 막을 수조차 없지 않소이까?”
윤걸의 말에 태을사자도 동의했다.
“좋소이다. 그러면 각자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흑호에게도 누군가가 알려주는 것이 좋겠소.”
윤걸이 말했다.
“내가 토둔법을 써서 흑호에게 알리리다. 나는 근위 무사라 토둔법을 알고 있소이다.”
흑풍사자가 한 가지를 덧붙였다.
“조선군이 진영을 옮기기 전에 윤 무사와 흑호는 나 와 함께 여기저기 좀더 둘러봅시다. 아직 해가 뜨려 면 반 각 정도 남았으니 한 번 둘러보는 데에는 지 장이 없을 듯하오.”
“그러면 각자 행동에 들어갑시다. 시간이 별로 없 소.”
마지막으로 태을사자가 말하자, 셋은 각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흑풍사자는 신립의 막사 로 향하고, 윤걸은 토둔술을 써서 땅 속으로 들어갔 고 태을사자는 사계로 몸을 전이시켜 갔다.
진영을 돌며 장병들의 동정을 살피던 흑풍사자와 흑 호, 윤걸의 셋은 조선군이 신립 등의 급작스러운 결 정에 따라 새재를 떠나 탄금대에 진을 치게 되었다 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병사들은 진영을 옮기는 의미에 대해 전략적인 판단 까지야 하지는않았지만, 늦은 밤중에 갑자기 진영을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만스러워 했다. 그리고 신립의 북방 전투에 참여했던 부대나 전쟁 경험이 많은 고참병들의 부대는 별 말이 없었으나, 후방의 한직에 있던 군사들이나 급히 모집된 신병들은 불안 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조총이란 거, 쏘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 땅 소 리만 나면 사람하나가 고꾸라진다면서? 왜병이 그 런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데, 우린다 죽는거 아냐?” “아따. 그런 걱정 허들 말드라고잉. 그건 아무것도 아닝께. 우리 조선 진영에도 승자총통이라는 무시무 시한 병기가 있대야. 원래 신장군이 승자총통 운용 에는 귀신이라고 형께 걱정 붙들어매소. 다 방책이 있지 않겠는가.”
“왜병들은 수십 년 동안 사움질만 했다 안 카나? 그런 놈들하고 붙으면 워데 힘 한번 써보기나 하겠나?”
“길고 짧은 건대 봐야 하는 것이지유.”
돌아다니면서 듣는 병사들의 말투로 보건대, 북도 쪽의 병사들은거의 없는 듯했다. 경상도의 패잔병에 서부터 전라도의 군관, 한양의포졸들에 이르기까지, 병사들은 제 각각의 사투리로 틈만 나면 걱정이 담 긴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경상도의 수군이었다 가 이곳에합류하게 된 어떤 경상도 병사는 박홍과 원균이 겁에 질려 150척에달하는 전선을 일부러 가 라앉혔으며 1만이나 되는 수군을 해산해 버렸다는 이야기를 동료에게 들려 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윤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거 참, 이상하군. 이곳에 진을 친 병사가 칠천 정 도인데, 바다에서 150척이나 되는 전선에 1만의 수 군을 거느리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 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싸움 한 번 해 보지 않고 도망쳤다니, 정말 해괴한 일이군.”
그러자 윤걸과 흙 속에서 동행하고 있던 흑호가 퉁 명스럽게 말했다.
“인간들이 원래 그렇지 뭐. 나는 저들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하나도 이해가 안 되우.”
한편, 그들과 떨어져 공중으로 다니던 흑풍사자는 어느 막사 부근에서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 아직 싸움이 벌어지기 전이니 중상자나 죽은 자들이 나올 것도 아닌데, 죽은 지 꽤 오래되었으나 승천하 지 않은 듯한 영의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것도 전쟁터에 어울리지 않는 여자의 영혼 같았으니, 해 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상하군………. 그런 영이 왜 군의 막사 안에 있는 것일까?’
저승사자인 흑풍사자는 본능적으로 그러한 느낌을 놓치지 않았다.물론 지금의 흑풍사자는 이 일에 직 접 관여할 이유가 없지만, 원래가죽은 자들을 거두 어 데려가는 것을 소임으로 하느니만치 그런 것을두 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아마 상황에 맞게 논 리적인 사고를 하는 태을사자였다면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흑풍사자는 천으로 된 장막을 스르르 통과하 여 막사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여자는 없 고 군관 한 사람이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 런데 바로 그 남자의 몸 안에서 죽은 지 오래된 여 자 영혼의 느낌이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나? 남자, 그것도 내일 결전을 앞둔 장수의 몸에 여자의 혼령이 씌여 있다니.’
흑풍사자는 괴이하게 생각하며, 남자의 몸에 손을 대어 안에 숨어있는 영을 뽑아내려고 하였다. 흑풍사자가 막 남자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홀연 히 나타난 강력한 요기가 뒤로부터 흑풍사자의 등을 꿰뚫고 지나갔다.
장막 밑의 땅 속을 돌아다니던 윤걸은 요기를 느끼 고 번쩍 고개를치켜들었다.
근위무사라는 본래의 직분상 요기에 민감한 본능을 갖고 있는 윤걸은 따로 떨어져 있는 흑풍사자의 신 상에 좋지 못한 일이 생겼다는느낌을 퍼뜩 받았다.
“뭔가 일이 벌어졌네!”
윤걸은 옆에 있는 흑호에게 전심법으로 외치고는, 몸을 위로 솟구쳐 흙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흑호는 위로 올라오지 못했다. 흑호는몸을 지닌 존재였기 때문에 군사들이 득실대는 곳으로 모습을 내보일수 없었던 것이다. 할 수 없이 흑호는 지금껏 하던 대 로 토둔술을 써서 윤걸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 움직 일 수밖에 없었다.
윤걸은 흑호가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 이, 신형을 흑풍사자가 있는 곳으로 이동시켜 갔다. 중간에 몇몇 조선군 병사들과 마주쳤으나, 윤걸은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곧장 그들의 몸을 통과하여 지나갔다.
사계로 떠난 태을사자는 항상 보아 오던 황천관에 도달하였다.
태을사자의 마음은 매우 다급했다. 날이 밝을 시간 이 다 되어 가고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도달했구나………. 어서 가서 알려야 한다. 판관에게, 안 되면 아뢰서라도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막 번뇌연에 들어가려던 태사자는 평소와 다른 것 을 느꼈다. 원래 황천관은 사계에 들어가는 관문으 로, 항상 신장 두 명이 커다란 신창(神)을 들고 지켜 서 있었는데, 그 두 신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 았던 것이다. 다만 을씨년스러운 빈 관문만 떡 하고 버티고 있었다.
‘왜 신장들이 없지…?’
태을사자는 행여나 잘못 된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싶어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러나 어쨌든 신립이 천기 를 어기고 탄금대에 진을 쳤으며 그 배후에는 마계 가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명부에 알려야 했다.태을 사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찾아보았으나 역시 신장이 발견되지않자 의아한 마음을 남겨 둔 채 번뇌연으로 몸을 날렸다.
번뇌연을 빠져나와 명부 앞에 선 태을사자는 다시 한 번 이상한 것을 느꼈다. 황천관 앞에 신장들이 없었던 것처럼, 명부 앞에도 항상그곳을 지키고 있 던 울달과 불솔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주 변에도 다른 저승사자나 판관, 하다못해 귀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사계가 텅텅 비어 버렸단 말인가?’
자신이 인간이라면 차라리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테지만, 저승사자인 태을사자로서는 그럴 수도 없었다. 그저 답답하고궁금할 따름이었다. 태을사자는 현관을 통과하여 명부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는 기척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전심법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들려왔다.뭔가를 찾거나 부탁하 면서 부지런히 정리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비로소 태을사자는 마음을 놓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쪽으 로 신형을 이동시켜서 보니, 소란을 피우고 있는 자 들은 저승사자들보다 몇계급이 낮은 귀졸(鬼卒)들이 었다. 그들은 서류들과 책자들을 한아름안고 창고에 서 나와, 화수대라 불리는 전대에 그 서류들을 집어 넣고있었다.
화수대는 사계에서 간혹 사용되는 유용한 물건으로, 집어넣어도 집어넣어도 또 집어넣을 수 있는, 거의 무한정의 내부 공간을 갖고 있는푸대였다. 인간 세상에도 화수분이라는 이름의 그릇이 있다고 하는데, 산을 깎아 만든 이 물그릇에 물을 다 채우고 나면 아무리 퍼내도줄지 않는다고 한다. 화수대도 그 이 름을 따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으 나 분명치는 않았다. 물론 이 화수대는 아무 것이나 집어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생계의 물건을 담 을 수는 없고,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사계의 영기로 뭉쳐진 물건만을 담을 수 있는 푸대였다.
태을사자는 귀졸들에게 다가갔다. 귀졸들은 일에 열 중하느라 자신들보다 몇 계급 위인 사자가 오는 것 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태을사자를 발견한 다음 에도 약간 주춤거리며 가볍게 목례를 했을 뿐, 일에 서 손을 떼지는 있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태을사자가 묻자 화수대의 주둥이를 벌리고 있던, 소 머리를 가진흉하게 생긴 귀졸 하나가 대답했다.
“창고를 비우고 있습니다. 판관의 분부입니다.”
“내 황천문을 통해 오는 길이다. 그런데 신장이나 명부의 문지기들이 보이지 않던데, 모두 어디로 갔는지 아느냐?”
“급한 일이 있다 하여 모두 소집되어 갔습니다.”
“문지기까지 모두 소집해야 할 일이 있었단 말이 냐?”
“저희들은 잘 모릅니다. 저희 같은 것들이야 사계 뇌옥에 갇힌 죄수 신세나 마찬가지인데 무엇을 알겠 습니까. 다만 이곳의 일이 바쁘다 하여 서둘러 돕고 있는 중입니다.”
귀졸들은 불가에서 말하는 일종의 야차들이며, 민간 에서 이야기하는 두억시니나 도깨비들이기도 했다. 그들은 말하자면 인간 세상의노비와 흡사한 존재들 로, 대부분 인간의 형체를 지니고 있기는 했으나 그 머리는 소나 말, 돼지나 개 등의 형상을 하고 있었 다. 그들은뇌옥을 경비하거나 지옥에서 죄 지은 영 혼들에게 벌을 가하는 등 말단의 일을 하는 존재들 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물어 보아야 뭔가를알아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태을사자는 더 캐물으려다가 마음을 돌려 다른 것을 물었다.
“판관들께서는 모두 어디 계시느냐?”
“거의 나가신 것 같고…… 이판관은 계십니다.”
“이판관이 계시다고? 그거 다행이로구나. 어디에 계시느냐?”
“아마 뒤켠의 자비전에 계실 겁니다.”
“자비전이라고? 알겠다. 수고들 하여라.”
“예!”
태을사자는 귀족들을 뒤로 하고, 급히 신형을 이동 시켜 명부의 뒤켠에 있는 자비전으로 향했다. 자비 전은 이판관이 자주 드나드는 곳으로, 이번 일을 떠 나기에 앞서 이판관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장소이기 도 했다.
자비전에 도달하니 과연 안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원래 자비전은판관, 그러니까 6품 이하의 계급을 지 닌자들은 마음대로 출입하지못하는 곳이었으므로, 태을사자는 밖에서 고했다.
“아뢰오!”
“태을인가? 안으로 들게.”
안에서 이판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을사자는 허락을 받자 신형을 가볍게 이동시켜서 자비전 안으 로 들어갔다.
이판관은 예의 그 난초를 묵묵히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 있었는데,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차피 사 계의 존재인 판관이나 사자들의 안색이 혈기 면 좋은 색일리는 없지만, 이판관의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가득 깃들어 있었다. 태을사자는 고개를 조아리며 긴장된 어조로 말했다.
“아뢰옵니다. 생계에 큰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가…………….”
태을사자가 긴장하여 말하는데도 이판관은 시큰둥하 게 대답하며 여전히 난초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태을사자가 조금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 이판관의 입에서는 태을사자가 깜짝 놀랄 말이 튀어나왔다. “여기도 큰일이 벌어졌네……. 유계의 마물들이 사 계 변경에 집결하고 있네.”
“유계의 마물들이라 했사옵니까? 그들이 어째서…….”
이판관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말했다.
“모르겠네.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것인지………….”
인간계도 아닌 사계에 전쟁이라니……. 태을사자는 깜짝 놀라서 자칫하면 신형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넘어질 뻔했다. 태을사자가 놀란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동안, 이판관이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지금 사계 내의 신장들을 비롯하여 도력을 지니고 싸울 수 있는자들은 모두 변경에 투입되어 경계를 강화하고 있네………. 생계의 영혼을 관리하는 아주 적은 수만 여기 일을 보고 있는 중이라네.”
“작은 분쟁이 아니옵니까? 유계의 마물이라면 그다 지도력이 높지않을 터인데….”
“집결한 마물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가? 자그만치 육백만일세.”
“육백만 마리요?”
태을사자는 다시 한 번 놀라서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판관은 고개를 저었다.
“육백만 마리가 아니고 육백만 무리일세……………. 한무리를 대략 일초(초는 조선시대 때 군사의 숫자를 세 던 단위. 약 백 명의 부하와 몇명의 장교로 편성된다)로 잡아도 육억이 넘는 숫자라네.”
태을사자는 아예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저승의 무관과 신장, 사자들, 기타 도력 있는 자들 만 싸움에 참여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자신이 아는 범위에서 그 숫자는 약 팔만 가량이 될 것이 다. 조선을 관장하는 명부에 속해 있는 저승사자를 모두합치면 이천, 무관은 약 천 명 정도, 신장과 판 관 등 여타 존재를 합치면 오백 정도를 헤아리니 그 들이 모두 동원되었다고 해도 삼천오백의군세에 불 과하다. 그리고 조선 외에 각 나라를 관리하는 명부 가 삼백곳 정도 흩어져 있는 것으로 태을사자는 알 고 있었다. 명부 중에서도인구가 많은 중원(중국)을 다루는 곳이나 천축(인도)을 다루는 곳은훨씬 규모 가 크겠지만 훨씬 작은 곳도 있으니, 조선을 평균으 로 볼 때동원될 수 있는 군세는 대략 백만 정도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면비록 유계의 마물들이 환계 나 마계와는 달리 대부분 그 도력의 경지가 낮고 약 한 것들이라고 하나, 그 수가 육억이라면 거의 육백 대일의 싸움을 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사계는 이 보다 범위가 더 넓었으나, 사계의 다른 부분들은즉각적인 통솔을 할 수 있는 곳이 아 니었다. 동물을 다루는 곳이나 다른 별을 다루는 곳 까지 합치면 사계 전체의 명부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러한 영역들은 별도의 차원에 있으므로 아무리 사계 내에속한다 하더라도 지원을 바라거나 소통을 할 수 없었다.
태을사자는 긴장하여 말했다.
“저승 내의 귀족들까지 모조리 모은다면 수가 몇억 은 되지 않겠사옵니까?”
“그렇다고 하여 본연의 일을 중단할 수는 없지 않은 가. 하물며 아직은 전쟁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말이 야. 윤회를 관장하는 일조차 버리고 모조리 싸움에 만 뛰어들면 세상이 어찌 되겠는가. 이미 광계와성 계에도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사계 본연의 임무를 중단해서는 아니된다는 염왕의 분부가 떨어졌다네.”
그것은 이판관의 말이 맞았다. 귀졸이나 기타 하급 의 존재는 도력이 별로 없으니 제대로 싸울 수도 없 을 것이며, 영혼을 관리하는 업무를 중단한다는 것 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 사계에는 수억의 인간 영혼들이 윤회 과정을 거치고 있거나아니면 지옥에서 벌을 받고 있었다. 그러한 영혼들을 관리하고 벌을주고 판가름을 내리 려면 역시 수억의 귀졸들이 필요했다. 그 일을 중단 한다면 세상의 조화는 깨어지고 말 것이다. 태을사자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판관은 백두산에 갔던 일은 어찌 되었는가 하고 물었다. 그제서야 태을사자는 정신을 차리고 그간의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백두산에 도달하였으나 호군을 비롯한 호랑이들이 모두 주살되어 있었다는 것, 흑호라는도력을 지닌 호랑이를 만났고 그로부터 조선 땅의 도력 있는 짐승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사 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신립이 천기를 벗어나서 새 재에 진을 치지 않고 탄금대에 진을 쳤다는 것 등을 알렸다. 그리고 천기를 바로잡기 위해서 뭔가 조치 를 취해야 한다는 말로 보고를 끝마쳤다.
이판관은 태을사자의 말을 들으면서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을사자가 말을 마치자, 이판관은 심각한 얼굴로 난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 겼다. 여기저기서 천기가 어겨지는 와중이라, 이판 관으로서도 선뜻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운 모양이었 다.
“흠…… 그러나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도 없지 않은 가?”
“신립이 탄금대로 진을 옮긴 것 자체가 천기를 어긴 것이 아니옵니까? 그러한 일이 있다면 천기를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그러자 이판관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생각해 보게나. 지금 여기도 문제가 많다네. 유계 와 지금 험악한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말일세. 그런데 신립이 다소 그릇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천기를 건드리는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신립이 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인지에 대한 내용도 자네는 아 직 모르지않는가? 모든 것을 추측으로만 해결할 수 는 없는 일이네.”
태을사자는 기가 꺾였다. 자신이 경솔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기야 자신의 판단만 믿고 상부에 이런 보고를 올려서 좋은 결과를 바란것도 무리거니와, 더 구나 사계에서도 상당한 혼란이 벌어진 마당에이판 관이 난색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태을사자는 다소 불손한 어조로 말했다.
“하오면 신립에게 영향을 미쳐서 탄금대의 포진을 바꾸게 할 수는없다는 말씀이옵니까?”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는 아니되네. 생계와 사계가 교통하여 그 나아가는 방향을 간섭하게 하는 것은 내 권한 밖의 일이야.”
“하오면 염왕께 품을 올리는 것은………….”
“답답하구먼. 이보게 태을. 증거도 없이 염왕께 어 찌품을 올린단말인가? 사실 말이네만………….”
이판관은 더욱 침울한 안색이 되어 태을사자에게 말 했다.
“과거 왜란이 발발하던 날, 박홍과 원균이 경상도의 조선 수군을모조리 해산한 것에 대해서도 천기를 어 긴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올라온 바 있다네. 그 이 야기는 들었는가?”
“알지 못하옵니다.”
“좌우간 괴이한 일이었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당 시원균의 행동이었어. 그는 자신의 수군 전함 75 척, 박홍의 함대까지 합쳐 총 150척이나 되는 군선 을 모두 구멍을 뚫어 물에 밀어 넣고는 두세 척의 배만거느리고 싸운답시고 전라도로 갔다네. 전라좌 수사 이순신과 힘을 합쳐 싸운다고 말이네.”
그 말을 듣자 태을사자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싸움이 두려워 겁을 먹었으면 그대로 숨어 버릴 노릇이고,싸우러 갈 것이면 자신의 함대를 모 두 끌고 나가서 왜군과 싸울 것이지 어찌 그런 행동 을 했답니까?”
“그래서 원균의 행동에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는 이야기가 돌았지. 이건 왜국측 명부에서 전해 준 이야길세. 왜국측은 당시 수군의싸움으로 인해 왜군 전사자가 많이 나올 것으로 알고 그에 대비했다더 군. 천기에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는 거지. 그런데 막상 결과가 딴판으로 나와서 왜국측 저승사자들이 헛탕을 칠 수밖에 없었다네. 그래서 그 행동을 납득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올라오게 된 거지. 이건 생계의 시간으로 이미 여러 날 전의 일이네.”
“그래서 어찌 되었답니까?”
“그 일은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네.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어느 정도 천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으니까.”
태을사자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인간이 어떻게 천기를 변화시킨다는 말입니 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팔계를 통틀어 힘이 지극히 약 하고, 수도 많지않으며, 죽고 다시 나는 과정을 반 복하게 되어 있는 미약한 존재일세.허나 바로 그 점 이 인간들을 세계의 근간으로 만드는 이유라네. 우 리사계만 보더라도 그들이 있음으로 해서 존재하는 것 아닌가? 비록 미약하고 힘이 없다 하나 인간의 영혼을 그토록 존중하는 것도 다 그런이유 때문이지.”
“인간의 영혼이 윤회를 거듭하여 점점 발전하면 성 계나 광계, 나아가서는 신계의 존재들로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인가 보군요.”
“그렇다네. 그래서 원균 스스로가 천기를 어긴 것으 로 결론이 나고말았어.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지. 더 욱이 죽기로 된 자가 죽지 않기는했지만, 그 자들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 때문에 결국 그 문제는 흐지 부지되어 버리고 만 것이네.”
태을사자는 이판관의 말을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판관의 말대로라면 왜란이 일어난 후 그와 유사한 천기 변동의 사건들이 여러 차례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번 일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나 이번 상주 싸움에서 대량의 영혼이 분실된 일 은 그것과는 다르옵니다. 죽을 자가 죽지 않은 것이 야 언젠가 때가 되면 그 영혼을회수할 수 있으니 문 제가 작겠지만, 이번 일은 죽지 않을 자가 죽었고그 죽은 자의 영혼마저도 사라진 것이 아닙니까? 어찌 같은 차원으로볼 수 있겠사옵니까?”
“그래서 자네와 흑풍, 윤 무사까지 보내어 이 일을 조사하도록 한것이 아닌가. 나도 자네의 생각에 동조는 하네. 그러나 증거가 필요하단 말일세. 심증만 가지고는 지난번 왜국에서의 일과 같이 흐지부지되 기가 십상이야. 그러니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오라 는 얘기일세.”
“그러나 이제 곧 날이 밝사옵니다. 조금만 더 시간 이 지나면 우리는 생계의 양광 아래에서 더 이상 행 동할 수 없을 것이며, 신립은 탄금대에 진을 친 채 로 왜군과 맞부딪힐 것이옵니다. 그래서 또 수천 명 이 죽고 그 영혼들이 사라지게 된다면 어찌합니 까?”
“그저 최선을 다하라는 밖에…………. 증거를 획득하여 야 하네. 그러지않고서는 일이 안 돼. 나도 이 일이 깨끗이 처리되기를 바라고 있어.흐지부지되는 것은 나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네. 알겠는 가?”
태을사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태을사자는 착 잡한 기분으로이판관에게 읍하고는 자비전을 나서려 했다. 그때 아주 짧은 순간, 태을사자는 자비전에 있는 난초에서 이상한 기운이 나오는 것을 느꼈지만, 이판관의 앞에서 무례를 범할 수도 없는지라 그냥 자리를 물러나왔다.
그리고 태을사자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생계를 향해 몸을 전이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