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4권 – 10화
“그럴려면 상고시대에는 사람들이 글씨도 몰랐고 불도 몰랐고 농사짓는 법도 몰랐다는데, 그 때와 비 교하면 지금이 얼마나 좋아? 왜 그때와는비교하지 않지? 몇 백년 후에 사람들이 더 똑똑해져서 얼마 나 잘 사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먼 미래의 일이 잖아! 왜 알지도 못하는 미래의 일을가지고 조선을 몰아세우는거야!”
호유화는 화가 나서 잠시 생각을 가다듬었다.
‘제기랄. 내 꾀에 내가 빠지는구나. 좋다. 그러면 내가 먼저 생각을 좀해보자. 일단 내가 아는 지금의 나라들과 비교해 보아서 조선이 못한 점을찾아 내면 되겠지!’
생각한 호유화는 법력을 극도로 끌어 올렸다. 호유 화는 매우 자존심이강하고 한 번 화가 나면 눈에 보 이는 것이 없는 성질인지라 은동에게 이대로 지기는 정말 싫었다. 그래서 호유화는 크게 법력을 소모하 게 되어 잘쓰지 않던 대천안통(大天眼通)의 술법을 쓰려고 한 것이다. 이 대천안통을 자기의 삼천년 법 력과 융화하면 한번에 세상을 두루 훑어 볼 수도 있는것이었다. 다만 너무 손상이 심해 법력에 큰 지장 을 주게 될수도 있었지만호유화는 그런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은동은 갑자기 승아의 머리칼이희게 변하면서 하늘로 솟구쳐 오르자 깜짝 놀라서 뒤로 뒷걸음질을 쳤다.
호유화가 입씨름을 하다가 화가 나서 자신을 해치려 는 것은 아닐까 하고겁이 났지만 은동도 화가 많이 나 있던 참이라 뒤로 많이 물러서지는 않았다. 솟구 쳐 오른 호유화의 머리카락들은 점점 솟아올라 하늘 을 뚫을 듯 솟구치다가 번쩍 하는 광채를 뿜었다. 은동은 깜짝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데 다음순간, 다시 승아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는데 얼굴빛이 파리한 것이 탈진한 듯, 좋아보이지 않았 다 은동은 깜짝 놀라 승아에게 가서 말했다. 비록 싸우기는 했지만 은동은 속이 좁은 편은 아니었다. 하물며 아녀자가(그 아녀자가 무시무시한 힘을 지닌 호유화라는 것도은동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갑 자기 기운을 잃고 어디가 아픈 것 같자걱정이 된 것 이다. 그런데 호유화는 그 순간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미대천안통의 술수로 세상을 한꺼번에 훑어 본 것이다. 한 번에 수십년을 보아도 될까말까한 많 은 일들을 보았으니 호유화가 받은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법력이 거의 흩어져 버린 것 같았고 몸까 지 마구 떨려왔다. 그러나호유화는 기를 쓰고 생각 을 집중하여 이름도 모르고 자취도 모를 많은 나라 들을 마구 조선과 비교하였다. 법력을 극도로 써서 거의 탈진할 지경이었으나 호유화는 고집스럽게 머 리에 법력을 돌려 두뇌회전을 수백, 수천배로 빠르 게 돌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호유화는 문득 길게 한 숨을 쉬었다.
“틀렸구나! 틀렸어!”
호유화는 속으로 이런 바보같은 인간들, 멍청이 들 이라고 마구 욕을했다. 현재 세상에는 수백개의 나 라가 있었으나 당시 조선에 비할만한 나라는 없었 다. 서방의 제국들은 엄청나게 싸움을 벌이고 있었 고 백성들의고통은 조선과 비교할 것이 아니었다. 16세기에 서양의 농노들의 생활은조선백성의 생활 보다 몇배는 비참한 것이었다. 서양인들은 고기가 주식이었지만 그들은 일년에 한 번도 고기 구경을 하기가 힘들었다. 모두 영양실조에 걸리고 질병과 전쟁과 엄청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선의 벼 슬아치들이 백성을 수탈한다 하나 어느 정도 명목을 지니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들은 귀족이라 하여 모 든 백성들을 소유물로 생각하고 생사여탈을 그야말 로 마음대로 하였다. 여자를 우습게 아는 정도가 아 니라 초야권이라하여 막 결혼을 하려는 새색시를 영 주가 합법적으로 강탈하는 괴이한 법까지 있을 정도 였다. 조선의 썩은 벼슬아치들이라도 말로는 백성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아예 노골적으로 그들을 짓 밟았다. 단순한 탐욕 때문에전쟁이 잇달았고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 그들은 먼 대륙으로 가서 원주 민의 씨를 말리면서 재물을 수탈했다. (호유화는 유 럽인들의 남미정벌을본 것이다. 실제로 남미는 번영 된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나 유럽인들의 수탈로 인해 인구가 1/20 이하로 격감하였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발전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 서방은 원래 야만인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대국이라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명 왕조는 중국 왕조 중에 서도드물 정도로 수탈과 폭정이 심한 나라였다. 당 이나 송 등은 명군이 나와정치를 잘하기도 하였으나 명나라의 왕들은 거의가 폭군이어서 그곳의 혼란은 조선보다도 몇 배 심했다. 그러니 중국을 중심으로 한 다른 아시아계열의 속국들 또한 고통은 비슷했 다. 아주 머나먼 곳에는 온 몸이 검은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평화롭게 살기는 하였지만 아직 국 가도 이루지 못한 상태에 지나지 않았으니 조선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서방과 중원의 중간 쯤에는 회교를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며 그 사회는 심 히 융성했지만 그 종교는 아무래도 호유화에게는 너 무도 생소하고 억압이많아 이해조차 되지 않았다. 특히 그곳에서 여자를 대하는 것이나 축첩 같은 문 제는 조선보다 수십배나 강하여서 여자는 아예 사람 으로 인정도 받지못하여 얼굴조차 내놓고 다닐 수 없을 정도여서 호유화는 더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천축국이라는 나라도 그런 것은 별로 다르지 않아 비록 사람들의 정신적 수준은 높았지만 처참한 기근과 너무 많은 인구에 시달려서 백성들의 생활은 말 할 수 조차 없을 정도였다. 더군다나 조선은 그런대 로 여러가지 사회제도가 있었다. 소식을 알리는 기 별이나 역마제도가 있었고우편제도도 있었으며 과거 제도가 있어서 백성도 고관이 될 수 있었다. 서방 나라의 경우 귀족이 아니라면 이것은 꿈도 꿀 수 없 는 일이었다. 조선도 계급의 차별이 있다고는 하나 천축국의 계급차별(카스트제도)은 죽어서도 대를 물 려 계급을 이루어 아예 영혼마저 속박할 정도이며 사회신분이낮은 천민(수드라)는 상류계급의 인사에 게 손가락 하나만 대어도 죽음을 면치 못할 정도이 니 거론조차 할 수 없었다. 폐단이 심했다하나 구휼 이나구황제도가 조선에는 있었고 나라가 공짜로 병 자들을 치료해주는 혜민서같은 것마저도 법으로 정 해져 있었다. 양반의 떵떵거림이 극심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동네마다 향약이 있어서 풍속을 단속하였기 때문에 도적이나윤리에 어긋난 자들의 수효는 당시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거의 없다시피하였다. 유교 에 쓸려서 폐단이 많고 번거로운 짓거리가 많았지만 어쨌든 사람들의 윤리의식은 투철하여 범죄나 파렴치 한 짓은 미래와 비교하여도극히 적었다. 기근이 들 면 굶주리고 역병이 돌면 쓰러져 죽어가는 자가 많 은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렇지만 b으면 그런대로 사람사는 꼴로 살 수있었다. 출판이 발달하고 지식 이 융성하여 어느 못사는 농갓집에라도 하다못해 천 자문, 소학 한 두권은 있었으며 문자해득률은 당시 세계 최고였다. 농사짓는 농군들조차 몇마디 문자를 쓸 줄 알았고 변변치 못한 시골수재들조차 글을 휘 갈기고 시를 쓰며 부를 지을 줄 알았다. 사람들은 역병이나 난리, 기근만 없다면 평안하였으며 유쾌하 였다. 그러한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나라는 당시 아무 곳에도 없었다. 조선에 괴질이 들어 수만명이 죽은 적이 있지만 나라에서 의원을 풀어 대책을 마 련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진 일도 많을 정도 로 의학지식도 발달하였다. 서방에서는 흑사병이 돌 아 전 인구의 사분의 일이 죽었는데도 아무 손을 쓰 지 못하였으니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평상시에 조 선 백성들은 열심히 일하였지만 틈만 나면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즐겁게 살았다. 감히 백성이 술을 계속 마실 수 있을 정도의 나라는 당시에는 없었다. 당시 숫자가 가장 많은 중국인들은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요순시대를 그리워했으나 조선은그 러한 요순시대에 거의 근접해 있었다. 당시 어느 세 상 어느 곳에도 그러한 나라는 없었다! 물론 후대 의 세상을 본 호유화로서는 그것들의 결점을수천가 지라도 지적할 수 있었지만 후대의 세상의 잣대로 과거를 볼 수는없었다. 그랬다가는 은동이 아까 말 한 것처럼 미개상태의 과거를 들고 나와 조선의 우 월성을 말해도 할 말이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호유 화는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제기랄. 정말 제기랄이다. 이 놈의 조선이 그럼 지금 세상에서는 그런대로 가장 잘 사는 선진국가란 말인가?’
호유화는 그대로 지고 싶지 않아 억지라도 부려보 려 했으나 문득 은동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은동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 응?”
은동의 말이 들리고 호유화는 은동이 들고 있는 활 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은동 자신이 서투른 솜씨 로 깎아 새긴 ‘柳花’의 두 글자도 보였다.
호유화는 갑자기 묘한 감정이 들었다. 몸이 둥둥 뜨 는 것 같았고 마음이두근거렸다.
‘내가 도를 익히고 수천 년동안 하늘도 우습게 알 며 혼자 지냈는데…
남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것도 나쁜 기분은 아니구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