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5권 – 4화 : 한산 대첩
한산대첩
한편 태을사자는 그 시각, 명나라에 가 있었다. 이 미 선조의 어가가 평양에 머물렀을 적부터 조선에서 는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명국에 원병을 파병해 줄 것을 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명국이 원병을 보내줄지는 상당히 미지수였다.
태을사자는 막상 명국에 온 다음 몹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명국은 일반적으로 조선에서 대국이니, 상국이니 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명나라를 처음 세운 사람은 주원장이었는데, 그 이후 명나라는 주 씨가 대대로 황제로 등극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대의 황제들은 대부분 난폭하고 백성을 사랑하지 않아 명국의 많은 백성들은 이미 몇 대에 걸 쳐서 누적된 핍박과 학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명국의 조정은 부정부패가 판을 쳐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몇몇 뜻있는 신하들이 있어 아직까지 조정 을 지탱하고는 있었지만, 전체적인 국면으로는 상당 히 위험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태을사자는 명국에서 상문신(喪門神)이라 칭하는 사 계의 사자를 만나게 되었다. 생계의 인간들의 믿음 에 맞추어 그 면모를 바꾸는 사계의 특성 때문에 조 선에서는 저승사자나 저승판관 등이 하는 역할을 중 국에서는 ‘흑백무상(黑白無常)’이라는 일종의 저승 사자와 상문신들이라는 자들이 맡고 있었다.
태을사자는 조선사신들의 어가를 따라 명국으로 갔 고 다른 자들과의 접촉은 하지 않았지만, 상문신이 직접 태을사자에게 저승 염라대왕의 명을 전해 주려 고 만나러 온 것이다. 거기다가 지금 저승의 사자들 이 조선, 왜, 명국의 세 나라에 평소의 두 배 이상 파견되어 있었다.
태을사자와 만나는 자리에서 상문신은 이렇게 말했 다.
“원래대로라면 자네는 자네의 관할인 조선을 떠나서 는 안 되는 것이나 자네는 염라대왕께서 직접 전권 을 주셨다네. 자네는 자유롭게 국적을 가리지 않고 영혼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필요하다면 각국의 사 자들에게 명을 내릴 수도 있다네. 이것이 바로 생계 에 나온 사계의 모든 사자들을 부릴 수 있는 염왕령 일세. 이런 파격적인 조치는 처음인데… 뭔가 중 요한 일이라도 수행하고 있는 겐가?”
태을사자는 염라대왕이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데 대해 감사하게 여겼다. 그런 권한까지 부여받았다는 것은 태을사자를 돕기 위해서인 것이 분명했다.
염왕령은 과거 태을사자를 체포하기 위해 내려진바 있었으나 이제는 태사자 자신이 염왕령을 사용하 게 되었으니, 참으로 운명이란 묘한 것이었다. 아무 튼 태을사자는 상문신에게 그에 관한 사정은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이번의 사건 내용을 인간은 물론, 계 외의 다른 존 재들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으며 그것은 신계의 결 정된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태을사자는 예를 다하 여 염왕령을 받아든 후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 다.
상문신은 판관급이니 태을사자보다 직급으로 보면 당연히 위인 처지여서, 태을사자가 명하면 따라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불쾌한 듯했으나 그럼에도 불구 하고 상당히 협조적이었다. 그래서 태을사자는 상문 신에게 명국의 돌아가는 상황을 물었던 것인데, 거 기서 조금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명국은 지금 엉망이라네. 사방에 도적들이 일어나고 법이 유명무실해져서 강호의 협객들이 오히려 관 청의 역할을 하고 있다네. 그런데도 조정의 탐관오 리들은 백성들을 끝없이 수탈하여 굶어죽는 자가 부 지기수일세. 더군다나 변방도 위험한 터인데……….”
“변방이 위험하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오?”
“지금 명국 내에서는 몇몇 뜻있는 자들만이 우려하 고 있는 일일세. 북방의 민족들 말일세.”
“여진족은 나도 좀 압니다. 조선에게 복속된 종족들 이 아닙니까?”
여진족이라면 이미 조선의 변방과 접하고 있어서 조 선과 잦은 충돌을 해왔던 부족이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여진족과 많이 싸웠고 그의 충실한 막하 장수였던 이지란(원래 이름은 퉁두란)도 여진족 출 신이었다가 이성계의 인품에 감복하여 평생을 따랐 던 자였다.
세종 때는 장군 김종서를 시켜 6진을 개척하여 영 토를 넓히기도 했다. 김종서가 수양대군에게 목숨을 잃은 이후에는 김종서의 오른팔 격이었던 이징옥이 반란을 일으켜 ‘대금국’이라 칭하였는데, 많은 여진 족들이 그를 따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은 무력 일변도의 정책만을 쓴 것이 아 니라, 여진족을 회유하고 일면 따뜻이 대해 주어 이 후 여진족들은 조선을 별로 적대시하지 않고 있었 다.
하지만 중국은 특유의 대국이라는 자부심 때문인지, 변방의 여진족들을 매우 멸시하여 왔다. 더구나 1115년 완안 여진족의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는 당 시 송나라와 대립하여 많은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아울러 근래에 이르러서도 명나라의 영락제(永樂帝) 는 여진족을 침공하여 복속시킨 다음 그들을 건주(建州), 해서(海西), 야인(野人)의 세 무리로 갈라놓 아 세력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어언 2백년 전의 일이었으며, 여진족은 차츰 세력을 강화 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여진족과 중국과의 갈등 은 조선과의 갈등보다 몇 배가 심했다.
“그렇지만도 않다네. 현재 건주여직(建州直 : 명 나라 때에는 여진을 ‘여직’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기 도 하였다)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와 흩어졌던 여진 족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중일세. 그 때문에 명국 의 변방에서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모양이지만, 정 작명국 조정에서는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다네.”
“걸출한 인물이라니? 그게 누굽니까?”
“누루하치(好兒哈赤 : 1539~1626), 성은 애친각 라(愛親覺羅)라는 자이지. 그는 지금 빠른 속도로 여진족을 통일해 나가고 있다네. 아직 그렇게까지 큰 세력이 된 것은 아니네만 그 기세가 놀랍지. 더군다나 명은 번번이 흉년이 들고 각종 재해가 끊이 지 않는데다가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네. 그러나 황제는 대대로 환관들과 한통속이 되어 지금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는 하나 답답 한 명국의 황제가 거기까지 신경을 쓸지 모르겠네.”
명나라의 황제는 효종인 홍치제를 제외하고는 거의 가 탐욕스럽거나 무능한 왕들이라 명나라에서는 환 관정치가 판을 쳤고 탐관오리들이 들끓었다. 당대 명나라의 황제는 만력제(萬曆帝), 사후 신종황제로 일컬어진 인물이었는데 그도 역시 그리 현명한 황제 는 되지 못했다.
덕분에 사회풍토는 맥이 처져 있어서 조선에 원병을 낸다는 것은 쉬운 일 같지 않다는 것이 상문신의 의 견이었다. 좌우간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태을사자는 기분이 조금 언짢아져서 금방 상문신과 헤어져 버리 고 말았다.
태을사자는 다시 몸을 날려 이번에는 조선사신들의 처소로 몸을 이동시켰다. 이미 조선에서는 명국에 계속 구원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고 있었는데, 명 나라 조정의 여론은 원군 파병에 반대하는 분위기였 다. 그 때문에 조선사신들의 처소는 항상 걱정거리 와 불안감이 뒤덮여 있는 터였고, 밤이 깊었는데도 처소에는 불이 꺼지지 않고 수심에 잠긴 사람들이 돌아다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덕형이 명에 파견되어 원군을 요 청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젊고 빼어난 재주를 지 닌 이덕형이 온다면 그의 외교력으로 뭔가를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태을사자는 계속 그 쪽 분위기를 살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태을사자 에게 뭔가 야릇한 느낌이 와닿았다. 바로 마수에게 서 풍겨나오는 요기임이 분명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태을사자는 습관적으로 묵학선을 꺼내려 하였으나 묵학선은 이미 잃어 버린 다음이라 대신 백아검을 꺼내 쥐었다. 그리고 허공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잠시 후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오며 낯익은 형체 하 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풍생수!”
태을사자는 이를 뿌드득 갈며 법력을 끌어올렸다. 놈은 바로 태을사자의 철천지원수라 할 수 있는 풍 생수였다. 태을사자의 동료 흑풍사자도, 무사 윤걸 도 그놈에게 당하여 소멸되어 버리지 않았던가? 그 러나 태사자가 법력을 끌어올리는데도 놈은 태연 했다.
“오랜만이군, 저승사자. 법력이 매우 발전했군그 래.”
놈은 태연한 말투로 태을사자에게 능글맞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대답하지 않고 세워 쥐고 있던 백아검을 서서히 돌려 쥐었다. 그러자 놈이 능글맞게 말했다.
“가만가만, 지금 그리 급하게 덤빌 것은 없어. 싸워 보아야 금방 승부가 날 것도 아니니 말야……. 그동 안 너만 발전하고 나는 놀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 은 아니겠지?”
확실히 태을사자의 법력은 그동안 드물 정도로 발전 했지만 놈에게서 풍기는 느낌도 만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태을사자는 놈이 왜 일부러 모습을 드러냈으며, 왜 여유만만한 태도를 보이는지가 궁금 했다.
“여기는 왜 나타났느냐? 조선사신들을 노리려고?”
“오, 천만에, 천만에, 틀렸어. 나는 그들을 좀 도우 려고 하는 거야.”
“헛소리! 네놈들이 조선을 돕는다구?”
그러자 풍생수는 천천히 태을사자를 향해 대가리를 돌리더니 슬며시 웃어 보이는 듯, 이를 드러냈다.
“이봐, 우리가 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나? 우린 조선이니 왜국이니 하는 생계의 그런 구분에는 관심 이 없어. 굳이 왜국 편을 들거나 하지는 않는다구. 착각하지 마.”
그 말에 태을사자는 한층 경계하며 물었다.
“그러면 여기는 왜 나타난 것이냐?”
풍생수는 잠시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대답했다.
“솔직히 말하지. 자네에겐 놀랐어. 자네가 우리 일 을 이리 심각하게 건드릴 줄은 몰랐지. 솔직히 처음엔 별 것 아니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너는 그 덩치만 큰 고양이 같은 놈을 꼬여서 나에게서 달아 났고, 또 작은 꼬마를 끌어들였지. 더군다나 그 빌 어먹을 구미호 년까지 끌어들였으니…………. 그리고 사 계에 심어 놓았던 백면귀마까지 이겨 버렸어. 그래, 자넨 생각 외로 대단해. 그래서 말인데, 우리는 상 당히 많은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어.”
“수정?”
의아해하는 태을사자를 보며 풍생수는 이를 드러내 며 무서운 기세로 말했다.
“흥! 이젠 너희가 이겼다고 여기겠지? 마계는 이제 봉쇄되어서 우리는 돌아갈 수조차 없고 더 이상 지 원을 받을 수도 없어. 멍청이같은 유계 놈들은 사계 접경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고……. 그 래, 네놈은 확실히 대단해. 우리가 한 방 먹었지. 대단히 타격이 커. 그래서 우리는 계획을 바꾸기로했어.”
“네놈이 두목이냐? 그건 아닐 텐데?”
“그래……. 흑무유자께서 쫓겨 생계로 오실 정도였 으니………, 흐흐……. 그분이 모든 계획을 변경하도 록 했지. 이제 너무 염려 마. 우리의 목적은 이젠 단지 살아남는 것뿐이라구. 그러니 너무 경계할 필 요없어. 적어도 지금만큼은.”
“다 떠들었나?”
태을사자는 냉랭한 표정으로 서서히 백아검의 끝을 풍생수에게 겨누었다. 그러자 풍생수는 조금 질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지금 덤비면 나를 그리 쉽게 이길 것으로 보 이나?”
그러자 태을사자도 담담히 되받았다.
“내가 이기지 못할 것으로 보이는가?”
“실망인데? 말이 통하지 않으니. 나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왔어.”
“네놈들과는 타협하지 않네. 그리고 그건 내 권한도 아니고.”
“권한? 하하…, 얼버무리려 하지 마. 이번 일에 대해서는 네가 최고의 책임자인 걸 누가 모를 줄 아 나?”
“나는 사계의 일개 저승사자에 불과하네. 그리고 내 임무는 생계에 내려온 네놈들 열두 마리를 없애는 것일 뿐. 아니지, 지난번에 하나가 은동이에게 당했 다니 이제는 열한 마리가 남았나?”
“흥!”
풍생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잠시 후 놈은 다시 냉정을 회복한 듯 이죽거렸다.
“다 알고 있으니 시치미 떼지 마라. 네 계급은 비록 낮지만 생계에서의 이번 일에 한하여는 네가 전권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 아니냐? 아무리 법력이 높은 성계, 광계의 존재도 이번 일은 직접 건드릴 수 없 을걸? 후후….., 좌우간 너는 여기서 나를 막을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나는 너희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니까.”
“네놈들이 누구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을 믿을 수 없는걸?”
그러자 풍생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조선은 지금 명군의 도움이 필요해. 그러나 이대로 두면 몇 년이 가도 원군은 파병되지 않을 텐데?”
태을사자는 잠시 몸을 움찔했다. 지금 이 녀석이 무 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일까? 믿기가 어려웠다.
“무엇이라고 했느냐?”
“내 도움이 없이는 조선이 명군의 도움을 얻기가 어려울걸? 흐흐……, 어때?”
“그렇다면 너희는 이제 전쟁을 포기한다는 것이 냐?”
“흐흐흐….. “
“말해! 그러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포기한다는 거냐? 더 이상 인간의 영혼을 모으지 않고, 천기에 어긋나게 조선을 패전으로 몰고 가지도 않는다는 거 냐?”
그러나 풍생수는 능글맞게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목이 달아나야 말을 할 모양이군.”
태을사자가 화가 나서 다시 백아검에 법력을 집중하 자 풍생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희는 어차피 우리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 봐………, 이건 법력의 싸움이 아니야. 머리의 싸움이 지. 마계를 봉쇄하고, 유계의 군대를 밀어냈다고 반 드시 너희들이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은 아니야. 좌우간 한 가지만 말해두지. 나는 지금 명군이 조선 에 파병하여 조선을 돕게끔 만들어주고 싶은 거야. 나는 아무 인간도 해치지 않을 것이고, 이 일만 끝 나면 명국 땅에서 사라질 거야. 너는 솔직히 지금 조선이 명국에서 원군을 받지 못할까 봐 겁내고 있 지?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 흐흐……………. 그 래, 날 없앤다고 하면? 너희가 인간사에 직접 개입할 수 없다는 건 나도 잘 알아. 그러면 네가 무슨재주로 명군이 파병되게 할 거지? 응? 대답해 보라구.”
태을사자는 암담해졌다. 이놈, 아니 마수들은 분명 모략을 꾸미고 있다. 이미 마수들은 지난번 중간계 에서의 재판 이후로 구석에 몰린 상황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 깊고 교묘한 술책을 꾸밀지도 몰랐다. 그런데 무 슨 술책일까?
태을사자는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놈은 지금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놈은 명군의 파 병을 돕겠다고 했다. 놈이 바라는 것은 명과 왜국과 의 싸움을 부채질하자는 것일까? 아니, 더 많은 희 생자가 나게 하여 인간의 영혼을 거두어들이려는 것 일까? 그럴 수도 있었다.
지금 조선에서는 지난번 사건 이후 수많은 저승사자들이 경계의 강도를 높여 하나의 영혼도 잃지 않으 려 애쓰고 있었다. 그런 판에 명군이 개입하면 그만 큼 통제가 어려워질 것이고, 영혼을 훔칠 수 있는 빈 틈도 그만큼 많아질지 몰랐다. 놈들은 바로 그 점을 노리는 것일까?
“네놈들은 인간의 영혼으로 무엇을 하려는 게냐? 이 판국에서도 암흑의 대주술을 써서 신이 되고 싶 은 게냐?”
태을사자가 호통을 쳐보았으나 풍생수의 눈빛이 잠 시 빛났을 뿐이었다.
“상상력들이 꽤 좋군그래. 마음대로 생각해라. 좌우 간 여기서 나는 너와 합작을 하려고 하니까. 동상이 몽(同床異夢)이라 해도 현실은 현실이니 말이야.”
“왜 합작을 하려는 게지?”
“말하지 않았나? 명군이 파병되게 하려 한다고. 제 길, 솔직히 말하지. 네놈이 와서 눈을 번득이고 있 으니 방해를 받을 것 같아서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은 네놈도 바라는 일이 야. 그대로 두면 조선은 망한다구. 어때? 잠시 동안 만이라도 휴전을 하지 않겠나?”
태을사자는 하마터면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할 뻔했 다. 그러나 그런 스스로를 억눌렀다. 마수들의 계획 에 옳은 요소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태을사자는 잠시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가 천천히 말했다.
“대답하지.”
“좋다, 그러니 어서 가자. 석성을 없애거나 그자의 마음을…….”
풍생수는 이미 태을사자가 자신에게 응낙한 것으로 믿고 지껄이려다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태을사자의 눈빛이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넌 내 칼에 소멸된다. 전에 흑풍과 윤무사가 그리되었던 것처럼.”
풍생수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 멍청한 녀석! 그냥 두면 조선은 망한다! 그리고 네놈들은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단 말이다. 잊었나?”
“잊지 않았지.”
“그러면? 조선이 망해도 좋으냐? 네놈이 이러는 것 은 큰 실수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태을사자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염왕령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과연 대단한 효력을 지닌 사계의 신물답게 수십 명의 저승사자들이 급히 모여들었 다.
그 사자들은 아무래도 장소가 명국인지라 중국의 저 승사자인 흑백무상과 상문신이 주종을 이루었고, 조 선의 검은 도포 차림의 저승사자도 있는 반면, 특이 하게도 검은 천을 뒤집어쓴 백골의 모습에 커다란 낫을 든 사신(死神)도 있었다. 이런 모습의 사자는 동양에서는 보기 힘들고 멀리 서방에서만 있다고 하 는데, 여기 북경에서까지 서방의 사신이 와 있을 줄 은 태을사자도 짐작하지 못했다.
수십 명의 사자들이 풍생수를 원형으로 에워쌌으며 위와 아래 방향까지 모두 에워쌌다. 그러자 태을사 자는 천천히 말을 건넸다.
“실수라도 좋다. 어떤 것이든 네놈들이 원하는 것을 그냥 하게 둘 수는 없다.”
“그러면 조선이 이대로 왜국에 의해 망해도 좋단 말이냐? 무엇을 믿고 이러는 거냐?”
풍생수는 악을 썼다. 그 말에 태을사자는 슬며시 입 가에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나는 천기를 믿는다. 조선이 그리 간단히 망할 나 라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또한…….”
태을사자는 백아검과 염왕령을 조금 내려뜨리고 말 을 이었다.
“조선에 있는 왜란종결자를 믿는다. 왜란종결자가 있고 그 인물이 활약한다는 것은 바로 천기가 왜란 이 종결지어지게끔 정해져 있다는 의미일 테니까 말 이다.”
그러면서 태사자는 주변의 사자들을 더 이상 풍생 수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한 다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풍생수는 사나운 기세로 으르렁거리면서 태을사자에게 말했다.
“흥……, 바보 같은 짓이다. 후회하게 될걸?”
“후회는 하지 않는다.”
“네가 나를 정말 이길 수 있다고 믿느냐?”
말을 한 뒤 풍생수는 태을사자가 미처 무어라 대답 도 하기 전에 태을사자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맹렬 하고도 비열한 기습이었다. 그러나 이미 태을사자는 과거의 태을사자가 아니었다. 묵학선이 없다고는 하 지만 과거에 비해 몇 배나 강해진 법력이 있었다. 태을사자는 간단하게 풍생수의 공격을 백아검의 검 봉으로 쳐내 버렸다.
풍생수는 거의 죽기살기의 기세로 무시무시한 마력 을 태을사자에게 쏟아냈다. 그것도 품品)자 형을 이루며 세 단계로. 하지만 태을사자는 천천히 백아검을 휘둘러서 풍생수의 공격을 믿어지지 않을 정도 로 간단하게 퉁겨내었다.
풍생수가 놀라면서 재차 꼬리를 휘두르는 순간, 태 을사자는 휙하고 백아검을 그었다. 순간 풍생수의 두 개의 앞발이 뭉텅 잘려져 나갔다. 사방을 둘러싸 고 있던 사자들에게서 으음 하는 탄식성 같은 소리 가 터져나왔다.
“이것은 윤걸의 몫이다.”
풍생수는 뒤로 날아 도망치려는 듯했으나, 그쪽에 버티고 있던 많은 저승사자들이 일제히 손을 앞으로 내밀며 법력을 모으자 풍생수의 몸은 태을사자 쪽으 로 되퉁겨져 날아갔다. 바로 그 순간 태을사자는 한 번 검을 꺾어쥐었다. 단순히 검을 꺾어쥔 것뿐이었 는데도 파팟 하는 파공음과 함께 풍생수의 뒷다리 두 개가 다시 날아가 버렸다.
“이것은 흑풍의 몫이다. 그리고………….”
채 말을 잇기도 전에 태을사자는 멈칫해 버렸다. 풍 생수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자신의 무기인 꼬리를 자신의 목에 찔러 넣었던 것이다. 그 흉악한 기세에 태을사자는 잠시 주춤했고, 풍생수는 서서히 사라지 기 시작했다.
“그래………, 엄청나졌구나. …그러나 너는 실수한 것이다. ……왜란종결자……… 왜란종결자라…”
풍생수는 비웃는 듯, 자조하는 듯한 소리만을 남기 고 서서히 사라져 갔다. 태을사자는 조금은 허망한 듯이, 조금은 아쉬운 듯 백아검을 든 채로 꼼짝도 않고 서서 사라지는 풍생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풍 생수의 모습이 완전히 없어지자 저만치에 떠 있던 상문신이 갑자기 태을사자의 앞에 다가와서는 읍을 해보였다.
“대단하오! 내 사죄할 것이 있소.”
태을사자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백아검을 다시 소 맷속에 넣었다. 그러자 상문신은 엄지손가락을 내밀 며 말했다.
“나는 솔직히 당신 같은 일개 사자가 염왕령을 자유 로이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해 왔소. 그러 나 당신의 법력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소!”
상문신이 떠들어대는데 느닷없이 조용히 산들바람 한 줄기가 남에서 북쪽으로 불어왔다. 그 바람을 느 끼고 태을사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크게 소리쳤다.
“아뿔싸! 북! 북방을!”
상문신과 다른 사자들은 태을사자가 도대체 왜 저러 나 하고 허둥대며 북쪽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태을사자는 안색이 변하면서 다시 백아검을 꺼내 힘 껏 북쪽의 한 지점을 향해 던졌다. 백아검은 빙빙 돌며 날아가다가 갑자기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 한 번 챙 소리를 내며 되퉁겨 다시 태을사자의 손으 로 돌아왔다. 태을사자는 어허 하며 크게 한숨을 내 쉬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는 상문신이 태을사 자에게 물었다.
“무엇이오? 대체 왜 그러시오?”
태을사자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풍생수를 놓쳤소!”
“음? 아까 그 마수가 풍생수요?”
“그렇소.”
“으음, 놈은 이미 소멸되지 않았소?”
그러자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또 속았소! 놈은 불사의 마수로, 바람으로 변하여 언제든 형체를 재생할 수 있소. 놈은 죽지 않았소! 바람으로 화하여 도망쳤소……. 아아…………, 묵학선이 있었다면 아까 놈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인 데…………. 백아검을 던지는 것이 묵학선을 던지는 것 보다 익숙하지 못하여 또 놓치고 말았소! 정녕 아 쉽고도 아쉽소!”
태을사자는 분을 이기지 못해 다시 한 번 몸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번에야말로 풍생수를 틀림없이 잡았다고 여겨 방심한 것이 실수였다. 그리고 놈이 하도 처절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놈이 불사의 괴물이었다는 것을 잊었던 것, 그리고 던지는 데에 숙달된 자신의 법기인 묵학선이 없었던 것도 놈을 놓친 요인이었다.
놈은 바람으로 화하여 아무 곳으로나 사라져 버릴 수 있었으니, 지금 놈을 뒤쫓는다 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법력이 높아졌다고 방심하니, 이 꼴을 당하는구나. 그래……………, 놈의 말이 맞다. 이건 법력의 싸움이 아 니라 머리의 싸움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태을사자는 또 한 가지의 의문이 떠올랐다. 놈들은 노선을 바꾸었다고 했다. 더 이상 왜국의 편을 들지 않으며 오히려 명군이 조선에 파 병하는 것을 돕겠다고까지 했다. 주변 정황으로 볼 때 그것은 사실일 것 같았다.
만약 태을사자가 풍생수에게 응낙을 했을 경우에 풍 생수는 정말 명군이 파병되도록 힘을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었다. 태을사자의 법력은 풍생수보다도 확 실히 우위에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놈들은 무엇을 꾀하는 것일까? 이제 는 무엇을 노리는 것일까? 놈들이 불리해지기는 했 지만, 그 정도로 꾸미는 일을 포기했으리라고는 믿 을 수 없다…’
태을사자는 다시 아래 조선사신들의 거처 쪽을 바라 보았다.
‘내가 잘한 것일까? 마수들의 말대로 명군이 참전하 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오히려 조선 에 불리한 일을 해버린 것은 아닐까?’
태을사자는 걱정이 되었으나 억지로 그 걱정을 밀어 내 버렸다.
‘아니다, 천기를 믿어야 한다. 마수 놈들이 개입하든, 개입하지 않든 천기는 올바르게 흘러갈 것이다. 명군이 참전하든, 참전하지 않든 천기는 올바르게 흘러갈 것이다. 천기를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들 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태을사자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그 주변에서 수 많은 저승의 사자들은 태을사자의 속마음을 몰라 다 만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태을사자는 문득 풍생수가 실수로 내뱉었던 말을 기억해냈다.
‘가만…………… 석성……… 석성이라고 풍생수가 말하지 않 았던가?’
태을사자는 곧 상문신에게 석성이라는 자가 누구냐 고 물었다. 그러자 상문신이 말했다.
“석성이라면 현재 명조정에서 병부상서(部尙書)를 맡고 있는 사람이오. 조선 출병에 대해 상당히 반대 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들었소만・・・・・・.”
“병부상서라면 병권을 좌우하는 긴요한 자리가 아니 오?”
“그렇소. 조선에서라면 아마 병조판서쯤 될 것이 오.”
그러자 태을사자는 미간을 찌푸렸다. 풍생수는 분명 석성을 죽게 하거나 석성의 마음을 돌리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병권의 실무자인 병부상서가 출병에 반대한다면 실제로 출병이 이루어지기는 힘 들 것이니 풍생수의 생각도 일리가 있었다.
‘그렇구나……. 어디 두고보자. 마수 놈들의 조력이 없이도 꼭 일이 제대로 되게 할 것이다! 반드시!’
태을사자는 주먹을 불끈 쥐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도사님, 도사님. 나군관님이 부르세요!”
그 소리에 은동은 인상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오엽아, 너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말랬잖아!”
그 말에 오엽이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헤헤 하 고 귀엽게 웃어 넘겼다.
“도사님이 맞잖아요. 그리구 지금은 아무도 없구.”
“좌우간 그러지 마! 그건 비밀 중의 비밀이라고 몇 번이나 이야기했니?”
“네! 네! 알았어요. 그러니 화내지 마세요. 네? 의 원님?”
오엽이는 다시 귀엽게 웃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은동은 더 화도 낼 수가 없어서 고개만 휘휘 저으며 좌수영 쪽으로 향했다.
그날, 흑호와 은동은 마수들을 물리치고 그 중에 기 와 시백령을 해치웠지만 오엽에게 진면목을 들켜 버 렸다. 덕분에 둘은, 없는 말재주로(은동은 어린데다 가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고 흑호는 원래 말재주가 없었다) 오엽을 구워삶아 입을 다물게 하느라고 죽 을 애를 썼다.
다행히 오엽이는 은동보다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이 긴 해도 아직은 어린아이였고, 놀라운 일을 보아 기 가 질려 있는 터라 자기 마음대로 상상을 하는 것 같았다. 즉, 은동은 실은 대단한 산신령에게 배워 도를 닦은 도사(라기보다는 도동(道童)에 가까웠겠 지만)였고, 흑호는 산신령을 따라다니는 영통한 호 랑이가 아니냐는 것이었다.
때마침 말재주도 없던 둘은 진땀을 흘리면서 그렇다 고 둘러댔고, 오엽이는 철없이 그 말을 믿는 것 같았다. 그러고는 은동에게 도를 어떻게 닦으며, 도를 닦으면 뭐가 좋으냐고 꼬치꼬치 물어보기까지 해서 은동의 혼을 반쯤 빼놓았다.
결국 은동은 자신들은 하늘이 낸 사람인 좌수사를 못된 악귀들로부터 지키고 전쟁에 이기게 돕는다는 말을 했고(비록 왜란종결자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 나 완전한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이 사실을 만 약 누구에게 발설한다면 천벌이 내릴 것이라는 협박 까지 했다. 그러자 오엽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흑호가 보기에 오엽이는 천벌을 무서워하기 보다는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그에 동의한 것 같았 다. 흑호는 오엽이에게 누설하면 잡아먹어 버린다고 까지 겁을 주었으나, 오엽이는 산신령 밑에 있는 호 랑이가 어찌 사람을 잡아 먹느냐면서 오히려 대들어 흑호는 꼼짝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그 이후 오엽이는 은동이에게 그렇게 곰살갑게 굴 수가 없었다. 도사라는 존경심에 그런 것이 라고 어린 은동이는 생각했지만, 흑호는 남몰래 저 계집아이가 딴 꿍꿍이를 가진 것은 아닐까 싶어 조 금은 불안했다.
사실 그날 이후로 오엽이는 그전까지 하지 않던 분 가루를 바르고 옷매무새도 단정해졌으며 머리도 깨 끗하게 빗어서 몰라볼 정도로 달라졌다. 그전까지는 까맣고 고생기가 끼인 여자아이였던 것이 언제 그랬 었냐는 듯, 아주 곰살궂고 귀여운 얼굴로 변하였다. 그 모습을 보고 흑호는 ‘여자는 누구나 다 둔갑을 할 줄 아는구먼.’이라 말했고, 은동은 ‘여자는 다 구 미호(실은 호유화)와 비슷하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오엽이의 입을 막은 뒤 은동과 흑호는 둘이 서 마수와 싸웠던 일을 되새겼다. 사실 은동은 정신 이 든 다음에 뭔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은동은 시백령의 공격에 당해서 이제 죽었다고 체념해 있었 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멀쩡했고, 더구나 흑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을 공격하던 시백령도 이미 반은 죽 어 있었다지 않는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했으나 나중에 오엽 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은동의 몸에서 뭔가 불길 같 은 것이 일어나 시백령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는 것 이다. 그러자 흑호는 은동이 무의식중에 성성대룡의 술법을 쓴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며, 은동이 벌써 혼 자 마수 세 마리를 해치운 것이나 다름없다고 칭찬 해 주었다. 그러나 은동은 뭔가 좀 찜찜했다.
“내가 그럴 정도로 술법에 능하거나 익숙한 것도 아 닌데…………. 뭔가 좀 이상한걸요?”
“어허, 허지만 그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설명이 되겠 냐? 아무도 법력을 쓸 자가 없었는데.”
“으음……, 그러나 성성대룡의 불을 맞으면 모두 그 자리에서 타 버렸는걸요? 계두사도 그랬고 기도 그랬고요. 근데 시백령은 왜 안 타 버린 걸까요?”
“그거야 시백령 놈이 좀 세니까 그랬겠지. 너도 보 아서 알겠지만 그 계두사나 기 같은 놈들은 홍두오 공보다도 훨씬 하급 아니여. 그러니 놈은 조금 더 버틴 거겠지.”
아무튼 그것이 아니고는 시백령이 맥없이 당한 것을 해석할 방법이 없었기에 은동은 그렇게 수긍하고 찜 찜한 마음을 눌러 버렸다. 그러고 보니 이제 성성대 룡에게서 받은 그 불의 술수를 세 번 모두 사용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비추무나리의 술수와 증성악신인의 술수도 각각 한 번씩 사용하였으니, 이제 은동에게는 염라대왕에게 받은 술수 세 번과 비추무나리와 증성악신인의 술수가 각각 두 번씩 남 아 있는 셈이었다.
그리 따져보니 기와 계두사 같은 하급 녀석들에게 강력한 성성대룡의 술수를 낭비한 셈이 되어 버린 것 같아 조금은 아쉬웠다. 둘은 그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흑호와 은동은 한참 이후까지도 이상한 점 한 가지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좌우간 은동은 배시시 웃는 오엽의 얼굴을 뒤로 하 고 나군관, 즉 나대용을 만나러 갔다. 나대용은 은 동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 배를 탈 수 있겠는가? 아마도 며칠은 걸릴것인데?”
“예? 어째서……”
그러자 나대용은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먼저 말하지 않았는가? 출진하는 경우에도 꼭 수사님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실은 내일이면 출 진이라네. 어때? 수사님은 이제 배를 타도 지장 없 으시겠는가?”
이순신의 부대가 드디어 출진한다는 말을 듣고 은동 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이순신의 증상은 이미 상당히 호전되어 있었다. 은동은 그저 허준의 처방 을 전해 듣고 앵무새처럼 읽는 수준이라 잘은 이해 하지 못했지만, 이순신의 병은 거의 신경성이었다.
이순신은 비록 마음이 온화하고 너그러운 사람이었 으나 몹시 소심하고 신경질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게다가 공무에는 빈틈이 없었으나 일종의 결벽증 환 자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논리에 맞지 않고, 특히 정해진 규칙에 맞지 않는 것을 거의 병적일 정도로 싫어하였다. 그러한 성격인데도 이순신의 조정의 명 에 따라, 마음이 전혀 맞지 않고 속으로는 경멸하고 있는 원균과 함께 작전을 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원균은 이순신을 자주 자극하고 방약무인 한 행동을 하여 이순신은 폭발할 지경이었지만, 그 것마저도 소심한 성격과 공무라는 허울에 엮여 참아야만 했다. 그러니 일단 그의 결벽성과 소심함이 서 로 상충하는 판인데다가 이순신은 싸움에서조차 절 대질 수 없다는, 아니, 져서는 안 된다는 압박감마 저 받고 있었다.
부하들의 신뢰를 받는 만큼 그들을 배신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가지다 못해 압박까지 받고 있었으니 오죽하겠는가. 또한 이순신은 그러한 불안 을 직접 의논할 만한 사람조차 없었다. 이순신의 지 략과 경륜과 비슷하지 않으면 누가 이순신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겠는가? 조정에 가 있는 유성룡 정도 라면 이순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같이 터놓고 이야기 도 할 수 있을 것이었지만, 그와는 거의 이천 리의 거리를 두고 있으니 그것도 불가했다.
결국 이순신의 병은 몸의 허약함에 많은 신경성 압 박으로 인해 빚어진 병이었던 것이다. 허준은 비록 하일지달의 둔갑을 통해 이 병을 접했지만 근본 대 책을 알아내어 잘 처방을 했으며, 또 그 연락과 연락의 사이사이에는 태을사자가 청해온 저승의 한 의원이 은동의 귀에 붙어 도움을 주고 있었다.
덕분에 은동은 이순신의 측근들에게 청해 이순신이 며칠간 일체의 군무는 물론, 일기까지도 쓰지 못하 도록 했다. 은동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순신의 수하 들은 원균을 이순신과 만나지 않게끔 배려했다. 원 균은 가끔 이순신에게 군무를 묻는답시고 찾아와서 술이나 마시고 주정이나 부려 이순신의 신경을 갉아 먹다시피 해왔던 것이다.
아무튼 원균을 만나지 않은 덕분인지,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이순신은 조금이나마 정신적인 안정을 찾 게 되어 다시 작전을 활발히 짜기 시작했다.
“예…………, 큰 무리는 없으실 것입니다. 그러면 저도 동행하는 것입니까?”
“그래야 하겠지. 솔직히 자네는 너무 어려서 배를 태우는 것이 미덥지는 않네만, 수사님이 작전하시는 것이니 큰 위험은 없을 것이네.”
나대용이 우락부락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하자 은동도 좋아라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옛 ! “
사실 은동은 조금 겁이 나기도 했지만 이순신이 누 구던가? 왜란종결자가 아닌가? 그런 이순신이 패할 리가 없다고 은동은 굳게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자 신이 원수로 생각하는 그 왜병들을 통쾌하게 무찌르 는 모습을 좀 보아야 직성이 풀릴 것도 같았다.
“흠, 그러면 어떻게 할까? 범쇠도 같이 동행할 것 인가?”
나대용은 사실 은근히 범쇠(흑호)에게 눈독을 들이 고 있었다. 비록 범쇠는 은동의 하인이 되어 출전을 강요받지는 않았지만, 덩치가 크고 힘이 세어 싸움에 나가면 공을 세울 것 같다고 나대용은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은동은 고개를 저었다.
“범쇠는 물을 몹시 무서워하고 멀미가 아주 심하답 니다. 저만 가면 됩니다.”
사실 흑호가 공연히 사람의 모습을 하고 다른 사람 들과 거의 코를 맞대는 것은 불안한 일이었으며, 자 첫 마수들이 쳐들어온다면 남의 눈이 두려워 제대로 활약할 수가 없었다. 흑호는 둔갑술을 할 줄 아니 따로 선단을 따라다니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었다.
나대용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내에 부상자들이 생겼을 경우에도 좀 부탁한다고 말했다. 은동은 조금 겁먹었으나 여차하면 자신의 귀에 머물 고 있는 의원귀신(?)의 도움을 받으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1592년 7월 4일. 이순신의 함대는 세 번째로 출격 하게 되었다. 이제 왜선은 겁을 먹고 전라도 근해에 는 거의 얼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부득 불 경상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여야만 했다. 공문을 돌려 정탐한 바에 의하면, 가덕과 거제 등지에 왜선 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아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경 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공동작전을 펴기로 한 것이 다.
이순신의 함대는 일단 7월 4일 저녁에 이억기의 함 대와 합류한 뒤 7월 6일에 다시 출발하여 원균 함 대와 합류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때 조선군의 규모 는 이순신의 함대 24척, 이억기의 함대 26척, 원균 의 함대가 8척이었다. 이순신의 함대와 이억기의 함 대는 지난번 당포해전때와 척수가 달라지지 않았으 나, 원균의 함대는 여러 척이 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배는 실제로 건조된 배가 아니고, 그동안 이순신 이 노획했던 왜선을 넘겨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번 당포해전 등에서 노획한 배가 여러 척 있었 는데, 그것을 원균이 억지를 부리다시피 빼앗아갔던 것이다. 경상도가 거의 왜군들의 소굴이 되어 버린 터에 경상우수사인 원균이 배를 새로 건조할 여유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덕분에 원균의 함대는 비록 배가 8척으로 늘었다고는 하지만 화포를 장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전투에는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이순신은 자신이 매우 싫어하는 원균에게 마지못해 배를 내준 것이기 도 하지만…………….
그러나 처음으로 전선을, 아니 바다에서 배라는 것 을 처음 타본 은동은 전쟁 같지가 않아 희희낙락하 고 신기해했다. 아직 전투가 벌어질 기미조차 없었 고, 남해의 좋은 풍광 사이를 많은 수의 거대한 함 대와 함께 여행하는 것이 즐겁기까지 했다.
더구나 은동은 뱃멀미도 별로 일으키지 않았다. 그 도 그럴 것이, 은동은 이미 저승까지 오락가락했으며 축지법에 둔갑술에까지 휘말려서 무서운 고속으로 날아다니기를 밥먹듯 했으니 그에 단련이 되어 뱃멀미 정도는 일으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은동은 한편으로 매우 염려가 되었다. 함대 가 출발함에 따라 이순신의 신경질적인 면이 점점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도 은동이 직접 알 아낸 것은 아니었고, 은동의 귀에 붙은 의원의 귀신 이 알려준 바이기는 했지만……
7월 7일이 되자 동풍이 크게 불어서 배가 나아가지 못했다. 할 수 없이 조선함대는 고성땅 당포에 이르 러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작업을 하였다. 함대가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자 이순신은 긴장을 너무 한 나머지 머리가 봉두난발이 되었으며 눈이 붉게 충혈 되었으나 본인은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은동이 보다 못하여 사람들이 없는 진찰 때에 은근 히 말할 정도였다.
“장군님, 피곤하시옵니까?”
그러나 이순신은 피곤이 극에 달한 모습을 하고서도 말투만은 평온했다.
“허허, 피곤하다니? 아직 싸움은 시작조차 하지 않 았는데 무엇이 피곤하겠느냐?”
그때 은동의 귓속에 있는 영이 은동에게 속삭이기 시작했고 은동은 그대로 이순신에게 말했다.
“속히 휴식을 취하시옵소서. 의원으로서 간하는 말 씀이옵니다.”
“음? 쉬다니. 아니야, 할 일이 많은 터인데…”
그러자 의원의 영은 은동에게 정색을 하라고 했고 은동도 그대로 했다.
“장군님, 장군의 몸은 장군 한 분의 몸이 아니옵니 다. 수많은 백성들과 병사들, 그리고 조정의 기대가 장군님의 몸에 달린 것이옵니다. 장군님께서 몸을 상하시면 그 누가 수군을 맡는단 말씀이시옵니까?”
그러자 이순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직은 적정도 보이지 않으니 이만 쉬시옵소서. 장군님의 휴식에는 병이 가장 큰 약이옵니다.”
“음?”
‘아이구!’
은동은 의원의 말을 정신없이 옮기다 보니 병에는 휴식이라는 말을 잘못 말했던 것이다.
“아니……… 아니…… 장군님의 병에는 약이 휴식이 옵니다.”
은동은 일단 헷갈리기 시작하자 더 말이 헷갈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얼굴이 더욱 시뻘겋게 붉어졌다. 이순신은 그런 은동을 물끄러미 보고 있 다가 갑자기 껄껄 웃었다.
은동은 창피하고 송구스러워서 아무런 말도 못했다. 더구나 귓전에서는 의원의 영이 은동보고 바보라며 계속 욕을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은동은 자기도 모르게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바보, 바보 멍청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이순신은 껄껄 웃다가 은동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는 미소를 지으며 은동을 냉큼 안아 무릎에 올 렸다. 은동은 갑자기 이순신이 자신을 무릎에 올리 자 몹시 당황했다. 은동의 체구가 작았는데도 이순 신은 좀 허약했는지 은동을 안아올리는 것도 그다지 쉽게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허허, 소년 의원. 그것 가지고 무어 울고 그러는가? 허허허, 아직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군!”
“…….”
은동은 얼굴이 빨개져서 뭐라 말하려 했지만 이순신 은 은동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의원 노릇하기가 쉽지 않지? 허허……, 내가 미안하구나. 어린아이에게 이런 고생을 다 시키 니……. 그래, 좀 쉬어보자. 그러니 편하게 좀 부르 자꾸나. 은동아?”
“‘예・・・・옛.”
“은동아?”
“‘예・・옛!”
“허허. 내 자식들이 아직 어려 너만한 손주는 없다
만, 손주를 본다면 너 같은 손주를 보았으면 싶구 나. 허허……….”
이순신은 맏아들 회(: 1567년 생)과 둘째아들 울 (蔚 : 1571년 생, 정유년에 이름을 열 이라 고침) 이 있었고 딸도 두 명이 있었지만, 나이가 고작 이 십대 안팎이었으므로 은동이만한 손주는 없는 것이 당연했다.
좌우간 운동은 항상 근엄하고 엄숙해 보이는 이순신 에게 이러한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같은 면모가 있 다는 것에 놀랐다. 이순신은 어린아이인 은동만 있 는 자리라 마음이 풀어지는 듯했다.
“세상에 나만큼 박복하고 죄 많은 사람은 없을 것이 다, 허허…….”
“어째서 장군님이 박복하십니까?”
“허허…….”
이순신은 대답을 하지 않았으나 그것은 이순신의 마 음에 어린 가장 커다란 앙금 중의 하나였다. 이순신 은 실로 철두철미하게 모든 일을 사리에 맞게 행동 하는 사람이었으며, 그렇지 않고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이순신의 관직길은 실로 순탄하지 않았다. 간신히 무과에 급제한 것이 서른두 살 때의 일이었으며, 진 급도 이순신의 기량과는 맞지 않게 빠르지 못했다. 서른여덟 살 때에는 전라도 발포만호로 있었는데, 1 월에 군기가 엉성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실제로 이순신만큼 군기를 중요시하는 인물은 없었 는데도 파직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불법승진 청탁 을 거부한 보복이었던 셈이니, 이순신은 이때 벌써 쓴맛을 한 번 본 셈이 된다. 그래도 깔끔하고 완벽한 일 처리 덕분에 이순신은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 었다.
그 다음해에는 난데없이 변방중의 변방인 함경도로 옮겨가 군관이 되었는데, 여기서 이순신은 기량을 살려 호족 울지내(鬱只乃)라는 자의 침입을 막는 공 을 세웠다. 그 덕에 한달만에 승진하여 훈련원 참군 (參軍)이 되었으나 며칠만에 부친이 별세하여 고향 아산에서 휴직하였다.
3년 상을 치른 뒤 복직하여 함경도에서 북방 호적 을 막는 중책을 맡았는데 1년 후인 43세 때 북방 호족의 기습을 받았다. 이때 북방의 절도사는 이일 (신립과 함께 탄금대에서 진을 친 이일임)이었는데, 그는 이순신이 잘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잘 듣 지 않고 꼬장꼬장한 이순신을 희생양으로 삼아 모든 죄를 덮어씌워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특유의 강한 논리로 결백을 주장하 여 결국 무죄가 되었으나 그 지나친 꼬장꼬장함 때 문에 미움을 사서 무죄임에도 보직에서 해임되어 백 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 결국 함경도에서 갖 은 고생을 하다가 44세 때 정읍현감이 되고, 46세 때 고사리진첨사와 만포진첨사로 임명되었으나 관리 들의 미움을 사서 유임된 바 있었다.
그러다가 난리를 불과 얼마 남기지 않은 작년에 진 도군수로 부임되었으나 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가 리포첨사로, 또다시 부임하기도 전에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다른 때에는 고관들의 장난이었을 것이나 이번만은 그의 고향친구요, 죽마고우인 유성 룡의 전격적인 천거로 승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승진을 기뻐할 처지도 못 되었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이미 둘 다 난리가 반드시 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에 대비하기 위해 힘을 썼으니 결국 이순신은 난리를 알면서도 가장 위험한 자리에 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을 알 면서도 맡아야 한다는 것은 소심한 이순신에게는 상 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렇듯 화려한 (?) 전력을 가진 이순신이 조정관리들의 썩어빠짐이 나 두려움을 모를 리 없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맡을수록 그 일 자체보다 더 어 렵고 난처하고 억울한 일이 생기게 마련인 것이 인 간사인 것이다. 하지만 이때까지 이순신은 오로지 스스로의 논리와 준비성만으로 버티며 살아왔고, 앞 으로도 그래야만 했다.
이순신은 만일에 대비하여 <난중일기>를 사실대로, 빠짐없이 기록하였으며, 모든 공문서와 장계 등을 복사하여 별도로 보관하도록 빈틈없이 지시하였다. 이 모든 것은 지난날 겪었던 쓰라린 일들에서 배운 것으로, 이순신은 조선에서 벼슬을 하려면 어떤 위 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박복하다고 한 것은, 첫째로는 이렇듯 힘들고 고달프게 살아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순신의 고민은 또 있었다. 이순신은 몹시 정확한 두뇌를 가지고는 있었지만, 또한 무척 정이 많고 소 심한 사람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가 상충되어 이순 신을 계속 괴롭혔다.
군무를 보자면 냉혹, 과감한 결단력이 요구되었다. 이순신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이순신은 항상 냉혹하리만큼 엄정하게 군기를 세워 부하들의 기강 을 잡았다. 그러나 그것은 전라좌수사라는 이순신이 그러한 것이요,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은 그러한 군기 나 처벌을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했다.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은 숫기가 없고 말을 잘하지 못하여서 원균이 안하무인으로 날뛰는데도 보이는 데에서는 싫은 소리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군무는 군무이니, 정확하게 하 지 않을 수 없었고 여기에 이순신의 고통이 있었다.
천성에 맞지 않는 일을 오직 의지로 해내야 하는 이 순신의 고통은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 고통이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중압감까 지 덧붙여 덮쳐오는 데에서 이순신은 병이 난 것이 라 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은 그의 부하들과 모든 사람들을 몹시 아끼는 성격이었다. ‘공은 얻지 못하더라도 인 명을 해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오래된 신념이자 믿음이었으며, 그 때문에 이순신은 논공행상에 불리 하더라도 원균처럼 병사들을 다그쳐 목베기를 시키 는 일 같은 것은 결코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군율을 잡기 위하여 자신의 마음은 결코 내키지 않았으나 이미 상당한 숫자의 부하들을 잡아 벌주고 참형에까지 처한 바 있으며, 그의 부하 들 중에 나오는 사상자들을 몹시 애석해했다. 그렇 다고 이순신이 그런 감정에 빠져 군무를 소홀히 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고, 그렇게 어리석거나 감정적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 바로 이순신의 비극 이었다.
차라리 어리석거나 감정적으로 행동했더라면 마음의 앙금은 남지 않았을 것이며, 차라리 글을 모르는 과 격한 무장이었더라면 하나의 행동에 수십번씩 갈등 하며 마음을 졸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순 신은 그 선량하고 약한 마음으로 인해 ‘자신을 믿는 부하들을 죽게 만드는’ 죄를 수없이 짓고 있는 것으 로 자책하게 된 것이다.
“장군님……, 지나친 근심은 화가 됩니다…………..”
은동은 이순신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순신은 비 록 웃고 있는 얼굴이었으나 그의 표정에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적막함과 외로운 감정이 돌고 있었 다. 이순신은 웃고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몹시 쓸쓸 했다.
이번 싸움 또한 쉽게 끝나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 었다. 왜군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지난번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싸움 이 벌어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칠 것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의 계책으로 죽어가는 왜군의 수가 얼 마나 될까 생각해보고 몸서리를 쳤다. 몇 천일까? 몇 만일까? 전쟁을 계속 이겨야만 하지만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면 비록 그들이 적군일지라도 서 글픈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왜군을 동정하여 놓아주는 의미는 아니었 다. 다만 그러한 살생의 죄를 저질러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세상의 서글픔과 자기자신의 위치가 간 혹 한탄스럽게 여겨졌을 뿐이다.
“허허, 내가 주책이구먼. 되었네, 내 자네의 권고를 받아들이겠네. 틈나는 대로 몸을 쉬일 것이니 안심 하시게.”
이순신이 잠깐의 감상에서 벗어나 다시 본래의 모습 으로 돌아오자 은동은 이순신과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전령이 들어와서 은동은 이 순신의 방에서 나가야 했다.
그날 이후 이순신은 다시 냉엄한 자세를 되찾아 더 이상은 은동에게 감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어 린아이에게 감정을 내보인 것을 조금은 쑥스럽고 부 끄럽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은동은 비록 말로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지 만, 이순신의 그런 쓸쓸함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깊 은 공감을 느끼고 배 밑창 선실로 돌아와 까닭도 모 르는 채 눈물을 흘렸다. 둔갑술을 써서 은동의 옆에 다가온 흑호가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만 은동은 대답 하지 않았다. 아니, 왜 눈물이 나오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은동은 그 이후 시간만 나면 이 순신에 대해 두고두고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생겼 다.
그날 저녁, 당포에 정박하여 물과 나무를 싣던 이순 신 함대를 보고 한 촌민이 달려왔다. 그는 김천손이 라는 소치는 목자였는데, 그 사람은 중요한 정보를 이순신 함대에 알려왔다.
– 왜선 대, 중, 소선 70여 척이 오늘 낮 오시(대략 낮 2시 경)경에 영등포 앞바다에서 거제 고성땅의 견내량 물목으로 들어가 정박중이다!
이 정보는 즉각 이순신에게 보고되었고, 이순신은 김천손을 불러 몇 마디를 물은 뒤 그 말이 사실이라 고 판단했다. 이것은 중대한 정보였다. 70여 척이나 되는 많은 전선이 한무리를 이루고 정박중에 있다는 것은 분명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는 공격함대라는 것 을 의미한다. 수송선이라면 낮에 정박하는 일은 없 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다시 김천손에게 적의 대선의 숫자를 물었다. 그러자 김천손은 대단히 커다란 배가 절반은 넘 어 보이더라고 말했다. 그 말에 이순신은 긴장했다. 김천손은 조선의 해안에 사는 백성이니 판옥선을 자 주 보았을 것이다. 그런 김천손이 ‘큰 배’라고 말했 으니, 이번의 그 ‘큰 왜선’은 적어도 지난번 다섯 척을 격침했던 오구로마루 급의 배 정도 된다는 뜻 이었다.
그런데 그렇듯 큰 배가 30여 척이나 모여 있다는 것은 이번에는 왜군의 결의도 자못 비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순신의 생각으로 지난번 해전에서 그 큰 배에는 상당한 고위급의 장수들이 타고 있는 것 으로 보아, 그런 큰 배는 왜국에서는 상당히 귀한 것 같았다. 그런 배가 30여 척이나 동원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이번에 왜국 수군도 결판을 내려나 보구나. 있는 힘을 다 끌어모은 선단이다. 이번 싸움에서 이기면 왜국 수군은 완전히 기가 꺾일 것이다!’
이순신은 아침에 동이 트기 전에 식사를 하고 곧바로 출격할 것을 휘하함대에 명하였다.
한편, 겐키는 불안한 느낌에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겐키는 마수에게 쫓기다가 영문도 모르는 채 전선에 타게 되었는데, 하필 이 전선은 조선으로 출병하는 왜군함대 소속이었던 것이다.
그 왜군의 함대는 이순신을 무찌르고자 왜군의 최고 정예들을 긁어 모은 특별 부대였으며, 이 함대의 지 휘관은 왜군의 유명한 수군대장 중의 하나인 와키사 카 야스하루(協治협판안치)였다. 그리고 와키 사카의 뒤에는 역시 이름을 날리는 수군대장인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 구귀가융)와 가토 요시아키(加藤 嘉 가등가명)가 후속부대로 뒤를 따라오고 있었 다.
구키 요시타카는 바로 오구로마루를 발명한 인물이기도 했으며, 가토 또한 11명의 해군대장 중의 1인 으로 용맹할 뿐만 아니라 지략이 있다고 알려진 인 물이었다. 와키사카와 구키는 열한 명의 왜국 해군 대장 중에서도 첫 손에 꼽히는 대장들이었으며, 이 번에 출격한 선단의 규모도 유래가 없을 정도의 것 이었다.
원래 겐키의 신원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으나 겐키 는 일단 낙오병으로 신고되어 이 배의 일원이 되었 다. 정체가 분명치 않은 낙오병마저도 전투원으로 참가시킬 정도로 이번 함대는 급히 조달된 것이었 고, 그 임무 또한 막중했다.
그럭저럭 시일이 흐르는 사이 부상을 입었던 겐키의 다리는 거의 치유되어가고 있었으나 겐키는 통 배에 서 내릴 기회를 잡지 못하여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 었다. 그런데 겐키가 조심스럽게 수소문 해보자니 이 배는 전라도수군을 쳐부수기 위해 항해하는 중이 었다. 겐키는 그 말을 듣고 몹시 걱정이 되었다.
‘전라도수군이라면 이순신이라는 장수가 지휘하는 수군이 아닌가? 기지마님이나 가메이님 등도 손 한 번 써보지 못하고 당할 만큼 무서운 장수라고 들었 는데……………..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겐키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자신이 획득한 센 리큐의 비밀문서를 고니시에게 전달하지 못할까 봐 그것이 더욱 걱정되었다. 결국 겐키는 싸움이 벌어지면 그 때 기회를 틈타 달아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사실 풍생수는 겐키의 두 형제를 죽였고, 겐키마저 도 쫓아가 죽이려 했으나 겐키는 몹시 겁을 먹어 항 상 사람이 많은 곳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에 마수 들도 함부로 그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풍생수는 명나라로 갈 일이 생겨서 잠시 겐키를 내버려두고 있었다. 마계로부터의 지원이 끊긴 터라 마수들도 여러 곳을 동시에 신경 쓸 만한 여유는 없 었던 것이다.
그러나 풍생수는 겐키와 그 형제들이 고니시의 명을 받고 무엇인가 탐지하러 왜국에 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지, 겐키가 센 리큐의 문서를 얻었다는 것까지 는 알지 못했다. 만약 풍생수가 센 리큐의 문서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알았다면 결코 겐키를 포 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음날, 그러니까 7월 8일 새벽, 조선수군의 모든 판옥선들은 노를 힘껏 저어 아직 어두운 바다로 출 항하기 시작했다. 새벽의 여명이 비칠 때쯤 속도가 빠른 판옥선들은 곧 견내량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 선군은 이미 준비를 갖추어 병사들이 배불리 먹고 긴장을 하고 있었지만 왜군은 아직 잠에서 채 깨지 도 못했을 터였다.
일단 이순신은 견내량 물목에서 적의 정찰대를 만났 다. 큰 배 1척과 중간배 1척으로 이루어진 이 정찰 대는 조선군의 함대가 나타난 것을 보자 급히 뱃머리를 돌려 거제도만으로 들어갔다. 이순신은 급히 뒤를 쫓지 않고, 행여 매복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여 선발대로 자신의 함대 중 절반인 열세 척의 판옥선 을 만 안으로 보냈다.
잠시 후 선발대로 보낸 배들에서 통영연으로 왜군의 사정을 알려 왔는데, 왜군은 모두 칠십이 척의 배였 고 큰 배가 절반이나 되며 방책을 치듯 원형의 진을 이루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순신의 좌수영에서는 통영연으로 전달체계를 만들어 먼 거리에서 상당히 복잡한 내용도 쉽게 전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보고를 받은 이순신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큰 배들이 방책을 쳤다고? 왜군이 새로운 전술을 생각해냈나 보군. 아마 가장 뛰어난 인물이 지휘하 는 모양이로구나.’
이순신은 지난번 보았던 큰 배들이 대량으로 동원되 었다는 것을 듣고는 그렇게 판단했는데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다. 와키사카의 부대에만도 총 칠십이척의 선단에 오구로마루 급의 대형전함이 서른여섯 척이 나 되었으며, 후속부대인 구키와 가토의 부대도 사 십이 척의 선단에 대형선이 스물 한 척이나 되었다.
지난번 기지마의 죽음과 가메이의 궤주로 왜군은 새 로운 전략을 짜기에 이르렀으며, 그것이 바로 ‘층각 전략’이었다. 조선의 판옥선은 크기가 크고 속도가 빠르며, 더군다나 화포의 사정거리가 길다는 것을 알게 된 왜군은 높은 층각이 달린 오구로마루 급의 배를 모조리 동원하여 높이의 이점으로 사거리의 단 점을 막으려 했다.
이층 혹은 삼층의 누각이 달린 배들은 그때까지는 단지 지휘용으로만 사용되어 왔는데, 그 높은 곳에 서 아래를 굽어보고 총이나 화살을 쏘면 화포가 날 아가는 거리상의 단점을 메울 수 있을 것이라고 와 키사카는 판단한 것이다. 그가 편 진형은 원형의 진 이었는데, 대형선으로 원형 진을 편 것은 조선군의 화포로부터 받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곧 그에 대응할 적절한 전략을 쉽 게 생각해냈다. 그는 이억기나 원균 등에게 일단 만 밖에서 대기하도록 청하고, 선발대의 절반만 다시 나아가 적을 유인하도록 명을 내렸다. 이순신의 지 속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이억기나 원균의 함대는 그런 연기(?)를 할만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서 거북선 2척을 필두로 한 이순신 함대의 돌격부 대 6척이 적진을 향하여 돌격하여 맹렬히 포사격을 가했다.
하지만 과연 와키사카의 계략이 맞았는지 왜선들은 그리 큰 타격을 입지 않았고, 열을 갖춘 층루에서 아래를 굽어보며 쏘는 탄환은 상당히 멀리까지 나갔 다. 잠시 후, 조선군의 선발대는 더 견디지 못한 듯 후퇴하기 시작했는데, 와키사카는 이때를 놓치지 않 고 총 돌격 명령을 내렸다. 부장 하나가 유인이 아 니겠느냐고 말했지만 와키사카는 고개를 저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고작해야 20여 척이다. 유인을 해보아야 별수 없을 것이다!”
허나 별수 없는 것만도 아니었다. 후퇴하는 조선군 선을 따라 만의 입구로 나오자 그곳에는 수십척의 조선함선이 있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다시 재빨리 통영연을 올려 학익진을 폈다. 그러자 와키사카는 당연히 생각해 두었던 ‘충각전략’을 사용하여 배들 을 급히 원통으로 배열시켰다. 왜선이 원형으로 배 치되는 모습을 보더니 이순신은 미소를 지으며 명했 다.
“지금부터 일제사격을 가한 뒤 접근하여 배의 고물 과 키를 노려라!”
그 말에 수하장졸들은 약간 놀라움을 표했다. 이제 까지 이순신은 화포의 사거리로 적을 주로 공격했으 며, 접근하는 전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는 접근하라는 것일까? 부장 하나가 묻자 이순신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잘 보아라. 저들은 이제 바다 한가운데로 나왔으 며, 우리의 숫자가 많은 것을 알고 후퇴하려 하리 라. 그런데 우리가 키와 고물을 파괴한한다면 그들 은 이제 배를 몰 수 없으니 꼼짝없이 바다에 빠져 죽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이판에 왜놈들이 싸울 경황이 있겠느냐? 더구나 원형진을 편 것은 스스로 함정에 빠지는 것과 같으니, 배가 접근하여도 자기 들끼리 노가 걸려 우리 배로 덮쳐들기가 어려워지는 까닭이다. 그러니 노를 힘껏 젓게 하여 속도를 늦추 지 말고 부근을 돌면서 모조리 격침시켜라!”
그 명에 의해 조선군의 함선들은 화포를 일제히 사 격하며 거리낌없이 왜선들에게 접근하여 다가가기 시작했다.
한편 은동은 배가 속도를 내고 두꺼운 배의 판자를 뚫고 둔중한 화포의 굉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아 전투가 바야흐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 다. 은동이 흥분하고 있는데, 흑호는 조용히 은동에 게 전심법으로 자신이 상공을 돌아볼 터이니 이순신 의 부근에 가 있으라고 말하고 이내 사라져 버렸다.
은동은 솔직히 호기심이 일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지만 겁도 났다. 화포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쏘아 지는 소리는 은동이 듣기에는 너무도 컸다. 조총소 리만 들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데 화포소리는 그 몇 배나 크고 강렬했던 것이다. 더구나 싸움이 벌어진 다고 생각하자 지난날 왜군들에게 어머니를 잃었던 그 악몽 같은 기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래서는 안 돼. 정신을 차려야지…………. 정신을….’
그러나 계속 삐걱거리는 노 젓는 소리와 뱃전을 때 리는 세찬 파도소리, 사방에서 울려오는 포소리와 총소리들은 점점 은동의 귓속을 후벼파기 시작했다. 은동은 억지로 이를 악물고 선창을 올라가 이순신의 곁으로 가려고 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고 눈도 떠지지 않았다.
‘용기를 내! 용기를! 이 바보야. 어서! 어서!’
은동은 후들후들 떨면서 억지로, 억지로 선창사다리 를 더듬으며 조금씩 기다시피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 다.
은동이 대장선의 윗갑판으로 올라갔을 때, 전투는 이미 한창에 이르고 있었다. 사방에는 수십 명의 기 라졸들과 통영연을 날리는 늙은 촌민들(통영연을 날 리는 역할은 연날리기에 익숙한 촌민들이 주로 맡고 있었다), 그리고 장교들과 군졸들이 빽빽이 서 있 어, 앉아 있는 이순신의 모습은 보이지조차 않았다.
그러나 함성소리와 포성, 총성과 파도소리들이 뒤섞여 은동의 귀에 밀려들어 거의 정신이 나갈 지경이 었다. 전투가 한창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은동은 눈으로 그 광경을 보고 싶었으나 대 장선은 높은 방패가 사방을 메우다시피 하고 있어서 키가 작은 은동은 바깥을 볼 수가 없었다.
간신히 방패 하나의 틈을 비집고 내다보자 그때에서 야 비로소 바깥의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사방에서 조선군의 판옥선들이 덩치가 크고 높은 왜선들이 모 여있는 곳을 향하여 일제히 돌격해 나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은동은 그 웅장한 광경을 본 순간, 거의 오금이 저 려 움직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비록 마수들과 무 시무시한 싸움을 겪은 은동이었으나 수천, 수만명이 각각 당시의 기술을 최고로 모은 전함을 타고 최신 의 무기인 화포와 총 등을 사용하며 벌이는 혈투는 은동의 넋을 빼앗을 정도였다. 잠시 후 조금 정신이 들면서 은동이 느낀 감정은 단 하나였다.
‘무섭다!’
은동이 죽을 고비를 아무리 여러 차례 겪었건, 세상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신기한 일들을 많이 치렀 건, 그것은 아무 상관이 없었다. 마을사람들이 왜병 들에게 모두 죽고 마을이 풍비박산이 났었지만, 그 것은 단지 도망쳐야 할 일이었고 자신이 직접 그 안 으로 뛰어들어야 했던 일은 아니었다.
이리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혈투를 벌이 는, 웅장하고도 무섭다 못해 처절한 광경은 처음 보 았다. 그리고 그 앞에서는 단지 무력하고 무섭다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았다. 은동은 덜덜 다리를 떨면 서 나무 사다리를 다시 구르듯 내려와 선창의 한구 석에 처박혀 버렸다.
‘잘한다! 잘해!’
흑호는 둔갑법을 써서 보이지 않게 조선선단의 위를 날며 신바람이 나 있었다. 이순신 함대의 함선들이 지닌 화포는 비록 그 당시에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 지만, 길이가 수백 척에 달하는 왜선들을 단방에 부 순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그 배들은 수십, 수백 발의 화포를 맞아가며 천천히 여기저기가 부서지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화전(불화살)의 세례를 받고 불타올라 완전히 분해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오히 려 그 편이 더 신나고, 장관을 이루었는지도 모른 다.
수십척에 이르는 왜선들이 이미 이순신의 명대로 키 와 노, 돛대를 잃고 조금씩 조금씩 부서져 나가며 전력을 상실하여 가고 있었다. 와키사카가 새로 내 세운 충각전략은 조선함대가 원거리에서 함포 공략 을 해올 때의 대비책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는 이순 신이 이리도 빨리 전략을 바꿀 것으로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결국 결사적인 항전에도 불구하고 왜선들 은 한척, 한척 부서져갔다.
은동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선창 구석에 처박혀 꼼 짝도 하지 않았다. 너무도 무서웠다. 무슨 생각이 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본능적인 두려움과 공포 가 지배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은동에게 정신이 돌아오도록 만든 것은 피칠갑 을 한 몇 명의 부상자였다. 한참 전투가 진행되는 중이라, 그래도 배마다 한두 명의 부상자나 사상자 가 나오는 것은 당연했다.
전투가 열기를 띠자 이순신의 대장선도 상당히 왜선 의 진에 접근해갔다. 헌데 이는 전투에 참여하기 위 해서가 아니었다. 화포와 화살이 난무하는 가운데 지령을 내리려면 통영연이 아닌 근거리용인 깃발 신 호를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대장선이 접근하자 자연히 왜병의 사격이 대장선에 집중되었다. 그러자 삽시간에 부상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전투가 한참인지라 은동이 혼자만이 있는 선창에 몇 명의 군졸들이 부상자를 내려놓고 다시 갑 판으로 올라가 버렸다.
은동이는 정신은 조금 돌아왔지만 삽시간에 피범벅 이 된 부상자들이 자신의 주변에 놓이자 더더욱 무 서워졌다. 그들 중 왼쪽 눈에 조총알을 맞아 철철 흐르는 피를 손으로 막고 있던 덩치 큰 사내가 은동 에게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네, 의원이라며?”
은동은 멍하니 입만 벌린 채 겁먹은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남자는 은동의 겁먹은 눈빛을 보 더니 갑자기 화가 난 듯 외쳤다.
“뭐 하나!”
“네….. 네……?”
은동은 멍한 소리로 더듬거렸다. 그러자 그 남자는 악을 썼다.
“의원이면 어서 해! 내 눈에서 총알을 빼달란 말여!”
눈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남자의 기세는 자못 흉험 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지금 은동의 눈에는 그 남 자가 어떤 마수나 귀신보다도 무서워 보였다.
“어…… 어…….”
은동이 앉은 채 뒤로 뭉기적거리며 물러나려 하자 그 남자가 다짜고짜 은동의 멱살을 잡았다.
“어서 해! 내가 가지 않으면 누가 포를 놓아! 누가 왜놈을 잡냐구!”
그래도 은동이 겁을 먹어 벌벌 떨자 남자는 은동의 따귀를 사정없이 철썩철썩 후려갈겼다. 은동은 눈에 서 별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지만, 덕분에 정신 은 조금 드는 것 같았다. 화가 치밀어 올라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도 몰랐지만.
“어서 해!”
“아저씬 못 싸워요!”
은동은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그래가지고 어떻게 싸워요!”
그러자 그 남자는 누런 이를 악물며 외쳤다.
“안 싸우면! 안 싸우면 그대로 맞아 죽으란 말여?”
“아저씬 다쳤어요! 어떻게…….”
“그래도 왜놈들을 죽여야 혀! 왜놈 한 놈이 얼마나 많은 백성을 죽이는지 알어? 엉! 우리 아우 일가는 왜놈들 때문에 씨가 말렸어!”
버럭 외치면서 남자는 구멍이 뻥 뚫린 흉측한 눈을 은동에게 왈칵 들이밀었다. 순간 솟구쳐 오르는 피…………, 예전에 죽은 동네사람들의 베어진 코······, 그리고 어머니의 코……. 그 무엇보다도 남자의 증 오심과 적개심이 은동을 견딜 수 없이 짓눌렀다.
은동은 어질하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 다.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은동은 자 신도 모르는 새, 남자의 눈구멍에 손을 밀어넣고 있 었다. 남자는 ‘으아아악’ 비명을 질렀지만 은동은 손을 뺄 수 없었다. 그 축축하고도 비릿한 감촉에 다시 한 번 몸서리를 쳤지만, 은동의 손은 딱딱한 것을 찾은 뒤 힘껏 잡아 왈칵 뽑았다.
남자는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고 바닥에 뒹굴었 다. 기절한 모양이었다. 은동은 피로 범벅이 된 손 을 늘어뜨리고 손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이 바닥 에 무늬를 그릴 정도로 덜덜 떨며 망연히 서 있었 다.
‘싸움이란 게 전쟁이란 게…….’
은동은 몸서리를 쳤다. 무심결에 발밑에 너부러진 두 명의 부상자를 내려다보았다. 한 명은 어깨를 맞 아 기절한 듯했고 다른 한 명은 배에 화살이 꽂혀 있었다. 은동은 갑자기 흐흑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무의식적으로 눈물을 닦자, 시뻘건 피가 얼굴에 범 벅이 되었고 옷도 피범벅이 되었다.
은동은 엉엉 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부상자의 배에 꽂힌 화살을 확 잡아 뽑아내었다. 은 동의 신력에 화살이 간단하게 쑥 뽑혀 나왔고, 끝에 살점이 붙어 있었다. 그것을 본 은동이 다시 흑흑 흐느끼면서 화살을 옷에 아무렇게나 닦아 내었다.
아랫도리가 축축했다. 오줌을 싼 것 같았다. 은동은 계속 엉엉 울면서 그 화살촉으로 다른 부상자의 어 깨를 후비어 총알을 빼내기 시작했다. 한참만에야 총알이 빠져나오자 은동은 어헝 소리를 내며 화살을 기둥에 박아 버렸다. 은동의 힘에 왜국의 화살은 기 둥에 깊이 들이박혀서 자루만 남았다.
은동은 옷자락을 부드득 뜯어내어 부상자들의 상처 를 싸매기 시작했다. 대충 싸맨 것이지만 은동의 힘 이 워낙 강하여 삽시간에 지혈이 되었다. 대강 처리 가 끝나자 은동은 다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징 그럽고 무섭고 욕지기가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그때 은동의 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 원의 목소리였다. 이 응급조치를 하라고 계속 은동 을 다그친 것은 다름 아닌 은동의 귀에 붙어 있던 그 의원이었다.
‘고생했구나. 아이야…… 잘했다.’
그러나 은동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손을 들어 주 체할 수 없는 눈물을 닦으려고 얼굴을 문지르자 오 히려 얼굴이 더욱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는 창피스러워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래, 이놈의 싸움………… 이놈의 싸움…………! 하지만 난 어떡하지?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난 이렇 게 바보 멍청인데…………….’
그때 눈에 총알을 맞았던 남자가 정신을 차리는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아직도 고통이 극심한 것 같았지만, 얼굴을 더듬어보고 자신의 상처가 천 으로 대어져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그 남자는 성한 한쪽 눈을 힘겹게 뜨고서 은동을 돌아보았다.
은동은 얼굴부터 온몸이 피칠갑이었고, 옷도 상처를 싸매느라 너덜너덜 찢어진 참혹한 모양새였다. 거기 다가 아랫도리는 오줌을 싸서 축축히 젖어 있었다. 조그마한 몸은 학질에 걸린 것처럼 덜덜덜 떨고 있 었다. 그 모습을 본 억세고 거친 남자는 주르르 굵 은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구나. 어린것한테 내가……………”
남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은동을 숨이 막힐 정도로 와락 끌어안더니 가까스로 몸을 추스렸다. 그러고는 반쯤 기듯이 비틀거리며 사다리를 기어올라가기 시 작했다. 힘겹게 오르던 남자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은동을 돌아보고 말했다.
“네 몫까지 싸울 거여……. 꼭!”
은동은 아직도 슬프고 무섭고 떨리고 속이 메슥거렸으나 그 남자에게 간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왜병들은 화살과 조총을 쏘아댔으나 판옥선의 두꺼 운 방패들을 상대로 하기에는 거의 무용지물이나 다 를 것이 없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왜병들은 접근하 는 판옥선에 올라타려고 기를 썼으나 이 또한 노군 들의 힘에 밀려 번번이 실패했다. 두툼하고 굵은 조 선노로 적선이 지나치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밀어내 는 작전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조선군의 치밀한 계책에 왜선들 선체에 여기저기 구 멍이 뚫리고 노가 부러지고 돛대가 주저앉고 대선의 간판인 층루가 무너져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왜군대장 와 키사카는 몸을 떨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나의 전략을 이리 도 쉽게 깨뜨리다니… 정말 무서운 상대다!’
와키사카는 미칠 것 같았다. 그는 이를 갈면서 숨겨 두었던 최후의 비열한 술책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은 포로로 잡은 조선사람을 몇 명씩 분산하여 왜선에 태워둔 안배(按排)였다.
“조선인들을 갑판으로 올려랏!”
흑호는 신이 나서 왜선들이 깨어지는 광경을 지켜보 았다. 바로 그때, 느닷없이 각 배마다 조선인으로 보이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갑판으로 끌려나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어라? 뭣 하는 짓이지?’
단순한 흑호는 영문을 몰라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가 문득 그 사실을 깨닫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 이놈들이 비열하게 백성들을 인질로 세워?’
흑호는 당장 날아가서 와키사카를 때려죽이려 했다. 놈의 짓이 너무나 가증스럽고 더러워 보였던 것이다. 중간계의 의지니, 금계니 하는 따위는 이미 까맣게 잊고 있었다.
‘금수끼리 싸워도 새끼를 잡아 인질로 세우는 짓은 없다! 이런 더러운 눔!’
흑호는 쏜살같이 와키사카 쪽으로 쏘아져 내려갔다. 그러나 흑호가 막 와키사카를 덮치려는 순간, 뭔가 뜨끔한 기운을 느꼈다.
‘제기럴! 또 마수냐?’
흑호는 자신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채 부산을 떠는 와키사카를 한 번 째려보고는 들었던 주먹을 내렸 다. 그놈보다는 아무래도 마수가 더 가증스럽고 미 웠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마수는 흑호에게 오지 않고 자꾸 바깥쪽으로, 바깥쪽으로만 향하여 가는 것 같 았다.
‘뭐여? 또 유인하는 건가? 흐음…….’
흑호는 비록 머리가 둔하고 성질이 급했지만, 동물 특유의 기가 있어 한 번 당해본 경험이 있는 일은 두 번 다시 겪는 무모함을 저지르지 않았다. 흑호는 주위를 주의깊게 살핀 후 마수가 단 한 놈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어허, 무엇이? 왜선마다 조선사람들이 타고 있다 는 말이냐?”
이순신은 그 보고를 받고 깜짝 놀랐다. 이순신은 오 랜만에 병사들이 직접 전투할 기회를 주게 되어 내 심 흐뭇하게 여기던 터였다. 그런데 와키사카가 잔 꾀를 부려 왜선마다 조선사람 몇 명씩을 인질로 태 워 두다니!
그들이 갑판에 나와 있는 것을 보고 조선수군은 갑 자기 사격이 둔해졌다. 아무리 난리라지만 조선수군은 차마 자신들과 같은 동포를 향하여 포를 쏠 수는 없었다. 대장선의 장교들도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 도 왜놈들을 놓칠 수는 없다는 주장과 그래도 살려 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이순신 역시 잠시 망연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의견이 모아지지 않자 모두의 시선이 이순신을 향했 다. 이순신은 갑자기 다시 생기를 잃고 십년은 더 늙은 듯한 모습으로 변했다. 이순신의 야윈 손이 가 늘게 떨리는 있음을 장교들은 보았다.
“장군…….”
누군가가 결정을 재촉하듯 하였으나 이순신은 한참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공격을 멈추지 말라…….”
“하오나……!”
나대용이 외쳤다. 나대용은 우락부락한 용모였지만 실제로는 몹시 성품이 고왔다. 이순신은 괴로운 듯 고개를 저었다.
“왜적을 놓아줄 수는 없다. 아니, 그보다도 우리가 여기서 주춤하면 앞으로 모든 왜군 배들은 더 많은 우리 백성을 태울 것이다…………..”
이순신은 점점 잦아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 다가 갑자기 고함을 쳤다.
“더 쏘아라! 더 몰아붙여라! 앞으로는 왜적들이 그 럴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또한 인질로 잡혀 있는 우리 백성들의 죽음을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하라!”
이순신은 고함을 치다가 이내 괴로운 듯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크게 소리를 쳤다.
“군령이다!”
“군령이오!”
장교들과 기라졸들은 명이 떨어지자 분주히 군령을 전달했다. 이순신은 나지막한 소리로 다시 말을 이 었다.
“왜선이 빈 배가 되면 구할 수 있는 데까지 구하도 록 하라. ………이는 군령은 아니다. …………그러나 모두 에게 전하도록 하라……………..”
그러자 모든 장교들은 비감한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 였다. 이순신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 었다. 지금 그 작전에 말려들면 당연히 왜군들은 이 후 모든 배에 조선인 인질을 세울 것이고, 피해자는 더더욱 늘어날 것이었다.
이순신의 군령은 역으로 더 강한 공격을 퍼부어 그 작전이 전혀 쓸모없음을 보여주라는 의지가 담겨 있 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도 마음이 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작은 목소리로 어쩌면 필요없을, 사족 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 말에 오히려 조선군은 혹은 더더욱 분노 하여, 혹은 단순히 군령에 따라 왜군을 더더욱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엥? 저게 뭐여?’
흑호는 조금 의아해했다. 마수가 이순신을 노리거나 뭔가 전황에 영향을 줄 짓을 할 거라 여겼는데, 지 금 전쟁터에서 멀리 벗어나고 있는 어느 패잔병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그자는 난파한 배에서 탈출 한 왜병인 것 같았으며, 조그마한 나무토막에 몸을 의지하여 상당한 속도로 헤엄치고 있었다. 한참을 헤엄쳤을 터인데도 속도도 줄지 않고 무서운 집념으 로 계속 나아가는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어디로 가려고 그러나? 여긴 바다 한복판이고 물살 도 빠른데, 참 이상하구먼. 보통 사람은 헤엄쳐서 가기 어려울 텐데?’
흑호는 최대한 법력을 감추면서 의아한 마음으로 관 찰만 계속 했다. 그러나 마수는 분명 그자에게 천천 히 다가가며 법력을 모으는 품이, 아마 그자를 일격 에 해치려 하는 듯싶었다. 순간 흑호는 번민에 휩싸 였다.
‘왜놈을 죽이려는 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겄네. 좌 우간 왜놈이면 죽어도 그만 아녀?’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니 그 점도 좀 의아했다.
‘아녀, 마수가 좋은 일을 꾸밀 리는 없을 거여. 저 왜놈이 뭔가 중요한 인물인가?’
흑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우물쭈물하다가 마수가 막 그자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순간, 무의식적으로 몸을 날려 놈의 공격을 쳐냈다. 마수는 흑호가 느닷 없이 나타나자 깜짝 놀라는 것 같았다.
놈은 흑호가 제일 미워하는 소야차는 아니었으나 처 음 보는 놈이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고, 전 신이 조금 투명하여 일종의 그림자 같아 보였다.
“흥! 이눔! 뭔 짓을 꾸미는지는 모르지만 한번 죽 어 봐라!”
흑호는 다짜고짜로 주먹을 휙휙 휘두르며 놈에게 달 려들었다. 그러나 놈은 정말 그림자처럼 흑호의 주 먹을 그대로 통과시켜 버렸다.
“오호? 그럼 술법으로 해볼려?”
흑호는 으르렁 하며 포효한 뒤 돌개바람을 한번 내 쏘았다. 그러자 놈은 신기하게 돌개바람이 닿을 때 쯤 몸을 두 개로 확 분리시키는 것이었다. 그 모습 을 보는 순간, 흑호는 놈을 태을사자가 준 두루마리 에서 한 번 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으흠, 네놈이 바로 몸을 마음대로 나눈다는 분신귀 (分身鬼)로구나!”
재빨리 놈이 다시 몸을 네 개로 나누었다. 흑호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면서 꼬리로 물을 쳐 물방울을 철썩 퉁겨올렸다. 그러고는 솟아오른 물방울에 법력 을 담아서 놈들에게 우박처럼 쏘아내었다. 그것은 영발석투의 술법을 조금 변형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싸우는 장소가 바다여서 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놈은 휘르르 하고 여러 개의 분신들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모양을 만들더니 흑호가 쏘아보낸 물방울을 휘 리릭 에워싸 흩어지게 했다. 그러고는 휙휙 하고 정신없이 흑호의 주위를 떠돌며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 다.
놈은 상당히 음기가 강한 마수인 듯, 놈이 몸 근처 로만 다가오자 흑호는 몸이 오싹오싹해졌다. 그런데 도 그놈은 흑호를 물리치는 것보다는 아래 있는 자 에게 손을 뻗으려고 여러 차례 분신을 날렸다. 흑호 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번번이 아래 있는 자를 덮치 려는 분신을 술법으로 막아내면서 흥이 나게 싸움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도 아래의 헤엄치던 자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기를 쓰고 도망만 치고 있었다. 분신귀 놈은 아래 있는 자가 점점 멀어지려고 하자 조금씩 당황 하는 것 같았다. 흑호는 마수에게 틈을 주지 않았 다. 세 번의 공격을 간단히 퉁겨내 버린 흑호는 분 신귀 놈에게 물었다.
“이놈! 도대체 왜 저 인간을 노리는 거냐? 뭐가 있는지 말하면 놓아줄 수두 있다!”
그러나 약삭빠른 마수가 흑호의 그 정도 말에 넘어 갈 리 없었다. 놈은 약간 움찔하더니 술법도 쓰지 않고 무작정 흑호에게 몸으로 덮쳐 들었다. 거의 목 숨을 내놓은 듯한 기세에 흑호는 흠칫했다.
그냥 당하고만 있을 흑호가 아니었다. 흑호는 잽싸 게 앞발에 법력을 담아 놈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그 러자 놈의 머리가 박살이 나면서 부르르 떨더니 공 기중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다. 흑호는 너무도 어이 가 없어서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이놈이 미쳤나? 어째서……………?’
그러나 다음 순간, 흑호는 놈의 이름이 다름 아닌 분신귀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차! 놈은 몸을 나눌 수 있지!’
아니나다를까, 놈은 이미 몸을 나누었던 것이다. 놈 의 분신 하나가 벌써 저만치 아래로 쏘아져 내리꽂 히면서 허우적거리는 왜병에게 다가들고 있었다. 흑 호는 다시 바람의 술법을 써서 놈의 분신을 휘말아 버리려 했으나 놈은 어느새 왜병의 등덜미로 손을 뻗치고 있었다.
헤엄을 치고 있는 왜병 형색의 인자, 겐키는 낯익은 써늘한 기운이 등덜미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순 간, 온몸이 굳어 버리는 것 같았다.
은동은 피와 오물과 땀으로 범벅이 된 몸으로 그때 까지도 배 밑창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울음은 진정이 되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점점 침울해져 견디기가 힘겨웠다.
‘나는 뭐지? 나는… 바보… 멍청이…….’
은동은 스스로의 꼬락서니가 한심스럽기 짝이 없었 다. 뭐가 우주 팔계의 존재가 힘을 부여해주고 뭐가 신력을 지니고 술법을 지닌 존재란 말인가? 마수들 과 싸울 때까지만 해도 은동은 이렇듯 주저하지 않 았다. 그건 마수들이었으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어찌 보면 장난과도 흡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상처입고 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순간, 은동은 손끝 하 나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은 무서움이나 죽음에 대한 공포와는 또 다른 형태의 감정이었다.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된, 보다 큰 공포라고나 할까? 어머니의 죽음, 마을사람들의 죽음. 그러나 죽음의 공포보다 거기에서 비롯되는 혐오감과 이유조차 모 를 무서움과 두려움, 그리고 긴장………….
‘난…… 못해, 못해… 1…………..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이 꼴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왜군을 무찌르고 이 순신을 구해내고 난리를 종식시켜야 한다고? 피를 조금 본 것만으로 덜덜 떨리고 손이 굳어 버리는 꼬 맹이인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말인 가? 마수들이 인간을 조종하여 이순신을 공격한다 면, 그것을 막을 사람은 은동이뿐이라고 했다. 그러 나 자신이 어찌 그렇게 한단 말인가?
지금까지의 은동은 처음 해보는, 얼떨떨하고도 신기 한 놀이에 넋이 빠져 있는 아이에 불과했다. 그러나 부상병의 눈에서 조총알을 빼낸 순간, 은동은 다시 현실 속의 열 살짜리 아이로 돌아왔던 것이다. 은동 은 어느새 땅에 떨어져 피와 오물로 범벅이 된 유화 궁을 보았다. 그러자 다시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호유화가 저걸 줬는데도………… 난 할 수가 없어………….난 바보야. …………바보 멍청이…………….’
은동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더럽혀진 채 땅에 굴러다니는 유화궁을 보며 호유화의 생각이 떠올라 울고, 그동안 거의 잊고 있었던 어머니와 전멸한 마 을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용기 도 내지 못하는 자신 때문에 더더욱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어럽쇼?’
흑호는 놀라서 공중에서 잠시 균형을 잃었다. 분신 귀 놈은 그 왜병을 해치지 못했다. 그 대신 무언가 두루마리 같은 것을 하나 안고 도망치는 것이었다. 흑호는 당연히 놈이 왜병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줄 알고 술법을 썼는데, 놈이 노린 것은 왜병의 목숨이 아니라 그의 품안에 있는 하나의 두루마리였던 것이 다.
그것을 빼앗고 난 다음에야 놈은 다시 왜병의 목숨 을 노리고 달려 들었지만 흑호가 재빨리 놈의 공격 을 막아내었다. 그러자 놈은 더 버티기 어렵다는 듯 두루마리를 들고 뺑소니를 쳐버렸다. 끈질기게 흑호가 뒤를 쫓자, 급기야는 그 두루마리를 마화(火) 로 태워 허공에서 재를 뿌리기에 이르렀다.
‘어라라? 그럼 저놈은 저 두루마리를 빼앗으러 왔다 는 건가?’
흑호는 잠시 망설였다. 분신귀를 해치워 버려야 하 는 걸까? 아니면 저 왜병 놈을 닦달해야 하는 걸 까? 처음에 흑호는 왜병의 목숨이 살아난 것을 보 고 굳이 무리를 하면서까지 분신귀를 쫓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왜병을 잡아 닦달하려다 보니 미처 생 각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아이쿠! 이런! 중간계에서 나보구 인간과는 더 이 상 아무 연관도 맺어선 안 된다구 했었지? 흐 음……, 이 일을 어쩐다?’
지난번 중간계에서 흑호와 태을사자와 호유화는 더이상 왜란종결자의 일을 인간들이 알게 하거나, 그 에 관한 일 때문에 인간들에게 영향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런데 마수들이 이순신도 아닌 이놈을 그토록 기를 쓰고 노렸던 것을 보면, 이놈은 이번 일에 뭔가 중요한 단서를 쥐고 있었음 이 분명했다. 그것이 그 두루마리였을 것인데, 아쉽 게도 그 두루마리는 마수에게 빼앗겨 이미 재가 되 어 버렸다. 그렇다고 놈을 잡아 닦달할 수도 없었 다.
‘제기! 더럽게 됐구먼. 아이구, 답답혀. 그냥 콱 족 쳐 버리고 나중에 추궁하면 몸으로 때울거나?’
하지만 흑호는 그럴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한 몸만 달린 일이라면 성질에 못 이겨서라도 저질 러볼 터였지만, 이건 천기가 달린 문제라고 하지 않 았던가? 그러던 중 흑호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려! 그래서 은동이가 있는 거지! 은동이를 데리고 와서 이놈을 잡아 추궁하라고 하면 될 거 아닌가 ?’
그러나 그 방법을 생각하자니 그 또한 문제였다. 은 동이는 지금 이순신의 대장선에 타고 있는데, 은동 이를 갑자기 끌어내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 할 것이었다. 할 수 없이 흑호는 놈의 얼굴과 체취 를 잘 기억해 두리라 마음먹었다.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얼마든지 놈을 잡아낼 수 있으리란 생각에 서였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새로 부리게 된 부하(?)들을 불러내었다.
“물고기들아! 새들아! 저놈이 어디로 가는지 끝까 지 쫓아서 나중에 나에게 일러라! 알았지?”
금수의 우두머리가 된 흑호이니만큼 모든 물고기나 새들 또한 흑호의 명을 어길 수가 없었다. 내친김에 흑호는 한 번도 불러보지 않은 도깨비들을 불러보았 다. 역시 우두머리는 좋은 것이라 바다 위인데도 삽시간에 네 마리의 도깨비들이 나타났다. 네 발 달린 이매(魅) 두 마리와 외발 도깨비인 독각(獨脚) 두
마리였다.
“밤이건 낮이건 저놈을 놓치면 안 뒤어! 놓치면 네 놈들 혼난다!”
단단히 다짐을 받아놓고 흑호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 으로 다시 이순신의 대장선으로 향했다.
한편 겐키는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힘이 자신의 품에 단단히 갈무리해둔 센 리큐의 문서를 빼앗아가자 이 젠 끝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행히 영문을 알 수 없는 괴상한 일은 더 이상 벌어지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도 자신의 몸은 무사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신령의 가호가 있는 것일까?’
두루마리는 비록 빼앗겼지만 겐키는 이미 문서를 읽은바 있어서 내용은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증거는 없어졌지만, 아마 고니시에게 이야기하면 자신의 말 을 믿어줄 것이었다. 아니, 이는 죽음으로까지 혼자 가지고 가기에는 너무도 중대한 내용이었다.
‘그래, 살아야 한다. 적어도 일을 마칠 때까지는 살 아야 해!’
겐끼는 이미 지치고 부상당한 곳이 도져서 기절할 지경이었지만, 다시 죽을힘을 다해 헤엄치기 시작했 다.
“으…… 은동아?”
흑호는 은동의 몰골을 보고 몹시 놀랐다. 처음에는 심하게 다친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곧 주변을 살 핀 뒤, 제정신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은동을 안아올렸다. 안아보니 은동은 부상을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너 왜 얼이 빠져서…………….”
그러나 그때 다시 부상자 하나가 구르듯 선창으로 내려오는 바람에 흑호는 은동을 그냥 내버려둘 수밖 에 없었다. 어느새 은동과 정이 들어 버린 흑호는 아까의 수상한 왜병에 대한 생각마저도 까맣게 잊어 버린 채 은동이의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은 동은 흑호가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전투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왜선에 돌 입하여 충각선을 쳐부순 사람은 순천부사 권준이었 으며, 거의 모든 전선들이 한 척씩의 목표를 노리고 접근하여 갔다.
“천자총통을 준비해라! 대철환을 장전하고 화약을 최대로 장전하라!”
이순신이 가장 아끼는 용맹한 장수인 녹도만호 정운 은 평행으로 떠서 조총을 끈질기게 쏘아대는 두 척 의 충각선을 포착했다. 방패 틈으로 날아든 조총알 에 포수가 넘어지자 정운은 그을음투성이가 되어가 며 직접 군졸들과 함께 거대한 천자총통의 포구를 돌렸다.
“받아라! 왜놈들!”
육중한 천자총통의 포연과 함께 놀랍게도 대철환은 앞의 층각선의 층루를 박살내 버리고 뒤쪽 층각선의 층루마저도 명중시켰다. 뒤쪽 충각선의 층루가 우지 끈 하면서 넘어져 바다에 처박히고 앞 충각선 층루 의 파편들이 비오듯 쏟아져 내리자 조선군사들은 이 묘기에 환호성을 올렸고 왜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 다.
그 두 척의 충각선에서는 왜병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마구 도망치며 물에 뛰어들었다. 정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불화살을 비오듯 쏘게 하여 두 척의 층각 선을 통째로 불태워 버렸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왜 병들의 비명소리가 처절하게 울려퍼지자 왜선들의 원형진은 겁을 먹고 와그르르 허물어져 갔다.
‘틀렸다!’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알려진 장수답게(?) 재빨리 만 사를 포기하고 비상시를 위해 준비해둔 전용선에 올 랐다. 와키사카의 관직은 나카무쇼노스케(中務少輔 중무소보)라고 하여, 이른바 8부 장관 중의 하나인 중신이었다. 와키사카는 그만큼 대단한 지위에 있었 기 때문에 비상시를 대비하여 특수한 배가 배당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배는 전투무기는 거의 실려 있지 않은 반면에 다른 배의 갑절에 달하는 노가 달린, 이른바 쾌속선이었다.
와키사카는 자기 가문의 충직한 다른 장수들이 목숨 을 내던지면서 앞을 막아주는 사이 이 쾌속선을 타고 도주하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와키사카의 수족이었던 다른 장수들은 하나도 남지 않고 몰살해 버렸 다.
좌수영 휘하의 최고의 명궁으로 알려진 방답첨사 이 순신은 묵묵히화살 한 대에 왜병 하나씩을 꼬치로 만들면서 천천히 왜선에 접근해 가고 있었다. 방답 첨사 이순신의 배역시 각종 철환과 화살들이 우박 처럼 쏟아져 내렸으나, 그보다 더욱 왜군들의 공포 심을 자극한 것은 한 대의 활이었다. 방답첨사 이순 신은 과감하게 상체를 내밀고 추호도 흔들리지 않는 기세로 정확히 화살 한 대에 왜병 하나씩을 쪽집게 처럼 맞추어 떨구고 있었다.
그의 배가 충각선에 삼십 장까지 접근하자 왜병들의 사격이 뚝 그쳐 버렸고, 이십 장까지 접근하자 왜병 들이 다투어 물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 장까지 접근하자 그 배는 완전히 비어 버렸다. 방답 첨사 이순신이 묵묵히 화전 한 대를 꺼내어 충각선에 꽂는 순간, 그 뒤를 이어 불화살이 우박같이 쏟 아져 곧바로 충각선은 불덩어리가 되었다. 방답첨사 이순신은 이순신의 명 그대로, 추호도 목을 베려는 욕심조차 없이 곧 다른 배를 뒤쫓아 쳐부수기 시작 했다.
광양현감 어영담이 과감하게 판옥선의 노로 층각선 을 밀어내며 충각을 깨뜨리자, 그곳에 있던 왜장이 고슴도치가 되어 굴러떨어졌다. 판옥선의 노군들은 신이 나서 노로 놈의 몸을 받아내어 산 채로 잡는데 성공했다. 왜장은 곧바로 작은 배에 옮겨져 이순신 의 대장선으로 옮겨져 왔지만, 이미 화살을 너무 많 이 맞아 입조차 떼지 못했다.
이순신은 냉혹하게 왜장의 목을 베라고 명하였다. 왜장은 눈을 번하게 뜨고 코앞에서 목으로 날아드는 칼날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그 왜장은 바로 와키사 카의 오른팔 격인 중신 와다나베였는데, 왜국에서도 이름이 높았던 장수인 와다나베는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아 이름조차도 남기지 못했다.
그외 사도첨사 김완, 여도권관 김인영, 흥양현감 배 흥립, 좌돌격장 급제 이기남, 발포만호 황정록 등이 지휘하는 전함이 각각 1척씩의 충각선을 깨뜨리고 불사르거나 포획하였으며 좌별도장 영군관 전만호, 윤사공, 가안책 등의 3인은 거의 비어 버린 충각선 2척에 뛰어들어 그 배들을 노획하기도 했다. 이억기 의 함대 또한 분산되어 도망치는 왜선들을 마구 무 찔렀으며 원균도 머리사냥에 정신이 없었다.
이미 와키사카가 도망치고 모든 대선이 부서지거나 가라앉는 참이었다. 왜군 중 그 누구도 더 싸우겠다 는 열의를 가진 자가 없었다. 원형진을 이루었던 대 선들의 안쪽에는 중선들과 소선들이 있었는데, 이미 전의를 상실한 왜병들은 중선과 소선에 올라타기 위 해 아귀다툼을 벌였다.
심한 경우는 너무 많은 인원이 한꺼번에 올라타 배가 뒤집히고, 또는 배가 뒤집히지 않기 위해 뱃전을 잡는 같은 편의 손목을 칼로 마구 베어 버리는 참극 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중 육백 명 가량의 왜군들은 작은 배 여섯 척에 나누어 타고 재빨리 선단을 조직 하여 죽을힘을 다해 포위망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조선 판옥선들이 일차적으로 층각선 (오구로마루)등 의 대선들을 주로 공격하는 틈을 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배들 중 두어 척은 다시 화포에 맞 아 풍비박산이 나버렸고 왜병들 이백여 명은 산산조 각이 나서 고기밥이 되었다. 그때 이순신은 누구보 다도 조선인들이 탄 배를 격침시킨다는 생각에 마음 아파 하다가 그 꼴을 보고는 분통을 터뜨렸다.
“저놈들을 한산도로 몰아라!”
‘예?”
“놈들을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게 하리라! 우리 백성들이 겪은 고통만큼 놈들도 받아야 한다!”
한산도는 당시 아무 것도 없는 그야말로 황폐한 섬 에 불과하였다. 그곳은 숲은 무성하였으나 먹을 것 을 전혀 구할 수 없는 섬이어서 이순신은 놈들을 그 곳에 가두어두고 천천히 해치울 생각을 한 것이다. 이순신으로서는 다소 잔인한 전략이었으나, 지금 이 순신은 신경이 몹시 날카로운 상태였다. 이순신은 내친김에 원균에 대한 감정도 조금 드러내 버렸다.
“그놈들을 경상우수사원균)에게 맡기기로 하자. 목 베는 것을 좋아하는 이이니.”
이번 전투에서도 원균은 비록 많은 배를 파하기는 하였으나 역시 거의 빈 배에 돌입한 것에 지나지 않 았다. 덕분에 원균의 함대는 이순신의 함선에 삼분 의 일에도 못 미치는 척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 신의 함대보다도 많은 사상자를 내게 되었다.
이순신은 그런 원균이 못마땅하여 견딜 수가 없었 다. 스스로도 이유를 알지 못할 정도의 못마땅함이 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송장을 치우는 일이나 맡기 자는, 일종의 심술을 원균에게 발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연락을 맡은 장교들은 중간에서 쉬쉬하여 원 균에게는 좋은 소리로 전달하였다.
결국 한산도 해전에서 대형선 오구로마루 36척을 포함한, 72척에 이르는 와키사카의 대함대는 와키 사카가 타고 도망친 대선 1척, 중선 7척, 소선 6척 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격파당하여 불에 타 버렸다. 죽은 자의 수효는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대부분의 왜병들은 물에 빠져 고기밥이 되었다. 따 라서 이 한산대첩은 그 규모나 중요성에 있어 왜국 과의 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승리였으며, 후에까지 임진왜란의 삼대 대첩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전투 후에도 조선군들은 바빴다. 그 아수라장 속에 서도 그나마 살아남은, 인질로 잡혀 있던 조선인들을 구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이 배에서 한 명, 저 배에서 두 명 하는 식으로 구해낸 인질들을 만날 때마다 이순신은 내내 가슴이 아팠다.
‘내가 한 행동은 옳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 다 해도………… 내 나라 백성들을 향해 포를 쏜 나자 신을 용서할 수 없구나…….’
이순신은 극심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일일이 만나 왜군의 규모나 상황을 물었으며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특히 이순신은 장계에서까지 이들 하나하나 의 이름을 적으며 물어본 내용들을 모두 기록하였 다. 이는 당시 이순신이 은연중에 이들에 대한 생각 이 얼마나 각별하였는지를 간접적으로 입증하여 준 다.
결국 이순신은 그들 모두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주 고 살길을 열어주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작은 선행 이 바로 이후 이순신에게 힘이 될 줄은 이순신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그때에는 말이다.
종일 접전을 치른 이순신 함대는 피곤에 지쳐 그날 은 견내량 앞바다에서 진을 치고 밤을 새웠다. 왜국 의 포로가 되었던 난민들의 정보로, 후속부대가 있 음을 알아낸 이순신은 아예 결판을 내기로 작정하였 다. 그에 앞서 부상자들과 난민들을 그날 밤으로 좌 수영으로 후송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중에는 이미 완전히 무력한 상태가 되어 버린 은동도 포함되어 있었다.
흑호는 은동이 이순신의 옆을 떠나는 것이 불안하였 지만 마수를 일단 한 번 쫓아낸 적도 있었고, 지금 의 은동이의 상태로는 마수가 나타나도 꼼짝도 하지 못할 것 같아서 은동이를 선선히 가도록 내버려두었 다. 그리고 흑호는 은연중에 도깨비들과 금수들을 불러 이순신 함대 주변을 더욱 철통같이 경계하게 하였다.
한산대첩이 있은 다음날인 7월 9일, 이순신 함대는 다시 안골포에 왜선 사십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그리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때 원균 은 이순신과 동행하였으며, 이억기는 잠시 다른 갈 래로 진출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 다음날인 10일 새벽, 안골포에 정박하고 있는 구키와 가토의 연합함대를 발견한 이순신은 곧장 공 격명령을 내렸다. 구키와 가토의 함대는 앞서 전멸 하다시피한 와키사카의 후속부대로 대선 스물한 척, 중선 열다섯 척, 소선 여섯 척으로 구성된 도합 마 흔두 척의 함대였다.
그들은 이미 와키사카의 함대가 완전 궤멸되었다는 소식에 사기가 땅바닥을 뚫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으 므로 정박하고 있는 상태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골포만은 조수가 빠져나가면 바닥이 보일 정도로 수심이 얕은 곳이라 판옥선으로 무리하게 돌격을 감 행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몇 번이나 유인계책을 써 보았지만 왜선들 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순신의 계책을 알아차렸 다기보다는 바다로 나아가 싸울 마음이 없었다고 하 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안골포의 만은 뒷부분이 바로 산으로 이어져 있고, 육지와 이어져 있는 곳이어서 여차하면 부산포까지도 도망갈 수도 있었다.
적이 따라나오지 않자 즉시 이순신은 앞서 당포해전 에서 사용하였던 차륜전술을 사용하기로 하였다. 즉, 조선총통의 긴 사거리를 이용하여 비교적 원거 리에서 돌아가며 지속적으로 포격을 하기 시작한 것 이다. 왜장들 중 구키와 가토는 비교적 지략이 출중 한 장수들로 알려져 있었으나 대응할 방법이 없었 다. 어찌되었건 그들은 수군이었다.
그러나 안골포만 앞은 어느새 나타난 조선수군으로 꽉 차 있었고, 뒤쪽은 산이었다. 철수를 하고 싶어 도 배를 떠메고 산을 넘어갈 수도 없는 일 아닌가?
왜군은 나름대로 충각전술로 응사를 했지만 조금 공격하다가 장전시간 동안 뒤로 빠지는 조선배에는 거 의 영향을 줄 수가 없었다.
싸움이 시작되고, 잠시 뒤에 연락을 받은 이억기의 선단이 밀어닥쳐 조선수군의 공격은 더더욱 맹렬해 졌다. 특히 왜군의 저항이 별로 대단하지 않자 이순 신은 휘하에 있는 2척의 거북배를 전격적으로 투입 했고 이억기도 곧바로 자신이 지난번 보았다가 만든 거북배 1척을 투입했다. 안골포해전에서 이 거북배 의 활약은 대단했다.
결국 구키와 가토는 원형진을 이룬 채 움직이지 않 도록 하여 피해를 극소화하려고 했으나 결국에는 화 력에 밀려 당해낼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움직 이는 적과 싸우겠다는 병법이 애초부터 틀렸다는 소 리를 남기고 가토가 먼저 철수했으며, 구키도 그 뒤 를 따랐다. 구키와 가토는 이순신에게 치를 떨었으 며, 그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을 썼다.
“모든 전사자의 시체를 수거한 다음 철수하라! 이순신이란 놈에게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라!”
대장의 명령이 내려지자 모든 왜병들은 비로소 살길 을 얻어 전사자들과 부상자들의 시체를 모조리 끌고 배를 버린 다음 산으로 철수했다. 일단 산으로 피신 한 적을 이순신의 수군이 잡으러 가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단병접전을 해본 경험조차 없는 이순신의 수군이 육전을 벌이다가는 미처 싸워보지 도 못하고 전멸되리라는 점은 불을 보듯 뻔했다.
원균이 그래도 뒤를 쫓아야 한다고 난리를 피우자 이순신은 원균에게 한산도에 고립된 왜군을 모두 넘 겨줄 터이니 섬멸하여 공을 세우라고 겨우 달랬다. 또한 이억기는 이 기회에 왜선들을 모조리 쳐부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이순신은 그것도 만류하였다.
“우수사,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이제 왜선은 쳐부술만큼 쳐부수지 않았소? 사십여 척에서 삼십여 척을 격침시켰으니,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소이까?”
“좌수사께서는 당장 빈 왜선들이 있는데, 그것을 그 냥 내버려두자는게요?”
“그런 것은 아니외다. 그러나 지금 산으로 도망친 왜적떼는 그 수가 몹시도 많고 몸에 아무 것도 지닌 것이 없는 도적떼 같은 무리들이오. 그들이 도망칠 길은 남겨두어야 그나마 민폐가 적지 않겠소?”
“민폐라니요?”
“저 많은 무리들이 아무 것도 없이 부산포까지 가려 면 도중에 수많은 우리 백성들이 피해를 당할 것이 외다. 그렇지 않소?”
“그렇지만…….”
이억기는 이순신의 말을 듣고 조금 주저하는 듯한 눈치를 보이면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어차피 지금은 전쟁 중이오. 민초들이 고통을 당하 는 것은 나도 아오만, 저들을 그냥 두면 또 내습해 오지 않겠소?”
“적을 잡자고 우리 백성들을 고통받게 할 수는 없소 이다. 물론 왜병들을 베고 물리쳐야지요! 그러나 왜 그러는 것이오? 누구를 위하여 왜병들을 물리치려 는 것이오? 우리 백성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오? 전 쟁이라고는 하나 전쟁 또한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 람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오이까?”
“하지만 왜선을 코앞에 두고도 그냥 남겨둔다는 것 …….”
이억기는 이순신의 의견에 동감은 하였지만 뭔가 불안한 듯했다.
“후일 조정으로부터 문책을 받을 우려도 있소이다.”
“그것은 염려 마시오. 내 장계에 전말을 적어 올릴 예정이오. 사단이 생기면 내가 감당하리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조선백성들을 위해 자신의 공을 포기하고,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길을 택 한 이순신의 이 결단은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서 이 순신의 인망을 높이는 데에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된 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런 생각까지는 물론 하지도 못했다. 다만 인질로 잡혀 있던 조선백성들에게 포 를 쏘도록 했다는 자책감이 이순신을 그렇게 행동하 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배제할 수는 없 다.
이 한산대첩을 계기로 이순신은 점차 조정보다는 백 성을 위하여 전쟁을 치른다는 의식을 강하게 가지게 되었다. 그 일례로, 이순신은 해전이 끝난 후 노획한 막대한 물품(주로 탈취한 왜선에서 얻은 것들이 다) 중 군용물건을 제외한 모든 것들을 군졸들과 백 성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그러나 원균에 대 한 이순신의 감정은 거의 한계에 다다랐으니, 이순 신은 이때부터 장계에 원균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비 판하기 시작한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다.
이순신의 뜻에 따라 안골포에 남은 십여 척의 부서 진 왜선들을 파괴하지 않고 이순신의 연합함대는 조 금 물러나와 밤을 지새게 되었다. 그리고 밤새 남아 있던 왜병들은 이순신의 짐작대로 남은 배에 올라타 싹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후 놀라운 것 을 보게 되었다.
그 놀라움이란 바로 왜병들의 잔혹한 만행이었다. 그것도 같은 편들에게. 구키와 가토는 이순신에게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려고 죽거나 다친 자기편의 병사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그 머리를 모아 태워 버린 만행을 저지르고 도망친 것이다. 그 왜병의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잘라진 손발이며 몸뚱이는 그대로 포구에 참혹하게 버려진 채 머리만을 태웠는데도 그 무더기가 열두 곳이나 되었다.
조선조정은 목을 벤 수급으로 공을 산정하였기에 왜 군은 이순신에게 공을 주지 않으려고 발악적으로 목 을 모두 베어 태워 버린 것이다. 조선수군 모두는 그 광경에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이순신은 명 을 내려 왜군의 시체를 모두 바다에 수장하고 그 끔 찍한 화장터를 깨끗이 치운 다음 철수하도록 하였 다.
그러나 만약 이때 흑호나 태을사자가 이 자리에 있 었다면, 이 믿어지기 힘든 만행이 마수들에게 영향 을 받았다는 것을 눈치챘을 터였다.
좌우간 이 한산대첩과 안골포 해전에서 이순신 함대 는 도합 왜선 아흔두 척을 격침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더구나 그 아흔두 척에는 대형 오구로마루가 오십오 척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이순신에게 전멸당한 가메이 고레노리의 배가 오구로마루 다섯 척만으로 독립부대 행세를 한 것으 로 볼 때, 한 해전에서 그런 대형선 오십오 척을 격 멸한 것은 유래가 없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이순신 등의 조선함대는 단 한 척의 작은 배도 잃지 않았으며, 왜군이 아무리 적게 잡아도 3만 이상의 목숨을 바친 데 비해 이순신의 좌수영 함대의 전사 자수는 단 열아홉 명이었다. 세계의 전쟁 역사상 이러한 싸움은 없었다.
이로써 왜의 해군은 거의 재기불능의 타격을 입었으 며 도저히 서해와 남해를 엿볼 생각을 감히 하지 못 하게 되었다. 왜군의 많은 장수 중 이제는 아무도 남해안으로는 가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의 이 승전은 수많은 의병들과 분산되어 독립적으로 활동 을 펴던 조선관군에게도 큰 용기를 주게 되었으며, 왜군에게는 그야말로 싸울 의사를 송두리째 꺾어놓은 쾌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