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5권 – 9화 : 비장한 최후
비장한 최후
한편 이상한 글씨를 보고 밖에서 기다리던 무애는 갑자기 동굴 밖으로 웬 사람 하나가 툭 굴러나오자 깜짝 놀랐다.
“저것이 웬 사람인가? 어찌하여 저기에서 나오는 거지?”
아직 그 이상한 존재와 약속한 일다경의 시간은 다 차지 않은 것 같았지만 무애는 동굴 앞으로 성큼성 큼 다가갔다. 그런데 그 안에서 굴러나온 것은 난데 없는 은동이가 아닌가?
“어렵쇼? 나무아미타불………. 이런 희한한 일이 다있는가?”
무애는 은동의 몸을 안고 동굴 안을 들여다보려 했 으나 동굴 안은 지금 무시무시한 싸움 때문에 휙휙 미친 듯한 바람이 뿜어져 나와 눈조차 뜰 수가 없었 다. 그때 은동이 번쩍 눈을 떴다. 은동은 혼이 들어 갔다 나왔다 하는 바람에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정신 을 차리려 애썼다. 은동은 무애가 자신을 안고 있는 것을 보고 소리쳤다.
“무애스님! 저를 놔주세요!”
무애는 은동이 소리치자 깜짝 놀라며 은동을 놓아주 었다. 그러자 은동은 부산하게 움직이며 주변에서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무애는 은동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 물었다.
“은동아? 너는 왜 여기 있느냐? 동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지? 그리고 지금 무엇 하는 거냐?”
은동은 그 말에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은동은 굵다 란 나뭇가지를 몇 개 주워 모은 다음에 소리쳤다.
“스님! 화섭자나 부싯돌이 있으세요?”
무애는 얼결에 품에서 불씨를 담은 통을 내주었다. 은동은 그것을 받아 정신없이 훅훅 불면서 나무에 불을 붙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은동아, 대답해 줄 수 없느냐?”
무애가 다시 묻자 은동은 빠르게 말했다.
“저 안에 요물이 있어요! 그리고 태..”
태을사자와 흑호가 싸우고 있다고 말하려다가 은동 은 말을 멈추었다. 무애가 그것을 알면 안 되지 않는가?
“저………… 산신령이 그 요물을 상대하고 있는데 불이 필요하대요!”
“요물이라면…… 려기를 뿜어내는 요물 말이냐?”
“네, 불로 없애야 한대요.”
무애는 은동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몰랐지만 아까 이상한 글씨가 저절로 씌어진 것과 합쳐 볼 때 좌우 간 동굴 안에 뭔가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어서 싸움 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런데 은동이가 나 와서 어느 한 쪽(산신령이건 아니건)을 도우려고 하고 있으니 자신도 그냥 두고볼 수는 없다고 생각 했다.
“그러면 나도 가자꾸나! 나도 그 요기를 느끼고 오 는 길이다. 그냥 두고볼 수는 없지.”
“네? 아이구, 안 돼요. 스님은……”
“어린 네가 위험을 무릅쓰고 애를 쓰는데 어른이고 하물며 불제자인 내가 그냥 볼 수 있겠느냐? 어서 가자!”
은동은 당황하여 무애를 말리려 하였지만 무애는 스 스로 불붙은 굵은 나뭇가지 하나를 집더니 뒤편에 있던 승려들까지 손짓을 해서 오게 했다. 은동은 큰 일났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한시가 급한 판국에 무애 를 말릴 틈도 없어 하는 수 없이 무애와 함께 동굴 입구로 달려갔다.
“어이쿠! 저 화상들은 뭐유? 동굴 안에 들어왔 수!”
흑호는 난데없는 승려들이 동굴 안으로 들어오자 깜 짝 놀랐다. 그것을 보자 태을사자도 당황하여 말했다.
“흑호, 어서 둔갑법으로 몸을 숨기게!”
“제기럴! 지금 버티기도 어려운데 언제 둔갑을 한 단 말유!”
하지만 태을사자가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법력 을 쏟아내는 틈을 타서 흑호는 간신히 둔갑술을 써 서 풍둔법(화수목금토의 오행중에 바람에 해당하는 둔갑법. 목둔법의 일종임.)으로 모습을 감출 수 있 었다.
동굴로 들어선 은동은 이제는 인간의 몸에 있는지라 둘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휙휙거리며 일어나는 바람소리 등으로 둘이 아직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무애는 동굴로 들어서면서 무척 놀랐다. 수없이 많은 벌레들이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며 형상을 갖추어 뭉치고 흩어지는 모습은 그야말로 끔찍해 보
였다.
려충은 생계에 병을 옮기는 존재이니만큼 몸이 어느 정도는 물질화 되어 있어서 무애의 눈에도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려충은 입구가 막히자 동굴을 빠져 나가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저….. 저놈이 요물이냐?”
“네…….”
그때 태을사자가 은동에게 전심법으로 외쳤다.
‘불붙은 나무를 던져라!’
은동이 불붙은 나뭇가지 하나를 던지자 흑호가 그것 을 받아 힘을 불어넣었다. 흑호의 법력은 자연계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므로 흑호는 비록 바싹 말라붙은 나뭇가지라도 순간적으로는 그 안에 내재한 기운을 극도로 끌어낼 수 있었다. 흑호가 힘을 쏟자 나뭇가 지는 순식간에 타 버리면서 불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커졌다.
“좋다!”
태을사자가 순간적으로 치솟은 커다란 불을 법력으 로 밀어내자 화아악 하며 불기둥이 려충들 쪽으로 밀려갔다. 려충들은 불기운을 피하고 어쩌고 할 사 이도 없이 불길에 휩싸여 삽시간에 새까맣게 죽어서 떨어졌다.
그것을 보고 무애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몰랐 지만 좌우간 자신도 나뭇가지를 던졌다. 그러자 다 시 커다란 불기둥이 려충들을 한바탕 휩쓸어 갔다.
“비록 벌레들이긴 해도 불제자의 몸으로 살생을 하게 되다니, 허허…”
“저건 벌레가 아니에요. 요물들이에요. 보세요, 아 무리 불에 탔어도 죽은 시체조차 안 생기잖아요.”
말을 건네면서도 은동과 무애는 정신없이 불붙은 나 뭇가지를 집어 던졌다. 몇 번을 더 하자 려충들은 상당한 수가 죽어 없어진 듯, 려의 모습은 전보다 절반 정도의 크기로 줄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은동 은 나무가 더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무를 더 가지고 올게요!”
은동은 외치면서 뛰쳐나가려 했다. 그때, 려의 몸이 갑자기 화악 하면서 녹색의 안개 같은 것을 내뿜었 다. 은동과 무애는 놀라서 뒤로 주춤 물러섰는데, 다음 순간 려의 몸 가운데에서 려충들이 와르르 몰 려나와 려는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은동이 소리치자 무애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가운데에 벌레들의 어미가 있나 보다!”
무애가 말하는 순간, 려는 이번에는 무애와 은동 쪽 으로 갑자기 려충들을 우르르 쏘아냈다. 흑호와 태 을사자도 미처 손을 쓸 틈이 없었다. 은동은 무의식 중에 비추무나리의 주문을 외우려 했으나 주문은 이 미세번을 다 써 버렸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이구!’
그런데 은동의 앞을 무애가 막아섰다. 동굴 안을 한 바탕 려충들이 휩쓸고 지나가자 뒤쪽에 있던 승려들 도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제야 태을사자와 흑 호가 있는 힘을 다해 려충들을 밀어내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두 명의 무애의 사제들은 이미 온몸이 려충에 뚫려 서 벌집같이 되어 쓰러져 버렸고 무애도 온몸에 참 혹하게 구멍이 나 버렸다. 그러나 은동은 무애가 몸 으로 감싸주었기 때문에 몇 군데를 다친 것말고는 크게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스…… 스님!”
은동이 소리치자 무애는 은동에게 힘없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허허……………..저놈이………… 대… 대단하구나, 허허…….정말 그냥 두면 안 될 요물이구나…………, 허허…….”
그리고 무애는 쿨럭 피를 토하더니 은동에게 속삭이 듯 부드럽게 말했다.
“은동아……. 꼭…… 꼭 큰 일을 해야 한다. 너는………… 너는 꼭 출가하기 전의 내 아들녀석을 닮아서 말이야……. 허허………… 알았지?”
그러다가 무애는 갑자기 은동을 놓고 껄껄껄 웃었 다. 의외의 행동이라 은동과 태을사자, 흑호뿐만이 아니라 려마저도 놀라서 주춤하는 것 같았다.
“내 이 한몸 바쳐서 요물을 없앤다면 무슨 후회가 있으리? 허허허.”
무애는 온몸에서 분수같이 피를 흘리면서도 껄껄 웃 으며 예의 항상 입에 달고 다니던 노래를 부르기 시 작했다.
가자가자 같이 가자. 염왕님전 지옥으로,
네가 온 곳 거기이니 가는 곳도 그곳일 터
번뇌 많고 죄도 많은 이 화상이 같이 가니
이런저런 원망말고 벗삼아서 같이 가자………….
그러면서 무애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불붙은 가지 를 들고 몸에 대었다. 그러자 무애의 승복에 불이 붙어서 무애의 몸은 불덩어리가 되었다. 그래도 무 애는 노래하는 것과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은동은 그 모습을 보고 질려서 몸조차 움직일 수 없 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둔갑을 풀고 다시 모습 을 드러낸 흑호도 마찬가지였다.
온몸에 불이 붙은 무애가 덩실덩실 춤을 추듯이 려 에게 다가가자 려는 놀란 듯 려충들을 우르르 내쏘 았다. 그러나 태을사자가 저만치서 다시 검은 안개 를 내뿜자 려충들은 태반이 도로 밀려나 버리고 말 았다.
또다시 수많은 려충들이 무애의 몸을 뚫었다. 하지 만 무애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려에게 다가가 려충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려충들은 불덩어리가 다 가오자 혹은 도망치고, 혹은 무애를 저지하려는 듯 달려들다가 불이 붙어 사라져 갔다.
“안 돼요!”
은동이 그제야 소리를 지르자 태을사자가 외쳤다.
“저 승려가 대왕 려충을 잡았다!”
무애는 려의 안쪽으로 파고들어가 안쪽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려의 대왕 려충을 잡은 것이다. 이제 무 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커다란 물체가 닿자 그것을 꽉 끌어 잡았다.
그러자 려는 마지막 발악을 하는 듯 녹색의 안개를 분수처럼 내뿜었다. 무애의 몸이 밀려나려고 하자 태을사자는 이를 악물고 법력을 발해서 그것을 막았 다. 그때 흑호가 동굴 안이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 로 외쳤다.
“뭐 하는 거유! 그 사람을 죽일 셈이유!”
“이제 저 화상은 살아나지 못해! 자기 목숨을 바쳐 려를 없애려 했으니 그리해야 할 것 아닌가!”
태을사자가 말을 하자, 다시 려가 기를 써서 무애의 불붙은 몸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그러자 흑호도 크게 서러운 듯 포효하고는 법력을 보태어 무애의 몸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둘은 이미 끝도 없이 려충들과 싸우느라 법력이 거의 고갈된 상태였기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했다.
“은동아! 활을! 놈에게 활을 쏘아라!”
태을사자가 크게 외쳤다. 은동이 부여받은 술법은 거의 다 써 버렸지만 아직 활 한 번은 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동은 그 비참한 광경을 보고 멍하니 온몸을 떨고 있었다. 한산해전 때 수많은 군사들이 싸우고 죽는 것을 보 고 주눅이 들었던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두렵고, 무섭고. 좌우간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못 해…… 못 해요…….”
“어서! 더 버티기가 힘들다!”
그러자 은동은 와락 울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어떻게…………! 어떻게 무애스님한테 활을 쏴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은동을 보며 태을사자가 다시 노여운 듯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너는 저 화상의 죽음을 헛되게 할 셈이냐!”
태을사자의 호통에 은동은 부들부들 손을 떨면서 유 화궁을 꺼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증성악신인의 술수를 써서 화살 한 대를 손에 쥐었다. 그러나 도 저히 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신의 은인인 무애의 몸을 뚫는 화살을 날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불 에 타서 참혹하게 재가 되어가는 무애의 등에 ………….
은동은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었다. 왜란종결자도, 난리도 모두 다 싫었다. 지긋지긋하고 모든 것이 역 겹고 피로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서!”
태을사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지자 은동은 으아 악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유화궁에 화살을 먹여서 있는 힘을 다해 쏘았다. 은동의 신력에 유화궁에 깃 든 법력, 그리고 증성악신인의 술수를 통해 강력한 기운을 품고 있는 화살이 똑바로 날아가 무애와 대 왕 려충을 한꺼번에 꿰뚫었다. 그리고 둘의 몸을 끌 고 바위벽까지 날아가서 덜컥 박혔다.
활활 타오르는 무애의 몸은 그때까지도 징그럽게 생 긴 대왕 려충을 놓지 않았고, 드디어 대왕 려충은 기이한 울림을 내고는 서서히 소멸되어 사라져 갔 다.
대왕 려충은 사라지는 순간 다시 한 번 녹색의 안개 같은 것을 뿜어냈다. 무시무시한 냄새가 나는 안개 였는데 그 안개는 어쩌고 말고 할 사이도 없이 은동 에게 날아가 은동의 몸을 감쌌다. 태을사자와 흑호는 깜짝 놀랐지만 은동은 여전히 몸을 떨며 유화궁을 든 채 서 있었다.
“스…… 스님·····.”
려충이 사라지자 일단 태을사자와 흑호는 안도의 한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흑호는 갑자기 은동이 울 음을 터뜨리며 주저앉는 것을 보고 놀랐다. 갑자기 은동의 얼굴이 푸르죽죽하게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 닌가.
“어어어………! 은동이가! 저거 보슈!”
“으음?”
태을사자와 흑호가 재빨리 달려가 보니 은동은 이미 몸이 불덩이같이 열이 나고 있었다.
“이게 뭐유?”
태을사자는 은동의 몸에서 이상한 기운이 나오는 것 을 알고는 놀랐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태을사자가 보는 그는 은동을 돕기 위해 저승에 서 불러왔던 그 의원의 혼이었다.
의원의 혼은 은동의 혼이 몸에서 빠져나오자 은동의 혼에 붙어 있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큰일이로군. 이건 저주일세.”
“저주?”
“저주도 보통 저주가 아니라 려가 마지막 발악으로 뿜어낸 것일세. 지독하군. 일종의 병에 걸린 것 같 이 보이는군, 그래.”
“음냐, 그러면 어떡허지?”
태을사자와 흑호는 몹시 놀라 은동의 상태를 다시 한번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얼마 가지 못할 듯싶었던 것이다. 의원은 다시 은동의 몸 을 살펴보고 말했다.
“야단이군. 일단 방법은 한 가지밖에는 없겠네.”
“어떤 방법이유?”
“우선 이 아이의 혼을 다시 빼내세. 그래서 몸과 혼을 분리시키면 이 병은 도지지 않을 걸세.”
“그러다가 몸이 망가져 버리문 어쩌라구?”
“그러지는 않을 걸세. 이건 일종의 주술에 의한 저 주와 같은 병이라네. 몸과 혼의 부조화를 오게 하는 것이니 일단 혼과 몸이 분리되면 악화되지는 않을 걸세.”
그 말에 태을사자는 다시 은동의 혼을 몸에서 빼냈다. 그러고 나서 태을사자는 흑호에게 말했다.
“자네 은동이의 몸은 어디서 가지고 왔나? 전라좌수영에서 가지고 온 것인가?”
“그렇수.”
“흠…… 그러면 도로 가져다 두게. 이대로면 더 심 해지지는 않을 것이니.”
그러자 흑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었는지를 기억해 냈다.
“아차! 이거 잊고 있었네. 정신이 없어서… 큰일 이 또 있수.”
“무슨 일인가?”
“은동이의 아버지가 지금 왜장 고니시에게 잡혔수. 잘못하면 죽을 지두 모른단 말유.”
“음?”
그 말을 듣고 태을사자도 놀랐다. 그런데 막 혼이 분리된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다시 차린 은동이 그 말을 들었다. 은동은 뛰어오르듯 흑호에게 매달 리며 외쳤다.
“네? 아버지가요?”
“그려.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정탐을 하러 평 양성에 들어왔다가 잡힌 거 같어. 내가 구하구 싶었 지만 그건 인간들 일이니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지 않니… 그래서 너라면 될 것 같아서………….”
그러자 은동이 소리쳤다.
“그러면 어서 가요! 다른 술수는 다 써먹었지만 염라대왕님이 주신 술수는 아직 있어요! 그걸로 고니 시를 죽여 버리면 되잖아요!”
그러자 태을사자가 호통을 쳤다.
“아니 된다!”
“왜요?”
“고니시는 비록 왜장이나 그 중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천기의 흐름에도 영향을 주는 인물일 터, 그 를 그러한 술법으로 해칠 수는 없다!”
“싫어요! 없애고 말 거예요!”
“그것만은 아니 된다!”
그러자 은동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도대체 뭐야? 이리저리 왔다갔다 죽을 고생을 다 했는데…………. 호유화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되 고……. 게다가 무애스님도 돌아가시고………… 아버지 마저도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무슨 따질 것이 그리 많다는 거야!’
“그러면 술법을 안 쓰면 되잖아요! 활로 쏘든지 주 먹으로 때려눕히든지 좌우간 아버지를 구하고 말거 예요!”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으며 간곡히 은동을 타일렀다.
“힘을 써도 안 되느니! 그 힘이 네가 원래 지니고 있던 힘이냐? 마수들과 싸우는데 도움이 되라고 삼 신대모께서 주신 힘이 아니더냐? 그 힘을 가지고 고니시를 해치는 것은 오히려 네가 천기를 어그러뜨 리는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몰라요! 빨리 데려다 줘요!”
흑호는 은동이 가엾어서 얼른이라도 은동을 평양으 로 데려다 주려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태을사자는 단 호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그리 간다면 허락할 수 없 다!”
“나빠요! 태을사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태을사자는 고개를 저으며 되받았다.
“은동아, 너는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구나. 물론 그럴 만도 하다만, 너도 차차 이해하게 될 것 014…….”
“몰라요! 항상 나중에! 나중에! 나는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왜 이런 일에 휘말려서 이렇게 되는 거냐구요! 그깐 일이 뭐가 중요해서!”
“은동아!”
“다 나빠! 다 나빠! 전부 나를 이용하는 거야! 호 유화도 죽을 거구! 무애스님도 돌아가시구! 내가 무애스님한테 활을 쐈어! 내가 그렇게 하게 만들었 어! 태을사자도 흑호도 삼신할머니도 모두 나빠! 마수들보다 더 나빠!”
은동은 미친 듯이 마구 소리치고 발을 구르다가 끝 내는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몸에서 혼이 빠져나간 상태라 눈물조차 흘릴 수 없어서 더욱더 서럽기만 했다.
흑호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고, 태을사자는 그런 은동을 여전히 냉정한 눈 빛으로 지켜보며 잠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태을사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직접 그 일에 개입할 수도 없고 술법이나 힘을 써서도 안 된다. 하지만 좋다.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은동은 듣지도 않고 계속 울어대기만 했다. 그러자 흑호가 오히려 쩔쩔매며 물었다.
“뭐유?”
“우리는 인간사에 개입할 수 없지만 인간은 할 수 있네. 하지만 은동이도 이제는 인간 외적인 힘과 깊 이 연관을 맺게 되었으니 개입할 수는 없을 걸세.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힘을 빌린다면…….”
“누구 말유?”
“유정스님과 김덕령, 곽재우 등이라면 도력이 빼어난 사람들이니 은동이가 귀띔만 해주고 자네가 조금 도와만 준다면 은동이의 아버지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르네.”
“시간이 될까?”
“첩자로 잠입했다가 잡혔다면 금방 처형하지는 않을 걸세. 한 이삼일 정도는 문초를 하겠지. 그러니 그 사람들에게 조력을 구하면 가능할 걸세.”
“태을사자, 댁은 어쩌시려구?”
“나는 원래 생계의 존재가 아니지 않는가? 나도 마 음은 굴뚝 같으나 내가 직접 도울 수는 없을 것 같네……”
“‘흠……..근데 ・・・……그 사람들을 끌어들이면 그것두 천기에 거스르는 일이 되지 않을까?”
태을사자는 시각을 다투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전심법을 써서 한순간에 긴 내용을 흑호에게 전달했 다.
“아닐 걸세. 과거 신계의 전언은 더 이상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했네. 하지만 유정스 님과 김덕령, 곽재우, 서산대사 등 몇몇은 이미 왜 란종결자의 일을 알지 않는가? 그리고 그들은 날 직접 보지 못했겠지만 자네와는 마주앉았던 적도 있 네. 그러니 자네가 어서 은동이와 함께 가서 은동이 가 그 일을 그들에게 부탁하도록 하게. 자네가 조금 그 근처로 옮겨주는 정도의 힘을 빌려주는 것은 별 문제 없을 성싶으니.”
“그렇구먼! 김덕령 정도라면 왜군진중이라도 사람 하나 빼내오는 정도는 문제두 아닐 거야! 내가 조 금만 둔갑법을 써서 도와준다면 그 주먹에 왜병들이 어찌 당해내려구! 좋수! 역시 태을사자는 머리가 좋수!”
흑호는 기운을 얻어 계속 울고 앙탈을 부리는 은동이를 번쩍 들었다. 그러다가 흑호는 조금 어이없는 듯 말했다.
“그런데…… 은동이가 혼만 가도 이야기가 될까?”
“그것이 문제일세…………. 은동이가 이 일에 끼어들려 면 당연히 몸을 지닌 채 가야 하는데… 저 몸으로 제대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며, 자칫하면 놈의 저주가 은동이의 몸을 망치게 될지도 모르네.”
그 말에 흑호는 으음 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의원의 영에게 물었다.
“그 저주를 풀 방법은 없수?”
“모르겠네. 내가 한 번 여기저기 알아보지. 사계에 도 가보고, 하일지달에게도 물어보고…… 설마 우주 팔계에서 그 저주를 푸는 방법이 없기야 하겠는가만…….”
대뜸 은동이 외쳤다.
“갈래요! 아버지는 죽을지도 모르는데………나는 상관없어요!”
그러자 의원의 영이 말했다.
“고통이 극심할 것인데…… 참아낼 수 있겠느냐?”
“상관없어요!”
의원의 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을사자에게 말했다.
“나는 아는 것이 적은 무지한 의원이고 옛날 사람이 라 모르네만, 저승에 가보면 뭔가 방도가 생길 것이 네. 그러니 나를 보내주게.”
의원의 제안에 태을사자는 두말 않고 의원의 영을 자신의 소맷속에 들어가게 했다.
“은동아, 정 그렇다면 가보거라. 단, 절대 고니시나 다른 자들을 해치지 않도록 주의하거라. 내 일전에 보니 고니시의 명은 아직도 매우 오래 남아 있다. 절대 너는 술법을 써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그러나 은동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흑호가 대 신 말했다.
“좋수! 그럽시다!”
“그러면 나는 이곳을 좀 수습하고 전라좌수영에 가 있겠네. 더구나 이순신을 혼자 놓아두는 것도 불안 544…….”
흑호가 막 떠나려는데 태을사자가 잠시 흑호를 부르더니 고개를 한 번 갸웃했다.
“그런데 흑호. 은동이의 화살이 원래 이렇게 강했었 나?”
“음? 글쎄. 난 모르우. 성성대룡의 술법을 같이 넣 었을 때는 강했는데……. 그냥 쏜 것도 상당하네그 려.”
“상당한 정도가 아닐세. 성성대룡의 술수를 깃들인 것만큼이나 강하더군. 좌우간 어서 가보게.”
흑호가 은동이를 데리고 떠나자 태을사자는 허공을 한 번 보고 다시 염왕령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조금 있다가 몇 명의 저승사자가 달려와서 부상을 입고 부유하고 있던 저승사자들을 거두어 가고 무애의 영 혼과 승려들의 영혼, 의원의 영혼까지도 거두어 갔 다.
잠시 숨을 고른 후 태을사자는 저승사자에게 물었다.
“이 주변에 또 다른 요기는 없었나?”
“없었소이다.”
그러자 태을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아까는 분명 려 혼자가 아니었는…….”
“예?”
“아니, 되었네.”
대강 수습을 하고 태을사자는 다시 좌수영으로 날아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태을사자의 뇌리에는 뭔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앙금처럼 남아 있었다.
‘아까는 그리 강한 놈들은 아니었지만 두 마리의 마 수가 더 있었다. 인면지주(人面蛛: 사람의 얼굴을 한 거미 모양의 마수를 일컬음) 같았는데… 그놈 들은 분명 려를 도와 통로를 열려고 밖으로 나간 것 같았는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그리 고 은동의 마지막 화살은 어떻게 그리도 강할 수 있 었을까? 애당초 나는 은동이 화살을 쏘면 법력을 넣으려 했었는데 너무나 기세가 강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긴 것일까
뭔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무엇인가가……………… 태을사자는 날아가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뭔가가 있다……. 분명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뭔 가가 있어. 우리 주변 가까운 곳에………. 도대체 누
굴까? 아니, 무엇일까?’
그러다가 태사자는 다시 은동의 생각을 하고 한숨 을 쉬었다. 사실 그렇게 복잡을 떨 일도 아니었다. 태을사자가 저승사자 한 명만 보내어 은동의 아버지 강효식의 명을 알아보면 그만이었다. 강효식의 명이 금방 끝날 것으로 되어 있다면 강효식은 어떻게 되 어서도 죽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애를 쓰지 않아도 살아날 것이었다.
하지만 태을사자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만약 강 효식의 명이 끝나게 되어 있다면 은동을 설득할 자 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태을사자는 비록 냉정 한 저승사자였지만 이승 사람들의 삶의 애착을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영혼이 불멸이고 계속 윤회한다고 죽음을 슬퍼하지 말라는 식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인간이 죽음을 싫 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삶에 애착을 가지기 때문이 며, 삶에 애착을 가지기 때문에 세상이 유지되는 것 이 아닌가?
더구나 태을사자는 은동이 천기의 돌파구가 될 것이 라는 삼신대모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은 동의 상태는 지금 몹시 불안해 보였다. 그렇다고 아 직 어리기는 하나 엄연한 인격체인 은동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거나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강요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안 그래도 은동이는 요 근래 충격을 많이 받은 모 양이던데……………. 강효식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은동 이는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안 되는데…….’
태을사자는 은동과 이순신, 그리고 난리를 겪고 있 는 수많은 조선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한 숨을 쉬었다.
‘은동아…, 강해지거라… 강해져야 한다. 너에 게 수백만 조선 사람들, 아니 생계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 제발…. 제발 아무 일 없기…….
태을사자는 쏜살같이 남서쪽으로 날아가면서 은동의 일이 잘 풀리기를 마음속 깊이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