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6권 – 1화 : 천기를 위하여
천기를 위하여
사흘이 지났다. 비록 아슬아슬하게 려를 없애기는 했지만 려가 뿌린 려역의 파장은 컸다. 려역은 조선 땅 전체에 퍼져나갔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 었다. 려역은 조선인과 왜군을가리지 않고 퍼져나 갔으며, 늦더위에 어울려 그 기세가 한참이었다.
더구나 전란 때문에 환경은 황폐해지고 식량이 부 족하여 돌림병의 기세는 더더욱 꺾일 줄몰랐다. 그 러나 그나마 려가 죽었기 때문에 다행이지, 려를 무 찌르지 못했으면 더더욱 큰 돌림병이 계속적으로 돌 았을 터였다.
평양성 부근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때 번화했던 평양 성은 거의 죽음의 성같이 변해 버렸다.대부분의 주 민들은 도망쳐 버리고 이제 평양성은 극소수의 주민 과 왜군들만이 사는 황량한성이 되어 버렸다. 게다 가 보급이 끊긴 평양성에는 식량부족으로 갖가지 참상이 벌어지고있었다.
그런데 그 평양성의 한 어두운 그늘 아래에서 눈을 빛내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는 몸이 몹시 아파 보이는 아이 하나가 끼어 있었 다.
“은동아, 괜찮겠느냐? 몸이 불편해 보이는구나.”
말을 건넨 것은 사명대사, 바로 유정이었다. 당시 유정은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의병을 일으켜 주로 정탐과 첩보활동을 펴고 있었다. 강효식도 그 중의 하나로 평양성에 잠입했다가 그만 잡혀 버리고 만 것이다.
그 옆에는 김덕령도 있었다. 석저장군으로 알려진 김덕령은 노모 때문에 아직 의병을 일으키지는 못 했지만, 오히려 덕분에 짬을 낼 수 있었다. 곽재우 도 오고 싶어했지만 곽재우는 이미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올 시간이 없었 다.
그들 앞에는 왜군이 성안에 설치한 막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고니시는 명목상으로는 민폐를줄이기 위함 이었으나 실제로는 병력을 엄하게 관리하기 위해 성 안에 막사를 벌여 놓고 있었다.
“포로들이 잡혀 있는 막사가 저쪽이라 하였느냐?”
김덕령이 묻자 은동의 귓가에 흑호가 속삭이는 소리 가 들려왔다.
– 맞는 것 같어. 그렇다구 혀.
흑호는 범쇠로 둔갑을 하여 은동을 유정에게 데려다 주고, 유정의 의견에 따라 김덕령에게 연락을 하여 평양으로 오게 한 것이다. 유정이나 김덕령 둘 다 은동을 데리고 온 범쇠가 사람이 아니라, 지난번 만 났던 호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았으며 굳이 흑 호가 누구인지 캐물으려 하지도 않았다. 흑호는 은 동의 아버지 강효식을 구하려는 생각에 강효식이 왜 란종결자의 일과 깊은 연관이 있으니 반드시 구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오. 왜란종결자가 대체 뉘요?”
김덕령이 흑호에게 물었다. 그러나 흑호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허우. 그건 알려줄 수 없수.”
“흠…… 좌우간 지금 잡혀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게 정말 왜란종결자를 돕는 일이 된단 거유?”
“그렇수. 뭐 언뜻 보기에는 연관이 없다고 보이겠지 만, 천기는 그런 게 아니라우. 그들을 구하는 게 나 중에 왜란종결자에게 큰 도움이 될 거유.”
사실 흑호는 스스로 거짓말을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 았다. 은동의 아버지를 구하여 은동이가다시 기운을 내게만 된다면 어찌 왜란종결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 는단 말인가? 좌우간 흑호가 자신있게 말하자 김덕 령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들은 몸이 좋아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인 은동이가 그들의 뒤를 따라오는 것에는찬성하지 않 았다. 그에 대해 흑호는 태을사자에게서 답할 말을 배워온바 있었다. 그것은 은동이 평양 부근에 갔다 가 자신의 부친이 잡히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말하라 는 것이다.
그 덕분에 은동은 그들의 길 안내를 맡게 된 셈이었 다. 그러나 실제로 은동이 평양성 안의왜군 진지를 본 적은 없으니 흑호가 몸을 감추고 허공에서 내려 다본 다음 은동에게 전심법으로 길을 일러주고 있었 던 것이다.
흑호는 이번 일에 직접 개입할 수가 없어서 범쇠로 변한 채 따라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곧둔갑법을 사 용하여 허공으로 모습을 감추고 그들의 뒤를 따랐 다. 직접 개입은 하지 못한다하더라도 별일이 생기 지 않나 보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은 야간복 차림으로 성에 들어오는 장작과 풀 더미를 실은 우차에 숨어서 평양성에 잠입하였는데 이미 밤이 깊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흔적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해가 뜨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속히 움 직이자. 갈 수 있겠느냐?”
김덕령이 묻자 은동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동은 몹 시 몸이 좋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일을 생각하여 별 로 아픈 곳이 없다고 하며 억지로 따라나선 것이다.
은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정과 김덕 령은 그냥 은동이 조금 몸이 불편한 줄로만 알았지, 그토록 지독한 려의 저주에 걸렸다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가만.”
김덕령이 은동과 함께 그늘에서 나가려는 찰나 유정 이 김덕령을 제지했다. 조금 소리를 죽이고 기다리 자 왜군 몇몇이 긴 창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 였다. 그것을 보고 유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양성은 변변히 보급조차 받지 못할 텐데…………. 제법 군기가 엄정하구려.”
그러자 김덕령이 물었다.
“대사께서는 이미 의병을 일으켰으니 군무(軍務)가 다망(多忙하실 것인데… 괜찮으시다면제가 해결 하면 안 되겠수?”
“아니외다. 강공(강효식)은 실제 군무에 경험이 많 고 임기응변에 능하여 우리 의병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오. 내가 나서는 것이 옳지요.”
유정은 평양으로 보냈던 정탐꾼들이 모조리 잡혀 버리자 그들을 구할 겸, 직접 평양의 방어를 확인할 목적도 지니고 온 것이었다.
“그나저나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는 않겠소. 문에 서 엄하게 보초를 서고 있으니………..”
“보초가 까짓 별것이오? 주먹 한 방이면 될 것인 데!”
말하면서 김덕령은 주변에 있던 차돌멩이 하나를 주 워서 꽉 쥐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돌은 손안에서 부스러져 가루가 되어 버렸다. 은동은 그때 려에게 서 옮은 병이 위중하여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기 힘 들 지경이었고 정신이 오락가락했지만 김덕령의 신 력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유정이 조용히 웃으며 김덕령을 막아섰다.
“그 용기는 장하나 방법이 좋지 못하오. 중과부적이 란 말이 있지 않소?”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숨어서 들어갑시다.”
“좋소이다. 나는 강공을 뵌 적이 없으니 대사께서 들어가시오. 내가 보초들을 유인해 왜군들의 눈길을 끌어 보겠소이다.”
“그렇게 합시다. 강공을 구하면 내가 크게 휘파람을 불어 신호를 할 것이니, 그러면 여기를빠져나가 성 문 부근에서 만납시다.”
“좋소이다. 오랜만에 힘 한 번 써보겠군.”
“헌데 김공.”
“예? 대사.”
“조심하시오. 총알에는 눈이 없는 법이오.”
그러자 김덕령은 허허 하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
“왜놈들 총알에는 안 맞을 것이오, 허허.”
김덕령은 복면을 푹 눌러쓰고 휘적휘적 몸을 드러낸 채 걸어나갔다. 그러자 진문을 지키고있던 왜군 보 초 몇 명은 어리둥절해서 잠시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어둠속에서 한 사람이 걸어나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만 있었다.
잠시 후 저만치에서 보초가 뭐라고 소리치자 김덕령 은 허허 웃고는 돌을 하나 휙 집어 던졌다. 가볍게 던진 것 같았는데 그 돌을 머리에 맞은 왜병 놈은 머리가 깨지면서 그 자리에서즉사해 버렸다.
다른 보초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자 김덕령은 휙하 고 바람같이 저쪽으로 달려가 버렸다. 그러자 보초 들은 한 명만을 남기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다.
“기회구나! 가자. 시간이 얼마 없다. 보초를 쓰러뜨려야…….”
유정이 말하며 돌을 집어들려는데 은동은 고개를 끄 덕이더니 유화궁을 꺼냈다.
‘유정스님은 불도를 믿는 분인데 살생을 하시지 않 겠지? 하지만 난 왜병 놈들을 꼭 죽여야겠어. 나쁜 놈들!’
물론 화수대 속에 들었던 것을 꺼낸 것이지만 유정 은 난데없이 커다란 철궁이 튀어나오자조금 놀랐 다.
“어허, 그 활이 어디서 났느냐?”
“가지고 왔지요.”
“음? 아니, 어디에 넣어서 가지고 왔느냐?”
은동은 대답하지 않고 역시 화수대에 넣어 두었던 화살 하나를 꺼내어 휙 쏘았다. 피르르하고 화살이 무섭게 날아가자마자 한 놈 남았던 보초는 그 자리 에서 거꾸러지고 말았다.
은동은 그동안 참았던 화를 화살을 통해 푼 것이었 는데 화살이 턱 맞는 소리가 나자 자신도모르게 가 슴이 뜨끔했다. 하지만 유정은 은동의 활솜씨가 대 단하며 화살의 위력도 대단하다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허허, 대단하구나. 무슨 술법이냐?”
은동은 유정이 보는 앞에서 화수대를 쓴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어어…………… 이…. 이건…….”
그 모습을 보자 유정은 웃으며 말했다.
“네가 보통 아이가 아니란 것은 안다. 하루아침에 신력이 생기고, 저승사자와 도통한 호랑이를 부리 고, 물건을 늘이고 줄이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 보통 의 재주는 아니겠지.”
유정은 이미 은동이 뭔가 아주 특별한 아이라는 것 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은동은 겸연쩍 기도 하고 해서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가벼워져서 말했다.
“전 이거말고도 누구든 소리도 없이 죽일 수도 있어 요. 단 세 명밖에는 그리 못하고 천기에 영향을 줄 만한 사람은 그리 못하지만……”
“그런 술법이 다 있느냐?”
“그럼요. 염라대왕이 직접 주신・・・・・・.”
말하다가 은동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 말까지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은동은 이 말을 해서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그러나 유정도 놀 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아이가 대단한 아이이기는 하지만 설마 생사여 탈권까지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비록 세사 람이라고는 하나… 믿기 어렵구나!’
하지만 이제껏 은동을 몇 번 보아온 유정으로서는 그 말이 거짓일 것 같지도 않았다.
좌우간 유정은 은동을 옆구리에 끼고 휙 하니 날 듯이 진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은동의 몸 상태가 몹시 안 좋은 것 같아 몸놀림이 느릴까 봐 그런 것이다. 그런데 은동은순간 자기가 쏜 왜병이 쓰러져 있는 것을 언뜻 보았다. 사람을 죽였다는 생각에 은동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은 동이 본 것은 왜병의 앙상한 다리와 발뿐이었다.
“흠, 어디로 가야겠느냐?”
일단 장막들이 늘어선 속으로 들어간 유정은 다시 은동에게 물었다. 은동은 아까 죽은 왜병의 다리만 을 떠올리고 있다가 놀라서 흑호를 불렀다.
‘흑호 아저씨! 흑호 아저씨!’
그런데 흑호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은동은 이상하 여 유정에게 얼버무렸다.
“저도 더 이상은 몰라요∙∙∙∙∙∙. 장막 안에까지 와본건 아니거든요.”
“흠, 그러냐?”
유정은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막 저쪽에서는 아직도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서 김 덕령이 꽤나 크게 장난을 치고 있는 듯했다. 잠시 시간이 더 지나자 왜군의 한소대 정도가 우르르 몰 려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은동이 걱정하자 유정은 씨익 웃었다.
“저 정도로 김공을 당해내려구. 한 천명 보내서 오 백 명은 죽을 각오를 해야 김공을 잡을까 말까 할 걸?”
“석저장군님이 그리 무서운가요?”
은동이 영 믿기지 않아 물어보니 유정은 웃으며 말했다.
“김공은 하늘이 낸 역사(力士)시니라. 옛날 중국에 서 전설적으로 전해지는 영웅들도 맨손으로는 호랑 이 한 마리 정도밖에는 잡지 못했는데, 김공은 이 미 나이 열서너 살에 호랑이를맨손으로 잡았고, 지 금은 순식간에 대여섯 마리는 때려잡을 수 있단다.”
삼국지에 나오는 허저나 수호전에 나오는 무송 같은 인물들도 호랑이 한 마리 정도를 맨손으로 잡는 것 에 불과하였는데, 김덕령은 그 몇 배나 되는 힘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후에 김덕령은 의병을 일으킬 때 군사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그 날 바로 산으로 들어가맨손으로 호 랑이 두 마리를 때려잡아 힘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 러나 은동은 흑호가 퍼뜩 떠오르자 그 말이 별로 탐 탁지 않게 생각했다.
‘하필 호랑이를 때려잡는담?’
좌우간 유정은 강효식이 갇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은동을 옆에 낀 채로 장막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얼마나 다녔을까, 포로들이 갇혀 있음직한 장막은 나오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유정은 점점 초조해졌다. 제아무리 김덕령이라도 수많은 왜병들이몰려온다면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막 몇 개를 다시 지나자 이번에는커다란 장막 하나가 나타 났다.
“저 장막은 보통 것과는 다르구나. 내 한번 살펴볼 것이니 여기서 기다리거라.”
유정은 은동에게 말한 뒤 갑자기 스르르 모습이 없어져 버렸다. 그것을 보고 은동은 깜짝놀랐다.
잠시 후에 유정은 저만치 장막의 뒤편에서 다시 모 습을 드러내 보였다. 유정은 은신술을 사용한 것이 었다. 물론 흑호나 태을사자의 그것에 비할 바는 못 되었지만 유정도 몇 초 정도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 지 않게 할 만한 술법을 지니고 있었다.
유정이 단도를 꺼내 장막을 찢고 안으로 들어가자 은동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유화궁을 들고 장막 밖 에서 혼자 기다렸다. 마음이 몹시 불안해진 운동은 다시 흑호를 마음속으로 불러보았지만 흑호는 여전 히 나타나지 않았다.
‘이상하다. 흑호 아저씨는 어디로 간 걸까?’
은동이 불안을 참으며 얼마간 기다리자 다시 유정이 나왔다. 그런데 유정은 몹시 긴장한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은동은 반갑기도 하고 유정스님이 왜 얼굴이 굳어져있나 걱정도 되어 물었다. 유정이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놀라운 것을 보았느니라.”
“예?”
“흠…… 나는 여기 들어온 김에 기회가 닿으면 고니 시를 처치하려 했었는데………… 이리 되면그만두어야 겠구나.”
“무슨 말씀이세요? 고니시를 그냥 두다뇨?”
은동은 유정이 고니시를 처치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 는 것이 기뻤다. 고니시는 조선의 원수가 아닌가? 그런데 유정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궁금했 다. 궁금해하는 은동의 표정을읽은 유정이 말했다.
“고니시는 지금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는 것 같구 나. 좌우간 나중에 이야기하고 어서 강공이나 찾아 보자꾸나.”
유정은 그 정도로 얼버무리고 다시 은동을 껴안고 강효식을 찾아 나섰다. 다시 한참을 헤매자 저만치 에서 갑자기 화광이 충천해지는 것이 보였다.
“어허, 김공이 불을 지르신 게구나. 김공이 힘들어 하는 것 같구나.”
유정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시간이 너무 흘러 버린 것이다. 그때 은동이 약간 이상한 막사 하나를 발견했다.
그 막사는 다른 막사들과 상당히 멀찍이 떨어져 있 는데다가 사방에 나무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문을 제외하고는 빠져나갈 곳이 없을 듯싶었다. 게다가 지금 김덕령이 소란을 피워서대부분의 왜병들이 잠을 설치고 진안의 보초들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 다.
그런데 유독 그 장막만은 보초들이 눈을 부릅뜨고 조금도 물러서거나 우왕좌왕하지 않고 경비를 서고 있었던 것이다.
은동은 호유화의 술법으로 눈이 밝아졌기 때문에 그 것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스님……, 저기…………….”
은동이 손가락질을 하자 유정도 곧 그 막사가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 저기가 필경 포로들을 가둔 곳일 듯하구나. 내 보고 오마.”
유정은 은동을 내려놓고 막사 뒤쪽으로 접근하였다.
그리고 보초들에게 달려들어 택견의 수법으로 한 놈의 턱을 갈기고, 놀라서 창을 휘두르려는 다른 놈의 아랫배를 발로 걷어찼다.
마지막 한 놈이 다시 유정에게 조총을 들이대는 것 을 유정은 빙글 몸을 돌리면서 두 발로연달아 놈의 면상을 걷어찼다. 그러자 세 놈의 보초는 삽시간에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져버렸다.
유정은 쓰러진 보초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날렵하게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은동이 조마조마하게 그 광 경을 보고 있었는데 장막 안에서 유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동아! 여기다!”
“와!”
은동이 너무 기뻐서 막사 쪽으로 달려가려는데 갑자기 은동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은동아! 안 뒤어! 가면 안 뒤어!
‘어! 흑호 아저씨!’
은동은 흑호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랐다. 흑호의 목소리가 몹시 기운이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러세요! 무슨 일이 있나요?’
– 은동아! 어서! 어서 도망쳐! 눈을 감고 어서 도 망가!
‘뭐예요! 무슨 일이에요!’
– 은동아 어서! 아무 것도 보면 안 뒤어! 어서 도망쳐! 어서!
그러나 은동은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저기 계시대요! 가야 돼요!’
그러면서 은동이 막사 안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은 동의 앞에 무엇인가가 털썩 하고 떨어져내렸다. 그 것을 보고 은동은 기겁을 할 듯 놀랐다. 그것은 바 로 흑호였던 것이다.
“어…… 어째서………….”
그러나 은동은 더 이상 말조차 꺼낼 수가 없었다. 땅에 떨어져 내린 흑호의 위로 유유하게내려앉고 있는 존재가 있었던 것이다. 흑호는 전심법을 쓸 생 각도 하지 않고 악을 썼다.
“어여 도망가! 눈을 감구!”
그러나 이미 늦었다. 은동은 보고 말았던 것이다.
차가운 미소를 띠며 쓰러진 흑호의 뒤로유유히 내려앉는 존재…. 그것은 바로 은동이 꿈에서도 잊 지 못하고 있던 호유화였다.
그때, 자신의 거처로 정한 평양성 내의 큰 집에서 고니시는 밀사 한 명과 만나고 있었다. 그밀사는 조 금 서툰 왜국말로 말했다.
“심대장께서는 조만간 직접 찾아오시기를 바란다고 하십니다.”
“그러한가.”
“그러나 심대장의 뜻은 확실하십니다. 이 전쟁은 무의미합니다. 왜국에게도, 조선에게도, 명국에게도 아무런 득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전쟁입니다.”
“동감이다.”
고니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금 이 밀사는 바 로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수족 같은인물로서, 지난번 고니시가 격퇴한 조승훈 휘하의 명군 속에 끼어 있던 심유경이라는 자가보낸 밀사였다.
그는 보통 사람 같으면 감히 엄두도 내기 힘든 계획 을 꾸미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 전쟁을 어떻게 든 조속히 끝낸다는 것이었다.
“허나………….. 간파쿠님은 동의하지 않으실 것이고, 간 파쿠님의 동의가 없이는 전쟁이 끝날 수없다.”
“고니시님이 애써주시면 가능합니다. 고니시님, 대 체 이 전쟁을 하여서 무엇을 얻는다고 생각하십니 까? 정말 조선을 정벌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명국은 그것을 그냥 두고보지는않을 것입니다. 명군 의 정예가 지난번의 조승훈 부대와 같다고 여기시 는 것은 아니겠지요? 명군의 군대는 수백만이 넘습 니다.”
고니시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번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조승훈이 명군을 몰고 직접참전하였다 는 것은 고니시에게도 큰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이제는 정말 이길 수 없다…….며 고니시는 생각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왜군장수들도 고니시와 의견을 같이 하고 있었다. 단 한 사람, 아무런 생각이 없는 가토만은 반대할 것이었으니 그에게는 알릴 필요도 없었지만…….
“그러나 간파쿠님을 어떻게 설득한단 말인가? 왜국 의 모든 자들 중 그분의 의견을 거스를수 있는 자 는 아무도 없다.”
“심대장께서는 그에 대해서도 방법이 있다고 말씀하 십니다만….”
고니시와 심유경의 밀사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중단되었다. 장막 밖에서 누군가가 고니시를불렀기 때 문이었다.
“무슨 일인가!”
“대장님, 밖이 몹시 소란합니다. 적의 간자(間者 : 간첩)들이 침입한 모양입니다. 불이 나고보초들이 여러 명 죽었다고 합니다.”
“불을?”
고니시가 혼잣말처럼 외치자 심유경의 밀사는 꾸벅 고니시에게 절을 했다.
“다망하신 것 같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그리 말하고는 그자 또한 뒤 창문으로 스르르 빠져 나가 버렸다. 겐키와 비슷한 솜씨였다. 고니시는 밖 의 장교에게 들어오라 말하고는 자세한 것을 물었다.
“불은 어디에 났는가?”
“진지 밖의 빈 민가입니다.”
“죽음을 당한 보초들은 어디에 있었느냐?”
“진문 앞입니다.”
“무슨 꼴인가……”
고니시는 잠시 생각을 해보고 말했다.
“필경 포로들을 구하러 온 모양이다. 소란을 피우지 말고 모두가 엄숙하라 전달하라. 그리고내가 직접 그리 간다!”
“…예?”
장교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고니시는 갑옷을 입히라 명하고 장교가 갑옷을입히는 동 안 말했다.
“군량이나 마초에 불을 지르지 않고 민가에 불을 지른 것은 우리의 시선을 그리로 돌리기위함이오, 진문 앞의 보초가 죽었다는 것은 누군가 진지 안으 로 침입했다는 것이다. 진지 안에서 할 일이라고는 포로를 탈출시키는 것뿐이지 않겠는가?”
그제야 이해가 되는 듯 장교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하오나 직접 가신다는 것은…….”
“저렇듯 기를 쓰고 구하려는 포로라면 뭔가 중요한 것이 있겠지. 직속부대를 불러라.”
“하이!”
장교는 서둘러 부대를 부르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고니시는 직접 칼을 들고 활을집어들었다. 활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지는 것을 보아 평양에 온 다음 몸이 퍽 상한 듯싶었다.
요 근래 그 지긋지긋한 악마들은 조금 뜸해졌으나 지난번 겐키의 형제들을 죽인 그 백발을한 마녀의 생각은 아직도 고니시의 뇌리에 잊혀지지 않고 있었 다.
‘혹시 그 악마들의 짓은 아닐까….? 아니다…………. 놈들이 이런 식으로 일을 저지를 리 없지….’
고니시는 밖으로 나가면서도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 심유경이라는 자는 도대체 어떻게 간파쿠님의 마음을 돌리겠다는것이지? 아……, 될 수만 있다면 나도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내고 싶지만…………….’
고니시는 그 지겨운 악마들이 원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악마들은 전쟁 이 계속되는 것을 원하고 있으니, 전쟁을 끝내는 것은 병사들과 죄없는 사람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 을 뿐 아니라 악마들에게도 일격을 가하는 것이 될 수 있을 터였다.
‘혹시…… 간파쿠님을 나보고 설득하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불가하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러나 아직 고니시는 간파쿠인 히데요시가 두려웠 다. 그는 상관이었으며 절대적인 권력자였다. 더구 나 겐키의 활약으로 고니시는 이미 악마들이 자신의 주인인 히데요시에게 무언가의 손길을 뻗쳤다는 것 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니시는 충성이 최상의 덕목이라는 믿음을 뼛속까지 가진 낭만주의자였다.
‘괴롭구나……. 정말 괴롭구나…… 내가 목숨을 걸 고 받들어야 할 주인이 옳지 않다면……나는 어떻 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여야 옳은 것일까?’
고니시는 우울한 얼굴로 정렬한 백여 명 남짓의 친 위부대 앞에 나섰다. 지금은 어쨌든 침투한 적을 잡 아야 하니까 말이다.
“호…… 호유화…………….”
은동은 처음에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중상 을 입어서 중간계에서 치료를 받고 있던호유화가 어떻게 여기에 나타났단 말인가? 그리고 호유화가 어째서 흑호를 공격하여 해쳤단말인가? 그러나 은 동은 흑호가 다쳤음에도 일단은 반갑기부터 했다.
“다…………… 다 나았나요?”
그러나 호유화는 흥 하고 코웃음을 한 번 쳐 보이고 는 은동에게 입을 열었다.
“한낱 요물에 불과한 나를 네가 걱정해 주었단 말이 냐?”
그 목소리가 얼어붙을 만큼 쌀쌀해서 은동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유화…, 어째서………….”
그러자 호유화는 갑자기 큰소리로 깔깔깔 웃었다.
“분통이 터져서 참을 수가 없었어. 너 같은 꼬마 녀석 때문에 내가 죽을 고비를 넘기다니…. 그 런데도 너는 나에게 무어라 했지? 못된 여우………….. 요물이라고?”
은동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왜 호유화가 저토록 지독한 소리를 하는 것일까? 그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호유화가 저렇듯 변한 것일까? 도무 지 알 수가 없었다. 은동은 천천히 유화궁을 늘어뜨 리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렇지만・・・・・・그렇지만…… 나는……나는…….”
호유화는 은동의 유화궁을 한동안 눈여겨보더니 이 상하게도 다시 화를 벌컥 냈다.
“흥! 그따위 활에 내 이름을 새기다니! 용서 못 해!”
그러더니 호유화가 손을 한 번 뻗자 은동이 들고 있던 유화궁은 호유화의 손으로 휙 빨려들어갔다.
호유화는 단번에 유화궁을 집어 둘로 뚝 분질렀다. 무서운 힘이었다.
은동은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흘리면서 입 을 반쯤 벌린 채 말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 자 호유화가 다시 한 번 매섭게 외쳤다.
“더러운 인간 꼬마녀석! 죽어랏!”
외침과 동시에 호유화는 무서운 불길 한 줄기를 내 쏘았다. 은동은 그것을 채 피할 사이도없었다. 그 런데 무엇인가 검은 물체가 은동의 앞을 갑자기 막 더니 불길을 한꺼번에 쳐냈다.
호유화가 내쏜 불길이 비켜져나가 저만치 멀리에 있는 막사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
호유화는 여전히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 다. 은동의 앞을 막아선 것은 흑호였다.흑호는 비 록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지금 눈은 무섭게 핏발이 서 있었고 갈기가 잔뜩 곤두서있었다.
“너……… 너. 은동이를 죽일 셈이여? 네가 어떻 게……! 어떻게!”
흑호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흑호는 은 동을 위해 평양 성을 정탐하고 다니다가우연히 호유 화를 만났다. 그러나 반가워하는 흑호를 호유화는 다짜고짜로 기습하였다. 흑호는 놀랐지만 맞붙어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고 덕분에 형편없이 당한 것 이었다.
하지만 마음 착한 흑호는 그 와중에도 은동이 호유 화를 만나지 않고 무사히 강효식을 구하여 도망치기 만을 바라고 가급적 시간을 끌려고 했다.
흑호의 생각과는 달리, 유정과 은동은 강효식의 장막을 찾느라 많은 시간을 소비한 탓에 호유화는 은 동의 존재를 감지해 버린 것이다.
“흥! 어서 비켜라, 죽고 싶지 않으면. 그 꼬맹이를 없애야 분이 풀리겠다.”
호유화가 말하자 흑호는 다시 한 번 갈기를 곤두세 우며 외쳤다.
“이애는 안 뒤어. 이애는 천기를 지킬 수호자여. 절대 안 뒤어.”
“그만해요……. 제발 그만!”
은동이 외쳤으나 흑호는 커다란 앞발로 은동을 휙 밀어냈다.
“말로는 소용없어. 이미 내가 수없이 말했지만 들은 척도 않더만.”
“아니에요. 호유화가 아닐 거예요! 호유화가 이럴리 없어! 마수가 변장한 걸 거예요!”
그러자 흑호는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아녀, 절대 마수가 아녀. 환계의 기운이 그대로 느껴져. 호유화가 맞어……………”
그 말을 듣고 은동은 벼락을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아…….”
은동이 충격을 받아 몸을 떨며 굳어 버린 것을 보고 흑호는 다시 한 번 힘없이 웃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이판새판이여. 은동아, 너는 어서 도망가! 어허잇!”
흑호는 한 번 찌렁찌렁하게 노호성을 지른 다음 무 서운 돌개바람을 뿜어내었다. 그렇지만호유화는 그 돌개바람을 양손으로 막아내었다.
“겨우 그 정도의 힘으로 나를…….”
그러나 그것은 흑호의 속임수였다. 흑호는 반분의 힘으로 돌개바람을 내뿜은 다음, 나머지의법력을 발 에 집중하여 땅을 후려갈겼다. 그러자 호유화의 발 밑에서 수없이 많은 돌과 바위들이 솟구쳐 올라왔 고 호유화는 간신히 세 번이나 몸을 틀면서 그 바위 의 공격을 피했다.
“이 지저분한 호랑이 놈이!”
“호랑이라구? 허허, 고양이라더니 많이 올라갔구나. 이건 어떠냐!”
흑호는 다시 무섭게 갈기를 곧추세우더니 하늘을 향 해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마른하늘이 번쩍하더니 번갯불 한 줄기가 호유화를 향해 내리꽂
혔다.
호유화는 무서운 속도로 몸을 피했으나 번개는 그대 로 호유화 쪽으로 따라붙으면서 호유화를 내리쳤 다.
“흥!”
호유화는 번개를 맞으면서도 흑호를 향해 다시 한 번 시뻘건 불길을 뿜어냈다. 흑호는 번개술을 쓰는 도중이라 다시 그 불에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쾅 소리와 함께 흑호가 나가 떨어졌는데 흑호의 털은 이미 그슬리고 타 들어가고 있었다.
호유화는 번개를 맞았으나 어깨부분이 조금 그슬린 것 뿐,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호유화 가 다시 흑호를 향해 일격을 가하려는 순간, 다른 쪽에서 일갈성과 함께 무형의법력이 호유화의 뒤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호유화는 황급히 옆으로 세번 이나 몸을 돌리면서 그 기운을 피했다.
“웬 놈이냐!”
은동의 멍한 눈에도 그 광경은 들어왔다. 그것은 바 로 장막 안에서 쏟아져 나온 기운이었다.그리고 장 막 안에서 유정이 힘없이 늘어진 강효식을 부축한 채 뛰어나왔다.
강효식의 손에는 아직도 밧줄이 걸려있었다. 이는 유정이 강효식의 포박을 풀다가 밖에서괴이한 소리 가 나자 놀라서 나오다가 전에 본 적이 있는 백발의 호유화가 은동과 흑호를 공격하는 것을 보고 손을 쓴 것이었다.
유정이 쏘아낸 기운은 불력(佛力)에 근본을 둔 것이 라 비록 무형의 기운이라 물리적인 힘은없었지만 호 유화나 기타 다른 계의 존재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되는 기운이었다.
“은동아! 어떻게 된 것이냐?”
유정은 주변에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유 정은 얼결에 흑호가 공격당하는 것을 보고 불력을 쓴 것이다. 그러나 과거 금강산 아랫마을을 쑥밭으 로 만들고 아이를 잡아갔던 요물이 바로 백발의 여 자 모습을 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을 유정은 기억해 냈다. 유정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요물이 드디어 본성을 드러내는 모양이군.’
그러자 호유화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쏘아붙였다.
“너는 또 어디서 나온 화상이냐? 극락왕생이 그리 도 소원이냐?”
호유화는 다시 한 손을 들어 이번에는 유정에게 한 줄기 기운을 뿜어냈다. 유정은 재빨리합장을 하면 서 불력을 발산했다. 그것은 불가의 밀법에서 말하 는 부동심결(不動心訣)이었다.
순간 유정의 몸 주위에서는 상당히 밝은 빛이 구체 처럼 뿜어져 나왔고, 호유화의 법력은 그기운을 뚫 지 못하고 물 속으로 꺼져 들어가듯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저…… 땡중이!”
호유화가 놀라서 이를 갈며 말하자 유정은 천천히 불호를 한 번 외우고 말했다.
“무릇 사악한 기운은 불력의 힘에 범접할 수 없거늘・・・・・・ 그만 그쳐라!”
호유화는 다시 유정을 향해 공격을 하려 했으나 이 번에는 뒤에서 흑호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흑호는 다시 법력을 내쏘려 했으나 자칫하면 유정이나 강 효식까지 다칠까 봐서 법력을쓰지 않고 육탄공격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호유화는 다시 몸을 돌리면서 흑호의 주먹을 막아내었다. 흑호는 죽기살기로 주먹과꼬리, 뒷발까 지 놀리면서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게 삼사십회나 공격을 가했다. 호유화는 뒤로 몇 발자국이나 물러 날 수밖에 없었다.
그에 더하여 유정이 다시 합장을 하고 불력을 잠시 쏟아내자 호유화는 점점 손발을 놀리기가 어려운 것 처럼 보였다.
흑호는 정신없이 호유화를 밀어붙이면서 소리쳤다.
“은동아! 어여 가! 아버지랑····..”
은동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흑호가 내지른 소리에 은동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호유화와 흑호. 둘 다 은동에게는 목숨을 걸고 함께 모험을 했던 자들이었고 친구라고도, 동료라고도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 둘이 지금 눈앞에서 목 숨을 걸고 싸우고있는 것이다.
“그만해요!”
은동이 애원하듯 외침과 동시에 유정의 등에 업힌 강효식이 신음소리를 냈다. 그것을 보고은동은 다 시 아버지가 걱정되었다.
“아버지!”
은동이 외치자 유정은 강효식을 보느라 잠시 불력을 쏟아내기를 멈추었고 호유화의 동작은다시 민첩해 졌다. 흑호는 원래가 호유화보다 법력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이미 수없이 얻어맞은 이후라 호유화가 자 유로워지자 상대가 되지 않았다.
호유화는 은동의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냅다 흑호의 아랫배를 갈겼다. 그러자 흑호의입에서 컥 하면서 선혈이 튀었다.
유정이 은동에게 물었다.
“도대체 이 요물은 무어냐? 그냥 두면 안 되겠구나!”
“저…… 저…….”
은동은 다시 어물어물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 리 지금 흑호와 싸우고 있다손 치더라도호유화는 그동안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던가. 은동은 비록 그것을 애정이라는 면으로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호유화의 존재는 은동의 마음속에 분명 히 각인되어 있었다.허나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은동은 정말로 모든 것이 싫어졌다. 호유화와 지냈 던 지난 일들이 눈앞을 줄줄이 흘러갔다.그리고 그 와 동시에 흑호를 잡아죽일 듯 공격하는 호유화의 모습이 거기에 겹쳐졌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사람도 믿을 수 없고……. 요물은 역시 믿을 수 없었어……….’
은동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유정에게 소리쳤다.
“이 여자…… 요물을………… 물리쳐 주세요…….”
그러자 유정은 강효식을 내려놓고 있는 힘을 다해 불력을 발했다. 비록 수많은 왜병들 속에들어와 있 는 처지였지만 난데없이 나타나 목숨을 해치려는 요 물을 유정으로서는 그냥 두고볼 수는 없었던 것이 다. 은동은 부르르 몸을 떨고는 팔에서 육척홍창을 뽑아 내었다.
은동이 육신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홍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안에 깃든 법력만은 여전했다. 그것을 휘두르며 은동은 호유화에게 무작정 달려들 었다.
호유화는 정신없이 흑호와 싸우는 중에도 은동이 몸을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모습을 보았다. 호유화 는 일갈성과 함께 다시 무시무시한 힘으로 흑호를 쳐서 쓰러뜨린 뒤, 달려드는 은동에게 소리쳤다.
“역시 그렇구나! 좋다! 죽어라!”
은동은 창을 휘두르며 달려들면서 호유화가 팔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보고 운동은 눈을 감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실수하지 말고 날 쳐. 호유화……………’
은동은 죽어 버리고 싶었다. 요행히 호유화를 찌를 수 있으면 같이 죽고, 아니더라도 자기가맞아 죽으 면 호유화의 분이 풀릴 것 같았던 것이다. 유정은 놀라서 불력을 힘껏 발휘하였으나 이미 호유화의 손 에서는 기운이 뿜어져 나간 다음이었다.
그때였다. 우레 같은 총소리와 함께 호유화의 몸이 뒤로 젖혀졌고 호유화의 겨냥은 빗나가서 은동 옆 의 땅을 쳤다. 땅이 두 자나 넘게 깊숙이 파이며 흙 먼지가 일어났다. 호유화의 몸이 젖혀진 때문에 은 동의 창도 빗나갔고 은동은 장막에 처박혀 쓰러져 버렸다.
“어느 놈이…”
호유화는 눈을 들어 총소리가 난 쪽을 보았다. 그곳 에는 말을 타고 투구를 쓴 고니시가 백여 명이 넘 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서 있었다. 고니시는 멀리서 자신을 협박했던 백발의 여자모습을 발견하자 일제 히 총을 발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 앞에 몇 명의 사람 모습이 더 있었으나 밤이었고 거리가 멀어서 고니시는 잘 식별할 수가 없었다. 유정과 은동은 검은 색의 야행복을 입고 있었고, 흑 호는 원래 몸이 검어서 눈에잘 뜨이지 않았던 것이 다. 그 와중에 호유화의 백발은 멀리서도 눈에 두 드러져서 고니시는일단 무조건 발사를 명령했다.
물론 그 총알이 호유화를 쓰러뜨리거나 상처를 입힐 수는 없었지만 수십 발이 넘는 총알이명중하자 호유 화가 몸을 비틀거리게 된 것이다. 고니시가 다가오 자 호유화는 이상하게도 이를 한 번 갈고는 몸을 빼 었다. 호유화는 허공으로 몸을 솟구쳐 올리면서 말했다.
“흥. 바보 같은 꼬마! 명이 길구나! 네게 선물을 하나 줄까?”
은동은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호유화가 쏘아낸 법력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 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호유화의 법력은 땅에 쓰러 져 있던 강효식을 향해 날아간것이다.
강효식은 순간 온몸에서 우두둑하고 뼈 부러지는 소 리를 내면서 손발이 맥없이 늘어져 버렸다.
“으아악!”
은동은 비명을 질렀다. 유정도, 그리고 막 몸을 일 으키던 흑호도 마찬가지였다. 고니시의 부하들은 멀 리 보이는 백발의 여인의 몸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 을 보고 기겁을 했으나 고니시는 부하들을 재촉했다.
“어서 쏘아라! 쏴!”
다시 한 번 조총 병들의 일제사격이 이어졌으나 이 미 호유화는 몸을 무화시킨 이후였다. 총알들은 호 유화의 몸을 그냥 통과해 멀리 날아가 버렸다.
은동의 귀에 호유화의 빈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내 마음이다. 지긋지긋한 꼬마야…………. 너도 네 아비처럼 어디 가서 죽어 버려라!”
목소리가 사라지자 호유화는 이미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아버지!”
은동은 외치면서 강효식에게 다가갔다. 유정이 얼른 강효식의 맥을 짚고 상세를 살펴보았다.강효식은 아 직 맥은 남아 있었지만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박살이 나버린 강효식 은 잘 버텨야 일각 정도였다.
“은동아,………할말이 없구나. 나무아미타불ᆢ”
유정이 불호를 외웠다. 은동은 강효식에게 기어갔으 나 강효식의 몸이 너무나 참혹하게 망가져 있었기에 은동은 아버지의 품에 안길 수조차 없었다.
은동은 강효식의 손을 잡았으나 그 손은 너무도 힘이 없어서 사람의 손 같지가 않았다.
강효식은 눈을 감고 있으면서도 나지막하게 말했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지만………….
“은동아…………. 너냐? 너………….. 맞느냐?”
“맞아요! 아버지! 아버지!”
“그래………. 은동아… 너는…..”
그 순간, 고니시는 부하들을 재촉했다.
“다른 녀석들이 더 있다! 어서 쏘아라! 하나도 살 려두지 마라!”
곧이어 일제사격이 쏟아졌다. 흑호가 놀라서 술법을 썼으나 힘이 충분치 못했다. 조총 탄들은 꽤 많은 숫자가 흑호가 뿜어낸 바람에 밀려나갔지만 몇몇 발 은 뚫고 들어왔다.
은동은 어깨에 한 발, 다리에 한 발을 맞았지만 아 픈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유정도 세 발이몸을 스쳤 고 흑호의 몸에는 두 발의 조총이 박히고 한 발이 스쳤다. 그러나 강효식은 그 망가진 몸에 또 네 발 의 총탄을 맞고 말았다.
그 모양을 보고 은동은 으악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 총격으로 인해 강효식은 그나마 남아있던 숨마 저도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이………… 이놈들!”
은동은 완전히 눈이 뒤집혀 버렸다. 흑호도 거의 넋 이 나간 듯했지만 은동의 입이 움직이는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은동은 바로 염라대왕이 전에 일러주 었던, 어떤 인간이든지 죽일 수있는 술법을 쓰고 있 질 않은가.
“은동아! 고니시는 죽이면 안 뒤어!”
흑호가 소리치자 유정이 재빨리 달려들었다. 유정 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이미 이 꼬마가대단한 술 법을 지닌 아주 초자연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아까 은동은 자기가 아무나 죽일 수 있는 술법이 있다고 무심코 이야기하지 않았 던가?
유정은 재빨리 은동의 입을 틀어막고 은동을 껴안으 려 했다. 은동은 한순간 입이 막히자 다시 발버둥을 쳤는데 그 힘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유정은 법력도 있는 고승이었고 어른이었는데도 은 동의 손짓 한 번에 날아가 저쪽 구석에처박혀 버 리고 말았다. 그래도 유정은 정신을 놓치지 않고 외 쳤다.
“흑호! 은동이를 막게!”
그 말에 흑호는 얼결에 은동이를 잡아 입을 막았다. 아무리 은동이 신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흑호의 힘 은 당할 수 없었다. 흑호가 은동을 잡는 사이 고니 시의 부하들은 다시 사격을가해왔다.
은동을 안은 흑호는 낌새를 채고는 재빨리 몸을 굴 려 피하면서 유정의 몸도 꼬리로 쳐냈다.덕분에 이 번의 사격에서는 셋 다 한 발의 총알도 맞지 않았 다.
사정이 이쯤 되자 유정은 다시 은신술을 썼다. 그 와중에도 유정은 이미 죽은 강효식의 시신을 끌고 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자 흑호도 다시 둔갑 술을 써서 은동을 데리고 유정의 뒤를 따라갔다. 유 정의 은신술 정도는 지금의 법력이 높은 흑호로서는 충분히 알아볼 수있는 정도였다.
한편 고니시의 병졸들은 몇 명 남아 있던 사람 형체 들이 다시 사라져 버리자 또 한 번 깜짝놀랐다. 하 지만 고니시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미 수 없이 겪어 왔던 일이었으니까.
“되었다. 어서 불길을 잡고 해산하라.”
고니시는 그 자신이 은동의 술법으로 삽시간에 목 숨을 잃을 뻔했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있었다. 그 의 마음속에는 다시 나타났던 그 백발의 요물 걱정 밖에는 없었다.
“대사! 괜찮으시오?”
아까 약속한 장소에 이르자 김덕령이 유정을 맞았 다. 그러나 유정은 이제 조총이 스친 상처가 쑤시는 데다가 무리하게 은신술을 오래 써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유정은 울컥 피를 토하고 김덕령의 부축을 받았다.
뒤따라온 흑호는 김덕령이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이 제와 새삼스럽게 모습을 감추고 말 것도없어서 그 냥 반인반수의 모습을 드러낸 채 앞에 나섰다. 김덕 령은 흑호와는 이미 구면인 터라 별로 놀라지 않았 다. 흑호의 품안에서 고니시를 죽이겠다고 발버둥 을 치던 은동은 이제는 풀이 죽은 듯 흐느껴 울기만했다.
“일은…….”
김덕령은 말하려다가 은동과 저만치 건너편에 쓰러 져 있는 강효식의 시신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김덕 령도 역시 순박한 사람으로 일이 잘못 되었다는 것 을 느끼고는 할말이 없어서 머쓱하게 서 있었다.
유정이 조금 숨을 헐떡이더니 흑호에게 눈짓을 했 다. 그러자 흑호는 은동을 내려놓았다. 유정은 일 단 은동의 상처를 살피고 대강의 응급조치를 해주었 다. 다행히 은동은 신력을 지닌몸이었고 상처도 별 반 대단한 것은 아니어서 거동에 큰 불편도 없을 정 도였다.
유정은 자신의 치료도 대강 끝내고 다시 몸을 일으 키더니 김덕령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김덕령은 강효식의 시신이 있는 곳으로 가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경황이 없는 중이라 정식으로 매장할 수는 없었지만…….
은동이 다시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강효식의 시신 옆으로 가서 울먹였다.
“아버지………….”
그 모습을 보고 흑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유정은 조용히 나무아미타불 불호를 외웠다.
김덕령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은동을 보고 말했다.
“아버님은 돌아가셨구나……”
은동은 한참이나 울면서 입술을 꾹 다물고 김덕령이 구덩이를 파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젠 아버지를 볼 수 없어…………. 살아서는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할 거야………. 아버지는좋은 곳으로 가실까? 그러실 거야. 꼭… 태을사자에게 부탁해야지. 그리고・・・・・・ 그리고………….’
은동은 스스로를 위안하려고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 었다. 저승을 직접 다녀오고 사후세계에대해 눈으로 본 은동이도 슬픔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좌우간 그러했다. 이제 어머니와 아버 지가 모두 돌아가셔서 세상에 홀로 남은 외톨박이 가 되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유정은 조금 쉬고 난 뒤 김덕령을 거들었고 흑호도 머뭇거리면서 같이 땅을 파기 시작했다.흑호는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인간의 관습에 대해서는 무지했지 만, 어쨌든 기운이 엄청난흑호가 땅을 파자 순식간 에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유정이 조용히 불호를 외우는 가운데 강효식의 시신은 그렇게 매장되어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죽여 버릴 거야…….”
은동은 강효식의 매장이 끝나자 매몰차게 중얼거렸 다. 유정과 김덕령은 아이가 그렇듯 강한살의를 품 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무슨 말이냐? 은동아?”
유정이 은동에게 타이르듯 물었다.
“고니시… 그놈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요! 왜놈 들이………… 어머니를 죽이고 이젠 아버지까지……………! 죽여야 해!”
흑호는 놀라서 은동의 입을 또 한 번 틀어막았다. 언제 은동이 염라대왕이 부여해준 술수를써서 고니 시를 죽여 버릴지 몰랐기 때문이다. 유정은 고개를 저으면서 천천히 은동에게 말했다.
“네 마음은 안다………….. 하지만………… 강공을 해친 것은 고니시라고 볼 수는 없지 않느냐? 그요물이 한 짓이 아니겠느냐?”
흑호가 잠시 입을 풀어주자 은동은 다시 대들었다.
“아니에요! 고니시가 총을 쏘지 않았으면 살려낼 수 있었을 거예요!”
은동은 호유화가 자신에게 그런 짓을 한 것을 아직 까지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모르게 강효 식을 죽인 것은 호유화가 아니라 고니시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유정으로 서는 은동이 고니시를 이렇게 일찍 죽이는 것보다 는 뭔지 모를 요사한 요물인 호유화에게 살의를 품 는 편이 나았다.
“아니다…. 이미 네 아버님은 그 요물에게 맞아 돌아가시기 직전이었다. 고니시도 책임이없지는 않 지만… 고니시보다는 그 요물의 책임이 크단 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정 그렇다면 고니시가 아니라 고니시의 부하를 탓 해야지. 고니시가 직접 총을 쏜 것은 아니지 않느 냐?”
“하지만 그놈이 명령을 내렸다구요!”
“그렇게 따지면 결국 네 아버님을 해친 것은 그 요 물이라 보아야지…… 그렇지 않으냐?”
은동은 말문이 막혔다. 다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 했다. 이제 어찌되었건 호유화와 원수지간이 된 것이다. 호유화가 은동 자신을 죽이거나 해쳤다면 차 라리 좋았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그토 록 참혹하게 해친 것은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다.
은동은 아버지가 죽은 것과 또한 그 때문에 호유화 와 원수가 되었다는 것이 슬퍼서 소리를내어 엉엉 울었다. 그것을 보고 혀를 차던 유정은 은동에게 말 을 건넸다.
“네가 안다는 그 술법이 어디에서 배운 것인지, 또 정말 가능한 것인지는 내 알지 못한다.하지만 그런 술법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야. 더구나……”
유정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었다.
“고니시는 지금 중요한 일을 꾸미는 것 같다. 아까 문서에서 보았지. 그는 지금 독단적으로계획을 꾸 며 전쟁을 끝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자다. 명나라의 어떤 고관과 연락을 취하기시작한 것 같더구나. 비록 그도 왜구의 일인이고 침략자이기는 하나, 그 런 노력을 한다는 것은 가상한 일이지. 그러니 조금 만 두고보기로 하자. 일단은 난리가 끝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느냐?”
유정은 은동이 알아듣기를 바라며 조목조목 이야기 했다. 김덕령은 고니시가 그런 일을 꾸미고 있는 줄 은 몰라서 유정에게 다시 몇 가지를 더 물어 보았 고 흑호도 눈이 휘둥그레져서그 이야기를 들었다.
흑호는 전에 고니시에게 갔던 인자가 혹시 그 일 때 문에 오간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제야 흑호 는 며칠 전 고니시의 장막 안에서 그들의 대화를 담아 두었던 것을 떠올렸다.그러나 지금 유정이나 김덕령에게 자신이 술법을 써서 알아낸 사실을 들려 주는 것은 위험하다고 여겨 꺼내놓지는 않았다.
한편 은동은 지금 눈앞이 캄캄하기만 하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유정의 차근차근한설복도 거 의 듣고 있지 않았다. 지금은 아버지의 죽음과 호 유화의 배신 때문에 너무나 큰충격을 받고 있었으 며 그 외의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아무도 필요 없어. 이젠 아무도 믿을 수 없어…………….’
은동은 흑호를 힐끗 보고 태을사자를 생각하며 다시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호유화마저도 배신했어. 호유화가 아버지를 죽였 어…………. 흑호도 믿을 수 없고 태을사자도믿을 수 없어. 하일지달이건 삼신대모건 성계건 신계건간에 다 나쁘고 빌어먹을 것들이야. 아버지를 죽인 자들 을 눈앞에 주고도 술법조차 못 쓰게 한다면 도대체 술법은 뭐 하러 준거란 말야!’
그러나 김덕령도 유정이 말하는 중에도 은동의 가엾은 모습을 보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은동아, 생각을 크게 먹어라. 수많은 사람들이 고 통을 당하고 있단다……………..”
김덕령의 말에 은동은 다시 마음이 약해졌다. 도무 지 생각하기가 힘들고 복잡하기만 했다.그러나 가 장 큰 감정은 이제 정말 모든 것이 싫고 귀찮다는 것뿐이었다.
이제 은동은 천기고 왜란종결자고 뭐고 간에 아무 것도 필요 없으며, 아무 것도 관여하지 않겠다고 속 으로 맹세했다.
호유화를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리거나 호유화의 손 에 죽어 버리거나 하겠다고도 맹세했다.그래야 분 이 풀릴 것 같았다. 그것말고는 은동은 더 이상 아 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것도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거기까지 생각한 뒤, 은동은 더 이상 버틸 기력이 없어서 풀썩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