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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종결자 6권 – 3화 : 은둔생활


은둔생활

한편 홀로 좌수영을 떠나 터벅터벅 길을 걷던 은동 은 좌수영이 아스라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자 한 숨을 내쉬었다. 흑호나 태을사자가 지금쯤이면 자 신이 남긴 편지를 볼 때가 된것 같았지만 누가 따 라오는 것 같지는 않았다.

‘따라오지 않는 것 같구나…………. 고마워요.’

일견 자신의 길을 막지 않는 것이 고마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참을 가다보 니 도대체 맥이 풀리고 정신이 없어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니 벌써 그저께 저녁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다.

“아이구, 이 근처는 민가도 없고……….. 어떻게 하나……………..”

은동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 았다. 아득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져 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은동은 애써 고개를 흔들면서 다시 팔 을 걷어 보았다. 푸르죽죽하게변해 가는 피부의 병 든 빛깔은 빛을 쏘이자 한결 더 푸르게 변하는 것 같았다.

은동은 아이구 싶어서 얼른 소매를 내렸다.

‘이대로 썩어서 죽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에 이, 모르겠다. 죽으면 죽는 거지……. 하지만…………… 하지만…………….’

은동이 멍하니 주저앉아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산토끼 두 마리가 은동 앞에 나타났다.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은동은 고개를 갸웃하며 토끼를 바라보며쫓으려는 듯 손을 내저었 지만 토끼는 도망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은동 앞에 다가와 몸을움츠리는 것이었다.

‘무얼까? 마치 잡아먹어 달라고 하는 것 같구나. 이 런이런…….’

거기까지 생각하자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 다. 흑호였다.

‘이런, 흑호가 아직도 나를 보고 있나 보구나. 나더러 토끼라도 잡아먹으라는 건가? 으음…….’

은동은 그런 흑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지만 눈을 빤히 뜨고 있는 토끼들을 잡을 생각은들지 않았다.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토끼네. 잘됐네. 나으리, 배고프실 텐데….”

은동은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천만 뜻밖에 그 곳에 있는 오엽이를 보았다.

“어…. 너….. 너 대체 어떻게…”

그러나 오엽이는 은동의 말은 들은 척도 않고 종알 종알 지껄이며 대뜸 토끼의 귀를 낚아챘다.

“아프시다면서 무슨 걸음이 그리도 빨라요? 쫓아오 느라고 죽을 뻔했네. 여긴 길도 없는 곳이라구요! 이런 데로 들어오다니 정말…..”

그러면서 오엽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토끼를 바 라보았다.

“불쌍한 것. 하지만 너는 나으리의 요깃감이 될테니 그리 서운해 말거라.”

오엽이는 조그마한 장도칼을 꺼내 토끼를 잡으려 했다. 은동은 오엽이가 토끼를 잡으려는것을 보고 놀라서 소리쳤다.

“죽이지 말아! 나는 괜찮아!”

그러나 오엽이는 고개를 젓고 단번에 토끼를 잡아 버리며 말했다.

“배 고프다고 얼굴에 써 있는데 왜 그러세요? 토끼 가 불쌍한가요?”

은동은 토끼가 이미 죽어 축 늘어진 것을 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저런………, 안 죽여도 되는데・・……너는…….”

오엽이는 죽은 토끼를 들고 대들듯이 은동에게 내밀 었다.

“안 죽여도 된다구요? 그럼 나으리는 굶어죽을 건 가요? 불쌍하다구요? 그럼 나으리는 안 불쌍한가 요?”

샐쭉거리며 대꾸한 오엽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토끼 가죽을 슥슥 벗겼다. 은동은 차마볼 수가 없 어서 눈을 감았으나 오엽이는 또 다시 냉랭하게 말 했다.

“살려면 먹는 것도 당연한 거예요. 정 토끼가 불쌍 하면 마음으로 미안하다고 하기나 해요.나으리가 살려면 다른 것들을 먹어야 해요. 그건 죄도 아니고 이상한 것도 아니에요.”

“하지만……”

은동이 엉거주춤 말을 못하자 오엽은 흥 하면서 피묻은 손으로 머리칼을 한 번 추스리더니말했다.

“내가 보기엔 토끼보다 나으리가 더 불쌍해요. 그 꼴이 대체 뭐예요? 토끼가 불쌍한 줄 안다면 나으 리 자신이 불쌍한지 안한지 한 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은동은 아무 말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오엽이 는 눈 깜짝할 사이 토끼의 가죽을 벗기더니 다시 낙엽과 잔가지를 긁어모아 불을 피워 토끼를 구웠 다. 비록 토끼는 좀 엉성하게구워졌지만 오엽이는 그것을 은동에게 불쑥 내밀었다.

안 그래도 은동은 그간 죽음과 다른 일들에 대해 깊은 번민을 하던 차에 눈앞에 멀쩡하게살아있던 토 끼가 구이가 되어 쓱 내밀어지자 토할 것 같았다.

“으음…… 이… 이건……”

은동이 머뭇거리자 오엽이는 다시 샐쭉해져서 말했다.

“토끼가 불쌍하다고 했나요? 나으리가 안 먹으면 이 토끼는 괜한 죽음을 한 거예요. 나으리.쇤네, 비 록 생각은 없지만 자신이 필요해서 살생하는 건 할 수 없다고 여겨요. 죄가 되는 건그 죽은 대상을 정 말 불쌍하게 여기는지, 그리고 정말 그리 생각하는 지에 달렸다고 봐요. 토끼에게 미안하다면 먹고 기 운을 차려요. 그럼 된 거예요…”

오엽은 처음에는 샐쭉하게 말했으나 차츰 목소리가 애절해졌다. 은동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눈물을 주르 르 흘렸다.

“…… …….”

“사내 대장부가 왜 그리도 잘 우나요! 찔찔찔…. 계집애들보다 더 하네!”

“아냐!”

은동은 얼굴이 붉어져서 냉큼 오엽의 손에서 토끼 를 빼앗아 들고 마구 먹었다. 비록 맛은없었고 반 쯤밖에 안 익었지만 굶주리던 차라 몹시 맛이 좋았 다. 오엽이는 그런 은동이를 미소를 띠며 바라보다 가 은동이 토끼를 거의 다 먹자 입을 열었다.

“근데………어디로 가실 건가요?”

“왜?”

그러자 오엽이는 피식 웃으며 양손을 허리에 짚었 다.

“나으리, 똑똑하신 분이 왜 그러세요? 여기는 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구요. 나무하는 사람들밖에 안 다니고 인가도 없어요. 나으리가 나왔을 때는 어디로 가겠다는 생각이 있었을것 아니에요?”

은동은 쩔쩔 맸다. 흑호나 태을사자 앞에서도 당당 한 은동이었지만 지금 말 잘하는 오엽이앞에서는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오엽이는 비슷한 나이이니 응석을 부리기에 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막무가내를 부리기에 는 오엽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했다.

어느새 은동이는 다시 과거의 철없는 어린아이로 돌 아가 있는 것 같았다. 일견으로는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으음…… 나는・・・・・・.”

은동은 끙끙거리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음…… 금강산으로 갈 거야!”

“금강산요? 거긴 왜요?”

“으음….. 그래. 거기는……. 유정스님이라고 아주 법력 높은 분이 계시거든. 그래서 거기서・・・・・・ 음・・・・・・ 그러니까 동굴에라도 들어갈 건데…”

“동굴에는 왜 들어가나요? 왜 꼭 범죄 아저씨처럼 웅얼웅얼해요?”

“으음…………, 병을 고치려고…………. 난 빛에 쏘이면 안 되는 병에 걸렸거든.”

그러자 오엽이는 얼굴에 슬픈 빛을 띠며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그런 병이었나요? 나으리가 안 좋은 것은 알았지만……”

잠시 말끝을 흐리다가 오엽이는 다시 말했다.

“의원에게 보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은동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문득 서글퍼졌다.

“내 병은 어느 의원도 못 고쳐.”

“하긴…………… 나으리도 의원이시니 병에 대해 모르실 리가 없고…… 그런데 그냥 동굴 안에서무엇을 하 시게요?”

은동은 또 막막해졌다. 그것까지 생각해보지는 않 았던 것이다. 조금 생각하던 은동은 문득오엽의 얼 굴을 보았다. 오엽의 얼굴은 얼마 전과는 또 어딘 가 달라져서 정말 예뻐 보였다.하루하루가 지날수 록 예뻐져 가는 것 같아서 은동은 얼른 얼굴을 돌렸 다.

불현듯 호유화가 생각이 났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죽은 아버지의 생각에 분통이 터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수련, 수련을 할거야! 요물을 잡아야 하거 든!”

다부진 은동의 말에 오엽이는 깜짝 놀랐지만 곧 박 수를 치며 기뻐했다.

“그래요? 어마! 신나라!! 그런데 그 요물은 누군 데요?”

“너는 말해도 몰라. 이 세상의 것이 아니야.”

“어머머… 더 듣고 싶어요. 뭔데요? 네?”

말하면서 오엽은 은동의 옆으로 바싹 붙었다. 은동 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오엽이의 몸이바싹 붙자 그냥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구미호야.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호유화라는 요 물인데 환계라는 데의 환수래. 그놈…….아니, 그 것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

그 말에 오엽이는 몹시 놀라는 눈치였다. 오엽이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잠시 후에 은동에게 물었 다.

“아버님이………… 돌아가셨나요?”

“그래.”

“나으리 아버님도 의원이실 텐데……. 요물이 왜 의원이신 아버님을 죽였지요?”

은동은 자신이 했던 거짓말과 실제 이야기가 섞이자 조금 당황하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몰라. 좌우간… 좌우간 원수를 갚아야겠어!”

오엽은 잠시 뭔가 생각해 보는 듯하더니 이내 낯빛 이 어두워졌다. 은동은 오엽이 자신을 불쌍하게 여 겨서 그런가보다 하고 다시 서글퍼졌다. 그러나 오 엽이는 다시 쾌활하게 말했다.

“꼭 그렇게 하세요! 원수는 갚으셔야죠! 나으리라면 반드시 하실 수 있을 거예요………….”

그 말에 은동은 또다시 호유화에 대한 적개심이 불타올라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그래! 맹세해! 꼭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거야!”

“그래요… 그렇게 되실 거예요…….”

오엽이는 그런 은동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돌연 약간 남자 같은 말투로 말을 건넸다.

“그런데…………… 빛을 쐬면 안 된다고 하면서 낮에 떠나 서 어쩌겠다는 거죠?”

은동은 그냥 북받쳐 오르는 감정에 무심코 떠난 것 이라 그런 것은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원래 은동은 낮에는 길을 가고 밤에는 무조건 자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 그건…….”

“그래요. 걱정이 많으셔서 미처 생각 못하셨겠지요.・・・・・・그러니 쇤네가 길을 안내할게요. 쇤네 고향은…..강원도 금강산 부근이에요. 그러니 좀 힘들겠지만 낮에는 자고 밤에만 길을 가야해요.”

은동은 오엽이가 따라온다는 말에 놀라서 물었다.

“어…… 너…… 너 따라올 거야?”

그러자 오엽은 다시 샐쭉해지면서 대꾸했다.

“나으리는 토끼 한 마리도 못 잡으면서 도대체 어쩌 겠다는 거죠? 네? 길을 가는 동안은 물론이고 동 굴 안에서 있을 거라면서 누가 나으리 밥을 해주고 수발을 해준단 말이에요? 나으리는 원수를 안 갚을 건가요?”

다시 원수 갚는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은동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 원수를 갚아야지. 아버지를 죽인 호유화를 내 손으로 물리쳐야지 하는 생각에 은동은 다시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얼마나 시간 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오엽이 따라오면서 수발을 다해준다면 오엽에게 너무 미안할 것 같았다.

“하…… 하지만……… 그건 주막에라도 들리면 되는데 네가 너무 힘들지도…………. ……..”

“염려 말아요! 저야 원래가 나으리를 모시는 계집 인걸요? 그리고 무슨 주막에 들러요? 나으리처럼 어린 사람이 혼자 길 떠났다고 하면 아무도 믿지 않 을 거고 어른들이 잡아 다시 좌수영으로 돌려보낼 걸요?”

“어…… 그…… 그건 안 되지만……”

황망스런 표정을 짓는 은동을 쳐다보며 오엽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방법이 있어요. 말이나, 안 되면 나귀라도 한 마리 사서, 낮에는 풀을 먹이고 밤에는타고 길을 가 면 돼요. 돈 가진 건 있나요?”

“음?”

그러고 보니 은동은 돈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 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오엽은 다시잔소리를 늘 어놓으려고 했다. 그때, 은동은 지난번 흑호가 새로 캐다 준 산삼을 떠올렸다.

“이거………… 이거라면 돈이 되지 않을까?”

오엽은 은동이 꺼낸 두 뿌리의 산삼을 보고 샐쭉거 렸다.

“좀 크기는 하지만 도라지 두 뿌리를 팔아 봐야 얼마나 되겠어요?”

“이건 도라지가 아냐. 산삼이래!”

“네? 에이, 설마…….”

“정말이야!”

오엽이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입을 열었다.

“의원 나으리 말이니………… 정말일 것도 같지만…………. 이건 말린 삼도 아니잖아요? 캔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새 캐신 건가요?”

은동은 할말을 찾지 못하여 입을 다물었다. 오엽이 는 산삼을 빼앗듯이 받아들고 말했다.

“좋아요. 쇤네가 가서 한 번 팔아보죠. 나으리는 너 무 세상을 몰라서 속을 수 있으니 안 돼요. 근 데…………… 이게 정말 값이 나가는 건가요? 얼마나 나 가죠?”

은동도 그것은 몰랐다. 하지만 의원 체면에 산삼 값도 모르는 것 또한 말이 되지 않는 것같아서 지 난번 흑호에게 들은 이야기를 옮겼다. 흑호는 작은 것 한 뿌리로도 기와집 한 채는 살 거라고 하지 않 았던가?

“기와집 한 채 값은 넘을 거야.”

“에? 설마…….”

사실은 은동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흑호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으므로 은동은 다시 자신있게 말했다.

“정말이라니깐!”

결국 오엽이는 은동을 그늘진 숲에 두고 산삼을 팔 러 혼자 갔다. 은동은 누워 좀 쉬면서 눈을 붙였다. 오엽이가 혹시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저 편하게 생각했다.

‘가면 오히려 다행이지. 같이 가면 고생이 막심할 텐데…・・・・・・・ 그냥 가라, 오엽아. 그냥 들고도망가 버려・・・・・・・……그리고 나는・・・・・・ 나는 그냥…… 모든 게 귀찮은데…….’

하지만 오엽이는 돌아왔다. 그것도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아주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나으리 정말이네요! 신기하기도 해라.”

“음? 왔니?”

은동은 오엽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조금 시무룩해 졌지만 곧 얼굴을 폈다. 이렇게 된 이상할 수 없다 고도 생각되었고, 또 사실은 예쁘고 영리한 오엽이 와 같이 가는 것이 싫지도 않았다. 좌우간 오엽이 는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정말로 귀한 물건이더라구요! 돈하고 은괴도 받고 쌀도 샀어요! 정말로…………….”

은동은 오엽의 호들갑을 막아섰다.

“그럼 됐어. 그런데…………….”

“네?”

“뒤에 따라오는 건 누구지?”

“네?”

오엽은 뒤를 돌아보고는 까무러칠 듯 놀랐다. 그 뒤 에는 벌써 인상부터가 좋지 않아 보이는남자들 몇 명이 얼씬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것들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고 뭐하냐? 어른 에게 맡겨라.”

“이렇게 인적 없는 산중에까지 제 발로 와주다니, 정말 고맙기도 하구먼.”

실실 웃으며 그렇게 말하는 사내들의 얼굴에는 탐 욕이 넘쳐흘렀다. 오엽이가 큰돈을 들고오는 것을 보자 도둑들이 달라붙은 것이다. 오엽이는 도둑들을 보고 벌벌 떨며 은동의 뒤에숨었다.

“어떡해요……. 아이구…….”

그러나 은동은 귀찮은 듯이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 다.

“어서들 가세요. 다칩니다.”

대뜸 도둑들이 우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었다. 보기 만 해도 벌써 어리고 가냘픈데다가 병색까지 완연한 자가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듣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꼬마야, 맞고 내놓을 테냐? 그냥 바치고 맞을 테냐? 낄낄…….”

도둑 중 한 놈이 은동을 아주 얕잡아보고 터벅터벅 은동의 앞으로 걸어왔다. 은동도 사실은좀 겁이 났 지만 자신은 신력이 있으니 겁낼 것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뒤에서 붙어 떨고 있는 오엽을 보자 안쓰러 운 생각도 들고 행여 오엽이 다칠까 봐서 빨리 끝내 기로 마음먹었다.

은동이 앞으로 나서자 놈은 껄껄 웃으며 때려 보라 는 듯 징그럽고 더러운 배를 불쑥 내밀었다.

“헉!”

은동이 나서면서 배를 툭 칠 때까지 웃고 있던 놈 은 은동이 툭하고 배를 치자 신음소리를내며 대경실 색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쓰러져서 꼼 짝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도둑들은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은동을 보고 있는데 은동은 짐짓 놀라는 척하면서 다시 다른 도 둑에게 뛰어들어 한 대 갈겼다. 이번에는 조금 더 힘이 들어가 있어서 그 도둑은뒤로 몇 발자국이나 날아가 나무에 부딪친 뒤에 다시 앞으로 털썩 쓰러 졌다.

“어어…… 이 꼬마가!”

도둑들은 놀라면서 그때서야 무기를 꺼내려 했으나 은동은 나머지 두 놈을 하나씩 손에 잡고는 휘휘 돌 리듯이 멀찍이 던져 버렸다. 나가떨어진 놈들은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기절해버렸다.

“괜찮니? 오엽아, 넌…….”

은동이 말하는데 오엽이는 마구 울면서 은동에게 와락 안겨 버렸다.

“으아앙! 나으리! 나 죽는 줄 알았어!”

은동은 놀랍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얼굴이 붉 어졌지만 차마 울고 있는 오엽이를 떼어버릴 수는 없었다. 한참이 지나자 오엽이는 울음을 그치고 품 에서 떨어졌지만 이번에는 계속 재잘거렸다.

“세상에…… 나으리가 그렇게 셀 줄은 몰랐어요! 멋있어라! 천하장사네요? 이제 아무 것도겁날 게 없겠어요! 나으리, 꼭 저를 지켜 주세요? 네?”

은동은 멋쩍기도 했지만 으쓱하기도 해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또 서글픈생각이 들었 다.

‘아무리 세상이 험하기로서니 아이들을 해치고 등치 려 하다니……. 태을사자는 삶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이런 것도 아름다울까? 모르겠다. 아이구… 머리야…….’

은동은 또다시 갈피를 잡지 못해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은동은 오엽과 함께 나귀를 타고 열흘 이상이 걸려 서 금강산에 당도하였다. 오엽이는 영리하고 은동 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며 늘 기발하고 장난스럽게 놀아서 가는 동안 은동은 지루한 줄 몰랐다.

흑호의 보살핌 덕분인지, 밤에만 길을 가는 데에도 어떤 짐승도 그들을 해치려고 하지 않았으며 때마다 꿩이나 토끼 같은 작은 짐승들이 잡아달라는 듯이 다가오기까지 했다.

은동은 돈이 생긴 이후부터는 짐승들을 잡아먹지 않 았지만 짐승들과도 장난을 치며 놀았다.밤에만 길을 갔기 때문에 가끔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서 산적 같 은 놈들이 오기도 했고 왜병들 몇몇과도 마주치곤 했지만 그때마다 은동은 타고난 힘으로 수월하게 그들을 때려눕힐수 있었다.

원래 은동의 기운이 세기도 했지만 산적이나 왜병들 은 아이들뿐인지라 방심하다가 소리 한번 못 지르 고 그저 당하기만 했다. 오엽이는 그때마다 벌벌 떨었으며, 그런 오엽의 가녀린면을 보고 은동은 오 엽을 지켜주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갈수록 은동의 병은 더 고통스러워졌지만 은동이 아 파지고 정말 세상만사가 싫어질 것 같으면 오엽이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은동을 부추겼다. 그때마다 은동은 그 생각을 하면서 그럭저럭 죽고 싶은 마음 을 이겨내었다. 열흘 이상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은동은 어느덧 죽고싶다는 생각은 거의 잊게 되었 고, 하루빨리 도를 닦고 법력을 배워서 원수 호유 화를 자기손으로 물리치겠다는 생각만 하게 되었다.

은동은 금강산에 도달하여 산을 뒤져서 안이 널찍하 고 물이 흐르는 동굴을 하나 잡았다. 그안으로 들어간 뒤 돌로 문 입구를 거의 봉해 버렸다.

“이제 나는 나가지 않을 거야. 원수를 갚을 때가 되기 전에는……”

그 말을 듣고 오엽이는 울먹였다.

“정말요? 그럼 나랑도 놀지 못하나요?”

어느새 오엽이와 정이 많이 든 은동도 마음이 약해졌지만 복수심으로 다시 마음을 추슬렀다.

“안 돼. 이야기는 할 수 있지만…………. 그러니까 오엽이는 내 걱정 말고 가도 돼.”

“싫어요!”

오엽은 날카롭게 소리쳤다.

“내가 없으면 나으리는 어떻게 하라고요? 누가 수발을 해주고 심부름을 해주고 필요한 것을 갖다주겠어요?”

“나는 혼자서도 그럭저럭 살 수 있어. 네가 힘들어 서 어떻게…….”

“난 할 거예요! 내가 안 하면 나으리 혼자 어떻게 하려구 그래요?”

오엽은 완강했다. 은동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부 모님이 돌아가신 후 누가 자신에게 이토록신경을 써 주고 정을 주었던가? 과거의 호유화는 그랬지만 이 제 호유화는 적이고 원수였다.

은동이는 오엽이마저 가면 허전할 것 같아서 조그만 소리로 부끄러운 듯 말했다.

“사실… 그래 주면 고맙겠어…….’

“정말요? 호호…….”

활짝 웃는 오엽이를 보며 다시 은동이 말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뭔데요?”

“제발 나를 나으리라고 부르지 말고 존댓말 좀 하지마. 너 몇 살이지?”

“열두 살요.”

“그럼 나보다 나이도 많잖아. 그러면 수발을 들어도 허락해 줄게.”

“안 돼요! 쇤네는 종인걸요! 쇤네는…….”

“하지만……”

“안 돼요! 쇤네가 종이 아니면 수발 드는 것도 안 할지 몰라요. 그럼 얼마나 아쉬워지겠어요? 다 …….”

그러더니 오엽이는 다시 한 번 밝게 웃었다.

“나으리라고는 하지 않을게요. 됐나요?”

할 수 없이 운동은 그 정도로 좋다고 했다.

오엽이 대강의 살림살이들을 조금씩 짊어지고 나른 다음, 은동은 바람 들어올 정도로만 남기고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동굴 입구를 막아 버렸다. 오엽은 슬퍼하며 꼭 그렇게 해야만하냐고 했지만 은동은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오엽이와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마음이 느슨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병이 심해지지 않기 위해 나와도 밤에만 나올 수 있는데, 오엽이가 밤에 이 산중을 홀로 올라와야 하니 그것 도 마음에 걸렸다. 오엽이 처음에는 바로 동굴 옆에 초막을 짓겠다고했으나 은동은 극구 말렸다. 그래서 오엽이는 그 아랫마을에 거처를 정했다고 말하며 은동의 수발을 했다. 은동은 며칠을 그렇게 지내다 보니 지루해졌다. 컴컴하여 밤낮도 알 수 없는 처 지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다가 몸이 괴롭고 보니 은동은 점점 성격이 침울해져 갔다. 그에 따라 호유 화에 대한 복수심도 깊어만 갔다.

어느 날 운동은 오엽에게 부탁하여 유정스님을 불러 달라고 했다. 물론 동굴 저 너머로 목소리만 들리 게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왜요?”

“스님께 법력을 배워야지…………. 그래야 원수를 갚을 것 아니야?”

“나으리 힘이 그렇게 센데도 이기지 못해요?”

“안 돼. 그 요물은 세상에서 당할 자가 없을 정도 야. 스님께 법력을 배워도 될까 말까야.”

“차라리 그럼 유정스님께 원수를 갚아달라고 부탁하 면 어때요?”

“내 원수는 내가 갚아야지…………. 그리고 유정스님도 이기기 어려울 거야. 유정스님하고 석저장군, 홍의 장군 전부 덤빈다면 몰라도……”

“어머? 그렇게 강한 요물이라면 유정스님에게 법력 을 배워 보아야 이기지 못할지도 모르잖아요?”

그러자 은동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하지만 해야 돼! 내가 죽든 호유화가 죽든・・・・・・・반드시 끝장을 봐야겠어!”

“호유화가 그토록 미운가요? 나으리가 다칠지도 모르는데…….”

“미워, 미워. 정말 밉다구…….”

오엽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유정스님께 다녀오겠다 고 나갔다. 은동은 유정스님이 정말 와줄까 반신반 의하고 있었는데 그날 밤, 유정 스님은 정말로 굴밖 에 왔다.

“은동이냐?”

유정의 목소리가 들리자 은동은 반가워서 울음이 터 질 것만 같았다. 이제 가까운 사람을 모두 잃고 흑 호와 태을사자와도 멀어진 지금, 오엽을 빼면 유정 스님이 그래도 은동에게는 제일 가까운 사람이었다.

은동은 유정스님이 와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유정스님은 놀라면서 은동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술법을 모두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으며, 가급적 김덕령과 곽재 우 등에게도 알려두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순신도 자신들이 알아서 지키겠다고 말해서 은동을 안심시 켰다.

이순신의 일이 해결된 것으로 믿게 되자 은동은 마 음이 편해져서 한층 분발하여 호유화를이길 수 있 도록 이를 갈며 수련에만 몰두하였다. 유정이 가르 쳐 주는 술법들은 모두 기기묘묘하고 희한한 것들이 었으며, 간혹 곽재우와 김덕령 등도 와서 또 다른 도가의 호흡법 등과술법 등을 가르쳐 주었다.

오엽이는 계속 은동이 필요로 하는 물건 등을 구해 다 주어서 은동은 별 불편이 없었다. 동굴은 상당 히 넓어 수련을 하는데도 그리 불편하지 않았으며 물이 빠지는 구멍도 있어서 그럭저럭 살 만했다.

은동은 가끔가다가 오엽의 목소리를 듣는 것과 복수 심을 불태우며 수련을 하는 것만을 낙으로 삼으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날이 갈수록 은동은 오엽의 존 재가 마음속에 자리잡아 가는것을 느꼈다.

오엽이 없었다면 제 아무리 복수심이 강해도 견디지 못하고 뛰쳐 나가 버리거나 죽어 버렸을 것이었다. 하지만 오엽은 그야말로 눈물겹도록 정성스럽게 은 동의 시중을 들어주고 은동을 격려하고 때로는 나무 라면서 잘 보살펴 주었다. 몇 번이나 은동은 그런 오엽이 고마워서눈물을 흘렸으나 오엽은 은동이 칭 찬을 할작시면 도망쳐 버리곤 했다.

그렇게 나날이 흘러갔지만 은동은 얼마나 지났는지 도 알 수 없을 지경이 되어갔다. 동굴 속은 해도 비 치지 않고 작은 호롱불 하나만 있을 뿐이었으니 점 점 생활이 불규칙해져서 어림잡기도 어려웠다. 구멍 틈으로 밤낮을 알 수는 있어서 처음에는 날짜를 계산해 보려고도 했지만 그것도 부질없는 짓 같아 속 편하게 잊어 버리기로 했다.

그렇듯 얼마나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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