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란종결자 6권 – 9화 : 쥐와 늑대의 싸움
쥐와 늑대의 싸움
그날 이순신은 교서를 받자마자 곧바로 출발했다. 전멸한 수군의 삼도수군통제사로 말이다. 이순신은 다시 군관 몇만 남기고는 모든 사람에게 갈 길을 가 라고 명해서 은동도 밀려나듯이순신의 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은동은 뭔가 섬뜩한 것을 느끼 고 한순간도 늦추지 않고 이순신의 뒤를 따랐다.
이순신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얼굴에 는 핏기가 없고 동작이 어색했다. 은동은더욱 불길 한 예감을 느꼈다. 이순신이 길을 가자 그를 알아본 백성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그들은 이순신에게 전 황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좌우간 반가워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들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얼굴은 표 정 하나도 변하지 않고 무심하기만 했다.
8월 10일, 이순신은 앓으며 길을 떠나 승주군 낙안 에 머물렀다가 몸이 아프다며 그대로 하루를 더 머 물렀다. 은동은 그때도 이순신의 뒤를 따라 근방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는데, 별안간 불길한 기운이 느 껴졌다. 은동은 생각할 틈도 없이 단숨에 담을 넘어 방안으로 들이닥쳤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순신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대들보에 목을 매려 하고 있었 던 것이다.
“장군님! 안 되십니다!”
은동은 손가락에 재빨리 법력을 가해 퉁겨서 지풍 (指風)으로 대들보를 분질러 버렸다. 그러자 이순신 은 목을 매지 못하고 땅에 털썩 떨어져 내렸다. 은 동은 이순신의 처지가 너무도불쌍해 엉엉 울면서 방안으로 들어와 이순신의 목을 맨 줄을 풀고 이순 신이 쓴 유서를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이순신은 조용히 말했다.
“그냥 내버려두거라………. 또 쓰려면 종이가 든다.”
은동은 기가 막혀서 이순신을 부여잡고 엉엉 울었 다.
“장군님! 아니 됩니다!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이순신은 은동의 모습을 알아보았지만 다시 눈을 감 았다.
“내가 더 욕을 보는 것을 바라느냐?
“아니 됩니다, 장군님. 장군님이 그러시면 백성들 은 누구를 믿사옵니까? 돌산도, 한산도에그득한 난 민들은 다 왜놈들에게 떼죽음을 당할 것입니다. 장 군님, 힘을 내소서. 장군님…….”
은동이는 되는 대로 마구 지껄이며 펑펑 눈물을 쏟 았다. 은동이도 울고, 이순신도 울었다.한참이 지 나자 이순신은 비로소 감정의 평형을 찾았는지 조용 히 말했다.
“그래………, 백성들………. 그래…………, 내 백성들에게 죄를 많이 지었어…………. 갚아주어야지…………가더라도 갚아주고 가야지…………….”
그날의 사건 이후로 이순신은 병은 비록 위중하나 다시 예전의 통제사로 돌아간 것처럼, 그나마 남은 부서진 전선이나마 부지런히 끌어 모으기 시작했다.
이제는 남은 병사도 거의 없었고, 그나마 패전 때문 에 군기가 해이하기는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으나 이순신은 묵묵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말을 듣지 않 는 자를 곤장을 치고, 달아난 자는 목을 베기도 하 는 등이순신은 서슬 퍼렇게 군기를 다시 잡아 나가 기 시작했다.
은동은 그런 이순신의 모습에서 감히 범접하지 못할 어떤 찬 기운 같은 것을 느꼈다.
‘정말 보통 사람은 아니다. 어찌 이렇게 일에 몰두 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 것도 남지 않았는데!’
8월 내내 부지런히 애쓴 결과 이순신은 부서진 배 를 몇 척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한산도와 기 타 남해 부근의 난민들은 이순신이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 흩어져숨어 있다가 환호성을 올리며 이순신을 따랐다. 그들은 곧 수없이 모여들 어 이순신이 정말왔는지 한 번 보기를 청했다.
이순신은 수많은 무지렁이 백성들의 반가워하는 얼 굴을 보면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이순신은 수없이 몰려든 백성들 앞으로 나아가 연설을 했다.
“나는…………… 나는 죄 많은 사람이오……. 여러분의 피 땀으로 만든 군선은 모두 수장되었고 여러분의 아 비, 지아비와 아들들은 수군으로 뽑혀 갔다가 죽음 을 당하기도 했소…….”
그러자 백성들은 그건 이순신 잘못이 아니라 원균 때문이며 무능한 조정관료들 때문이라며 아우성을 쳤다. 참으로 묘한 것이 이순신이 연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군중이 이순신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또 무리한 요구를 하 려고 하오. 다시 배를 짓고 다시 수군으로, 노군으 로 나와 달라고 말하려고 하오. 당장 하루 살아가기 도 힘든 여러분에게서 힘을 빌려 달라 하려고 하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뻔뻔한 자인지도 모르오. 하지만 그것만이 우리가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오.
여러분에게 나라와 종묘사직을 위해서 힘을 빌려 달 라는 소리는 하지 않겠소. 충성하기 위해 싸우라는 소리도 집어치우고 싶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이미 상처입고 피해를 입은 여러분들 자신 의 복수를 위해 싸우게 될 것이오! 여러분의 원수 인 왜놈들과 싸우고그놈들을 몰아내기 위하여 여러 분은 싸우게 될 것이오! 내 약속하겠소! 여러분 중 한 사람도 헛되이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겠으며, 여러분이 흘린 피와 땀을 천배만 배로 쳐서 왜놈 들에게 돌려줄 것을!”
군중은 우와 하며 이순신의 연설에 감격하여 아우성 을 쳤다. 이순신의 연설은 실로 핵심을찌르는 말이 었다. 백성들은 더 이상 충성이니, 조정이니 하는 진절머리나는 말밑에서 싸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 들이 당해온 수모와 고통의 복수를 위해 싸우는 것.
그것이 비록 야만적이기는 하나 사기를 고양시키고 결의를 다지게 하는 데에는 가장 중요했다.
이순신은 연설을 끝내고 눈을 감았다. 은동은 백성 들이 힘을 얻은 것은 좋았으나 이순신의연설이 지 나치게 과격한 것 같아서 몸을 조금 떨었다. 부장들 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걱정하는 소리 를 듣고 그저 웃어 넘겼다.
“괜찮어. 당장은 어쩔 수 없을 거야, 허허…………. 하 지만 내가 승전하면 반드시 내 목은 없어지겠지? 허허…………, 하지만 조정에서 얼마나 펄쩍 뛸까 생각 하면 유쾌하기 한량없구나! 으허허………… 유쾌하구 나!”
그 말을 듣고 은동은 다시 소름이 끼쳤다. 이순신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으며, 조정을 극도로 증오하여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부장 이 걱정하자 이순신은 한 마디를 더 했다.
“우리는 이긴다!”
“예……? 하오나……………”
“저 백성들이 있는 한, 우리는 이긴다. 왜놈들이 모 조리 죽거나 물러갈 때까지! 우리는 이기기만 한 다!”
순간, 이순신의 눈에서는 광채가 번득이는 것 같았 다. 은동은 이순신이 그토록이나 처절하고무서운 표 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이순신은 이제 조정이나 상감이나 종묘사직 같은 것 들을 위해 싸우는 장수가 아니었다. 그는 바로 눈 앞에 있는 무지렁이 백성을 위해 싸우는, 가장 원초 적이고 근본적인, 야수에 가까운 상태로 변해 있었 다. 궁지에 몰릴 때까지 몰렸으되, 이순신은 오히려 이제까지보다 더더욱 냉정해져 있었다.
백성들은 이순신의 독려에 기운을 얻어 다시 배를 수리하고 노를 젓는 훈련을 하기 시작했다. 패잔병 이 모여드는가 하면 ‘이장군 밑에서 싸우면 안 죽는 다더라’는 소문을 듣고 자원하는 자들도 상당수 되 었다. 다시 함대를 온전히 구성할 수는 없었으나 일단 급한 대로 전선열 척 정도가 다시 형체를 갖추 었으나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훈련받은 수군이 고작 백여 명밖에 남지 않은 것이었다. 판옥선 한 척의 정원이 백육십여 명이었으니 배 한 척에도태 우지 못할 사람들만이 남은 것이다.
그러던 8월 28일, 난데없이 왜선 여덟 척이 나타나 돌입하였다. 참패의 기억이 남아 있던 조선군은 아 직 대오조차 갖추지 못한 판이라 그대로 어지러이 무너지려 하였고, 특히 겁쟁이였던 경상수사 배설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세가 부족하니 일단 피하고……”
그러나 이순신은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피하면 어디로 간단 말이오! 나가자!”
이순신은 오히려 무서운 기세로 정비조차 되지 않은 군선을 휘몰아 무섭게 포구를 짓쳐나갔다. 화포조차 실리지 않고 노군들만 태우고 말이다. 그것을 보고 왜군들은 오히려 질린 듯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 랑을 놓았다. 왜군이 물러나자 이순신도 뒤를 더 쫓지는 않았으나뭔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르다. 시간이 없으니 편법을 써야 겠구나………….’
이순신은 수리된 판옥선의 노군들을 전원 어부들이 나 난민들로 교체했다. 단 한 명씩의 수군을 배치 했을 뿐이다. 그리고 열두 척의 배에 포수를 배치 하려 했으나 숙달된 수군은 배한 척당 열 명씩밖에 돌아가지 않았다.
이순신은 하는 수 없이 가장 크고 위력이 강한 천자 총통과 지자총통마다 한 명씩을 배치하고, 나머지 서너 명의 보조인원은 모조리 난민으로 대치했다. 그리고 직접 그 역할을 분담시킨 후 포를 쏘고 장전 하는 방법을 속성으로 가르쳤다. 모든 인원이 포를 쏘고 조준할 줄 아는 것이 좋았으나 시간이 없으니 가장 단순한 동작 하나만을 가르쳐 반복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수군은 오로지 조준만을 하도록 시켰다. 은 동도 그 와중에 다시 이순신의 배에 올라타게 되었 다. 이번에는 의사가 아니라 일개 수군으로서였다. 은동은 태을사자 등이 오지 않을까 했으나 그들은 벌써 한 달이 넘어가는데도 나타날 생각도 하지 않 아 은동은 혹시 무슨일이 있는가 하여 몹시 불안하 게 여겼다.
그런 판에 9월 2일에는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쳐 버 리는 한심한 일이 벌어져 군의 사기를 꺾었고, 9월 4일에는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들끓어 그나마 빈약 한 배마저도 모조리 수장될 뻔했으나 이순신 등이 밤을 새고 뛰어다닌 끝에 간신히 수습할 수 있었다.
은동도 남몰래 신력을 써서 반이나 가라앉은 배를 두 척이나 파도 속에서 끌어냈다. 그러나7일에는 또 왜선 십여 척이 다가왔다. 군사들은 다시 불안해했 으나 이순신은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진군하였다. 그러자 왜선들은 다시 겁을 먹고 물러갔다.
이때 왜군은 비록 조선수군이 모조리 고기밥이 되었 다고는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왔다는 이야기에 어느 정도 긴장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바로 그 점을 노 려 일부러 맹공세를 취한 것이다. 만약 이때 왜군이 죽기살기로 달려들었다면 이순신도 대책이 없었을 터였다. 이순신은이날 왜선이 달아나는 모습을 보더 니 그날 밤에 야습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대비를 했다.
“놈들의 달아나는 모습이 질서정연한 것을 보니 퇴 각한 것도 계략의 일부임이 틀림없다. 야습이 있을 것이니 엄히 대비하라.”
은동은 설마 했으나 이순신의 예측은 귀신같이 맞아 밤이 되자 왜선들은 어지러이 총을 쏘며 달려들었 다. 다른 수군들은 모두 주춤하는데 이순신은 스스 로 자신의 전선으로 앞으로몰고 나가 직접 지자포 를 발사하여 한 척을 명중시켰다. 그에 왜군들은 겁을 먹고 네 번이나 왔다갔다 하면서 포를 쏘는데, 놀랍게도 왜선에도 대포가 실려 있는 듯 했다. 군 관들이이를 걱정하자 이순신은 껄껄 웃었다.
“아마도 노획한 포를 대강 실었을 것이다. 그러나 포란 것은 좌대가 튼튼하지 못하고 장수가 운용할 줄을 모르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겁낼 것 없다.”
결국 왜군은 이순신의 예언대로 헛되이 화약만 낭비 하다 물러나 버렸다.
9월 13일, 이순신은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에 이 상하고 괴걸한 용모를 지닌 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 한 것이다.
“아무 염려 말고 계획대로 시행하면 성공할 것이다. 이름에 은 자가 들어가는 자를 의지하면 위험하지 않을 것이다.”
이순신은 깨어난 뒤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래 서 꿈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였으나 이름에 ‘은’ 자가 들어가는 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 나 은동은 그 이야기를 법력으로 엿듣고 혼자 생각 했다.
‘용모를 보아하니 그분은 증성악신인이시구나. 성공 할 것이라 하니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이름에 ‘은자가 들어가는 자란 나를 가리키는 것 같으니, 반드시 이장군을 지켜야 하겠구나…………….’
9월 14일. 드디어 이순신의 함대는 왜선에 대한 정 보를 얻었다. 이때 왜군의 대장은 지난번에 이순신 에게 죽은 수군대장 기지마 미치노의 동생인 기지마 미치후사였으니 그는 형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나온 것이다. 이때 적세는 대략 2백여 척. 그것도 거의가 4년 동안의 휴식기에 건조한 대선들이었고, 오구로 마루를 능가하는 니혼마루(日本丸)라는 터무니없이 거대한배들도 많이 있었다.
이 배들은 삼층의, 보다 높은 누각이 달리고 벽이 두터워졌으며 그 크기는 판옥선의 한 배반에 달하 는 괴물 같은 배들이었다. 이때 이순신의 함대는 고작 열두 척에 수군은 130여명이었고, 나머지는 모조리 처음으로 병장기를 만져보는 농군과 어민들 뿐이었다. 군관들은 거의 대부분 철수하자고 하였 으나 이순신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군관들은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병법과 계략을 떠들어댔으나 이순신은 조용히 미소를 짓다가 말문을 열었다.
“계략과 술수가 많은 것은 알지만 그 꾀 자체가 장 한 것이 아니다. 쓰면 반드시 들어맞을때를 짚어 꾀를 쓰지 않으면 없느니만도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 이순신은 자신의 작전을 처음으로 밝혔다. 그것은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하는 작전이었다. 이순 신이 싸움터로 생각한 임하도 앞바다는 명량물목을 지나야 하는데, 그곳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유속 이 무서우리만큼 빨라 한 번 들어가면 배를 되돌릴 수 없는 곳이었다. 그곳까지만 왜선을 유인하면 왜 선은 방향을 잡을 수 없고 반대편으로 나아가는 조 선수군의 배는 화살같이 달릴 수 있는 것이다. 이순 신은 작전을 설명하며 덧붙였다.
“계략이나 인간의 힘보다 더 위대한 것은 자연의 힘이다.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는 장수는죽은 시체나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이순신은 모든 장수와 군관을 불러 독려했 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하면 죽는 다 했다. 또 한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 게 여긴다고 하는데, 그것은 모두 지금 우리를 이르 는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은모두 살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에 처하리라.”
드디어 9월 16일, 고작 열두 척밖에 남지 않은 조 선함대를 비웃듯, 왜장 기지마 미치후사는무려 백 삼십삼 척의 대선을 이끌고 무섭게 달려들었다. 은 동마저도 그 기세를 보고 질릴 정도였다. 은동의 법 력을 부린다 해도 겨우 배 두어 척이나 당해낼까? 도저히 상대가 될 것같지 않았다.
‘이건….. 이건 쥐와 고양이의 싸움이다. 아니야, 쥐와 늑대의 싸움이다. 말도 안 된다. 다틀렸어…….!
그러나 이순신은 침착하게 사색이 된 부하들을 냉정 히 꾸짖으며 말했다.
“적이 비록 일천 척이라도 우리 배를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동요하지 말고 있는 힘을 다해적을 쏘아 라.”
이순신은 이미 작전을 세울 때부터 모든 화포를 장 거리용인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으로 교체해 두었다. 아직 신병인 수군들이 신통치 않아 명중률은 낮았지 만, 계속하여 조선수군이 움직이지 않고 포를 쏘자 왜선은 겹겹이 에워싸기는 했으나 가까이 접근할 엄 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나 거리가 멀자 포가 맞지를 않았다. 더욱이 쏘아도, 쏘아도 왜선들은 끝이 없는 듯싶었으며 상처 를 입는 것 같지가 않았다. 조선수군의 모든 장병들 은 그것을 보고 얼굴빛이 하나같이 죽었으며, 은동 마저도 낯빛이 변했다.
그때 이순신은 과감하게 쾌속 전진하여 왜군측에 접 근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다른 배들은하나같이 눈 치를 보며 대장선이 나아가는 데도 나가려 하지 않 았다. 그것을 보고 이순신은발을 굴렀다.
“중군 김응성은 배를 돌려 무엇을 하려는가! 당장 목을 베어 효시하여야 할 것을!”
왜선의 어마어마한 선단은 조선수군의 열악한 화포 를 무릅쓰며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이순신은 즉시 급하게 중군 김응성과 거제현령 안위 (과거 이순신 의 명으로 부산성을 불태웠던사람)를 불러 꾸짖었 다.
“너희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정녕 군법에 죽고 싶 으냐? 도망친다고 어디 가서 살 수 있을성싶으 냐!”
이순신의 호통에 안위는 정신이 번쩍 든 듯했다. 안 위는 이제 단말마에 몰린 맹수 같은 형상이 되어 소리를 쳤다.
“나가자!”
이순신은 김응성에게도 고함을 쳤다.
“너는 중군장으로 멀리 피하기나 하고 대장을 구원 하지 아니하니 어찌 죄를 면하겠느냐! 당장 처형할 것이로되 정세가 급하니 우선 공을 세우라!”
그러자 김응성도 이순신의 추상 같은 호령에 정신이 나가는 듯하더니 죽기살기의 각오가 되어 돌진하기 시작했다.
김응성과 안위의 배가 무서운 기세로 앞으로 달려나가자 궁지에 몰려 눈치만 보던 다른 배들도 덩달아 최후의 발악을 하듯 소리를 쳤다.
“우와!”
“돌격!”
“가자!”
조선수군은 이제 정말로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대로 화포를 쏘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갔다. 정말 은 동도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였으니 모두는 죽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죽었다고 여기 고, 저들의 손에 자신들이 모조리 죽는다고 생각하 니 분노와 적개심 밖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그렇게 조선수군의 십여 척 남짓한 다 망가진 군선 은 발악적으로 왜군 쪽으로 몰려들었다. 전선수로는 십일 대일, 아니 병력으로 본다면 오십 대일의 싸움인 ‘명량해전’은 이렇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포를 쏘고 노를 저었다. 그러나 왜군의 배의 수효는너무도 많 았다. 배 한 척 한 척이 여러 척의 왜선에 둘러싸여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였다. 조선군은 모두 자신들이 왜군에 포위되었다고 생각하였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왜선들은 이순신의 함대가 여태까지의 전법과 달리 갑자기 근접하여 돌격하는 태세를 취하자 몹시 놀 라서 후퇴하려 했다. 그러나 후퇴하는 뱃길은 조수 가 빨라 배를 제어하지 못하여돌릴 수가 없었다. 순 식간에 대오가 흐트러졌고, 여기에 조선수군들이 미 친 듯 사이로 파고들어오니 명령조차 하나도 전달 되지 않았다.
어느새 조선수군은 아예 왜군들 사이사이로 파고들 어 총포를 마구 쏘아대었는데 비록 마구잡이로 쏘 는 포였지만 사방이 다 왜선인지라 빗나가는 것이 없었다.
“칙쇼! 키를 잡아라! 배를 돌려라! 돌려!”
기지마 미치후사는 소리를 질러댔으나 거대한 니혼 마루들과 오구로마루 등은 선회성이나 조작성이 판 옥선에 비해 훨씬 떨어졌다. 조선군, 그것도 이름을 떨치는 이순신 함대가 순식간에 파고들자 왜군은 이전의 조선군보다도 더더욱 기가 꺾여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이순신의 이름은 그토록이나 왜군들에게는 공포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었다.
더구나 조수가 갑자기 바뀌어 배가 통제불능의 상황 이 되자 왜군들은 이것도 이순신의 신통함으로 생각 했을 정도였다. 제갈량이 적벽에서 동남풍을 빌었 듯이 이순신이 조수의 흐름을갑자기 바꾼 것이라고 믿어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버렸다.
보다 못한 기지마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배를 돌 렸다. 주위의 모든 부하들은 도망치려고조수와 싸우 며 휩쓸리다가 자기들끼리 부딪치고 난장판이어서 전혀 명령이 하달되지 않았던것이다. 기지마는 냉정 하게 돌출한 두 척의 배, 안위와 김응성의 배를 노 렸다.
“저 두 척을 잡아라!”
기지마의 독려에 선창에 있던 장교들은 노군들을 마 구채찍으로 후려갈겼고 노군들은 죽을힘을 써서 방향을 선회하는데 성공했다. 한 척의 왜 소선이 거 대한 기지마의 니혼마루에 짓밟혀 깨어져 버렸으나 기지마는 상관하지 않았다.
“돌진!”
거대한 니혼마루가 일단 안위의 배로 다가들자 다 른 두 척의 왜선도 어찌어찌하여 방향을돌려 안위 의 배를 노리고 달려들었다. 안위의 배의 노군들은 노를 들어 니혼마루가 접선(接船)하지 못하도록 하 려 했으나, 거대한 니혼마루의 관성에 의해 안위의 배의 노들은 모조리부러져 버렸다.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지마의 배가 안위의 배와 접촉하자 한 무리의왜군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다급한 안위는 직접 포를 돌려 으아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 들려는 왜군들을 향해 정면에서 쏘았다. 여러 놈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방에 흩어졌지만 기지마는 급히 누각에 뛰어올라가 소리를 질렀다.
“돌격! 돌격!”
그 소리에 기운을 얻은 왜군들은 갈고리와 밧줄을 던지면서 있는 힘을 다해 안위의 배에 올라타려고 개미떼같이 달라붙었다.
안위는 사력을 다해 소리쳤다.
“나는 죽는다! 모두 나를 따라 죽자!”
곧바로 안위는 길다란 장검과 포를 쑤시던 막대를 집어들고 달라붙는 왜군들을 어지러이 쳐내기 시작 했고 곧 포수와 노군들까지 미친 듯 올라와 손에 잡 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고 왜군들을 쳐내기 시작했 다. 그것을 본 이순신은 급히 외쳤다.
“배를 돌려라! 어서!”
그러나 아무리 우수한 판옥선이라도 그리 쉽게 선회 가 될 리 없었다. 키잡이가 용을 썼으나키는 삐걱거 릴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은동은 재빨리 선창 밑으로 가서 키를 움켜잡고 용을 썼다.
“여차!”
은동이 당기자 거짓말처럼 배는 휘청하더니 제자리 에서 선회했다. 키잡이는 멍하여 정신나간 사람처 럼 은동을 바라보았으나 은동은 피식 웃으며 다시 갑판으로 달려 올라갔다.
방향을 돌린 이순신의 대장선은 곧바로 모든 화포 를 장탄하여 근거리에서 세 척의 왜선을향해 발포 했다. 그러기를 두 번, 세 번, 거대한 니혼마루였 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쏘아대는천자총통의 위력에 버티지 못하고 기어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배가 크 게 기울었다. 중심을 잃고 수많은 왜군들이 물에 떨 어졌고 이 틈을 타서 안위의 군사들은 밧줄과 갈고 리들을 미친 듯 잡아떼어 물에 던졌다.
곧이어 녹도만호 송여종(정운이 죽고 난 뒤 녹도만 호가 된 인물)과 평산포대장 정응두의 배가 합류하 여 반대편에서 포를 쏘아대자 왜선 세척이 삽시간 에 여기저기 깨어지며 불이 붙어 지옥과 같은 모양 이 되었다. 왜군들은 이순신이 대장임을 알아보고 집중사격을 가했는데,은동이 이를 갈면서 법력으로 모조리 총알을 퉁겨내 버리고 장풍을 한 방 날렸 다. 순간 왜선 한켠이 박살나면서 이순신을 노리던 왜병들은 이내 모조리 박살이 나서 고기밥이 되었 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알아볼 틈이 없을 만큼 상황은 긴박했다. 그리고 은동 자신도 몇이나 왜군 을 죽였는지 모르되 저번처럼 어쩌고저쩌고 하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은동이성장한 것도 물론이 지만, 그만큼 조선군 모두는 악에 받쳐 있었던 것이 다.
그때 기지마는 아직도 누각 위에 올라 소리를 지르 고 있었는데, 이순신의 배에 타고 있던항복한 왜인 준사(俊)라는 자가 이순신에게 외쳤다.
“저…… 저 붉은 옷이노 입은 자………… 대장이오! 대장! 마다시(馬多時, 기지마의 별명이었던듯)요!”
이 준사라는 자는 왜인이었으나 이순신에게 잡힌 후 이순신의 능력에 감복하여 이순신을 신처럼 섬겨 같 이 싸우는 자였다. 그자가 기지마 미치후사를 알아 보자 이순신은 곧 옆에 있던무상 김석손이란 자에게 외쳤다. 김석손은 원래 장사꾼이었는데 힘이 장사 에다 팔매질 등,무엇을 던지는 데에 능했다.
“저자를 갈고리로 맞추어 끌어내릴 수 있느냐?”
“해봅지요!”
김석손은 갈고리를 휘휘 돌려 기지마를 노리고 던 졌다. 아슬아슬하게 갈고리가 빗나가려는순간, 은동 이 지풍을 탁 날리자 갈고리는 다시 방향을 바꾸어 덜컥 기지마를 꿰었다.
“으아악!”
혼비백산한 기지마는 누각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 려 발악을 했다. 김석손과 몇 명의 노군이 끌어도 꿈쩍 않는 것을 은동이 슬쩍 가서 당겼다. 그러자 밧줄이 삽시간에 팅 하는 소리를 내며 당겨졌다. 놈 은 아악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허공을 날아 대장선 갑판에 털썩 떨어졌다. 그러자 준사가 얼굴을 보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그래! 마다시다!”
준사는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듯했다. 이순신이란 장수는 얼마나 신통하기에 자신의 나라대장을 이토 록 손쉽게 엮어 오는 것일까? 준사는 이순신에게 너무도 감복하여 자기 나라의대장이 잡혀왔는데도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준사가 기지마를 확인하자 이순신이 싸늘하게소리쳤다.
“이놈을 높이 들어 토막토막 잘라라!”
결국 형의 원수를 갚겠다던 기지마 미치후사는 형의 원수는커녕 이순신이 보는 앞에서 눈을번하게 뜨고 죽었다. 그것도 부하들도 뻔히 보는 가운데 높이 매달려서 참혹하게도 여기저기가 토막토막 잘려서 마침내 죽어 버린 것이다. 비록 잔혹한 일이었지만 왜군들은 자신들의 대장이 그토록 처참하게 죽는 것 을 보고는 손발이 저려 미친 듯 자기들끼리 부딪치 며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다시 마술을 부린다!”
“대장이 죽었다! 이순신에게는 못 당한다!”
“나 좀 살려라!”
이때 왜선의 피해는 31척에 달했는데, 그 중 태반 은 조선군이 직접 쏘아 부순 것이 아니라자기들끼 리 엎치락뒤치락하며 빠져나가느라 악다구니를 쓰 는 통에 전복된 것을 줍다시피하여 올린 전과였다. 한바탕 난전을 치르고 난 다음, 모든 조선수군은 기 진맥진하여 늘어져버리려 했다. 노군들도 손을 놓아 배들은 이리저리 서로 맞닿은 채 떠 다녔다. 추격을 할 기운조차도 남지 않은 것이다.
바로 그때, 이순신은 환한 얼굴로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일단 점고(考)를 하라!”
그러자 방금 지옥문까지 갔다온 안위가 헉헉거리며 외쳤다.
“조금…… 조금 쉬었다 하시는 것이…………….”
“지금 점고를 하는 것이 가장 기운이 나리라. 어서 시행하라!”
이순신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군명의 엄수라 당장 점고는 시행되었다.
“수군 김말득!”
“노군 점돌이!”
“사수 박만복!”
하나하나 점고를 하는 목소리에는 기운이 없었으나 갑자기 환호성이 일었다. 안위의 배가점고를 막 끝 낸 것인데, 안위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소 리를 질렀다.
“죽…… 죽은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전원 무사합니다!”
옆 배에서도 환호성이 일었다.
“녹도 이호선! 두 명이 조금 다쳤을 뿐입니다! 전원 무사합니다!”
“평산포 일호선! 우리 배도 그렇습니다!”
이순신이 껄껄 웃자 은동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 었다. 병사조차 거의 타지 않은 빈곤한열두 척의 배로 적선과 싸워 31척의 배를 격침시키고, 수만의 왜군을 죽인 조선군의 사망자는 단 두 명! 대장선 에 탔던 김탁(金卓)과 계돌이(戒生으로 기록됨)뿐 이었다. 그외 십여 명의 경상자와 약간의 갑판 파손 이 조선군이 입은 피해의 전부였다.
이순신이 웃으며 말했다.
“죽기를 바라고 잘들 싸워 주었다. 몸을 아끼지 않 으면 대승을 거두는 것이다. 잘들 기억하라.”
그러자 각 배에서 자신감의 환호성이 마치 폭풍처럼 일어났다. 조선수군은 기적을 이룬 것이다. 이는 세계 전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대승이었다. 선박 수로 십일 대 일, 병력으로 오십 대 일의 적. 그것도 직전 싸움에서 일패도지하였었고, 무지한 어 민과 농군을 모은병력이었다.
기습도, 매복도 아니고 정면으로 적과 맞붙어 싸운 것이며, 상대는 얼마 전 조선수군을 전멸시키고 승 승장구하던 부대였다. 그러한 적과 싸워 자신의 병 력의 세 배의 적을 수장시키고도 입은 피해는 단 두 명. 이러한 승리는 이순신말고는 그 어떤 인간 도 이루어낼 수 없을것이라고 은동은 믿었다. 은동 은 오직 몸을 떨며 이순신의 웃는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진….. 진정 명장이다. 이런 사람은………… 이런 사 람은 고금에 없을 것이다. 믿을 수가 없다….’
조선군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으나 그곳은 물살이 너무 거셌기 때문에 다시 노를 저어 당사도로 진을 옮겼다. 피해가 거의 없다는 것이 사기를 높여 지친 몸에 이런 노역을 가능케 한것이다.
다음날, 선단이 어외도에 이르렀을 때 조선수군은 놀라운 손님을 맞았다. 무려 수백 척에 이르는 조그 마한 난민들의 피난선들이 빽빽이 몰려나와 이순신 을 맞은 것이다.
“고생들 하셨수!”
“장하시우!”
피난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전선으로 다가와 자신 들도 부족할 것인 양식과 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중한 격려를 조선군에게 듬뿍 안겨 주었다. 패주 하여 빈곤했던 선단은 이제 완전 활기를 되찾고, 거의 축제 분위기를 이루었다. 피난민들도 눈물을 흘렸고, 수군들도 웃으면서도 눈물을 철철 흘렸다. 은동도 감격에 겨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데 이순신 이 지나가다은동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고마우이. 자네가 아니었으면, 내 큰일을 그르칠 뻔했네…”
그러나 은동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니옵니다, 장군님. 장군님은 정말 천하의 명장이 십니다. 정말 장군님은…….”
왜란종결자가 틀림없다는 말이 입 밖에까지 나올 뻔 했으나 운동은 간신히 억눌렀다. 그러자이순신이 말 했다.
“고맙네. 내게 무슨 능력이 있겠는가? 다들 잘 싸 워준 덕이지…..”
“옥체보중하시옵소서.”
“그래・・・……..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반드시 살아야겠 네. 보게나, 얼마나 보기 좋은가……………”
은동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라는 말에 문득 이상 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순신은 부하들과백성들이 한 데 어울려 환호하는 모습을 보며 조용히 눈물만 흘 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