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삼국지 개정신판에 부쳐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삼국지 개정신판에 부쳐


삼국지 개정신판에 부쳐

이제 벌써 마흔 해 가까이 되어가는가. 그해 이른 봄 어느 날 나는 바로 받아들기에는 망설여지고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데까지 있었 지만, 그렇다고 못 들은 척 물리치기 또한 곧 쉽지 않은 제의를 하나 받았다. 그 무렵 기세 좋던 어느 신문사로부터 받은 『삼국지연의』 연재 요청이 그랬다.

망설임은 그때 내 나이 서른넷이었고 당시로서는 문단 늦깎이로 이제 겨우 세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은 등단 사 년차라는 데서 왔다. 버젓이 ‘통속연의’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이런 책을 정색하고 우리 말로 풀어놓는 일에 내 젊은 날의 소중한 몇 년을 써도 될 것인가. 세월과 더불어 언젠가는 쇠잔해갈 내 문학적 재능과 열정을 이런 분 명치 못한 문화적 효용과 함부로 맞바꾸어도 좋은가.

그때의 걱정은 좋은 사전 가지고도 주석서 없이는 사서(四書)조차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 성 싶지 않은 않을 만큼 엉성한 내 한문 독해력이나 『주자서(書)』의 주 가운데서 이따금 눈요기한 송 대백화 한번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는 백화문에 말고는

서 비롯되었다. 아무리 내 독학과 사숙(私淑)을 넉넉하게 셈해준다 해도, 그리고 『삼국지연의』가 원전 제목에 통속通俗)이라고 못 박을 만큼 읽기 쉬운 고전문(古文)으로 쓰여 있다 해도, 그 책을 우리 말로 평역(譯)할 만하다는 근거는 내 학력이나 이력 어디에서도 찾기 어려울 터였다.

하지만 그 제안에는 앞서의 망설임이나 걱정을 덮기에 넉넉한 끌 림도 있었다. 먼저 당시 주요 일간지 문화부장의 월급과 맞먹을 정 도라는 연재 고료에다 일본 일주일, 타이완 열흘의 자료 수집 및 보 충 취재를 위한 여행 경비와 보조 인력(주로 단기 고용 통역과 그 지역 특파원) 지원 약속이 있었다. 거기다가 연재 원고 매수가 그 무렵의 일간지 평균의 두 배에 가깝고 연재 기간도 오 년 가까이 되어 그 제안의 경제적 매력을 더욱 키웠다.

그러나 그 매력을 주저 없는 수락으로 바꾸게 만든 것은 이미 여러 해 전에 고인이 되신 박맹호 회장님의 사려 깊은 충고와 권 유였다.

“이 형이 오랜 세월 지켜내야 할 문학과 이 형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도 알맞은 때에 받은 좋은 제의 같소. 띄엄띄엄 내는 베스트셀러나 근근이 발행되는 문예지 원고료 로는 그 둘을 지키고 보살피는 데 그리 넉넉하지 못할 테니. 진지한 작가도 가질 수 있는 아주 효율적인 부업 정도로 여기고 한번 해보시오. 흔치 않은 기회를 축하하고 또 뜻있는 결실을 기대해보지요.” 그 뒤 얼마간 더 뜸을 들이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그 봄이 다하기 도 전에 먼저 타이완으로 떠났다. 전해 오공 정부의 연좌제 폐지로 내게도 겨우 나라 밖으로 나갈 길이 열리기는 했으나 1983년 그때 만 해도 해외여행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에 가까웠 다. 거기다가 타이완 여행은 대륙이 아직 굳게 닫혀 있을 때라, 중국 을 전생의 아득한 고향쯤으로 여기며 꿈꾸어온 내게는 여러 가지로 새롭고 별난 기억을 남겨주었다.

그중에서도 타이중(臺中)박물관은 마오쩌둥의 용인 아래 장제스 군대의 군함에 실려 양쯔강을 타고 내려왔다는 대륙의 보물들과 고 적, 고문서로 사람을 압도하였다. 나는 거기서 어느 하루 내내 나관 중 『통속연의』의 여러 판본들을 복사해 왔는데, 기억으로는 홍치본 에서 모종강, 이탁오본을 비롯해 이립옹본, 주교본 같은 것들로 그 일부는 지금도 내 서재 구석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중심이 아직 타이완에 머물러 있던 중국 고전 출판물 국제 시장에서 이름만 듣던 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거리를 지나는 것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나는 거기서 당장 서가에 비치해둘 필요가 있는 사사(四, 『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에다 남은 17사(史, 사사에서 『남사』·『북사』까지) 대강을 갈색 타블로이드판 크기 장정본으로 샀는데, 돌아올 때 항공화물 무게 초과로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밖에 한 주일 가까운 타이완에서의 취재기간 중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나 그들에게서 받은 교훈이며 충고 같은 데도 별난 것이 많았다. 하지만 이 평역 초간본 서문이나 다른 회고 회상에서 이미 쓴적이 있어 여기서는 되풀이를 피한다.

일본 간다(神)의 헌책방 골목까지 돌며 요란을 떨고 돌아온 뒤 겨우 대여섯 달의 자료정리와 숙려 구상 기간 뒤에 서둘러 연재에 들어간 것은 다시 이듬해 초봄이었다. 그리고 사 년 반 남짓 지난 1988년 초에 신문 연재를 끝내고, 출판사의 편집 교정 출판 과정을 거쳐 그해 초여름에 초판 평역 삼국지가 전 10권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초간본 『평역 삼국지』 서문을 쓸 때 삽십 년 뒤에 내가 또 다시 ‘개정신판 서문’을 쓰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삼국지연의』가 그 나라 말(또는 당대 일상 언어)로 번역, 평역, 편술, 재구성 등으로 엮여 시대에 따라 판본이 바뀌며 읽히는 동양 세 나라를 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얼핏 계산한 한 판본의 수명은 대략 길어야 삼십 년 쯤 되었다.

중국 현대어로 바뀐 『삼국연의도 그렇지만 여러 대 전해온 일본 의 번역 번안 판본들도 삼십 년을 넘긴 것은 거의 없어 보였고, 가장 많이 읽혔다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도 한 이십 년 지난 그때 는 시들해진 듯했다. 오히려 새로 나온 지 오래지 않은 진순신의 『비본 삼국지』가 일본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았고, 심하게는 이제 삼국지가 그 시대 중국의 나라별 인물별 평전(評傳) 형태로 쪼개져 나오는 경향이 시작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비슷해서 해방 뒤 박태원을 비롯해 수십 종 삼국지가 나왔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때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80년대 초반 무렵 쉽게 구할 수 있던 것은 김광주 역 문고판 과 『김구용 삼국지』, 『박종화 삼국지』 등이 있었는데, 시중 서점에서 의미 있는 판매고를 올리고 있던 것은 『박종화 삼국지』 정도였다. 그것도 출간 십오년이 다 돼가 벌써부터 매대 구석으로 몰려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제 초판 출간 삼십 년이 훨씬 넘은 『평역 삼국지』 개정 신판에 서문을 새로 쓰게 되니 그 감회 어찌 그리 만 만할 수 있겠는가.

전판의 개정 윤문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살펴본 것은 그간 내 『삼 국지』에 쏟아진 평이었다. 초반에는 우호적인 평이 많았으나 갈수록 비판이 늘어가고 나중에는 비난과 혹평까지 쏟아졌다. 대개는 나도 놀랄 만큼 폭발적인 내 『평역 삼국지』 판매부수와 비례했는데, 주로 그 뒤 새로 나온 번역판들과 서평에 곁들여진 것이 많았다. 대개는 오류나 무지를 지적하는 형태로 새로 내는 자기네 판과 대비시키기 위함인 듯했지만 터무니없는 비방은 아니었다.

그다음은 나도 놀랄 만큼 많은 삼국지 마니아들의 비평과 질정이 었다. 그들은 대개 일생 열 번 이상 여러 판본을 되풀이 읽으면서 나 름의 사유와 의식을 갈고 닦은 이들로서 때로는 긴 편지로 때로는 분개를 참지 못한 격한 전화로 나의 오류 또는 편향을 꾸짖었다. 그 중에서 어떤 분들은 삼국지 연구가를 자처할 만큼 식견을 키운 이들 도 있어 자주 나를 뜨끔하고 민망스럽게 했다.

그런 이들 가운데 한문을 수천 년 자신들의 글자로 쓰고 현대 백 화를 표준어로 살아온 두 사람의 견해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한 사 람은 옌볜 교포로서 거기서 나고 자라고 배우고 읽어 삼국지 전문가가 된 이동혁이란 젊은 동북 저술가였고 또 한 사람은 중국 고전문 화를 현대적으로 잘 풀이해 수백만 독자를 누렸다는 이중톈(易中天) 이란 샤먼대학 교수였다. 앞 사람은 두툼한 책 한 권으로 내 불학과 무지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비웃어 나를 오래 부끄럽고 비참하게 만 들었다. 뒤 사람은 짤막하지만 어리둥절해할 만큼 과분한 평가로 또 오래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2000년대 초 중국 CCTV에서 삼국지 강의로 몹시 인기를 누린 이중톈 교수는 한국에서의 어떤 대담에서 내 『삼국지』 평역을 ‘고명 (高明)하다’는 두리뭉실한 언급으로 넘어갔는데, 한국어를 배워 읽었 을 리 없는 그이고 보면 지나가는 덕담이었음에 분명하다. 결과로 보면 그렇게 자신만만하고 통렬하게 내 천학淺學)을 짚어준 우리 교포 전문가 쪽이 내게 훨씬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그 뒤 내 『삼국 지』를 손볼 기회가 올 때마다 제일 먼저 그의 지적과 질정을 떠올리 고 손을 보았다.

이제 그런 개정 신판 교정과 감수도 끝나고 다시 서문을 쓰는 감 회가 어찌 지난 세월에만 머물 것인가만 새 판에 거는 부질없는 자 부나 후회, 소망과 기원을 길게 늘어놓는 일이 이제 와서 또 무슨 소 용이랴. 이쯤에 서문이 더 길어지는 것을 그친다.

2020년 2월 15일 부악 기슭 蒼友坡에서 

李文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