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38권 23화 : 기적은 2번도 일어날 수 있다 – 1
기적은 2번도 일어날 수 있다 – 1
알카사스 측은 언데드의 대량 발생을 내심 반기고 있었다.
상당한 피해를 입은 건 사실이지만, 얻게 될 것에 비한다면 그건 사소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놈의 드래곤 때문에 눈에 거슬리는 사막민족을 건드리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걸 깨끗하게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나타난 것이다.
모르는 척 가만히 놔두면 사막 전체는 언데드로 꽉 찰 것이다.
사막민족의 씨를 완전히 말려버리고.
물론 6만 정예 대군이 괴멸당한 게 뼈아프긴 했지만, 그건 그만큼 언데드 세력이 막강하다는 증거였다.
그렇기에 알카사스 측에서는 가만히 놔둔다면 6개월 이내에 사막민족 대부분이 사라지고, 성이나 요새에 자리 잡은 소수만이 살아남을 것으로 추측했다.
그런 자들 역시 언데드 떼에 포위당한 상태일 테니 식량이 다 떨어지는 몇 년 후에는 모두 죽임을 당하리라.
알카사스가 전면에 개입하는 건 그때가 될 것이다.
평화롭게 살고 있는 사막민족을 몰살시킨 사악한 언데드들을 멸해야 한다고 하면 명분도 좋다.
알카사스가 내심 바라는 건 신성 아르곤 제국의 지원이었다. 언데드를 극도로 증오하는 만큼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대규모 병력을 파견해 줄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르곤은 대사막과 워낙 멀리 떨어져 있기에 땅덩어리를 차지하려고 할 리도 없으니 얼마나 좋은가.
다른 곳이라면 공간이동 마법진이라도 설치해서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사막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
식민지 같은 걸 유지할 수가 없는 지역인 것이다.
최상층부의 지시에 따라, 모든 계획은 그것을 중심으로 세워지고 수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작전관이 있었다. 군대를 운용하는 모든 복잡다단한 전략들은 그 방면의 전문가인 작전관의 관할이었다.
지금껏 무공 수련만 하느라 평생을 쏟아부은 기사들에게 전략과 전술을 맡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언데드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선 구성에 대한 작전관의 보고를 받던 그루시아 후작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참, 용병단 쪽에서 파견받은 마법사가 있었잖은가. 이름이 뭐였더라…………?”
“아, 랄프 디겔 마법사 말씀이시군요.”
작전관이 곧바로 마법사의 이름을 떠올리는 걸 보면, 상당히 도움이 되고 있는 모양이라고 그루시아 후작은 생각했다.
“그 마법사 이름이 랄프 디겔이었나? 그래, 어떻던가. 수석 마법사가 적극적으로 권했기에 무리해서 끌어들이긴 했는데………….” 작전관은 환한 얼굴로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쩐지, 수석 마법사님의 추천이 있으셨군요. 정말 탁월한 안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군 운용에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 어떻게 말인가?”
“방어선 전방 곳곳에 마법진을 촘촘히 설치하여 언데드가 접근하면 알람을 울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요충지에는 이미 설치를 끝냈고, 지금은 기타 다른 여러 지역에도…………….”
작전관의 말에 그루시아 후작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알람 마법이라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잖은가?”
기사단이라면 적의 기습을 방지하기 위해 주둔지 주변에 촘촘히 알람마법망을 설치해 두는 건 상식이기 때문이다.
공간이동을 활용한 기습공격에 능한 집단이기에, 알람마법망을 폭넓게 펼쳐두지 않는다면 언제 기습을 당해 전멸당할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사막 수십 킬로 앞까지 알람마법진을 설치하고, 또 그 신호를 수신하는 마법진을 설치하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마법사분들이 말씀하시더군요. 마법진에 저 정도로 능숙하다면 왜 타이탄 생산시설에 들어가지 않았는지 의아하다는 반응들이었습니다.” 작전관의 설명을 듣고서야 랄프 디겔의 활용법을 이해한 후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호오, 그 정도였던가. 용병단에 그냥 놔두기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로군.”
“그렇습니다, 각하. 그 마법사만 영입할 수 있다면, 기사단의 전술 운용 폭이 획기적으로 넓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야밤에 몰래 이동하는 언데드의 움직임을 수십 킬로 거리에서 미리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작전관의 말에 동의하며 그루시아 후작은 투덜거렸다.
“마법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진 마법사들이 모두 타이탄 생산시설로 흡수되는 건 정말 문제가 있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나. 타이탄은 곧 국가의
힘이니까 말일세.”
그건 사실이지만, 알카사스의 경우 타이탄이나 엑스시온을 외국에 수출까지 하고 있었기에 마법진에 능한 마법사의 수요는 타국에 비해서
월등하게 높았다.
알카사스에 타국보다 마법사가 많은 건 사실이었지만, 쓸 만한 마법사를 구하기 힘들다는 건 다른 나라들과 똑같았다.
“그 문제는 수석 마법사와 의논을 좀 해봐야겠군.”
“참, 이번에 정보부에서 보내온 정보에 따르면, 대사막 중부지역에서 라시드라는 존재가 나타나 빠른 속도로 세력을 규합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작전관의 보고에 그루시아 후작은 코웃음을 쳤다.
“뭐, 그것들도 멍하니 앉아서 죽기는 싫을 테니 뭉치기는 하겠지. 그건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잖은가.”
“그게・・・・・・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대체 무슨 말인가? 사막 부족 놈들은 결속력이 없어서 뿔뿔이 흩어져 사는 건 지금까지의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는데 말일세.”
“이번 건은 좀 다르게 보셔야 할 듯합니다. 왜냐하면 이번 세력의 중심이 되는 라시드는 사막민족에게 있어서 아주 특별한 호칭이니까요.” 침중한 작전관의 말에 그루시아 후작의 얼굴이 살짝 변하였다.
“특별한 호칭이라……………?”
“예. 라시드라는 건 바르게 인도된 사람이라는 말로서, 신께서 보내주신 구세주라는 의미가 짙다고 볼 수 있습니다.”
“흐음~, 쉽게 말해 종교적 지도자가 가질만한 호칭이란 말이지?”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신성 아르곤 제국이 보여주고 있듯, 종교 집단이 지니고 있는 광기는 정말 대단하니까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 상대 역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달려드는 광기 따위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 언데드라는 게 문제지. 우리 쪽 6만 대군을 하룻밤에 전멸시킨 놈들이야. 종교의 힘에 의지한다고 해봐야 그 한계는 곧바로 드러나게 되어 있어.”
작전관은 그루시아 후작의 반론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 말씀이 틀린 건 아니지만, 언데드라는 변수가 이번에는 아주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생존하려면 뭉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요. 만약 적이 같은 인간이라면 유불리를 따져 배신자들이 나올 수도 있겠습니다만, 대화 자체가 통하지 않는 마물이다 보니 세력 규합이 더욱 가속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흐음, 그건 그럴 수도 있겠군.”
잠시 고심하던 그루시아 후작이 입을 열었다.
“귀관의 판단이 그렇다는 말은, 정보부의 의견은 아니라는 거지? 그쪽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그루시아 후작의 질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정보부에서도 새롭게 급부상하고 있는 라시드라는 인물에 대한 조사를 안 해봤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라시드라는 인물이 있는 곳이 사막 중심부다 보니 정보 수집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주변에 언데드까지 대량으로 출몰하고 있다
“보니 ・・・・・・.”
그루시아 후작의 미간이 주름을 긋기 시작한다.
전쟁 발발 이후 살아남은 사막 부족이 뭉쳐서 저항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하지만 정보부에서 라시드라는 인물에 대해 예의 주시하며 정보 수집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예상외로 적잖은 규모로 뭉쳐서 저항하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저항해 봐야 얼마 지나지 않아 전멸해 버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반적인 언데드라면 사막민족의 능력이라도 충분히 대적이 가능했다.
하지만 샌드웜이나 거대전갈, 거대지네, 초대형 도마뱀 종류, 사막사자와 같은 초대형 육식동물들…………. 이런 게 섞여 있는 언데드 떼를 토벌하려면 최소한 그래듀에이트급 기사 정도는 있어야 한다.
언데드 떼와의 전투에서 323정찰조가 막심한 피해를 입고 도주해야 했을 정도니, 일반 병사들은 아예 대적이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링카 영지의 6만 대군이 하룻밤새에 전멸당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막 부족 따위가 언데드와의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고?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라시드, 인도된 사람이라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작전관은 그자가 종교적인 인물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지만, 그루시아 후작의 생각은 달랐다.
‘인도된 사람. 즉,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왔다는 말이잖아. 설마, 서쪽 대륙에서 은밀히 도와주고 있는 건가?
그루시아 후작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상념이었다.
323정찰조에 막대한 피해를 안겼을 정도니, 사막민족의 전력 따위 아무리 모여 봤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건 뻔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뭔가 외부의 도움이 있다는 말이다. 최소한 타이탄 1기 이상의……….
‘참?! 그러고 보니 도망친 라이 녀석도 타이탄을 가지고 있었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루시아 후작은 작전관에게 말했다.
“알겠네. 또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바로 알려주도록.”
“명심하겠습니다, 각하.”
군례를 올리고 나가려는 작전관에게 그루시아 후작이 말했다.
“나가는 길에 클리프를 불러주게.”
“예, 각하.”
라이가 타이탄을 가진 채 탈영했다는 건 극비에 부치고 있었다.
이런 치욕적인 사건이 외부에 알려지면 자칫 그루시아 후작의 목까지도 위태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라이가 가진 타이탄은 보급품도 아닌, 우연히 노획해 온 타이탄이다.
아직 상부에 보고조차 되지 않은 상태였기에 후작은 재빨리 타이탄 노획 건을 아예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작전관의 말을 듣던 그루시아 후작은 왜 갑자기 죽은 라이가 떠올랐는지 모를 일이다. 만약 라이가 또다시 살아남았다면 그루시아 후작의 입지가 아주 곤란해지는 것이다.
라이가 죽은 것도 이미 4개월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인데……………
라시드라는 단어의 의미를 듣고 보니, 라이가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라이만큼 그 이름에 어울리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기사단 내에서라면 어리고 경험도 없는 애송이에 불과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는 그래듀에이트다. 범인과 비교한다면 초인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그런 존재가 그것도 타이탄까지 1기 보유한 채 순박한 사막 부족들 사이에 들어간다고 생각해 보라. 굳이 타이탄을 꺼낼 것도 없이 어지간한 언데드 따위 간단히 박살내 버리고 영웅으로 추앙받을 게 뻔하지 않겠는가.
만약, 작전관도 라이가 사막으로 탈출했다는 걸 알았다면 후작과 비슷한 결론을 내렸겠지만, 자신의 치부가 밖에 알려지길 원치 않았던 후작은 라이의 탈출 사실 자체를 지워버렸다.
라이는 검술 탓에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 덕분에 후작이 정보조작을 하는 건 아주 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