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9화 : 걷히지 않는 어둠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9화 : 걷히지 않는 어둠


걷히지 않는 어둠

황건의 난은 부패한 한나라 제실(帝室)에 대한 하늘의 경고였다. 그러나 그 끔찍한 경고를 받고도 영제는 여전히 암우(暗愚)와 혼탁 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 한 예가 황건의 난에 공을 세운 이를 가리 고 그에 따라 상을 베푸는 일에서 보여준 공정치 못한 처사였다. 다 시 환관들에게 기울어져 그들의 말을 따른 탓이었다.

주준은 워낙 드러난 장수라 거기장군(車騎將軍)에 하남윤(河南) 이 되었고 손견도 이미 조정에 알려진 터라 별군사마(別軍司馬, 독립 여단이나 전투단의 지휘관격)가 되었다. 그러나 주준이 표를 올려 누누 이 그 군공을 아뢰었건만 유비에게는 관작은커녕 비단 한 자투리 상 으로 내려오지 않았다. 그를 위해 힘써줄 만한 이도 조정에 없었거 니와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칠 만한 주변도 재물도 유비에겐 없었던 탓이었다.

날이 오래되어도 조정에서 아무런 기별이 없자 유비와 관우, 장비 삼형제의 마음은 점점 어둡고 무거워져갔다. 무엇보다도 큰일은 함 께 이끌고 온 오백 용사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었다. 싸움터에서야 관군의 군량을 빌기도 하고 노획한 적의 곡식과 돈으로도 어떻게 변 통이 되었다 하지만 평온한 도성에서는 나라에서 내리지 않는 한 그 들을 먹이고 입힐 길이 없었다. 황보숭과 주준 등 싸움터에서 낯을 익힌 장수들에게 간청하기도 하고, 다시 중랑장으로 돌아와 있는 옛 스승 노식에게 빌기도 해서 그럭저럭 달포는 끌어왔어도 앞일이 막 막했다.

그렇다고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껏 공 을 이루고도 다시 탁현 저잣거리의 건달로 되돌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운 오백 용사들 또한 빈손으로 돌려 보낼 수는 없었다.

“까짓거 다 때려치우고 돌아갑시다. 이렇게 썩어빠진 놈의 조정에 벼슬해본들 무슨 소용이겠소?”

장비가 몇 번이나 그렇게 분통을 터뜨렸으나, 그때마다 유비가 대 답이 궁한 대로 장비의 노기를 구슬러 가라앉히는 것도 그 때문이 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즐겁지 아니한 마음으로 낙양 거리 를 거닐고 있던 유비는 우연히 수레에서 내리는 낭중 장균(張鈞)을 만났다. 유비보다는 손위였지만 같이 노식의 문하에서 공부했던 적 이 있어 둘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현덕이 낙양에 웬일인가?”

한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끝에 장균이 초라한 현덕의 행색 을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작은 공으로 나라의 보답을 구하는 것은 군자의 도리가 아닌 줄 알지만, 딸린 수하들의 간절한 바람을 외면치 못해 이렇듯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비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간에 있었던 일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 고 장균에게 상세히 일러주었다. 듣고 난 장균은 몹시 놀라는 눈치 였다.

“현덕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렇다면 자네들의 공 이야말로 군공의 으뜸에 들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낭중인 나조차 자네의 이름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기막힌 노릇일세. 또 십상시 (常侍) 놈들이 장난을 친 것임에 틀림이 없네. 자네의 공을 부러 숨기고 누군가 뇌물을 바친 작자에게 자네에게 내릴 벼슬과 상급을 빼돌려버린 것일세.”

그러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염려 말고 돌아가 있게. 내 불원간 폐하께 직접 아뢰어 뒤틀린 것은 바로잡아보도록 하겠네.”

유비에게는 천금의 도움보다 더 큰 위로였다. 유비는 그 길로 돌 아가 그 기쁜 소식을 두 아우에게 전하고 다시 조정에서 기별이 오 기를 지긋이 기다렸다.

한편 장균은 유비와 헤어지자마자 똑바로 수레를 몰고 궁궐로 달 려갔다. 그리고 황제에게 뵙기를 청한 뒤 간곡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지난날 황건의 무리가 난리를 일으킨 것은 모두 십상시가 뇌물 을 받고 벼슬을 팔아 높은 자리를 도둑질한 데서 비롯됐습니다. 자 기들과 친하지 않으면 쓰지 않고, 원수를 맺지 않는 한 죄를 지어도 죽이지 않으니, 그 부당함이 마침내 천하의 큰 난리를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 십상시의 무리는 조금도 회개함이 없이 다시 사람의 장막으로 폐하를 둘러싸 성총을 가로막고 있사옵니다. 공이 있는 자라도 뇌물이 없이는 그 공을 폐하께 알릴 길이 없고, 오히려 하찮은 공을 세운 자가 뇌물을 바쳐 큰 벼슬을 얻으니, 실로 사직을 위해 근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폐하께서는 마땅히 저 간악한 십상시의 목을 베시어 남교(南郊)에 높이 매다시고, 천하에 두루 포 고를 내시어 공이 있는 이를 무겁게 상 주신다면 사해(四海)가 절로 맑고 조용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장균의 그같이 곧고 바른 말은 영제를 감동시키기에 앞서 십상시의 귀에 먼저 들어갔다. 일제히 달려 나와 오히려 장균을 참소 했다.

“낭중 장균이야말로 간사한 말로 그 주인을 속이는 자이옵니다. 폐하, 부디 헤아려 들으시어 거짓을 참으로 여기지 마소서.”

원래가 바른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다. 거기다가 흠뻑 정을 쏟 고 있는 십상시가 일제히 내달아 그렇게 말하니 영제는 대뜸 영을 내려 무사들로 하여금 장균을 끌어내게 하였다.

간신히 장균을 끌어내어 당장의 화는 면했지만, 각기 한 짓이 있 는 터라 십상시들도 마음이 편치 못했다. 저희들끼리 가만히 모여 의논을 맞추었다.

“이번 일이 생긴 것은 반드시 황건의 난리에 공을 세우고도 벼슬 을 얻지 못한 자들이 있어 그 원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대로 두면 또 다른 장균이 나타나게 될 터이니 지금부터 그런 자를 찾아 늦기 전에 적당한 벼슬들을 주어 보내세.”

그리고 새삼 논공행상(論功行賞)을 추가해 불평이 있음직한 이들 에게 작은 벼슬을 내리게 했다. 덕분에 유비에게도 중산부(中山府) 안희현(縣)의 현위) 자리가 돌아왔다.

“우리가 겨우 현위 자리나 하나 얻어 걸리자고 반 년씩이나 목숨 을 걸고 싸웠단 말이오? 또 나와 관우 형은 참는다 쳐도 함께 고초 를 무릅쓰고 싸워온 저 오백 용사들은 어떻게 하시겠소? 내 말대로 때려치우고 돌아갑시다. 차라리 어디 목 좋은 곳에 산채나 여는 게 백배 낫겠소.”

장비가 다시 그렇게 펄펄 뛰었으나 유비는 말없이 그 벼슬을 받 았다. 현위쯤은 예전에도 마음만 먹었으면 따낼 수 있었던 자리여서 서운한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뒷골목 유협 세계의 어둠에 묻혀 세월을 낭비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낮은 대로 밝고 떳떳한 관리로서의 길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유비는 몇 군데 지인에게 변통한 노자를 약간씩 나누어주고 뒷날 을 기약한 뒤 탁군에서 데려온 의군들을 돌려보냈다. 그리고 기어이 떠나지 않으려는 스무남은 명의 장정과 관우, 장비 두 아우만 거느 린 채 임지인 안희현으로 향했다.

안희는 중산부의 작은 고을에 지나지 않았으나 부임한 유비는 열 성을 다해 정사에 임하였다. 한 달이 안 돼 유비의 이름은 고을 백성들이 한결같이 떠받드는 이름이 되었다. 터럭만큼도 백성들의 이익을 해하는 일이 없고, 오히려 부역과 세금을 줄이는 데만 힘을 쏟으 니 오랫동안 탐관오리에 시달려온 백성들에게는 그런 유비가 고맙 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탁군으로 돌아가겠다고 펄펄 뛰던 장비와 말은 안 해도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던 관우도 차츰 유비의 뜻하는 바를 따라주었 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침상에서 잠을 자며 극진한 정으 로 대하는 유비를 쓸데없는 불평으로 괴롭힐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 다. 오히려 전보다 더욱 유비를 공경하여 형으로라기보다는 주인으 로 모셨으니, 비록 그가 여러 사람과 함께 앉아 있을 때라도 관우와 장비는 그 등 뒤에 호위하여 서 있기를 마다 않았는데, 온종일이 되 어도 게으른 빛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유비가 안희현에 부임한지 넉 달도 채 차지 않을 때였다. 갑작스레 괴이한 조정의 조서가 내려왔다.

‘이번 황건의 난에 군공을 세워 장리(長吏)에 이른 자 수없이 많 다. 그런데 짐이 듣기에 개중에는 세운 공도 없이 뇌물로 벼슬을 산 자가 있다 하니 이는 용서할 수가 없다. 마땅히 그를 가려내어 벼슬 을 떼고 공 있는 자에게 그 벼슬을 돌리리라.’

유비로서는 얼른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이었다. 오히려 피해자에 가 까운 자신에게 그런 조서가 내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의아로운 마 음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난데없는 독우(督)의 행차가 안희현에 이르렀다. 독우는 자사刺史)에 속한 일종의 감찰 관리로서 주로 현리(縣吏)의 비위를 살피는 자리였다. 유비로서는 바로 상관이 되니 달 려 나가 맞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 못날수록 쥐꼬리만한 권력만 잡으면 턱없이 우쭐대는 법 이다. 그 독우의 사람됨이 바로 그러해서 눈앞에 사람이 없었다. 유 비가 성 밖까지 나가 맞아들이며 극진히 예를 올렸건만 독우는 말 위에 앉은 채 오직 말 채찍을 들어 답례를 대신할 뿐이었다.

이를 본 관우와 장비는 몹시 노했다. 당장에 말에서 끌어내려 허 리를 꺾어주고 싶었지만 두 아우의 성질을 아는 유비의 엄한 눈길에 간신히 화를 억눌렀다.

비록 유비를 알아볼 만한 안목은 없더라도 그 독우에게 조금이나 마 조심성이 있었더라면 그 자리의 심상찮은 공기는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손에 쥐어진 하잘것없는 권력에 완전히 취해 있던 그는 갈수록 더했다.

현의 역관에 이르렀을 때였다. 독우는 스스로 천자라도 된 듯 남 쪽을 보며 높은 자리에 앉고 유비는 계단 아래 시립(立)하여 서게 했다. 그리고 한동안 거드름을 떨며 유비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 었다.

“유(현위는 어디 출신인가?”

“비는 중산정왕(中山靖)의 후예로, 탁군 탁현에서 왔습니다.”

유비가 공손히 대답했다. 독우가 왠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한층 엄하게 물었다.

“그렇다면 무슨 공으로 이곳의 현위에 오르게 되었는가?”

“황건적을 무찌르는 서른 번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약간의 공이 있다 하여 조정에서 내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유비는 의군 일으킨 일에서부터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독 우는 유비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큰소리로 꾸짖기 시작했다. 

“듣자듣자 하니 네놈이 너무하는구나. 앞서는 황친(皇親)임을 사 칭하더니 이제는 군공까지 꾸며대? 방금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찾 고 있는 자가 바로 너 같은 자가 아니고 누구겠느냐? 마땅히 위에 고하여 네놈이 도둑질한 벼슬을 떼게 하리라.”

실로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유비는 하도 기가 막혀 무어라고 변 변히 대꾸해보지도 못하고 역관을 물러나왔다.

현청으로 돌아와 다시 곰곰 생각해보았지만 벼슬살이가 얼마 되 지 않은 유비로서는 독우의 그 같은 생트집이 무엇 때문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유비는 오래된 현리들에게 물어보았다. 그 중에 하나가 미미하게 웃으며 귀띔해주었다.

“독우가 공연히 위세를 부리며 트집을 잡는 것은 틀림없이 뇌물 을 바라서일 것입니다. 뇌물로 구슬리십시오.”

듣고 난 유비가 한탄했다.

“내가 백성들로부터 아무것도 거둔 것이 없는데 무슨 수로 뇌물 에 쓸 재화가 있겠소?”

사실이 그러했다. 봉미(奉) 몇십 석 나오는 것으로는 두 아우와 나누어 쓰기에도 빠듯하고, 그렇다고 달리 백성들에게서 우려낸 것 도 없으니 유비에게 재물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하릴없이 독우의 처분만 기다릴 뿐이었다.

밤이 지나도록 유비가 뇌물을 바치지 않자 독우는 이튿날 날이 밝는 대로 자신이 데리고 온 자들을 시켜 유비가 손발로 부리는 현 리부터 잡아들였다. 그 현리를 문초해 유비의 죄를 찾으려는 수작이 었다.

그러나 아무리 매질을 한다 해도 없는 유비의 죄가 나올 리 없었 다. 어떻게든 유비가 백성들을 괴롭혀 재물을 빼앗았다는 자백을 얻 어보려 했지만 현리는 끝내 그런 독우의 뜻을 따라주지 않았다. 독우 의 언성이 높아짐에 따라 애매한 현리만 초죽음이 되어갈 뿐이었다. 역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 같은 일은 곧 유비가 있는 현청에 까지 들려왔다. 그림자처럼 유비를 시립하고 있던 장비가 먼저 호랑 이 수염을 빳빳이 곤두세우며 소리쳤다.

“독우 제놈이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내 그놈의 골통을 부숴놓고 와야겠소.”

관우도 익은 대춧빛 같은 얼굴이 더욱 불그레해지며 장비의 하는 양을 조금도 말리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현덕은 여전히 엄한 목소 리로 그런 장비를 꾸짖었다.

“독우가 비록 자사의 속관(屬)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 크게 보면 그 또한 성상(上)의 명을 받드는 신하다. 그를 죽이고 네가 살아남 기를 어찌 바라느냐? 모두 이 형에게 맡기고 너는 물러가 있거라.” 

그런 다음 유비는 역관으로 찾아가 독우에게 보기를 청했다. 어떻 게든 죄 없이 매질을 당하고 있는 현리를 구해주고 싶어서였다. 그 러나 독우는 역관을 굳게 닫아걸고 유비를 안으로 들여지조차 아니했다.

몇 번이나 거듭 만나기를 청했으나 독우가 끝내 만나주지 않자 유비는 조용히 현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은은한 분노에 못지않게 가슴 깊이에서 치미는 슬픔이 있었 다. 조상들이 힘들여 일으킨 한 제국의 치유할 길 없는 상처를 보고 있는 데서 느껴지는 슬픔이었다.

한편 유비의 꾸중을 듣고 홧김에 낮부터 술을 퍼마신 장비는 취 한 가운데도 일의 결말이 궁금해 말을 타고 역관 쪽으로 가보았다. 난데없이 역관 앞에서는 오륙십 명의 늙은이들이 모여 슬피 울고 있 었다. 이상히 여긴 장비가 그 까닭을 묻자 늙은이 하나가 나서서 울 먹이며 대답했다.

“독우 나리께서 현리를 핍박하여 우리 유공(公)을 해하고자 한 다기에 우리가 고을 백성들을 대표하여 등장(狀)을 온 것입니다. 그러나 독우 나리는 역관 문을 닫아걸고 우리를 들이지도 않으니 애 석하고 분해서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백성들이라고 눈과 귀가 없을 리 없었다. 드러내놓고 말은 안해도 독우를 원망하는 기색이 완연했다.

고을 늙은이들로부터 그 같은 말을 듣자 억지로 참고 있던 장비 의 분통이 일시에 터졌다. 대뜸 고리눈을 부릅뜨고 이를 부드득 갈 며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굳게 잠겨 있던 역관의 문은 장비의 바윗덩어리 같은 한 주먹에 박살이 났다. 문 안에서 지키고 있던 독우를 따라온 아랫것들이 어 찌 막아보려 했으나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몇 명 잡히는 대로 마당에 태질을 치니 나머지는 말 그대로 얼이 빠지고 넋이 흩어진 듯하여 도망치기에 바빴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 없어지자 장비는 똑바로 후당으로 뛰어들었다. 독우가 마루 높이 앉아 형틀에 매달린 현리에게 거짓 죄를 씌우고 있는 중이었다.

“어떤 놈이냐? 누가 감히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에 훼방을 놓으려 드느냐?”

독우는 노기가 뻗을 대로 뻗어 호랑이 수염을 고슴도치 털처럼 빳빳이 세우고 달려드는 장비를 보고 낮이 핼쑥해졌으나, 그래도 아 직 주위에 여남은 명 남은 종자들을 믿는 것인지 제법 호통으로 나 왔다.

장비는 더욱 노기가 치솟았다.

“백성을 해치는 이 도둑아,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한마디 큰 소리로 꾸짖고는 다짜고짜로 독우에게 덮쳐갔다. 주위 에 남아 있던 독우의 졸개들이 분분히 창칼을 뽑아들고 막아섰지만 대문께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림없는 일이었다. 뜨거운 차 한잔을 마 실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저마다 대가리가 터지고 콧등이 깨어진 채 후당 좁은 뜰에 즐비하게 드러눕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꼴을 본 독우가 놀라 달아나려고 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장 비의 솥뚜껑 같은 손이 독우가 쓴 관을 날리고 이어 쇠고리 같은 다 섯 손가락이 독우의 머리채를 우악스레 감아쥐었다.

“장군, 자, 장군, 살려주시오.”

그제서야 독우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들바들 떨며 용서를 빌 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장비는 한마디 대답도 없이 독우의 머리채를 당겨 마루에서 끌어내린 뒤 그대로 역관을 나와 현청 앞까지 끌고왔다. 신발은커녕 미처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질질 끌고 왔으 니 독우의 몰골이 성할 리 없었다.

마침 현청 앞에는 말을 매어두는 참죽나무 말뚝이 있었다. 장비는 독우를 거기다가 꽁꽁 묶은 뒤 곁에 있는 버드나무에서 회초리를 한 줌 꺾어 들었다.

“이놈, 너도 한번 맞아보아라.”

장비는 그런 꾸짖음과 함께 독우의 허벅지와 종아리 어름을 후리 기 시작했다. 구경꾼이 어느새 빽빽이 둘러섰지만 아무도 말릴 엄두 를 못 냈다.

“잘못했습니다. 장군님, 부디 살려만 주십시오.”

이제 독우는 체면이고 뭐고 차릴 여유도 없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빌었다. 그러나 성난 장비는 들은 체도 않고 매질을 계속했다. 잠깐 사이에 십여 개의 버드나무 가지가 부러져나가고, 군데군데 찢긴 독 우의 바지에는 벌겋게 피가 배어 나왔다.

현덕에게 그 소식이 들어온 것은 드디어 마음을 정한 그가 현위 의 도장과 띠[印綏]를 챙겨들고 막 현청을 나서려는 때였다. 벼슬을 내주고라도 부리던 구실아치[吏]를 구하려는 생각에서였다.

“큰일났습니다. 장(張)장군께서 독우 나리를 매달아놓고 심히 매 질을 하고 있습니다.”

현청의 일꾼 하나가 헐레벌떡 들어와 그렇게 알렸다. 현덕이 놀라 달려가보니 과연 그랬다.

“익덕, 이게 무슨 짓이냐?”

“이런 놈들이 바로 백성을 해치는 도적이오. 내 오늘은 이놈을 때 려죽이고 말겠소.”

엄한 유비의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장비가 씨근대며 대답했다. 그 대로 두면 정말로 독우를 때려죽일 것만 같았다.

“현덕 공, 부디 나를 구해주시오.”

그때는 이미 용서를 빌 기력도 없이 애처로운 비명만 지르던 독 우가 현덕을 보고 눈물로 애걸했다. 그 꼴이 위세를 부릴 때보다 한 층 밉살스러웠지만, 현덕은 원래가 너그럽고 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급히 장비를 꾸짖어 매질을 멈추게 했다. 이때 진작 소식을 듣고도 모른 체하던 관우가 뒤늦게야 나타나 현덕에게 말했다.

“형님께서는 이번 황건의 난에 큰 공을 수없이 세우셨으나 돌아 온 것은 겨우 현위라는 미관말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도 저 독우 같은 못된 무리가 있어 이처럼 욕을 당하시니 참으로 기막힌 노릇입니다. 원래 가시덤불에는 봉황이 깃들이지 아니하는 법입니 다. 제가 보기에 이곳은 형님이 계실 곳이 못 됩니다. 차라리 저 못 된 독우를 죽여 탐관오리를 징치(懲治)하는 본보기를 보이신 뒤 벼 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곳에서 따로이 원대한 앞날을 도모해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관우의 말투는 결코 일시적인 분함에서 나온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장비가 저질러놓은 일 또한 없던 일로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어버 렸다. 거기다가 현덕 자신도 인수(印綏, 관인(官印)따위를 꿰어 찰 수 있게 한 끈. 인끈) 주머니를 들고 올 만큼 마음속에 결정이 선 뒤였다.

그러나 현덕은 한 번 더 생각을 기울인 뒤에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실은 나도 그리 생각했다네.”

그리고 현덕은 소매에 넣어 온 인수 주머니를 꺼내 그 끈을 독우 의 목에 걸어주며 꾸짖었다.

“네가 백성을 해친 죄로 보아서는 마땅히 죽여 없애야 할 것이로 되, 하늘은 삶을 귀한 덕(德)으로 여기니 잠시 목숨을 붙여둔다. 마 땅히 뉘우치지 않고 또다시 못된 마음을 품으면 반드시 네 목이 어 깨 위에 남지 않는 날이 올 것이다. 여기 나라에서 내려주신 현위의 인수가 있으니 이만 가지고 돌아가거라.”

“고맙습니다, 유공. 이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관우까지 엄하게 나서는 바람에 꼼짝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던 독 우는 유비가 그렇게 말하자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매 맞은 아픔도 잊 고 수없이 현덕에게 감사한 뒤 데려온 종자들과 함께 엉금엉금 기듯 돌아갔다.

하지만 워낙 태어나기를 소인으로 태어난 독우였다. 제 잘못을 뉘 우치기는커녕 자사에게 돌아가기 무섭게 현덕 삼형제의 죄를 열 배 나 부풀리어 일러바쳤다. 자사 또한 보잘것없는 위인이었다. 아랫것 들의 말만 믿고 발연히 노하여 유, 관, 장 삼형제를 잡아들이란 영을 내렸다.

곧 고을마다 통문이 돌고 탁군으로 가는 길목에는 현덕 삼형제를 잡으려는 군사들이 깔렸다. 그러나 미리 일이 그리될 줄 짐작한 삼 형제는 탁군으로 돌아가지 않고 똑바로 대주(代) 태수유회(劉恢)를 찾아 몸을 의탁했다.

유회는 현덕과 마찬가지로 한나라 종실이었다. 전부터 현덕의 이 름을 들어 알고 있었으나, 만나보니 그 부드러우면서도 씩씩한 기상 이 한층 마음에 들었다. 이에 그들 세 사람을 찾는 정주(州)태수 의 통문이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삼형제를 받아들여 숨겨주었다. 유, 관, 장 삼형제가 나라에 큰 공을 이루고서도 오히려 죄인으로 쫓기게 된 것과 같은 일은 낙양의 조정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황 건의 난이 가라앉음과 함께 다시 기세를 얻기 시작한 십상시가 바로 그 주동이었다.

내시들은 난리가 한창일 때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장 군들과 대신들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난리가 끝나고 그 평정을 위해 나누어져 나갔던 병권들이 다시 금문(門)안으로 돌아오자 그들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간사한 말과 속임수로 늙은 영제의 마 음을 흘려 이전의 세도를 되찾으려 들었다.

몇 달 전 유비를 위해 바른 말을 하다 끌려나간 낭중 장균이 그런 내시들의 첫 희생자였다. 그렇지만 그들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이제부터 우리를 따르지 않는 자는 모두 죽여버리세.”

자기들이 이전의 권세를 온전히 되찾았다 싶자 십상시들은 그렇 게 의논을 맞추고 먼저 칼끝을 황건란에 공을 세운 장수들에게 돌렸 다. 그들에게 뇌물을 요구하여 만약 들어주지 않으면 자기들을 따를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내쫓거나 죽인다는 계책이었다.

거기에 가장 앞서 걸려든 것이 황보숭과 주준이었다. 십상시의 우 두머리인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이 각기 사람을 보내 뇌물을 요구했지만 강직한 황보숭과 주준이 그따위 요구를 들어줄 리 없었다.

일이 뜻대로 되자 십상시들은 입을 모아 황보숭과 주준을 참소하기 시작했다.

“거기장군(車騎將軍) 황보숭은 세운 공도 없이 헛된 이름만 키운 자입니다. 그러면서도 높은 벼슬과 많은 상급을 받았으니 안 될 일 입니다. 지금이라도 마땅히 그 벼슬을 거두어들여야 합니다.” 

“주준 또한 부하 장수들의 공을 가로채 제 이름만 높인 장수입니 다. 그래 놓고도 거기장군에 하남윤이 된 뒤로는 더욱 우쭐하여 나 라일을 게을리하니 백성들의 원망이 끊이지 않는다 합니다. 역시 그 벼슬을 거두심이 마땅합니다.”

둘 다 황건적을 무찌르고 돌아올 때만 해도 고맙고 미덥던 장수 들이었다. 그러나 그 몇 달 평온한 시절을 겪은 영제에게는 어느새 밤낮없이 자신을 싸고돌며 입에 발린 충성과 아첨을 일삼는 십상시 가 훨씬 소중한 사람들이 되어 있었다. 이에 영제는 깊이 헤아리지 도 않고 그들의 참소를 받아들이니 황보과 주준은 그날로 벼슬에 서 쫓겨났다.

실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더욱 어이없는 일은 아무런 명 분도 없이 내시들의 벼슬을 높여준 것이었다. 느닷없이 조충에게 거 기장군을 내리고 장양 등 열 명의 내시를 모두 열후(列侯)에 봉(封) 한 것으로, 가히 노망이라 이를 만한 처분이었다.

벼슬을 거두고 내리는 일이 그 모양으로 행해지니 나라의 다른 일이 제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황건의 난리로 잠시 반짝했던 자 성(省)의 기운은 후한의 조정에서 다시 자취를 감추고 천하는 여전히 폭정과 착취의 어둠 속에 남겨지게 되었다.

정치가 썩고 백성들의 원망 소리가 높으면 반드시 그 틈을 타는 것이 야심가와 도둑의 무리이다. 먼저 장사(長) 땅의 구성(區)이 란 자가 무리를 모아 난리를 일으키고, 이어 어양漁陽) 땅의 장순 (張純), 장거張擧) 형제가 백성을 선동해 모반했다. 전란으로 피폐하 고 폭정에 시달린 백성들은 먹여준다는 소문 하나만으로도 도적이 나 야심가를 가리지 않고 모여들어 금세 수천, 수만의 세력으로 불 어나갔다.

특히 어양 땅의 장순 형제는 형 순(純)이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아우 거(擧)가 대장군이 되어 자못 기세가 드높았다. 순식간에 부근 일대의 크고 작은 고을을 휩쓸고 머지않아 도성을 취하리라 큰소리 쳤다. 구성도 그 기세에 힘입어 장사 일대를 무인지경 넘나들듯 노 략했다.

한 곳도 아닌 두 곳에서 난리가 이니 지방의 수령 방백(方伯)들이 제대로 대적할 길이 없었다. 장계와 표문이 정월 눈발 날리듯 조정 으로 날아들며 위급을 고했다. 그러나 십상시들은 서로 짜고 난리가 난 사실조차 황제께 고하지 아니했다. 황제가 놀라 다시 외정(外廷) 의 대신들에 함빡 대권을 넘겨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내시들이 농간을 부려도 한의 조정에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 아무것도 모르는 황제가 여느 때처럼 후 원에서 십상시를 불러들여 질탕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간의 대부 유도(陶)가 불쑥 어전 앞에 엎드리더니 큰 소리로 통곡을 했다. 

“경은 어인 일로 그리 슬피 우는가?”

한창 흥겹게 술잔을 기울이던 영제가 몽롱한 눈길을 간신히 모아 유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유도가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아니하며 대답했다.

“천하의 위태롭기가 아침저녁을 다투고 있는 때에 폐하께서는 간 사한 내시들과 함께 술만 즐기고 계시니 이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 겠습니까?”

그러나 영제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아침까지 만 해도 사해가 두루 평온하고 백성들은 소리 높여 격양가(擊壤歌) 를 부른다는 소리를 내시들에게서 들은 까닭이었다. 알 수 없다는 눈길로 되묻는다.

“나라 안이 두루 평온한데 무엇이 그토록 위태롭고 급한가?”

“사방에 도적이 일어 주군을 침략하고 있사옵니다. 지금 도성으로 이르는 관도에는 위급을 고하는 파발이 줄을 잇고 있사온데 어찌 위 태롭고 급하지 않사옵니까?”

유도는 그렇게 아뢴 뒤 황제의 주위에 둘러선 십상시를 노려보며 분연히 덧붙였다.

“그 화는 모두 저 간악한 십상시들이 관작을 팔고 백성들을 도적 질하여 원망을 산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폐하의 성총을 가리어 착한 사람은 모두 조정에서 떠나가고 나쁜 무리만 우글거리 니 실로 이제 그 화는 눈앞에 이르렀다 할 수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폐하, 소신의 말을 가벼이 여기지 마시옵고 밝은 살핌으로 이 나라 를 위급에서 구하소서.”

자기들이 둘러친 사람의 장막만 믿고 있던 십상시들은 졸지에 벌레 씹은 얼굴들이 되었다. 그러나 워낙 간지(智)에 밝은 자들이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아 생각을 맞춘 뒤 일제히 관(冠)을 벗어놓고 영제 앞에 꿇어 엎드려 입을 모아 아뢰었다.

“조정의 대신들이 저희를 용납지 않으면 저희들은 살길이 없어집 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저희가 성명(性命)을 보존하여 향리로 돌 아가 살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가산은 모조리 내놓아 도 적을 치는 데 쓸 군자에 보태고자 합니다.”

자못 애절한 목소리에 말을 맺기 무섭게 간사한 눈물까지 줄줄이 흘러내렸다. 그걸 보자 유도의 충성스런 말에 희미하게 일던 경각심 은 금세 사라지고 십상시의 거짓 충성과 애처로운 모습만이 영제의 어리석고 어두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자연 유도에게 역정이 일지 않을 수 없다.

“너도 곁에 가까이 두고 부리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짐에게 그것조차 용납되지 않는단 말이냐?”

그러고는 무사를 불러 유도의 목을 베게 하였다. 거꾸로 죄 없는 십상시를 참소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운 뒤였다. 그 같은 영제의 분 부에 유도가 크게 탄식하며 소리쳤다.

“이 한 몸 죽는 거야 애석할 것도 없다마는 한의 천하가 가련하구 나. 사백 년 치세가 어찌 이토록 허망히 끝난단 말이냐!”

그러나 그 말이 이미 마음의 귀가 막혀버린 영제에게 들릴 리 없었다. 다만 무사를 호령하여 끌어내 베기를 재촉할 뿐이었다.

제명에 몰린 무사가 유도를 끌어내 목을 베려 할 때였다. 대신 하 나가 급히 후원으로 들며 무사에게 소리쳤다.

“무사들은 유(劉) 대부에게 손을 대지 마라. 내가 폐하께 아뢰어 보리라.”

보니 사도 진탐(陳)이었다. 진탐은 우선 유도의 형(刑)을 중지시 킨 뒤 영제 앞에 엎드려 물었다.

“유간의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주살하려 하십니까?”

“근신)을 욕하고 비방했으며 아울러 짐을 모독한 죄이니라.” 황제가 흐릿한 눈길로 대답했다. 진탐이 문득 소리를 높였다. 

“천하의 모든 백성들이 한결같이 저 간악한 십상시들의 고기를 씹고자 하나 폐하께서는 오히려 저들 받들기를 부모처럼 하시고, 저 들의 몸은 한 치 공을 이룬 적도 없으나 폐하께서는 또한 저들을 높 여 열후에 봉하셨습니다. 무릇 입 달린 자라면 누가 그 그릇됨을 말 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봉서(后) 등의 무리는 지난번 황건의 난 때 도적들과 짜고 안에서 호응하기로 한 적까지 있사옵니다. 그런데 도 폐하께서는 어찌 스스로 돌아보아 경계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서 서 저들의 나라 망치는 꼴을 구경만 하고 계십니까?”

“봉서 등이 안에서 난을 꾸미려 했다는 것은 아직 뚜렷이 밝혀진 일이 아니다. 또 경은 하나같이 십상시를 나라 망치는 간적(奸)으 로만 몰아붙이나 어찌 이 중에 한둘이야 충신이 없겠느냐?”

영제는 끝내 환관들을 싸고 돌았다. 그러나 진탐도 굽히지 않고 맞섰다. 원통함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머리를 들어 계단에 찧으며 십상시의 죄를 논하니 터진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조복(朝服)을 흥건히 적셨다.

그걸 본 영제는 그의 충성심을 헤아리기는커녕 자신을 거스르는 것이라 여겨 크게 노했다.

“무사들은 저 발칙한 놈을 끌어내 가두어라. 뒷날 유도와 함께 목을 베리라.”

그렇게 소리치니 사도 진탐 또한 유도와 함께 나란히 옥에 갇히 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황제가 자기들을 편들어 일을 처결해주기는 했지만 십상시들은 그래도 한 가닥 불안한 마음이 일었다. 대신들이 유도와 진탐을 구 하려고 시끄러운 논의를 일으킬 것 같은 우려 때문이었다. 죽여 입 을 봉하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이라 생각하고 그날 밤 몰래 사람을 보내 갇혀 있는 유도와 진탐을 죽여버렸다. 그리고 마지못해 구성과 장순 형제 칠 일을 의논했다.

“이번에는 황건란 때처럼 도성의 군사를 빼내 외정(外廷)의 대신 들에게 맡기는 일은 없어야겠네. 서원팔교위(西園八校尉)는 우리 손 에 남겨두고 도적 잡을 계책을 세우기로 하세.”

우두머리의 하나인 건석이 먼저 그렇게 못박았다. 이때 장양이 나 섰다.

“장사의 도적 구성은 손견을 시켜 치게 함이 어떤가? 지난번 황건 란 때는 홀로 앞장서 성벽에 기어올라 완성(城)을 떨어뜨릴 만큼 용맹한 장수라네. 변장(邊章)과 한수(韓) 등이 양주에서 난리를 일 으켰을 때도 그가 간다는 말만 듣고 도적들이 스스로 흩어지지 않 았나?”

“그렇지만 믿을 수 있는 인물인가?”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내시가 물었다. 손견을 쓰는 일이 호랑이를 키우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라는 뜻의 물음이었다. 장양이 자 신 있게 대답했다.

“손견 그자는 확실히 범 같은 장수일세. 그러나 사람이 미욱하지 않아 우리가 잘 길들이기만 하면 도리어 우리의 발톱과 이로 쓸 수 도 있다네. 지난번 황건란 때도 공이 컸지만 우리들에게 씀씀이도 후하지 않던가? 이번에도 틀림없네. 손견을 장사 태수로 보내 구성 을 잡도록 해보세. 도성의 군사 하나 딸려 보내지 않아도 다 제가 모 아 쓸 것이고, 돌아와서는 바치는 것도 공연히 결백한 체하는 것들 과는 비교도 안 될 걸세.”

장양이 그렇게 말하니 반대가 있을 리 없다. 십상시들은 장사 쪽 은 손견에게 맡기기로 하고, 다시 장순과 장거 칠 일을 의논했다. 

“어양(陽)에는 누구를 보내는 편이 좋겠는가?”

“거기는 따로 사람을 보낼 것 없네. 종정) 유우(劉虞)를 다시 보내세.”

“유우라고? 그는 무장(武將)이 아니잖는가? 과연 그에게 그만한 힘이 있겠나?”

“듣기에 그는 전에 유주자사로 있을 때 선정으로 그곳 백성들을 깊이 감복시켰다 하네. 그를 보내 달래보고 안 되면 대주 태수쯤으 로 돕게 하지. 공연히 좋지 못한 인물을 보냈다가 세력만 키워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하여 결국 장순과 장거 토벌을 유우에게 맡기고 대주 태수 유회에게 돕게 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런 십상시의 결정은 황제의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날 입시한 그들은 가장 충성스러운 체 전날 꾸민 일을 도적 깨칠 계책으로 아뢰니, 영제는 크게 기뻐하며 그대로 따랐다.


그 무렵 손견은 이미 하비와 강남 일대의 용장(將)이 아니라 조 야가 다 아는 장안의 명사가 되어 있었다. 황건의 난 때 세운 공으로 별군사마로 출발한 그는 양주의 변장, 한수 등이 난을 일으키자 또 한번 이름을 드날릴 기회를 얻었다. 중랑장 동탁이 토평의 대임을 맡고 양주로 갔으나 시일만 끌고 이기지 못하매, 조정은 다시 사공 장온을 거기장군으로 삼아 변장과 한수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때 장온이 표문을 올려 손견을 참군사(參軍事)로 천거한 덕분이었다.

군사를 서쪽으로 몰아 장안에 이른 장온은 그곳에서 제명에 의지 해 동탁을 불러들였다. 동탁은 마지못해 장안으로 불려 왔으나 정한 기일을 어겼을 뿐만 아니라 장온의 책망에 심히 불손한 태도로 나왔 다. 이때 그걸 본 손견이 가만히 장온에게 말했다.

“동탁은 지은 죄를 겁내지 않고 오히려 올빼미가 나래를 펴 맹위 를 떨치듯 큰소리만 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군령이 정한 기일까지 어겼으니 마땅히 군법을 펴 목을 베야 합니다.”

“동탁은 그 위명을 농촉(蜀) 일대에 널리 떨치고 있는 자인데 이제 그를 죽이면 서쪽[州]으로 간들 누구에게 의지하겠는가?” 

그래도 동탁의 용맹을 아끼는 장온이 근심스레 물었다. 이에 손견 이 더욱 강경하게 권했다.

“명공께서는 친히 왕병(兵)을 이끌고 출전하시어 위세가 천하를 울리게 하는데 어찌 동탁 따위의 하찮은 이름에 의지하려 하십니까? 제가 동탁의 하는 양을 보니 용서할 수 없는 죄가 세 가지나 됩 니다. 첫째는 윗사람을 가볍게 여기고 예를 갖추지 못한 죄며, 둘째 는 도적이 발호한 지 여러 해 되도록 토평하지 못해 군사의 사기를 꺾이게 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의 힘을 의심하게 한 죄며, 끝으 로는 대임을 맡고도 공을 이루지 못한 주제에 소환을 받고도 기일을 어기고 또 와서는 저토록 기고만장한 것입니다. 예부터 뛰어난 장수 치고, 천자께서 내리신 부월에 의지해 무리를 이끌 때 죄 지은 자를 목 베어 위엄을 세우는 것을 망설인 적은 없습니다. 만약 명공께서 지금 동탁을 목 베어 위엄을 세우지 않으시면 장차 그 화가 어디까 지 미칠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장온은 차마 동탁을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손견을 달래 보냈다.

“자네는 이만 돌아가게. 자칫 동탁의 의심을 살지도 모르겠네.” 덕분에 동탁은 죽음을 면하고 장온의 휘하에 들어 다시 양주로 진군하게 되었다.

변장과 한수는 조정에서 보낸 대군이 동탁의 군사까지 아울러 오 고 있다는 말을 듣자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급히 무리를 흩고 각기 항복을 애걸해왔다. 이에 장온은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군 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왔다.

난은 진압되었다 해도 싸움이 없었으니 논공행상이 제대로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손견이 세 가지 죄를 들어 장온에게 동탁을 목 베 기를 권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듣는 사람치고 감탄하지 않는 이가 없 었다. 그때 벌써 동탁은 조정 안팎 모두에게 그만한 미움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십상시들도 처음에는 그가 주는 뇌물 맛에 줄곧 그에게 군권을 주어 변방을 지키게 했으나 별 공도 없이 자기 세력만 기르려 하자 차차 동탁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탁을 보는 눈길이 그처럼 미움과 두려움 아니면 의심에 가득 찬 바람에 거꾸로 득을 본 것은 손견이었다. 그는 싸움 한번 하지 않 고 대단한 이름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별로 학문이 깊지 못한 그 에게는 명예롭기까지 한 의랑(議)자리까지 돌아왔다.

그런 뜻에서 보면 방금 그 토벌을 명받은 구성 또한 손견에게는 중요한 성공의 디딤돌이 되었다. 장사 태수로 내려간 손견은 한편으 로는 선정을 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벌써 십 년이 넘도록 그를 따르는 네 장수 황개(黃蓋), 한당(韓當), 정보(程普), 조 무(祖茂)를 앞세워 구성의 무리를 쳤다.

그렇지 않아도 드높은 손견의 위명이었다. 그가 장사의 태수로 왔 다는 것만으로도 떨며 굴복해야 할 판에 생각 밖으로 세심한 보살핌 까지 곁들이자 백성들의 마음은 금세 구성의 무리에게서 돌아섰다. 거기다가 벌써 수십 번의 크고 작은 싸움을 치른 손견의 네 장수가 정예한 관병을 이끌고 토벌해오니 구성의 무리는 견딜 재간이 없었 다. 달포 남짓 지나자 무리는 흩어지고 구성은 사로잡혀 베임을 당 하고 말았다.

그러나 손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이웃 군에서 구성과 내 통하여 난리를 꾀하던 주조(周), 곽석(石)의 무리들까지 뿌리 뽑 으니 장사에 이웃한 세 고을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조정은 그런 손 견을 오정후(烏程侯)에 봉해 그 공을 기렸다.


한편 장거, 장순의 무리를 토벌하기 위해 유주목(幽州牧)이 되어 내려간 유우(劉虞)는 생각보다 훨씬 큰 적세에 놀랐다. 장순의 무리 는 그사이 십여만 명으로 자라 오환교위(烏校尉) 기조(箕稠), 우북 평 태수 유정(劉政), 요동 태수 양종(陽) 등을 죽이고 청주와 기주 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다. 거기다가 오환(烏丸)의 초왕(王) 등과 도 손을 잡아 유주는 안전한 곳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백성들에게 지난날의 은의를 상기시키고 도적의 무리에게 현혹되 지 않게 하는 일도 다스림이 있은 뒤에나 기대할 수 있는 법이었다. 당장 발붙일 곳조차 마땅찮은 유우에게는 필요한 게 먼저 자신을 임 지에 있을 수 있도록 지켜주는 무력이었다.

이에 유우는 우선 성곽이 튼튼하고 높은 계성(城)에 관부 아닌 군영(軍營)을 열고 먼저 다스림의 근거지를 확보하는 일에 착수했 다. 장거와 장순이 그걸 보아넘길 리 없었다. 곧 대군을 몰아 계성을 공격해 왔다.

이미 허약할 대로 허약해진 주군(州軍)들인 데다 그 자신 대단한 장략을 지니지도 못한 유우에게는 당연히 견디기 힘든 공격이었다. 다급한 유우는 같은 종실이요, 가장 가까운 고을의 태수가 되는 대 주 태수 유회에게 구원을 청했다.

유현덕과 관, 장 삼형제를 숨겨주고는 있어도 그들이 왕법(法) 을 어긴 죄인이라는 게 자못 꺼림칙하던 대주 태수 유회였다. 구원 을 바라는 유우의 글을 읽고, 그들 삼형제를 위해 좋은 기회가 온 것 으로 여겼다. 곧 사람을 보내 현덕을 부른 뒤 유우의 글을 내보이며 말했다.

“비록 그 독우가 탐학한 자라고는 하나 조정이 보낸 관리임에는 틀림없으니, 그에게 매질을 한 것은 왕법을 범한 것이 아닐 수 없네. 그런데 이제 그 죄를 씻을 때가 왔네. 군사 삼천을 빌려줄 테니 가서 유백안, 유우의 자)을 구하게.”

그러지 않아도 구차하게 숨어 지내는 것이 지루하고 괴롭던 유현 덕이었다. 유회의 그 같은 말에 크게 기뻐하며 시키는 대로 따랐다. 관우, 장비도 현덕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놀고 먹느라 온몸이 근질근질하던 장비는 싸울 일이 생겼다는 말에 어린아이처럼 좋아 했다.

유, 관, 장 삼형제는 그날로 대주병(代) 삼천을 빌려 바람과 같 이 계성으로 달려갔다. 그들이 밤을 낮 삼아 달려 계성에 이르렀을 때는 장거(張擧)의 무리가 한창 공성(城)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이 었다. 잇단 승리에 취해 마치 천하가 저희들 것이라도 된 듯 경계를 게을리하고 있던 반도들은 갑작스런 원병이 나타나자 당황하고 말 았다. 열 배가 넘는 군사를 가지고도 어이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걸 보자 현덕 삼형제와 대주병들은 더욱 힘이 났다. 관우의 청 룡도와 장비의 사모가 베고 후리고 찌르고 쑤시며 트는 길로 삼천 군마가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성안의 유주병(幽州兵)들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세 좋게 성문을 열고 나와 들이치니 장거의 군사 들은 삼십 리나 쫓겨난 뒤에야 간신히 패군을 수습할 수 있었다.

그다음부터는 분전의 연속이었다. 데려간 대주병 삼천에다 그들 이 분전으로 사기를 회복한 유주병 만여가 가세하자 보름도 안 돼 유주 일대는 유우의 다스림이 온전히 미치는 지역이 되었다.

그러자 유우는 민심의 수습에 들어갔다. 수하의 관원들과 군사들 에게 터럭만큼도 백성을 괴롭히지 못하게 하고, 장거의 무리에 가담 했던 자라도 마음 바꿔 돌아오면 관대하게 용서해주었다. 그런 다음 오환(烏丸)의 초왕 등 장거의 모반에 동조한 자들에게는 글을 보내 달래는 반면 장거와 장순의 목에는 큰 상을 걸었다.

민심이 차츰 자신을 떠나고 동조자들도 하나둘 떠나가자 일이 그 른 것을 안 장거와 장순은 처자까지 버리고 변경 밖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장순은 그 수하인 왕정(政)에게 목이 잘리어 유우에게 되 돌아오고, 장거는 장순이 죽고 그 졸개들마저 항복해버리자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유우의 공으로만 보였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뒤를 받쳐주는 유비의 무력이었다. 유우도 그걸 잊지 않고 첩보와 함께 유비의 큰 공을 아뢰는 표를 올렸다. 조정은 유우를 태위로 삼고 용구후(龍侯)에 봉하는 한편, 유비도 독우 때 린 죄를 면해주고 하밀(下)이란 곳의 승丞)으로 삼았다. 그 뒤 다 시 유비는 고당(高堂)이란 곳의 위尉)로 옮겼는데, 어느 편도 세운 공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시골 벼슬아치[郡吏]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간신히 별부사마(馬)로 평원(平原)의 현령을 맡게 되지만 그것도 실은 공손찬의 강경한 표문 덕분이었다. 그사이 변방 을 평정하고 오환 탐지왕(貪至)과 그 족속들의 항복을 받는 등, 어 느새 조정도 무시할 수 없을 만한 군벌로 자란 공손찬은 유비를 위 함 못지않게 자기의 근거지 가까운 곳에서 세운 유우의 공을 깎기 위해서도 유비의 공을 힘껏 추켜세웠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