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권 – 12화 : 차라리 내가 저버릴지언정 저버림받지는 않으리라
차라리 내가 저버릴지언정 저버림받지는 않으리라
하태후와 폐제 죽인 일을 시작으로 동탁의 무도함은 나날이 더해 갔다. 매일 밤마다 궁궐에 들어가 마음에 드는 궁녀들을 번갈아 욕 보이고, 잠은 무엄하게도 용상에서 잤다. 조정의 대신들을 하인 부 리듯 했으며, 거리의 백성들은 버러지나 짐승보다 못하게 여겼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군사를 이끌고 도성을 나가 양성(陽) 부근에 이르렀을 때였다. 봄이 완연한 이월이라 마을 사람들은 남녀 를 가리지 않고 나와 봄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동탁의 뒤틀어진 심 사에는 공연히 그게 못마땅했다.
그래서 찌푸린 눈으로 보고 있는데 문득 흉악한 꾀가 떠올랐다. 없는 공을 만들어 자신의 위세를 더하면서 낙양 사람들에게 겁도 주 고, 또 약탈을 마음대로 못해 걸신이 들린 부하들에게 약탈할 기회도 주는 일석삼조의 꾀였다.
“농사철에 일은 않고 모여서 술을 마시고 노니 저놈들은 도적 떼임에 분명하다. 어딘가를 약탈하고 돌아와서 잔치를 벌이고 있으니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여버려라.”
동탁은 그렇게 명을 내려 그 마을뿐만 아니라 부근의 모든 마을 을 쓸어버렸다. 남자건 여자건 보이는 대로 죽이고 마을을 뒤져서는 반반한 부녀자와 재물을 있는 대로 약탈하게 했다. 저녁때가 되니 끌고 간 수레 아래에는 천여 개의 사람 머리가 매달리고, 수레 위에 는 약탈한 부녀자와 재물이 그득했다.
“양성에서 도적 떼를 만나 싸워 크게 이기고 그 목 천여 개와 노 략질한 재물을 빼앗아 왔다.”
낙양에 돌아온 동탁은 부하들을 시켜 그렇게 퍼뜨린 뒤, 목은 성 아래서 모두 불태우고 부녀자와 재물은 부하들에게 상으로 골고루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낙양의 백성들이라고 해서 눈과 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동탁이 앞서 저지른 다른 죄악들과 마찬가지로 그 일도 며칠 가지 않아 참모습이 드러나니 입 달린 사람 치고 동탁을 욕하지 않는 이 가 없었다.
원래 권세란 얻기보다 지키기가 힘든 법이다. 동탁은 권세를 얻는 과정에서는 그럭저럭 책략가의 흉내를 내었지만 지키는 데는 너무 도 부족함이 많았다. 그런데 그 부족함이 드러날 때마다 창칼로 메 우려 드니 내외로 파탄이 오지 않을 수 없었다.
월기교위 오부俘)는 항상 동탁의 잔인하고 포악함을 미워했다.
조복 속에 가벼운 갑옷을 받쳐 입고 단도를 품은 채 동탁을 죽일 때 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루는 먼저 입조(入朝)해 있는데 동탁이 홀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오부는 이때다 싶어 나가서 맞는 체하고 칼 을 꺼내 동탁을 찔렀다.
동탁은 워낙 기력이 세고 무예가 뛰어났다. 슬몃 몸을 피하며 오 부의 칼 든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뒤따라온 여포가 달려들어 오 부를 땅바닥에 메어꽂았다.
“누가 너에게 이 같은 역적질을 시켰느냐?”
동탁은 쓰러진 오부를 노려보며 그렇게 물었다. 오부가 분연히 소리쳤다.
“너는 내 임금이 아니고 나는 네 신하가 아닌데 역적질이라니 무 슨 소리냐? 네 죄가 이미 하늘에 가득해 사람마다 죽이기를 원하고 있으니 하물며 한나라 조정의 녹을 먹는 나이겠느냐? 다만 한스러 운 일은 너를 찢어 죽여 천하에 공도를 밝히지 못하는 것뿐이다.” 그러자 화가 난 동탁은 오부를 끌어내 과형에 처하게 했다. 과(剛) 란 뼈가 드러날 때까지 살을 발라 죽이는 것으로, 오부는 그 혹독한 형을 당하면서도 끝내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 저 정관(管)과 마찬 가지로,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던진 그의 이름은 길이 뒷사람의 존숭을 받으리라.
동탁에 대한 그 같은 저항은 밖에서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발해 태수 원소였다. 동탁에게 칼을 빼들고 맞선 것으로 더욱 이름을 얻은 데다 그를 달랜다고 준 태수 자리가 또한 그의 근거지인 기주에서 멀지 않았다.
원소가 가만히 세력을 모으니 사람이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 었다. 사세오공의 지반에다 그의 명성이 겹쳐 있을 뿐만 아니라 발 해태수로서 관작도 무시 못할 배경이 되어준 것이었다. 장수감으로 는 안량(顏良), 문추(醜) 등이 이미 와 있었고, 모사로는 봉기(逢 紀), 허유(許) 등이 있었다. 원소의 군문(軍門)에 들기를 원하는 장 정들도 줄을 이어 그들을 먹일 곡식이 달릴 지경이었다.
원소가 누구보다도 이를 갈며 동탁을 겨냥한 군사를 기르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하진이 죽은 마당에서 보면 원소는 소제(少 帝)를 세우고 십상시를 뿌리 뽑는 데 으뜸가는 공신이었다. 그리하 여 이제 막 큰 포부를 펴려는데 동탁이 나타나 모든 것을 가로채버 렸다. 뿐만 아니라 황제까지 갈아치워 원소의 전공(前功)을 없이하 는 동시에 동탁 자신의 위치는 적어도 새 황제의 재위 동안에는 흔 들림이 없도록 굳혀 놓았으니 어찌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원소는 한편으로는 군사를 기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동탁의 동 정을 살피는 데 힘을 쏟았다. 그가 풀어놓은 사람들이 가져오는 소 식은 한결같이 분통 터지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정면으로 동탁 에게 맞서기에는 힘이 너무도 약했다.
이에 원소는 낙양성 안에서 호응할 세력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백관들을 하나하나 두고 생각해보니 사도 왕윤(允)이라면 그 세력 의 중심 인물이 될 만했다. 가만히 사람을 보내 밀서 한 통을 전했다.
‘역적 동탁이 하늘을 속이고 황제를 내쫓으니 그 참람됨이 차마 말하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런데도 공께서는 그 발호(跋扈)함을 아니 듣고 아니 보신 듯하시니 어찌 나라를 위하고 충성을 앞세우는 신하라 할 수 있겠습니까? 소紹)는 지금 군사를 모아 조련하면서 제실(室)의 도적들을 깨끗이 쓸고자 하되 다만 함부로 가볍게 움 직이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만약 공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어 틈을 타 일을 꾀하시고 저를 부리시겠다면 마땅히 달려가 크신 명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왕윤은 그 편지를 읽고 깊이 생각해보았으나 마땅한 계책이 떠오 르지 않았다. 그래서 한숨만 쉬며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대궐에서 반열을 짓고 있는데 둘러보니 마침 동탁의 사람들이 보이지 아니했 다. 왕윤이 거기 있는 오래된 대신들과 의논이라도 해보리라 마음먹 고 나지막이 말했다.
“오늘은 이 늙은이가 세상에 떨어진 날이오. 저녁에 저희 집에 오셔서 술이라도 몇 잔 나누는 게 어떻겠소?”
“꼭 가서 축수(壽)를 드리리다.”
모여 있던 구신들은 별 생각 없이 모두 그렇게 대답했다.
집으로 돌아온 왕윤은 조용한 후당에다 술자리를 마련했다. 저녁 이 되자 여러 공경들은 약속대로 왕윤의 집으로 모였다. 그러나 왕 윤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더니 술이 몇 순배 돌기도 전에 얼굴을 가리고 목을 놓아 울었다.
“귀한 생신날에 어찌 슬퍼하십니까?”
모인 사람이 모두 놀라 그렇게 물었다. 왕윤은 울음을 그치고 대 답했다.
“실은 오늘이 천한 것의 생일이 아닙니다. 다만 오래전부터 여러 분들과 모여 가슴속에 쌓인 울분을 풀어보고 싶었으나 동탁이 의심 스럽게 여길까 봐 못하다가 이제 생일을 빌려 뜻을 이룬 것입니다. 동탁은 임금을 속이고 권세를 희롱하여 나라의 위태롭기가 아침 저 녁을 기약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우리 고조(高祖)께서 진(秦), 초(楚) 를 없애고 얻으신 천하가 오늘에 이르러 동탁의 손에 넘어갈 줄 누 가 생각이라도 했겠습니까? 제가 운 것은 실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공경들도 한가지 슬픈 마음이 일어 다 같이 목을 놓 아 울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손을 어루만지며 큰소리로 웃는 사람 이 있었다.
“이 자리에 모이신 공경들께 말씀드립니다. 울고 울어 밤이 낮이 되고 다시 낮이 밤이 된들, 울음으로야 어찌 동탁을 죽일 수 있겠습 니까?”
그렇게 빈정거려 놓고 다시 소리 높여 웃는 사람을 보니 효기교 위(騎校尉)로 있는 조조였다. 왕윤이 성난 소리로 꾸짖었다.
“네 애비 할애비도 한가지로 한실의 녹을 먹었는데, 너는 나라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도리어 웃기만 하느냐?”
그러자 조조는 웃음을 그치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제가 웃은 것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이토록 여러분이 모여서도 아무런 계책이 없는 것이 우스웠을 뿐입니다. 이 조조가 비록 재주 는 없으나, 원하신다면 즉시 동탁의 머리를 잘라 도성의 문에 내걺 으로써 천하에 사죄케 할 수가 있습니다.”
좀 지나치기는 하나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였다. 왕윤은 자리를 옮기어 은근하게 조조에게 물었다.
“맹덕(德)에게 어떤 고견이 있는가? 좀 전에는 감정이 격해 말이 지나쳤네.”
조조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요즘 저는 몸을 굽혀 동탁을 섬기고 있습니다만 실은 틈을 노려 역적을 없애고자 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제 동탁은 저를 믿어 저 는 언제든 동탁에게 가깝게 다가갈 수가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사 도께서는 칠성보도(七寶刀)한 자루를 가지고 계신다 합니다. 원컨 대 제게 그 보도를 빌려주십시오. 동탁의 부중으로 들어가 그를 찔 러 죽이겠습니다. 불행히 일이 잘못되어 제가 죽게 되어도 한은 없 습니다.”
“맹덕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니 실로 천하를 위해 큰 다행일세.”
왕윤은 이렇게 조조를 치하한 뒤 스스로 술잔을 따라 조조에게 바쳤다. 조조가 그 잔을 받아 뿌리며 맹세를 나타내자 왕윤은 애지 중지하던 칠성보도를 내주었다. 칼을 받아 갈무리한 조조는 잔에 남 은 술을 마시자마자 몸을 일으켜 여러 공경에게 작별을 고했다. 대 의를 위해 목숨을 건 장부의 기개가 넘쳐흐르는 뒷모습이었다.
원래 조조는 동탁이 대권을 잡을 때부터 원소처럼 자신의 근거지 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 무렵 부친 조승은 진류(陳留) 땅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조의 권유를 따라 처음에는 고향인 패국 초현으로 내려갔으나 그곳이 마땅치 않아 재물과 가솔들을 진류 땅으로 옮겨 일가의 근거지로 삼은 것이었다.
따라서 진류로 내려가면 원소만큼은 안 돼도 나름으로는 상당한 세력을 기를 수 있는 조조였지만, 조조는 곧 생각을 바꾸고 그대로 낙양에 머물렀다. 한번 그 중심권을 벗어나면 다시 편입되기 어려운 것이 권력의 속성이란 걸 정치 감각이 밝은 조조는 잘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동탁의 농권(權)도 그것이 그대로 완결된 사건이 아니라 무언가 보다 크고 무거운 변화에로의 과정 같아 세밀히 보아둘 필요 가 느껴졌다.
그러나 그런 이유에 못지않게 조조를 낙양성에 붙들어둔 것은 동 탁 쪽의 접근이었다. 몇 번 대하지 않아서부터 동탁은 왠지 조조를 마음에 들어했다.
무딘 동탁의 눈에도 조조의 재주는 그만큼 돋보였던 듯싶다. 십상 시의 몰락과 함께 유명무실해진 서원(西園, 십상시의 우두머리 건석이 거느린 내정 호위병)의 전군교위(典軍校尉)였던 조조를 남군(南軍, 도성 수비군)의 효기교위로 옮기고 서량에서 데리고 온 측근들보다 더 애 중히 여겼다.
“무장에는 봉선(奉先)이 있으니 모사)로는 맹덕만 내 사람이 되면 천하에 두려울 게 없겠네마는.”
동탁은 남을 통해 그렇게 넌지시 말하기도 하고,
“맹덕, 나를 도와 일해보는 게 어떤가? 뒷날 뜻을 이루게 되면 가 장 큰 공은 그대에게 돌리리라.”
조조에게 직접 그렇게 말하기도 했다. 조조는 원소처럼 무모하게 드러내놓고 저항하지는 않았다. 외양으로는 그의 뜻을 받드는 듯 동 탁을 섬겼고, 나라와 백성들을 크게 해치지 않는 한 꾀를 빌려주기 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무렵 동탁은 조조를 거의 자기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조복 아래를 갑옷으로 받쳐 입고, 수천 갑사와 여포의 호위가 아니면 집 밖을 나서지 않는 그였지만 조조만은 무시로 그의 침실까 지 드나들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조가 동탁을 암살하려 든 일은 정사 기록에는 찾을 길이 없다. 지모(智謀)의 사람으로 알려진 그에게 그런 무모한 행동이 맞 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서른넷이란 조조의 나이도 혈기만으로 목숨을 내던지기에는 너무 많았다. 임협(俠) 시절에 몸에 배었음직한 협 기(氣)와 뒷날에 이따금씩 보인 직정적(直情的)인 성격을 바탕으 로 뒷사람이 꾸민 그럴듯한 야화이리라.
어쨌든 다음 날 조조는 왕윤으로부터 받은 보도를 차고 동탁의 부중으로 갔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으니 동탁은 작은 채에 있다는 대답이었다.
동탁은 마침 평상에 비스듬히 기대 쉬고 있는 중이었다. 곁에는 여포가 칼을 찬 채 시립하고 있었다.
“맹덕은 어찌 이리 늦었는가?”
동탁이 들어서는 조조를 보고 물었다. 조조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제 말이 시원찮아 걸음이 더딥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탁은 그 말을 듣자 그게 조조에게 선심을 쓸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여포를 돌아보며 일렀다.
“내게 서량에서 바쳐온 좋은 말이 여러 필 있다. 봉선은 가서 좋은 말 한 필을 골라 조조에게 주도록 하라.”
그 말에 여포는 말을 고르기 위해 방을 나갔다. 밖엣사람[外人]이 있으면 곁을 뜨지 않고 지키는 게 상례였지만 동탁이 아끼는 조조라 별 의심 없이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이 역적 놈을 죽이기 꼭 알맞구나…….
조조는 홀로 남은 동탁을 보고 마음속으로 그렇게 기뻐했다. 그러 나 동탁의 힘이 워낙 좋고 무예가 뛰어난 걸 잘 아는 터라, 함부로 칼을 빼들 수가 없었다. 급한 마음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곧 좋은 기 회가 왔다. 몸이 무거운 동탁이 오래 한 자세로 있을 수가 없어 몸을 완전히 뉘며 벽 쪽을 향한 것이었다.
‘이놈은 이제 끝났다…….’
조조는 급히 칼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막 몸을 일으키는데 동탁이 홱 몸을 돌렸다. 벽에 있는 큰 거울에 조조가 칼을 빼들고 다가오는 모습이 비친 것을 본 까닭이었다.
“맹덕은 무얼 하려는가?”
동탁이 큰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때마침 방 밖에서는 여포가 말을 끌고 돌아오는 기척이 났다. 되든 안 되든 부딪쳐 보기에도 너무 늦 은 셈이었다.
“제게 좋은 칼 한 자루가 있기에 승상께 바치고자 합니다. 평소 아껴주시는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이 되었으면 합니다.”
조조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으며 빼들었던 칼을 두 손으로 바 쳤다. 실로 재빠르고 눈부신 기지였다.
동탁도 얼결에 그 칼을 받아 살펴보았다. 길이가 한 자 남짓, 칼자 루는 일곱 가지 보석을 박아 장식을 했는데 칼끝이 몹시 날카로웠다. 과연 보기 드문 보도였다.
“좋은 칼이다. 받아두어라.”
동탁은 그렇게 말하며 때마침 말을 골라놓고 들어온 여포에게 그 칼을 맡겼다. 조조는 황급히 칼집을 끌러 여포에게 넘겼다.
“말을 보러 가세.”
조조의 응대가 너무도 천연스런 까닭인지, 칠성보도에 반한 덕택 인지 동탁은 별 의심 없이 조조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여포가 골 라온 말은 썩 훌륭했다.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 승상의 두터우신 은혜를 무엇으로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조는 동탁에게 감사한 뒤 다시 자연스럽게 청했다.
“한번 시험 삼아 타보았으면 합니다만…….”
“좋도록 하게.”
조조가 진심으로 자기가 준 말을 마음에 들어 하자 동탁은 기쁜지 선선히 허락하고 좌우에게 일렀다.
“맹덕에게 안장을 내주어라.”
안장을 얹어주자 조조는 동탁의 눈앞에서 태연히 말을 끌고 승상 부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대문에 이르기 무섭게 말등에 뛰어오르더 니 급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동남을 바라고 달리는 말과 사람은 그 대로 한 줄기 빠른 바람 같았다.
조조가 승상부를 빠져나간 뒤에야 선사받은 칼을 간수해두고 돌 아온 여포가 동탁에게 말했다.
“조조의 행동이 아무래도 수상쩍습니다. 조금 전 들어오면서 보니 조조는 칼을 빼 찌르려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님의 고함소리에 놀라 칼을 바친 것입니다.”
“실은 나도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들킨 자객 치고는 너무 태연하지 않느냐?”
동탁이 그렇게 반문할 때 마침 이유가 들어왔다. 둘의 대화가 심 상찮게 보였던지 까닭을 물었다. 동탁이 조조의 일을 이유에게 말하 자 이유의 표정에도 의혹이 떠올랐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조는 처자 권속이 이 낙양성 안에 없습니다. 듣기에 진작 고향 으로 내려보냈다는데, 지금은 진류로 옮겨 터를 잡고 있다고 합니 다. 능히 그런 일을 꾀할 만한 자입니다. 지금 그에게 사람을 보내 불러보십시오. 아무런 의심 받을 만한 일이 없으면 급히 달려올 것 이니 그 칼을 바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름을 받고도 오 지 않으면 그가 그 칼로 승상을 찌르려 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때는 급히 잡아 문초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동탁도 그 말을 옳게 여겼다. 즉시 옥졸獄) 넷을 뽑아 조조를 부르러 보냈다. 조조를 부르러 간 지 한참 만에 옥졸들이 돌아와 동 탁에게 고했다.
“조조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을 달려 동문을 나갔 다기에 문을 지키는 관리에게 물으니, 승상의 명을 받들어 급한 공 사를 보러 간다며 달려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곁에서 말했다.
“조조 그 도적이 두려워 달아난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놈이 승상을 찌르려 한 것은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말에 동탁이 노하여 소리쳤다.
“나는 그토록 저를 두텁게 대했거늘 도리어 나를 해치려 하다니.”
“이 일은 반드시 함께 꾸민 자가 있을 것입니다. 조조를 붙들어야 만 그 무리를 모두 잡을 수 있습니다.”
이유가 다시 그렇게 말하며 조조 잡아들일 일을 재촉했다. 동탁의 마음이 조조에게 기울어지는 것을 걱정해온 터라 한층 그 입이 매웠 다. 동탁도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조조의 모습을 그린 화상과 함께 공문을 내려 조조를 잡아들이도록 했다. 조조를 잡는 자는 천금의 상에 만호(萬戶侯)를 봉할 것이요, 숨겨주는 자는 같은 죄로 벌하 리란 내용이었다.
한편 낙양성을 빠져나온 조조는 진류 땅을 향해 나는 듯 말을 몰았다.
‘이제 한나라는 끝났다. 황제는 한낱 야심가의 이용물에 지나지 않는다. 일찍이 두려워한 대로 힘을 가진 자가 곧 의로운 자가 되는 세상이 오고 말았다. 이미 천하는 주인이 없어졌다……………?’
다급하게 쫓기는 몸이지만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데도 있었다. 희 망을 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끊지 못하던 한나라에 대한 미련에서 마 침내 벗어난 느낌이었다.
‘한조를 위한 노력은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남은 것은 온갖 야심 가의 무리와 주인 없는 천하를 다투는 일뿐. 이제부터는 대의도 충 성도 다만 나를 위하여서이리라.’
그러나 조조가 탄 말은 생각처럼 빠르지 못했다. 조조가 중모현(中牟縣)이란 곳에 이르러보니 이미 동탁의 영을 전하는 파발이 먼 저 당도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한달음에 관을 지나려던 조조는 손 한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관문을 지키던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군사들은 조조를 묶어 현령에게 끌고 갔다.
“나는 그저 떠돌이 장사치로 성을 두 자 황보(皇甫)로 쓰고 있습 니다. 군사들이 불문곡직하고 나를 얽고 이리로 끌고 왔는 바, 도무 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조조는 현령에게 그렇게 시치미를 뗐다. 그러나 현령은 조조의 얼 굴을 자세히 내려다보더니 한동안 말이 없다가 갑자기 꾸짖었다.
“전일 벼슬을 얻고자 낙양에 있을 때부터 나는 이미 네가 조조라 는 걸 알고 있다. 어찌 나를 속여 네 신분을 숨기고자 하느냐? 이미 너를 잡으라는 영이 내려와 있으니 내일은 낙양으로 압송해 동승상 께 상이나 청하리라.”
그리고 조조를 잡아온 군사들에게 술과 밥을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조조는 뜻밖에도 동탁의 파발이 이미 와 있고, 현령이 자신의 얼 굴까지 알아보자 앞이 아득했다. 한번 큰 뜻을 펴보지도 못하고 동 탁의 손에 죽는가 싶었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현령은 조사할 것이 있다 하며 부리는 사 람을 시켜 갇힌 조조를 후원으로 불러낸 뒤 물었다.
“내가 듣기로 승상께서는 너를 대함에 박하지 아니하였는데 너는 어찌하여 승상을 해치려 하였느냐?”
조조가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은 뒤 대답했다.
“참새나 제비가 어찌 큰 기러기나 고니의 뜻을 알겠느냐? 너는 이 왕 나를 잡아 가두었으니 빨리 동탁에게 끌고 가 상이나 청하거라.
쓸데없이 무얼 자꾸 묻느냐?”
그러자 현령은 좌우를 물리친 후 더욱 은근하게 말했다.
“그대는 나를 하찮게 보나, 나 또한 속된 관리는 아니다. 다만 주인을 아직 못 만났을 따름이오.”
조조가 살피니 꾸며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이에 조조도 가슴 속을 털어놓았다.
“내 조상들은 대를 이어 한나라의 녹을 먹었소. 만약 그 은혜에 보답할 마음이 없다면 들짐승이나 새와 무엇이 다르겠소? 내가 몸 을 굽혀 동탁을 섬긴 것은 다만 틈을 타 그를 죽여 나라에 해가 되 는 물건을 제거하기 위함이었소이다. 그런데 일이 그만 이렇게 어긋 나고 말았으니 모든 게 하늘의 뜻인 듯싶소.”
“만약 맹덕께서 이곳을 벗어나면 장차 어디로 가시려오?”
“먼저 향리로 돌아간 뒤 거짓으로나마 제명(命)을 빌려 천하 제 후들과 그 군사들을 불러 모을 작정이오. 그래서 다 같이 역적 동탁 을 주살하는 게 오직 내가 바라는 바이오.”
그러자 현령은 스스로 조조의 결박을 풀고 높은 자리에 앉힌 뒤 두 번 절을 하며 말했다.
“공이야말로 참으로 충의지사(忠義之士)요.”
놀란 조조도 마주 절을 하며 물었다.
“현령의 높은 이름은 어떻게 되시오?”
“저는 성이 진(陳)이요, 이름은 궁(宮), 자는 공대(公臺)로 씁니다. 비록 작은 고을의 현령에 머물러 있으나 뜻은 비루하고 작지 아니하 려고 애쓰던 차에 공의 의기를 보게 되니 실로 감동이 큽니다. 원컨 대이 하찮은 벼슬을 던지고 공을 따라가고자 하니 부디 물리치지 마십시오.”
조조는 진궁의 그 같은 말에 자신의 귀를 의심할 정도로 기뻤다. 감사와 함께 그의 뜻을 받아주었다.
진궁은 그 밤 안으로 노자에 쓸 약간의 금은을 거두어 조조와 함 께 떠났다. 각기 신분을 알아볼 수 없도록 옷을 갈아입고 칼 한자루 씩을 등에 진 채 조조의 권속(屬)들이 기다리는 진류로 나는 듯 말 을 몰았다.
떠난 지 사흘째 되던 날 성고(皐) 부근에 이르니 해가 뉘엿뉘 엿했다. 조조가 한 숲이 짙은 곳을 채찍으로 가리키며 진궁에게 말 했다.
“저 속에 여백사(呂伯奢)란 분이 살고 계시는데 가친과는 형제를 맺으신 분이외다. 가서 집안 소식도 물을 겸 하룻밤 묵어 갈 곳을 찾 아보는 게 어떻겠소?”
“그것 참 잘됐습니다. 그리로 가십시다.”
진궁이 그렇게 찬성하자 두 사람은 여백사의 집으로 말을 몰아갔다.
여백사는 조조를 반갑게 맞아들이며 물었다.
“내가 듣기로 조정에서는 널리 파발을 보내 너를 잡아들이라고 성화라더라. 네 아버님이야 진류로 피해 가셨으니 무슨 일이 있으랴만 너는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느냐?”
“만약 여기 이 진(陳) 현령이 없었더라면 이 몸은 벌써 동탁에게
끌려가 뼈는 부숴져 가루가 되고 살도 짓이겨진 고깃덩어리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조조는 그렇게 서두를 꺼낸 뒤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그 말을 들은 여백사는 진궁에게 늙은 몸을 굽혀 절을 하며 진심으 로 감사를 올렸다. 그리고 청하기도 전에 그쪽에서 먼저 하룻밤 쉬 어 가기를 권했다. 실로 자식을 구해준 이를 대하는 아비와 다름이 없었다.
조조와 진궁이 은근히 기뻐하고 있는데 여백사가 문득 몸을 일으 키더니 안채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 돌아온 여백사가 말했다.
“마침 내 집에는 좋은 술이 없네. 잠시 기다리면 서촌(西村)에 가 서 한 단지 사 오겠네. 그때 마주 앉아 회포를 푸세.”
그러고는 나귀를 타고 총총히 집을 나갔다. 궁하게 쫓겨다니던 끝 이라 그런지 조조의 눈에는 까닭 없이 서두는 것같이 보였다. 안에 들어가 식구들로부터 무슨 말을 들은 게 아닌가 더럭 의심이 났다. 여백사는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진궁도 은근히 걱정이 되는 지 얼굴이 흐려지고 조조는 더욱 의심이 났다. 그래서 더욱 귀를 모 아 바깥의 동정에 마음을 쓰고 있는데 문득 집 뒤에서 칼 가는 소리 가 들렸다.
“여백사는 아무래도 제 친아버지는 아니오. 조금 전에 떠나는 모 습에 자못 의심스러운 데가 있었으니, 한번 가만히 엿들어봅시다.”
조조가 그렇게 말하자 진궁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몰래 초당 뒤로 숨어들어 귀를 기울였다.
“묶어서 죽일까 그냥 죽일까?”
누군가가 굵은 소리로 물었다.
“혹시라도 놓치면 큰일이네. 묶어서 죽이세”
또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조조도 진궁도 그런 그들의 대화를 엿듣자 낯빛이 변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진궁이 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조조가 칼자루에 손을 대며 분연히 말했다.
“역시 그랬군. 만약 지금 우리가 먼저 손을 쓰지 않으면 반드시 우리가 저들에게 사로잡혀 죽게 될 것이오.”
그러자 진궁도 할 수 없다는 듯 칼을 빼들고 조조를 따랐다. 두 사 람은 똑바로 후원으로 뛰어들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눈에 띄는 사람 은 모조리 말 한마디 할 틈조차 주지 않고 죽여버렸다. 죽여놓고 보 니 여백사의 처자와 남녀 종을 합쳐 여덟이나 되었다.
그래도 혹 남은 사람이 있을까 하여 두 사람은 집을 뒤지기 시작 했다. 그런데 부엌 뒤로 갔을 때였다. 돼지 한 마리가 묶인 채 몸을 버둥거리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은 어이가 없었다. 돼지를 잡으려고 칼을 갈고 있던 사람 을 의심이 지나쳐 모조리 죽여버린 것이었다. 진궁이 탄식했다.
“맹덕께서 의심이 많아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게 되었구려. 우리 를 대접하려고 준비하는 사람들을 도리어 죽여버렸으니 이 일을 어 찌하면 좋겠소?”
조조도 실로 난감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이었다. 조조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냉정하게 대답했다.
“이제 와서 어쩌겠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니 우리나 서둘러 달아납시다.”
그리고 서둘러 말을 끌어내 왔다.
두 사람이 채 몇 리도 달리기 전이었다. 저만큼 여백사가 나귀 안 장에 술 두 병을 사서 매달고 급히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손에는 과 일과 채소까지 싸들고 있었다.
“조카와 진현령은 무슨 일로 그리 급히 떠나려 하는가?”
여백사는 조조와 진궁을 보자 멀리서부터 큰소리로 물었다. 조조 는 찔끔했으나 태연한 목소리를 꾸며 대답했다.
“죄인으로 쫓기는 몸이 어찌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있겠습니까. 공 연한 누만 끼칠까 두려워 이만 떠날까 합니다.”
그러자 여백사는 어림없다는 듯 두 손까지 저으며 조조와 진궁을
말렸다.
“나는 이미 집안 사람들에게 돼지까지 잡으라고 시켜놓았네. 거기 다가 이렇게 술과 안주까지 장만해 오는 길인데 하룻밤 묵어 가지 않겠다니 될 법이나 한 말인가? 속히 말을 돌리게.”
그러면서 여백사는 조조의 말고삐를 잡으며 놓아주려 하지 않았 다. 해놓은 짓이 있는 만큼 조조는 그 말엔 따를 수 있는 처지가 못 됐다.
“그냥 갑시다.”
진궁에게 나직이 속삭이고는 말에 채찍을 가했다. 진궁도 조조와 함께 행동해온 터라 여백사를 마주 대하기가 면구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역시 말에 채찍질을 해 여백사를 그냥 지나치려는 조조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그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자기들을 바라보고 있는 여백 사를 지나칠 무렵이었다. 조조가 갑자기 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더니 채찍을 들어 여백사의 뒤쪽을 가리키며 소리쳐 물었다.
“백부님, 저기 오는 저 사람이 누굽니까?”
그 말에 여백사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조조 가 재빨리 칼을 뽑아 여백사를 내리찍었다. 비명 소리 한번 없이 여 백사의 목이 나귀 등에서 떨어졌다.
“아니 맹덕, 이게 무슨 짓이오?”
저만치서 급히 말을 세운 진궁이 놀라 소리쳤다.
“물론 이 사람은 의리가 깊고 우리에게 호의를 가지셨소. 그러나 한번 집에 돌아가 권속들이 몰살당한 걸 보면 마음이 달라질 것이 오. 결코 우리를 그냥 둘 리 없소. 만약 무리를 모아 우리를 쫓기 시 작하면, 그 화는 실로 피하기 어려울 것이오.”
“하지만 그 사람이 죄 없는 줄 알면서도 죽이는 것은 크나큰 불의 가 아닐 수 없소.”
진궁이 한층 꾸짖는 듯한 목소리로 조조를 반박했다. 조조는 가만 히 그를 보다가 낮고 조용하게 대답했다.
“차라리 내가 세상 사람들을 저버릴지언정,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저버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오[寧敎我負天下人, 休敎天下人我負].”
남을 배반할지언정 배반당하지는 않으리란 차가운 결의였다. 그 말을 들은 진궁은 이미 더 이상의 말이 필요없음을 알았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여백사를 베려고 마음먹을 때까지 조조 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그냥 달아나는 것, 여백사를 억지로 끌고 가 는 것, 그리고 사실을 말하여 용서를 구하는 것. 조조도 되도록이면 여백사를 죽이지 않고 그 어려움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 어느 편도 안전한 방도는 못 되었다. 그냥 달아나는 것 은 물론, 사실을 말하고 용서를 받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인간의 감정 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자신이 가는 곳과 목 적과 현재 상태를 아는 여백사가 한번 마음이 변해 자신을 뒤쫓으 려 들면 결국은 헤어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질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여백사를 끌고 가는 일도 쉽지 않았다. 어린아이라 속이거 나 꾀어 데려갈 수도 없고 짐짝이라 묶어서 싣고 갈 수도 없는 일이 었다.
그리하여 조조가 마지막으로 의지한 것은 의의 크고 작음과 목적 의 정당함이었다. 천하를 위한 대의 앞에서는 사사로운 은의는 희생 될 수도 있고, 만백성을 학정虐政)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 도 용납되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조조의 그 같은 결정은 곧 그의 정신이 전통적인 유가의 가르침 과 결별하는 걸 뜻하기도 했다. 그때껏 그가 힘들여 걸어온 것은 충 효와 인의의 길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태평스런 시대의 원리였고, 돌이킬 수 없는 혼란의 시대에는 맞지 않았다.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낸 것은 법가와 종횡가와 병가의 통치술이었지 결코 유가의 가르 침은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자기의 시대가 그 난세로 치닫고 있다고 믿게 되면서부터 조조의 생각은 그렇게 기울어졌다. 그런데 이제 그게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뒷사람이 흔히 그를 폄하여 말하는 ‘난세의 간웅’으로 가는 첫걸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진궁은 달랐다. 아직도 유가적인 이상에 사로잡혀 있는 진 궁은 조조를 그 이상을 실현할 인물로 믿었다. 처음 붙들려 온 그와 대면했을 때 그가 내세운 대의가 그러했고, 며칠 함께 동행하는 동 안에도 특별히 그런 환상을 깨뜨릴 만한 일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런 데 여백사를 죽임으로써 진궁의 그 같은 환상은 산산이 흩어지고 만 것이었다.
진궁은 크게 실망했다. 밤길을 달리는 동안도, 객점(客)에 투숙 하여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도 진궁은 말없이 자기가 해야 할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조조는 배불리 저녁을 먹자마자 곧 잠에 떨어졌다. 마치 아무 일 도 없던 사람처럼 깊고 편안하게 잠든 조조를 보자 진궁은 한층 그 의 사람됨에 두려움이 일었다.
‘나는 조조가 훌륭한 인간이라 믿어 어렵게 얻은 벼슬까지 버리고 그를 따랐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마음이 모질고 독하기가 이를 데 없구나. 그대로 두면 반드시 천하의 큰 근심거리가 될 것이다……………. ‘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진궁은 문득 그를 살려두어서는 안 되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칼을 빼들고 조조의 침상 곁으로 다가갔 다. 그때 다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라를 위해 일하고자 그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를 잘못 본 것이었으나, 한때나마 그를 주인으로 섬기려고도 마음 먹었다.
그런데 며칠도 안 돼 그를 죽인다니 아무리 그가 불인(不仁)하다 하 나 의로운 일은 되지 못하리라. 거기다가 잠든 자를 찌르는 것은 하 찮은 자객이나 할 짓이 아닌가. 차라리 그를 버리고 떠나 달리 좋은 사람을 찾아보는 일이 나으리라.’
이런 진궁은 칼을 다시 칼집에 꽂고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구간에서 매인 말을 끌어내 그 밤으로 어디론가 떠나가버 렸다.
한편 조조는 한참 늘어지게 자고 나니 진궁이 보이지 않았다. 그 의 짐이 없어진 걸 보고 짐작은 되었지만 그래도 행여나 하는 마음 으로 마구간에 가보았다.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떠난 것임에 틀림 없었다.
‘이 사람은 내가 여백사를 죽이는 걸 보고 의롭지 못하다 하여 떠 나간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진궁, 그대도 알아야 하네. 나도 자네가 섬기는 그 인의에 의지해 살고 싶어했음을. 그러나 이미 세상은 그 가르침만으로는 구할 수 없네. 오히려 언젠가 그 인의는 그대 스스 로를 상하게 하는 칼이 될 것이네……………’
조조는 씁쓸하게 웃으며 그렇게 중얼거린 뒤 급히 떠날 채비를 했다. 우선은 그냥 떠나갔지만 진궁이 언제 마음이 변해 자신을 관 가에 일러바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쓸데없이 꾸물거리다가 어려운 지경에 떨어지느니 고단하더라도 발길을 재촉해 한시라도 빨리 진 류로 가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다.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달린 끝에 무사히 진류 땅에 이른 조조는 부친의 놀람을 달래며 자기의 포부를 밝혔다.
“이미 한실은 스스로 역적을 몰아낼 힘이 없습니다. 동탁을 죽이는 길은 의병을 모아 그의 군사를 꺾는 길뿐입니다. 가산을 모두 털 더라도 의로운 군사를 길러 대업을 이루는 기틀이 되도록 허락해주 십시오.”
늙어갈수록 아들의 말에 의지하고 사는 조숭이었다. 선선히 허락하며 덧붙였다.
“선친께서 물려주신 재물이 적지 않았으나 내가 불초하여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게다가 연전 억만 전을 내어 태위 벼슬을 산 일로 더 욱 줄었으니, 자금이 적어 뜻대로 일을 이루지 못할까 걱정이다. 들 으니 인근에 효렴 위홍(衛弘)이란 이가 있어 재물은 소홀히하고 의 를 중히 여긴다는구나. 그가 대단한 거부이고 또 네 뜻이 대의에 어 그러지지 않으니 한번 도움을 청해볼 만하다. 만약 그의 도움을 얻 을 수만 있으면 네 뜻을 펴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조조에게는 자못 요긴한 조언이었다. 이에 조조는 크게 술자리를 벌이고 위홍을 청했다. 조조의 명성은 익히 들은 바라 위홍도 그 청 을 받아들였다. 그가 조조의 집에 이르자 조조는 그를 윗자리에 앉 게 한 뒤 공손히 절을 하며 입을 열었다.
“이제 한실에는 주인이 없고, 오직 동탁이 권세를 오로지하고 있 을 뿐입니다. 그가 위로 임금을 속이고 아래로 백성을 해치니 천하 뭇사람들이 모두 그 고기를 씹지 못해 이를 갈고 있습니다. 조조가 힘을 다해 사직을 붙들어보려 하나 한스럽게도 너무나 힘이 모자랍 니다. 공께서는 충의를 높이 여기는 지사라 들었기로 부끄러움을 무 릅쓰고 감히 도움을 청합니다. 부디 천하 만민을 생각하시어 이조(曹) 아무개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주십시오.”
진지하고도 간곡한 조조의 목소리였다.
위홍이 대답했다.
“나 역시 그 같은 뜻을 품은 지 오래이나 한스럽게도 앞장서 이끌 만한 영웅을 만나지 못했을 따름이오. 이제 맹덕께서 그토록 장한 뜻을 품으셨다니 가산을 흩어서라도 돕고 싶소이다.”
바로 조조가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이에 조조는 크게 힘을 얻어 이튿날부터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다. 먼저 황제의 명을 사칭하여 충 의지사의 궐기를 촉구하는 글[矯詔]을 여러 곳으로 띄운 뒤, 커다란 백기에 ‘충의’ 두 자를 크게 써서 세워두고 인근의 용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흩어져 은밀히 힘을 기르고 있는 옛 친구들과 피 붙이들에게도 사람을 보내 때가 왔음을 알렸다.
동탁의 악명이 워낙 높아 충의 두 글자만으로도 조조의 깃발 아 래로 모여드는 용사는 많았다. 거기다가 동탁을 찌르려다 실패한 것 으로 더욱 높아진 조조의 이름과 하루에 백만 전을 써도 십 년은 간 다는 위홍의 재산이 겹치니 그야말로 장마철에 비 쏟아지듯 의병들 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가장 큰 힘이 된 것은 역시 조조의 부름을 받 고 달려온 임협(俠) 시절부터의 손발들이었다.
맨 처음으로 조조의 막하에 도착한 것은 악진(樂進)이었다. 양평 (陽平) 위국(衛國) 사람으로 자를 문겸(文)이라 쓰는 그는 황건란 때 함께 향리를 지키던 용사들을 중심으로 천이 넘는 인마를 이끌고 달려왔다. 몸집은 작아도 당차고 날래 젊을 때부터 조조의 아낌을 받던 사람인데 조조가 시킨 대로 향리에서 조용히 힘을 기르고 있다가 때맞추어 돌아온 것이었다. 조조는 크게 기뻐하며 우선 그를 사
마(司馬)로 삼아 좌우에 있게 했다.
그다음에 온 것은 이전(李典)이었다. 악진과 비슷한 경위로 향리 인 산양군(山陽郡) 거록 땅에서 숨어 지내다가 조조가 부르자 역시 무리 수백을 이끌고 늦을세라 달려왔다. 조조는 또한 크게 기뻐하며 그의 문재(文)를 높이 쳐 장전리(帳吏)로 삼았다.
생가 쪽의 피붙이인 하후돈과 하후연도 이전과 악진의 뒤를 이어 각기 천이 넘는 인마를 이끌고 도착했다. 황건란 이래로 자신을 따 르는 향리 용사들에다 다시 동탁 토벌의 대의로 모아들인 장정들이 었다. 뿐만 아니라 종형제간인 둘 모두가 빼어난 무장들이라 그들이 오자 조조는 한층 든든했다. 하후돈을 비장(裨將)으로 삼고 하후연 을 별부사마部司馬)로 삼아 군사(軍事)를 맡겼다.
친가로 사촌이 되는 조인과 조홍 역시 각기 천이 넘는 인마를 이 끌고 조조를 돕고자 달려왔다. 둘 다 용맹하기가 하후씨(夏) 형 제에 못지않은 장재(將材)들로 조인은 회수(淮)와 사수 어름 에서 힘을 기르고 있다가 따르는 무리와 함께 달려왔고, 조홍은 조 씨(曹氏)의 본거지인 패국 초현의 장정들을 이끌고 달려온 길이었 다. 조조는 그 두 아우를 각기 사마(司馬)로 삼고 하후돈 형제와 함 께 군사를 돌보게 했다.
“허자원은 왜 오지 않는가?”
조인과 조홍이 오던 날 크게 술자리를 열고 오랜만에 만난 옛 패 거리들과 술잔을 나누며 회포를 풀던 조조가 불쑥 좌우에게 물었다. 자원은 허유의 자였다.
당연히 올 줄 알았던 옛 친구가 아직껏 당도하지 않은 것이 섭섭 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좀 가볍기는 하지만 그의 번뜩이는 재치와 매서운 안목도 조조에게는 절실히 필요했다. 하후돈, 하후연, 이전, 악진, 조홍, 조인 모두가 다 빼어난 인재였지만 모사로서는 아무래 도 부족한 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원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악진이 결기 서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원본초와 가까이 지내는 건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그의 사람이 되었다니?”
“주공께서 의심스러우시다면 한번 원소의 군막에 들러보십시오. 상객(上)의 자리에 앉아 입에 혀처럼 구는 그를 볼 수 있을 것입 니다.”
악진이 더욱 못마땅한 듯 대답했다. 조조가 오히려 달래듯 대답했다.
“원본초 또한 대의를 위해 힘을 쓰는 사람이오. 허자원이 그를 돕 는다고 탓할 게 무엇이겠소?”
그러나 말과는 달리 조조는 까닭없이 마음이 어두워졌다. 허유의 지모에 의지할 수 없게 된 아쉬움을 훨씬 넘는, 막연한 불안 같은 것 이었다. 뒷날 원소와 함께 생사를 걸고 천하를 다투게 될 일이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라도 와닿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