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2화 : 데운 술이 식기 전에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2화 : 데운 술이 식기 전에


데운 술이 식기 전에

아무리 강동의 맹호 손견의 군사들이라 하지만 군량과 마초가 없 고서야 어떻게 견디겠는가. 며칠도 안 돼 끼니를 굶게 되자 군사들 의 사기는 떨어지고, 아직 이월이라 들풀을 뜯길 수도 없으니 못 먹 은 군마도 싸움터를 닫지 못할 지경으로 되어갔다. 세작이 나는 듯 이 그 소식을 관 안으로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숙이 화웅에게 한 꾀를 말했다.

“적의 진중이 어지럽다니 실로 좋은 기회입니다. 오늘 밤 야습을 하되, 제가 한 떼의 군사로 손견의 진채 뒤를 칠 터이니 장군은 앞 을 공격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손견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 입니다.”

화웅 또한 장재(將)가 있는 자라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날 밤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뒤 조용히 관을 내려왔다. 달은 밝고 바람은 맑은데, 손견의 진채에 이르니 어느새 밤은 반이나 지난 뒤였다. 화 웅은 곧장 북을 치고 함성을 울리며 손견의 진채를 급습했다.

놀란 손견이 급히 갑옷을 꿰고 말 위에 오르자 마침 화웅이 나타 났다. 몇 마디 나눌 사이도 없이 두 범 같은 장수는 맞붙었다. 그러 나 말이 몇 번 엇갈리기도 전에 손견의 진채 뒤로 이숙의 군사들이 달려들었다. 앞뒤로 적을 맞은 데다 이숙의 군사들이 놓은 불길까지 치솟자 손견의 군사들은 크게 혼란에 빠졌다. 여러 장수들이 각기 흩어져 혼전을 하는데, 오직 조무(祖茂)만이 손견을 뒤따르며 함께 에움을 헤치고 있었다.

손견이 원래 화웅을 두려워할 장수는 아니었지만 워낙 형세가 불 리하니 손발이 제대로 맞아주지 않았다. 그때 조무가 나타나 길을 열자 다급한 김에 화웅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더욱 기세가 오른 화웅이 쫓았다.

손견은 화살을 집어 따라오는 화웅에게 쏘았다. 화살을 두 대나 날렸지만 화웅은 번번이 몸을 틀어 피해버렸다. 그런데 세 번째 화 살을 날리려 할 때였다.

손견이 지나치게 힘을 주어 당긴 탓인지 작화(畵弓)이 우지끈 부러져버렸다. 할 수 없이 말을 달려 달아나기 바빴다. 뒤따라오던 조무가 말했다.

“주공(公)의 머리에 있는 붉은 싸개[]가 적병의 눈길을 끌어 주공을 알아보게 됩니다. 벗어 던지시고 제 투구를 쓰십시오.”

손견은 황망한 가운데도 조무의 말을 따라 붉은 머리싸개를 벗어던지고 그가 벗어주는 투구를 썼다. 조무는 재빨리 손견이 버린 머리싸개를 대신 쓰고 길을 나누어 달아났다.

화웅의 군사들은 붉은 머리싸개만 보고 뒤쫓았으므로 조무의 투 구를 바꿔 쓴 손견은 무사히 사잇길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러나 조 무는 그렇지 못했다. 화웅의 급한 추격을 받다가 한군데 불탄 민가 에 이르렀다. 조무는 다급한 김에 머리싸개를 타다 남은 기둥에 걸 어놓고 부근의 나무숲 속에 몸을 숨겼다.

화웅의 군사들은 붉은 머리싸개를 보고 사면을 에워쌌으나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으스름한 달빛 아래여서 붉은 머리싸개가 걸린 나 무 기둥이 손견처럼 보인 까닭이었다. 그 용맹이 두려워 멀찌감치서 화살만 쏘아댔다.

아무리 활을 쏘아도 손견이 움직이지 않자 비로소 화웅의 군사들 은 속은 줄 알았다. 그제서야 다투어 앞으로 내달으며 붉은 머리싸 개를 얻어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 들었다. 그때 돌연 숲 뒤에서 한 장 수가 말을 달려 나오며 화웅의 군사들을 베기 시작했다. 조무였다. 조금이라도 손견에게 도망칠 수 있는 여유를 주기 위해 달아나는 대 신 맞부딪쳐 온 것이었다.

화웅이 그 꼴을 보고 있을 리 없었다.

“이놈, 내 칼을 받아라.”

외침과 함께 대도를 휘둘러 조무를 내리쳤다. 다 잡은 손견을 놓 치게 된 분함까지 보태 내려친 그 기세가 여간 위맹스럽지 않았다. 조무가 쌍도를 들어 막으려 했으나, 칼이 작고 가벼운 데다 에움을 헤치느라 지쳐 있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대로 화웅의 대도에 쪼개지며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손견과 함께 큰 뜻을 품고 전장을 달리기 십여 년, 범 같은 장수로 강남에서 용맹을 떨치던 장수치고 는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화웅은 날이 새도록 손견의 군사들을 죽이다가 조무의 목과 사로 잡은 군사를 앞세우고 돌아갔다. 각기 흩어져 혼전을 벌이던 정보와 황개, 한당 셋은 날이 밝은 뒤에야 간신히 군사를 수습해 손견을 찾 아왔다. 그러나 조무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손견은 슬픔을 이기 지 못했다.

“오오, 대영(大榮, 조무의 자), 그대는 나를 대신해 죽었구나. 이제 어디서 다시 그대의 영걸스런 용자(容)를 볼 수 있으리오…………….” 

손견이 그렇게 목놓아 우니 정보, 황개, 한당 등도 함께 눈물을 흘 렸다. 같은 부춘 사람으로 허창의 난을 토벌할 때부터 십여 년이나 되는 세월을 그림자처럼 따르던 조무였기에 손견의 슬픔은 더욱 컸다.

한편 손견이 화웅에게 크게 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원소는 크게 놀랐다.

“일전에는 포(鮑)장군의 아우가 명을 지키지 않고 함부로 군사를 움직여 제 목숨을 잃고 많은 군사를 죽게 하더니 이제는 손문대 臺)까지 화웅에게 져서 예기가 꺾였구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제후들을 불러모으고 그렇게 물었으나 한결같이 대답이 없었다. 동탁의 장수 화웅이 손견까지 꺾었다는 말을 듣자 모두들 몸을 사리 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긴댔자 만신창이가 될 것이고 지면 목숨까지 잃을 판이니 서로 앞장서기를 꺼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소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런 제후들을 둘러보다가 눈길이 공손찬에 이르렀을 때였다. 등 뒤에 세 사람이 서 있는데 하나같이 용모가 범상 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그들 모두 입가에 냉소를 띠고 있는 게 더욱 원소의 눈길을 끌었다.

“공손 태수 등 뒤에 서 있는 이들은 뉘시오?”

원소가 문득 공손찬에게 물었다. 공손찬이 기다렸다는 듯 유비를 제후들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어릴 적부터 저와 한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유비올 시다. 탁군 사람으로 얼마 전까지도 평원령으로 있었소이다.”

“그렇다면 지난날 황건을 무찌르는 데 공이 컸던 유현덕(劉德) 이 아니시오?”

조조가 금세 유비를 알아보고 그렇게 물었다. 몇 해 전 영천(川) 부근에서 언뜻 만나고 지나쳤지만 조조에게도 유비는 인상 깊었다. 그러나 분주했던 그 몇 해 동안 다시 대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유 비 또한 스물대여섯의 시골뜨기 청년에서 서른을 훌쩍 넘은 고을 수 령으로 변해 얼른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소이다. 교위께서 어떻게 아시오?”

“그의 공도 공이려니와 지난날 황건을 파할 때 한번 만난 적이 있소이다.”

그러고는 유비에게 인사를 건넸다.

“유() 현령은 그간 무양하시었소?”

유비도 공손하게 손을 모으며 답례했다.

“진작에 알아뵈었습니다만 하찮은 졸(卒伍)의 몸이라 감히 아는 체를 못했습니다.”

공손찬은 조조가 유비를 아는 체하자 힘을 얻어 유비로 하여금 원소와 제후들에게 일일이 절하여 보게 한 뒤 그의 공과 출신을 자 세히 말하였다.

원소도 곧 유비를 알아보았으나 조조처럼 아는 체는 아니했다. 중 랑장 노식이 그 어리고 하찮은 시골뜨기와 자신을 나란히 세워두고 인사를 시키던 불쾌한 추억에다, 그 자리에서 구태여 아는 체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다만 자리 하나를 내주게 하여 유비를 제 후들 틈에 앉게 했을 뿐이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제후의 열에 끼겠습니까.”

유비가 그렇게 말하며 사양했다. 그러자 원소가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를 존중하는 것은 그대의 이름이나 관작이 아니라 그대가 제실의 종친이기 때문이오. 근왕(勤王)의 대의를 내세우는 우리가 제실을 존중하지 않고 누가 하겠소?”

이에 유비도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끝자리에 조심스레 앉았다. 그 뒤를 관우와 장비가 다시 석상처럼 시립해 섰다.

그때 홀연 탐마(馬)가 달려와 알렸다.

“화웅이 철기를 거느리고 관을 내려와 진채 앞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긴 막대에 손태수의 붉은 머리싸개를 걸어놓고 우리 군사를 놀리며 싸움을 걸어오고 있습니다.”

원소가 급히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나가서 한번 싸워보겠소?”

그 말에 원술의 등 뒤에서 유섭(兪)이란 장수가 나서면서 소리쳤다.

“소장이 한번 가보겠습니다.”

원소가 기뻐하며 허락했다.

“장하다. 가서 화웅의 목을 얻어 오너라.”

허락을 받은 유섭은 날랜 말을 골라 타고 씩씩하게 화웅을 맞으 러 나갔다. 그러나 그의 발굽 소리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급한 보고 가 좌중에 들어왔다.

“유장군께서는 화웅과 겨룬 지 삼 합도 못 돼 화웅의 칼에 목을 잃으셨습니다.”

그 기막힌 전갈에 자리에 있던 제후들은 모두 놀랐다. 잠시 서로 쳐다볼 뿐 말이 없는 가운데 불쑥 한 사람이 일어났다. 기주 자사 한 복(韓馥)이었다.

“내 상장 가운데 반봉(鳳)이 있소이다. 화웅을 목 베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오.”

“그가 어디 있소? 얼른 나가게 하여 더는 예기가 꺾이지 않도록 하시오.”

원소가 급하게 반봉의 출전을 명했다. 한복에게 불려나온 반봉의 위풍은 과연 늠름했다. 큰 도끼를 들고 성나 부릅뜬 눈으로 달려 나 가는 기세가 단번에 화웅을 장작 패듯 쪼개놓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제후들의 기대대로는 되지 않았다. 반봉이 달려

나간 지 오래지 않아 다시 급한 전갈이 날아들었다.

“반장군 역시 화웅의 칼에 목을 잃으셨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제후들은 모두 낯빛까지 변했다. 포충을 죽이고 손견을 머리싸개까지 벗어던지고 도망가게 할 때만 해도 화웅은 아 직 그리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에서 두 사람의 상장 군(將軍)을 잠깐 동안에 베어 넘기는 것을 보자 모두 간담이 서늘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상장 안량(顔)과 문추(醜)가 아직 이곳에 이르지 못한 게 애석하구나. 둘 중에 하나만 여기 있어도 어찌 화웅 따위를 두려워 하랴!”

더는 나서려는 제후가 없는 걸 보고 원소가 큰 소리로 탄식했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끝자리 부근에서 한 사람이 나 서며 크게 소리쳤다.

“원컨대 소장이 나가보겠습니다. 틀림없이 화웅을 목 베 장하帳 下)에 바치오리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보니, 키가 아홉 자에 수염이 두 자, 봉의 눈에 누에 같은 눈썹이 꿈틀거리는데, 얼굴은 잘 익은 대춧빛 같고 목소 리는 커다란 종을 울리는 것 같은 장수가 장막 앞에 나와서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구요?”

낯선 얼굴이라 원소가 좌우를 보며 물었다. 공손찬이 나서서 대답했다.

“유현덕의 아우로 관우라 합니다.”

“지금 벼슬은 무엇이오?”

“유현덕을 따르면서 지금까지는 평원현의 마궁수로 있었습니다.”

공손찬이 그렇게 대답하자 돌연 그 자리에 있던 원술이 성난 목소리로 관우를 꾸짖었다.

“너는 우리 제후들에게 대장감이 없는 줄 아느냐? 한낱 궁수로서 어찌 감히 그토록 어지러운 말을 하느냐? 썩 나가거라.”

그 말에 관우의 붉은 얼굴이 노기로 더욱 붉어지고 공손찬도 은 근히 성난 기색을 보였다. 그때 조조가 원술을 말렸다.

“원공로(公路, 원술의 자)는 잠시 노기를 참으시오. 이 사람이 이미 나서서 큰소리를 쳤으니 반드시 그만한 용력과 재략이 있을 것 같 소. 시험 삼아 한번 내보내봅시다. 만약 이기지 못하고 돌아오면 그 때 꾸짖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조조의 말에 참는 것인지 아니면 얼른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지 원술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자리의 제후들도 모두 조조의 말이 옳 다 여겼다. 그러나 원소만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한낱 궁수를 내보내 싸우게 한다면 반드시 화웅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오.”

그런 원소를 조조가 다시 달랬다.

“이 사람의 의표(儀表)가 속되지 않으니 화웅이 어찌 그가 한낱 궁수인 줄 알아보겠소? 한번 내보내봅시다.”

그래도 여전히 원소는 허락하려 들지 않았다. 조조와 원소의 차이 점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조조가 능력만 있으면 출신이나 경력 이나 세상의 평판 따위는 무시하고 사람을 쓴 것에 비해 원소는 그 렇지가 못했다. 원소는 언제나 인간 그 자체보다도 가문이나 직위, 경력 따위 등 그에게 부가된 사회나 제도의 인정을 중시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에 의지해 사람을 판단하고 쓰는 일은 평화로운 시대를 유지하는 데는 몰라도 어지러운 시대에 대처해나가는 데는 힘이 되기 어렵다. 평화로운 시대는 종종 굳은 사회, 멈추어진 사회 와 같은 뜻이어서 기존의 지식과 공식으로도 그럭저럭 풀어갈 수 있 다. 그러나 움직이는 사회, 변화하는 사회와 일치하기도 하는 난세 에는 그 굳어버린 지식과 시효가 지나가버린 공식만으로 모든 걸 해 결할 수는 없다. 어쩌면 뒷날 조조와 원소의 다툼에서 승패를 결정 한 것들 가운데 중요한 것은 그런 두 사람의 차이에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원소가 흔연히 출전을 허락하지 않자 이번에는 관우가 결연히 말했다.

“만약 이기지 못하면 내 목을 쳐도 원망 않겠소.”

관우가 자기 목숨까지 걸자 원소도 더는 말리지 않았다. 제후들도 자신 없는 자기들의 상장을 내보내는 것보다는 관우의 위풍에 한 가 닥 기대를 걸었다.

“이 술 한잔을 들고 가시오.”

관우가 출전의 허락을 받고 막 장막을 나서려 할 때 조조가 좌우 를 시켜 데운 술을 내오게 하며 권했다. 어쩌면 관우에 대한 일생의 흠모가 그 순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관우가 그대로 장막을 젖히고 나서며 호기롭게 대답했다.

“술은 그냥 따라두십시오. 얼른 갔다 와서 마시겠습니다.”

마치 잊어두고 온 물건 찾으러 나가는 사람 같았다. 만용인지 의 기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그 씩씩한 기상에 제후들은 다시 한번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장막을 나온 관우는 청룡언월도를 가져오게 한 뒤 몸을 날려 말위에 올랐다. 적진을 향해 말을 닫는 모습은 마치 한 마리 성난 용이 푸른 바다에서 치솟는 것 같았다.

뒤이어 북소리와 함성이 크게 일고, 하늘과 땅이 뒤집히며 바위와 산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장막 안의 제후들은 모두 크 게 놀라 낯빛까지 변했다. 그러다가 결과가 궁금하여 사람을 보내 알아보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말방울 소리도 요란하게 말안장에 화 웅의 머리를 단 관운장이 돌아왔다.

“자, 여기 화웅의 목이 있소이다.”

관운장이 화웅의 목을 땅에 내던지며 말 위에서 뛰어내리더니 똑 바로 조조가 따라둔 술잔을 들었다. 데운 술이 식지 않아 아직 따뜻 하였다.

유비도 유비지만 그 자리에서 누구보다 기뻐한 것은 조조였다. 관 우 스스로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그 용맹을 기렸다. 이때 유비의 등 뒤에서 장비가 나서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우리 형님께서 화웅을 목 베어 왔으니 어서 관을 쳐 깨뜨리고 동 탁을 사로잡을 일이지, 여기서 무엇을 기다리고들 계십니까?”

딴에는 스스로 선봉이 되어 한바탕 싸우고 싶은 뜻을 나타낸 말 이었다. 관우가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그도 여럿에게 솜씨를 보이고 싶어 배길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러잖아도 조조가 지나치게 관우를 추켜올리는 데 심사가 뒤틀려 있던 원술이 다시 좁은 속을 드러냈 다. 낯이 벌게지도록 성을 내며 장비를 꾸짖었다.

“비록 작은 공이 있었기로서니 대신과 제후들도 서로 겸양을 하고 있는데, 한낱 현령의 졸개가 어찌 이렇게 제 힘을 뽐낼 수 있단 말이냐? 저자들을 모두 장막 밖으로 끌어내라.”

조조가 급히 원술을 말렸다.

“공이 있는 자는 상을 줌이 마땅하오. 어찌 귀천만을 헤아리겠소?”

그 말에 원술은 더욱 불같이 화를 냈다.

“공들이 한낱 현령 따위를 이토록 무겁게 여기신다면 나는 그만 돌아가겠소.”

좁아터진 소견머리로 보아 능히 그럴 만한 위인이었다. 맹주인 원 소도 썩 유쾌한 얼굴은 못 되었다. 그 공기를 알아차린 조조가 급히 생각을 바꾸고 좋은 말로 원술을 붙들었다.

“어찌 말 한마디로 큰일을 그르치겠소? 이 조조가 지나쳤다면 용서하시오.”

그리고 공손찬에게 권하여 유, 관, 장 삼형제와 함께 자신의 진채 로 돌아가도록 했다.

공손찬이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가자 다른 제후들도 어색한 표정 으로 헤어졌다. 조조는 몰래 사람을 공손찬에게 보내어 술과 고기를 전하며 유현덕 삼형제를 위로하게 했다. 마땅히 맹주인 원소가 해야 할 일을 조조가 대신하고 있는 셈이었다. 어떤 면에서 원소는, 각기 개성이 다르고 추구하는 이익이 다른 그 제후들의 모임에서, 그들의 충돌을 막고 이익을 조정할 수 있는 맹주로는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 는 편이 옳다.

한편 화웅의 졸개들은 사수관으로 쫓겨 들어가 이숙에게 화웅이 죽은 일을 알렸다. 두렵고 막막한 이숙은 급히 위급을 고하는 글을 써서 낙양의 동탁에게 올렸다.

화웅의 잇단 승리에 마음을 놓고 있던 동탁은 그 소식에 다시 놀 랐다. 급히 모사 이유와 양자 여포 등을 불러놓고 대책을 의논했다. 이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우리는 상장 화웅을 잃고 적의 세력은 갈수록 커져가고 있 습니다. 먼저 하실 일은 안에서 바깥의 적과 손을 잡을 자를 제거하 는 것입니다.”

“안에서 호응하는 자라니?”

동탁이 이유의 말을 얼른 알아듣지 못하고 물었다.

“지금 적의 맹주는 원소입니다. 그런데 그 숙부 원외袁)가 태부 (太傅)로 이 낙양성 안에 있습니다. 혹시라도 안에서 적과 내통이라 도 하게 되면 매우 위태합니다. 먼저 제거하심이 옳겠습니다. 그런 다음 승상께서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나가셔서 적의 무리를 깨뜨려 흩 어버리십시오.”

동탁은 그런 이유의 말을 옳게 여겼다. 먼저 이각과 곽사를 불러 군사 오백을 주고 태부 원외의 집으로 보냈다. 남자 여자 늙고 젊고 를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죽여버리라는 명령과 함께였다. 이각과 곽 사는 동탁의 명을 충실히 이행하여 원외의 가솔들을 한 사람 남김 없이 없앤 뒤 원외의 목을 성문에 높이 걸어 다른 사람에게도 경계 로 삼았다.

동탁은 이어 이십만 대병을 일으키고 두 길로 나누어 제후들의 근왕병과 맞서게 했다. 이각과 곽사에게 오만을 주어 사수관(關) 으로 가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십오만 군에다 이유, 여포, 번조, 장제 등을 이끌고 호로관(虎牢關)으로 갔다. 호로관은 낙양에서 오십리쯤 떨어진 곳으로 그곳에 이른 동탁은 여포에게 따로이 삼만을 주 어 관 밖에 진을 치게 하고 자신은 관 안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동탁 쪽의 그 같은 대응은 곧바로 원소가 이끄는 근왕의 의군(義 軍)에게도 전해졌다. 원소는 급히 제후들을 불러모으고 동탁 깨칠 의논을 했다. 이번에도 조조가 먼저 나섰다.

“동탁이 호로관에 군사를 주둔시킨 것은 우리들 제후들의 가운데 를 자르자는 뜻입니다. 우리도 마땅히 군사의 반을 나누어 그쪽의 적을 막아야 합니다.”

깊이 헤아린 끝에 한 말이니 다른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이에 원 소도 여덟 갈래의 제후를 따로 빼내 호로관으로 가게 했다. 하내 태 수 왕광, 동군 태수 교모, 산양 태수 유유, 북해 태수 공융, 상당 태수 장양, 서주 자사 도겸에 북평 태수 공손찬을 합쳐 여덟이었다. 나머 지 아홉 갈래 제후들은 사수관을 계속 공격하되 조조의 군사들은 양 쪽을 왕래하며 구원에 응하기로 했다.

맹주 원소의 영을 받은 여덟 갈래 제후들은 각기 진채를 뜯고 군 사들을 호로관으로 진군시켰다. 그중에서도 먼저 호로관에 이른 것 은 하내 태수 왕광이었다.

관 밖에 진을 치고 기다리던 여포는 왕광의 군사들이 오는 걸 보 자 철기 삼천을 이끌고 나는 듯 마주쳐왔다. 겨우 군마를 정돈하고 진세(陣勢)를 벌인 왕광이 말을 탄 채 문기(門)아래서 바라보니 저만치 여포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녀를 셋이나 써 묶은 머 리 위에는 자금(紫金)으로 된 관이 얹혀 있고 몸에는 서천(西川)에서 나는 붉은 비단에 백 가지 꽃을 수놓은 옷을 걸쳤는데, 그 위에 짐승 의 얼굴을 새긴 연환環)란 갑옷을 입고 허리에는 죔쇠가 영 롱한 사만대(獅蠻帶)란 띠를 둘러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활과 화살통을 몸에 걸고 손에는 방천화극을 든 채 불꽃 같은 털에 바람같이 빠른 적토마(赤兎馬) 위에 앉았으니, 과연 사람은 여포요 말은 적토라 할 만했다.

왕광이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나가 싸워보겠느냐?”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왕광의 등 뒤에서 한 장수가 창을 꼬나 들고 말을 달려 나갔다. 왕광이 보니 하내의 명장 소리를 듣는 방열 (悅)이었다. 왕광은 적이 마음을 놓았다.

방열도 처음 자기편 군사들의 성원을 받으며 달려 나갈 때는 볼 만했다. 그러나 여포의 말과 만나 채 오 합도 어우르기 전에 방천화 극에 찔려 말 아래로 떨어졌다.

여포가 그 기세를 몰아 방천화극을 춤추며 왕광의 진으로 덮쳐오 고 그 뒤를 삼천 철기가 뒤따르니 왕의 군사가 배겨낼 수 없었다. 군사는 사방으로 흩어지고 여포는 무인지경 넘나들 듯 왕광의 진을 짓밟으며 그 군사들을 죽였다. 때마침 동군 태수 교모와 산양 태수 유유의 군사가 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왕광은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간신히 여포를 물리치기는 했으나 적지 않은 인마를 꺾인 세 갈래 의 제후들은 삼십 리나 물러나 진채를 세웠다. 뒤에 남은 다섯 갈래 의 군마가 이르렀지만 여포를 물리칠 계책은 막연하기만 했다. 모두 여포의 무서운 무예에 감탄하고, 그를 막을 자 없다고 한탄할 뿐이었다.

그러는 중에 다시 여포가 덮쳐왔다. 여덟 갈래의 제후들이 모여 앉아 나오지도 않는 꾀를 쥐어짜고 있는 장막으로 한 군사가 달려와 알렸다.

“여포가 와서 싸움을 돋우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한꺼번에 군사를 몰아 여포를 대적합시다.”

놀란 여덟 갈래 제후들은 급한 김에 그렇게 의견을 맞추고 일제 히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 각기 데려온 군사들을 이끌고 높은 언덕 에서 여포가 오는 양을 지켜보았다.

여포는 한 떼의 인마를 이끌고 수놓은 대장기를 펄럭이며 앞장서 서 제후들의 진을 짓밟아 오고 있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장수 하나 가 여포를 맞아 싸우러 창을 겨누며 달려 나갔다. 상당 태수 장양(張 楊)의 부장 목순(穆順)이었다.

용기는 좋았지만 목순은 원래가 여포의 상대는 못 되었다. 여포가 손을 번쩍 들어 화극을 쳐드는가 싶자 목순의 몸뚱이는 창에 꿰어 말 아래로 팽개쳐졌다.

그걸 본 사람들은 놀랍고 두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후들에게 전혀 사람이 없지는 않았다. 북해 태수 공융의 부장에 무안국武安 國)이란 이가 있어 철퇴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목순보다는 나았지만 무안국 역시 여포를 상대로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아슬아슬하게 십여 합을 어울리는가 싶더니 여포의 한 창에 왼팔이 떨어져나갔다. 남은 길은 철퇴를 던져버리고 말 머리를 돌려 목숨을 구하는 것뿐이었다.

“무안국을 구하라.”

“모두 한꺼번에 여포를 쳐라.”

여덟 제후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렇게 외치며 휘하의 군사 를 몰아 한꺼번에 여포에게 부딪쳐갔다. 여포의 군사가 많지 않은 걸 보고 머릿수로 밀어붙인 것이었다. 그렇게 되자 아무리 여포라도 감당할 길이 없었다. 무안국을 버려두고 급히 군사를 물렸다.

여포가 물러간 뒤 제후들은 다시 모여 대책을 상의했다. 그때는 조조도 그들 여덟 갈래 제후 쪽에 와 있었다. 여포 때문에 고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응원을 온 길이었다.

“여포가 영용(勇)하여 상대할 사람이 없으니 열일곱 갈래 길로 온 제후들이 모두 모여 의논해보는 게 어떻겠소? 만약 여포만 사로 잡을 수 있다면 동탁을 죽이는 일은 쉬울 것이오.”

언제나 그렇듯 조조가 먼저 의견을 내놓았다. 제후 가운데 하나가 반문했다.

“그렇게 되면 사수관 쪽은 어떻게 하시겠소? 만약 그쪽의 적이 우 리를 뒤쫓기라도 하는 날이면 우리는 결국 등과 배로 적을 맞는 꼴 이 되지 않겠소.”

그렇게 되니 의견이 하나로 정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마다 옳다고 믿는 대로 말하고 있는데 다시 여포가 돌아와 싸움을 걸고 있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여덟 제후는 우선 조금 전처럼 일제히 말에 올라 힘을 다해 여포 에게 대항하기로 했다. 마침 여포는 먼저 공손찬의 군사부터 짓밟기 시작했다. 공손찬은 스스로 삭)이라는 긴 창을 휘두르며 여포와 싸웠으나 역시 당해낼 수가 없었다. 몇 합 어우러보지도 못하고 힘에 부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놈 게 섰거라.”

공손찬이 달아나는 걸 보고 여포가 천둥같이 호령하며 적토마를 몰아 뒤쫓았다. 그 말이 원래 하루에 천리를 닫는다는 명마라 나는 듯 달리는 것이 한 줄기 바람 같았다. 공손찬이 타고 있는 백마 역시 변방의 오랑캐들이 공손찬을 백마장사(白馬長史)라 부르며 두려워하 게 만들 만큼 좋은 말이었지만 적토마에는 미치지 못했다. 금세 여 포는 창을 내지를 수 있을 만큼 바짝 공손찬을 따라붙었다.

“이제 네놈의 목은 내 것이다.”

여포가 번쩍 화극을 들어올려 공손찬의 등을 겨누며 소리쳤다. 보 는 이들은 모두 아찔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돌연 한 장수가 고리눈 을 부릅뜨고 호랑이 같은 수염을 뻣뻣하게 거슬러 세운 채 장팔사모 를 끼고 말을 몰아 나오며 여포에게 소리쳤다.

“이 성 셋을 가진 종놈아, 달아나지 말라 연인(人) 장비가 여기있다.”

어려서부터 탁군에서 자랐건만 언제나 조상들의 고향인 연(燕)을 내세우는 게 장비의 버릇이었다.

그런 장비를 보자 여포는 공손찬을 놓아주고 곧바로 장비에게로 말을 몰아갔다. 장비가 모든 생각을 떨쳐버리고 싸움에만 마음을 쏟 아 분발하니 오십여 합을 싸워도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때 보고 있 던 관우가 말 배를 박차고 여든두 근 청룡도를 휘두르며 달려와 여포를 협공했다. 장비의 힘이 부치기 때문이 아니라 타고 있는 말이 여포의 적토마에 비할 바가 못 돼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진다는 걸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관우, 장비와 여포의 말은 정(丁) 자의 형태를 이루며 서로 치고받 았다. 관우의 청룡도와 장비의 장팔사모가 여포의 방천화극을 번갈 아 베고 찌르기를 다시 삼십여 합이 되어도 여포는 조금도 몰리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명마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여포의 무 예는 실로 화경(化境)에 접어들었다 할 만했다.

그걸 보자 유비도 참지 못했다. 쌍고검을 비껴들고 갈기 누른 말 을 박차 싸움을 도우러 달려 나갔다. 사수관의 싸움에서 화웅을 목 베고도 원소와 원술에게 업신여김을 당한 뒤라 되도록이면 앞장서 지 않으려고 애쓰던 그들 삼형제였으나 결국은 다시 앞장서서 어려 운 싸움을 떠맡고 만 셈이었다.

여덟 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한바탕 화려한 비무(比)가 펼쳐졌다. 유, 관, 장 삼형제는 여포를 에워싸고 번갈아 치고 빠졌다. 관우의 청 룡도가 태풍처럼 후리고 가면, 뒤이어 장비의 장팔사모가 유성처럼 찔러오고, 다시 현덕의 쌍고검이 매섭게 베어왔다. 한동안 여덟 제 후의 군사들은 취한 듯 어린 듯 그런 그들의 싸움에 넋을 잃었다. 아무리 여포라지만 그렇게 되자 오래 지탱하지 못했다. 신룡(神 龍)처럼 꿈틀거리며 세 사람의 창칼을 막아내던 방천화극이 차차 느 려지더니 막고 내지르는 법이 한 가지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칫 무예를 뽐내다가는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사실은 관운장이 달려 나 올 때부터 무리한 싸움을 끌어오고 있었다는 편이 옳았다.

“받아라!”

드디어 몸을 빼기로 작정한 여포가 셋 중에서 가장 약한 유비의 얼굴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방천화극을 내질렀다. 유비가 급히 몸을 피하자 세 사람의 에움에 한군데 빈 곳이 생겼다. 여포는 그 틈으로 화극을 거꾸로 잡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유비의 얼굴을 내지른 것은 몸을 빼기 위한 허초(虛)였던 셈이었다.

달아나는 여포를 세 사람이 말을 박차며 뒤쫓았다. 그걸 본 여덟 제후의 군사들은 힘이 났다. 크게 함성을 지르며 뒤따르니 그 기세 가산을 허물 듯했다. 대장이 쫓겨오는 데다 사기가 오른 상대방 군 사들까지 덮쳐오자 여포의 군사들은 그만 겁을 먹었다. 변변히 싸워 보지도 못하고 호로관 안으로 도망쳐 들어가기에 바빴다. 절로 시흥 (詩興)을 자아내는 장한 광경이었다.

유비, 관우, 장비 세 사람이 관 아래 이르러 바라보니, 문루(門樓) 에 푸른 비단 해가리개가 서풍에 나부끼고 있었다. 장비가 그걸 보 고 소리쳤다.

“저것은 틀림없이 동탁일 것이다. 여포를 쫓는 것도 좋지만 차라 리 먼저 동탁을 사로잡음만 못하리라. 그거야말로 풀을 베고 뿌리를 뽑아 없애는 게 될 것이다.”

그러고는 말을 박차 똑바로 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성벽 위에서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져 나아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군사를 물리자 뒤따라온 여덟 제후는 일면 유비 삼형제의 공을 치하 하는 한편 일면 원소의 진채로 이긴 소식을 전했다.

승전보에 힘을 얻은 원소는 주춤해 있던 손견에게 다시 진병을 명했다. 그러나 손견은 군사를 내어 동탁을 치기에 앞서 황개와 정 보를 데리고 먼저 원술의 진채를 찾았다. 지난번 군량과 마초를 보 내주지 않아 화웅에게 패하게 만든 까닭을 따지려는 참이었다. 원 술도 해놓은 짓이 있어 떨떠름했으나 아니 만날 구실이 없었다. 마지못해 나타나자 손견은 발로 땅을 굴러가며 성난 기색으로 따 졌다.

“동탁과 나는 원래 틈이 간 일도 원수 진 적도 없소이다. 내가 몸 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며 가서 죽기로 싸운 것 은 위로는 나라를 위해 역적을 토벌코자 함이요, 아래로는 장군의 집안(원소가 원술의 사촌이며 원씨가 반 동탁의 주동 세력임을 가리키는 말) 을 위해서였소. 그런데도 장군은 어찌 헐뜯고 고자질하는 자의 말만 믿고 군량과 마초를 보내지 않으셨소? 그 때문에 마침내 이 손(孫) 아무개로 하여금 싸움에 지고 아끼는 장수까지 잃게 했으니 이제 어 떻게 하실 작정이오?”

시퍼렇게 대드는 품이 자칫하면 큰일을 낼 기세였다. 누구보다도 손견의 과격한 성품을 잘 알고 있는 원술은 두려움에 질렸다. 한동 안 말없이 있다가 모든 죄를 아랫사람에게 덮어씌웠다.

“그놈이 공연히 장군을 모함하여 큰일을 그르치게 했소. 내 그놈 을 목 베어 덕 없고 귀 엷음을 장군에게 사죄하겠소.”

그러고는 손견에게 군량과 마초를 보내주지 말라고 한 군사를 잡아 목 베게 했다.

손견도 원술이 수하를 목 베어가며 사죄하자 더는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장군의 참뜻이 아니었다니 물러가겠소.”

그렇게 사죄를 받아들이고 원술의 진채를 나서려는데 문득 사람이 달려와 알렸다.

“관 위에서 한 장수가 말을 달려와 장군께 뵙기를 청합니다.”

관에서 나왔다면 동탁 쪽의 사람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만나자고 하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급히 원술과 작별하고 자기 본채로 돌아와보니 동탁이 아끼는 장수인 이각이 와 있었다. 보아하니 세객 (客)이랍시고 온 것 같았다. 손견이 짐작으로 마음을 다지고 있는 데, 이각이 입을 열어 본색을 드러냈다.

“지금 여러 제후들이 동승상에 항거하는 군사를 일으켰으나 우리 승상께서 우러르고 두려워하는 이는 오직 장군뿐입니다. 이에 승상 께서는 특히 이각()을 보내시어 장군과 가깝게 되기를 주선하라 이르셨습니다.”

“서로 병진(兵)을 벌이고 창칼을 맞댄 지금 어떻게 가깝게 지낸단 말이오?”

손견이 노기를 억누르며 물었다. 이각은 손견이 응낙할 뜻이 있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서슴없이 속을 털어놓았다.

“지금 승상께는 나이가 찬 딸이 있습니다. 장군의 아들과 혼인을

맺으면 실로 양가의 복덕이 될 것입니다.”

그러자 손견이 크게 노하여 이각을 꾸짖었다.

“동탁이 하늘을 거스르고 도리를 어겨 제실을 뒤집고 어지럽혔기 에 내 그 역적 놈의 구족을 멸하여 천하에 그 죄를 빌게 하려고 마 음 먹은 지 오래다. 그런데 도리어 그 역적 놈과 사돈을 맺으라고? 네놈이 더러운 입을 놀린 죄로 보아서는 목을 베어 마땅하나, 명색이 사신이라고 왔기에 그 목을 남겨주니 얼른 물러가라. 가서 빨리 관 을 바치면 네 목숨이 부지할 것이요, 만약 쓸데없이 머뭇거리다가는 네 뼈와 살이 가루가 될 줄 알아라.”

그러면서 손을 칼자루로 가져가는데, 긴소리 늘어놓다가는 정말 로 목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이에 이각은 더 말을 붙여보지도 못 한채 꽁지를 말고 동탁에게로 달아나 말했다.

“손견 그놈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올시다. 승상의 청을 거절했 을 뿐만 아니라 하늘을 거스르고 도리를 어긴 역적이라고까지 승상 을 욕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동탁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포를 꾀 어들이듯 손견을 달래보려고 하다가 일은 안 되고 욕만 본 꼴이었 다. 마음 같아서는 단번에 군사를 몰고 관을 나가 손견을 요절내고 싶었지만, 그게 안 되니 더욱 분통 터지는 노릇이었다. 한동안 화를 삭이느라 씩씩거리다가 이유를 불러 물었다.

“손견은 나와 손잡을 의향이 조금도 없으니 어쩌면 좋겠느냐?” 

이유도 그 일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동탁이 묻기 바쁘게 미리 생각해 둔 못된 꾀를 털어놓았다.

“온후(溫侯, 여포)께서 패하신 바람에 겁을 먹은 군사들은 이제 싸 울 마음이 거의 없습니다. 차라리 군사를 거두고 낙양으로 돌아가 황제를 장안으로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요즈음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의 노래 가운데,

서쪽에 한나라가 하나 西頭一個漢

동쪽에도 한나라가 하나 東頭一個漢

사슴이 장안에 들어야만 이 어려움이 없어지겠네 鹿走入長安 方可無斯難

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서쪽에 한나라가 하나라는 것은 고조(高祖)께서 장안에 도읍하시어 열두 대를 보내신 일을 가 리키고 동쪽에 한나라가 하나라는 것은 광무제(武帝)께서 낙양에 도읍하시어 역시 열두 대를 보내신 걸 말하는 듯합니다. 이제 천운 이 되돌아왔으니 승상께서는 다시 장안으로 가셔야만 이 크나큰 근 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아이들의 노래는 바로 그런 하늘의 뜻을 승 상께 일러주는 것으로, 그 노래를 따르시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을 좇 는 일이 됩니다.”

그 말을 들은 동탁은 몹시 기뻐했다.

“과연 그대는 내 꾀주머니[智囊]라 할 만하다. 그 말을 듣지 않았 다면 실로 내가 깨닫지 못할 뻔했다.”

그리고 그날 밤으로 여포와 함께 군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갔다. 유, 관, 장 삼형제의 무공은 뜻밖에도 이유의 얕은 꾀를 만나 동탁의 장안 천도라는 엉뚱한 결과로 번져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