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2권 – 4화 :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
먼저 손견이 떠나가고 이어 조조와 공손찬이 떠나버리자 남은 제 후들의 의맹(盟)은 날로 문란해져갔다. 그중에서도 참으로 기막힌 일은 대의로 모인 제후들 간에 일기 시작한 싸움이었다.
아무도 없는 낙양에 군사를 오래 머물게 하다 보니 제후들은 한 결같이 군량 대는 일이 걱정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도 연주 자사 유대(劉岱)가 가장 먼저 군량이 떨어졌다. 준비한 곡식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군사를 이끌고 온 탓이었다.
유대는 처음 군량과 마초의 수급을 맡은 원술에게 청해보았으나 그 마당에 원술인들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원술이 맡은 것은 싸움에서 노획한 군량이나 의군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서 거둔 군 량을 모두 두었다 공평하게 나누어주는 것이지, 제 군사 먹일 군량을 덜어내 다른 제후의 군량을 대라는 것은 아니었던 까닭이다.
이에 유대는 제후들 중에 비교적 군량이 넉넉한 동군 태수 교모 (喬瑁)에게 군량을 좀 꾸어달라고 부탁했다. 교모는 같은 동맹군의 청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꾸어준다고는 하면서도 이런저런 구실로 얼른 꾸어주지 않았다. 앞날을 알 수 없는 터에 별로 되돌려 받을 가 망이 없는 곳에 군량을 빌려주어 자기 군사를 먹일 곡식이 줄어드는 게 싫어서였다.
그러자 성난 유대는 어느 날 밤 교모를 공격하여 군량을 빼앗는 것은 물론 교모를 죽이고 그 군사들까지 아울러버렸다. 원래 교모가 군량이 넉넉했던 것은 가져온 곡식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이끈 군사 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지척에 있던 유대의 대군이 기습해 오자 당 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제후들 사이는 이내 서로 의심하고 경계하는 것으로 변하고 말았다. 거기다가 차차 대의보다는 실리가 앞서게 되 고, 명분보다는 타산이 앞서게 되니 의맹인들 제대로 유지될 리가 없었다. 이에 원소도 허수아비 맹주 노릇을 그만두고 진채를 거두어 낙양을 떠나버렸다. 용의 머리로 시작해 뱀의 꼬리로 끝나버린 듯한 기의였다.
그 무렵 형주(州)에서는 형주 자사 유표와 손견의 싸움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형주 자사 유표는 자가 경승景)이요, 산양군 고 평 땅 사람이었다. 역시 한실의 종친으로 어려서부터 사람 사귀기를 좋아했는데 특히 일곱 사람의 명사와 친했다.
자를 중린(仲麟)으로 쓰는 여남 땅의 진상(陳), 자를 맹박孟博)으로 쓰는 같은 땅의 범방范), 자가 세원(元)인 노국의 공욱(孔 昱), 자가 중진(眞)인 발해 땅의 범강(范), 자가 문우)인 산 양 땅의 단부(檀), 자가 원(元)인 같은 군의 장검(張), 자가 공효(孝)인 남양 땅의 잠경 (岑脛)이 그들 일곱 명사였다. 세상 사 람들은 그 일곱에다 유표까지 넣어 흔히 그들을 ‘강하팔준夏八 俊)’으로 불렀다.
유표의 사람됨이 그러하다 보니 형주 자사가 된 뒤에도 주위에 훌륭한 인재가 많아 형주 땅은 다른 어느 곳보다 풍족하고 평온했 다. 앞서 말한 일곱 사람 외에도 연평 사람 괴월(越)과 괴량(蒯良), 양양 사람 채모(瑁) 등의 장수가 그를 도와 형주를 지켜준 덕분이 었다.
산동에서 조조가 동탁을 치기 위한 의군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원래 유표도 군사를 일으켜 거기에 호응하려 했다. 그러나 미처 군 사를 움직이기도 전에 손견의 배신을 알리는 원소의 밀서를 받게 되 었다. 손견의 그 같은 행동은 유표로서도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유표는 괴월과 채모에게 군사 만 명을 내어주며 일렀다.
“손견이 참람된 뜻을 품고 옥새를 감추어 제 소혈로 달아나려 한 다 하니 그대들 둘은 그 길을 끊고 그를 사로잡아 옥새를 빼앗도록 하라.”
주인으로부터 그 같은 엄명을 받은 괴월과 채모는 그날로 군사를 진발시켜 손견이 지나갈 길목에 진을 치고 기다렸다. 기다린 지 오래 지 않아 과연 손견이 그 수하 군사들과 함께 그리로 행군해 왔다. 괴 월은 자기 군사들에게 싸울 채비를 갖추게 한 뒤 먼저 말 위에 올라 진문 앞에 나가섰다. 손견이 그를 알아보고 큰소리로 물었다.
“괴영탁, 괴월의 자)은 어찌하여 군사를 이끌고 내가 가는 길을 막는가?”
“너 또한 한나라의 신하가 아니냐? 그런데 너야말로 어찌하여 사 사로이 나라의 보배인 옥새를 감추고 도망치는가? 어서 그걸 내놓 아라. 그러면 너를 돌아가게 놓아주겠다.”
괴월이 제 주인 유표에게 들은 대로 씩씩하게 대꾸했다. 그 말을 듣자 손견은 불 같은 성미가 일었다. 대답 대신 곁에 있는 황개에게 영을 내렸다.
“황공복(覆)은 개처럼 짖어대는 저자의 목을 가져오라.”
그러자 황개는 기다렸다는 듯이 쇠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 갔다. 괴월도 지지 않고 칼을 춤추며 마주쳐왔다. 이어 둘은 불똥을 튀기며 어우러졌지만, 싸움은 기대한 만큼 길지 못했다. 몇 합 되기 도 전에 황개의 쇠채찍이 괴월의 호심경(護心鏡, 가슴 부분을 가리는 갑 주의 일부)을 치며 쨍그랑 쇳소리를 냈다. 그러자 거기에 무슨 타격을 받았는지, 아니면 황개의 채찍 솜씨에 겁을 먹었는지 괴월이 갑자기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황개가 그런 괴월을 뒤쫓고 손견도 승세를 탄 군사를 휘몰아 유 표의 군사들을 덮쳤다. 유표의 군사들은 변변히 대항조차 못하고 달 아나는 저희 대장을 뒤쫓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손견의 군사가 형주병들에 의해 막혀 있던 길목을 거의 벗어났을 무렵이었다. 홀연히 산 뒤에서 북과 징 소리가 울리며 유표 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타났다. 임지가 서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유표가 워낙 인근에 신망이 두터운 사람이라 손견도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싸우지 않고도 길을 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 로 손견은 말 위에서나마 존경의 예를 보이며 유표에게 큰 소리로 물 었다.
“경승(景, 유표의 자)께서는 어찌 원소의 편지 한 장만 믿으시고 이웃 군을 이렇게 핍박하시오?”
그러나 유표의 표정은 엄하기만 했다.
“네가 전국 옥새를 숨겨가니 장차 역적질이라도 하겠단 말이냐?”
그 말에 손견은 이미 낙양에서 한차례 효험을 본 적이 있는 맹세 를 되풀이했다.
“만약 내가 그 물건을 가지고 있다면 칼과 화살 아래 죽을 것이오!”
“그 말을 내게 믿게 하려면 너와 군사들의 몸과 짐을 뒤지도록 내 게 맡겨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믿겠느냐?”
그 말에 손견은 다시 화가 치밀었다. 조금 전까지 보였던 공손한 태도를 버리고 불길이 이는 듯한 눈길로 유표를 노려보며 꾸짖었다.
“네가 무슨 대단한 힘이 있다고 감히 나를 깔보느냐? 굳이 길을 막는다면 다만 네 목을 베고 지나갈 뿐이다.”
그러고는 분연히 칼을 빼들고 똑바로 유표를 향해 말을 몰았다. 유표가 원래 무골이 아니라 손견과 대적할 까닭이 없었다. 얼른 군 사들 속에 숨어 물러났다. 그러나 손견은 내친김이라 그대로 군사를 몰아 유표에게 부딪쳐갔다.
그때 산 양편에서 함성과 함께 미리 숨어 있던 유표의 군사들이 일시에 나타나 양쪽에서 손견의 군사를 덮쳤다. 거기다가 흩어진 줄 알았던 괴월과 채모의 군사도 기다렸다는 듯 손견의 등 뒤를 찔
러왔다.
아무리 손견이라지만 앞뒤 좌우에서 적을 맞게 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좌충우돌하는 사이에 유표의 군사들에게 겹겹이 에워 싸이고 말았다. 그때 만약 정보와 황개, 한당 등이 죽기로 싸워 그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거기서 이미 손견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끝맺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손견은 그들 세 장수의 분전에 힘입어 유표의 에 움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반 넘어 꺾이고 상한 대로 자기 군사들을 이끌고 무사히 근거지인 강동으로 돌아가니, 결국 유표는 옥새도 빼 앗지 못하고 손견의 원한만 사게 된 셈이었다.
근왕(王)쪽에 섰던 제후들 간의 그 같은 분열과 대립은 그 정도 로 그치지 않았다. 기름지고 넓은 기주를 두고 다시 북방의 두 웅자 (雄者)가 원수를 맺게 됐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공손찬과 원소였다. 낙양에서 돌아온 원소는 하내에다 군사를 멈춘 채 다시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원소 역시도 군량이 떨어져 걱정하고 있었다.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백성들을 흩어버리는 바람에 그곳 에서 쌀 한 톨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명색 의군이어서 함부로 약 탈할 수도 없으니 실로 난감한 일이었다.
그런데 기주목 한복(韓)이 어떻게 알았는지 원소에게 군량에 보 태 쓰라고 곡식 수천 석을 보내왔다. 원소에게는 가뭄 끝의 단비나 다름없었으나 한복은 한복대로 깊이 생각한 나머지였다. 다름 아닌 북쪽의 공손찬 때문이었다. 공손찬은 동탁을 치기 위해서란 명목으로 힘을 기르고 있지만 언제 남으로 내려와 기주를 덮칠지 알 수 없었다. 이에 한복은 그때를 대비해 미리 원소의 환심을 사두려 했다. 어떻게 보면 한복의 판단은 자못 옳았다. 사실 부근에서 공손찬에 대항할 만한 세력이 있다면 그것은 원소뿐이었다. 거기다가 원소는 사세오공(公)의 후예이니 만큼 불의하게 남의 땅을 삼키려 들 지도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같은 믿음이 바로 한복의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을 가져올 줄이야.
원소가 한복이 보낸 곡식을 반가워하고 있을 때 그의 모사 봉기 (紀)가 가만히 원소에게 권했다.
“대장부가 천하를 종횡하면서 어찌 남이 보내주는 곡식을 구구하 게 얻어먹고 지낼 수 있겠습니까? 기주는 돈과 곡식이 넉넉한 땅입 니다. 그걸 취해 장차 주공의 큰 뜻을 펼 기반으로 삼는 게 어떻겠습 니까?”
“그렇지만 저는 나를 생각해 이 많은 곡식을 보내왔는데 차마 그 기업을 빼앗을 수가 없구려. 만약 세상이 그걸 알면 이 원소의 불인 함에 모두 등을 돌릴 것이오. 좋은 계책이 아니다.”
원소가 자못 의로운 체 대답했다. 그러자 봉기가 한 꾀를 내었다.
“좋은 수가 있습니다. 먼저 몰래 공손찬에게 사람을 보내 우리가 협공을 할 것이니 기주로 군사를 내라 이르십시오. 북방의 오랑캐들 을 평정한 뒤부터 줄곧 남쪽 기주에 눈독을 들여오던 공손찬이니 반 드시 거기에 응할 것입니다. 그러면 지모가 부족한 한복은 놀라 주 공께 도움을 청할 게 틀림없습니다. 그때 틈을 보아 기주를 취하시 고 그럴듯한 핑계로 공손찬을 따돌려버리시면 됩니다. 기주는 실로 손만 내밀면 얻을 수 있는 땅입니다.”
말하자면 남의 칼을 빌려 살인을 하자는 것이나 다름없는 계책이었다. 원소도 그 계책이 마음에 들었다. 그날로 글을 닦아 가만히 공 손찬에게 보냈다.
‘기주는 땅이 넓고 기름지며 백성이 많으나 한복은 능히 다스릴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하외다. 먼저 공손태수께서 동북에서 기 주로 군사를 내시면 저도 서남에서 협공을 하겠소이다. 기주를 차지 한 뒤에 태수와 내가 나누어 다스린다면 그곳의 수백만 백성들에게 도 복덕이 될 것이오.’
그런 글을 받은 공손찬은 크게 기뻤다. 진작부터 노리던 땅이었지 만 한때의 동지였던 한복이 그 주인이라 망설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동맹군의 맹주였던 원소가 거들겠다니 더 망설일 필 요가 없었다. 세상 사람들의 욕을 먹어도 원소가 더 먹을 것이고, 한 복의 원망을 들어도 원소가 더 들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공손찬은 원소의 속마음도 모르고 밀서를 받은 그날로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그러나 아직 기주로 군사를 들이기도 전에 소문이 먼저 기주목 한복의 귀에 들어갔다. 원소가 다시 몰래 사람을 보내 공손찬이 군사를 일으킨 일을 한복에게 알려준 탓이었다.
짐작대로 한복은 크게 놀랐다. 곧 모사인 순심荀諶)과 신평(辛評) 두 사람을 불러놓고 걱정을 늘어놓았다.
“걱정했던 대로 공손찬 그놈이 우리 기주를 취하려 한다고 원본초가 알려왔소. 장차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런 한복의 말에 순심이 나섰다.
“공손찬이 연(燕)과 대(代)의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면 지금 우 리로서는 그 예봉을 당할 길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평원(平原)에서 힘을 기르고 있는 유비와 관, 장 두 아우도 공손찬의 사람이니 그들 까지 합세하면 더욱 막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원소에게 의지하는 수뿐입니다. 원소는 지혜롭고 용맹하기가 남다른 데다, 그 아래에는 뛰어난 장수들이 아주 많습니다. 장군께서 원소에게 함께 이 기주를 다스리자고 청하시면 원소는 반드시 달려와 장군을 도울 것입니다. 거기다가 원소는 덕망 있고, 또 장군께 군량까지 얻어 쓴 일이 있으 니 장군을 대함에 결코 소홀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공손 찬 따위는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한복이 들으니 꼭 그럴듯한 꾀였다. 곧바로 별가(別) 인관순(關)을 보내 원소에게 도움을 청하게 했다.
“장군,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관순이 명을 받고 막 떠나려 할 때 한 사람이 나서서 크게 소리쳤 다. 한복이 보니 장사(長史)로 있는 경무(耿武)란 자였다. 이미 원소 에게 의지하기로 마음 먹은 한복은 못마땅한 눈길로 경무를 보며 물 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원소로 말할 것 같으면 외로운 나그네요, 그 군사는 주리고 헐벗 은 무리입니다. 우리만 바라보고 있는 처지이니, 비유컨대 품 안의 어린것과 다름없습니다. 젖을 주지 않듯 군량만 대어주지 않으면 절로 망할 그에게 무엇 때문에 우리 기주를 맡기려 하십니까? 그를 불
러들이는 것은 양떼 속에 호랑이를 넣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아무쪼록 깊이 헤아려 행하십시오.”
경무의 말은 간곡했다. 그러나 한복은 듣지 않았다.
“나는 원래 원씨(氏) 아래서 벼슬아치를 지낸 사람인 데다 재주 와 힘이 아울러 원본초에게 미치지 못한다. 옛사람도 어진 이를 골 라 그 자리를 내어주었으니 나도 그 예를 따르려 한다. 그대는 어찌 아녀자처럼 원본초를 질투하는가?”
꿈 같은 소리만 늘어놓으며 한복은 기어이 관순을 원소에게 보내 버렸다. 한복의 앞을 물러난 경무는 길게 탄식했다.
“기주는 이제 끝났다!”
아무리 한복이 못난 주인이지만 그 아래에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경무의 탄식을 듣고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떠나는 이가 서른이 넘었다. 그러나 경무는 차마 기주를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 한복 의 엄명에 눌려 원소의 진중을 다녀오기는 해도 관순 또한 뜻은 경 무와 다름이 없었다. 함께 어떻게든 기주를 지켜볼 작정으로 가만히 성 밖에 숨어 때를 기다렸다.
며칠 안 돼 원소가 군사를 이끌고 기주성에 이르렀다. 경무와 관 순은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갑자기 숨은 곳에서 칼을 빼들고 달려 나 왔다. 원소를 죽여 기주를 구하자는 뜻이었지만 장한 것은 의기뿐이 었다. 그림자처럼 붙어 원소를 호위하던 안량과 문추가 그들을 가로 막고 각기 한칼에 그들 둘을 베어버렸다.
원소는 성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검은 속셈을 드러냈다. 스스로 기주목이 되어 한복을 분위장군으로 삼은 뒤, 전풍(田豊), 저수(沮授), 허유, 봉기 등에게 기주 다스리는 일을 갈라 맡게 했다. 한복은 허울 좋은 이름뿐, 권한은 몽땅 원소의 수중으로 넘어가버렸다.
그제야 한복은 후회했으나 이미 소용이 없었다. 자칫하다가는 목 숨까지도 부지할 것 같지 않아 처자도 버린 채 기주에서 도망쳤다. 한복이 겨우 구한 말 한 마리에 쫓기듯 올라 몸을 의탁하러 달려간 곳은 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진류 태수 장막(張邈)에게로였다.
한편 공손찬은 원소의 말만 믿고 군사를 일으켜 기주로 내려갈 채비를 갖추었다. 그런데 미처 군사를 내기도 전에 원소가 기주를 차지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경위가 좀 석연치 못했으나 알 바 아 니라 생각하고, 아우 공손월(公孫越)을 원소에게 보냈다. 약속대로 기주의 반을 내놓으라고 요구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공손찬이 싸우지는 않았다 해도 약속은 약속이라 원소는 대 답이 궁했다. 한동안 머뭇거리다가 좋은 말로 공손월을 달래 보냈다. “그 일은 그대의 형인 공손 태수가 직접 오면 의논하기로 하겠소. 돌아가 그렇게 일러주시오.”
대접도 융숭하고 또 약속한 땅을 내놓지 않겠다는 말도 아니니 공 손월은 그냥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를 쉬고 다음 날로 원소 에게 작별을 고한 뒤 형 공손찬이 기다리는 북평으로 길을 떠났다. 그런데 채 오십리도 가기 전이었다. 길 옆에서 한 떼의 군마가 나타났다.
“우리는 동승상의 명을 받고 온 장수들이다.”
그들은 그렇게 외치며 공손월 일행을 향해 어지럽게 활을 쏘았다. 사신으로 원소를 찾은 공손월이라 싸울 채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잠시 동안에 화살을 맞아 고슴도치처럼 되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요행히 목숨을 건져 도망친 졸개로부터 아우 공손월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공손찬은 크게 노했다. 멀리 장안으로 쫓겨가 있 는 동탁이 기주 북쪽까지 사람을 보내 하필 자기 아우를 죽일 리만 무했기 때문이었다.
“원소 그놈이 나를 시켜 한복을 치도록 해놓고, 뒤로 엉큼한 수를 부려 기주를 홀로 차지했다. 거기다가 이제는 동탁의 군사를 가장하 여 내 아우까지 죽였으니 이 원수를 갚지 않고 어쩌랴!”
그렇게 분연히 외치며 휘하의 군사란 군사는 모조리 긁어모아 기 주로 향했다. 십여 년 변방에서 기른 힘을 모두 쏟은 데다 속임을 당 하여 아우까지 잃은 분노와 원한에 차 있으니 그 기세가 거셀 수밖 에 없었다. 금세 기주를 삼켜버릴 듯 밀고 내려갔다.
공손찬이 쳐내려온다는 소식을 듣자 원소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대군을 이끌고 맞으러 나오니 두 군사는 곧 반하 (磐河)의 상류 부근에서 만났다. 원소의 군사들은 반하에 놓인 다리 동쪽에 진을 치고 공손찬의 군사들은 서쪽에 진을 쳤다.
먼저 진용을 갖춘 공손찬이 말을 탄 채 다리 위에 서서 큰 소리로 원소를 꾸짖었다.
“원소, 이 의리를 저버린 놈아. 어찌하여 감히 나를 속이느냐?”
원소도 말을 타고 다리 끝에 나타나 지지 않고 공손찬을 꾸짖었다.
“내가 너를 속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한복이 스스로 재주 없음을 알고 내게 기주를 넘기고자 하기에 받았을 뿐이거늘 네놈이 무슨 간섭이냐?”
“지난날 네가 충의롭기에 너를 맹주로 추대했으나 이제 하는 짓 을 보니 실로 늑대 같은 심보요, 개 같은 짓거리다. 음흉한 술수로 남의 땅을 빼앗고 내 아우까지 죽였으니 네 무슨 낯짝으로 세상 사 람들을 대하겠느냐?”
공손찬이 한층 소리 높이 원소를 꾸짖었다. 아픈 데를 찔리자 원 소는 왈칵 성이 났다. 대꾸 대신 좌우를 둘러보며 묻는다.
“누가 저놈을 사로잡아 올꼬?”
“제가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원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추가 큰 소리로 대답하고 창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갔다. 공손찬은 다리 곁에서 문추를 맞아 한 바탕 싸움을 벌였다.
공손찬이 비록 용맹하나 원소의 상장 문추를 대적하기에는 미흡 했다. 말이 열 번 엇갈리며 어우르기도 전에 손발이 어지러워지더니 스무 합을 채우지 못하고 자기의 진 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문추는 그 기세를 타고 그대로 쫓아와 공손찬이 몸을 감춘 중군 속으로 말을 몰고 뛰어들었다. 당황한 보졸들이 철갑으로 몸을 싼 채 말 위에서 긴 창을 휘두르는 문추를 어찌하지 못하니, 문추는 무 인지경 가듯 공손찬의 중군을 짓밟았다.
그걸 본 공손찬 쪽의 장수 넷이 한꺼번에 달려 나가 문추를 막았 다. 그러나 문추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들을 맞아 싸우는데 과연 기주의 명장다웠다. 어지러이 날아드는 네 장수의 창칼을 막고 피하다가 한소리 기합과 함께 창을 내지르자 한 장수가 가슴에 피를 쏟 으며 말 아래로 떨어졌다.
넷이서도 당하지 못하던 문추를 셋이서 당할 수는 없었다. 동료 하나가 죽는 걸 보자 남은 공손찬 쪽의 세 장수는 두려움에 질려 말 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되면 이미 싸움은 끝났다고 하는 편이 옳았 다. 뒤이어 밀려드는 원소의 군사들에게 대적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공손찬의 진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문추는 마음껏 공손찬의 중군을 유린하다가 문득 후진 쪽에 숨어 있는 공손찬을 발견하고 이번에는 그쪽으로 덮쳐갔다. 공손찬은 급 했다. 군사들을 돌볼 틈도 없이 가까운 산골짜기를 바라 달아났다. 그 뒤를 문추가 따르며 큰 소리로 얼러댔다.
“공손찬 이놈, 어디로 달아나느냐? 얼른 말에서 내려 항복하지 못 할까?”
공손찬은 급한 가운데도 뒤돌아 화살을 날렸으나 문추가 번번이 창으로 화살을 쳐내버리니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화살은 다하고, 투구를 떨어뜨려 산발이 된 채 공손찬은 오직 말을 채찍질하기에만 바빴다.
그렇게 정신없이 쫓기면서 어느 산비탈을 돌 때였다. 힘이 다했는 지 헛디뎠는지 공손찬의 말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 바람에 공손찬 은 몸을 뒤집으며 말에서 떨어져 산비탈 아래로 굴렀다.
“이제 너는 내 손에 죽었다.”
문추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을 꼬나잡고 산비탈을 내려갔다.
하지만 공손찬의 운이 거기서 다한 것은 아니었다. 미처 문추가 공손찬에게 이르기도 전에 왼쪽 산비탈 풀숲에서 한 소년 장수가 나 타나 소리쳤다.
“문추는 무얼 하려는가? 함부로 솜씨를 뽐내지 마라!”
이제 막 공손찬의 목을 얻어 큰 공을 세우려는 찰나에 난데없는 소년 장수가 나타나 길을 막으니 문추는 크게 성이 났다. 상대방이 누구인가를 물어보려 하지도 않고 창부터 내질렀다.
공손찬이 간신히 언덕을 기어올라 왔을 때는 두 장수의 싸움이 한창 어우러진 뒤였다. 자기를 구해준 사람을 바라보니 키는 여덟 자에 눈썹이 짙고 눈이 큰 소년이었는데 넓은 얼굴에 두툼한 턱이며 벌어진 어깨가 여간 늠름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 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귀신 같은 창솜씨였다.
원소의 으뜸가는 장수를 맞아 싸우는데도 오륙십 합이 되도록 조 금도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싸우는 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창대만 어지러이 풍차 돌듯 하는 광경에 공손찬은 자신의 위태로운 처지마 저 잊고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문추와 그 소년 장군의 싸움이 끝난 것은 공손찬의 구원군이 이 른 뒤였다. 자기의 상대 하나만으로도 벅찬데 주인을 찾는 공손찬의 인마가 몰려드는 걸 보자 문추가 몸을 빼쳐 자기편 진채로 달아나버 렸다.
“소년 장군은 뉘시오? 어떻게 이 몸을 구해주게 되었소이까?”
문추가 물러간 뒤에야 정신을 차린 공손찬이 감사와 아울러 소년장수의 이름을 물었다. 소년 장수가 공손히 대답했다.
“저는 상산군 진정 땅 사람으로 성은 조(趙)요 이름은 운(雲)이라 하며 자는 자룡(龍)으로 씁니다. 원래는 원소의 다스림 아래 있었 습니다만, 그가 임금을 위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고 그를 떠나 장군의 휘하로 오던 길입니다. 뜻밖으로 이곳에서 뵙게 되니 실로 영광입니다.”
원소가 기주를 차지한 내막을 알 리 없는 백성들은 그의 가문과 허명에 마음이 쏠리고, 식자들은 그의 위세에 눌려 따르는 때에 원 소를 버리고 왔다니 좀 이상했다. 공손찬 또한 원소가 스스로 기주 목이 되고 장군 칭호를 멋대로 쓰는 것을 보고 그의 사심을 짐작하 여 떠나온 조자룡을 한눈에 알아볼 만큼 개결하지는 못했던 까닭이 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원소의 상장 문추를 쫓고 자기를 구해주었으 니 그를 계속 의심할 수는 없었다.
“실로 놀라운 의기요, 무예외다. 장군이 아니었다면 오늘 이 몸이 큰 욕을 면키 어려웠을 것이오.”
공손찬은 그렇게 치하한 뒤 자기의 진채로 돌아가 군사들을 정돈했다.
첫 싸움에 지기는 했으나 십 년을 쌓아올린 공손찬의 세력은 과 연 가볍지 아니했다. 군중을 정돈한 공손찬은 다음 싸움을 자기가 우세한 기병 위주로 벌이기로 작정했다. 공손찬에게는 오천이 넘는 철기가 있었는데 말은 태반이 백마(白馬)였다. 공손찬이 강)이며 오환(烏丸), 선비(鮮卑) 등의 오랑캐를 진압하는 데 쓴 주력으로, 오 랑캐들은 공손찬을 ‘백마장사’라 부르며 그의 백마로 이루어진 기병 이 나타나기만 해도 겁을 먹고 달아났다. 공손찬은 그 기병을 좌우 두 대로 갈라 한꺼번에 보갑 위주인 원소의 진중을 휩쓸어버리려했다.
하지만 원소도 자기편과 적의 강한 곳과 약한 곳을 알 만큼은 되 는 인물이었다. 공손찬이 자랑하는 철기를 두 대로 가르는 걸 보고 자신도 선봉을 두 대로 나누는 한편 각 대마다 궁수 천여 명을 딸려 적군 기마의 돌입에 대비케 했다. 그리고 다시 궁수 팔백과 보병 만 오천 명을 진 앞에 열지어 서게 함으로써 선봉의 화살비를 뚫고 들 어온 적의 기마를 잡도록 했다.
이튿날 그런 원소군의 대비를 알 리 없는 공손찬은 날이 새기 무 섭게 싸움을 돋우었다. 조운은 얻은 지 오래잖으니 속마음을 알 수 없다 하여 후군에 머물게 하고 대장 엄강(嚴綱)을 선봉으로 삼은 뒤 자신은 전날처럼 중군을 이끌었다.
“원소, 이 군자의 탈을 쓴 도둑놈아, 오늘은 결판을 내자.”
공손찬은 진 앞에 나서 붉은 바탕에 금실로 테를 두른 대장기를 펄럭이며 원소를 충동질했으나 어쩐 일인지 원소의 진문은 굳게 닫 긴 채 응답이 없었다. 공손찬의 속셈을 안 이상 함부로 진문을 열고 대적하다가는 그가 자랑하는 백마의 철기대(鐵騎隊)에 짓밟히기 십 상이라고 단정한 원소군의 대응책이었다.
“안 되겠다. 그대가 가서 저것들을 짓밟아버려라.”
진시(辰時, 오전 여덟 시경)부터 사시(巳時, 오전 열 시경)까지 갖은 욕 설로 충동질해도 끝내 원소군이 움직이지 않자 마침내 공손찬은 선 봉 엄강에게 그렇게 영을 내렸다.
명을 받은 엄강은 북과 징을 울리며 원소의 진을 향해 밀물처럼 휩쓸어갔다. 이때 진문 앞을 맡은 원소의 장수 국의(義)는 화살방패[]아래팔백 궁수들을 감춘 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방패로 몸을 가리고 적이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 그러 다가 한 소리 포향(砲響, 실전용의 대포가 아니라 신호용의 폭죽과 같은 소 리)이 터지거든 일제히 활을 쏘라.”
그것이 궁수들에게 내려진 엄명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엄강은 기세 좋게 말을 몰아 원소의 진 앞에 이르렀다.
갑자기 한 소리 포향이 터지며 방패 뒤에서 팔백 궁수가 나와 일 제히 강한 활을 쏘아 붙였다.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라 화살은 어김없이 엄강의 군사들을 맞혔다. 순식간에 절반이 화살에 죽거나 상하니 엄강은 크게 당황했다. 급히 군사를 물리려고 했으나 달려온 기세가 있어 쉽지가 않았다.
그때 원소 쪽의 대장 국의가 칼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나왔다. 곧 바로 엄강을 취해 싸운 지 몇 합 안 돼 처음부터 손발이 어지러운 엄강의 목을 쳐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렇게 되자 공손찬의 군사 는 더욱 혼란되고 원소의 군사는 한층 기세가 일었다.
공손찬이 급히 좌우 두 대로 나누어둔 기병을 내보내 대장 엄강 을 잃은 선봉군을 구하게 했으나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진작 그에 대비해둔 원소의 좌우 양군이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문추가 이끄 는 우군이나 안량이 이끄는 좌군 모두 마필은 공손찬의 철기에 미치 지 못했으나 각기 강한 활과 쇠뇌를 든 일천 궁수가 있어 어지럽게 살을 쏘아 붙이는 바람에 견딜 수 없었다. 공손찬이 자랑하던 기병 마저 허물어지자 오히려 그걸 보고 힘을 얻는 원소의 중군이 일제히 달려 나오기 시작했다. 또다시 공손찬 군의 대패였다. 원소의 장수 국의는 단숨에 공손찬의 진문까지 이르러 대장기를 지키고 있는 장 수를 죽이고 그 깃대를 베어 쓰러뜨렸다.
공손찬은 자기의 권세와 위엄을 드러내는 수기(繡旗)가 두 동강이 나 쓰러지는 걸 보자 더 싸울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말을 돌려 다리 로 도망치니 그 군사들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뭉그러져 갔다.
국의는 신이 났다. 순식간에 공손찬의 중군을 헤치고 똑바로 후군 에 이르렀다. 승리에 겨워 죽을 곳인 줄 모르고 찾아든 셈이었다. 공 손찬의 소심에 하릴없이 후군에 남아 있던 조운은 국의를 보자 말을 달려 곧바로 그를 맞았다. 원소의 상장 문추도 어쩌지 못한 조자룡의 창을 국의 따위가 당할 리 없었다. 창과 칼이 몇 번 부딪치지도 못해 국의는 조자룡의 한 창에 찔려 말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조자룡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말을 달려 국의를 뒤따라온 원소의 군사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왼쪽을 찌르고 오른편을 베며 나 아가는데 마치 사람 없는 풀숲을 헤치고 가는 듯했다.
적의 선봉이 갑자기 뭉그러지는 걸 보고 다시 돌아온 공손찬은 그 광경에 힘을 얻었다.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밀려오는 원소군을 되받아쳤다. 이번에는 원소군의 대패였다. 거꾸로 대장을 잃고 선봉 이 깨져 사기가 떨어진 원소의 군사들은 밀고 올 때의 기세만큼이나 풀이 죽어 달아나기에 바빴다. 전장에서 사기의 중요함을 잘 말해주 는 한바탕의 역전극이었다.
그 무렵 원소는 전풍(田豊)과 함께 창을 가진 군사 수백과 활을 가진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진문 앞에 나가 싸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국의가 적의 대장기를 베고 이어 적의 후군으로 돌입했다는 말
에 방심한 탓이었다.
“공손찬은 실로 무능한 놈이로구나. 군사를 쓰는 법이 어찌 이리 서투른가!”
원소가 그렇게 껄껄거릴 때만 해도 좋았다. 아직 국의의 죽음을 모르는 원소의 중군이 기세 좋게 공손찬의 진 쪽으로 밀고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변이 일어났다. 선봉이 주춤하는 것 같더니 갑자 기 조자룡이 물속에서 치솟은 신룡처럼 원소의 눈앞에 나타났다. 원 소 곁의 궁수들이 급히 활에 살을 먹이는 순간에도 조자룡은 잇달아 네댓 명의 장수를 쓰러뜨려 원소의 중군을 흩어놓았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뒤를 이어 나타난 공손찬의 반격이었다.
“주공, 일이 급합니다. 우선 저 뒤로 몸을 숨기십시오.”
놀란 전풍이 한 곳 흙담을 가리키며 권했다. 그때 원소를 구해준 것이 명문가의 자제다운 자존심과 결기였다. 원소는 투구마저 벗어 땅에 던지며 분연히 말했다.
“대장부가 전장에 나서면 싸우다 죽기를 바랄 일이지 어찌 담 뒤 에 숨어 구구하게 살기를 바라겠느냐!”
그리고 스스로 칼을 빼들고 공손찬의 군사를 맞으러 나아갔다. 원 소의 그 같은 언행을 본 군사들은 감동했다. 일제히 죽기를 각오하 고 싸우니 아무리 조운이라도 그 같은 사람의 벽을 뚫을 수가 없었 다. 거기다가 다시 뒤에 남아 있던 원소의 군사들이 합세하고 앞서 나아갔던 안량 또한 군사를 끌고 그곳에 되돌아왔다.
전세는 또 한 번 뒤집혔다. 이번에는 공손찬이 승리를 서두르는 바람에 적은 군사로 적진 깊이 너무 들어온 탓이었다. 조자룡의 무 예가 비록 초절(超絶)하다 해도 워낙 뒤를 받쳐주는 군사의 수가 모 자랐다. 잠깐 동안에 원소의 군사들에게 겹겹으로 에워싸인 공손찬 군은 그저 에움을 뚫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조자룡은 공손찬을 보호하며 개미 떼 같은 원소의 군사들을 헤치 고 간신히 본진이 있는 다리 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원소가 틈을 주지 않고 대군을 몰아 추격하니 본진을 지킬 길이 없었다. 할 수 없 이 반하 건너로 군사를 물렸다. 반하를 건너는 유일한 길인 넓지 않 은 다리는 순식간에 공손찬의 군사들로 꽉 메워졌다. 원소군의 화살 과 급한 추격을 면하기 위해 서로 밀치고 헤집고 하는 통에 다리에 서 물에 떨어져 죽는 공손찬의 군사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 이었다.
간신히 반하를 건넌 뒤에도 원소군의 추격은 계속되었다. 이 기 회에 공손찬을 사로잡아 아예 싸움을 끝내버리겠다는 듯한 원소의 기세였다. 군사들의 앞머리에서 말을 달리며 급하게 공손찬을 몰아 댔다.
그렇게 오 리쯤 달렸을까. 한군데 산모퉁이를 도는데 갑자기 함성 이 크게 일며 한 떼의 인마가 나타났다. 앞선 세 사람의 장수는 유현 덕과 관우, 장비였다.
그들 셋은 불문곡직하고 똑바로 말을 몰아 앞서 뒤쫓는 원소를 덮쳐갔다. 몇몇 장수가 호위하려 했으나 도무지 적수가 되지 못하니 원소는 이내 쫓기는 몸이 되었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를 호위하는 장졸들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원소의 혼은 놀라 중 천까지 떠오르다 말았다. 쌍고검과 청룡도와 장팔사모에 쫓기어 자 랑하던 보검조차 내버리고 달아나다가 다리 어귀에서야 여러 장수 들의 구함을 받아 간신히 숨을 돌렸다.
공손찬은 그 여세를 몰아 원소의 군사들을 다리 건너 원래의 진 채로 내쫓고 자기의 진채로 돌아갔다. 베어 넘어간 대장의 수기를 다시 일으키고 흩어진 장졸들을 모으게 한 뒤 유, 관, 장 삼형제를 자신의 군막으로 청해 치하했다.
“고맙네. 오늘 만약 현덕 아우가 나를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참으 로 큰 낭패를 당했을 거네.”
“형님께서 이 아우에게 베풀어주신 은덕의 만에 하나라도 갚고자 이렇게 달려오는 길입니다. 너무 늦어 자칫 큰일을 그르칠 뻔했으니 송구스럽습니다.”
유비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지난번의 출병으로 한층 성숙하고 생 각이 깊어진 언행이었다.
낙양에서 돌아온 뒤로 유비는 고을을 다스리는 일과 힘을 기르는 일에 전에 없이 마음을 쏟았다. 감가장)에서 청혼이 있었으 나 그마저도 한마디로 물리쳤다.
“대장부 큰 뜻을 품고 세상에 나와 아직 그 뜻을 펴기도 전에 어찌 처자부터 얻어 작은 일에 연연해짐을 기를 수 있겠소? 기다리라 이 르시오. 때가 오면 제후의 예로 감소저(甘小姐)를 맞이하러 가겠소.” 그리고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르는 두 아우와 함께 현청과 조련장 에서만 살았다. 몇 달간 열일곱 갈래 길로 온 제후들 사이에서 보고 들은 것이 어떤 심경의 변화를 준 것임에 틀림없었다.
원소와 공손찬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 것은 유비의 힘이 갑절로 자라났을 즈음이었다. 유비는 공손찬이 당연히 자기를 부르리라 짐 작하며 기다렸으나 왠지 공손찬은 부르지 않았다. 얼마 뒤에 들리는 소문은 연(燕)과 대(代)의 군사들만 이끌고 원소를 치러 떠났다는 것이었다.
“출진 준비를 서둘러야겠다. 원소를 가볍게 보고 계신 것임이 분명하다.”
유비는 그 소문을 듣자마자 관우와 장비를 불러 그렇게 말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부터 혼자 힘으로 성취를 거듭해온 사람에게는 명문의 귀공자라면 무턱대고 깔보는 경향이 있다. 공손찬이 바로 그 런 경우로 한미한 집안에서 나, 오직 재주와 담력만으로 제후의 열 에 오른 그에게는 원소가 한낱 물정 모르는 어린애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비는 원소의 여러 성격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 에게 숨어 있는 힘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이도 세력도 벼슬도 다 른 제후들보다 나은 것 없는 원소가 지난번 기의에서 아무 반대 없 이 맹주로 추대된 일이며, 한복이 갖다 바치듯 기주를 원소에게 넘 겨준 것 따위가 바로 그 숨겨진 힘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었다. 유비에게는 오히려 공손찬이야말로 전력을 다해야만 간신히 원소 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결과로 보면 유비의 예측은 잘 맞아떨어졌다. 공손찬이 당연히 자 기의 힘으로 보탤 수 있는 유비의 힘을 빌지 않고, 홀로 간 것은 그 만큼 원소를 가볍게 본 탓이었다. 만약 유비가 때맞추어 구원을 오지 않았더라면, 공손찬은 목숨을 잃는 것까지는 몰라도 거의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유비의 그 출전은 공손찬에게 진 빚을 갚는 일 못지않게 이로움도 컸다. 그것은 바로 조운을 만난 일이었다. 그날 밤 유비와 두 아우를 위로하는 술자리에서 공손찬은 조운을 불러 유비에게 인 사를 시켰다.
참으로 묘한 것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다. 어떤 사람과는 매일 얼굴을 맞대고 지내도 언제나 낯설고 멀게 느껴지는가 하면 어떤 사 람은 처음 만나도 오래전부터 다정하게 지내온 사이처럼 친하고 가 깝게 느껴진다. 조운을 처음 보는 유비의 마음이 그랬다. 분명 한 번 도 만난 적이 없는 얼굴이건만 넓은 얼굴과 서글서글한 눈매는 아직 스물이 못 찬 나이와 아울러 오랜만에 헤어져 있던 친아우를 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공손찬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그 의 무예나, 한눈에 날래고 힘깨나 씀을 알아볼 수 있는 늠름한 체격 에서 느껴지는 훌륭한 장수감으로서의 욕심은 다음의 일이었다. 조운 또한 유비를 보는 눈이 예사스럽지 않았다. 처음 공손찬에게 불려올 때만 해도 얇게 수심이 껴 있던 얼굴이 유비를 보는 순간 환 히 밝아지며,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줄곧 유비만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유비와는 달리 조운은 정말로 전부터 유비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술자리가 파할 무렵 조운이 유비의 잔에 술을 치며 넌지 시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유상공께서는 혹 상산초옹(常山樵翁)이란 분을 아시는지요?”
유비에게는 처음 그 이름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십여 년이나 지난 일이고, 또 그 만남은 너무도 짧아 기억 속에 깊게 새겨지지 못한 까닭이었다. 오히려 뚜렷한 것은 어느 이름 모를 마을 앞에 서 한나절이나 쳐다보고서 있었던 고목과 그때 언뜻 머릿속을 스쳐 간 깨달음의 일섬(一閃)이었다.
“오래전에 그런 노인을 뵈온 적이 있소.”
술이 다시 한 순배가 돈 뒤에야 간신히 스스로를 상산(常山)의 나 무꾼 늙은이라고 일러주던 그 늙은이를 기억해낸 유비가 그때껏 자 기만을 바라보고 있는 조운에게 대답했다.
“역시…….”
조운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탄식처럼 그렇게 내뱉고는 뒤를 잇지 못했다. 이상하게 여긴 유비가 물었다.
“조장군은 어떻게 그를 아시오?”
“제 스승님의 막역한 벗이셨습니다.”
“아직도 살아 계시오?”
“작년 제가 스승의 문하를 떠날 무렵 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분을 만난 걸 아시었소?”
“그분께서 생전에 가끔씩 유상공의 얘기를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분이? 무어라 말씀하셨소?”
“뒷날 사석에서 뵈오면 조용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자룡은 그렇게 말한 뒤 굳게 입을 다물었다. 한층 어둡고 쓸쓸 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걸로 보아 무슨 말 못할 까닭이 있는 것 같았다. 유비도 더는 캐어묻지 않았다.
간신히 원소를 물리치기는 했지만 아직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어서 그날의 술자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막사로 돌아온 유비는 생각할
수록 조운의 일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미 남의 사람이 되었고 또 처음 보는 터수지만, 까닭없이 조운이 자신의 삶과 깊은 연관을 맺 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거기다가 소년 시절의 몽롱한 꿈처럼 자신을 스쳐갔으나, 그를 통 한 깨달음의 기억은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오히려 또렷해지는 그 늙은이를 조운이 상기시킨 일도 예사롭지 않았다. 스스로를 상산의 나무꾼 늙은이로 밝힌 그가 그때의 짧은 만남을 통해 자신에게서 무 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조운에게 어떻게 말했는지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유비는 결국 그 싸움이 끝나고 다시 평원으로 돌아갈 때 까지는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얼굴을 대하는 동 안 서로 우러르고 아끼는 마음은 점점 자라갔지만 진중이라 조운이 말한 그런 사석을 마련하기 어려웠다. 유비는 유비대로 남의 사람을 넘본다는 의심을 받기가 싫었고 조운은 조운대로 시원하게 말하지 못할 사정이 있어 더욱 은밀한 사석을 만들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비의 군사들이 이른 뒤로 공손찬과 원소의 싸움은 지구전으로 변했다. 한번 쓴맛을 본 원소가 굳게 지킬 뿐 싸우려 들지 않는 데다 공손찬 또한 섣불리 공격할 마음이 일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다 보니 싸움은 어느새 달포를 넘기고 그 소식은 멀리 장안에 있는 동탁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동탁이 슬그머니 그 싸움을 이용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모사 이유가 들어와 말했다.
“원소나 공손찬은 다같이 당금의 호걸들입니다. 지금 반하에서 서 로 싸우고 있는데, 그대로 두고 볼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천자의 조 칙을 앞세우고 사람을 보내 말리셔야 합니다. 듣기에 두 사람은 어 느 편도 쉽게 상대를 쓰러뜨릴 수 없어 시일만 끌고 있다 하니 승상 의 뜻인 줄 알면서도 조칙이 당도하면 못 이긴 채 괴로운 싸움을 그 만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승상의 위엄으로 싸움을 말렸다는 칭송 을 듣게 될 뿐만 아니라, 괴로운 싸움을 면하게 되면 두 사람은 마음 깊이 승상의 은덕에 감복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자기 뜻에 맞는 말이었다. 이에 동탁은 다음 날로 태부 마일제(馬磾)와 태복 조기(趙岐)를 뽑아 싸움을 그치라는 천자의 조칙을 가지고 반하로 가게 했다.
두 사람이 하북(河北)에 이르니 원소는 백 리 밖까지 나와 천자의 명을 받들었다. 다음 날 두 사람을 맞은 공손찬도 천자의 명을 받들 어 둘의 화해는 쉽게 이루어졌다. 겉으로는 천자의 명을 어길 수 없 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속으로는 마찬가지로 이길 수도 없는 싸움 에서 몸을 빼내게 된 걸 은근히 기뻐하는 것이 모두 동탁의 모사 이 유가 헤아린 대로였다.
공손찬은 군사를 물리기에 앞서 다시 한번 조정에 표문을 올려 유현덕을 평원현의 현령에서 평원군의 상으로 올려주도록 청했다. 기의에 참가한 일로 평원령이란 벼슬 자체가 조정으로부터 박탈된 상태인 유비에게 공적인 권위를 회복시켜주려 한 것이었다. 승상의 자리에서 보면 대단찮은 벼슬자리인 데다, 방금 그의 권유를 순순히 받아들인 공손찬의 청이라 동탁도 그걸 허락했다. 유비를 키워주는게 바로 공손찬의 세력을 보태는 결과가 되리라는 것을 염려하지 않
은 것은 아니었으나, 평원이 이미 공손찬의 세력 아래 있는 이상 명 분뿐인 벼슬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 게 동탁의 생각이었다.
유비와 조운의 사석은 유비와 공손찬이 각기 군사를 자기의 임지 로 돌리게 된 전날 밤에야 마련되었다. 작별을 핑계로 유비가 조운 을 자신의 군막으로 청했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자룡)의 영용한 자태를 다시 보게 될는지………모르겠소.”
실로 이 비(備)의 섭섭한 마음 무어라 형용해야 할지 모
유비는 조운을 옆자리에 앉히고 손수 술을 따라 권하다가 문득 조운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조운의 자를 부른 것은 가까운 만큼 허물이 없어진 사이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운도 서글서글한 눈매에 물기를 비치며 탄식처럼 말했다.
“지난날 나는 공손찬이 영웅인 줄 잘못 알고 그에게 투항했으나 이제 그 하는 짓을 보니 원소와 다를 바 없는 무리외다. 상산초옹 그 분께서 명공의 크신 이름까지 제게 일러주지 않으신 게 실로 한스럽 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그러잖아도 그 늙은이가 자기를 두고 한 말이 궁금하던 유비가 술잔을 내리며 물었다. 조운이 더욱 침울해지며 대답했다.
“그분께서 살아 계실 때 이따금씩 스승님을 찾아왔다가 무예를 연마하는 나를 보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한실이 빛을 잃어 주인으 로 섬길 수 없으면 달리 주인으로 섬길 사람은 귓밥이 인중 아래로 처지고 손이 무릎에 닿는 유씨 성을 쓰는 인걸이라 했습니다. 저는 세상에 나와 그런 분을 찾았으나 이름을 모르고 인연이 닿지 않아 종내 찾을 수가 없더니, 명공을 만난 뒤에야 그분의 말이 거짓이 아 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공손찬을 주인으로 정한 뒤라 다만 늦게 만났음을 한할 뿐입니다.”
유비도 그 말을 듣자 애석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조운의 손을 한 층 힘주어 잡으며 말했다.
“자룡은 잠시 몸을 굽혀 공손 태수를 섬기시오. 반드시 함께 일하 게 될 날이 있을 것이오.”
오랜 후원자인 동시에 은인이기도 한 공손찬에게는 은밀한 배신 이 될 말이었지만 더는 속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조운을 아끼는 마음 못지않게 머지않은 공손찬의 몰락을 예감한 탓인지도 모를 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