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9권 – 4화 : 위는 오에 맡기고 촉은 남만으로
위는 오에 맡기고 촉은 남만으로
촉, 오가 다시 손을 잡았다는 소식은 곧 위의 세작에 의해 중원으 로 전해졌다. 위주(魏主) 조비는 그 소식을 듣자 크게 노했다. “촉과 오가 화친을 맺었다면 이는 틀림없이 중원을 엿보려는 뜻 이다. 짐이 먼저 그들을 치는 게 나으리라!”
그렇게 소리치고 문무의 관원들을 불러모아 크게 군사를 일으킬 의논을 했다. 먼저 오를 치고 이어 촉마저 쳐 없애버릴 생각이었다. 이때 대사마 조인과 태위 가후는 이미 죽고 없었다. 몇 안 남은 중 신 가운데 하나인 신비가 나서서 말했다.
“중원은 땅이 넓으나 백성이 적어 군사를 쓰기에는 이롭지 못한 데가 있습니다. 오늘 계책을 세우더라도 십 년은 군사를 기르고 땅 을 일구어야만 군량과 군사가 넉넉해질 것입니다. 그때에 가서 군사를 일으켜야 촉과 오를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겁많은 선비의 소리일 뿐이오. 지금 당장 오와 촉이 손을 잡고 국경으로 밀려드는데 언제 십 년씩이나 기다릴 틈이 있단 말이오?”
성난 조비가 그렇게 소리치며 그날로 군사를 일으켜 오를 치기를 재촉했다. 사마의가 나와 말했다.
“오는 장강의 험함을 끼고 있어 배가 아니면 건널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어가를 움직여 몸소 나가시려면 먼저 크고 작은 싸움배부 터 마련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채), 영潁) 쪽으로 회淮) 땅에 드신 뒤 수춘을 빼앗고 광릉에 이르시어 강구를 건너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얼른 남서를 우려빼는 게 오를 치는 데에도 상책이 될 것 입니다.”
조비는 그런 사마의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날로 영을 내려 밤낮 으로 용주(龍)라는 싸움배 열 척을 짓게 하는데, 모두가 길이 스무 남은 길에 이천 명이 탈 수 있는 큰 배였다. 그리고 따로 영을 내려 크고 작은 싸움배를 끌어모으게 하니 그 수가 삼천 척이었다.
황초(初) 오년 가을 팔월, 모든 채비가 끝난 조비는 마침내 높고 낮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출전을 명했다. 조진을 전부로 삼고, 장요, 장합, 문빙, 서황 등의 맹장을 먼저 내보낸 뒤, 다시 허저와 여 건에게 중군을 맡기고 조휴는 뒤를 맡게 했다. 유엽과 장제를 참모 로 삼아 그날로 군사를 내니 물과 뭍 두 길로 나선 군사는 삼십만이 넘었다. 사마의는 상서복야로 허창에 남아 크고 작은 나랏일을 도맡 아 보게 했다.
그 소식은 곧 오나라에 들어갔다. 근신이 급히 오왕에게 알렸다.
“조비가 몸소 용주를 타고 물과 뭍 두 길로 삼십만의 대군을 휘몰 아 내려오고 있습니다. 채, 영으로 해서 회 땅으로 나오고 있는데, 틀 림없이 광릉을 뺏은 다음 거기서 강을 건너 우리 강남을 치려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손권은 곧 문무의 관원들을 모아놓고 어찌해 야 될지를 의논했다. 먼저 고옹이 나와 말했다.
“주상께서는 이미 서촉과 화친을 맺으셨으니 어서 글을 공명에게 보내 그쪽에서도 군사를 내게 하십시오. 서촉이 군사를 일으켜 한중 으로 나오면 위의 세력은 절로 두 군데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습니 다. 그때 우리도 대장 한 사람을 뽑아 남서에 머물면서 조비를 막게 하면 그리 힘들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못 미더운지 다시 육손을 끌어내 쓰려 했다.
“육백언이 아니면 이같이 큰일을 감당해낼 이가 없소. 그 이를 불러와야겠소.”
“육백언은 형주를 맡아 지키고 있습니다. 가볍게 움직일 수 없습
니다.”
고옹이 그렇게 말했으나 손권은 여전히 생각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그걸 내가 모르는 바 아니나, 눈앞에 그를 갈음할 만한 사람이 없으니 어찌하겠소?”
손권이 그렇게 말하자 문득 한 사람이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신이 비록 재주 없으나 한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위병을 막아보겠습니다. 만약 조비가 강을 건너오면 반드시 사로잡아 폐하께 바칠 것이고, 또 그가 강을 건너지 않더라도 위병의 태반을 죽여 다시는 감히 우리 동오를 넘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손권이 보니 그는 다름 아닌 서성이었다.
서성의 자신에 찬 말에 손권도 믿는 마음이 생겼다.
“경을 얻어 강남을 지키게 되었으니 내가 걱정할 게 무엇 있겠는가?”
기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서성을 안동장군으로 삼아 건업과 남 서의 군마를 모두 맡겼다.
명을 받고 물러난 서성은 곧 자신이 맡은 장졸들에게 영을 내려 싸움에 필요한 물자와 깃발을 마련케 하는 한편 장수들을 불러 모아 강남을 막을 계책을 의논했다. 문득 한 사람이 뛰쳐나와 외쳤다.
“이제 대왕께서는 장군께 위병을 쳐부수고 조비를 사로잡는 큰일 을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장군은 무슨 까닭으로 빨리 군마를 내어 강 건너 회 땅에서 적을 맞지 않으십니까? 조비의 군사들이 여기까 지 오도록 기다리셨다가는 일이 뜻 같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서성이 보니 그는 오왕의 조카 손소(孫韶)였다. 양위장군으로 일 찍부터 광릉을 지키고 있었는데 나이는 어려도 기개가 있고 매우 대 담했다. 서성이 그의 지나친 만용을 억누르듯 말했다.
“조비의 군사는 세력이 큰 데다 이름있는 장수들을 선봉으로 내 세우고 있으니 강을 건너가 그들과 싸워서는 아니 된다. 적의 배들 이 모두 강의 북쪽 언덕에 모일 때를 기다리는 게 옳다. 그때는 절로 그들을 쳐부술 계책이 있으리라.”
“제가 거느린 삼천의 군마는 광릉 근처의 길과 지세를 밝게 알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저에게 강을 건너가 조비와 한바탕 죽기로 싸우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만약 이기지 못하면 달게 군령을 받겠습니다.”
손소가 더욱 호기를 부리며 그렇게 우겼다. 그러나 서성은 허락하 지 않았다. 손소가 또다시 가기를 우기고 서성이 마다하기를 서너 차례, 마침내 서성은 성이 꼭뒤까지 차올랐다.
“네가 이토록 군령을 듣지 않는 것은 무얼 믿고서인가? 내가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조차 다스리지 못할 줄 알았더냐?”
그렇게 소리쳐 손소를 꾸짖고는 무사들을 불러 영을 내렸다.
“저놈은 군령을 듣지 않으니 끌어내다 목 베도록 하라!”
손소가 아무리 손권의 조카라 하나 당장은 서성이 군령을 거머쥐 고 있었다. 도부수들은 그의 영을 어기지 못해 손소를 진문 밖으로 끌어내고 검은 기를 올려 형을 집행하려 했다. 이때 손소의 부장( 將)한 사람이 나는 듯 달려가 그 일을 손권에 알렸다.
놀란 손권은 얼른 말에 올라 서성의 진중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때가 늦지 않아 도부수들이 막 손소를 목 베려 할 무렵에는 형장에 이를 수 있었다.
“멈추어라. 내가 서장군을 만나보리라.”
손권이 그렇게 소리쳐 손소를 구했다. 손소가 울며 말했다.
“신은 지난날 광릉을 지키고 있었던 적이 있어 그곳 지리는 잘 압 니다. 이때 나아가 조비를 치지 않고 조비의 군사가 장강을 건너기 를 기다려서는 그날로 우리 동오도 끝장이 나고 맙니다.”
“알았다. 잠시 기다리라.”
손권은 그렇게 말해놓고 서성을 찾아갔다. 서성은 손권이 온 걸 보자 대뜸 그 까닭을 알아차렸다. 자신의 장막으로 맞아들이기 바쁘 게 말했다.
“대왕께서는 신에게 도독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위병을 막으라 하셨습니다. 지금 양위장군 손소는 군법을 지키지 않고 군령을 어겼 으니 목 베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그를 구해주 셨습니까?”
“손소가 혈기만 믿고 잘못 군법을 어긴 듯하오. 부디 그를 너그럽게 보아주시오.”
손권이 손소를 대신해 빌었다. 그러나 서성은 굳은 얼굴을 풀지 않았다.
“법이란 신이 세운 것도 아니요, 대왕께서 세우신 것도 아니며, 나 라가 으뜸으로 세워둔 어떤 본보기올시다. 그런데 대왕께 가깝다는 것 때문에 그 법을 어긴 자를 구해주시면 앞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 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손소가 군법을 어긴 걸 벌하는 것은 마땅히 장군의 권한이나 그 아이는 좀 달리 보아주시오. 원래 유씨(兪氏)였던 것을 돌아가신 형 님께서 몹시 사랑하시어 손씨(성까지 내렸소. 거기다가 나를 위해서도 여러 번 공을 세웠으니 지금 죽이는 것은 형님의 뜻을 저 버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로서도 참기 어렵구려.”
손권이 다시 한번 간곡히 말했다.
서성도 손권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마지못해 그 청을 들어주었다.
“대왕의 낯을 보아 죽음만은 면해드리겠습니다.”
이에 손권은 손소를 불러들여 서성에게 절하며 잘못을 빌게 했다.
그러나 손소는 빌기는커녕 오히려 소리 높여 서성에게 맞섰다.
“내가 말한 것은 다만 군사를 이끌고 가서 조비를 쳐부수자는 것 뿐이었소. 나는 잘못이 없으니 여기서 죽을지언정 당신의 생각은 따 를 수가 없소이다!”
그 말을 듣자 서성은 성난 나머지 얼굴빛이 다 변했다. 손권이 얼 른 손소를 꾸짖어 내쫓고 서성을 달랬다.
“저따위 녀석이 없다 한들 오에 손해날 게 무어겠소? 앞으로는 저 아이를 쓰지 마시오.”
그리고 다시 궁궐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군사 하나가 달려와 서성에게 알렸다.
“손소가 자기 군사 삼천을 이끌고 몰래 강을 건너가 버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서성은 괘씸함보다 걱정이 앞섰다. 만약 잘못되면 손권을 볼 일이 아득한 까닭이었다. 가만히 정봉을 불러 삼천 군마 를 주고 밀계를 내려 강을 건너가게 했다.
한편 위주 조비가 용주를 타고 광릉에 이르니 먼저 와 있던 조진 이 강 언덕에 군사를 늘여 세우고 조비를 맞아들였다. 조비가 조진 에게 물었다.
“강가에 적이 얼마나 있는가?”
“강 건너를 바라봐도 군사 하나 보이지 않고 깃발도 영채도 없습니다.”
“그것은 틀림없이 속임수일 것이다. 짐이 친히 가서 그 허실을 살펴보리라.”
조비가 그렇게 말하고 용주를 젓게 해 대강 속으로 나아갔다. 강저편 언덕에 배를 대니 배 위에 세운 용봉(鳳) 일월(日月)의 기치와 비단 덮개는 보는 사람의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조비는 배 에 버티고 앉아 한참이나 강 남쪽을 살폈으나 정말로 한 사람도 보 이지 않았다.
“이렇다면 강을 건너도 되지 않겠는가?”
이윽고 조비가 유엽과 장제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유엽이 가 만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병법에 허허실실이라 했습니다. 우리 대군이 이른 걸 보고서도 어찌 준비가 없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서두르지 마시고 사나흘만 더 동정을 살피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선봉으로 하여금 강을 건너 살피도록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조비도 듣고 보니 그 말이 옳은 듯했다.
“경의 말이 바로 짐의 뜻과 같소.”
그렇게 말하며 급하게 강을 건널 생각을 버렸다.
그때 이미 날이 어두워 조비는 강물 위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달이 없는 밤이라 군사들이 모두 등불을 켜드니 세상이 대낮같이 밝 았다. 그러나 강남에는 여전히 횃불 하나 보이지 않았다.
“저게 무슨 까닭인가?”
조비가 아무래도 모르겠다는 듯 좌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신이 듣기 좋은 말로 대답했다.
“폐하께서 천병을 이끌고 이르셨다는 말을 듣자 바람에 쓸리듯 달아나버린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흐뭇해 조비도 속으로 웃었다.
그런데 이튿날 날이 밝은 뒤였다. 잠시 인 바람에 짙은 안개가 걷히자 강 건너 언덕이 성으로 잇대어져 있었다. 성루마다 창칼이 햇 빛에 번쩍이고 성벽에는 갖가지 깃발이 어지럽게 펄럭이고 있었다. 뒤이어 전갈이 쏟아져 들어왔다.
“남서로부터 강을 따라 석두성까지 수백 리에 성곽과 배와 수레 가 잇대어 끊어지지 않고 있는데 모두가 하룻밤새에 솟은 것이라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조비는 깜짝 놀랐다. 실로 서성이 갈대를 묶어 푸른 옷을 입힌 허수아비를 만들게 하고 거기에다 창칼이나 깃발을 꽂아 역시 성처럼 만든 곳에 세워두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걸 수많은 인마로 본 위병이 그대로 조비에게 알렸으니 어찌 조비의 간이 철렁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는 비록 천() 무리의 뛰어난 무사들을 거느렸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강남의 인재들은 어찌해볼 수가 없구나!”
조비가 그렇게 탄식하고 있을 때 문득 미친 듯한 바람이 일기 시 작했다. 흰 물결은 하늘을 찌르고 어지럽게 튀는 물방울은 조비의 용포를 적셨다. 금세라도 조비가 탄 배가 뒤집힐 듯하자 조진은 황 망히 문빙에게 영을 내려 배를 급히 저어오게 하였다.
문빙이 작은 배를 저어왔으나 조비의 용주가 얼마나 심하게 흔들 리는지 아무도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문빙이 하는 수 없이 용주 위로 뛰어올라가 조비를 들쳐업고 작은 배로 옮겼다. 간신히 작은 배를 저 어 강물가에 이르니 유성마가 달려와 급한 소식을 전했다.
“촉의 조운이 군사를 이끌고 양평관으로부터 나와 장안을 치려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조비는 깜짝 놀라 낯빛이 변했다. 그때 다시 오의 군사 한 떼가 갑자기 위병을 덮쳤다. 바로 손소가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위 병이 당해내지 못해 태반이 꺾이고, 물에 빠져 죽은 자만도 헤아리 기 힘들 정도였다.
위의 여러 장수들이 힘을 다해 조비를 구해 겨우 회하를 건넜다. 그러나 미처 삼십 리도 가기 전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오군이 강 가의 무성한 갈대에다 미리 고기기름을 끼얹어놓고 기다리다가 불 을 지른 것이었다.
불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세차게 타올랐다. 하늘 가득 피어오른 불꽃은 금세 조비가 탄 용주를 삼켜버릴 듯했다. 깜짝 놀 란 조비는 얼른 작은 배에서 뛰어내려 불길이 덜한 언덕으로 기어오 르려 했다.
조비가 겨우 강가 언덕에 올라 돌아보니 자신이 타고 있던 용주 는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더욱 황망해진 조비는 급히 말에 올 랐다. 그때 또 한 떼의 군마가 물밀듯 쏟아져 들었다. 이번에는 오의 장수 정봉이 이끄는 군사들이었다.
장요가 급히 말을 박차 달려 나가 정봉을 맞았으나 나이 탓인지 이미 예같지 못했다. 정봉이 쏜 화살에 허리를 맞고 말에서 떨어 졌다. 서황이 얼른 달려 나가 장요를 구하고 위주 조비와 함께 보호 하며 가까스로 달아났다. 그러나 군사는 거기서 또 수없이 꺾였다. 뒤쫓던 손소와 정봉은 위군이 버리고 간 것들을 거둬들였다. 뺏은 말이며 수레에다 배, 병기, 군량이 산과 같았다. 위의 대패였다. 오왕은 싸움에 크게 이기고 돌아온 손소와 정봉에게 큰 상을 내렸다.
조비는 패군을 이끌고 허창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무엇보다 괴로 운 것은 장요의 죽음이었다. 장요는 정봉에게 화살 맞은 곳이 덧나 허창에 이르자마자 숨이 졌다. 조비는 장요를 후하게 장사 지내주고 그 유족들에게 금은을 내려 미안한 마음을 스스로 달랬다.
한편 군사를 이끌고 양평관으로 나왔던 조운은 미처 싸움을 시작 하기도 전에 제갈공명으로부터 글 한 통을 받았다.
‘익주 기수, 노인, 어른, 추장의 뜻) 옹(雍)가 남만의 맹획과 손을 잡고 만병 십만을 일으켜 사군(四郡)을 침략하고 있으니 장군 은 군사를 물려 되돌아오시오. 양평관은 마초에게 굳게 지키라 하면 될 것이오. 이제 나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남쪽을 쳐 그곳의 오랑 캐를 평정할 작정이오.’
공명의 글은 대강 그러했다. 이에 조운은 급히 군사를 거두어 성 도로 돌아갔다.
이때 성도의 공명은 크고 작은 일을 모두 홀로 도맡아 하는데 오 직 공변됨을 으뜸으로 삼으니 조금도 그릇됨이 없었다. 서천과 동천 의 백성들은 오랜만에 태평한 세월을 마음껏 누렸다. 밤에는 문을 닫아거는 일이 없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도 주워 가지는 법이 없었 다. 거기다 해마다 풍년이라 늙은이 젊은이 가릴 것 없이 배를 두드 리며 노래했고, 나라의 부역이 있으면 서로 다투어 나와 힘을 아끼 지 않았다. 따라서 싸움에 필요한 기구나 물자 치고 갖춰지지 않은게 없고, 병영의 창고에는 쌀이 가득했으며, 나라의 고방에는 재물이 꽉 차 있었다.
그런데 건흥 삼년 익주에서 급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만왕 맹획이 오랑캐 군사 십만을 일으켜 국경을 침범하고 있습 니다. 그런데 건녕 태수 옹개는 한(漢) 십방후防侯) 옹치(雍齒)의 자손이면서도 맹획과 손을 잡고 모반하려 합니다.”
이어 급한 소식이 뒤따라 들어왔다.
“장가군 태수 주포와 월준군 태수 고정 두 사람은 성을 들어 옹개 에게 바쳤고 오직 영창군 태수 왕항 한 사람만이 버티고 있다 합니 다. 옹개, 주포, 고정 세 사람은 맹획의 길잡이가 되어 영창군을 들이 치고 있는데, 태수 왕항은 공조 여개(呂凱)와 함께 백성들을 모아 죽 기로 싸우고 있으나 형세가 매우 위태롭다고 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공명은 곧 궁궐로 달려가 후주를 뵙고 아뢰었다.
“신이 보건대 남쪽 오랑캐가 폐하께 복속하지 않는 것은 나라의 큰 근심거리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신 스스로 대군을 이끌 고 가서 저들을 무찔러야 될 것 같습니다.”
“동쪽에는 손권이 있고 북쪽에는 조비가 있는데 승상께서 짐을 버리고 가신다니 막막하구려. 만약 오나 위가 쳐들어온다면 어찌하 겠소?”
후주가 겁먹은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공명은 부드럽게 그런 후주를 안심시켰다.
“동오는 이제 막 우리와 화친을 맺은 터라 딴마음을 먹지 아니할것입니다. 또 만약 딴마음을 먹는다 해도 이엄을 백제성에 남겨두었으니, 그 사람이면 넉넉히 육손을 막아낼 것입니다. 남은 것은 위의 조비인데 그도 별로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조비는 싸움에 크게 진 지 오래되지 않아 날카로운 기세가 죽어 있으니 먼 곳을 치러 오 기 어려울 것입니다. 거기다가 마초가 한중의 여러 좁은 길목이며 험한 관을 맡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밖에 신은 장포와 관흥에 게도 군사를 나눠주어 이쪽저쪽 위급에 대비하게 해두었으니 폐하 를 지키는 데는 만에 하나도 그릇될 염려가 없습니다. 이제 신은 먼 저 남쪽 오랑캐부터 쓸어버린 뒤 다시 북으로 쳐올라가 중원을 뺏으 려 합니다. 그리하여 선제께서 보잘것없는 신을 세 번이나 찾아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아울러 돌아가시면서 하신 당부를 이루려 하는 것 이니 부디 허락하여주십시오.”
그러자 후주도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짐은 나이 어리고 아는 게 없으니 승상께서 헤아려 하시오.”
그때 한 사람이 나서서 소리쳤다.
“아니 됩니다. 승상께서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여럿이 보니 그는 남양 사람 왕련(王)이었다. 자는 문의(儀)로 그때 벼슬은 간의대부였다.
“남쪽 지방은 불모의 땅이요, 나쁜 기운과 병이 가득한 고장입니 다. 나라의 큰일을 맡아보시는 승상께서 몸소 그리로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옹개 같은 무리는 사람 몸으로 치면 옴이나 버짐 같은 가벼 운 걱정거리이니, 한 사람 대장을 뽑아 치게 해도 틀림없이 공을 이 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련이 그렇게 말리는 까닭을 밝혔다.
“남쪽 오랑캐 땅은 이 나라에서 매우 멀어 사람들은 왕화(化)에 익어 있지 않소. 따라서 복속시키기가 매우 어려운 까닭에 내가 몸 소 가보려는 것이외다. 때로는 힘으로 억누르고 때로는 부드러움으 로 달래야 하는데, 그때그때 헤아려 베풀어야 되는 일이라 다른 사 람에게 맡길 수가 없소.”
공명이 왕련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왕련이 두 번 세 번 말 려도 듣지 않고 그날로 군사를 일으켰다. 양평관에 나가 있던 조운 을 급하게 불러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공명은 장완)을 참군으로 삼고 비위(費禕)는 장사로, 동궐(董 厥), 번건(建) 두 사람은 연리(吏)로 세웠다. 대장으로는 조운과 위연을 써서 군마를 모두 거느리게 하고, 왕평(平)과 장익(張翼)은 부장이 되어 서천 장수 수십 명과 더불어 그들을 따르게 했다.
군사는 모두 오십만이었다. 공명이 그들을 급하게 몰아 익주를 향 해 가고 있는데 문득 관공의 셋째 아들 관색)이 찾아와 말했다.
“형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을 때 저는 다친 몸으로 포가장에 숨어 낫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늘상 서천으로 가서 선제를 뵙고 원수 갚을 마음뿐이었으나 몸이 낫지 않아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가 이제야 겨우 몸이 나아 알아보니 동오의 원수들은 모두 죽어 있 더군요. 어서 서천으로 가서 천자를 뵈오려 하는데 도중에 남쪽 오 랑캐를 치러 가는 군사를 만나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저도 함께 데려가주십시오.”
공명이 그를 보니 관공의 모습이 역력했다. 공명은 탄식해 마지않으니, 그 사람이면 넉넉히 육손을 막아낼 것입니다. 남은 것은 위의 조비인데 그도 별로 걱정하실 것은 없습니다. 조비는 싸움에 크게 진 지 오래되지 않아 날카로운 기세가 죽어 있으니 먼 곳을 치러 오 기 어려울 것입니다. 거기다가 마초가 한중의 여러 좁은 길목이며 험한 관을 맡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그밖에 신은 장포와 관흥에 게도 군사를 나눠주어 이쪽저쪽 위급에 대비하게 해두었으니 폐하 를 지키는 데는 만에 하나도 그릇될 염려가 없습니다. 이제 신은 먼 저 남쪽 오랑캐부터 쓸어버린 뒤 다시 북으로 쳐올라가 중원을 뺏으 려 합니다. 그리하여 선제께서 보잘것없는 신을 세 번이나 찾아주신 은혜에 보답하고, 아울러 돌아가시면서 하신 당부를 이루려 하는 것 이니 부디 허락하여주십시오.”
그러자 후주도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이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짐은 나이 어리고 아는 게 없으니 승상께서 헤아려 하시오.”
그때 한 사람이 나서서 소리쳤다.
“아니 됩니다. 승상께서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여럿이 보니 그는 남양 사람 왕련(王)이었다. 자는 문의(儀)로 그때 벼슬은 간의대부였다.
“남쪽 지방은 불모의 땅이요, 나쁜 기운과 병이 가득한 고장입니 다. 나라의 큰일을 맡아보시는 승상께서 몸소 그리로 가셔서는 아니 됩니다. 옹개 같은 무리는 사람 몸으로 치면 옴이나 버짐 같은 가벼 운 걱정거리이니, 한 사람 대장을 뽑아 치게 해도 틀림없이 공을 이 룰 수 있을 것입니다.”
왕련이 그렇게 말리는 까닭을 밝혔다.
“남쪽 오랑캐 땅은 이 나라에서 매우 멀어 사람들은 왕화(化)에 익어 있지 않소. 따라서 복속시키기가 매우 어려운 까닭에 내가 몸 소 가보려는 것이외다. 때로는 힘으로 억누르고 때로는 부드러움으 로 달래야 하는데, 그때그때 헤아려 베풀어야 되는 일이라 다른 사 람에게 맡길 수가 없소.”
공명이 왕련의 말에 그렇게 답했다. 그리고 왕련이 두 번 세 번 말 려도 듣지 않고 그날로 군사를 일으켰다. 양평관에 나가 있던 조운 을 급하게 불러들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공명은 장완)을 참군으로 삼고 비위(費禕)는 장사로, 동궐(董 厥), 번건(建) 두 사람은 연리(吏)로 세웠다. 대장으로는 조운과 위연을 써서 군마를 모두 거느리게 하고, 왕평(平)과 장익(張翼)은 부장이 되어 서천 장수 수십 명과 더불어 그들을 따르게 했다.
군사는 모두 오십만이었다. 공명이 그들을 급하게 몰아 익주를 향 해 가고 있는데 문득 관공의 셋째 아들 관색)이 찾아와 말했다.
“형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을 때 저는 다친 몸으로 포가장에 숨어 낫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늘상 서천으로 가서 선제를 뵙고 원수 갚을 마음뿐이었으나 몸이 낫지 않아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가 이제야 겨우 몸이 나아 알아보니 동오의 원수들은 모두 죽어 있 더군요. 어서 서천으로 가서 천자를 뵈오려 하는데 도중에 남쪽 오 랑캐를 치러 가는 군사를 만나게 되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저도 함께 데려가주십시오.”
공명이 그를 보니 관공의 모습이 역력했다. 공명은 탄식해 마지않으며 조정에 그 소식을 알리는 한편, 관색을 전부 선봉으로 삼아 데리고 떠났다.
공명이 거느린 인마는 매우 많았으나 대오를 가지런히 해 나아가 며 배고프면 밥 지어 먹고 목마르면 물 떠 마셨다. 밤이면 머물고 날 이 새면 나아가니, 어디를 지나가도 백성들을 터럭만큼도 해치는 법 이 없었다.
옹개는 공명이 친히 대군을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듣자 주포와 고 정을 불러 의논했다. 셋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군사를 세 갈 래로 나누어 싸우는 게 좋겠다는 결정을 보아 고정은 가운데 길로 나아가고, 옹개는 왼쪽 길로, 주포는 오른쪽 길로 나아가기로 했다. 셋 모두 저마다 거느린 군사는 오륙만쯤 되었다.
이때 가운데 길을 맡은 고정의 선봉을 맡은 것은 악환(鄂煥)이란 장수였다. 악환은 키가 아홉 자에 얼굴은 몹시 못생겼으나, 한 자루 방천극(天)을 잘 써 홀로 만 명을 당해낼 만한 용맹이 있었다. 그 용맹을 믿고 저희 편 대채를 떠나 촉병을 맞으러 나갔다.
그 무렵 공명이 이끈 대군은 이미 익주 경계에 이르러 있었다. 앞 장을 선 위연이 부장인 장익, 왕평과 더불어 익주 땅에 막 발을 들여 놓는데 악환이 군마를 이끌고 마주쳐 왔다.
양군이 둥글게 진을 쳐 맞선 가운데 먼저 위연이 말을 내어 큰 소리로 꾸짖었다.
“역적은 어찌하여 빨리 항복하지 않는가?”
그러자 악환은 다짜고짜로 말을 박차고 달려 나와 위연과 맞붙었 다. 위연이 몇 합 싸우지도 않고 힘이 부친 듯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게 꾐수인 것도 모르고 악환이 기세를 올려 뒤쫓았다.
몇 리쯤 갔을까, 문득 함성이 크게 일더니 왕평과 장익의 두 갈래 군마가 나타나 악환이 돌아갈 길을 끊어버렸다.
그때 다시 달아나던 위연이 돌아서서 덤비니 악환은 꼼짝없이 세 장수 가운데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제서야 속은 줄 안 악환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벗어나려 해보 았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끝내 세 장수에게 사로잡히어 공명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공명이 악환을 묶은 끈을 풀어주게 하고 술과 고기를 대접한 뒤 물었다.
“너는 누구에게 속한 장수인가?”
“저는 고정)의 부장입니다.”
악환이 뜻밖의 대접에 어리둥절해 대답했다.
그러자 공명이 한층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고정이 충의 있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옹개의 꾐 에 빠져 일이 이렇게 되었을 뿐이다. 이제 너를 놓아 보낼 터이니 가 서 고태수(高太守)에게 이르라. 어서 빨리 항복해 크나큰 화를 면하 라고.”
그런 다음 정말로 악환을 돌려보냈다. 꼭 죽는 줄 알았던 악환은 거듭 절하여 고마움을 나타내며 고정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정 에게 공명의 덕을 추켜세움과 아울러 공명이 고정을 보고 한 말을 그대로 전하니 고정 역시 감격해 마지않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옹개가 고정의 진채를 찾아와 따지듯 물었다.
“악환이 사로잡혔다가 어떻게 돌아올 수 있었소?”
“제갈량이 의로 놓아 보낸 듯하오.”
고정이 숨기지 않고 사실대로 밝혔다. 그러자 옹개가 깜짝 놀라는 시늉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바로 제갈량이 우리 사이를 떼어놓으려고 부린 계책이다. 이른바 반간지계(反間之計)라는 것이오.”
그러나 이미 제갈공명에게 마음이 기울어진 고정은 그 말을 다 믿지 않았다. 어느 쪽이 옳은지 몰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문득 촉장 이 와서 싸움을 건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옹개는 스스로 삼만군을 이끌고 나가 촉군과 맞섰다. 그러나 원래 가 이겨낼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다. 몇 합 부딪기도 전에 옹개가 말 머리를 돌려 달아나니 위연은 이십여 리나 뒤쫓으며 옹개의 군사들 을 죽였다.
다음 날 옹개는 다시 군사를 몰고 나와 싸움을 걸었다. 그로서는 이판사판이었다. 그런데 공명은 웬일인지 사흘이나 잇달아 군사를 내지 않았다.
공명이 겁이라도 먹은 걸로 안 옹개와 고정은 나흘째 되던 날 길 을 나누어 함께 촉의 진채를 덮치려 했다. 바로 공명이 기다리던 것 이었다. 진작부터 공명은 위연에게 그들이 올 만한 길을 살펴두게 했다가 정말로 그들이 오자 복병을 내어 거꾸로 덮쳤다.
뜻밖에 당한 옹개와 고정의 군사는 태반이 죽거나 상하고, 많은 수가 사로잡혔다. 옹개와 고정이 빠져나간 것만도 요행이라 할 만큼 참패였다. 그러나 일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공명은 사로잡은 옹개의 군사와 고정의 군사를 두 곳에 나누어 가두었다. 그리고 자기편 군사를 시켜 슬그머니 그들에게 말하게 했다.
“고정의 졸개들은 죽음은 면하겠지만 옹개의 졸개들은 모두 죽음을 당할 것이다.”
그 말은 순식간에 사로잡힌 군사들 사이에 퍼졌다. 잠시 후 공명은 옹개의 군사들을 끌어오게 해 물었다.
“너희들은 누구의 졸개들이냐?”
“고정 아래에 있던 군사들입니다.”
들은 말도 있고 해서 군사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공명은 아무것도 모르는 체 정말로 그들을 죽이지 않고 술과 밥을 배불리 먹여 저희 진채로 돌려보냈다.
그런 다음 공명은 다시 고정의 군사들을 끌어내게 하여 조금 전 과 똑같이 물었다.
“저희들이야말로 진짜 고정의 군사들입니다.”
혹시라도 공명이 잘못 생각할까 두려워 고정의 졸개들이 소리쳤 다. 그러나 이번에도 군말 없이 그들을 살려주고 밥과 술을 내리며 말했다.
“옹개가 오늘 사람을 보내 항복하면서 너희 주인과 주포(朱)의 목을 베어 공을 삼겠다 했으나 나는 차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너희 들은 고정의 부하라 하니 너희를 놓아 보내거니와, 다시는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지 말라. 만약 다시 사로잡혀 오는 날에는 결코 용서 치 않으리라.”
그 말에 고정의 졸개들은 모두 절하여 고마움을 나타내고 자기들 진채로 돌아갔다.
사로잡혔다 돌아온 졸개들로부터 옹개의 일을 전해 들은 고정은 슬몃 의심이 들었다. 몰래 사람을 옹개의 진채로 보내 사정을 알아 보게 했다. 사로잡혔다 돌아온 옹개의 군사들 태반은 한결같이 공명 의 덕을 칭송함과 아울러 옹개보다는 고정을 따르려 한다는 말이 들 어왔다.
그러나 고정은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다시 몰래 사 람을 공명의 진채로 보내 허실을 살펴보게 했다.
그런데 공명의 진채를 살피러 가던 고정의 군사는 재수없게도 가 는 도중에 숨어 있던 공명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공명은 다시 그걸 이용했다. 사로잡혀 끌려온 군사를 짐짓 옹개의 군사로 착각한 것처럼 자신의 장막 안으로 불러들여 은근하게 물었다. “자네 대장은 고정과 주포의 목을 바치겠다고 약속해놓고 어째서 기일을 어기는가? 또 일이 그리 됐으면 사람을 내게 보내 그 사정을 자세히 얘기할 일이지 어째서 첩자를 보내 우리 진채를 살피는가?” 그러자 그 첩자는 공명이 일부러 그러는 줄도 모르고 정말로 옹 개가 보낸 사람인 양 입을 다물었다. 공명은 그에게 술과 밥을 내린 뒤 밀서 한통을 써주면서 당부했다.
“너는 이 글을 옹개에게 전하거라. 그리고 되도록이면 빨리 손을 써서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라고 일러라.”
공명이 놓아주자마자 자신의 진채로 돌아간 고정의 졸개는 무슨 큰 공이라도 세운 양 공명이 옹개에게 갖다주라고 한 밀서를 고정에게 바쳤다. 그 밀서를 읽은 고정이 옹개에게 버럭 성을 내며 말했다.
“나는 저를 진심으로 대했건만 저는 오히려 나를 해치려 하는구나. 정리로 보아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곧 악환을 불러들여 어떻게 할까를 의논했다.
“공명은 어진 사람이니 그와 등지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반하여 죄를 짓게 된 것은 모두 옹개 때문이니 차라리 그를 죽이 고 공명에게 투항하는 게 낫겠습니다.”
악환이 대뜸 그렇게 말했다. 이미 마음이 거지반 돌아서 있던 고 정은 그 말에 드디어 뜻을 굳힌 듯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손을 써야겠는가?”
“술자리를 마련하고 사람을 시켜 옹개를 부르도록 해보시지요. 그 사람이 딴 뜻이 없다면 기꺼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오지 않는 다면 반드시 딴 속셈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주군께서는 군사를 내어 앞으로 그를 들이치십시오. 나는 진채 뒤 소로에 매복해 기다리면 옹개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악환이 그렇게 꾀를 내자 고정은 곧 그대로 따라 먼저 술자리를 마련하고 옹개를 불렀다. 그러나 옹개는 옹개대로 전날 촉군에게 붙 들렸다 돌아온 졸개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고정이 자기를 해칠까 두려워 그 술자리에 가지 않았다.
그날 밤이었다. 옹개가 오지 않는 걸 마음이 있어서인 걸로 단 정한 고정은 군사를 들어 옹개의 진채를 들이쳤다. 그러자 공명이 고정의 졸개들로 잘못 안 체 놓아 보낸 옹개의 군사들이 함빡 고정을 편들었다. 자기들이 살아난 게 고정의 덕분이란 생각에서뿐만 아 니라, 고정을 따르는 게 여러 가지로 이로울 것 같아서였다.
밤중에 갑자기 습격을 받은 데다 자기편 군사들까지 고정을 도와 덤비니 옹개가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싸워보지도 않고 말에 올라 산길로 달아났다. 그러나 채 두 마장도 못 가 북소리가 울리면서 한 떼의 군마가 길을 막았다. 고정의 장수 악환이 숨어서 기다리다 나 타난 것이었다.
악환이 방천극을 휘두르며 말을 몰아 옹개를 덮쳤다. 옹개가 막아 보려 했으나 손발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악환의 한 창에 찔려 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악환이 그런 옹개의 목을 베자 옹개의 졸개들은 모조리 고정에게 항복했다. 고정은 양쪽 군마를 합쳐 이끌고 공명을 찾아가 항복하며 옹개의 목을 바쳤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높직한 자리에 앉아 항복을 받던 공명이었다.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 없이 고정을 내려보다가 문득 좌우를 돌아보 며 소리쳤다.
“여봐라, 어서 저 흉측한 역적 놈을 끌어내다 목 베어라!”
그 소리에 깜짝 놀란 고정이 공명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승상의 크신 은혜에 감동되어 옹개의 목을 받쳐들고 항복하 러 왔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저를 목 베려 하십니까?”
그러자 공명이 어림없다는 듯 크게 비웃으며 꾸짖었다.
“네놈은 거짓으로 항복해 왔다. 어찌 감히 나를 속이려 드느냐?”
그러고는 문갑 속에서 글 한 통을 꺼내 고정에 던지며 말했다.
“주포가 사람을 보내 가만히 항복하는 글을 보내왔다. 바로 그것 이니 읽어보아라. 거기 보면 옹개와 너는 함께 죽고 함께 살기를 맹 세한 사이라는데 네가 어찌 하루아침에 옹개를 죽일 수 있겠느냐? 네 항복이 거짓이란 걸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글 덕분이다.”
“아닙니다. 주포가 반간지계(反之計)를 쓴 것입니다. 승상께서는 결코 그놈의 말을 믿으셔서는 아니 됩니다.”
고정이 억울해 부르짖었다. 그러자 공명의 얼굴이 좀 풀렸다. 한 참을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 역시 편지 한 장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만약 네가 주포를 사로잡아 온다면 그때는 너의 진심을 믿어주겠다.”
“그 일이라면 승상께서는 조금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가서 주포를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그러자 고정은 그 길로 악환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주포의 진채 로 밀고 들어갔다. 주포의 진채가 한 십 리쯤 남은 산 곁을 지나는데 문득 한 떼의 군마가 마주쳐 왔다. 고정이 보니 주포의 군사들이었다. 고정을 본 주포가 놀라 물었다.
“고태수께서 어쩐 일이시오?”
고정이 대뜸 그런 주포를 꾸짖었다.
“너는 어찌하여 제갈승상께 못된 글을 올려 나를 해치려 했느냐?”
하도 난데없고 어이없는 말이라 주포는 눈이 둥그래져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악환이 말을 몰아와 멍해 서 있는 주포를 한 창에 찔러 버렸다. 주포가 말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고정이 그 졸개들에게 소리쳤다.
“순순히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리라. 모두 항복하라!”
그러자 주포의 군사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엎드려 고정에게 항복했다.
고정은 양쪽 군사를 모두 이끌고 공명을 찾아가 주포의 목을 바치며 항복했다. 공명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실은 내가 그대를 믿지 않은 게 아니었소. 그대가 빨리 옹개와 주포를 죽여 충심을 보이게 하려고 의심하는 체했을 뿐이다.”
그리고 고정을 익주 태수로 삼아 세 군을 아울러 다스리게 하고 악환은 아장(將)으로 세웠다.
고정, 옹개, 주포의 세 갈래 군사가 모두 평정되자 영창(永昌) 태 수 왕항(王)은 성 밖까지 나와 공명을 맞아들였다. 성으로 들어간 공명이 물었다.
“누가 공과 더불어 이 성을 지켜 무사하게 하였소?”
“제가 오늘까지 무사하게 이 성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본군 (本郡) 불위 땅 사람 여개(呂凱)가 도와준 덕분이었습니다. 모든 공 이 그 사람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왕항이 그렇게 대답했다. 공명은 그 자리에서 여개를 불러들이게 했다. 예가 끝난 뒤 공명이 넌지시 물었다.
“오래전부터 공이 영창의 높은 선비로 이 성을 지켜내는 데 여러 가지로 애쓰시고 있다는 말을 들어왔소. 이제 다행히 이 성은 건졌 으나 나는 여기 그치지 않고 남만까지 평정할 작정이오. 공의 생각 은 어떻소?”
그러자 여개가 품에서 지도 한 장을 내어주며 말했다.
“저는 벼슬길에 나온 뒤 남쪽 오랑캐들이 틈만 나면 모반하려 함 을 안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몰래 그 땅에 보내 거기서 군사를 머무르게 하거나 싸움을 벌이기에 좋은 땅을 살펴보고 그림 을 그리게 하였습니다. 바로 이 평만지장도指掌圖)’인데, 이제 승상께 올립니다. 승상께서 살펴보시면 남쪽 오랑캐를 평정하는 데 약간의 도움은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미리 알고 기다린 듯한 여개의 그 같은 말에 공명은 크게 기뻤다. 여개에게 행군교수(行軍敎授)를 내리고 아울러 길잡이로 삼아 남만 땅 깊숙이 들어갔다.
공명이 이끄는 군사가 한참 나아가고 있는데 문득 후주가 사자를 보내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공명이 사자를 맞아들이고 보니 그는 다름 아닌 마속이었다. 그 형 마량이 죽은 지 오래 안 돼 아직 상복 차림이었다.
“주상의 명을 받들어 군사들에게 나눠줄 술과 베를 가지고 왔습니다.”
마속이 그렇게 사자로 온 뜻을 밝혔다. 공명은 후주가 내린 것을 하나하나 군사들에게 나눠준 뒤, 마속과 자리를 같이해 물었다.
“보시다시피 나는 천자의 명을 받들어 남쪽 오랑캐를 평정하러 가 는 길이네. 전부터 들으니 자네는 세상 모든 일에 두루 안목이 높다 는데, 내게도 좀 가르쳐주게. 이번 일은 어떻게 해야 잘될 것 같은가?”
그러자 마속이 목청을 가다듬어 말했다.
“승상께서 물으시니 어리석은 대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남쪽 오랑캐들은 그 땅이 멀고 산이 험한 걸 믿어 천자께 복종하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됩니다. 또 설령 오늘 힘으로 눌러놓아도 내일이면 다 시 들고 일어날 것이니 여간 다스리기 어렵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승상께서 가시면 반드시 평정은 될 것이나, 우리가 북으로 조비를 치러 나서면 그 빈틈을 타 다시 일어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듣기 로 ‘적의 마음을 치는 게 으뜸이요, 적의 성을 치는 것은 그만 못하 다 마음으로 싸워 이기는 게 군사로 싸워 이기는 것보다 낫다’ 하였 으니 승상께서는 그 점을 헤아리셔야 할 것입니다. 마음으로 남쪽 오랑캐를 무릎 꿇게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무엇이겠습니까?”
“실로 유상(幼, 마속의 자)이야말로 내 마음속을 들여다본 듯 하이!”
공명은 그렇게 감탄하고 마속을 참군(參軍)으로 삼아 함께 데리고 갔다.
대강 마음속으로 생각해두었던 게 옳았음을 마속을 통해 확인한 까닭인지 그날부터 공명이 이끈 대군의 나아감은 더욱 빨라졌다. 오 가 있어 위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다 해도 쓸데없이 남쪽에서 시간 을 끌고 있을 까닭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