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4화 : 공명, 네 번째 기산으로 나아가다
공명, 네 번째 기산으로 나아가다
한편 공명은 미리 헤아린 한 달의 장마가 끝나가자 아직 날이 개 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한 갈래 군사를 몰아 성고로 나아갔다. 그리 고 나머지 대군에게도 영을 내려 적파에 모이도록 했다.
대군이 모두 모이자 공명은 장수들을 모두 자신의 장막에 불러모 으고 말했다.
“내가 보기에 위병은 머지않아 반드시 달아날 것이다. 위주가 조 서를 내려 조진과 사마의를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내가 그들을 뒤쫓으면 반드시 거기 따른 대비가 있을 것이니, 차라 리 그들을 그냥 보내주고 따로 좋은 계책을 꾸미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런데 미처 공명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왕평이 보낸 사람이 달 려와 알렸다.
“위병이 물러가고 있습니다.”
공명은 그 사람을 불러 왕평에게 전하게 했다.
“결코 적을 뒤쫓아서는 안 된다. 내게 위병을 깨뜨릴 계책이 따로 있으니 꼭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 일러라.”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장수들이 공명 앞에 나아가 물었다.
“위병은 비에 시달리다 더 견디지 못해 이제 물러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그 뒤를 후려칠 좋은 때입니다. 그런데도 승상께서는 어찌하여 뒤쫓지 말라 하십니까?”
공명은 그들을 타이르듯 말했다.
“사마의는 군사를 매우 잘 부리는 사람이다. 지금 군사를 물리기 는 하지만 반드시 복병을 묻어두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뒤를 쫓는다면 도리어 그의 책에 빠지는 꼴이 되고 마니 멀리 달아나도 록 놓아둬라. 나는 군사를 나누어 지름길로 야곡으로 달려가겠다. 그리고 기산을 빼앗아 위병들로 하여금 막을 틈이 없게 만들겠다.” 그러자 장수들이 다시 물었다.
“장안을 뺏으려면 다른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무슨 까닭으로 기산부터 꼭 차지하려 하십니까?”
“기산은 장안의 머리다. 농서 여러 고을의 군사들이 장안으로 오 려면 반드시 그 땅을 지나야 한다. 거기다가 기산은 앞으로 위빈(渭 濱)을 끼고 뒤로 야곡을 업어, 왼쪽으로 나고 오른쪽으로 들게 되어 있으니 복병을 쓰기에도 좋다. 그야말로 군사를 쓰기에 좋은 땅이 아니겠느냐? 나는 그 때문에 기산을 먼저 차지해 그 지리(地利)를 얻으려 한다.”
공명이 이렇게 대답했다. 그제야 장수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공명이 다시 영을 내렸다.
“위연, 장의, 두경, 진식 네 장수는 군사를 이끌고 기곡으로 나아 가라. 마대, 왕평, 장익, 마충은 야곡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스스로는 관흥과 요화를 선봉으로 삼아 나머지 대군을 이 끌고 그들 뒤를 따랐다.
한편 조진과 사마의는 군사를 물리면서도 촉병의 움직임이 궁금 했다. 한 갈래 군사를 진창 옛길로 보내 거기 있는 병의 움직임을 살피게 했다.
“병은 별로 뒤쫓아올 뜻이 없는 듯합니다.”
살피러 간 군사들이 돌아와 그렇게 알렸다. 이에 조진과 사마의는 마음 놓고 군사를 물렸다. 한 열흘쯤 갔을 때 복병으로 남아 뒤를 지 키던 군사들도 모두 돌아와 말했다.
“병들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조진이 말했다.
“잇달아 내린 가을비로 골짜기에 매단 나무다리들이 모두 끊어져 버렸으니 촉병들이 무슨 수로 우리가 물러난 걸 알겠느냐?”
그러나 사마의는 생각이 다른 것 같았다. 조진의 말을 뭉개듯 깐깐하게 말했다.
“병은 머지않아 우리를 따라나올 것입니다.”
“어떻게 그걸 아시오?”
조진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사마의가 깨우쳐주듯 말했다.
“잇달아 날씨가 맑은 데도 촉병이 뒤쫓지 않는 것은 우리가 복병을 남긴 걸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군사가 멀리가도록 놔두었다가 우리가 모두 가고 나면 저들은 기산을 뺏고 나오겠지요.”
그러나 조진은 믿을 수가 없었다. 말없이 고개만 갸웃거리자 사마 의가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자단은 어찌하여 내 말을 믿지 않으십니까? 제가 보기로 공명은 반드시 기곡과 야곡 두 골짜기로 나올 것입니다. 열흘을 기한으로 우리 둘이 한 골짜기씩 맡아서 지키되, 만약 공명이 오지 아니하면 저는 얼굴에 붉은 분을 바르고 여자 옷을 걸친 뒤 자단의 영채로 찾 아가 죄를 빌겠습니다.”
사마의가 너무 자신에 차 말하자 조진도 불쑥 고집이 솟아 그 내 기를 받아들였다.
“만약 촉군이 온다면 나는 천자께서 내려주신 옥띠 한 벌과 말 한 필을 중달에게 드리겠소.”
그러고는 곧 군사를 나누어 한 골짜기씩 맡았다. 조진은 기산 서 쪽의 야곡 입구를 지키고 사마의는 기산 동쪽의 기곡 입구에 진채를 세웠다.
각기 진채가 서자 사마의는 먼저 군사 한 갈래를 골짜기에 매복 시키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길가 영채에서 쉬게 했다. 그다음 옷 을 갈아입고, 잡군 속에 섞이어 각 영채를 돌며 군사들이 하는 양을 살폈다. 이곳저곳을 살펴보다가 어떤 영채에 이르렀을 때였다. 한 편장이 하늘을 우러러보며 원망의 소리를 내질렀다.
“큰 비에 젖어 몇 날 며칠을 고생했건만 어찌 돌아갈 생각은 않고 이런 곳에 다시 머무는가. 돼먹잖은 내기들을 하느라 관군의 괴로움은 돌아볼 줄 모르는구나!”
그 말을 들은 사마의는 가만히 자신의 장막으로 돌아가 장수들을 모두 불러모은 뒤 그 편장을 끌어오게 했다.
“조정에서 즈믄 날[]을 들여 군사를 기르는 것은 한때의 쓸모 를 위해서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 함부로 그런 원망의 소리를 내질 러 군사들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느냐?”
사마의가 끌려온 편장을 보고 꾸짖었다. 그러나 그는 바로 잘못을 빌지 않고 발뺌을 하려 들었다. 성난 사마의는 다시 그때 함께 있던 사람들을 불러들여 무릎맞춤을 시켰다. 그제야 빠져나갈 길이 없음 을 안 그가 잘못을 빌었다. 사마의가 그를 보고 차갑게 말했다.
“나는 내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다행히 촉병을 이기면 그 공 을 모두 너희들에게 돌려주려는 것이다. 그런데 네가 함부로 원망의 소리를 내어 스스로 죄를 얻었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고는 좌우의 무사들을 보고 소리쳤다.
“어서 저자를 끌어내 목 베어라!”
그 편장이 애걸하며 목숨을 빌었으나 소용없었다. 얼마 후 그의 목이 사마의에게 바쳐졌다. 그걸 본 장수들은 모두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사마의가 그런 장수들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모두 마음을 다해 촉병을 막으라. 우리 중군에서 포향 이 울리거든 한꺼번에 모두 뛰쳐나가도록 하라.”
겁을 먹은 장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정신차려 그 명을 받아들이고 물러났다.
그럴 즈음 위연, 장의, 진식, 두경 네 장수가 이끄는 병 이만은 기곡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문득 참모 등지가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 다. 네 장수는 그를 불러 물었다.
“참모는 무슨 일로 오셨소?”
“승상께서 군령을 내리셨소. 기곡으로 나갈 때는 위병의 매복에 충분히 대비할 것이며 가볍게 밀고 나가지 말라 하셨소.”
등지가 그렇게 자신이 달려온 까닭을 밝혔다. 진식이 빈정대듯 말 했다.
“승상께서는 군사를 부리는 데 어찌 그리 걱정이 많으시오. 내가 보기로 위병은 이번의 잇단 큰비 때문에 옷과 갑주가 모두 헐어빠져 돌아가기에 바쁠 것이오. 어찌 매복을 남길 틈이 있겠소? 이제 우리 군사는 속도를 배로 하여 나아가야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인데 무슨 까닭으로 오히려 나아가지 말라 하시는 거요?”
그런 진식을 등지가 조용히 타일렀다.
“이제껏 승상의 헤아림은 들어맞지 않음이 없었고, 그 꾀는 이루 어지지 않음이 없었소. 그런데 그대가 감히 영을 어기려는 것이오?”
그러자 진식이 비웃었다.
“승상이 정말로 그렇게 지모가 많다면 가정의 싸움은 어찌하여 졌소?”
위연 또한 공명이 그때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걸 떠올리며 비웃음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때 만약 승상이 내 말을 받아들여 자오곡으로 나갔더라면 장안은 말할 것도 없고 낙양까지 뺏을 수 있었을 것이오. 그런데도 아직까지 기산으로 나가는 것만 고집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을 얻겠다는 것이오? 또 기껏 군사를 주어 나아가라 해놓고 이제 다시 나아 가지 말라니 그 군령은 어찌 이리 밝지가 못하오?”
거기 힘을 얻은 진식이 더욱 간 크게 나왔다.
“내가 군사 오천을 이끌고 재빨리 기곡을 빠져나가 먼저 기산으로 가겠소. 가서 승상이 부끄러워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살펴보겠소!”
등지가 두 번 세 번 말렸으나 소용없었다. 진식은 기어이 오천 군 사를 이끌고 기곡으로 달려가버렸다. 다른 세 장수도 은근히 진식의 편이 되어 보고만 있자 등지는 하는 수 없이 그 소식을 공명에게 급 히 알렸다.
한편 공명의 영을 어기고 달려 나간 진식은 보란 듯 군사를 몰아 기곡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러나 몇 리 가기도 전에 갑자기 한소리 포향이 울리며 사방에서 복병이 뛰어나왔다. 그때서야 놀란 진식은 얼른 물러나려 했으나 벌써 때는 늦어 있었다. 위병은 골짜기 입구 를 메우고 철통같이 진식과 그 오천 군사를 에워싸버렸다.
진식은 이리 치고 저리 찌르며 힘을 다해 싸웠으나 도무지 빠져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마가 쏟아져 들어왔다. 바로 위연이 이끄는 촉병들이었다.
위연은 가까스로 진식을 구해 골짜기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진식 이 이끌고 간 오천 인마는 겨우 다치고 찢긴 사오백 명밖에 남아 있 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위병들이 사나운 기세로 쫓아왔다. 그러 다가 장의와 두경까지 군사를 이끌고 나와서야 위병은 비로소 물러 갔다.
위연과 진식은 그제야 공명이 미리 내다본 게 귀신 같음을 깨닫고 후회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군사는 잃고 사기는 꺾인 뒤였다. 한편 공명에게 돌아간 등지는 위연과 진식의 버릇없는 짓거리를 낱낱이 일러바쳤다. 공명이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위연에게는 원래 반역의 상이 있고, 평소에도 불평이 많은 줄 내 가 알고 있다. 그 용맹이 아까워 쓰고 있기는 하나 오랜 뒤에는 반드 시 나라에 걱정과 해를 끼칠 것이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성마가 달려와 급한 소식을 알렸다.
“진식이 사천여 군사를 꺾이고 겨우 사오백 다친 군사만 건져 골 짜기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다시 등지를 기곡으로 보내 진식을 위로하 게 했다. 겁을 먹은 그가 무슨 변란을 꾸밀까 걱정되어서였다. 그다 음 공명은 마대와 왕평을 불러 분부했다.
“야곡에도 만약 지키는 위병이 있다면 그대들 둘은 산마루를 넘 으라. 밤에는 나아가고 낮에는 숨어 기산 왼쪽에 이르거든 불을 질 러 신호하라.”
그리고 다시 마충과 장익을 불러 명했다.
“그대들 둘은 산기슭 샛길로 나아가되 역시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숨어 되도록이면 빨리 기산 오른편으로 나아가도록 하라. 거기서 불 로 신호하여 왕평 마대의 군사들과 합친 뒤에 한꺼번에 조진의 영채 를 들이친다. 내가 골짜기를 따라나가 모두 세 방향에서 들이치면 위병을 깨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에 왕평, 마대, 장익, 마충 네 장수는 각기 군사를 이끌고 공명이 시킨 대로 떠나갔다. 그들이 떠나간 뒤 공명은 또 관흥과 요화를 불러 무언가를 귀엣말로 일렀다. 밀계를 받은 관흥과 요화도 군사들 을 이끌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공명은 그들 모두가 떠난 뒤에야 가려 뽑은 군사를 휘몰아 전날 보다 속도를 배로 하여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가 도중에 다시 무 슨 생각이 났는지 오의와 오반을 불러 밀계를 주고 한 갈래 군사들 과 함께 먼저 보냈다.
야곡을 맡아 지키던 것은 조진이었다. 사마의와는 달리 촉병이 오 리라는 걸 믿지 못한 조진은 방비를 게을리하여 군사들을 모두 쉬게 하고 있었다. 열흘만 아무 일 없이 지나가면 사마의를 무안 주려고 벼르고 있는데, 그 이레 만에 일이 벌어졌다. 먼저 망보기 군사 하나 가 달려와 알렸다.
“골짜기를 따라 많지 않은 촉병들이 몰려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조진은 부장 진량(秦)에게 군사 오천을 주며 나아가서 살 펴보게 함과 아울러 촉병이 자기편 근처로 다가오지 못하게 하라 일 렀다.
진량이 군사를 이끌고 골짜기 어귀에 이르니 촉병이 얼른 달아나 는 게 보였다. 공명심에 들뜬 진량은 앞뒤 헤아리지도 않고 그런 촉 병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한 오륙십 리나 뒤쫓았을까, 갑자기 앞서 달아나던 병이 보이지 않았다. 더럭 의심이 난 진량은 뒤쫓기를 멈추고 거기서 잠시 쉬기 로 마음 먹었다.
“모두 말에서 내려 잠시 쉬도록 하라.”
진량은 그런 영을 내리고 자신도 말에서 내려 고단한 몸을 풀었 다. 그런데 갑자기 살피러 갔던 군사가 되돌아와 알렸다.
“앞에 촉병이 매복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소리에 얼른 말에 오른 진량이 앞쪽을 살펴보니 정말로 산속 에서 자욱이 티끌이 일고 있었다. 진량은 얼른 군사들에게 영을 내 려 적을 막을 채비를 하게 했다.
얼마 안 돼 사방에서 함성이 크게 일며 앞에서는 오의와 오반이 군사를 이끌고 달려 나오고 뒤에서는 관흥과 요화가 또한 군사들과 함께 덮쳐왔다. 좌우는 모두 험한 산이라 진량과 그가 이끄는 위병 들은 달아날래야 달아날 길조차 없었다. 거기다가 산꼭대기에는 촉 병들이 목소리를 모아 외쳤다.
“항복하라. 말에서 내려 항복하는 자는 목숨을 살려준다!”
그러자 위병의 절반은 싸움도 해보지 않고 말에서 내려 항복하고 말았다. 진량은 죽기로 싸웠으나 혼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오래잖 아 요화의 한칼을 맞고 말 등에서 굴러떨어졌다.
공명은 항복한 위병들을 모두 후군에게 넘겨 가둬두게 하고 그들 에게서 벗긴 갑옷과 투구를 오천의 촉병에게 입히고 씌웠다. 금세 오 천의 가짜 위병이 만들어졌다. 공명은 그들을 역시 위의 복색을 한 오반, 오의, 관흥, 요화에게 주고 곧바로 조진의 영채를 치게 했다. 그들이 조진의 영채에 이르기에 앞서 역시 가짜 위병 하나가 달 려가 조진에게 알렸다.
“촉병은 얼마 되지 않아 모조리 쫓아버렸습니다. 이제 모두들 본채로 돌아올 것입니다.”
자기편 장졸들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 길이 없는 조진은 그런 거짓 전갈에 몹시 기뻤다. 사마의에게 무안 줄 말을 다시 고르고 있 는데 문득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사마도독께서 심복 한 사람을 뽑아 보냈습니다. 대도독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조진은 곧 사마의가 보낸 사람을 불러들여 물었다.
“이번에 병은 매복의 계책을 써서 우리 위병 사천여 명을 죽였 습니다. 사마도독께서 장군께 간곡히 말씀 올리라 한 것은, 지난번 의 내기 따위는 잊으시고 마음 써서 적을 방비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쪽에는 단 한 명의 촉병도 없다.”
조진은 무슨 소리냐는 듯 그렇게 대꾸하고 내쫓듯 그 사람을 돌려보냈다.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사람이 와서 알렸다.
“진량이 병을 쫓아버리고 군사들과 더불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 말에 조진은 진량이 기특해 장막 안에서 가만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스스로 장막을 나가 진량을 맞아들이려 했다. 그런데 미처 진량에게 이르기도 전에 이상한 전갈이 들어왔다.
“우리 영채 뒤 두 곳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조진은 얼른 영채 뒤로 달려가 불길이 오르는 쪽을 살 펴보았다. 그러나 그게 누가 무엇 때문에 지른 불길인지 알기도 전 에 영채 앞쪽에서 먼저 큰일이 벌어졌다. 관흥, 요화, 오의, 오반이 위병 차림을 한 촉군을 휘몰아 영채로 짓쳐들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오래잖아 영채 뒤쪽에서도 마대, 왕평이 이끄는 병과 마충, 장익이 이끈 병이 양길로 물밀듯 쏟아져 나왔다. 너 무도 갑작스레 당한 일이라 위병들은 어떻게 손발을 놀려볼 틈도 없 었다. 그저 뿔뿔이 흩어져 목숨을 건지기에 바빴다.
장수들은 조진을 보호하며 동쪽을 바라고 달아났다. 그 뒤를 기세 가 오를 대로 오른 촉병이 급하게 쫓았다.
조진이 한창 정신 없이 달아나는데 갑자기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다시 앞에서 쏟아져 나왔다. 조진은 간이 오그라붙고 염통이 어는 듯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사마의가 이끄는 군사 였다.
사마의가 한바탕 힘을 다해 싸우자 촉병들도 비로소 기세가 꺾여 물러갔다. 조진은 그 덕분에 겨우 쫓김을 면했으나 사마의를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사마의가 그런 조진에게 서두르는 투로 말했다.
“제갈량이 이미 기산의 유리한 지세를 차지했으니 우리는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서 위빈으로 물러나 영채를 세우 고 따로 좋은 계책을 꾸며보는 게 옳습니다.”
싸움에 져서 쫓기다가 가까스로 구함을 받은 주제에 조진에게 딴 뜻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무래도 신기하다는 듯 사 마의에게 불쑥 물었다.
“그런데 중달은 어떻게 내가 이토록 대패할 줄 알았소?”
“내가 보낸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자단께서 병은 한 사람도 없 다고 하더라 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공명이 몰래 자단의 영채를 급습하려 함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달려와 접응한 것 이지요. 하지만 이번에 장군께서 정말로 그의 계책에 떨어졌기는 해 도, 결코 전에 내기한 일을 입 밖에 내셔서는 아니 됩니다. 다만 서 로 마음을 합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생각만 하십시오.”
그러나 조진은 부끄럽고도 죄스러웠다. 말은 않아도 마음속에서 괴로워하다 보니 그게 병이 되고, 그래서 한번 자리에 눕자 영 일어 날 줄 몰랐다.
위수가에까지 군사를 물린 사마의는 그곳에다 영채를 얽고 자리 를 잡았다. 그런 중에도 조진의 병세는 점점 나빠져 갔다. 그러나 사 마의는 군사들의 마음이 어지러워질까 봐 조진에게 돌아가자는 소 리를 할 수도 없었다.
한편 공명은 기세 좋게 대군을 휘몰아 기산으로 나왔다. 진채를 세운 뒤 군사들의 수고로움을 위로하고 났을 무렵 위연과 두경, 진 식장의 네 장수가 공명의 장막으로 들어와 죄를 빌었다.
“누구의 잘못으로 군사를 잃게 되었는가?”
공명이 그들에게 차갑게 물었다.
“진식이 영을 어기고 몰래 골짜기 속으로 들어갔다가 이같이 큰 낭패를 당했습니다.”
위연이 제 잘못은 빼고 모든 책임을 진식에게 미루었다. 진식이 그런 위연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이 일은 위연이 내게 시킨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반드시 내 뜻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공명이 목소리를 높여 진식을 꾸짖었다.
“어쨌든 그는 너를 구해주었는데 너는 오히려 걸고 넘어지느냐?
이미 장령을 어겨놓고 교묘한 말로 피하려 들지 말라!”
그러고는 무사들을 호령해 진식을 끌어내다 목 베게 했다. 잠시 후 무사들이 잘려진 진식의 목을 공명의 장하에 바쳤다. 공 명은 그 목을 진문에 높이 달아 다시 한번 군령의 엄함을 보였다. 그런데 다른 기록에는 진식이 받은 형이 요참腰), 즉 허리를 잘 라 죽이는 형이었다고 한다. 그거야 어쨌든 이 진식이란 사람의 죽음 을 눈여겨봐두어야 하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 그가 뒷날 정사 삼 국지』를 쓰게 될 진수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군령을 어긴 점으로는 위연도 죄 없다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공 명이 그를 죽이지 않은 것은 워낙 인재가 모자라는 촉이라 위연 같 은 용장을 얻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이 미 공명이 위연을 죽일 마음을 굳혀가고 있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진식을 목 벤 뒤 공명이 다시 군사를 낼 의논을 하고 있을 때 세 작이 와서 알렸다.
“조진이 병들어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지금 영채 안에서 치료를 받고 있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공명은 문득 기쁜 낯빛을 지었다.
“만약 조진의 병이 가볍다면 위병은 틀림없이 곧 장안으로 돌아 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위병이 물러나지 않은 걸 보니 그의 병이 무거운 모양이다. 그 때문에 그를 군중에 남겨 여럿의 마음을 흔들 리지 않게 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이제 나는 글 한 통을 써서 항 복한 진량의 군사들에게 주고 조진에게 보내려 한다. 조진이 그 글을 읽으면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그 말과 함께 항복한 위병들을 데려오게 해서 물었다.
“너희들은 모두 위의 군사들이고 부모와 처자도 또한 모두 중원 에 있다. 우리 촉에 오래 살 사람들이 못 될 듯해 이제 놓아주어 돌 려보내려 한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공명의 말을 들은 항병(降兵)들은 고마움을 못 이겨 울며 절했다. 공명이 다시 그들에게 말했다.
“조자단과 나는 서로 약조한 게 있어 여기 글 한 통을 썼다. 너희 들이 돌아갈 때 가지고 가서 자단에게 전하라. 반드시 큰 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글 한 통을 내주니 항복한 위병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받 아 저희 진채로 돌아가기 바쁘게 조진에게 바쳤다.
조진은 아픈 중에도 몸을 일으켜 공명이 보낸 글을 받았다. 겉봉 을 찢고 펼쳐보니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한 승상 무향후(武鄕侯) 제갈량은 대사마 조자단에게 글을 보내 이르노라 무릇 장수된 자는 들고 남과 굳세고 부드러움과 물러가고 나아감과 강하고 약함에 두루 능하고, 산악같이 움직이지 않으며, 음양같이 알기 어려우며, 천지같이 끝 간 데를 모르고, 태창(太倉, 한 나라 초 도읍에 있던 창고) 같이 가득 차 있으며, 사해같이 넓고, 삼광(三 光, 해, 달, 별)같이 빛나야 한다. 미리 천문을 알아 가뭄과 궂음을 헤 아리고, 미리 지리를 알아 힘들고 평안함을 가늠해야 하며, 진세를 살펴 싸울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하고, 적을 헤아려 그 잘하고 못하는 바를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하되, 슬프다 너 배움 없는 후배여. 너는 위로 푸른 하늘을 거 스르며 나라를 도적질한 역적을 도와 낙양에서 제호(帝號)를 일컫게 하더니, 다시 되잖은 군사를 야곡으로 몰아넣고 진창에서는 큰 비를 만났구나. 물과 뭍으로 아울러 고달프니 사람과 말이 어찌 미쳐 날 뛰지 않으리. 보라! 버린 갑옷과 투구는 산기슭에 가득하고 내던진 창칼은 들판을 뒤덮었다. 도독이란 자는 염통이 부서지고 간이 쪼개 진 듯 놀라고, 장수들은 쥐새끼들처럼 황망히 쫓겨 달아났다. 무슨 낮으로 고향의 부로(老)를 대하며, 무슨 뱃심으로 고향 집의 대청 에 오르랴. 사관들은 붓을 잡아 적을 것이고, 백성들은 입을 모아 떠 들어댈 것이다. 중달은 싸움 소리만 들어도 떨고 자단은 바람만 만 나도 두려움에 질린다고. 거기다가 우리 군사는 굳세고 말들은 튼튼 하며 장수들은 모두 성난 범 같고 내닫는 용 같다. 진천 땅을 쓸어 평지로 바꾸고 위국을 쳐서 쓸쓸한 언덕을 만들리라!’
그 글을 읽은 조진은 분노와 원한으로 가슴이 콱 막히는 듯했다. 성을 이기지 못해 그날 밤 군중에서 죽고 말았다. 공명은 전에 왕랑 을 말로 죽이더니 이번에는 조진을 글로 죽여버린 셈이었다.
그렇지만 정사의 기록은 좀 다르다. 조진이 죽은 것은 장마를 만 나 장안으로 돌아온 뒤이고, 위주도 몇 번 문병을 간 것으로 되어 있 다. 글로 그를 죽였다는 것은 제갈량의 신화를 만들기 위해 지어낸 얘기인 듯싶다.
어쨌든 조진이 죽자 사마의는 그 시신을 수레에 실어 낙양으로 보내고 그곳에다 장사 지내게 했다. 위는 조진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크게 노했다. 명을 바꾸어 사마의로 하여금 나아가 싸우라 재 촉했다. 이에 사마의도 더는 싸움을 미룰 수 없어 제갈양에게 싸우 자는 뜻을 적은 글을 보냈다.
“조진은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사마의로부터 싸움 거는 글을 받은 공명은 여러 장수들에게 그렇 게 말하고, 다음 날 싸우자는 답을 주어 사자를 돌려보냈다. 이어 공 명은 강유를 불러 무언가 밀계를 주고 다시 관흥을 불러 또 밀계를 주며 다음 날의 싸움에 대비케 했다.
이튿날 공명은 기산에 있는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위하로 나아갔 다. 공명이 자리 잡은 곳은 한쪽은 산이요, 한쪽은 강인데 그 가운데 개울과 넓은 들판이 펼쳐진 곳이었다. 대군이 어울려 싸우기에 알맞 은 지형이었다.
양군이 서로 마주 보고 진세를 벌인 뒤 한동안 활 싸움이 벌어졌 다. 진채에 틀어박힌 채 상대편 진채로 화살을 퍼붓는데 북소리가 크게 세 번 울렸다.
위진의 문기가 열리며 사마의가 말을 타고 천천히 나왔다. 그 뒤 에는 위의 장수들이 따르고 있었다. 사마의가 보니 촉진에서도 네 바퀴 수레에 단정히 앉은 공명이 나오고 있었다. 깃털부채를 가볍게 흔들며 앉아 있는 게 싸움터에 나온 장수라기보다는 바람이나 쐬러 나온 도사 같았다.
먼저 사마의가 입을 열었다.
“우리 주상은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자리를 물려주신 걸 본받아 한나라 제위를 물려받은 지 벌써 두 대를 지났다. 그런데도 너희 오 와 촉 두 나라를 그대로 두신 것은 너그럽고 인자하신 주께서 백 성을 다칠까 걱정하신 까닭이다. 너는 한낱 남양에서 밭 갈던 농투 성이로서 하늘이 정한 운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이렇게 함부로 쳐들 어왔으니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일찍 돌아 가면 달리 길이 있을 것이다. 각기 제 땅이나 지키며 솥발 같은 형세 로 천하를 나누고 있음으로써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한다면 너희들 도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으리라.”
공명이 껄껄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나는 선제로부터 홀로 남은 금상을 보살펴달라는 중한 명을 받 은 사람이다. 어찌 온 마음을 기울이고 힘을 다해 역적을 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조씨는 오래잖아 우리 한에 망하고 말 것이다. 너는 조상 대대로 한의 녹을 먹은 자로서 그 은혜에 보답할 생각은 않고 도리어 역적을 도우면서 어찌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느냐.”
그 말에 사마의는 슬며시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대꾸는 않 고 싸움을 서둘렀다.
“나는 너와 어느 쪽이 더 센지 겨루어보려고 왔다. 만약 네가 이 긴다면 맹세코 내 다시는 대장 노릇을 않으리라! 그러나 네가 지면 어서 옛 고향으로 돌아가라. 나는 그런 너를 해치지는 않겠다.”
“좋다. 그 기상이 장하다. 그렇다면 병사를 움직여 싸우려느냐? 아니면 진법으로 싸워보려느냐?”
공명이 그렇게 받아주자 사마의가 얼른 말했다.
“먼저 진법으로 싸워보자.”
“그럼 네가 먼저 진을 펼쳐보아라. 네 재주가 어떤지 한번 보겠다.”
공명은 망설이지도 않고 사마의에게 선수를 넘겨주었다. 그 말을 들은 사마의는 얼른 중군 장막으로 가서 손에 누른 깃발을 잡고 좌 우로 흔들었다. 군사들이 거기 따라 움직여 곧 한 가지 진세를 이루었다.
다시 말에 올라 뛰어나온 사마의가 공명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친 진을 알아보겠느냐?”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따위 진은 우리 군중의 끄트머리 이름 없는 장수라도 칠 줄 안다. 그건 혼원일기진(混元一氣陣)이 아니냐?”
공명이 한눈에 자신이 친 진을 알아보자 사마의는 은근히 놀랐다.
잠깐 생각하다가 솔직히 인정하며 말했다.
“좋다. 이번에는 네가 진을 쳐서 내게 한번 보여다오.”
그 말에 공명은 자기편 진채로 돌아가 말없이 깃털부채를 한번 흔들어 보였다. 역시 한 가지 진세가 이루어지자 공명이 다시 나와 사마의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친 진을 알겠느냐?”
“보기에 그것은 팔괘진(八卦)이다. 어찌 내가 모르겠느냐?”
사마의가 그렇게 대꾸하자 공명이 다시 묻는다.
“네가 쉽게 알아보았으니 깨뜨릴 줄도 알겠구나. 어떠냐? 네 감히 내 진을 깨뜨려보겠느냐?”
너무도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 같아 사마의가 불끈했다.
“내가 이미 그 진을 알아보았는데 깨뜨리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느냐?”
그렇게 언성을 높이는 사마의를 공명이 다시 충동질했다.
“그럼 당장에 한번 깨뜨려보아라.”
그 말에 사마의는 더 참지를 못했다. 곧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 대 능, 장호, 악침 세 장수를 불렀다.
“지금 공명이 친 진에는 휴(休), 생(生), 상(傷), 두(杜), 경(景), 사 (死), 경(驚), 개(開)의 여덟 개 문이 있다. 너희 셋은 동쪽의 생문(生 門)으로 들어가 서남의 휴문(門)으로 나온 뒤 다시 북쪽의 개문( 門)으로 밀고 들어가면 저 진은 넉넉히 깨뜨릴 수 있다. 조심하고 세 밀히 살펴 내가 시킨 대로 하도록 하라.”
그렇게 일러주고 군사를 딸려 내보냈다.
대능은 가운데 서고 장호는 앞장을, 악침은 뒤를 맡기로 하고 각 기 서른 기를 거느린 세 사람은 곧 위진을 벗어났다. 양군에서 응원 하는 고함 소리가 천지를 흔드는 듯했다.
세 사람은 곧 기세 좋게 촉진으로 뛰어들었다. 사마의가 일러준 대로 동쪽 생문 쪽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이내 휴문을 찾아 서남쪽으로 내달았으나 성벽이 연이어 둘러쳐져 있을 뿐 문이 보이지 않았다. 문이 없으니 빠져나갈 수가 없어 놀란 세 사람은 무 턱대고 서남쪽을 짓두들기고 나가려 했다. 그러나 병이 활을 쏘아 대 그것도 뜻 같지 못했다.
장호, 대능, 악침 세 위장(魏將)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촉진은 점 점 더 겹겹으로 두꺼워지고 진마다 문이 보였다. 도무지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는 혼란이었다. 그렇게 되니 세 사람은 서로를 돌아볼 틈이 없었다. 앞뒤 없이 흩어져 이리저리 어지럽게 치고 받아보았으나, 어느덧 보이는 것은 무겁게 드리운 구름이요, 둘러싸는 것은 짙은 안개뿐이었다.
그 구름과 안개 속에서 세 장수와 그들을 따르는 아흔 기의 위병 은 밤길 가듯 헤맸다. 그러다가 함성이 일며 하나씩 촉군에게 사로 잡히니 오래잖아 그들 장졸은 모두 촉군 중군에서 꽁꽁 묶인 채 만 나게 되는 꼴이 나고 말았다.
공명은 장막 위에 높이 앉아, 사로잡혀 온 대능, 장호, 악침 세 장 수와 아흔 명의 위병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희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하나 별난 일이 될 거야 무에 있 겠느냐. 이제 너희들을 놓아줄 것이니 돌아가서 사마의에게 일러라. 좀더 병서를 읽어 전법을 공부한 뒤에 다시 와서 결판을 지어도 늦 지 않다고. 그렇지만 너희들의 목숨을 붙여주는 값으로 창칼이나 갑 옷, 싸움말은 모두 두고 가야 한다.”
그러고는 그들의 갑옷을 모조리 벗긴 뒤 얼굴에는 먹을 칠한 채 걸어서 돌아가게 했다. 그들을 본 사마의는 화가 머리끝까지 솟았 다.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이를 갈고 소리쳤다.
“이렇게 무참하게 예기가 꺾였으니 무슨 낯으로 돌아가 중원의 대신들을 만나보겠는가!”
말뿐만이 아니었다. 사마의는 정말로 앞뒤 살피지 않고 삼군을 휘 몰아 촉진을 덮쳤다. 스스로 칼을 빼들고 백여 장수를 재촉해 싸움 을 이끌 정도였다.
바야흐로 양군이 한바탕 볼만하게 어우러지려 할 무렵 문득 위군 등 뒤에서 북소리 나팔 소리가 나며 함성이 크게 울렸다. 한 떼의 군마가 뒤편 서남쪽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살펴보니 촉장 관흥이 이끄 는 군마였다. 사마의는 후군을 갈라 관흥을 막게 하고 자신은 남은 군사를 몰아 다시 앞으로 밀고 나갔다.
그러나 얼마 나가기도 전에 이번에는 앞쪽의 위병이 어지러워졌 다. 강유가 땅을 쓸듯 대군을 이끌고 옆으로 덮쳐온 것이었다. 관 흥·강유와 앞쪽의 촉병이 세 갈래로 에워싸듯 들이치자 사마의는 깜짝 놀랐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가볍게 움직였음을 깨닫고 급히 군사를 물렸다. 힘을 다해 남쪽을 뚫고 나왔으나 군사들은 열 명 중 에 예닐곱이 상해 있었다.
사마의는 위수 남쪽으로 내려가서야 겨우 진채를 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한번 호되게 얻어맞은 뒤였다. 불에 덴 아이가 불을 두려워 하듯, 다시는 나와 싸울 생각을 않고 굳게 지키기만 했다.
공명은 싸움에 이긴 군사를 이끌고 기산에 있는 진채로 돌아왔다. 그때 마침 영안에 있는 이엄이 보낸 도위 구안(苟이 군량을 가지 고 왔다. 그러나 술을 좋아하는 구안은 오는 도중 시간을 끌어 기한 을 열흘이나 넘긴 뒤였다. 공명은 몹시 노했다.
“군량을 제때에 대는 것은 우리 군중에서 큰일 중의 큰일이다. 사 흘만 기한을 어겨도 목을 베게 되었는데 열흘이나 늦었으니 더 말할 게 무엇 있겠는가!”
그렇게 구안을 꾸짖고는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저 놈을 끌어내 목 베어라!”
장사 양의가 그런 공명을 말렸다.
“구안은 이엄이 쓰는 사람입니다. 거기다가 지금 온 곡식과 돈은 모두 서천에서 보낸 것입니다. 만약 구안을 목 벤다면 앞으로 누가 군량을 운반하려 들겠습니까?”
성난 중에도 들어보니 옳은 말이라 공명은 구안을 목 베는 대신 매 여든 대를 때려 돌려보냈다.
공명에게 얻어맞고 쫓겨난 구안은 앙심을 품었다. 크나큰 제 잘못 은 잊고 앙갚음할 궁리를 하다가 그날 밤 예닐곱 기를 데리고 위로 투항해버렸다.
촉장 하나가 투항해 왔다는 말을 듣자 사마의는 반갑게 그를 맞아들였다.
구안은 사마의 앞에 나가 공명에게 당한 일을 부풀리어 말하고 받아들여주기를 청했다. 사마의가 은근하게 말했다.
“그게 정말이라 해도 공명이 워낙 꾀 많은 사람이라 네 말을 다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만약 네가 나를 위해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해준다면 나는 너를 천자께 아뢰어 대장으로 삼겠다.”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힘을 다하겠습니다.”
구안이 얼른 대답했다. 사마의가 그런 구안에게 남몰래 일렀다.
“너는 성도로 돌아가 공명에게 후주를 원망하는 뜻이 있어 머지 않아 대위에 오르리라는 거짓말을 퍼뜨려라. 그리하여 네 주인으로 하여금 공명을 불러들이게 한다면 그것은 바로 너의 큰 공이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구안은 그렇게 대답하고 성도로 떠났다. 성도에 이른 구안은 시치 미를 떼고 여러 환관들을 만나보았다. 그리고 공명이 자기가 세운 공에 기대어 천자의 자리를 뺏으려 한다는 거짓말을 퍼뜨렸다.
그 말을 들은 환관들은 깜짝 놀랐다. 얼른 안으로 달려들어가 후주에게 알렸다. 후주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이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되겠는가?”
후주가 환관들에게 물었다. 환관들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공명을 얼른 성도로 불러들여야 합니다. 그에게서 병권을 뺏어 반역이 일어나지 않게 하십시오.”
이에 후주는 조서를 내려 공명에게 군사를 이끌고 돌아오라 했다.
장완이 나와서 아뢰었다.
“승상께서 나아가신 이래로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우셨는데 무슨 일로 이렇게 돌아오라 하십니까?”
후주는 장완에게도 바른말을 하지 않고 슬쩍 둘러댔다.
“짐에게 매우 기밀한 일이 있어 승상과 꼭 의논해야 되겠소.”
그러고는 사신을 재촉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명에게로 달려가게 했다.
사신이 기산에 이르자 공명은 어리둥절해 맞아들였다. 조서를 받 아보니 난데없이 얼른 되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공명이 하늘을 우 러러보며 탄식했다.
“주상께서 나이가 없으시니 곁에 아첨하는 신하가 붙었구나! 내 가 이제 막 공을 이루려는데 무슨 까닭으로 돌아오라는 말씀이신가. 돌아가지 않으려니 주상의 뜻을 어기게 되고 명을 받들어 물러나려 하니 이 같은 좋은 기회는 다시 얻기 어려울 것 같아 아깝다.” 곁에 있던 강유가 딴 걱정을 보탰다.
“만약 대군을 물리면 사마의가 그 틈을 타 뒤를 들이칠 것이니 그 때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새 마음을 정한 공명이 그 일은 걱정할 게 없다는 듯 말했다.
“대군을 다섯 길로 나누어 물러나면서 알맞은 계책을 쓰면 된다. 오늘은 군사 천 명을 남겨 아궁이 이천 개를 파게 하고, 내일은 삼천 개, 그 다음 날은 사천 개, 하는 식으로 매일 물러날 때마다 아궁이 수를 늘리도록 하라.”
“옛적에 손빈(臏)이 방연(龐絹)을 사로잡을 때는 군사는 늘리고 아궁이는 줄이는 계책[添減]을 썼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이제 군사를 물리시면서 어찌하여 오히려 아궁이를 늘리십니까?” 이번에는 양의가 알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공명이 그 까닭 을 일러주었다.
“사마의는 군사를 매우 잘 부리는 사람이다. 우리 병이 물러난 걸 알면 반드시 뒤쫓을 것이나 마음속으로는 반드시 복병이 있을까 의 심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버리고 간 영채의 아궁이 수를 헤아려 볼 것인데, 매일 아궁이 수가 늘어나면 군사가 정말로 물러가는 것 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가 어찌 함 부로 우리 뒤를 쫓을 수 있겠느냐? 그사이 우리가 천천히 물러나면 조금도 군사를 잃지 않고 돌아갈 수가 있다.”
그리고 곧 영을 내려 군사를 물리기 시작했다. 네 번째 기산행祁 山行)의 어이없는 종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