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6화 : 여섯 번째 기산으로
여섯 번째 기산으로
성도로 돌아간 공명은 삼 년을 기한으로 하고 위와의 싸움 준비 에 들어갔다. 군량을 모으고 말먹이 풀을 쌓는 한편 군사들에게는 진치는 법과 병기 다루는 법을 가르치고 싸움에 필요한 기구들도 빠 짐없이 갖춰나갔다. 장수와 군졸들을 잘 대접하고 백성들의 살이를 보살펴주니 동서양천의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공명의 은덕을 우러 렀다.
세월은 쉼없이 흘러 어느덧 삼 년이 지나갔다. 때는 건흥 십삼년 봄 이월 공명은 후주를 찾아뵙고 아뢰었다.
“이에 신이 장사를 어르고 다독인 지도 벌써 삼 년이 지났습니다. 군량과 마초는 넉넉하고, 싸움에 필요한 기구도 다 갖춰졌으며, 사 람과 말이 모두 튼튼하고 씩씩하니, 바야흐로 위를 치러 나서볼 때 인 듯싶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간사한 무리를 쳐 없애고 중원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맹세코 다시 돌아와 폐하를 뵙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천하는 솥발 같은 형세를 이루고 오도 위도 쳐들어오는 법 이 없는데 상부(相父)께서는 어인 까닭으로 평안히 이 태평함을 누 리려 하지 않으시오? 어찌하여 거칠고 험한 싸움터를 스스로 찾아 나서려 하시오?”
후주가 그렇게 공명을 말렸다. 공명이 낯빛을 고치고 목소리를 고 르게 하여 그 말을 받았다.
“신은 선제의 지우를 입은 뒤로 자나깨나 위를 쳐 없앨 계책을 생 각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힘을 다 쏟고 충성을 다해서 폐하께 중 원을 되찾아드리고 아울러 한실을 되일으키는 게 오직 신이 바라는 바일 뿐입니다.”
그때 문득 줄지어 섰던 신하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나서며 소리쳤다.
“승상께서는 결코 군사를 일으키셔서는 아니 됩니다.”
여럿이 보니 그 사람은 천문에 밝은 태사(太)인 초주였다. 여럿 이 눈길로 그 까닭을 묻자 초주가 말했다.
“신은 지금 사천대(司天臺)를 맡아보고 있으니 화와 복에 관한 일 은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사이 수만의 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와 한수에 빠져 죽는데 그것은 별로 상서롭지 못한 조짐입니다. 또 신이 천문을 보니 규성, 이십팔 수의 하나인 별 이름)이 태백(太 白) 어름에 걸쳐 있고 성한 기운이 북쪽에 서려 위를 치는 게 이롭지 못합니다. 또 있습니다. 요사이 성도 백성들은 모두 밤에 잣나무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야릇한 이변이 있을 때는 삼가 지키고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자 공명이 초주를 꾸짖듯 말했다.
“나는 선제께서 돌아가신 뒤의 일을 당부하는 무거운 말씀을 들 은 몸으로서 마땅히 힘을 다해 역적을 쳐 없애야 하오. 어찌 허망한 요기를 핑계로 나라의 큰일을 제쳐놓을 수 있겠소?”
그리고 유사(有司)에게 명해 소열황제(유비)의 묘당에 태뢰(太, 큰 제사)를 차리게 한 뒤 울며 고했다.
“신 양은 다섯 번이나 기산으로 나갔으나 한 치의 땅도 얻지 못했 으니 그 죄 실로 가볍지 아니합니다. 이제 신은 다시 모든 군사를 이 끌고 기산으로 나감에 즈음해 맹세의 말을 바쳐 올리고자 합니다. 힘을 다하고 마음을 다 쏟아 한(漢)을 쳐 없애고 중원을 되찾되, 이 몸이 닳고 시들어 죽은 뒤에야 그 일을 그만두겠습니다!”
공명의 먹은 마음이 그러하니 이제는 그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 다. 모두가 걱정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사이에 제사를 마친 공명은 곧 후주에게 작별을 고하고 한중으로 달려갔다.
공명이 장수들을 모아놓고 군사를 낼 일을 시작하려는데 홀연 사 람이 달려와 알렸다.
“관흥이 병들어 죽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목을 놓아 울던 공명은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가 반나절이나 지나서야 깨어났다. 여러 장수들이 번갈아 공명을 위로 하며 슬픔을 풀어주려 했다. 그러나 공명은 눈물을 거둘 줄 몰랐다.
“참으로 가련하다. 그 충의로운 사람에게 하늘이 긴 목숨을 주지 않았구나! 아직 군사를 내기도 전에 또 한 사람 대장을 잃었으니 이 무슨 하늘의 뜻인가?”
그렇게 탄식하며 슬퍼해 마지않았다.
공명이 관흥을 잃은 슬픔을 딛고 마침내 군사를 낸 것은 그로부 터 며칠 뒤였다. 공명은 삼십사만의 병을 다섯 길로 나누어 기산 으로 밀고 나가게 했다. 선봉은 강유와 위연으로, 둘은 모두 똑바로 기산을 향했고 이회(李)는 먼저 군량을 날라 야곡으로 드는 길 어 귀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위나라는 그 무렵 태평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특히 그 전 해에는 청룡이 마파정이란 곳에 나타났다 하여 연호까지 청룡 원년 으로 고치고 떠들썩하게 보냈다. 그런데 그 청룡 이년 봄 이월이었 다. 근신이 위주에게 아뢰었다.
“변경의 관리가 급한 소식을 띄워보냈습니다. 촉병 삼십여 만이 다섯 길로 나누어 다시 기산으로 나오고 있다 합니다.”
그동안 싸움 없이 지낸 위주 조예는 그 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곧 사마의를 불러들여 걱정스레 물었다.
“한 삼 년 조용히 지내더니 이번에 다시 제갈량이 기산으로 나온 다 하오. 어찌했으면 좋겠소?”
사마의가 별로 걱정없다는 듯 말했다.
“신이 밤에 천문을 보니 중원에는 한창 왕기(王氣)가 성했고, 규성 이 태백을 범하는 게 오히려 서천은 이롭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 제갈량은 제 재주만 믿고 하늘의 뜻을 거슬러 움직이고 있으니 이는 곧 스스로 패망의 길을 찾아나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신은 폐하께 내려진 크신 복에 기대 마땅히 달려가 그를 쳐부술 것입니 다. 다만 바라건대 네 사람만 함께 가게 해주십시오.”
“경은 어떤 사람들을 데려가고 싶소?”
위주가 그건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 물었다. 사마의가 얼른 대답했다.
“죽은 하후연의 네 아들입니다. 맏이는 이름이 패()요 자는 중권 (仲權)이며 둘째는 이름이 위(威)에 자는 권(權)이라 합니다. 셋 째는 이름이 혜(惠)에 자는 아권(雅權)이요, 넷째는 이름이 화(和)요 자는 의권(權)입니다. 하후패와 하후위 둘은 말타기와 활쏘기에 익숙하고 하후혜와 하후화는 도략에 밝습니다. 이들 네 사람은 늘상 아비의 원수 갚기를 별러 왔는데 이번에 신이 한번 써볼까 합니다. 하후패와 하후위는 좌우 선봉으로 삼고 하후혜와 하후화는 행군사 마로 삼아 함께 군기를 맡게 함으로써 촉병을 물리쳐볼 작정입니다.”
그 말을 듣자 조예는 문득 걱정스런 얼굴이 되어 물었다.
“지난날 하후무에게 잘못 대군을 맡겼다가 수많은 인마만 잃고, 그 자신은 아직도 부끄러워 이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소. 이번의 네 사람도 역시 하후무와 같은 꼴이 나지 않겠소?”
“그 네 사람은 하후무와 견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마의가 자신있게 그 넷을 두둔했다. 그제서야 조예도 사마의의 청을 들어주었다. 사마의를 대도독으로 삼아 모든 장수와 군사의 쓰 고 부림을 도맡게 하고, 각처의 병마도 모두 그의 명을 따르게 했다. 명을 받은 사마의가 장졸을 이끌고 성을 나서는데 다시 위주 조예가 몸소 조서를 내리며 당부했다.
‘경은 위빈에 이르거든 성벽을 높게 해 굳게 지키기만 하고 나가 창칼을 맞대는 일이 없게 하라. 촉병은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짓 으로 물러나는 체해 우리 군사를 유인하려 들 것이니 삼가고 함부로 뒤쫓아서는 아니 되리라. 저들이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려 저들이 물러가거든 그때에야 그 빈틈을 노려 들이치라. 그리하면 어려움 없 이 싸움에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말의 수고로움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니 이보다 더 나은 계교는 없으리라.’
사마의는 머리를 조아려 그 조서를 받고 그날로 낙양을 떠났다. 장안에 이른 사마의는 각처의 병마를 모두 불러모았다. 합쳐 사십 만이나 되는 군사가 위빈에 모여들어 진채를 세웠다. 사마의는 그 중에서 오만을 뽑아 위에 아홉 개의 부교를 놓게 했다. 그리고 선 봉 하후패와 하후위로 하여금 위수를 건너 영채를 세우게 함과 아울 러 본채 뒤에는 성 하나를 쌓아 적을 막는 데 걱정을 덜게 했다. 이 런저런 채비가 모두 끝난 뒤 사마의는 장수들을 불러모아 촉병 막을 의논을 시작했다.
그때 사람이 와서 알렸다.
“곽장군과 손장군이 오셨습니다.”
사마의는 곽회와 손례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만약 기산에 있는 병이 위수를 건너뛴 뒤 그 벌판으로 기어올라 북쪽 산을 타고 농서 길을 끊으면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마친 곽회가 대뜸 그런 걱정을 늘어놓았다. 사마의도 듣고나니 걱정스러웠다.
“그 말이 옳소. 공은 농서의 병마를 모아 북원(北原)에 진을 치시 오. 도랑을 깊이 파고 벽을 높게 쌓아 굳게 지킬 뿐 함부로 움직여서 는 아니 되오. 그리하여 적의 군량이 다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물러날 때 몰아붙여야 할 것이오.”
그렇게 말하고 곽회와 손례를 북원으로 보냈다.
한편 기산으로 나온 공명은 앞뒤 좌우와 가운데 다섯 개의 큰 영 채를 세우고, 또 야곡에서 검각에 이르는 길에도 열네 개의 대채를 세워 군마를 나눠두었다. 모두가 오래 버티기 위한 배치였다.
하루는 살피러 나갔던 군사가 급하게 돌아와 알렸다.
“손례와 곽회가 농서의 군사를 이끌고 북원에 진채를 세웠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공명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여러 장수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위병이 북원에 진을 친 것은 우리가 그 길로 나가 농서길을 끊을 까 두려워서이다. 우리는 거짓으로 북원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가만 히 위빈을 뺏어버리도록 하자. 군사들로 하여금 나무를 베어 큰 뗏 목 백여 채를 엮게 하고 그 위에 마른 풀과 물질에 익숙한 군사 오 천명을 태우라. 오늘밤 우리가 북원을 공격하는 체하면 사마의는 반드시 구하러 달려올 것이다. 그 적을 조금 두들겨준 뒤 우리 후군 이 먼저 강물을 건넌다. 그다음 뗏목을 풀어놓아 강물을 따라 흘러 가게 하면서 거기 실린 마른 풀에 불을 지르면 강물 위에 놓인 위병의 부교를 태워 없앨 수 있을 것이다. 후군은 그런 위병의 뒤를 들이치라. 나는 따로이 일군을 이끌고 앞에 있는 적의 영채를 빼앗을 것 이다. 그렇게 하여 위수 남쪽만 뺏으면 그다음 우리 군사가 나아가 기는 어렵지 않다.”
이에 장수들은 모두 공명이 시킨 대로 일을 시작했다.
수많은 병이 나무를 찍어 뗏목을 만들고, 한편으로는 어디론가 싸우러 갈 채비를 하는 걸 살핀 위군의 초병이 얼른 그 일을 사마의 에게 알렸다. 사마의가 장수들을 불러놓고 말했다.
“공명이 그러는 데는 틀림없이 계책이 숨어 있을 것이다. 북원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불 붙은 뗏목을 흘려보내 우리 부교를 태워 우리 등 뒤를 어지럽히려는 수작이다. 우리 앞을 공격하는 것은 그다음이 될 것이다.”
한눈에 공명의 계책을 알아보고 하는 소리였다.
이어 사마의는 거기에 대비한 배치를 시작했다. 먼저 하후패와 하 후위를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북원 쪽에서 함성이 들리거든 바로 군사를 이끌고 위 수 남쪽에 있는 산중에 숨어 있으라. 거기서 기다리다가 촉병이 몰 려오거든 뛰쳐나가서 짓두들겨라.”
사마의는 다시 장호와 악침을 불렀다.
“너희들은 이천 궁노수를 이끌고 부교 북쪽 언덕에 숨어 있다가 만약 촉병들이 뗏목을 타고 내려오거든 한꺼번에 활과 쇠뇌를 쏘아 붙여라. 결코 부교 곁으로 다가오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다음으로 사마의는 곽회와 손례에게도 사람을 보내 전하게 했다.
“공명은 북원으로 나가는 체하면서 몰래 위수를 건널 것이오. 그 대들은 이제 막 영채를 세운 데다 인마도 많지 않으니 도중에 매복 해 있으시오. 병은 오후부터 물을 건너 해 질 무렵이면 틀림없이 짓쳐들 것이오. 그대들이 거짓으로 패한 체 달아나면 병은 틀림없 이 뒤쫓을 것인데 그때는 활과 쇠뇌를 쏴서 막도록 하시오. 나도 물 과 뭍으로 나갈 테니 병이 모두 이른 뒤에는 내가 시키는 대로 따 라 싸우면 될 것이외다.”
실로 빈틈없는 대응이었다. 그러나 사마의는 그것도 모자라 두 아 들 사마사와 사마소에게는 앞에 있는 영채를 구원케 하고, 스스로는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북원을 구원하기로 정했다.
한편 공명은 공명대로 자신의 계책을 구체적으로 베풀기 시작했 다. 위연과 마대는 군사를 이끌고 위수를 건너 북원을 공격하게 하 고, 오반과 오의는 뗏목 탄 군사를 데리고 위병의 부교를 불살라버 리게 했다. 위수 가에 있는 사마의의 영채를 공격할 군사는 삼대로 나누었는데, 전대는 왕평과 장의가 맡고 중대는 강유와 마충이, 그 리고 후대는 요화와 장익이 맡았다.
명을 받은 장졸들은 그날 한낮에 모두 대채를 떠나 위수를 건넜 다. 그리고 각기 맡은 곳을 향해 진세를 이루며 천천히 나아갔다. 위연과 마대가 북원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이미 저문 뒤였다. 사 마의의 말을 듣고 사방에 군사를 풀어 살피던 손례는 병이 온 걸 보자마자 영채를 버리고 달아났다.
위연은 그 재빠른 물러남을 보고 위병에게 준비가 있음을 알아차 렸다. 얼른 군사를 물리려는데 사방에서 함성이 일며 두 갈래 위병이 쏟아져 나왔다. 왼쪽에는 사마의가 이끄는 군사요, 오른쪽에는 곽회가 이끄는 군사였다.
위연과 마대는 힘을 다해 빠져나왔으나 병의 태반은 위수에 빠 져 죽고 나머지는 위병들에게 에워싸여 달아날래야 달아날 길이 없 었다. 하지만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지 오반이 군사를 이끌고 달 려와 몰살은 겨우 면하고 강 언덕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한숨을 돌린 오반은 원래 받은 군령으로 돌아갔다. 군사 절반을 갈라 뗏목에 태우고 물 따라 흐르며 위병의 부교를 불태우려 했다. 그러나 거기에도 위병은 이미 준비가 있었다. 장호와 악침이 이천 군사를 호령해 언덕에서 화살을 퍼부으니 아무 가리개도 없는 뗏목 위의 병이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오반은 화살에 맞아 강물에 떨 어져 죽고,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물속으로 뛰어들어 제 목숨 하나 건지기에 바빴다. 그들이 버린 빈 뗏목은 모두 위병의 차지였다.
그 무렵 왕평과 장의는 북원으로 간 저희 편 군사가 이미 그 지경 이 난 줄도 모르고 위병의 본진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밤은 이미 깊 어 이경이나 되었는데 함성이 사방에서 요란했다. 왕평이 말 고삐를 당기며 장의에게 말했다.
“우리 마군이 북원을 치러 갔으나 이겼는지 졌는지는 알 수가 없 소. 거기다가 위수 남쪽의 위병 대채가 앞에 있는데 위병은 하나도 얼씬 않는구려. 사마의가 모든 걸 알고 미리 채비를 갖춰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소. 우리 함부로 뛰어들 게 아니라 부교를 사르는 불 길이 일거든 그때에야 나아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군사를 멈춘 채 강물 위에 불길이 솟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등 뒤에서 갑자기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승상께서 얼른 군마를 돌리라고 하십니다. 북원에 갔던 군사도, 뗏 목을 타고 부교를 태우려던 군사도 모두 적에게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 말에 왕평과 장의는 깜짝 놀랐다. 얼른 군사를 물리려 하는데 한소리 포향과 함께 위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이 지른 불길은 하늘을 찌르는 듯하고 그들의 기세 또한 사납기 그지없었으나 왕평 과장의는 겁먹지 않았다. 군사들을 격려해 한바탕 어지러운 싸움을 벌인 뒤에야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미 기세에 눌린 탓인지 그 싸움에서도 촉병은 다시 태반이 꺾이고 말았다.
공명은 싸움에 진 군사들을 기산의 대채로 불러모았다. 헤아려보 니 그 싸움에서 꺾인 군사만도 오만이 넘었다. 모처럼 힘을 들여 벌 인 싸움이 그 지경으로 끝을 맺자 공명의 걱정과 괴로움은 컸다. 이 번에는 누구 탓도 할 수 없는 깨끗한 패배여서 더욱 그랬는지도 모 를 일이었다.
그럴 즈음 성도에서 비위가 공명을 보러 왔다. 공명은 마침 잘됐 다 싶었다. 얼른 비위를 불러들이고 예가 끝나기 바쁘게 말했다. “내가 글 한 통을 써줄 터이니 번거롭지만 공께서 동오로 가서 좀 전해주시겠소?”
“승상의 명이라면 어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비위가 그렇게 기꺼이 승낙했다. 그러자 공명은 비위에게 글 한 통을 써주며 동오의 손권에게 전하라 했다.
공명의 글을 가지고 건업으로 달려간 비위는 오주 손권을 찾아보 고 글을 바쳤다. 손권이 뜯어보니 거기에는 대략 이렇게 씌어 있었다.
‘한실이 불행하여 기강을 잃으니 역적 조조가 제위를 찬탈하여 이 제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양은 소열황제의 중한 당부를 받은 몸으 로 어찌 힘을 다 쏟고 마음을 다 바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대병은 기산 아래 모여 있고 미친 역적의 무리는 머지않아 위수 가 에서 망하고야 말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동맹의 의미를 생각하시어 북정征)을 명해주십시오. 함께 중원을 빼앗은 뒤에 천하를 나누어 가진다면 그 아니 좋은 일이겠습니까? 글로써 는 다 아뢰지 못하나 오직 폐하의 밝으심에 기대 빌 뿐입니다.’
곧 함께 위를 치자는 공명의 권유였다. 읽기를 마친 손권은 흐뭇했다.
그는 글을 가져온 비위를 보며 의젓하게 일렀다.
“짐은 오래전부터 군사를 일으켜 위를 치려 했으나 공명과 힘을 합칠 기회가 없었소. 그런데 이제 이렇게 공명의 글이 왔으니 더 미 룰 까닭이 없는 듯하오. 오늘로 짐이 몸소 군사를 일으켜 거소문(居 巢門)으로 나가겠소. 가서 위의 신성을 빼앗을 참이오. 또 육손과 제 갈근에게는 강하와 면구의 군사를 들어 양양을 뺏게 할 것이며 손소 (孫韶)와 장승(張承)에게는 광릉으로 군사를 내 회양을 뺏게 하겠소. 그렇게 세 갈래 길로 한꺼번에 쓸고 나갈 우리 군사는 합쳐 삼십만, 긴 날을 머뭇거릴 것도 없이 당장 움직일 것이오.”
손권의 그 같은 다짐을 들은 비위는 고마움을 이기지 못했다. 엎 드려 절하며 그 고마움을 드러냈다.
“폐하의 정성이 그러하시니 중원은 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손권은 그런 비위를 위해 크게 잔치를 열게 했다. 한참 술잔이 오가는데 손권이 불쑥 물었다.
“승상의 군중에서는 누가 선봉으로 쓰이고 있소?”
“위연이 가장 자주 쓰입니다.”
비위가 사실대로 대답했다. 손권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 사람은 용맹은 넘치지만 마음이 바르지 못하오. 공명만 없어 지는 날이면 반드시 촉에 화가 되리다. 그런데 어찌 공명이 그걸 모 른단 말씀이오?”
실로 무서운 소리였다. 궁궐 깊숙이 앉아서 한번 보지도 못한 위 연의 사람됨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비위가 섬뜩함을 감추며 말했다.
“폐하의 말씀이 매우 옳습니다. 돌아가면 반드시 그 말씀을 공명 에게 전해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잔치가 끝나자 다시 한번 손권에 절하여 감사하고 한중으로 돌아갔다.
“오주는 삼십만 대군을 일으켜 세 갈래 길로 쳐올라 올 것이라 합니다. 그중에 한 갈래는 몸소 이끌 작정인 듯싶었습니다.”
비위가 그렇게 손권의 응답을 전하자 공명이 다시 물었다.
“그밖에 달리 하는 말은 없었소?”
“하나 더 있었습니다. 잔치 중에 위연의 말을 했습니다.”
그 말과 함께 비위는 손권이 위연을 평한 말을 전했다. 듣고 난 공명이 감탄하여 말했다.
“실로 총명한 주군이로구나! 나는 위연의 사람됨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 용맹이 아까워 마지못해 쓰고 있을 뿐이오.”
“그렇다면 일찌감치 마땅한 조치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비위가 걱정스레 공명의 말을 받았다. 그러나 공명은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게도 생각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고는 손권과 힘을 합쳐 위를 치는 일에만 마음을 쏟았다. 비위가 성도로 돌아간 뒤 공명은 여러 장수들을 모아놓고 다시 위병과 싸울 의논을 시작했다. 그런데 홀연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위나라 장수 한 명이 항복해 왔습니다.”
공명이 얼른 그 장수를 불러들이게 하고 물었다.
“그대는 누구이며 어찌하여 우리에게 항복하게 되었는가?”
“저는 위나라의 편장군 정문(文)입니다. 근래 진랑(秦)이란 자 와 함께 인마를 끌고 와 사마의 밑에서 쓰이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사마의가 사사로운 정에 치우쳐 사람을 쓰지 않겠습니까? 진랑은 높이 세워 전장군으로 삼고 이 정문은 마치 짚 검불 보듯 하니 분한 나머지 이렇게 달려와 항복 드리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 이 몸을 거두어 쌓인 분함을 풀어주십시오.”
그런데 미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위장 진랑이 군사를 이끌고 우리 진채 밖에 와서 정문에게 싸움 을 걸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이 정문에게 물었다.
“진랑의 무예가 너와 견주어 어떠냐?”
“제가 한칼에 베어버리겠습니다.”
정문이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공명이 이렇다 할 표정 없이 말했다.
“먼저 나가서 진랑을 목 베어 오너라. 그러면 나도 너를 믿겠다.”
그러자 정문은 선선히 말에 올라 영채를 나갔다. 공명도 몸소 영 채를 나가 정문이 진랑과 싸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진랑이 창을 끼고 달려 나오며 큰 소리로 정문을 꾸짖었다.
“역적 놈아, 어찌해 내 말을 훔쳐 타고 달아났느냐? 어서 빨리 내 말을 내놓아라!”
그러고는 말을 박차 똑바로 정문에게 덮쳐갔다. 정문도 군말 없이 칼을 휘둘러 진랑과 어울렸다. 그러나 겨우 한 번 엉켰다 떨어지는 데 진랑의 몸뚱이가 정문의 칼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대장이 그 렇게 죽으니 졸개들이 싸울 마음이 있을 리 없었다. 위병들이 늑대 만난 양 떼처럼 흩어지자 정문이 진랑의 목을 잘라 촉진으로 되돌아 왔다.
장막으로 돌아온 공명은 자리에 앉기 바쁘게 정문을 불러오게 했 다. 정문을 무겁게 쓰려 함인 줄 알았으나 그게 아니었다. 공명은 정 문이 불려오자마자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무엇들 하는가? 저 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정문이 놀라 소리쳤다.
“승상,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소장은 실로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러자 공명이 매섭게 꾸짖었다.
“나는 전부터 진랑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오늘 네가 베어 죽인 것은 진랑이 아니다. 네 어찌 감히 나를 속이려 드느냐?”
그러자 비로소 정문의 기세가 꺾였다. 갑자기 머리를 조아리며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오늘 제가 죽인 것은 진랑이 아니라 그 아우 진명이었습니다.”
“사마의가 너를 시켜 거짓으로 내게 항복케하고 무슨 일을 꾸며 보려 했으나 어찌 나를 속일 수 있겠느냐? 만약 네가 바로 털어놓지 않는다면 나는 어김없이 너를 목 벨 것이다!”
공명이 껄껄 웃으며 그렇게 말하고 사마의가 하려 한 짓을 캐물 었다. 일이 이미 글렀다 여긴 정문이 들은 대로 모두 털어놓으며, 살 려주기를 빌었다. 공명이 문득 목소리를 은근하게 하여 달랬다.
“네가 살기를 바라거든 어서 글 한 통을 써라. 사마의가 스스로 와서 우리 영채를 급습하게만 만든다면 네 목숨은 살려주겠다. 그리 하여 만약 사마의를 사로잡게 된다면 그걸 모두 네 공으로 쳐서 마 땅히 너를 중용할 것이다.”
그러자 정문은 하는 수 없이 사마의를 꾀는 글 한 통을 써바쳤다. 공명은 정문을 가둬두게 하고 그 글로 사마의를 잡을 계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번건)이 궁금한 듯 물었다.
“승상께서는 어떻게 정문이 거짓으로 항복해 왔다는 걸 알았습니까?”
공명이 잔잔하게 웃으며 일러주었다.
“사마의는 가볍게 사람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만약 진랑을 전장 군으로 세웠다면 반드시 진랑의 무예가 높고 세었기 때문이었을 것 이다. 그런데 오늘 싸움에서 정문과 싸운 장수는 겨우 한 합에 목이 떨어졌으니 틀림없이 진랑이 아니다. 나는 그걸 보고 정문의 항복도 거짓인 줄 알았다.”
그 말을 듣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치고 엎드려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공명은 말 잘하는 군사 하나를 골라 무어라 귓속말로 분부한 뒤 위채()로 보냈다. 그 군사가 위채로 들어가 사마의에게 정문이 써준 글을 바치자 읽고 난 사마의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중원 사람으로 이리저리 흘러다니던 끝에 촉에 주저앉게 되었으나 정문과는 한 고향에서 자랐습니다. 이번에 정문이 공을 세 워 공명은 그를 선봉으로 세웠습니다. 그러자 정문이 특히 저에게 당부해 이 글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정문이 말하기를 내일 밤 불 을 지르는 걸 신호로 대도독께서 몸소 대군을 이끌고 촉진을 급습해 달라 했습니다. 그러면 정문도 안에서 호응해 촉병을 단번에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군사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사마의는 정문이 자기 졸개를 보내지 않고 낯선 사람을 보낸 게 못 미더워 이것저것 캐물어보았 다. 그러나 그 군사의 말에는 조금도 수상쩍은 데가 없었다. 사마의 는 다시 정문이 보낸 글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역시 틀림없는 정문 의 필체에 내용도 이상한 곳이 없었다.
이에 그 군사를 믿게 된 사마의는 그에게 술과 밥을 내리고 말했다.
“오늘 밤 이경쯤 해서 내 스스로 적진을 급습해보겠다. 만약 일이 뜻대로 이뤄지면 너를 높게 쓰리라.”
그러자 그 군사는 머리를 조아려 고마움을 나타내고 저희 진채로 돌아갔다. 그 군사로부터 사마의가 속아 넘어갔음을 전해 들은 공명은 곧 싸움 채비에 들어갔다. 칼을 짚고 북두칠성을 우러러 기도를 올린 뒤에 먼저 왕평과 장의를 불렀다.
“그대들은 이리이리 하라.”
공명은 그렇게 남모르는 계교를 주고 다시 마대와 마충에게도 또 다른 계교를 주어 보냈다. 위연까지 불러 무언가 계교를 준 뒤에야 공명은 스스로 높은 산에 올라가 거기서 모든 갈래의 군사를 지휘 했다.
그 무렵 사마의도 두 아들과 함께 대군을 몰아 촉채를 급습할 채 비를 끝냈다. 막 군사를 내려는데 맏아들 사마사가 한마디 했다.
“아버님께서는 어인 까닭으로 한 조각 글만 보시고 몸소 위험한 곳 깊숙이 들려 하십니까? 만약 거기 어떤 잘못됨이 있으면 그때는 어찌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따로 장수 하나를 세워 먼저 가게 하시고 아버님께서는 뒤에서 호응해가시는 게 나을 듯합 니다.”
사마의도 듣고 보니 그럴듯해 그대로 따랐다. 진랑을 불러 일만 군사로 먼저 촉진을 급습하게 하고 자신은 뒤따르면서 변화에 호응 하기로 했다.
그날 밤이었다. 초경만 해도 바람이 맑고 달이 밝더니 이경쯤이 되자 갑자기 구름이 끼고 검은 기운이 하늘을 덮었다. 서로 얼굴을 맞대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캄캄해져버린 것이었다.
“하늘이 내가 공을 이루는 걸 도와주는구나!”
사마의는 야습하기에 알맞게 캄캄해져 몹시 기뻐하며 소리쳤다.
군사들도 힘이 나서 앞으로 내달았다. 입에는 소리를 못 내게 하는 나뭇가지를 물고 말에는 재갈을 채운 채였다.
촉채 가까이 이르자 진랑이 먼저 일만 군사를 이끌고 기세도 좋 게 뛰쳐들어갔다. 그러나 채 안에는 어리친 개새끼 한 마리 보이 지 않았다.
“모두 물러나라. 우리가 속았다!”
놀란 진랑이 그렇게 소리치며 군사를 물리려 했으나 뜻대로 되 지 않았다. 갑자기 사방에서 불길이 일며 함성이 요란한 가운데 두 갈래 병이 쏟아져 나왔다. 왼쪽은 장의와 왕평이 이끄는 병이 요, 오른쪽은 마대와 마충이 이끄는 촉병이었다.
진랑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워낙 촘촘하게 쳐둔 그물이 라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오직 뒤따라오는 사마의가 어서 구해주기 를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사마의의 사정도 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마의도 촉채 에서 불길이 솟고 함성이 이는 소리는 들었으나 어느 편이 이기고 지는지 알 길이 없었다. 무턱대고 군사를 재촉해 불길 쪽으로 내닫 는데 갑자기 함성이 일며 북소리 나팔 소리가 하늘에 가득했다. 놀 란 눈길로 보니 오른쪽에서는 강유요, 왼쪽에서는 위연이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덮쳐오고 있었다.
위병들은 싸워보기도 전에 그 기세에 먼저 질려버렸다. 그대로 무 너져내려 열에 여덟아홉은 상한 채 사방으로 흩어졌다.
뒤를 받쳐주기로 한 사마의가 그 모양이 되니 안에 갇힌 진랑의 신세는 뻔했다. 만 명의 졸개와 더불어 몇 겹으로 에워싸여 있다가 비오듯 쏟아지는 촉병의 화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겨우 목숨을 건진 사마의는 싸움에 진 군사를 이끌고 본채로 쫓 겨갔다. 코앞이 안 보일 듯하던 검은 기운은 삼경이 지나자 차차 걷 히고 하늘도 다시 맑아졌다.
위병이 모두 쫓겨간 걸 보고 산 위의 공명은 징을 쳐서 모든 군사 를 거두었다. 원래 이경 무렵에 갑자기 일었던 구름은 공명이 둔갑 법을 써서 불러 모은 것이었다. 따라서 군사를 거둬들이며 다시 그 구름을 흩어버리니 삼경부터는 하늘이 맑아질 수밖에 없었다.
본채로 돌아온 공명은 정문을 목 베고 다시 위수 남쪽을 빼앗을 의논을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위병이었다. 공명이 매일 군사를 보내 싸움을 걸어도 받아주지 않았다.
이에 공명은 몸소 수레에 올라 기산 앞 위수 동서의 지리를 살펴 보기 시작했다. 한 골짜기에 이르니 땅의 생김이 호로병 같은데 그 안에 천여 명이 들 만하고 또 양쪽의 산이 합쳐 골짜기를 이루면서 거기도 사오백 명이 더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있었다. 그 뒤에는 양쪽 산이 다시 붙어 길이란 것은 겨우 말 한 마리 사람 하나가 지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골짜기를 본 공명은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길잡이 군사에게 물었다.
“이 골짜기 이름이 무엇인가?”
“이 골짜기 이름은 상방곡인데 달리 호로곡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길잡이 군사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장막으로 돌아온 공명은 비장 두예(杜叡)와 호충(胡忠)을 불러 귀에 대고 무언가 은밀한 계교를 주었다. 그리고 다시 군중의 장인 천여 명을 불러모아 호로곡으로 보내고 목우(牛)와 유마(流馬)란 걸 만들게 했다.
그다음으로 불려온 건 마대였다. 공명은 마대에게 군사 오백을 내 주며 호로곡을 지키라 당부했다.
“뭇 장인들은 한 사람이라도 밖으로 내보내지 말고 바깥 사람도 안으로 들이지 않도록 하라. 내가 불시에 점검하더라도 소홀함이 있 어서는 아니 된다. 사마의를 잡을 길은 이번 일에 달렸으니 결코 이 소문이 밖으로 새나가는 일이 없게 하라.”
이에 마대도 그 명에 따라 떠났다.
한편 호로곡에 이른 두예와 호충은 장인 천여 명을 부려 목우, 유 마를 만들었다. 공명은 매일 친히 그곳으로 가서 그들이 일하는 걸 지시하고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장사 양의가 공명을 찾아보고 말했다.
“지금 우리 편 군량은 모두 검각에 있어 운반하는 일꾼과 마소가 옮겨오기에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공명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내 이미 군량을 옮겨올 계책을 세워온 지 오래니 걱정 않아도 될 것이다. 전부터 모아둔 여러 종류의 나무들과 서천에서 사들인 큰 목재로 목우와 유마를 만들게 해두었다. 그게 만들어지면 군량을 옮 기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 마소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밤낮으로 곡식을 실어 나를 수 있기 때문이다.”
곁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 마지않으며 물었다.
“옛부터 지금까지 목우나 유마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승상께서는 어떤 묘법을 지니셨길래 그같이 기이한 물건을 만드실 수 있습니까?”
공명이 어려울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장인들을 시켜 격식에 따라 그걸 만들게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만들어진 게 없어 보여줄 수 없으니 먼저 말과 글로 목우, 유 마를 만드는 법을 일러주겠다. 그 크기와 모남과 둥글음이며 길고 짧 음, 넓고 좁음을 모두 여기 적어 보여줄 것이니 한번 보도록 하라.”
그리고 먼저 붓을 들어 목우 만드는 법을 썼다. 다 쓴 것을 여러 사람이 돌려가며 읽어보니 거기에는 대략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배는 모가 나고 정강이는 굽으며 한 몸통에 다리는 넷이다. 머리 는 목덜미에 박혀 있고 혀는 배에 닿아 있는데, 많이 실으면 멀리 가 지 못하고 홀로 가면 몇십 리를 가나 떼 지어 가면 삼십 리가 고작 이다. 굽은 것은 소머리가 되고 짝이 진 것은 소의 발이 되며, 가로 지른 쪽은 소의 목덜미가 되고 구르는 쪽은 소의 다리가 된다. 뒤집 어져 있는 쪽은 소의 잔등이 되고 모가 난 쪽은 소의 배가 된다. 바 로 선 것이 소의 혀요, 굽은 것은 소의 갈빗대이다. 새겨 만든 것은 소의 이며, 세운 것은 소의 뿔이고, 가는 것은 쇠굴레요, 꺼져 있는 것은 소의 고삐다. 소는 멍에 둘로 끄는데 사람이 여섯 자를 가는 동 안 소는 네 발짝을 간다. 사람은 크게 힘들지 않고 소는 먹지도 마시 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어 그 구석구석 조각조각의 자세한 모양과 크기를 적었다. 유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목우처럼 그 대략의 생김과 특성을 적은 뒤에 그 만드는 법을 적어나갔다.
‘갈빗대 길이는 석 자 닷치에 너비는 세치, 두께는 두 치 닷 푼이요…….’
하는 식이었다. 모든 장수들은 그걸 둘러보고 새삼 감탄해 마지않
았다.
“승상은 참으로 신과 같은 분이다!”
그러고는 그 목우 유마가 어서 빨리 만들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자 다 만들어진 목우와 유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 있는 소나 말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산을 오르고 언덕을 내려가는 데 수월하기가 그지없었다.
공명은 우장군 고상(高)에게 명하여 군사 천여 명을 이끌고 목 우와 유마를 몰아 검각에 있는 군량을 기산으로 옮겨오게 했다. 이 로부터 촉병은 우선 군량 걱정은 없어졌다.
그런데 이 목우와 유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말이 많다. 어떤 이는 공명의 시대보다 훨씬 뒷날의 저술에 보이는 군용 수레의 일종 을 신비하게 윤색하여 공명의 이름을 높인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 은 예부터 있어 온 일종의 수레를 공명이 개량해 썼을 것이라고도 한다. 정사에도 뚜렷이 목우와 유마가 나오는 걸 보면 뒷사람의 주 장이 옳은 듯하다. 그러나 『연의에서 보는 것처럼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저절로 가는 그런 초과학적 운반수단은 아니었음에 분명하다. 길이 험하고 산길과 고개가 많은 곳에서 쓰기에 편리하게 몇 가지 고안을 곁들인 수레라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편 싸움에 지고 쫓겨온 사마의는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나아 가 싸울 수도 물러날 수도 없어 걱정으로 날을 보내는데 살피러 나 갔던 군사들이 돌아와 알렸다.
“병들이 목우와 유마란 수레를 써서 군량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별로 힘들어 보이지 않는데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 목우와 유 마가 움직이는 게 매우 신기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마의가 깜짝 놀라 말했다.
“내가 굳게 지킬 뿐 나가 싸우지 않는 것은 적이 마침내 군량과 마초를 대지 못해 절로 무너지기를 기다리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 제 목우와 유마 같은 걸 만들어 쓰고 있으니 틀림없이 공명은 긴 안 목으로 계책을 꾸미고 있는 듯하다. 기다린다 해도 적이 물러날 생 각이 없으니 이제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그러고는 곧 장호와 악침을 불러 영을 내렸다.
“너희들은 각기 군사 오백 명을 데리고 야곡 샛길을 따라 나가보 아라. 거기 알맞은 곳에 숨어 기다리다가 병이 목우와 유마를 끌 고 군량을 운반해 가거든 그 뒤를 들이쳐 그 목우와 유마를 뺏어오 도록 한다. 많이 뺏어올 것은 없으니 적이 모두 지나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뛰쳐 나가 그 끄트머리에 있는 서너 대만 끌어오도록 하라.” 이에 장호와 악침은 군사 오백을 이끌고 야곡으로 갔다. 군사들은 모두 촉병으로 꾸미게 하고 밤중에 가만히 샛길로 빠져 골짜기 한구 석에 숨어 있자니 과연 고상이 이끄는 목우와 유마가 줄지어 나타났다.
장호와 악침은 사마의가 시키는 대로 병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 다렸다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가 그 끄트머리를 덮쳤다. 뒤 에서 처져 목우와 유마를 끌던 촉병들은 그 갑작스런 습격에 미처 손을 쓸 틈이 없었다. 별수 없이 목우와 유마 몇 필을 버리고 달아나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