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11화 : 그 뒤 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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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11화 : 그 뒤 십년


그 뒤 십년

역사를 연의(義)할 때의 어려움은 의미 있는 인물과 사건이 세 월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삼국지연의』에서도 그렇다. 너무 사건과 인물에 치우쳐 세월의 흐름이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약점은 후반으로 갈수록 두드러져 심할 때는 몇십 년의 일들이 역동적인 시절의 몇 달 사이에 일어난 것처럼이나 한장회) 속 에서 처리되기도 한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한다면 삼국지연의』가 취급 하는 시대는 황건난이 일어나는 서기 183년부터 오(吳)가 망하는 282년까지 약 백 년간이며 공명이 죽는 232년은 대략 그 한가운데 에 해당된다. 그런데 『연의』의 여섯 가운데 다섯은 전반에 바쳐지고, 나머지 오십 년은 겨우 그 여섯 가운데 하나로 매듭짓고 있다. 삼국으로 갈라선 천하가 나름대로 안정된 뒤에 태어난 고만고만한 사람들의 이야기라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시간 감각에 착오를 일으킬 염려도 없지 않다.

좀 어색한 대로 다시 서력 기원을 빌려 알기 쉽게 세월의 흐름을 더듬어본다면, 제갈각의 요청을 받아 강유가 다시 위(魏)를 치러 나 선 것은 서기 253년, 공명이 죽은 지 이십 년 만이었고, 사마사가 조 방(曹芳)을 내쫓고 조모(曹髦)를 위주(魏主)로 세운 것은 그 이듬 해인 254년의 일이었다. 그리고 다시 아홉 해 뒤인 263년에는 마침 내 삼국 정립의 형세가 무너지게 된다. 위가 촉 정벌에 나서기 때문 이다.

하지만 그 십 년 가까운 세월도 평온히 지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 앞 세대처럼 천하의 쟁패가 달린 떠들썩한 것은 못 되지만, 세 나 라 모두가 크고 작은 내우외환에 시달리면서 천천히 시들어간 것이 그십 년 동안의 일이었다.


먼저 위나라부터 살펴보자. 사마사는 자신을 반대하는 세력을 제 거하고 임금까지 갈아치웠으나 그렇다고 위에 사람이 아주 없는 것 은 아니었다. 사마사가 새 임금을 세운 그 이듬해 위의 진동장군 관 구검과 양주자사(揚州刺史) 문흠(文)이 먼저 사마씨에게 반기를 들 었다.

관구검과 문흠은 둘 다 조상(曹爽)과 가깝던 사람들이었다. 조상 이 사마의에게 죽은 뒤 늘 불안히 여기다가 사마사가 천자를 내쫓고 멋대로 새 천자를 세워 명분을 주자 곧장 행동에 들어갔다. 수춘에 크게 제단을 쌓고 백마의 피를 찍어 맹세한 관구검과 문흠은 널리 세상에 고했다.

‘사마사는 함부로 임금을 내쫓은 대역부도한 자이다. 이제 태후의 밀조를 받들고 회남의 인마를 모두 일으켜 역적을 치려 한다. 뜻 있 는 이들은 모두 충의를 짚고 일어서라!’

그런 다음 크게 군사를 일으켜 관구검은 육만 대군으로 항성(項 城)에 자리 잡고, 문흠은 이만 대군으로 밖에서 오가며 변화에 따라 움직이기로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사마사는 마침 눈에 난 혹을 짼 뒤라 성치 못한 몸인데도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 낙양은 동생 사마소에게 맡기 고 스스로는 양양에 자리 잡은 뒤 각처의 군마를 불러들였다.

제갈탄은 예주 군사를 일으켜 수춘을 치게 하고, 호준은 청주군사 를 이끌고 관구검과 문흠이 돌아갈 길을 끊게 하며, 왕기(基)는 전 부병(前部兵)을 이끌고 먼저 진남을 치란 명을 받았다. 세 장수에게 명을 내린 뒤 사마사는 다시 문관과 장수들을 모아 싸울 일을 의논 했다.

광록대부 정(鄭)는 지구전을 권했으나 전부 대장 왕기는 관구 검의 군사들이 마지못해 관구검을 따르고 있는 점을 들어 단기 결전 을 주장했다. 왕기의 말을 따른 사마사는 전략 요충인 남돈성을 먼 저 차지하고 관구검이 오기를 기다렸다.

관구검도 남성이 요충이 된다는 걸 알고 군사를 보냈으나 이미 그곳은 사마사의 군사가 차지한 뒤였다. 거기다가 동오의 손준이 수 춘성을 노린다는 말에 놀란 관구검은 얼른 항성으로 군사를 물렸다.

거기서 기선을 잡은 사마사는 공세로 들어갔다. 문흠의 아들 문앙 (文)이 홀몸으로 수십 명 위장을 죽이는 분전이 있었으나, 대세는 이미 기운 뒤였다. 문흠은 위나라의 신예 장수 등애의 출현으로 대 패한 뒤 수춘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곳마저 이미 제갈탄에게 점령 된 뒤라 하는 수 없이 동오로 달아났다.

항성 안에 틀어박혀 있다가 손발이 다 잘린 꼴이 된 관구검은 당 황했다. 벌써 성을 에워싼 호준, 왕기, 등애(鄧)의 세 갈래 군마와 성을 나가 싸웠으나 당해내지 못했다. 겨우 여남은 기만 데리고 신 현성으로 달아났다가, 그곳 현령 송백(白)의 속임수에 빠져 술에 취해 자는 중에 목을 잃었다.

회남은 평정되었으나 그 싸움에서 눈을 다친 사마사는 마침내 자 리에 눕고 말았다. 제갈탄에게 정동대장군을 더해 양주의 군마를 다 스리게 하고 자신은 허창으로 돌아갔다. 사마사는 허창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죽었다. 죽기 전에 아우 사마소를 불러 대장군의 인수 를 전함과 아울러 뒷일을 당부했다.

“내가 맡아온 일은 너무 크고 무거워 벗어던지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제 네가 나를 이을 차례다. 큰일은 결코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자칫하면 온 가문이 몰살당하는 화를 불러들이게 된다.” 

위주 조모는 사마사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사신을 허창으로 보내 조문한 뒤 사마소더러는 계속 그곳에 머물러 동오의 침입에 대비하 라 했다. 그러나 사마소는 심복 종회(鍾會)의 말을 들어 군사를 이끌 고 낙양으로 돌아갔다.

그 기회에 사마씨를 약화시켜볼까 하던 조모는 사마소가 군사를 이끌고 낙수(水)에 진을 쳤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그에게 대장군에다 상서사(尙書事)를 맡겨 죽은 형의 뒤를 잇게 하니, 위의 정권은 여전히 사마씨의 수중에 남았다.


어떤 경우든 한 나라의 정권 담당자가 바뀌는 것은 적국에게는 한 좋은 기회로 치부된다. 위를 보는 촉의 눈길도 그러해서, 강유는 사마사가 죽고 사마소가 뒤를 이었다는 말을 듣자 곧 위를 칠 기회 라 여겼다. 정서대장군 장익(張)이 말리는 것도 뿌리치고 하후패 와 함께 포한袍)쪽으로 나갔다.

강유가 백만이라고 큰소리 칠만큼 많은 군사를 이끌고 조수祧 水)가에 이르자 위(魏) 국경을 지키던 군사가 옹주자사 왕경(王經)과 정서장군 진태(陳泰)에게 그 일을 알렸다. 왕경이 먼저 칠만 군사를 이끌고 나와 강유를 맞았다.

강유는 먼저 하후패와 장익에게 계책을 주어 보낸 뒤에 대군을 이끌고 조수에 배수진을 쳤다. 왕경이 몇 사람의 아장을 이끌고 나 와서 강유를 꾸짖었다.

“위와 촉, 오는 이미 솥발 형태로 천하를 나누고 있다. 그런데 너 는 어째서 자꾸 우리 위나라를 침범하느냐?”

“사마사가 까닭 없이 임금을 쫓아냈으니 이웃나라로서 마땅히 그 죄를 물어야 한다. 하물며 원수의 나라이겠느냐?”

강유가 그렇게 맞받았다. 왕경이 대꾸 없이 저희 편 네 장수들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촉군은 배수진을 쳤으니 싸움에 지면 모두 물에 빠져 죽고 말 것이다. 하지만 강유는 날래고 용맹한 장수이니 너희 네 사람이 모두 덤벼야 할 것이다. 만약 강유가 물러나는 낌새가 보이면 곧장 그 뒤 를 뒤쫓으며 치라!”

그 말에 그들 네 장수는 좌우로 갈라 나와 강유에게 덤벼들었다. 강유는 그들과 몇 합 싸우다가 자기 진채 쪽으로 달아났다. 왕경은 대군을 휘몰아 촉군을 덮쳐왔다. 강유는 군사들을 이끌고 조서(祧 西)로 달아났다. 물가에 거의 다다르자 강유가 문득 되돌아서며 장 졸들에게 소리쳤다

“일이 급하다! 여러 장수들은 어찌하여 힘을 다하지 않는가?” 

그 외침에 장수들이 힘을 다해 되받아치고 나왔다. 위병이 그 기 세를 당해 낼 리 없었다. 크게 뭉그러져 달아났다. 그때 다시 장익과 하후패가 뒤편에서 달려 나와 두 갈래로 위병을 짓두들겼다. 위군은 도리어 촉병에 에워싸인 형국이 되어 크게 혼란에 빠졌다. 자기들끼 리 밟고 밟히어 죽는 사람이 반이 넘었고 조수로 떼밀려 가서 빠져 죽은 사람도 헤일 수 없을 정도였다.

왕경은 겨우 백여 기를 이끌고 힘을 다해 싸움터를 빠져나가 적 도성으로 달아났다. 크게 싸움에 이긴 강유는 뒤따라가 적도성을 공 격하려 했다. 그때 장익이 말렸다.

“이미 공을 이뤘고 위세도 크게 떨쳤으니 이제 그칠 때입니다. 이 제 억지로 나아갔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뱀을 그리는데 다리를 덧 붙이는 꼴이 나고 말 것입니다.”

강유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난번에는 싸움에 지고도 오히려 나아가 중원을 종횡하고 싶었소이다. 이제 조수의 싸움 한판으로 위나라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으니, 내가 보기에 적도성은 손바닥에 침 한번 뱉으면(힘을 쓰기 위해) 얻을 수 있을 것이오. 그대는 스스로 기상을 떨어뜨리지 마시오.”

장익은 두 번 세 번 말렸지만 강유는 듣지 않았다. 군사를 몰아 적 도성을 에워싸고 들이치기 시작했다.

이때 위의 정서장군 진태는 크게 군사를 일으켜 왕경의 원수를 갚아줄려고 벼르고 있었다. 갑자기 연주자사 등애가 적지 않은 군사 를 이끌고 와서 말했다.

“대장군(사마소)의 명령을 받들어 장군을 도와 촉병을 치러 왔습니다.”

진태가 반가워하며 적을 칠 계책을 물었다. 등애가 조리있게 대답했다.

“만약 적이 조수에서 이긴 뒤에 강인들을 불러들여 관중과 농서 일대를 다투면서 인근 네 군에 격문을 돌렸다면 이는 우리가 크게 걱정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적은 지금 적도성을 치고 있습 니다. 적도성은 성벽이 높고 두꺼워 쉽게 떨어뜨릴 수 없습니다. 공 연히 군사들의 힘만 허비하게 될 터이니, 우리는 항령에 진을 치고 있다가 군사를 내어 치면 촉군은 반드시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진태가 기뻐하며 그 말을 따랐다. 그리고 쉰 명을 한 대(隊)로 하 여 스무 대를 적도성 동남 높은 산 깊은 계곡으로 가게 했다. 깃발과 북, 피리, 봉화 따위를 갖춰 낮에는 숨고 밤에는 움직이는 방식으로 촉군 몰래 숨어들게 한 것이었다. 적군이 오면 낮에는 북치고 피리 불며 깃발을 내걸고 밤에는 봉화를 올리고 방포를 쏘아 놀라게 하라는 명도 잊지 않았다.

진태와 등애는 그 군사들이 매복을 마치기를 기다려 각기 이만의 군사를 이끌고 적도성으로 나아갔다. 그때 강유는 며칠이나 잇따라 공격을 퍼부었으나 성이 전혀 떨질 기색이 없어 답답해하고 있었다. 해질 무렵 파발마가 연거푸 와서 알렸다.

“양쪽에서 적군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쪽은 위 정서장군 진태가 이끄는 군사이고, 다른 쪽은 연주자사 등애가 이끄는 군사들입니다.” 

강유가 놀라 하후패를 불렀다. 하후패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등애는 병법에 능한 데다가 이곳 지리에도 밝아, 그가 군사를 거 느리고 왔다면 힘든 싸움이 될 것입니다.”

“등애는 어떤 사람이오?”

강유가 새삼 궁금한 듯 물었다. 하후패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등애는 의양(陽)사람으로 자를 사재(載)라 씁니다. 어려서 아비를 잃어 한때는 소치기를 하는 등 어렵게 자랐지만 뜻이 커서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높은 산이나 큰 늪지를 보면 속으 로 모두 헤아려, 어느 곳은 군사를 머물게 할 만하고 어느 곳은 군량 을 저장할 만하며 어느 곳은 군사를 숨길 만하다고 말하고는 했습니 다. 사람들은 모두 그런 그를 비웃었으나 오직 사마의만은 그 재주 를 기특하게 여겨 마침내 군기(軍機)를 다스리는 데 써주었습니다. 또 등애는 말더듬이여서 언제나 무슨 말을 할 때는 애, 애() 하며 제 이름을 반복하기 때문에, 사마의가 우스개로 ‘경은 자꾸 애, 애 하는데 도대체 등애가 몇 명이나 되는가’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등애는 바로 대답하기를 ‘봉이여, 봉이여[兮, 『논어』 「」 편에 나오는 말. 공자를 가리킴] 하는 말이 있지만 한 마리 봉을 두고 말하는 것이옵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그 배움이나 민첩한 자질을 대강이나 마 짐작할 수 있는 대꾸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강유는 별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

가 말했다.

“적군은 먼 길을 오느라 지쳤을 것이오. 그들에게 쉴 틈을 주지 말고 바로 공격합시다.”

그러고 장익에게는 남아 적도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과 하후패 는 진태와 등애의 군사를 맞으러 나갔다. 진태는 하후패가, 등애는 강유가 맡기로 했다.

하후패와 헤어진 강유가 채 오리도 가기 전이었다. 갑자기 동남 쪽에서 한소리 포향이 울리더니 북소리 피리소리가 땅을 흔들고 봉 화 불꽃이 하늘을 찔렀다. 강유는 말을 달려 다가가보았다. 주위에 보이는 것은 모두 위병들의 깃발뿐이었다. 강유가 깜짝 놀라며 탄식 했다.

“우리가 등애의 계략에 말려들었구나!”

강유는 급히 하후패와 장익에게 사람을 보내 모두 적도성을 버리 고 물러나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군사를 한중으로 돌렸다.

돌아오는 길은 강유가 스스로 후미가 되어 뒤쫓아오는 적을 막았 다. 뒤에서는 북소리 피리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검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스무 군데의 봉화와 북소리 피리소리에 속았음 을 알아차렸다. 강유는 부끄러운 마음으로 군사를 거두어 종제(鍾提)로 물러났다.

한편 후주는 강유가 적도에서 공을 세웠다 하여 대장군으로 올렸다. 조서를 받은 강유는 표문을 올려 은혜에 감사하고, 다시 위를 칠 궁리에 들어갔다.

강유가 물러가자 적도성에 갇혀 있던 옹주자사 왕경은 성문을 열 어 등애와 진태를 맞아들였다. 왕경은 감사와 아울러 크게 잔치를 열어 두 사람을 대접하고 따라온 군사들에게도 큰 상을 내렸다.

진태가 표문을 올려 위주(魏) 조모에게 등애의 공을 알리자 위 주는 등애를 안서장군(安西將軍)으로 삼고 절(節)을 내렸다. 그리고 호동강교위(東姜校尉)를 겸하며 진태와 함께 옹주 양주에 머무르 게 했다. 진태가 잔치를 열어 등애를 추켜세우며 말했다.

“강유가 밤에 몰래 도망한 것을 보면 이제 싸울 힘이 없어진 것이 오. 다시는 함부로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외다.”

등애가 희미하게 웃으며 받았다.

“제가 헤아리기로는 촉군이 반드시 쳐들어올 이유가 다섯 가지나 됩니다.”

“그게 무엇무엇이오?”

“첫째로 촉군이 비록 물러가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한번 싸움에 이긴 기세가 있고 우리에게는 약해서 진 실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촉군은 제갈량이 훈련시킨 정병이라 부리기가 쉽지만 우리 는 장수가 수시로 바뀌고 군사들도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은 것입 니다. 셋째로 촉군은 움직일 때 배를 타서 편하지만 우리 군사는 모 두 걸어야 하기 때문에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적도 남안 농서 기산은 모두 싸워서 지켜야 할 곳인데, 촉군들은 한곳을 골라 힘 을 모을 수가 있지만 우리는 군사를 네 군데로 갈라 지켜야 하니, 우 리는 언제나 적군의 사 분지 일로 맞서게 되는 게 그렇습니다. 다섯 째로 촉군은 남안이나 농서로 쳐들어오면 강인들의 양식을 먹을 수 있고, 기산으로 오면 그곳의 밀을 먹을 수 있어 군량을 걱정하지 않 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진태는 감탄했다.

“공이 이미 귀신처럼 꿰뚫어보고 있으니 촉군쯤은 걱정할 게 무어 있겠소!”

한편 강유는 종제에서 큰 잔치를 열고 여러 장수들을 불러모아 위를 칠 일을 의논했다. 영사(史)번건이 말리는 투로 말했다. 

“장군께서는 여러 번 한중을 나가셨지만 한번도 큰 공을 세우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조서 싸움에서 위나라 사람들을 꺾어 이미 위세를 세우셨는데 무엇 때문에 또다시 나가려 하십니까? 만 일 다시 지기라도 한다면 세운 공마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강유가 번건을 달래듯 말했다.

“그대들은 위나라가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급하게 이기기 어려 우리란 것만 알지, 오히려 우리에게 위를 이길 다섯 가지 이유가 있 다는 것은 모르는 듯하이.”

“무엇입니까?”

장수들이 입을 모아 물었다. 강유가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적은 조서 싸움에서 크게 져서 사기가 꺾였지만 우리는 비록 물 러나기는 해도 한 명의 군사도 잃지 않았으니, 이게 다시 위병과 싸운다면 이길 수 있는 첫째 이유가 된다. 또 우리 군사는 배를 타고 나아가 고단하지 않지만 적병은 뭍으로 걸어와서 맞아야 하니…………….” 

그렇게 하나하나 짚어나가는데 대개 등애가 진태에게 말한 그 다 섯 가지였다. 다 듣고 난 하후패가 그래도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등애는 비록 나이가 어리나 지략이 뛰어났습니다. 반드시 곳곳에 대비를 해두었을 것이라 전날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래도 강유는 기어이 그 말을 듣지 않고 기산으로 군사를 내었다. 이때 등애는 강유가 다시 나올 줄 짐작하고 먼저 기산에다 아홉 개의 진채를 세워 엄히 방비하고 있었다. 이에 강유는 계책을 바꾸 어 약간의 군사로 기산을 칠 것처럼 꾸미게 하고 자신은 대군을 빼 돌려 남안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강유의 그 같은 계책은 등애에게 헤아려진 바 되어 어그러졌다. 무성산을 차지하여 진채를 세우려던 강유는 미리 가 있던 등애의 군사들을 보고 놀랐다. 위병들은 한차례 촉군을 들 이쳐 전군을 혼란시키고는 산 위로 올라가버렸다. 강유가 산 밑에서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받아주지 않았다.

삼경까지 싸움을 걸다가 산에서 내려온 강유는 기슭에다 진채를 얽으려 했다. 군사들에게 나무와 돌을 날라다 영채를 얽게 하고 있 는데 산 위에서 북소리 피리소리가 들리더니 위병들이 갑자기 쳐내 려 왔다. 크게 혼란에 빠진 촉군들은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벌 판의 진채로 쫓겨났다.

다음 날이었다. 강유는 군량을 나르는 수레를 끌고 무성산으로 갔 다. 그 수레를 군사들 바깥으로 둘러세워 진채의 목책을 대신하려함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강유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날밤 이경 무렵 등애가 화공을 써서 수레들을 태워버리니 진채로 쓸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난 강유가 하후패에게 말했다.

“남안을 얻을 수 없다면 상규를 먼저 빼앗는 것이 낫겠소. 상규는 곧 남안의 군량을 모아두는 곳이니 만약 상규를 잃는다면 남안은 절 로 위태로워질 것이오.”

그리고 하후패에게 군사 한 갈래를 주어 무성산에 머물게 한 다음 자신은 날랜 군사들과 용맹한 장수들을 모두 이끌고 상규로 떠났다. 강유가 장졸들을 재촉하여 밤새 걷는 사이에 먼동이 터왔다. 사방 을 돌아보니 군사들은 산세 험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데 길이 여간 거칠지 않았다. 강유가 길잡이를 불러 물었다.

“이 골짜기 이름이 무엇이냐?”

“단곡(谷, 토막난 골짜기)이라 합니다.”

그 말에 강유가 놀라며 말했다.

“이름이 좋지 못하구나. 단곡이라면 바로 단곡(谷, 끊어진 골짜기) 이나 다름없다. 누가 이 골짜기 어귀를 막고 있다면 어찌하겠느냐?” 

그러면서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는데 앞서 가던 군사들이 달려 와 알렸다.

“산 뒤편에서 먼지가 크게 일고 있습니다. 복병이 있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놀란 강유가 서둘러 물러나기를 명했다. 그때 장전교위 사찬(師 纂)과 등애의 아들 등충(忠)이 이끄는 위병들이 양쪽에서 치고 들었다. 강유는 싸우면서 달아나기를 거듭하며 골짜기를 뚫고 나가려 했다. 다시 앞쪽에서 등애가 대군을 이끌고 길을 막았다.

세 갈래 적병에게 에워싸인 촉군은 크게 낭패했다. 다행히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하후패가 구해주어 위급을 면할 수 있었다.

겨우 군사를 수습한 강유는 다시 기산으로 쳐들어가려 했다. 하후 패가 놀라운 소식을 알렸다.

“기산의 영채는 이미 진태에게 빼앗겼습니다. 지키던 우리 장수는 죽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한중으로 돌아갔다 합니다.”

이에 강유는 감히 동정으로 가는 길을 잡지 못하고 산골 후미진 샛길을 따라 한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등애는 강유가 곱게 돌아가 게 버려두지 않았다. 군사를 내어 급하게 뒤쫓아왔다.

강유는 여러 장수들에게 앞서 군사를 몰아가게 하고 자신은 뒤처 져서 적을 막기로 했다. 뒤쫓는 위병을 경계하며 한창 가고 있는데, 진태가 한 무리의 위병을 이끌고 덮쳐왔다. 그때 강유의 군사는 지 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리저리 부딪히며 에움에서 빠져나오려고 애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촉의 탕구장군 장의가 강유의 위급을 듣고 수백 기를 휘몰아 구 하러 왔다. 그 덕분에 강유는 간신히 적병을 뚫고 빠져나올 수 있었 다. 그러나 장의는 끝내 어지러이 쏘아대는 위병의 화살 아래 죽었 다. 겨우 목숨을 건져 한중으로 돌아온 강유는 제갈량의 전례를 본 받아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자신을 후장군(後將軍)으로 낮추고 대장 군의 일만 맡아볼 수 있도록行大將軍事]빌었다.

서촉에서 불어온 불길은 껐으나 위의 내정은 아직도 평온하지가 못했다. 안으로 또 한차례의 거센 불길이 그 불씨를 키우고 있었으 니, 그것은 다름 아닌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제갈탄이었다.

제갈탄은 낭야군 남양 사람으로 제갈량의 집안 조카였다. 일찍부 터 위나라를 섬겼지만 제갈량의 조카라는 것 때문에 빛을 보지 못하 다가 제갈량이 죽은 뒤에야 겨우 중임을 맡게 되었다.

그 무렵 제갈탄은 고평후로 양회(兩) 지방의 병마를 도맡아 거 느리고 있었다. 관구검과 문흠을 칠 때 세운 공 때문에 사마사가 그 를 높여 대장군을 삼은 뒤 사납고 날래기로 이름난 그 지방의 군마 를 맡긴 터였다. 그러나 그는 사마씨의 사람이라기보다는 조위(曹 魏)의 충신이라는 편이 옳았다.

사마소는 형을 이어 위의 대권을 잡자 은근히 딴마음이 일었다. 일을 벌이기 전에 지방에 흩어져 있는 장수들의 속부터 떠보기로 하 고, 심복 가충(賈忠)을 지방으로 보냈다.

가충은 먼저 회남으로 가서 제갈탄을 찾아보고 사마씨가 위로부 터 선위를 받으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물었다. 제갈탄은 그런 가충 을 꾸짖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나는 위의 국록을 먹은 사람으로, 만약 조정에 무슨 일이 난다면 이 한목숨을 바쳐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뿐이다!”

가충으로부터 그 말을 전해 들은 사마소는 가만히 양주자사 악침 에게 밀서를 보내 제갈탄을 해칠 계책을 꾸미는 한편 제갈탄에게는 사공 벼슬을 내려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게 자신을 해치기 위함인 걸 금세 알아차린 제갈탄은 먼저 사마소의 사자를 문초해 악침이 거기 관련된 걸 알아낸 다음, 불시에 양주를 들이쳐 악침을 죽이고 반기를 높이 들었다.

제갈탄은 양회의 군사 십여만과 양주에서 항복한 사만을 조련시 키는 한편 동오에도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그때 동오의 대권 은 손준에게서 그의 종제되는 손침(孫)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손침은 제갈탄의 청을 받자 전역(全懌)과 전단(端)을 대장으로 삼고, 주이(異)와 당자(唐)를 선봉으로 세운 뒤, 문흠을 길잡이로 딸려 칠만 대군을 제갈탄에게 보냈다. 거기 힘을 얻은 제갈탄은 곧 사마소를 칠 채비를 갖춤과 아울러 위주 조모에게 표문을 올려 군사 를 일으킨 까닭을 밝혔다.

사마소도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천자와 태후를 졸라 친정(親征) 의 형식으로 밀고 내려왔다. 낙양과 장안의 군사 이십육만에 정남장 군 왕기(基)는 정선봉으로, 안동장군 진건은 부선봉으로 세우고 감군 석포(苞)와 연주자사 주태(周太)를 좌우군으로 삼은 대군이 었다.

사마소의 군사가 먼저 창칼을 맞대게 된 것은 동오의 군사들이었 다. 동오의 선봉 주이는 위의 왕기가 맞붙었으나 세 합이 못 돼 몰 리게 되는 바람에 오병은 대패해 오십 리나 쫓기게 되었다.

제갈탄이 문흠, 문앙 두 부자와 수만의 날랜 군사를 이끌고 성을 달려 나와 그런 오병과 세력을 합쳤다. 그러나 오병이 대의보다는 이득을 구하러 온 데 착안한 종회의 계책에 떨어져 제갈탄은 군사만 잃고 수춘성에 도로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거기다가 도우러 온 오병도 손침의 조급함과 포악함 때문에 제갈탄에게는 끝내 이렇다 할 힘이 돼주지 못했다. 겨우 우전이 이끈 오 병만 명이 수춘성으로 들어갔을 뿐, 주이는 몇 번 진 죄로 손침에게 목이 달아나고, 손침이 돌아가면서 남긴 전위禕)는 손침이 두려 워 오히려 위에 항복해버렸다. 뿐만 아니라, 전위는 다시 수춘성 안 에 있는 아버지 전단과 숙부 전역에게까지 글을 보내 달랬다. 거기 넘어간 전역과 전단이 수천 오병과 함께 위에 항복하고 마니 성안의 제갈탄은 더욱 외로워졌다.

형세가 외로워지자 수춘성 안의 인심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먼저 모사 장반과 초이(焦)가 제갈탄에게 속전속결을 권하였다가 제갈탄이 받아들여주지 않자 성을 넘어 위의 진채로 달아났다. 그다 음은 문앙과 문호 형제였다. 그 아비 문흠 역시 제갈탄에게 급히 싸 우기를 권하다 목이 달아나자 그들 형제는 성을 넘어가 사마소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문앙 형제가 위의 벼슬을 받고 그걸 자랑하며 성 안을 보고 항복을 권하니 제갈탄의 군사들은 더욱 마음이 흔들렸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사마소가 일제히 성을 공격하자 북문을 지키던 장수 증선()이 문을 열어 위병을 맞아들였다.

제갈탄이 겨우 남은 수백 군사로 맞서보려 했으나 될 일이 아니 었다. 위장 호준을 만나 그 한칼에 목을 잃었다. 볼만한 싸움을 벌이 다 죽은 것은 오히려 구원하러 왔다가 성안에 갇혔던 오장 우전(于 詮)이었다. 우전은 항복을 권하는 왕기를 성난 소리로 꾸짖었다. 

“명을 받들어 남의 어려움을 구하러 왔다가 어려움을 구해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적에게 항복하란 말이냐? 내 어찌 차마 그런 의롭지 못한 짓을 하리!”

그리고 투구를 벗어던지며 다시 외쳤다.

“사람이 한번 나서 싸움터에서 죽는 것도 얼마나 복된 일이냐!”

제갈탄을 따르던 졸개들도 죽음 앞에서 씩씩했다. 항복만 하면 살 려준다는데도 수백 명이 모두 항복 대신 목을 늘여 칼을 받았다.

위가 천자까지 나서서 남쪽에서 싸우는데 이 그대로 있을 리 없었다. 강유는 제갈탄이 사마소에 맞서 의병을 일으키고 동오의 손 침까지 거들어 위주(魏)가 몸소 싸움터로 나갔다는 말을 듣자 몹 시 기뻐했다.

“이번에는 반드시 공을 이룰 수 있겠구나!”

그렇게 소리치며 곧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위를 칠 것을 허락해 달라고 아뢰었다.

중산대부(中

국론(國論, 원래는 仇國論)」이란 글 초주가

한 편을 지어 강유에게 보내며 출정을 말렸다. 그 내용은 대강 이러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옛날 약하면서 강한 자를 이길 수 있었던 사람은 어떤 술수가 있었던가? 내가 말했다. ‘큰 나라에 살면서 걱 정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태만함이 많았고, 작은 나라에 살며 걱정 이 많은 사람은 언제나 잘 하려고 애쓴다. 잘하려고 애쓰면 곧 살리 는 다스림 []이 되는 것은 이치의 마땅함이다. 그러므로 주나라 문왕은 백성을 길러 작은 나라로 큰 나라를 얻을 수 있었고, 월왕(越 王) 구천은 무리를 불쌍히 여겨 약한 나라로 강한 나라를 망하게 하 였으니 이게 바로 그 술수이다.

어떤 사람이 또 물었다. ‘지난날 초나라는 강하고 한나라는 약해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나누기로 약정하였으나, 장양(張良)은 백성들 의 뜻이 이미 정해지면 다시 움직이기 어렵다 하여 군사를 이끌고 항우를 뒤쫓았고, 마침내는 항씨를 망하게 하였다. 어찌 반드시 문 왕이나 구천처럼 하여야만 하는가? 내가 대답했다. ‘상(商, 은나라 와 주나라 때에는 임금과 제후를 세상이 모두 존중하였고, 임금과 신하 사이도 오래고 굳건하였다. 그때에는 비록 한고조(漢高祖)가 있다 해도 어찌 칼에 기대 천하를 빼앗을 수 있었겠는가. 진나라가 제후를 없애고 지방 수령을 둔 뒤 백성들은 피폐하고 진나라의 부역 은 모질어 천하가 흙더미 무너지듯 하자, 이에 호걸들이 아울러 일 어 서로 다투게 되었다. 그러하되, 지금은 우리나 저들이나 모두 나 라를 물려주어 세대가 바뀌었다. 이미 진나라 말기처럼 세상이 들끓 던 때가 아니라, 육국(六國) 천하를 나누어 차지하고 있던 때와 같은 데가 있다. 그러므로 주 문왕이 될 수는 있어도 한고조가 되기는 어 렵다. 때가 이르러서야 움직이고, 운세에 맞은 뒤에야 일어난 까닭 에 탕왕과 무왕의 군사는 다시 싸울 것도 없이 이길 수 있었다. 진실 로 백성들의 수고로움을 무겁게 여기고 때를 고름에 깊이 살폈다 할 만하다. 끝내 무(武)를 다하고 정벌을 함부로 하다가는, 불행히도 어 려움을 만나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마땅히 꾀해볼 바 가 없게 되고 말리라’


그때 이미 촉은 내관 황호(黄皓)의 장난질로 안에서 깊이 썩어 들 어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변방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강유가 큰 나라인 위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려 하니 충성되고 헤아림 깊은 대신으로 서는 그냥 볼 수가 없어 쓴 글이었다.

하지만 강유는 보고 나서 성부터 냈다.

“이것은 썩어빠진 선비의 글이다!”

그렇게 소리치고는 기어이 위를 칠 군사를 일으켰다. 새로 얻은 장서蔣)와 부첨(傅) 두 장수를 앞세우고 이번에는 장성(長城) 쪽으로 군사를 냈다.

장성을 지키는 위의 장수는 사마소의 친척 형뻘인 사마망(司馬望) 이었다. 이붕(鵬)과 왕진(眞) 두 장수와 성안의 군사들을 이끌고 성밖 이십리 되는 곳에 진을 쳤다. 그러나 사마망은 강유의 적수가 아니었다. 한 싸움에 두 장수를 모두 잃고 성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강유는 그런 사마망을 뒤쫓아 급하게 성을 들이쳤다. 그런데 막 성 을 떨어뜨리려 할 즈음 뜻밖의 구원병이 달려왔다. 위장 등애 부자 였다. 한바탕 싸움이 있었으나 어느 쪽도 크게 이기지는 못하였다. 강유는 장성을 뺏지 못한 채 다시 등애와 맞서게 되었다.

등애는 자기 아들 등충을 성안으로 들여보내며 사마망에게 싸우 지 말고 굳게 지키기만 하라 일렀다. 그러다 보면 남쪽의 싸움이 끝 나 관중의 군사들이 몰려올 것이고, 강유는 오히려 양식이 떨어져 돌아갈 것인데, 그때 강유를 치자는 뜻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강유는 등애에게 급하게 싸움을 걸었다. 등애는 금세 나와 싸울 듯하면서도 이 핑계 저 핑계로 싸움을 하루 이틀 미루었다. 그렇게 대여섯 번이나 싸움을 미룬 걸 보고서야, 등 애의 속셈을 알아차린 부첨이 강유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등애가 무슨 속임수를 쓰는 듯하니 방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강유도 그제야 등애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관중의 군사가 오기를 기다려 강유의 군사를 삼면에서 에워싸고 들이칠 생각임에 틀림없 었다. 이에 강유는 오히려 손침과 연결해 거꾸로 등애를 골탕먹일 궁리를 하고 있는데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사마소가 수춘을 들이쳐 제갈탄을 죽이고, 도우러 왔던 오병에게 는 모두 항복을 받았습니다. 사마소는 우선 군사를 돌려 낙양으로 돌아갔으나 머지않아 이곳 장성을 구하러 올 것이라 합니다.”

그 소식에 놀란 강유는 곧 군사를 물려 돌아갔다. 사마소의 대군 이 이르면 당해내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그러나 등애가 반드시 뒤쫓 을 것이라 여겨 좁은 길목이나 험한 산길마다 뒤쫓는 적을 막을 준 비를 하게 했다.

염탐하는 군사가 촉병이 물러난 걸 등애에게 알렸다. 그러나 등애 는 어찌 된 셈인지 서둘러 뒤쫓는 대신 껄껄 웃으며 말했다.

“강유는 사마 대장군이 오실 것을 알고 먼저 군사를 물린 것이니 굳이 뒤쫓을 것은 없다. 오히려 함부로 뒤쫓다가는 그 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군사를 풀어 가만히 병을 뒤따르며 살펴보게 했다. 과연 등애가 본 대로였다. 촉병은 물러가면서 낙곡(谷) 좁은 길목에 장 작과 마른 짚 검불을 쌓아두고 있었다. 위병이 뒤쫓아오면 거기 불 을 질러 화공으로 나올 작정이었던 듯했다.

여러 장수들이 그런 등애의 밝은 눈에 한결같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사마소도 대군을 움직일 필요 없이 병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자 몹시 기뻐했다. 그게 모두 등애의 공임을 알고 크게 상을 내렸다. 한편 동오의 손침은 자신이 제갈탄을 구하러 보냈던 당자와 전단, 전역 등이 모두 위에 항복했다는 말을 듣자 몹시 성이 났다. 당자와 전단의 일족을 모조리 잡아들여 죽이게 했다. 이들이 위에 항복하게 된 데는 누구보다 그 자신의 허물이 컸건만 그쪽으로는 눈길 한번 돌리는 법이 없었다.

그때 오주 손량(孫亮)은 나이 열일곱이었다. 사람이 총명하고 영 리해 포악한 손침을 싫어했으나 그 일가가 나라의 병권을 모두 잡고 있어 어찌할 수가 없었다. 틈만 엿보다가 어느 날 장인이며 황문시 랑인 전기(紀)를 불러 손침을 죽이라는 밀조를 내렸다.

전기는 장군 유승(劉丞)과 함께 손침을 죽이려 일을 꾸몄다. 그러 나 그 어머니가 손침의 누이라 일이 이뤄지기 전에 먼저 손침에게 알려지고 말았다. 오의 국운이 그것밖에 안 되었음이리라.

손침은 전기와 유승 및 그 집안의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 인 뒤, 손량을 임금 자리에서 내어쫓았다. 그때 상서 환의桓)가 손침에게 맞서 보았으나 손침의 칼에 의로운 피를 묻히고 죽었을 뿐 이다.

손침이 손량 대신 오주로 세운 것은 야왕 손휴(孫休)였다. 손휴 는 손권의 여섯째 아들로 대위를 이어받자 손침을 승상에 형주목을 겸하게 했다. 또 백관에게도 차례로 벼슬과 상을 내린 뒤 조카 손호 (孫晧)에게도 오정후(烏程侯)를 내렸다.

손침은 자신이 승상으로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 후(侯)가 다섯에 금병(禁兵)의 대장들이 또한 모두 피붙이였다. 그 권세가 임

금인 손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손침은 갈수록 방자해지다가 그해 겨울 대단찮은 일로 손휴에게 감정을 품고 좌장군 장포(張布)를 찾아 찬역의 뜻을 밝혔다. 장포가 그 말을 손휴에게 일러바치자 오주 손휴는 놀랐다. 거기다가 며칠 뒤 손침이 정말로 군사를 움직이려는 기미를 보이자 한층 급해진 손 휴는 노장(老) 정봉(丁奉)을 불러 매달렸다.

“폐하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신에게 나라의 해근(根) 을 뽑아 없앨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

정봉은 그렇게 대답하고 납일(臘日, 동지 뒤 셋째 술일. 종묘에 제사를 지냄)인 다음 날을 잡아 일을 벌였다. 금군(軍)을 자기 형제가 장악 하고 있다는 것만 믿고 아무 경계 없이 궁궐로 들어온 손침을 불시 에 잡아 목 베 죽이고 삼족을 멸했다.

오주 손휴는 손침을 죽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일가붙이에 의해 저질러진 모든 잘못을 바로잡았다. 손침 및 손준의 손에 걸려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모두 누명을 벗고, 쫓겨났던 이들을 다시 불 러들이니 마치 나라가 새로워지는 듯했다.

촉의 후주 유선이 사신을 보내 그 일을 치하했다. 오에서도 설후 (薛)를 사신으로 보내 답례했다. 설후가 돌아오자 손휴가 촉의 사 정을 물었다. 설후가 본 대로 전했다.

“중상시(中) 황호란 자가 권세를 잡고 있는데 공경(卿)이란 자들은 모두 아첨만 일삼고 있었습니다. 조정에서는 곧은 말을 들을 수가 없고 백성들은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습니다. 마치 참새나 제비가 처마 끝에 살면서 큰집]이 불탈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비 슷했습니다.”

바로 그 무렵 촉의 내정을 잘 보고 하는 소리였다.

“만약 제갈무후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어찌 그런 꼴이 났겠는가!” 손휴는 그렇게 탄식하고 국서(國書)를 써서 성도에 보냈다. 사마소가 오래잖아 위나라를 찬탈하고 그 위엄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촉과 오를 침범할 것이니 서로 간 정신 차려 준비하고 있자는 내용이었다. 강유는 그런 오나라의 국서를 받자 지난번에 깎인 위신 을 되찾을 때가 왔다 여겼다. 다시 후주에게 표문을 올려 위를 치러 가겠다고 나왔다.

후주가 마지못해 허락하자 대장군 강유는 이듬해 일찍 군사를 일 으켰다. 촉한 경요(景耀) 원년의 일이었다. 선봉은 요화와 장익이요, 왕함(王)과 장빈(張斌)은 좌장군으로, 장서와 부첨은 우장군으로 세운 뒤 하후패와 함께 이십만 군사를 몰아 한중으로 나아갔다. 하후패와 의논 끝에 강유가 잡은 길은 기산 쪽이었다. 기산 어귀 에 이른 강유는 일찍부터 농우의 군사를 이끌고 그곳을 지키던 등애 와 다시 맞부딪치게 되었다.

그때 등애는 언젠가 촉병이 다시 올 줄 알고 모든 채비를 갖춰놓 고 기다렸다. 곧 병이 진채를 칠 만한 곳에 미리 땅굴을 파놓고 촉 병이 거기 자리 잡기만 하면 그걸 이용해 안팎에서 들이칠 작정이 었다.

등애는 촉병이 정말로 자신이 점찍어 둔 곳에 진채를 내리자 됐 다. 싶었다. 밤을 틈타 땅굴로 사람을 보내, 안팎에서 병의 진채를 들이쳤다. 그러나 강유가 침착하게 대응하는 바람에 첫 싸움에서는 크게 이기지 못했다.

이에 등애는 강유와 진법으로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도리어 강유 의 장사권지진(長蛇捲地陣)이란 진법에 말려 위병은 기산의 진채만 빼앗기고 말았다.

그 뒤로도 등애는 한편으로는 정면으로 싸우고, 한편으로는 기습 을 노렸으나 싸움은 영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때 등애와 함께 싸 우던 사마망이 내놓은 계책이 촉의 어지러운 내정을 이용한 반간계 (反)였다.

그걸 받아들인 등애는 양양 사람 당균(黨均)에게 뇌물을 넉넉히 주고 촉의 중상시 황호를 매수하게 했다. 몰래 촉으로 숨어든 당균 은 황호에게 금은보석을 바리바리 져다 바치고, 강유가 후주를 원망 해 오래잖아 위에 항복할 것이란 말을 아뢰게 했다. 그리고 아래로 는 백성들 사이에도 유언비어를 퍼뜨려 똑같은 말이 떠돌게 하니, 예전에 공명이 사마의를 내쫓기게 할 때와 비슷했다.

황호가 곁에서 두 번 세 번 일러바치는 데다 성도 백성들까지 강 유가 반역하려 한다는 말을 하자 후주는 깜짝 놀랐다. 곧 사람을 보 내 강유에게 돌아오라고 이르게 했다.

강유가 영문도 모르면서 군사를 돌리려 하는데 요화가 나서서 말렸다.

“장수가 밖에 있을 때는 비록 임금의 명이라도 듣지 않을 수 있습 니다. 조서가 있다고 해서 가볍게 군사를 움직여서는 아니 됩니다.” 

그러나 장익은 생각이 달랐다. 요화의 말에 고개를 가로젓고 나섰다.

“의 백성들은 대장군께서 해마다 군사를 움직이시는 데 원망을 품고 있습니다. 이번에 마침 이겼으니 그 틈을 타 군사를 돌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돌아가 인심을 가라앉힌 뒤에 따로 날을 잡아 일을 꾀해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강유도 장익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곧 군사를 서로 돌리고 요화와 장익은 후군이 되어 뒤쫓는 위병을 막게 했다. 그 돌아가는 진용이 얼마나 단단하고 빈틈없던지 등애조차 감히 뒤쫓지 못했다.

성도로 돌아간 강유는 후주를 찾아뵙고 불러들인 까닭을 물었다. 후주에게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우물쭈물 핑계를 대다가 다만 한 중으로 돌아가 위에 변고가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강유는 탄식하며 한중으로 돌아갔다.

강유가 돌아가자 이번에는 사마소에게 촉을 칠 마음이 생겼다. 그 러나 새로 세운 위주 조모가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 함부로 위를 비 울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중호군 가충 등이 사마소에게 위주의 잠 룡시(詩, 몸을 숨기고 때를 기다린다는 내용의 시)를 고자질하니 사마 소와 위주 조모의 사이는 절로 벌어졌다.

위(魏) 감로(甘露) 오년 사월(서력 기원후 253년 4월) 사마소는 조 조를 본받아 위주에게 구석을 청했다. 내심 싫으면서도 사마소의 위 세에 눌려 하는 수 없이 사마소에게 구석을 내린 조모는 분했다. 시 중 왕침(王), 상서 왕경(經), 산기상시 왕업(業)세 사람과 의논 한 뒤 사마소를 죽이려 들었다. 그러나 이름뿐인 천자라 힘이 없어, 기껏 끌어모은 게 전중시위처럼 가까이 부리는 군사들과 창두蒼頭) 관동) 같은 궁중의 일꾼 삼백 명이었다.

왕경이 그런 조모를 붙들고 말렸으나 조모는 듣지 않고 사마소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궁궐문을 나서기도 전에 사마소의 심복인 가충 (賈), 성제(濟) 등이 거느린 정병과 만나 싸움 중에 성제에게 죽 고 말았다.

뒤늦게 그 일을 들은 사마소는 은근히 놀랐다. 한편으로는 태후를 구슬려 죽은 조모의 죄상을 천하에 선포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임금을 죽인 죄를 오로지 성제에게 덮어씌워 그 삼족을 모두 없앴다. 이때 사마소의 심복들이 바로 위를 넘겨받기를 권했으나 사마소 는 듣지 않았다. 조조를 본떠 그 일은 그 아들 사마염에게 맡기기로 하고, 자신은 여전히 조씨(曹氏)를 세워 천자로 삼았다.

사마소가 조모를 대신해 세운 게 조조의 손자요 연왕(燕王) 조우 (曹)의 아들인 조황(曹)이었다. 그가 바로 위의 마지막 임금인 원제(元)가 된다.

위의 그 같은 정변은 다시 강유에게 한 기회로 여겨졌다. 오나라 에 사신을 보내 함께 군사를 일으켜 위를 치자 하고 자신은 십오만 대군을 일으켰다.

강유는 요화와 장익을 선봉으로 삼아 요화는 자오곡을 취하라 하 고 장익은 낙곡을 취하라 했다. 그리고 스스로는 야곡으로 길을 잡 아 한꺼번에 세 갈래 군마를 몰고 기산으로 나아갔다.

기산을 지키던 등애는 강유가 나오자 맞을 채비를 했다. 그때 거 느리고 있던 장수 중에 왕관이란 이가 있었다. 등애에게 거짓 항복의 계교로 강유를 꺾자고 권했다. 곧 스스로를 지난번 위주 조모가 죽을 때 조모 편에 섰다가 함께 죽은 왕경의 조카라 하여 강유에게 항복을 믿게 한 뒤, 틈을 보아 안팎에서 호응해 강유를 사로잡자는 계교였다.

등애는 그 계교를 따랐으나 그걸 알아차린 강유가 오히려 거꾸로 이용하는 바람에 대패하고 말았다. 강유의 복병에 걸려 등애 자신이 보졸의 옷을 입고 겨우 목숨을 건져 달아나야 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왕관이 싸움의 방향을 이상하게 이끌어갔다. 거짓 항복으 로 촉군 뒤에 있다가 등애가 대패했다는 소리를 듣자 위로 달아나는 대신 한중으로 들어갔다. 강유는 혹시라도 한중이 어찌 될까 두려워 군사를 한중으로 돌렸다. 그 바람에 싸움에는 이겼어도 아무것도 얻 은 것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형국이 되고 말았다.

왕관은 뒤쫓아온 촉군이 사방으로 에워싸고 공격하자 달아나다 흑룡강에 뛰어들어 죽었다. 나머지 군사들은 모두 강유에게 사로잡 혀 산 채로 땅에 묻혔다.

강유가 공명의 뜻을 이어 여덟 번째로 대위전(對魏戰)을 일으킨 것은 촉한(蜀漢)의 경요 오년 시월이었다. 그동안 군마를 기르고 군 량을 쌓은 강유는 후주에게 표문을 올리고 삼십만 대군을 일으켜 조 양으로 나아갔다.

이번에도 강유를 맞아 싸우게 된 위장(魏將)은 등애였다. 강유가 조양으로 온다는 말에 다른 장수들은 그게 허장성세라 주장했다. 조 양으로 나오는 체하면서 기산을 치려 함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등 애는 조양을 근거로 둔전(屯田)을 하며 장구한 계책을 세우려는 강 유의 뜻을 헤아리고 빈틈없는 채비를 했다.

그 바람에 싸움은 처음부터 촉에 이롭지 못했다. 전부를 맡은 하 후패는 조양성을 뺏으러 갔다가 등애의 복병에 걸려 죽었다. 사마망 이 성문을 열어두고 빈 성같이 꾸며 하후패를 꾀어들인 뒤 감추어둔 군사들로 하여금 화살을 퍼붓게 해 하후패와 오백 촉군을 몰살시켜 버린 까닭이었다.

하후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슬퍼하던 강유도 그날 밤 이경 무렵 등애의 야습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데다 사마망까지 거들어 좌 충우돌 죽기로 싸웠으나 등애에게 몰려 이십 리나 쫓겨난 뒤에야 겨 우 군사를 수습할 수 있었다. 그때 장익이 강유에게 권했다.

“위병들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기산은 틀림없이 비어 있을 것입 니다. 장군께서는 군사를 정돈해 조양과 후하侯河)를 들이치고 계 십시오. 저는 가만히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기산에 있는 위군의 진 채를 쳐부순 뒤 장안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강유도 그 계책이 옳다 싶어 그대로 따랐다. 곧 장익에게 군사 한 갈래를 떼어주고, 자신은 남은 군사로 등애의 대군을 조양에 붙들어 두었다.

멋모르고 그런 강유와 며칠을 싸운 등애는 퍼뜩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첫 싸움에 지고도 오히려 급하게 싸움을 거는 걸 보고 촉군 의 숨겨진 계교를 짐작했다. 아들 등충에게 그곳을 맡기고 자신은 기산을 구하러 달려갔다.

등애가 없는 걸 감추기 위한 위군 쪽의 활발한 움직임이 이번에 는 강유에게 의심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그 갑작스런 움직임에 속임 수가 있는 것 같아 살피다가 문득 등애가 없어진 걸 알았다. 강유는 등애가 틀림없이 장익의 계책을 눈치 채고 기산으로 달려갔다고 보아 자신도 기산으로 달려갔다.

강유가 기산에 이르렀을 때 먼저 간 장익은 뜻밖에 나타난 등애 의 공격으로 한창 위급함에 빠져 있었다. 강유가 그런 등애의 등 뒤 를 후려쳐 전세는 곧 뒤집혔다. 등애는 오히려 장익과 강유에게 에 워싸여 위태로운 지경에 떨어지고 말았다.

다행히 그 싸움에서는 겨우 몸을 빼낼 수 있었으나 등애는 그 뒤 로도 계속해 강유에게 몰리게 되었다. 기산 영채 깊숙이 들어앉아 굳게 지킬 뿐 싸우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도 촉의 운세였는지, 뜻밖에도 성도에서 하루에도 세 번이나 잇따라 조서가 내려와 강유를 불러들였다. 어리석고 어두운 후주와 간악한 환관 황호가 손발이 맞아 해놓은 한심한 짓거리였다. 그때 촉의 우장군에 염우閻란 자가 있었다. 아무런 공도 없이 황호에게 뇌물을 써서 대장군까지 되었는데, 벼슬이 오르자 슬며시 딴생각이 났다. 강유의 자리를 노려 황호에게 뇌물을 듬뿍 안기자 황호가 후주에게 달려가 아뢰었다.

“강유는 위와 여러 번 싸웠으나 이렇다 할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 다. 염우로 하여금 강유를 대신해 대장군으로 세우는 게 좋을 듯합 니다.”

이에 황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는 후주가 조 서를 내려 강유를 불러들였다.

한중으로 돌아간 강유는 그곳에 군마를 쉬게 하고 자신은 조정에서 온 사명(命)과 함께 성도로 갔다. 유리한 싸움을 그만두어야 했던 아쉬움에다 자신을 불러들인 까닭이 궁금해 후주에게 뵙기를 청했다. 그러나 열흘을 두고 기다려도 후주가 만나주지를 않았다.

강유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하루는 동화문에서 비서랑 극정을 만나자 가만히 물어보았다.

“공은 폐하께서 나를 불러들이신 까닭을 아시오?”

극정이 가볍게 웃으면서 아는 대로 털어놓았다.

“장군께서 여태까지 그걸 모르셨습니까? 황호의 짓입니다. 염우 로 하여금 장군의 자리를 대신케 해서 공을 세우게 하려고 장군을 불러들이신 거지요. 그러나 위장 등애가 하도 군사를 잘 부린다 하 니 감히 염우를 대장으로 내보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강유는 크게 노했다. 주먹을 부르쥐고 이를 갈며 소리쳤다.

“내 반드시 이 간사한 내시 놈을 죽이고 말겠다!”

극정이 깜짝 놀라 그런 강유를 말렸다.

“대장군께서는 무후(武侯)의 뒤를 이으시어 맡으신 바 일이 무겁 기 그지없으신 터에 어찌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십니까? 만약 폐하 께서 장군의 뜻을 받아들여 주시지 않는다면 도리어 좋지 못한 일만 생길 것입니다.”

강유도 그 말을 듣자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노기를 억누르며 극정에게 감사했다.

“선생의 말씀이 옳은 듯하오. 새겨듣겠소이다.”

그 다음 날이었다. 그날도 후주는 황호와 더불어 후원에서 술타령 을 하고 있었다. 기다리다 못한 강유가 몇 사람을 데리고 바로 후원으로 들어갔다.

강유가 뛰어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황호는 놀랐다. 얼른 호수 뒤에 붙은 작은 산[湖山] 곁에 몸을 숨겼다. 뒤이어 들어온 강유가 후주에 게 절을 올린 뒤에 울며 아뢰었다.

“신은 기산에서 한창 등애를 에워싸고 몰아대는 중이었습니다. 그 런데 폐하께서는 잇달아 세 사람이나 보내시어 신을 불러들이셨습 니다. 그러신 폐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실로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후주에게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꿀 먹은 벙어 리처럼 한참이 지나도 입을 열지 못했다. 강유가 다시 아뢰었다. 

“황호가 간교하게 나라의 권세를 오로지하고 있으니 이는 후한의 십상시 같은 무리올시다. 폐하, 가까이로는 장(張)을 살피시고 멀리로는 조고(趙高)를 돌이켜보옵소서. 이런 무리는 빨리 죽여야만 조정이 맑고 평온해질 것이며, 중원도 그 뒤라야 되찾을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자 후주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황호는 그저 내 뒤를 따라다니며 잔심부름이나 하는 하찮은 내 시외다. 설령 그에게 나라의 권세를 통째 맡긴다 해도 그걸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는 위인이오. 지난날 동윤(董允)이 매양 황호에게 이 를 가는 게 알 수 없더니, 이제는 또 경이 왜 이러시오? 어째서 꼭 황호를 죽여야 한다는 게요?”

“폐하께서 오늘 황호를 죽이시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큰 화가 미 칠 것입니다.”

강유는 그렇게 잘라 말하며 거듭 황호를 죽이자고 우겼다. 그러나 후주는 조금도 그런 강유의 말을 들어주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말로 강유를 달랠 뿐이었다.

“어여삐 여기는 것은 살리려 애쓰고, 미워하는 것은 죽이려고 애 쓴다[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더니 정말 로 그렇구려. 경은 어찌하여 한낱 내시도 너그럽게 용납하지 못하시 오?”

그러더니 곁에 있는 신하를 시켜 호숫가 동산 그늘에 숨은 황호를 불러내게 하였다.

“대장군께서 크게 노여움을 품으신 듯하다. 네 스스로 대장군께 빌어라.”

후주가 그렇게 말하자 황호는 강유 앞에 엎드려 울며 빌었다. 

“저는 다만 폐하를 따르며 잔심부름이나 할 뿐 나랏일에는 간섭 한 적이 없습니다. 장군은 다른 사람의 말만 듣고 저를 죽이려 하지 마십시오. 제 목숨은 장군의 손에 달렸으니 부디 가엾게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황호는 그렇게 말하고 머리를 땅에 찧으며 줄줄 눈물을 흘렸다. 이미 후주가 나서 용서를 권한 데다 황호까지 그렇게 나오니 강유도 어쩌는 수가 없었다. 분한 마음을 억누르며 후원을 빠져나갔다. 강유는 그 길로 극정을 찾아가 대궐 안에서 있었던 일을 남김없

이 털어놓았다. 듣고 난 극정이 쓰게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장군께 화가 머지않아 닥칠 듯합니다. 그리고 만약 장군이 위태롭게 되면 이 나라도 따라 망할 것입니다.”

“그럼 이제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선생께서는 부디 내게 내한 몸도 보살피고 나라도 지킬 수 있는 계책을 일러주시오.”

강유가 극정에게 매달리듯 계책을 물었다. 각정이 한참 생각하다 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농서에 답중(中)이란 곳이 있는데 땅이 매우 기름집니다. 장군 께서는 어찌 지난날 무후께서 둔전하시던 일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천자께 말씀을 올려 답중에 자리 잡고 둔전을 하도록 하십시오. 그 리하면 첫째로는 밀을 얻어 군량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요, 둘째로 는 농우의 여러 고을을 엿볼 수 있으며, 셋째로는 위나라 사람들이 감히 한중을 넘보지 못할 것이고, 넷째로는 장군이 밖에서 병권을 쥐고 있어 딴 사람이 해치려 들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화 를 피하고 장군의 한 몸과 나라를 아울러 지키는 계책이 되지 않겠 습니까?”

그 말을 듣자 강유도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기쁜 얼굴로 극정에 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선생의 말씀은 실로 금옥보다 귀하다. 꼭 그대로 따르겠소.” 

뿐만 아니었다. 다음 날 후주에게 표문을 올리고 답중에 둔전하여 공명이 하던 대로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황호에게만 정을 쏟고 있 던 후주는 거북스런 강유가 스스로 멀리 떠나가 있겠다 하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못 이긴 체 강유의 청을 들어주었다.

한중으로 돌아간 강유는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가 여러 번 군사를 냈으나 번번이 군량이 모자라 공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나는 팔만 군사를 이끌고 답중으로 가서 밀 씨앗을 뿌리고 둔전하며 천천히 일을 꾀해보겠다. 그대들은 오랜 싸움에 힘들 고 괴로웠을 것이니 군사를 정돈해 돌아가 한중이나 잘 지키도록 하 라. 설령 위병이 온다 해도 천리나 군량을 나르고 험한 산과 언덕을 넘어야 하기 때문에 지쳐빠질 것이고, 그리되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틈을 타 뒤쫓으며 치면 못 이길 리 없으니, 모두 마음에 새겨듣고 그대로 따르라.”

그리고 호제(胡濟)에게는 한수성을, 왕함(王)은 낙성을, 장빈(蔣 斌)은 한성을 지키게 하고 장서(蔣舒)와 부첨에게는 나머지 관애(關 隘)를 맡겼다.

모든 장수들이 각기 맡은 곳으로 떠난 뒤에 강유도 팔만 군사를 이끌고 답중으로 갔다. 그리고 싸움을 서두는 대신 밭을 갈고 씨를 뿌리며 멀리 내다보고 하는 싸움 준비에 들어갔다.

강유가 답중에 둔전하여 길을 따라 마흔 곳에 영채를 세우고 긴 뱀 같은 진세를 펼쳤다는 말을 들은 등애는 놀랐다. 곧 세작을 풀어 강유가 자리 잡은 곳의 지형을 살피고 그걸 도본으로 그려오게 했 다. 강유의 뜻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며칠 안 돼 세작들이 도본을 그려왔다. 그걸 본 등애는 비로소강 유의 뜻이 원대함을 알았다.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될 일이라 여겨도 본과 함께 그 사실을 조정에 알렸다. 대략 위의 경원(元)사의 일이었다. 촉으로는 염흥 원년, 공명이 죽은 지 서른한 해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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