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14화 : 나뉜 것은 다시 하나로
나뉜 것은 다시 하나로
사마염이 위의 천하를 빼앗았다는 소문은 오주 손휴(休)의 귀에 도 들어갔다. 손휴는 사마염이 틀림없이 오를 치러 올 줄 알고 걱정 하던 나머지 병이 들었다.
자리에 누운 지 여러 날이 지나도록 일어나지 못하던 손휴가 어 느 날 갑자기 승상 복양훙(濮陽興)을 궁궐로 불러들였다. 남은 목숨 이 길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고 뒷일을 당부하기 위함이었으나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오주는 복양흥의 팔을 잡고 손가락으로 태자 손 완()을 가리킬 뿐 말 한마디 못 남기고 숨이 끊어졌다.
침전을 나간 복양흥은 여러 벼슬아치들과 함께 태자 완을 임금으 로 세울 의논을 했다. 그때 좌전군 만욱이 나서서 말했다.
“태자는 너무 어려 정치를 맡아 할 수 없소이다. 오정후(烏程侯) 손호(孫皓)를 세우는 게 나을 듯하오.”
“그렇소. 호(皓)는 재주와 아는 게 많고 결단력이 있으니 제왕감이라 할 만하오.”
좌장군 장포(張布)도 만욱을 거들어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손휴 로부터 손짓으로나마 당부를 받은 복양흥은 얼른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궁궐의 어른인 주태후(朱太后)를 찾아보고 어떻게 할까를 물었다.
“나는 일찍 남편 여읜 아낙에 불과한데 어찌 나랏일을 알겠소? 경 들이 잘 생각해서 세우도록 하시오.”
주태후가 그런 말로 결정을 복양흥에게 미루었다. 이에 복양흥도 손호를 세워 오주로 삼기로 뜻을 굳혔다.
손호의 자는 원종(元宗)으로 손권의 태자인 손화(和)의 아들이 었다. 그해 칠월에 제위에 올라 연호를 원흥(元興)으로 고쳤다. 손호 는 손완을 예장왕(豫)에 봉하고, 아버지 손화(孫和)를 문황제(文 皇帝)로 추존함과 아울러 어머니 하씨(何氏)를 태후로 올렸다. 또 정 봉을 좌우대사마로 높여 썼고, 이듬해는 연호를 고쳐 감로(甘露) 원 년으로 했다.
그러나 손호는 여러 사람이 바란 그런 임금이 못 되었다. 대위에 오른 뒤로는 날로 흉포해졌고, 술과 여자에 깊이 빠져드는가 하면 환관인 중상시 잠혼()을 지나치게 믿었다. 복양흥과 장포가 보 다 못해 그 그릇됨을 말하다가 끔찍한 꼴만 당하고 말았다. 손호는 그들을 목 베고 그들의 삼족을 죽여 없앴다.
그걸 본 신하들이 모두 입을 다물자 손호는 더욱 거침이 없었다.
연호를 다시 보정(寶鼎)으로 고치고 육개와 만욱으로 승상을 삼은 뒤 무창에 자리를 잡았다.
손호가 무창에 자리 잡으니 양주의 백성들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 물자를 대느라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런데도 손호는 사치와 향락을 일삼아 나라와 백성들의 살림이 아울러 거덜날 판이었다. 육 개가 다시 보다 못해 글로 말렸다.
‘요사이 아무런 재난이 없는데도 백성들의 목숨이 다해가고, 아무 한 일도 없는데 나라의 재물이 바닥났으니 신은 실로 그걸 괴롭게 여깁니다. 일찍이 한실이 쇠약해짐에 세 나라 일어났으나 그중 조씨 (曹氏)와 유씨(劉氏)는 올바른 다스림의 도를 잃어 이제 그 나라는 진(晋)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는 바로 눈앞에 밝게 보여준 본보기로 신은 다만 폐하를 위하고 나라를 아깝게 여겨 걱정하는 바입니다. 무창은 땅이 거칠고 메말라 왕자(王者)가 도읍할 곳이 못 됩니다. 아이들이 하는 노래에 이르기를,
건업의 물은 먹어도 寧飲建業水
무창의 고기는 못 먹겠네. 不食武昌魚
건업으로 돌아가 죽을지언정 寧還建業死
무창에 머물러 살지는 못하겠네. 不止武昌居
하는 것이 있는데, 이는 백성들의 마음과 하늘의 뜻을 밝혀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라에는 일 년을 버틸 재물이 없어 그 뿌리가 드러날 지경이고,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억누르는 데만 모질 뿐 불쌍 히 여기는 법이 없습니다.
대제, 손권) 때는 후궁에 궁녀가 다 차지 않았는데, 경제(景帝) 이래로 수천을 헤아리게 되어 그로 인해 재물의 쓰임은 더욱 심해졌 습니다. 또 좌우에는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만 있고, 벼슬 아치들은 무리를 지어 서로 끼고 돌며 충성스런 이를 해치고 어진 이를 안 보이게 가리니, 이는 모두가 다스림을 좀먹고 백성들을 병 들게 하는 것들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부역을 줄이시고, 백성 들을 쥐어짜는 일이 없게 하옵소서. 궁녀를 추려 내치시고 깨끗한 벼슬아치들을 뽑아 세우시면 하늘은 백성들이 즐거이 폐하를 따르 게 할 뿐만 아니라 나라를 평안케 해주실 것입니다.
육개의 그 같은 상소는 구절구절 옳았으나 오주 손호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토목공사를 일으켜 소명궁(昭明宮)을 짓 게 하니, 벼슬아치들은 모두 나무를 베러 산으로 내몰렸다.
손호는 거기 그치지 않고 또 상광(尙)이란 점쟁이를 불러 엉뚱 하게 천하를 얻을 일을 점쳐보게 했다. 상광이 점괘를 뽑아보고 말 했다.
“폐하의 점괘에는 길조가 나왔습니다. 경자년(庚子年)에 푸른 해 가리개[日]를 덮고 낙양으로 드실 것입니다.”
그러자 그 말을 믿은 손호는 크게 기뻐하며 중서승 화핵(華)을 불러 물었다.
“선제께서는 경의 말을 받아들여 강을 따라 수백의 영채를 얽게 하고 장수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면서, 노장(老將) 정봉에게 그들을 도맡아 거느리게 하셨소. 이제 짐은 한(漢)의 옛 땅을 모두 아우를 뿐만 아니라 촉의 원수를 갚아주려 하는 바, 어느 곳을 먼저 쳐야겠소?”
화핵이 놀라 그런 손호를 말렸다.
“촉은 성도를 지켜내지 못해 마침내 나라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제 사마염은 틀림없이 우리 오를 삼키려는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덕을 닦으시어 백성들을 평안케 하는 것으로 상 책을 삼으시옵소서. 억지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삼대 밭을 헤치고 불을 끄려는 것과 같아서 스스로가 타 죽을 뿐입니다. 부디 헤아려 행하시옵소서.”
그러자 손호가 벌컥 성을 내며 소리쳤다.
“짐은 때를 보아 옛적의 위엄을 되찾으려 하는데 네 어찌 그따위 이롭지 못한 소리를 지껄이느냐? 만약 오래된 신하로서 낯을 봐주 지 않는다면 당장 네 목을 자르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무사들을 꾸짖어 화핵을 밖으로 끌어내게 했다. 화핵은 궁 궐 밖으로 나가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
“이 아름다운 강산이 참으로 아깝다. 머지않아 남의 것이 되고 말겠구나!”
그런 다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살며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손호는 그래도 깨우치지 못하고 제 뜻대로 밀고 나갔다. 진동장군 육항)에게 명해 거느린 군사를 일으켜 양양을 뺏으라 했다. 그 소식은 곧 세작에 의해 낙양으로 들어갔다. 진주(晋主) 사마염 은 오의 육항이 양양을 엿본다는 소리를 듣자 신하들을 불러놓고 어떻게 할까를 물었다. 가충이 나와 말했다.
“신이 듣기로 오주 손호는 덕을 닦아 백성을 다스리려고는 않고 도리에 어긋나는 일만 함부로 하고 있다 합니다. 폐하께서는 도독 양호(羊)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이끌고 막으라 하십시오. 그 뒤 오나라에 변란이 일 때를 기다려 들이친다면 동오는 손바닥 뒤집듯 쉽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마염은 그 말이 맞다 싶었다. 곧 사자를 양양으로 보내 양호에 게 그 같은 뜻을 전하게 했다. 양호는 조서를 받자 곧 군사를 점검하 고 오군을 맞을 채비를 갖추었다.
양양을 맡아 지킨 이래로 양호는 그곳 군민들의 인심을 얻고 있 었다. 오나라 사람으로 항복한 뒤 다시 오나라로 돌아가려 하면 두 말 없이 보내주었고, 국경을 지키는 군사를 줄여 그들로 하여금 밭 을 팔백여 경(頃)씩이나 일구게 했다. 따라서 그가 처음 양양에 왔을 때는 백일 먹을 군량이 없었으나 그 이듬해에는 십년 먹을 양식을 쌓아둘 수 있었다.
양호는 군중에서도 되도록이면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게 했 다. 가벼운 옷차림에 띠를 느슨하게 매고 다닐 뿐 갑옷 차림으로 공 연히 군사들을 겁주지 않았다. 또 장막을 지켜주는 군사도 열 명 정 도로 줄여 군사들로 하여금 자기를 가깝게 여기도록 했다.
하루는 거느리고 있는 장수 하나가 양호에게 와서 말했다.
“살피고 온 군사들의 말에 따르면 오병들이 모두 마음이 풀려 있고 게으름에 젖어 있다 합니다. 그들이 준비 없는 틈을 타서 들이친 다면 반드시 크게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양호가 가볍게 웃으며 받았다.
“너희들은 육항을 너무 작게 보는구나. 그 사람은 아는 게 많고 꾀도 남다르다. 얼마 전 오주의 명을 받고 서능을 우려뺀 일을 잊었 느냐? 그때 보천(闡)과 그 밑의 장졸 수십 명을 죽였으나 나는 그 들을 구해내지 못했다.”
양호는 그 말에 이어 타이르듯 보탰다.
“육항이 장수로 있는 한 우리는 그저 지키고만 있어야 한다. 그쪽 내부에서 변고가 생기기를 기다린 뒤에야 오병을 칠 수 있을 것이 다. 만약 시세를 살피지 않고 가볍게 나갔다가는 형편없이 져서 내 쫓길 뿐이다.”
그걸 전해 들은 모두가 그의 식견에 감복하며 그저 제 땅을 지키는 데만 힘을 다했다.
그 뒤 어느 날이었다. 양호가 장수들을 이끌고 사냥을 나갔다가 마침 사냥을 나온 오의 육항 및 그 장수들을 만났다.
양호는 자기편 장수들에게 영을 내렸다.
“우리 군사는 경계를 넘어서는 아니 된다.”
이에 장수들은 진(晋) 땅 안에서만 맴돌며 사냥을 했다. 멀리서 그걸 본 육항이 감탄했다.
“양호의 군사들은 기율이 잘 서 있구나. 함부로 덤빌 수 없다.”
그리고 그 역시 자기편 경계 안에서만 사냥을 하다가 날이 저물 자각기 자기편 영채로 돌아갔다.
영채로 돌아온 양호는 사냥에서 잡은 짐승들을 일일이 살펴, 먼저 오나라 군사들의 화살을 맞았다가 자기편 군사에게 잡힌 것은 모두 오병에게 돌려주었다. 양호가 사람을 시켜 아깝게 놓친 짐승들을 모두 돌려주자 오병들은 매우 기뻐하며 그 일을 육항에게 알렸다. 육항은 심부름 온 진나라 군사를 불러 물었다.
“너희 대장은 술을 마실 줄 아느냐?”
“잘 빚어진 술이면 잡수십니다.”
그 군사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육항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내게 좋은 술 한 말이 있는데 갈무리해둔 지 오래된 것이다. 네 게 줄 테니 가져가서 너희 도독께 올려라. 그리고 아울러 그 술은 이 육(陸) 아무개가 손수 빚어 마시는 술로, 특히 한잔을 보내니 어제 함 께 사냥했던 정으로 알고 드시라고 아뢰어라.”
이에 심부름 왔던 군사는 술 한 말을 지고 돌아갔다. 그 군사가 돌아간 뒤 곁에 있던 장수들이 육항에게 물었다.
“장군께서 그 사람에 술을 주신 뜻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육항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그가 먼저 우리에게 멋을 부렸는데, 우린들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
실로 양호의 좋은 맞수다운 말이었다. 그 말에 오장(將)들은 모 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편 자기 진채로 돌아간 진나라 군사는 양호를 찾아보고 육항이 보낸 술을 바치며 거기서 있었던 일을 죄다 일렀다. 양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도 내가 술을 마시는 걸 안단 말이지?”
그리고 술항아리를 열게 해 한 잔을 따라 마셨다. 곁에 있던 장수 진원(元)이 말렸다.
“그 술 속에 간사한 수작을 부렸으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도독께서는 잘 살피신 뒤에 천천히 마시십시오.”
그러자 양호가 더욱 소리 높이 껄껄거리며 말했다.
“육항은 독한 사람이 아니다. 걱정할 거 없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육항이 보낸 술독을 다 비웠다. 뿐만 아니라 그 뒤로는 사람을 보내 서로 안부를 물으며 왔다갔다했다.
하루는 육항이 양호에게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양호가 그 심부름꾼에게 물었다.
“육장군은 평안하시냐?”
그 심부름꾼이 아는 대로 대답했다.
“장군께서는 병이 나시어 며칠째 장막 밖을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헤아리기에 그 사람의 병은 나와 같을 것이다. 내가 마침 약을 달여둔 게 있으니 네가 가져가 잡숫게 하여라.”
양호가 그렇게 말하고 달여둔 약을 병에 담아 보냈다. 심부름꾼이 약을 가지고 돌아가 육항에게 바치며 양호의 말을 전하자 곁에 있던 오장들이 육항을 가로막았다.
“양호는 우리의 적이니 이 약도 반드시 좋은 약은 아닐 것입니다.” 육항이 그들을 타이르듯 말했다.
“사람에게 독물을 쓸 정도라면 어찌 천하의 양호가 되었겠느냐? 너희들은 너무 의심하지 말라.”
그리고 약을 따라 마셨다. 다음 날 육항의 병이 씻은 듯이 낫자 장수들이 그 일을 경하했다.
육항이 장수들을 보고 말했다.
“그가 우리를 너그럽게 대하는데 우리는 거칠게 대하면 그는 반드 시 싸우지 않고 우리를 이기게 될 것이다. 지금은 각기 제 땅이나 지 키며 지내는 게 좋겠다. 애써 자질구레한 이득을 얻으려 하지 말라.”
그 말에 여러 장수들도 옳게 여겨 따랐다. 그런데 홀연 오주가 사 자를 보내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육항이 사자를 불러들여 찾아온 까닭을 물었다.
사자가 오주의 뜻을 전했다.
“폐하께서 장군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서 빨리 군사를 내어 진이 먼저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하셨습니다.”
그런 느닷없는 오주의 명에 잠시 말이 없던 육항은 한참 뒤에 사
자에게 말했다.
“그대는 먼저 돌아가시오. 폐하께는 내가 상소를 올리겠소.”
그리고 사자가 돌아가기 바쁘게 육항은 글 한 통을 써서 건업의 오주에게로 보냈다.
근신이 육항에게서 온 글을 올리자 손호는 겉봉을 뜯고 읽어보았 다. 거기에는 진을 아직 칠 때가 아니라는 것과 아울러 오주에게 덕 을 닦고 형벌을 삼가 백성을 편안하게 해줄 것을 권하는 글이 적혀 있었다. 다 읽고 난 오주는 몹시 성이 났다.
“짐이 듣자 하니 육항은 변경에 있으면서 적과 서로 내통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제 보니 정말로 그렇구나!”
그렇게 소리치며 사자를 보내 육항의 병권을 빼앗고 벼슬도 사마 (司馬)로 낮춰버렸다. 대신 좌장군 손기(孫冀)로 하여금 육항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니 이로써 오는 그 기둥 하나를 뽑힌 격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오주의 불같은 성미를 잘 아는 신하들은 아무도 그 일을 말리지 못했다.
오주의 못된 다스림은 거기서 그치지 아니했다. 스스로 연호를 건형(建衡)으로 고치고 오래잖아 다시 봉황(鳳凰)으로 고쳤다. 그리 고 그 봉황 원년(元年)에는 제멋대로 되지도 않을 일을 벌여, 가뜩이 나 궁한 군사를 국경에 보내 벌여놓았으니 아래위가 모두 그를 원망 했다.
승상 만욱(萬), 장군 유평(留), 대사농 누현(樓) 세 사람은 오 주가 너무도 무도함을 보고 바른 말로 그를 말리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때를 앞뒤로 십 년 동안 오주가 죽인 충신만도 마흔 명이 넘었다. 그래 놓고도 궁궐을 드나들 때는 언제나 오만 철기(鐵騎)를 데리고 다니니 신하들은 모두 두려워 떨 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편 양호는 육항이 병권을 빼앗기고 오주가 더욱 포악한 짓을 한다는 말을 듣자 오를 칠 때가 왔다고 보았다. 사람을 낙양에 보내 표문을 올리고 오를 치자고 권했다.
‘무릇 때와 운세는 하늘이 주신 것이라 해도 공업은 반드시 사람 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강회 땅의 험한 것은 검각에 못지않되, 손호의 포학함은 유선보다 더하며, 오나라 사람들의 고단 함도 파촉보다 더 심합니다. 그러나 대진)의 군세는 그 어느 때 보다 성하니, 이때에 사해를 하나로 아우르지 못하고 다시 어느 때 를 기다려 지키고만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오를 치기를 권하는 양호의 표문을 읽은 사마염은 매우 기뻤다. 곧 영을 내려 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가충, 순욱, 풍순 등 이 힘써 말려 그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양호는 진주가 자신의 청을 들어주지 않기로 했다는 말을 듣자 탄식해 마지않았다.
“천하의 일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열에 여덟아홉이로구나. 이제 하늘이 주는 걸 거두어 들이지 않으니 어찌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 아니랴!”
그러다가 함녕 사년 마침내 양호는 조정으로 돌아가 병을 핑계로 벼슬을 내놓았다. 진주 사마염이 그런 양호를 잡고 물었다.
“경은 나라를 평안케 할 어떤 계획이 있으시오? 부디 짐에게 일러 주시오.”
“손호의 포학함이 이미 심해 이제라면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불행히도 손호가 죽어 다시 어진 임금이 들 어서게 된다면 그때는 폐하께서 쉽게 오를 얻지 못하실 것입니다.”
양호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사마염도 깨달은 바가 있어 얼른 물었다.
“경이 이제 급히 군사를 몰고 오를 치러 가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양호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신은 이미 나이 많고 병이 잦아 그같이 큰일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폐하께서는 따로 슬기롭고 용맹 있는 장수를 뽑아 쓰도록 하옵 소서.”
그리고 사마염 앞을 물러나 벼슬 없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큰 뜻을 펴보지 못한 한이 병을 더했는지, 그해 동짓달이 되자 양호의 병세는 위독해졌다. 사마염은 몸소 양호의 집으로 병문 안을 갔다. 사마염이 양호가 누운 침상 곁으로 다가가자 양호가 눈 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이 만 번 죽는다 한들 폐하의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사마염 역시 울며 때늦은 탄식과 함께 물었다.
“짐은 경을 써서 오를 치지 못한 걸 한스럽게 여기고 있소. 이제 누가 경의 큰 뜻을 이을 만하오?”
그러자 양호가 눈물 그득 괸 눈으로 고마움을 나타내며 대답했다.
“신은 곧 죽을 것이나 폐하의 물음이 간절하니 어리석은 정성이 나마 다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이 보기에는 우장군 두예(預) 라면 맡겨볼 만합니다. 만약 오를 치시려면 반드시 그 사람을 써보 십시오.”
“착한 이를 드러내고 어진 이를 천거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오. 그런데 경은 어찌 조정에 사람을 천거하면서도 스스로 그 천거하는 글을 불사르고, 이제야 이렇게 말로 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일을 모르게 하시오?”
사마염은 양호가 상주로 두예를 천거하지 않고, 직접 가서 물은 뒤에야 대답하는 게 서운한 듯 물었다.
“벼슬아치를 뽑아 쓰는 것은 조정의 일인데 천거받은 사람은 천 거해준 사람의 집에 사사로이 고마움을 나타내는 수가 많습니다. 신이 바라는 바 아니올시다.”
양호는 마지막 힘을 모아 그렇게 대꾸하고 이내 죽었다.
사마염은 울며 궁궐로 돌아가 양호에게 태부 벼슬과 거평후鉅 侯)를 추증했다. 남주의 백성들은 양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저 자를 거두고 울며 슬퍼했다. 강남 쪽의 국경을 지키던 장사들도 모 두 소리내어 울며 그 죽음을 슬퍼했다. 양양 사람들은 양호가 살았 을 제 즐겨 거닐던 현산(山)에다 사당을 짓고 사철 제사를 드렸다. 진주 사마염은 죽은 양호의 말대로 두예를 높여 진남대장군 형주 사(事)로 삼았다. 동오를 칠 큰일을 맡기기 위한 사전 채비였다. 두예는 사람됨이 듬직하면서도 일을 맡아서는 무엇에도 익숙하고 막힘이 없었다. 또 배움을 좋아해 게으르거나 지루해하지 않았다. 좌구명(明)의 『춘추전(春秋傳)』을 가장 아껴 앉으나 누우나 손에 잡고 있었으며, 바깥에 나갈 때도 반드시 사람을 시켜 『좌전(左傳)』 을 말안장에 걸게 했으므로, 사람들은 그걸 ‘좌전(左傳癖)’이라 일 컬었다.
두예는 진주의 명을 받들어 양양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자 리 잡고 앉아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군사를 기르며 동오를 칠 채비를 하였다.
그때 오나라는 정봉, 육항 같은 믿을 만한 인물들이 모두 죽은 뒤 였다. 그러나 오주 손호는 매일 잔치를 열어 신하들까지 매일 술에 취해 지내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황문랑 열 사람에게 규탄관彈 官)이란 직책을 주어 술잔치가 끝난 뒤 신하들이 술자리에서 한 잘 못을 일러바치게 하고, 거기 걸려드는 자가 있으면 얼굴 가죽을 벗기거나 눈알을 뽑았다. 그 때문에 오나라 사람들은 잔뜩 간이 오그라들어 숨소리조차 크게 내쉬지 못했다.
그런 오나라의 사정을 안 진晋)의 익주자사 왕준이 상소를 올려 오를 치자고 청했다.
‘손호가 거칠고 음란하며 대진(大)을 거스름에 더욱 흉악해지니 되도록이면 빨리 쳐 없애야겠습니다. 만약 손호가 죽고 어진 임금이 들어서게 된다면 적은 더욱 굳세어질 것입니다. 거기다가 신이 동오 를 치기 위해 배를 만든 지 벌써 칠 년이나 돼 배는 나날이 썩어가 고, 신의 나이도 일흔이라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만약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만 어그러져도 오나라를 엿보기 어려워지니 폐하께서는 부디 이때를 놓치지 않도록 하시옵소서.’
그런 왕준의 글을 읽은 진주는 곧 신하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왕준의 말은 죽은 양호의 말과 거의 같다. 이제 짐도 뜻을 굳혀 동오를 치고자 하는데 경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그러자 시중 왕흔이 일어나 말했다.
“신이 듣기로 손호는 북으로 쳐올라올 마음을 먹고 군사를 정비 해 지금 그 성세가 한창 높으니 당장 맞싸우기 어려울 듯합니다. 다 시 일년을 더 기다려 적이 더 지친 뒤에야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 니다.”
진주는 그 말을 듣고 보니 또 그게 그럴듯해 보였다. 조서를 내려 군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후궁으로 돌아갔다. 사마염이 비서승장화(張)와 바둑을 두며 한가롭게 날을 보내는데 근신이 들어와 알렸다.
“변경에서 표문이 한 장 올라왔습니다.”
사마염이 그걸 뜯어보니 두예가 올린 글이었다.
‘지난날 양호가 조정의 신하들을 잘 헤아려보지 못해 남몰래 폐하 께만 계책을 올렸던 까닭에, 조정의 신하들이 일을 의논하는 데 뜻 이 한가지로 되지 못하게 한 듯합니다. 그러나 무릇 일이란 이로움 과 해로움을 서로 견주어보고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번 오를 치는 일을 헤아려보면 이로운 것은 열에 여덟아홉이 되나 해로운 것은 거 의 없습니다. 지난가을 이래로 역적을 치려는 형세는 이미 여러 번 드러내 보인 셈이니 만약 이번에 또 그만두면, 겁을 먹은 손호는 무 창으로 도읍을 옮기고 강남의 여러 성을 수리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성안으로 백성들을 옮겨버리면 성은 떨어뜨릴 수가 없고, 들에는 빼앗아 먹을 만한 게 없어 내년의 계책 또한 이루어지기 어려워집니다……………..’
진주가 막 그런 표문을 다 읽었을 때였다. 거기 실린 내용을 함께 본 장화가 문득 몸을 일으켜 두던 바둑판을 쓸고 두 손을 모으며 말 했다.
“폐하께서는 성무(聖武)하시고, 나라는 넉넉한 데다 군사는 강합 니다. 거기 비해 오주는 음란하고 포악하며, 그 백성들은 근심에 싸 이고 나라는 피폐해 있습니다. 지금 만약 오를 친다면 힘들이지 않고 평정할 수 있습니다. 부디 폐하께서는 더 주저하지 마십시오.”
그제야 진주도 뜻을 굳혔다.
“경의 말은 이로움과 해로움을 잘 살펴서 한 말이다. 짐이 다시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러고는 곧 대전으로 나가 오를 치라는 명을 내렸다.
“진남대장군 두예는 대도독이 되어 십만 군사를 이끌고 강릉으로 나아가라. 진동대장군 야왕 사마주(司馬伷)는 도중으로 나아가고, 정동대장군 왕혼(王渾)은 횡강으로 나아가며, 건위장군 왕융(王) 은 무창으로 나아가고 평남장군 호분(胡奮)은 하구로 나아가되, 각 기 이끄는 군사는 오만으로 하고 모두 두예가 쓰려는 대로 움직여 라. 용양장군 왕준과 광무장군 당빈은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간 다. 수군 육군 합쳐 이십만에 싸움배 만 척을 준다. 그리고 관남장군 양제(楊)는 군사를 이끌고 양양에 머물러 이들 여러 갈래 인마를 절제(節制)하라.”
그런 사마염의 명에 따라 진의 대병이 움직이자, 그 소식은 곧 동 오에도 전해졌다. 깜짝 놀란 오주 손호는 승상 장제(張悌)와 사도 하 식사공 등수(鄧修) 등을 불러놓고 진나라 군사를 물리칠 의논 을 했다. 장제가 나서서 말했다.
“거기장군 오연伍延)을 도독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강릉으로 가 적을 맞게 하고, 표기장군 손흠(孫歆)은 하구로 가서 적을 맞게 하십시오. 신도 장수가 되어 좌장군 심영)과 우장군 제갈정(諸 葛靚)을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십만 군사와 더불어 우저에 머물면서 우리 편 여러 갈래 군마와 접응하겠습니다.”
자못 씩씩한 장제의 말에 손호도 못 미더운 대로 따랐다. 장제가 바라는 대로 인마를 주어 보냈다.
하지만 아무래도 손호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후궁으로 돌아가 얼굴 가득 걱정 빛을 띠고 있는데 중상시 잠혼이 들어와 그 까닭을 물었다.
“진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밀고 내려와 여러 길로 군사를 보내 막 게 했으나 그래도 왕준이 걱정이다. 왕준은 군사가 수만에 싸움배도 넉넉히 갖춘 데다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오니 그 기세도 날카롭기 그지없다. 짐이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느냐?”
손호가 한숨을 쉬며 그렇게 속을 털어놓았다.
“신에게 한 가지 계책이 있습니다. 왕준의 배들을 모두 콩가루로 만들어버리겠습니다.”
잠혼이 문득 그런 큰소리를 쳤다. 손호가 반가워 물었다.
“그게 어떤 계책이냐?”
“강남에는 쇠가 많이 납니다. 그 쇠를 두들겨 이어진 고리 백여 줄을 만들게 하되 길이는 수백 길이 되도록 합니다. 고리는 그 하나 의 무게가 이삼십 근이 되게 하여 강을 따라 긴요한 곳에 가로 걸쳐 두고, 다시 한 길 남짓한 쇠말뚝 수만 개를 만들어 물속에 박아둡니 다. 그리하면 진나라 놈들의 배가 바람을 타고 달려오다가 쇠고리줄 에 걸리거나 쇠말뚝에 부딪쳐 깨져버릴 것이니 무슨 수로 강을 건널 수 있겠습니까?”
손호가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곧 나라 안의 대장장이를 끌어모아 강가에서 밤낮으로 쇠고리와 쇠말뚝을 만들게 했다. 그리고 다 만들어지기 바쁘게 그것들로 물 위를 가로지르고 물속에 박아넣었다. 한편 강릉에 이른 진의 도독 두예는 아장 주지(周旨)를 불러 영을 내렸다.
“너는 수군 팔백 명을 데리고 작은 배로 몰래 장강(長江)을 건너 낙향을 야습하라. 그리고 숲이 무성한 곳에 기치를 많이 세운 뒤에 낮에는 방포 소리 북소리를 요란하게 내고 밤에는 곳곳에 횃불을 들 어라.”
주지는 그런 두예의 명을 따라 장강을 건넌 뒤 파산(山)에 숨었다.
다음 날 두예는 수륙의 군사를 한꺼번에 움직여 밀고 나아갔다. 앞서가서 살핀 군사가 돌아와 알렸다.
“오주는 오연은 물길로, 육경(景)은 물길로 나오게 하고, 손흠을 선봉으로 삼아 모두 세 갈래로 우리를 막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예는 망설임 없이 군사를 몰고 나아갔다. 오래잖아 손흠 이 이끈 배들이 먼저 이르렀다. 양쪽 군사가 맞부딪자 두예는 어찌 된 셈인지 오래 싸우지도 않고 물러났다. 손흠은 군사를 강 언덕에 부려 그런 두예를 뒤쫓았다.
오병이 한 이십 리나 뒤쫓았을까. 갑자기 한소리 포향이 울리며 사방에 진병이 쏟아졌다. 놀란 오병은 급히 되돌아서 달아났다. 두 예가 기세를 타고 그런 오병을 뒤쫓으며 죽이니 거기서 죽은 오병만 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손흠은 꽁지가 빠지게 낙향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성안에는 이미 진의 아장 주지가 이끈 팔백 군사가 들어차 어지럽게 횃불을 흔들고 있었다.
“북쪽에서 온 군사들이 날아서 강을 건너기라도 했단 말이냐!”
놀란 손흠은 그렇게 탄식하며 얼른 군사를 물리려 했다. 그때 어 느새 성안에서 달려 나온 주지가 큰 고함 소리와 함께 손흠을 베어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오의 육경이 강릉에 이르러 보니, 강 남쪽 언덕에 한 줄기 불길이 일고 있고, 파산 위에는 큰 깃발 하나가 펄럭이는데 거기에는 진(晋) 진남장군 두예라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벌써 적이 강을 건넌 줄 알 고 놀란 육경은 얼른 강 언덕에 배를 대고 도망하려 했다. 그러나 또 한 갑자기 달려 나온 진장 장상(張)에게 목을 잃고 말았다. 오연의 신세도 그 둘보다 나을 게 없었다. 자기편 군사들이 모두 싸움에 진 걸 알자 싸워보지도 않고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진의 복병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오연이 묶여 두예에게 끌려가자 두예 는 차갑게 말했다.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는 장수를 살려둬 봤자 어디에 쓰겠는가!”
그리고 무사들에게 영을 내려 목을 베게 했다.
두예가 한 싸움으로 강릉을 우려빼니 완상 일대와 황주(黃州) 여 러 고을 수령들은 모두 바람에 쓸리듯 진에 항복해 왔다. 두예는 사 람을 보내 그곳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군사들에게도 백성들의 물건 은 터럭 하나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런 다음 군사를 움직여 무창 으로 나아가니 무창 역시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무창까지 빼앗자 두예가 이끈 진군의 위세는 더욱 떨쳐 울렸다. 두예는 그곳으로 모든 장수들을 불러모으고 오의 도읍인 건업을 우려뺄 의논을 시작했다. 호분이 먼저 나와 말했다.
“백 년이나 묵은 오래된 역적을 하루아침에 뿌리째 뽑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이번 봄은 강물이 불어 오래 군사를 머물게 할 수 없으니 이만 돌아갔다가 내년 봄에 다시 크게 군사를 내는 게 낫겠습니다.”
두예가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으며 말했다.
“지난날 악의(毅)는 제서(西)의 한 싸움으로 강한 제(齊)나라 를 아울렀다. 지금 우리 군사는 위세가 크게 떨쳐 마치 대쪽을 쪼개 는 듯한 기세로 나가고 있다. 그러나 몇 철을 지내고 나면 싸울 마음 이 풀어져 다시 어떻게 손을 대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여러 장수들을 격려해 한꺼번에 밀고 나가 건업을 치게했다.
그 무렵 진의 용양장군(將軍) 왕준은 수군을 이끌고 물결을 따라 동오로 내려가고 있었다. 앞서 살피러 나갔던 군사들이 돌아와 알렸다.
“오나라 것들이 쇠로 밧줄을 만들어 강물을 가로질러놓고, 또 물속 에는 쇠말뚝을 박아 우리 배가 내려오는 걸 막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왕준은 껄껄 웃으며 큰 뗏목 수십만 개를 만들게 했다. 그 리고 풀잎을 묶어 사람 형상을 한 군사에 갑옷을 입히고 창칼을 들 려 그 뗏목에다 태운 뒤 흘려보냈다.
오병들은 그게 살아 있는 사람인 줄 알고 한번 싸워보는 법도 없 이 달아나기 바빴다. 물속에 박혀 있던 쇠말뚝도 큰 뗏목에 부딪치 자 쓰러지거나 뽑혀버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뗏목에다 높이 열 길에 굵기 열 아름이나 되는 섶을 묶어 싣고 마유(麻油)를 부어놓은 다음 그 위에 작은 횃불을 켜 놓으니, 뗏목이 흐르다 쇠줄에 걸리면 횃불이 넘어져 그 불이 기름 부은 섶에 옮아 붙었다. 아무리 쇠고리로 엮어진 밧줄이라 해도 그 불길에야 어떻게 견디겠는가. 오래잖아 녹아 끊어져버리니 진병은 거침없이 대강을 따라 내려갈 수 있었다.
몸소 싸움터에 나와 있던 동오의 승상 장제는 좌장군 심영과 우 장군 제갈정에게 영을 내려 그런 진병을 막으라 했다. 영을 받은 심 영이 제갈정을 찾아보고 말했다.
“물 위쪽의 우리 군사들이 제대로 막지 못했으니 진군은 반드시 이곳까지 올 것이오. 여기서 힘을 다해 싸워 다행히 이기면 강남은 평안할 것이오. 그러나 이제 강을 건너 싸우러 갔다가 불행히 싸움 에 지게 되면 큰일을 그르치게 될 것이외다.”
“공의 말씀이 옳소.”
구태여 멀리 나가 싸울 마음이 없던 제갈정도 그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미처 그 말이 끝나기 전에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진병이 물결을 타고 내려오는데 그 기세가 당해내기 어려울 듯 합니다.”
쇠고리와 쇠말뚝만 믿고 있던 심영과 제갈정은 그 뜻밖의 소리에 크게 놀랐다. 황황히 장제에게 달려가 의논했다.
“동오가 위태롭습니다. 달아나 숨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갈정이 그렇게 장제에게 물었다. 장제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동오가 망하리라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슬기로운 이나 모두가 알고 있소. 그러나 이제 임금과 신하가 모두 항복하고 한 사람도 나라를 위해 죽는 사람이 없다면 그 또한 욕됨이 아니겠소?”
이미 죽음을 각오한 사람의 말이었다. 제갈정 역시 그 뜻을 받아 들여 울며 돌아갔다.
장제는 심영과 더불어 군사를 몰아 적을 막았다. 진병은 머릿수로 밀고 내려와 금세 장제의 군사를 에워쌌다. 먼저 오병의 영채로 뛰 어든 진장은 주지였다. 장제는 힘을 다해 싸웠으나 마침내는 어지럽 게 엉겨 싸우는 군사들 틈에서 죽고 말았다. 심영도 주지에게 죽음 을 당하자 장수를 모두 잃은 오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렇게 우저마저 빼앗은 진병은 더욱 오나라 깊숙이 밀고 들어왔 다. 왕준이 싸움에 이긴 소식을 보내자 진주 사마염은 몹시 기뻐했 다. 그때 곁에 있던 가충이 아뢰었다.
“우리 군사는 오래 밖에 나가 힘든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물과 풍토가 맞지 않아 반드시 병이 일 것이니, 군사를 불러들이셨다가 뒷날 다시 일을 꾀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장화가 그런 가충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제 우리의 대병이 그 둥지로 들어갔으니 오나라 것들은 모두 간이 오그라들었을 것입니다. 한 달을 넘기지 않고 틀림없이 손호를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볍게 군사를 불러들여 이미 이룬 공까 지 없이 하기에는 참으로 모든 게 너무 아깝습니다.”
그러자 진주가 미처 무어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가충이 바로 장화를 꾸짖었다.
“너는 천시(天)와 지리(地利)를 알지도 못하면서 공훈만을 내세워 우리 사졸들을 지치고 괴롭게 만들려고 드는구나. 비록 네 목을 친다 해도 천하에 네 잘못을 빌기에는 모자랄 것이다.”
장화가 내시라 더욱 함부로 내뱉는 소리였다. 사마염이 민망해서 장화를 편들고 나섰다.
“그것은 짐의 뜻이다. 장화는 다만 나와 뜻이 같았을 뿐이니 그걸 로 너무 나무라지 말라.”
그때 다시 두예의 표문이 올라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진주가 뜯 어보니 왕준과 마찬가지로 어서 빨리 군사를 몰아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진주는 거기서 더욱 뜻을 굳혀 정벌을 서두르 라는 명을 내렸다.
진주의 명을 받은 왕준과 두예는 뭍과 물길로 북소리도 요란하게 밀고 나아갔다. 그 기세에 눌린 오나라 사람들은 진의 깃발이 이르 는 곳마다 달려와 항복했다. 그 소식을 들은 오주 손호는 놀란 나머 지 낯빛까지 변했다. 그런 손호에게 여러 신하들이 채근하듯 물었다.
“북쪽에서 내려온 군사들은 날로 가까워 오는데 강남의 군사와 백성들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어찌하여 싸우지 않는단 말인가?”
손호가 씁쓸한 얼굴로 되물었다. 모든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오늘 이 지경이 된 것은 모두가 잠혼의 죄이니 바라건대 폐하께 서는 그자를 먼저 죽여주십시오. 그리하면 저희들은 모두 죽기로 싸 워 적을 막아보겠습니다.”
그래도 손호에게는 아직 잠혼을 감싸는 마음이 있었던지 얼른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한낱 내시가 어찌 나라를 그르칠 수 있겠느냐?”
그 같은 손호의 말에 신하들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폐하께서는 촉의 황호를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러고는 오주의 명을 기다리지도 않고 우르르 궁중으로 몰려들 어가 잠혼을 죽였다. 죽여도 그냥 죽이는 게 아니라, 토막토막을 내 그 생고기를 씹을 만큼 끔찍하게 죽였다.
그 한바탕 소동이 끝난 뒤 도준(陶濬)이 나와 아뢰었다.
“신이 거느린 군사는 적고 싸움배는 모두 작습니다. 군사 이만과 큰 배만 있으면 적을 쳐부술 수 있습니다.”
이에 손호는 어림군을 도준에게 내어주며 대강 상류에서 적을 막 게 하고, 전장군 장상(張)은 수군을 이끌고 하류에서 적과 싸우게 했다.
두 사람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막 떠나려 하는데 뜻밖에 서북풍 이 크게 일며 오병의 기치가 모두 배 안으로 쓰러졌다. 그러자 그게 불길하게 느껴진 탓인지 군사들이 모두 배에 타려 하지 않고 사방으 로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남아서 적을 기다리는 것은 다만 장상이 거느린 수십 명뿐이었다.
그 무렵 진장 왕준이 이끈 군사는 배마다 돛을 활짝 펴고 삼산(三 山)을 지나고 있었다. 뱃길을 잡고 있던 군사가 왕준을 찾아보고 말 했다.
“바람과 물결이 너무 심해 배를 움직일 수 없습니다. 바람이 가라 앉기를 기다려 나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 소리에 왕준이 화를 벌컥내며 칼을 빼들고 꾸짖었다.
“나는 바야흐로 석두성(石城)을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 머물러 있자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리고 크게 북을 울리게 하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 기세에 눌 린 오장 장상이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항복했다. 왕준이 그런 장상 에게 말했다.
“참으로 항복한 것이라면 어서 앞장을 서서 공을 세우라.”
그 말을 들은 장상은 자신의 배로 돌아가 석두성에 이른 뒤 소리를 질러 성문을 열게 하고 진병을 맞아들였다.
오주 손호는 진병이 벌써 성안으로 들어왔다는 말을 듣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으려 했다.
중서령 호충(胡)과 광록훈 설영이 그런 손호를 말렸다.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안락공 유선을 본받지 않으십니까?”
손호는 그 말을 따라, 스스로 묶고 관을 진 채 여러 신하들을 이끌 고 왕준에게 항복했다. 왕준은 그를 풀어주고 관을 불태운 뒤 왕을 대 하는 예로 그를 대해주었다. 뒷사람이 시를 지어 그 일을 한탄했다.
왕준의 다락 있는 배 익주에서 내려가니 王濬樓船下益州
금릉 땅의 왕기 시커멓게 걷히네 金陵王氣黯然收
천발 쇠사슬이 강바닥에 잠기니 千尋鎖沈江底
한 폭 항복 깃발 석두성에 걸렸어라 一片降旗出石頭
한세상 몇 번이나 옛일을 슬퍼할까 人世幾回傷往事
산 모습 옛 그대로 찬 물결 베고 있네 山形依舊枕寒流
이제 온 세상 모두 한 집이 되었는데 今逢四海爲家日
옛 보루 쓸쓸하고 갈대숲은 가을이네 古壘蕭蕭蘆荻秋
이리하여 동오의 네 주 여든세 군 삼백십삼 현과 오십 이만 삼천 호, 군리(軍) 삼만이천, 병(兵) 이십삼만, 남녀노유 이백삼십 만이 며, 미곡 이백팔십만 섬, 배 오천여 척, 후궁 오천여 명은 모두 대진 (大)에게로 돌아갔다. 촉한이 망하고 꼭 이십 년 만의 일이었다. 왕준은 대사가 정해지자 방을 붙여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모든 창 고를 봉했다. 그 다음 날 오장 도준의 군사는 그 소식을 듣자 싸워보 지도 않고 무너져버렸다.
뒤이어 진 야왕 사마주와 왕의 대병이 이르렀다. 모두 왕준이 큰 공을 세운 걸 보고 마음으로 기뻐해 마지아니했다. 두예 또한 그 다음 날 이르러 삼군을 배불리 먹이고 상을 준 뒤, 모든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니 그제야 동오의 백성들도 마음을 놓았다.
오의 건평 태수(守) 오언(吳)만이 아직도 성을 의지해 맞서고 있었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그도 오가 망해버린 걸 알고는 곧 진 에 항복했다.
왕준이 표문을 올려 이긴 소식을 전하자 진의 조정은 경하해마 지아니했다. 진주는 술잔을 들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는 모두 양호의 공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스스로 보지 못하게 된 게 안타깝구나!”
그때 손권의 종손(從孫)으로 진나라의 표기장군이 되어 있던 손수(孫秀)란 이가 있었다. 조정에서 돌아오자 남쪽을 바라보고 소리내 울며 한탄했다.
“옛날 토역장군(討逆將軍, 손견)은 한낱 교위(校尉)로서 나라를 일으켰는데, 이제 손호는 강남을 가지고도 스스로 내던져버렸구나. 넓 고 넓은 푸른 하늘아, 이 어찌 된 일이냐!”
한편 왕준은 군사를 진으로 돌리면서 손호도 함께 낙양으로 끌고 갔다. 궁궐로 들어간 손호는 대전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진제) 를 보았다. 진제가 자리를 내주며 앉기를 권하고 말했다.
“짐이 이 자리를 만들어놓고 경이 오기를 기다린 지 오래된다.”
“신도 남쪽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놓고 폐하를 기다렸습니다.”
손호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살펴보고 싶은 것은 손호의 사람됨이다. 그가 망국의 임금인 데다, 천하통일의 실 세도, 촉한정통론(蜀漢正統論)의 비호도 업지 못해 『연의』는 줄곧 그 를 나쁘게만 몰아왔으나, 실제로는 당차고 똑똑한 인물이었던 것으 로 보인다. 그가 진에게 항복한 것은 그야말로 역부족 때문이었고, 그것은 진제의 물음에 답한 그의 말로도 넉넉히 짐작이 간다. 가충이 그런 손호의 기를 죽여본답시고 따지듯 물었다.
“듣자 하니 당신은 남쪽에 있을 때 사람의 눈알을 뽑고 얼굴 가죽을 벗겼다는데 어째서 그런 끔찍한 짓을 했소?”
그러자 손호는 위엄을 갖춰 받아넘겼다.
“남의 신하가 되어 그 임금을 해치려 들거나 간사하여 아첨을 일삼고 불충하는 무리는 그같이 벌해야 할 것이오.”
그 말에 가충이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진제는 손호를 귀명후(歸命侯)에 봉하고, 아들과 손자에게는 중랑(中郞) 벼슬을 내렸다. 그를 따라온 오의 옛 신하들도 모두 열후(列 侯)에 끼워주었고 오승상 장제는 싸움터에서 죽었다 해서 그 자손 에게 벼슬을 내렸다. 또 오를 평정하는 데 으뜸가는 공을 세운 왕준 은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으로 높였고 그밖에 다른 장수와 사졸들 도 모두 그 공에 따라 상을 주고 벼슬을 올렸다.
그리하여 솥발같이 갈라섰던 세 나라는 다시 하나가 되었다. 그 뒤 촉주(蜀) 유선은 진 태강 칠년(기원후 287년)에 죽었고, 위주 조 환은 태강 원년(280년)에 죽었으며, 오주 손호는 태강 사년(283년)에 죽었는데 모두가 제 명대로 산 선종(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