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63화
1298화
멈칫.
펠튼이 놀라던 표정 그대로 멈춰 버렸다.
담이 약한 걸까. 그래서 너무 놀란 나머지 기절이라도 한 것일까.
아니다.
그걸 증명하듯 그와 같은 시각.
진짜 펠튼이 번쩍 눈을 뜨고 있었다.
“마스터!”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충성스러운 그의 제자가 이런 스승의 모습에 덩달아 놀랐다.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석실이었다. 앞서 조셉이 거대한 수정구, 가란의 거울을 들여다보던 곳과 꼭 닮은 구조의 석실.
하지만 그 내부마저 온전히 같지는 않았다. 조셉의 석실과는 달리 사람이라고는 펠튼과 그의 제자 두 사람뿐이고, 사방 벽에 가득하던 마법진과 룬어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같은 것이라면 석실 중앙에 자리 잡은 가란의 거울뿐이다.
“마스터, 괜찮으십니까?”
“시끄럽다. 물러나 있거라.”
갑자기 분체와의 연결을 끊어 버린 것에 대한 제자의 걱정을 단숨에 물리친 펠튼은 가란의 거울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은색 기사단이라니. 아닐 것이다. 어떻게 저들이 함께할 수 있단 말이냐. 어떻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펠튼은 떨리는 손으로 가란의 거울을 바쁘게 조정했다. 그리고는 인공 초인들과 싸우고 있는 기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자신의 짐작이 틀렸기를 바랐다.
하고 많은 이들 중에 은색 기사단이 왜 이곳에 있냐는 말이다.
검후의 친위대.
대륙 최강의 여기사단.
은빛 질풍.
은색 기사단을 가리키는 수식어들은 많고 많다. 하지만 그 많은 수식어 중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역시.
검후의 친위대.
은색 기사단은 검후의 검이며, 동시에 검후의 손이고 발이다. 검후가 있는 곳엔 항상 은색 기사단이 함께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최근 일 년은 그러지 못했다.
대외적으로는 검후의 폐관 수련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납치과 감금으로 인해서였다.
펠튼은 이런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이들 중 하나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속한 영혼의 관이, 아니, 미완의 마탑이 검후의 납치에 협력했었으니 모를 수가 없다.
이런 펠튼의 입장에서 은색 기사단이 저기 나타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벨은 검후의 납치를 함께하고, 그녀를 감금시킨 주범이다. 그런 바벨과 은색 기사단이 어떻게 함께할 수 있단 말인가?
은색 기사단에 있어 바벨은 원수였다.
물론 은색 기사단이 이런 사실을 모른다면 가능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역시 있을 수 없었다.
이미 한참 전에 검후가 구출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명예 후작과 은색 기사단에 의해서 그러니 은색 기사단이 검후와 바벨의 원한 관계를 모른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은색 기사단이 바벨 소속 초인들을 돕는다고?
인공 초인의 공격으로부터 바벨의 초인들을 지키고 있다고?
“미친 것들이 아니냔 말이다! 주군을 공격하고, 그 위엄을 손상시킨 자들에 대해 분노해도 모자랄 일이거늘! 그런 자들과 협력을 한단 말이냐! 저들이 진짜 은색 기사단이라면 그럴 수는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펠튼은 그 증거를 찾아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백 명이 넘는 기사들을 모두 확인하려는 것처럼 얼굴을 하나하나 모두 살폈다.
옆에 선 제자는 이런 스승의 모습을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흥분하셨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고선 언제나 냉정하시던 분이 좋지 않다.’
조셉 마법사의 소식을 가져온 수들린이 말했다.
침입자들에게 패하기 전, 조셉 마법사의 모습이 꼭 저랬다고. 하지만 그로서는 스승인 펠튼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저 스승이 부디 안정을 찾기를.
그런 마음으로 바라볼 때였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스승의 손과 눈이 한순간 갑자기 멈춰 버렸다.
그와 함께 스승의 눈과 입술이 지진이 난 듯 파르르 떨렸다.
‘무슨……?’
오히려 흥분한 모습보다 더 불안하게 느껴지는 스승의 모습. 제자는 그 이유를 찾아 스승의 손과 눈이 향한 가란의 거울을 살폈다. 거울 위에 떠올라 있는 것은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둘 다 성별은 여성이었으며,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것 같다.
한 사람은 귀부인처럼 고귀해 보였고, 다른 한 사람은 가시 달린 장미처럼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공통점이라면 두 사람 모두 여성으로서 굉장히 매력적이며, 아름답다는 것일까.
설마 이 상황에 그녀들의 미모에 반한 건 아닐 터. 그렇다면 스승이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대단한 이들일까?
‘누구지?’
그런 의문이 떠오른 순간, 그의 귀에 신음성 같은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있단 말이오. 검후여…………….”
“마, 마스터?!”
지금 분명 검후라고 하지 않았나?
제자는 놀란 마음에 스승을 불렀지만, 그의 목소리는 펠튼에게 들리지 않았다.
펠튼은 가란의 거울에 떠오른 두 사람의 얼굴에 온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였다. 그는 일전에 검후와 그 주변 인물에 대해 제법 알아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
검후와 항상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은색 기사단장의 얼굴을 말이다. 한데 그렇게 머리에 넣어 둔 두 사람의 얼굴이, 지금 가란의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은색 기사단에 검후라니.
그래서 부디 은색 기사단이 아니기를 바랬다. 혹시 은색 기사단이라면 검후가 함께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은색 기사단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데, 거기에 검후라는 거물까지 함께하고 있다면 그 감당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한데 정녕 그 걱정이 현실이 되어 버렸다.
갑자기 조셉이 떠올랐다.
자신이 나서서 죽여 버린 멍청이. 그런데 갑자기 그 멍청이에 동정이 갔다. 침입자 가운데 검후가 있을 줄 알았다면, 최소한 멍청한 놈이라는 말은 않는 것인데 말이다.
물론 조셉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한 바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 자신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작은 불안이 싹텄다는 점이 문제였다. 검후가 침입자 가운데 있다니.
저 검후가 바벨과 손을 잡고 영혼의 관을 침범했다니.
펠튼은 답답해져 오는 가슴에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관주, 보고 있는 거요?”
“……”
펠튼의 질문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부관주는 물론이고, 그 주변에 포진한 마법사 중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펠트과 마찬가지로 검후라는 존재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린 것이다.
그들은 멍하니, 영상이 떠올라 있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벽에는 두 개의 영상이 떠 있었다. 하나는 2층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여 주었고, 나머지 하나는 석실에 있는 펠튼과 가란의 거울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 듣고 보았다.
검후를 언급하는 펠튼의 발언과 부관주를 찾는 그의 목소리를.
“호, 혹시 잘못 본 것이 아니겠습니까. 검후라니요. 검후가 왜………….”
“검후가 맞습니다. 저뿐 아니라 적지 않은 분들이 검후의 용모 정도는 알고 있으실 겁니다.”
사실을 부정하고 나서는 어느 마법사의 말을, 부관주가 잘라먹고 나섰다.
그러자 모여 있던 마법사 중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고, 또 다른 몇몇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뜻이 아니었다.
검후의 얼굴을 알아보았기에,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마음의 표현이었다.
“설마 바벨과 검후가 손을 잡았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인간과 오크가 손을 잡은 격입니다.”
“혹시 검후가 구출되기 전에 바벨이 검후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면 세뇌를 했다거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상대는 검후요!”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검후와 바벨이 손을 잡는 일이 가당키나 하오?”
“그건…….”
난장판이다.
각자 그럴듯한 의견을 내놓고, 반박하기 바쁘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진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바벨이 용서를 빌었고, 검후가 그들을 용서했다는 사실.
귀족에게 명예는 목숨과 같다. 납치도 납치지만, 고귀한 몸으로 감금되었다는 사실은 평생의 수치다.
그런 수치를 준 상대를 용서할 수 있을까. 어림없는 소리다.
마법사들의 많은 수가 귀족 출신이다. 그게 아니라도 마법사로 인정되는 순간 준귀족 취급을 받으며, 스스로 특별한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그렇기에 그들도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수치를 준 적을 용서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만들 하세요. 이유가 무엇이건 검후는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들이 있으니, 그것부터 살펴야 합니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시면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 기사들이 은색 기사단이고, 검후가 저들을 이끌고 있는 것이라면………… 바벨이라고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바벨의 주인이 나서진 않더라도, 최소한 검후를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나섰다는 말이 아니겠냐는 말입니다.”
“맞습니다. 분명히 그럴 것입니다.”
원인은 몰라도 일단 검후가 함께하고 있는 것은 사실. 그렇다면 검후와 최소한의 격을 맞출 수 있는 인물을 움직였으리라.
그리고 이런 인물이라면 가진 능력 또한 뛰어날 것은 뻔한 일.
최소 은색 기사단장 급의 초인이 저들 중에 있다는 말이 된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부관주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뿐 아니죠. 쉐어 가든에서 검후를 구출할 때, 그곳에 은색 기사단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아시죠?”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이드 명예 후작.”
영혼의 관은 쉐어 가든에 사람을 붙여 두지 않았다.
대신 마스를 통해 쉐어 가든에서 있었던 일을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맞습니다. 어쩌면 그도 저곳에 있을지 모릅니다.”
“…….”
“그렇다면 문제가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그렇습니다. 명예 후작이 마스가 전해 준 대로 그 정도의 힘을 가진 강자라면, 대응을 달리해야 합니다.”
마법사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었다.
이드의 존재는 그들에게 그만큼 큰 걱정거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드에 의해서 생명의 관이 붕괴되고 정신의 관 토벌까지 이어지지 않았던가.
더욱이 정신의 관이 붕괴될 때 갑자기 튀어나온 괴물과 보여 준 전투는 어떠했으며, 쉐어 가든을 붕괴시킨 전투는 또 어떠했던가.
그 힘이 영혼의 관에서 터진다면?
가만히 앉아 있던 부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관주?”
“아무래도 탑주님을 뵙고 와야겠습니다. 일단 다른 분들께선 명예 후작의 존재를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