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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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6화


제106장. 조천소사(早天小事)

전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니, 사실을 말하면 해남을 떠난 삼 개월 전부터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해남을 사랑했다. 해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그곳에서 무공을 익히고 친구들을 사귀었다. 광활한 바다 위로 아침마다 떠오른 붉은 해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백사장 위를 달리는 것을 즐겨했다. 바다는 그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고, 바람에 섞여 들어오는 비릿한 내음은 항상 신선한 활기(活氣)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이곳은 그렇지 않았다. 산세가 깊어서 일출(日出)이라도 보려면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가파른 산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야만 했다. 공기는 제법 신선한 듯했으나 너무 차가워서 해남의 온화하고 따뜻한 기온에 젖어 있던 그에게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지나치게 쓸쓸했다. 수백 명이 능히 기거하고도 남을 널찍한 공간에 기거하는 사람이라고는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그중 몇 명은 무공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사냥꾼이었고, 일부는 한쪽 눈이 없거나 팔이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무엇보다도 삼 개월이 넘는 동안 적지 않은 고생을 하며 달려온 종남파의 장문인이란 작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이는 자신보다 조금 많아 보였다. 키는 호리호리하게 컸고, 일찍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깡마른 몸매에 고적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공 실력은 제법 뛰어난 듯했지만 일파(一派)의 존주(尊主)다운 위엄은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데다 대뜸 자신을 향해 하대(下待)를 하고 하늘 같은 문파의 어른인 조부에게도 별로 어려워하는 빛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강시(?屍) 같은 몰골을 한 놈이 장문인이라니 종남파의 꼴이 안 봐도 어떤지 알겠군.’

그는 자신이 해남파의 문하가 아니고 종남파에 적(籍)을 둔 신분이라는 것이 늘 불만이었다. 할아버지를 존경하지만, 자신을 해남파에 입문하지 못하게 말린 처사는 두고두고 원망스러웠다.

아버지를 해남파의 장문인으로 둔 자신이 왜 해남파의 그 놀라운 무공을 배우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는가?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다. 그중 큰아들인 전정(典釘)은 해남파에 입문을 했지만, 둘째인 전흠은 전풍개의 반 강요로 해남파가 아닌 종남파의 문하가 되어야만 했다.

종남파가 멸문했다는 소문을 들은 전풍개가 전흠에게 종남산으로 가자고 했을 때, 전흠은 의외로 순순히 따라나섰다. 어차피 종남파가 멸문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번 기회에 조부를 모시고 종남산으로 가서 조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종남파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씻어 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종남파는 멸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장문인이란 작자는 놀라운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단순히 종남파의 멸문한 흔적만을 보고 돌아가기를 기대했던 전흠으로서는 이곳에 남아 종남파의 부흥을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영 못마땅하고 짜증스럽게 생각되었다.

지금도 일출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산정(山頂)에 올랐으나, 오늘따라 뿌연 안개가 끼어 있어 제대로 된 일출을 구경할 수 없었다.

게다가 산정에 부는 겨울바람은 그야말로 칼날과 같아서 어지간히 튼튼하고 강인한 전흠도 한기(寒氣)를 느낄 정도였다.

“제길, 정말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군.”

전흠은 투덜거리며 산 아래로 내려오다 문득 무얼 보았는지 눈을 번쩍 빛냈다.

종남파의 본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 속에 작은 공지(空地)가 있었는데, 그 공지 한가운데에서 누군가가 검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파파팍!

눈부신 검광이 사방을 어지럽히고 바람을 가르는 예리한 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오고 있었다.

검법을 시전하고 있는 사람은 머리를 까치집처럼 헝클어뜨린 이십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청년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풍만한 몸매를 지닌 미녀가 커다란 나무에 기댄 채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청년의 몸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이마에는 흐르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찰싹 달라붙어 있어 마치 물속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청년의 검법을 시전하는 동작은 몹시 매끄럽고 완만했는데, 안력이 높은 사람이라면 무언지 모를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전흠은 한눈에 그 이상한 원인을 발견해 냈다. 검법을 시전하는 청년의 왼쪽 팔이 전혀 움직이지 않아서 동작의 연결에 방해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놀랍도록 자연스럽고 정교한 초식이 조금씩 빈틈을 보이고 있었다.

전흠은 그 공지가 빤히 내려다보이는 작은 구릉에서 서서 한동안 청년이 검을 휘두르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초식 자체는 확실히 나무랄 데가 없었다. 게다가 그다지 빠르지 않았으나 초식을 전개하는 청년의 동작에는 은근한 힘과 끈기가 배어 있어 결코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았다.

전흠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저자가 왼팔이 멀쩡하다면 나는 과연 저자의 검을 막을 수 있을까?’

지금 상태라면 백 중 백 자신이 이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며칠 전에 그와 직접 싸워 우세를 점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것이 반쪽의 승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흠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청년은 왼팔을 전혀 쓸 수 없는 몸이었던 것이다. 청년의 검이 점차로 느려지더니 마침내 검법의 시전을 마쳤는지 동작을 멈추었다.

짝짝짝!

전흠이 박수를 치자 청년과 미녀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행했다. 전흠은 천천히 구릉 아래로 내려갔다.

“멋진 검법이군. 그게 낙하구구검인가?”

청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수건을 건네주던 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전흠을 쏘아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죠?”

전흠은 피식 웃었다.

“얼마 되지 않았소. 후반의 서너 초식을 봤는데, 제법 쓸 만하더군.”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으나, 조금 전 청년이 펼친 검초는 단순히 쓸 만한 정도가 아니었다. 미녀는 여전히 전흠을 노려보며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숨어서 남의 무공이나 훔쳐보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전흠은 누군가로부터 이렇게 모욕적인 언사를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전흠도 참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 여자에게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이토록 톡톡 튀면서 아름다운 여자라면 말이다. 전흠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억센 남쪽 사투리가 섞인 음성을 내뱉었다.

“그런 건 훔쳐봤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지켜봤다고 하는 거요. 내가 무엇이 아쉬워 나보다 실력도 떨어지는 자의 무공수련을 훔쳐보겠소?”

그 말에 미녀는 바짝 약이 오른 모습이었다. 하나 그녀가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전에 전흠의 시선은 그 옆에 있는 청년에게로 향해 있었다. 전흠은 땀에 젖은 청년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당신 이름이 소지산이라고 했소?”

청년, 소지산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자 전흠은 다소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몸으로는 아무리 열심히 수련한다고 해도 나를 이길 수 없소.”

소지산의 눈빛이 무섭도록 매섭게 번뜩거렸다. 하나 전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딱 부러지는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믿지 못하겠다면 언제든지 덤벼 보시오. 대신 그때는 먼젓번처럼 위급했을 때 누군가가 술잔을 날리는 따위의 일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겠지.”

전흠의 말은 모욕적인 것이어서 옆에서 듣고 있던 방취아의 안색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하나 소지산은 그저 말없이 전흠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흠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며 싸늘한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 같으면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팔이라면 차라리 잘라 버렸을 것이오. 공연히 쓸데없는 헛수고를 해서 몸을 혹사시키지 말라는 말이오.”

마침내 방취아가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뭐라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이런 나쁜 자식!”

소지산이 때마침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전흠을 향해 가차없이 손을 썼을 것이다.

“사매.”

“사형은 저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나요? 나는 저자의 이빨을 분질러 버리고야 말겠어요.”

방취아가 화를 낼수록 소지산의 눈빛은 침침하게 가라앉았다. 방취아는 침중한 그의 얼굴을 보고는 폭발하려는 화를 간신히 억눌러 참았다. 그리고는 소지산의 두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형, 정말 참을 수 있어요?”

소지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취아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전흠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의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소지산도 특이했지만, 마치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길길이 날뛰던 방취아도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화를 내고 거친 욕설을 입에 담아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여자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전흠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돌렸다.

“재미없군. 난 그만 가 보겠소. 싸우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라구. 기꺼이 도전을 받아줄 테니.”

방취아는 다시 무어라고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멀어져 가는 전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서로 달랐다. 방취아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입술을 꼬옥 깨물고 있는데 비해, 소지산은 허공을 가만히 응시한 채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방취아는 몇 차례 깊은 숨을 내쉬고서야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는지 소지산을 돌아보았다.

“저자의 말은 신경 쓰지 마세요. 사형은 반드시 왼팔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절정고수가 될 수 있을 거예요.”

소지산은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방취아는 그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사형… 괜찮아요?”

소지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얼굴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저자의 말이 그리 틀린 것 같지 않다는 생각.”

방취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소지산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도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 내 왼팔은 오히려 없느니만 못해. 차라리 왼팔이 없다면 몸을 움직이거나 초식을 시전하는 데 있어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야.”

“사형…”

“사매도 보았잖아. 지금의 내 실력으로는 절대로 그자를 이길 수 없어. 이게 나의 한계(限界)야.”

“…”

“장문사형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오히려 짐이 되지 않으면 다행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군.”

방취아는 억지로 웃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세요? 장문사형이 사형을 얼마나 믿음직스러워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잖아요.”

텅 빈 허공을 응시하는 소지산의 얼굴 표정에 씁쓸한 빛이 감돌았다.

“내가 별 도움이 못된다는 건 본산을 수복할 때부터 알았어. 지금의 본파는 장문사형이라는 커다란 나무기둥에 가느다란 몇 개의 잔가지만이 붙어 있는 상황이야. 이런 모습으로는 절대로 본파를 부흥시킬 수 없어.”

“하지만…”

소지산은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보았다.

“이 팔만 없다면…”

방취아는 가만히 그의 왼팔을 잡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사형답지 않아요. 사형이 팔 하나를 자르고 지금보다 강해진다고 해서 장문사형이 좋아할 것 같아요?”

방취아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소곤거렸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요. 사형은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잖아요. 장문사형은 그것으로 만족할 거예요. 나도 그렇고요. 진짜로 의미가 있는 건 바로 그거라고요.”

“…”

“이제 아침을 먹으로 가요.”

방취아는 언제 화를 냈느냐 싶게 방긋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어서요, 배고파 죽겠어요.”

소지산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도중에 그는 몇 번이나 무어라고 입을 열려 했으나 결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신경이 끊어져 나무토막처럼 딱딱한 그의 왼팔을 꼬옥 잡은 채 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뿐이었다.

종남산의 아침은 유난히 청명(靑冥)했다. 소지산과 방취아가 신선한 아침공기를 가득 마시며 태화각에 도착하니 아미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방취아는 한쪽 구석에 앉아서 싱글거린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전흠을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 준 후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때 문득 그녀는 동중산의 옆에 전혀 낯선 인물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사람은 누구죠?”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중년인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를 했다.

“송천기라 하오.”

“당신은 누구예요?”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을 때 진산월의 음성이 들려 왔다.

“당분간 본파에 머무를 사람이다.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그의 음성에는 다른 질문을 받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서 방취아는 더 이상 꼬치꼬치 묻지 않았다. 하나 그녀의 얼굴에 의혹 어린 빛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장승표가 주방에서 낑낑거리며 음식을 내왔다. 본산을 수복한 이후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은 자연스레 장승표로 고정되었다. 그는 제법 요리에 재능이 많아서 만드는 음식마다 상당히 맛이 있었다. 제법 입맛이 까다로운 방취아도 그의 음식에는 별다른 불만이 없을 정도였다. 모두들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무거운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가볍게 웃고 떠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식사가 끝날 때쯤 진산월이 소지산을 불렀다.

“지산,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소지산이 진산월과 함께 태평각 쪽으로 사라지자 전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취아의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도 이야기나 나누는 게 어떻소?”

방취아는 왜 진산월이 소지산을 불렀을까 생각하느라 전흠이 가까이 온 것도 모르고 있다가 그의 음성을 듣자 흠칫 놀랐다. 하나 이내 표독스런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 눈길이 어찌나 날카롭고 매서웠던지 세상에 무서운 게 없던 전흠도 순간적으로 머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마도 장내에 사문의 큰어른인 전풍개가 있지 않았다면 방취아의 입에서 어떤 거친 욕설이 터져나왔을지 몰랐다.

“싫으면 말고…”

결국 전흠은 쓴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나야만 했다. 방취아는 전흠이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도 계속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돌아온 소지산은 방취아의 차갑게 굳어진 얼굴을 보고 주춤거렸다.

“사매, 아직도 아침의 일로 화가 풀리지 않은 거야?”

방취아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보다 장문사형은 무슨 일로 사형을 부른 거예요?”

“한 가지 일을 맡겼어.”

“그게 뭔데요?”

“일단 일어나지. 사매도 나와 함께 가야 하니까.”

방취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세한 이야기는 가면서 하지.”

소지산은 방취아를 데리고 태화각을 벗어났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은 친한 사형제라기보다는 다정한 연인(戀人) 같아 보였다. 전흠은 멀어져 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씹어뱉듯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쳇, 외팔이에 미녀라니 별로 어울리지도 않군.”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눈이 다시 번쩍 뜨였다. 한쪽 구석에서 다소곳한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서문연상을 발견한 것이다. 서문연상은 아직 십대 후반의 소녀에 불과했지만, 그 미모만큼은 방취아에 못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 특유의 청초하고 생생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은근히 젊은 남자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하나 전흠이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전에 한 사람이 쭈삣거리며 서문연상의 앞자리에 와서 앉았다.

“저…”

서문연상은 힐끔 고개를 쳐들었다가 방화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고는 고운 아미를 상큼하게 치켜 떴다.

“무슨 일이죠?”

방화의 준수한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계속 머뭇거리자 서문연상은 쌀쌀맞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할말이 있으면 빨리 하고 아니면 귀찮게 하지 말아요.”

방화의 얼굴은 아예 목덜미까지 시뻘겋게 변했다. 서문연상은 여기서 자신이 한 번만 더 심하게 몰아붙이면 그가 기절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때 방화가 거의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소저는 돌아가지 않을 생각인가요?”

서문연상의 얼굴이 홱 변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죠?”

방화는 당황하여 목소리가 더욱 작아졌다.

“그러니까… 영존(令尊)이 계신 곳으로 가지 않아도 되느냐는…”

“당신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요?”

“저… 그러니까…”

서문연상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분명히 말해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죠?”

방화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연상의 얼굴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설마 이 기생오라비같이 내성적이고 소심한 소년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지금 처지는 실로 묘했다. 그녀는 검보의 보주인 서문장천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인 신분이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을 암습해 온 살수를 피하기 위해 종남파에 몸을 의탁했으나, 지금 종남파가 초가보와 정면으로 격돌을 시작한 이상 언제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될지 몰랐다. 정상적이라면 일단 위험을 벗어난 이상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옳은 일이다. 더구나 부친인 서문장천이 삼보회동 때문에 이곳에서 멀지 않은 초가보에 와 있지 않은가? 문제는 부친에게로 돌아간다면 종남파와는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비록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종남파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그다지 싫지 않았다. 장문인과 문파 제자까지 모두 긁어모아도 불과 다섯 명밖에 되지 않는 형편없이 적은 인원이었지만, 그들은 개개인이 개성이 강하고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다.

모두들 문파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의욕에 넘쳐 있었고, 그들을 이끌고 있는 장문인은 그녀로서도 처음 만나 보는 절세의 고수였다. 게다가 유소응이라는 꼬마아이는 너무도 귀엽지 않은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녀는 종남파의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의 도움을 받은 자신이 그들에게는 필생의 대적(大敵)임이 초가보로 간다는 것은 그녀의 정서상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무작정 이곳에 눌러 있을 수도 없었다. 그러려면 종남파에 입문을 해야 하는데, 만에 하나 그녀가 종남파의 문하가 되었다가 초가보에 있는 서문장천과 검을 겨루게 될 상황이 된다면 그야말로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래저래 그녀는 심란한 마음이었다. 그나마 이곳에 있는 아무도 그녀의 진실한 정체를 모른다는 것에 위안을 갖고 천천히 자신의 마음을 결정해 보려고 했는데,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의외의 인물이 자신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의혹 어린 눈으로 방화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방화는 그녀의 칼날 같은 시선을 감당하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했다. 서문연상은 한동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자신도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어떻게 나를 알고 있나요?”

“저… 사실은 예전에 소저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를? 어디서 봤죠?”

방화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그게…”

그녀의 아미가 다시 하늘로 솟구쳤다.

“빨리 말해요. 어디서 나를 봤어요?”

방화는 그녀의 추궁에 찔끔하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했다.

“몇 년 전에 검보에서 서문 노부주(西門老堡主)님의 칠순 잔치를 열었을 때 그곳에 갔었습니다.”

그 말에 서문연상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서문 노부주란 서문장천의 부친이며 검보의 전대 보주인 검왕 서문동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삼 년 전에 서문동회는 칠순을 맞이했는데, 그때 강호의 유력한 고수들을 초빙하여 성대한 고희연(古稀宴)을 연 적이 있었다. 방화는 아마도 그때 초청을 받고 고희연에 참석하였다가 우연히 서문연상을 본 모양이었다. 서문연상은 새삼스런 눈으로 방화를 살펴보았다. 당시 검보의 고희연에 초청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강호에서 유명한 명문세가(名門世家)들 뿐이었다. 방화가 그 고희연에 참석했다면 그도 명문세가의 후손이거나 명숙의 고제(高弟)일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한동안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방화 같은 사람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서문연상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눈빛이 한층 더 매섭게 변했다.

“그럼 당신은 처음부터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지금까지 시치미를 뗐단 말이군요?”

방화의 어깨가 한차례 부르르 떨였다. 방화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얼굴만 붉히고 있자 그녀는 답답하기도 하고 약이 오르기도 했다. 하나 순진한 그의 모습이 조금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말해 봐요. 지금까지 잘 시치미를 뗐으면서 왜 이제와서 새삼스럽게 아는 척을 한 거죠?”

“그건… 영존께서 사람을 풀어 소저의 행방을 찾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알았죠?”

방화는 다시 머뭇거리다가 조금 전보다는 한결 차분해진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어제 산 아래를 내려갔다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검보의 고수들이 장안을 이 잡듯이 뒤지고 다닌다고 하더군요.”

서문장천이 자신의 실종을 알고 수하들을 풀었으리라는 것은 서문연상도 아미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문제는 그녀가 아직 돌아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신의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방화는 생각에 잠겨 있는 서문연상을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서문 보주의 성격상 이런 일을 대충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조만간에 어떤 식으로든 소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될 것이고, 그때 영존께서 자칫 오해를 하게 되지나 않을까 걱정되는군요.”

서문연상은 다소 뜻밖인 듯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당신… 보기보다 제법 예리하군요. 그런 생각도 다 할 줄 알고.”

방화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무림에서 소위 명문세가라고 불리는 곳의 생리(生理)를 조금 알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말하는 소위 그 명문세가 중에 검보도 포함된다 이거죠?”

방화는 그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특별히 대답을 듣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으로 방화도 또한 명문세가의 후손이며, 자신의 그런 신분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서문연상은 돌연 엉뚱한 질문을 했다.

“올해 몇 살이죠?”

방화는 뜻밖의 질문에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열여덟 살입니다.”

서문연상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뭐야?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기껏해야 열여섯이나 일곱쯤 되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아니가 많잖아.’

방화는 서문연상이 자신의 나이만 물어 보고 아무 말이 없자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문연상은 특유의 도도한 모습을 유지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리네. 난 열아홉이니 앞으로도 내게 깍듯이 존칭을 써야 해요.”

이어 그녀는 그가 다른 소리를 하기도 전에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아무튼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말아요. 그보다 당신은 이제 어쩔 거죠? 종남파에 입문할 건가요?”

방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입니다.”

“집에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되나요?”

그녀는 그가 이미 명문세가의 후손일 거라고 단정짓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했다. 명문세가의 후손이라면 아무리 자신이 원한다 해도 가문의 어른에게 승낙 받지 않고는 어떠한 문파에도 자기 마음대로 입문할 수 없는 법이었다. 하나 의외로 방화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필요 없습니다.”

그의 음성이 지금까지의 유약하던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서문연상은 흥미가 일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아요?”

방화는 표정마저 딱딱하게 굳어진 채 분명한 음성으로 잘라 말했다.

“내 일은 내가 결정합니다. 누구도 내 인생을 내 대신 살아 주지 않습니다.”

서문연상은 눈을 크게 뜨고는 그를 쳐다보더니 이내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멋진 말이군요. 아무쪼록 그 마음이 앞으로도 변하지 않기를 바래요. 언제 입문을 신청할 거죠?”

방화는 그녀의 칭찬에 조금 얼굴을 붉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중으로 장문인을 찾아갈 겁니다. 원래는 이곳에 오자마자 바로 말씀을 드리려 했는데, 여러 가지 일이 계속 터지는 바람에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군요. 무운(武運)을 빌어요.”

방화는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고맙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인사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순진해 보여서 서문연상은 다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전흠이 이 광경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제길, 짝 없는 놈이 없으니 나 혼자 완전히 외기러기 신세로군.”

그때 누군가가 그의 등을 툭 쳤다.

“무얼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거냐?”

“어? 할아버님.”

전풍개는 전흠의 시선이 향했떤 곳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엄격한 표정이 되었다.

“중원에 오니 네놈이 아무래도 가슴에 헛바람이 든 모양이구나. 나가자. 모처럼 몸이나 한번 풀어 보자꾸나.”

이어 그는 전흠이 무어라고 할 사이도 없이 그의 어깨를 잡아 끌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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