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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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1권 혈사지미(血事之迷)편 : 7화


제107장. 간담상조(肝膽相照)

양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대체 무슨 일이지?’

이른 아침에 수석총관이 급히 자신을 찾는다는 전갈을 받은 양전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 악종기에는 아침 잠이 많아서 이렇게 이른 아침에는 일을 하거나 사람을 부른 적이 드물었다. 더구나 삼보회동이 내일로 다가와서 지금의 초가보는 그야말로 폭풍전야(暴風前夜)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삼보회동에 참가하는 검보와 삼월보의 인물들이 모두 초가보에 도착하여 그들이 머물 곳을 준비하고 경비를 서느라 모두들 바쁘게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들은 물론이고 초가보의 수뇌급 인물들조차 어서 빨리 삼보회동이 시작되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양전도 어제 밤늦게까지 삼보회동이 열리는 장소에 대한 경비를 점검하느라 몹시 피곤한 상태였다.

“부르셨습니까?”

총관의 방으로 들어가자 악종기가 어느새 의관(衣冠)을 모두 차려 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악종기는 자신의 앞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이리 앉게.”

양전이 앉자 악종기는 은근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몸은 좀 어떤가?”

양전의 얼굴에 씁쓸한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별다른 일이 있겠습니까? 견딜 만 합니다.”

검의 고수가 한쪽 팔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커다란 손실이었다. 그나마 잘려진 팔이 왼팔이어서 무공을 펼치는 데 큰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래도 양전은 악종기가 자신을 회동이 벌어지는 장소에 대한 경비 책임이라도 맡겨 준 것에 내심 고마워하고 있었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퇴물 취급을 해도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

“수성전(壽星殿)의 준비는 잘되고 있다고 들었네.”

수정전은 내일 삼보회동이 열리게 되는 장소였다. 양전은 자신 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어젯밤 자정까지 제가 직접 경비태세를 확인했습니다.”

“수고했네. 자네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어서 불렀네.”

양전은 이제 그가 자신을 부른 용건을 말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악종기는 부탁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그것은 곧 지시(指示)와 다름이 없었다.

“말씀하십시오.”

“한 사람의 행방을 추적해 줘야겠네.”

“누굽니까?”

“정산이라는 자인데, 지금 서안의 북쪽 골목거리에 숨어 있다고 하네. 무슨 일이 있어도 그자를 데려오게.”

“그자가 반항하면…”

“목숨만 붙어 있으면 상관없네.”

양전은 악종기가 직접 지시할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누구일까 궁금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언제 출발할까요?”

“아침식사를 마친 후 바로 가 줘야겠네. 진령사걸(秦嶺四傑)을 데려가게.”

“그럼 수성전의 경비는…”

“조금 있따 좌린(左麟)이 갈 걸세. 그에게 임무를 인계하면 되네.”

“알겠습니다.”

양전은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왔다. 막 방을 벗어났을 때, 문득 양전은 좌린을 자기 대신 경비 책임자로 정하기 위해 자신을 엉뚱한 곳으로 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하나 지금의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설사 악종기가 좌린을 자기의 자리로 보내기 위해 일을 맡겼다 할지라도 그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거리가 주어졌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것일까?’

양전은 씁쓸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양전이 나간 후, 악종기는 시종에게 지시를 했다.

“백동일을 오라고 해라.”

시종을 보낸 후에 악종기는 한동안 허공을 응시한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조용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백동일이 과연 양전과 진령사걸을 당해낼 수 있을까? 어느 쪽이 살아 남든 결과는 마찬가지겠지만 말이야.”


“본파에 입문하고 싶다고?”

진산월은 담담한 시선으로 방화를 응시했다. 방화는 평소와는 다른 다부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오.”

“너는 본파에 들어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

“네가 나와 함께 다니는 것은 별문제가 없다. 같이 있고 싶으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아무 때고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문파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다르다. 그것에는 막중한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방화는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낸 채 진산월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단 입문을 하게 되면 너는 네 마음대로 떠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문파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며,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도 주어진 일을 해내야만 한다. 무엇보다도 너 자신의 안녕(安寧)을 보장할 수 없다.”

방화는 조심스런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서 문파와 생사고락(生死苦樂)를 함께해야 한다는 거로군요.”

“그렇다.”

“그렇다면 기꺼이 입문하겠습니다. 저는 그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방화의 두 빰은 발그스레 상기되어 있었고, 두 눈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밝은 빛이 감돌고 있었다. 진산월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더니 한참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너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

방화의 얼굴에 한 줄기 격동의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입문식(入門式)은 이달 보름에 하겠다. 그 전에 생각이 바뀌게 되면 언제든지 입문을 취소할 수 있다.”

방화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알았다. 그만 가 보거라.”

방화는 들뜬 표정으로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갔다. 진산월은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뜻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문파에 새로운 제자들이 들어오는 것은 좋은 일이긴 하나, 그만큼 그가 신경을 써야 하고 책임질 일이 늘어나는 것도 사실이었다. 더구나 방화는 제법 명망(名望) 있는 가문의 자식임이 분명한데, 무작정 제자로 받았다가 자칫하면 나중에 번거로운 일을 초래하게 될지도 몰랐다. 진산월은 허공을 응시하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보름 후면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을지가 결정될 거다. 저 아이의 진로(進路)는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

내일이 초가보에서 삼보회동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늦어도 사흘 후부터는 초가보와 본격적인 싸움을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진산월은 종남파가 초가보의 초반 공세를 물리치기만 한다면 장기적으로 승산(勝算)이 있다고 생각했다. 열흘! 진산월이 승패의 분수령(分水嶺)으로 생각하는 기간이었다. 초가보의 공격을 열흘만 견딜 수 있다면 결코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초가보를 넘어서야만 비로소 종남파는 강호에서 생존(生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다시 한 사람이 태평각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송천기였다. 송천기는 진산월에게로 다가오더니 특유의 무뚝뚝하고 냉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씨세가에는 언제쯤 갈 생각이오?”

진산월의 대답은 짤막했다.

“이틀 후요.”

“그날로 정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오늘은 정보를 수집하고, 내일은 계획을 세울 거요. 그리고 모레에 실행을 하는 거요.”

송천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은 쉽게 하는데, 이씨세가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진산월은 담담한 눈길로 송천기를 응시했다.

“나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지.”

송천기는 진산월의 앙상하게 마른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가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매달았다.

“그건 처음 보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지. 그래서 기꺼이 당신에게 일을 부탁한 거요.”

“응계성 외에 달리 행방을 알고 있는 사람이 또 있소?”

진산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음성으로 물었으나, 송천기는 즉시 그가 이번 물음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음을 깨달았다.

“실종된 종남파의 고수들 중 말이오?”

“그렇소.”

송천기는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오. 그러지 않았다면 당신과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오.”

진산월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송천기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으나 그에게서 어떤 표정도 읽을 수 없자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자가 무정(無情)한 사람이 아니라면 정말 참을성이 대단하군. 틀림없이 속으로는 크게 실망하고 있을 텐데…’

바로 그때였다.

“웬 놈이냐?”

멀리서 사나운 고함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검명(劍鳴)이 들려왔다.

차창!

진산월은 즉시 용영검을 허리에 차고 밖으로 나갔다. 송천기도 재빨리 그의 뒤를 따랐다. 태평각을 나와 두 개의 전각을 지나자 종남파의 입구에 해당하는 널찍한 연무장(鍊武場)이 나왔다. 그 연무장의 중앙에 세 사람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젊은 청년들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머리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청년들은 이미 한차례 손속을 겨루었는지 각기 장검을 손에 쥔 채 서로를 무서운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진산월이 다가가자 노인이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노인은 전풍개였다. 전풍개는 자신의 옆에 있는 전흠과 대치하고 있는 흑의청년을 턱으로 가리켰다.

“흠아와 비무(比武)를 하고 있는데 저 녀석이 갑자기 산문 안으로 들어왔다. 저 녀석이 검을 찬 것을 보고 흠아가 성급하게 손을 썼는데, 결과가 별로 좋지 못했다.”

마치 보고라도 하듯 전풍개의 음성은 무심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전흠의 표정은 전혀 달랐다. 이를 악문 채 사나운 눈으로 흑의청년을 쏘아보는 전흠의 얼굴에는 필생(必生)의 대적(大敵)이라도 만난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진산월은 어렵지 않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전흠의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예리한 검기(劍氣)에 베어져 가슴이 훤하게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조금 전의 격돌 때 손해를 본 모양이었다. 전흠의 무공은 진산월도 직접 겪었다시피 강호에서도 능히 일류(一流) 소리를 들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다. 그런데 단 일검(一劍)에 이런 낭패를 보았으니 확실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의 시선이 전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흑의청년에게로 향했다. 흑의청년의 시선이 그와 마주쳤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응시한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처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사람은 전풍개였다. 전풍개는 진산월과 흑의청년이 서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미동도 않고 있자 어리둥절하더니 진산월의 표정을 보고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항상 냉정하고 고적해 보였던 진산월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흑의청년의 얼굴은 처음 나타났을 때보다 더욱 차가워졌다. 흑의청년은 얼음장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종이처럼 얇은 입술이 살짝 열리며 얼굴만큼이나 냉막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많이 변했군.”

진산월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기만 했다. 흑의청년은 다시 말했다.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어. 그런 몰골로 용케도 살아 있었군.”

진산월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때 흑의청년이 출수를 했다.

팟!

전풍개조차도 검광이 눈앞을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가 출수한 것을 알았다.

땅!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세찬 검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전흠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앞에 대치해 있던 흑의청년이 어느새 몸을 돌려 진산월을 향해 검을 내뻗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자신을 완전히 무시한 듯한 그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거친 숨을 토하며 그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때 전풍개가 손을 내밀어 그를 제지했다. 전흠이 움찔하여 돌아보니 전풍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각한 표정으로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전흠은 할아버지가 이토록 진지한 모습을 한 것을 모처럼 보았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흑의청년은 수중의 검을 앞으로 내밀어 진산월의 목젖을 찌르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그 검끝은 진산월이 들어올린 용영검의 검집에 가로막혀 있었다. 흑의청년은 여전히 냉막한 모습이었고, 진산월 또한 여전히 웃고 있었다.

“확실히 변했어.”

흑의청년은 차갑게 중얼거리더니 다시 검을 휘둘렀다.

파팟!

검이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단지 중인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것은 뼛골이 시릴 정도로 싸늘하게 공기를 찢으며 진산월에게로 날아드는 무시무사한 검광뿐이었다. 전풍개는 그 검초의 악랄함에 절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진산월도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겠는지 마침내 검을 뽑아 들었다.

차차창!

예리한 파공음이 거푸 터져 나오며 세찬 검기가 사방을 휘몰아쳤다.
그 검기의 소용돌이가 어찌나 사나웠던지 전흠과 송천기는 황급히 뒤로 삼 장이나 물러나야만 했다.
전풍개만이 두 눈을 부릅뜬 채 격전장의 가까운 곳에 우뚝 서 있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수십 초를 주고 받았다.
흑의청년의 검초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악랄하고 잔혹한 것이었다.
노리는 부위는 하나같이 인체에 치명적인 곳이었고, 변초(變招)는 살벌하기 그지없었으며 속도의 가공함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에 비해 진산월의 검법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웠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는 예리한 살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어찌 보면 두 사람의 검법은 전혀 판이할 정도로 다르면서도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전흠은 두 사람의 놀라운 검술에 망연자실한 표정이었고, 송천기는 그저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오직 전풍개만이 두 눈을 잔뜩 찌푸린 채 냉정을 잃지 않고 있었다.
갑자기 그토록 매섭게 몰아치던 검기와 검광들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중인들이 영문을 몰라 쳐다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검을 멈춘 채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흑의청년이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불공평하군.”

진산월이 물었다.

“뭐가 말인가?”

“살아만 있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실력마저 달라졌으니 말이야. 정말 변해도 너무 변했어.”

진산월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자네는 전혀 변하지 않았군.”

“그래서 불만이야. 자네만큼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변했어냐 했는데.”

“아니, 자네는 지금의 모습의 제일 좋아.”

흑의청년의 눈이 번쩍 빛났다.

“정말인가?”

“물론이지. 그리고 한 가지 말해 줄 게 있는데…”

“그게 뭔가?”

진산월의 얼굴에는 담담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나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네. 다만 겉모습만 조금 바뀌었을 뿐이지.”

흑의청년은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화강암으로 된 석상(石像)이라도 꿰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 동안이나 진산월을 쳐다보던 흑의청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자네도 그대로였군. 결국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단 말이군.”

“사 년 만인가?”

흑의청년은 진산월의 말을 조금 수정해 주었다.

“사 년 이 개월하고도 팔 일 말일세.”

“적지 않은 세월이었군.”

“그래.”

진산월은 다시 빙긋 웃었다.

“자네가 변하지 않아서 다행이야.”

흑의청년은 웃지 않았다.
다만 진산월의 홀쭉한 빰과 고적한 눈빛, 그리고 왼쪽 빰에 나 있는 흉터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뺨의 상처는 어떻게 된 건가?”

“사고가 있었어.”

“단순한 사고로 보이지 않는군.”

“어쨌든 나는 살아 남았네.”

“그래서 다행이라는 건가?”

“그래.”

그때 전풍개의 투박한 음성이 들려 왔다.

“이 녀석은 누구냐?”

진산월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제 친구입니다.”

전풍개의 매의 그것처럼 예리한 시선이 흑의청년의 전신을 쓰윽 훑었다.

“친구라고? 그래서 만나자마자 대뜸 칼질부터 한 거냐?”

진산월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이번에는 흑의청년이 물었다.

“이 노인은 누구인가?”

“내게는 사조(師祖)뻘 되는 어른이시라네.”

흑의청년은 잠시 생각했다가 다시 물었다.

“종남삼검 중의 한 분인가?”

“그렇네.”

흑의청년은 조금 전에 전풍개가 했던 것처럼 그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별로 대단해 보이지는 않는 것 같군.”

이 무례한 말에 전풍개의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그때 전흠이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미친 놈. 함부로 아가리를 놀리다니 용서하지 않겠다.”

그의 장검이 섬뜩한 검광을 뿌리며 무섭게 날아들었다.
흑의청년은 슬쩍 허리를 놀려 너무도 수월하게 그의 검을 피했다.
전흠이 이를 부드득 갈며 다시 검을 휘두르려 할 때 전풍개가 그를 제지했다.

“너는 이만 물러나라.”

전흠은 무어라 말하려다 전풍개의 엄격한 눈빛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검을 거두었다.
전풍개는 전흠을 물리친 후 흑의청년을 쏘아보았다.

“젊은 놈이 몇 가닥 잔재주를 믿고 건방지기가 이를 데 없군. 조금 전에 네놈이 펼친 건 혈우검법이 아니냐?”

“그렇소.”

“그럼 네놈은 황성고검 나력지의 제자냐?”

흑의청년은 전풍개가 단번에 자신의 내력을 알아차리자 안색이 조금 변했다.

“사부님을 아시오?”

전풍개의 입가에 차가운 냉소가 떠올랐다.

“노부가 그런 변방에만 처박혀 필살검(必殺劍)인지 뭔지를 연구한다고 미쳐 있는 애송이를 알 것 같냐?”

자신의 사부를 애송이라고 불렀으나 흑의청년은 크게 화를 내지 않았다.
전풍개의 말에서 자신의 사부와 적지 않은 친분이 있음을 알아차린 것이다.
황성고검 나력지가 필살검을 연구하기 위해서 절곡(絶谷)에 들어가 검도(劍道)에 매진하고 있다는 것은 그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세월이 무려 이십 년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십마혈류였다.
전풍개는 흑의청년의 냉정한 얼굴을 응시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노부가 강호에서 행도(行道)했을 때 네 사부는 이제 갓 출도(出道)한 풋내기였다. 노부가 종남파에 있을 때는 두 번인가 노부를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

그 말에 흑의청년의 눈이 번쩍 빛났다.

“그럼 노선배가 질풍검 전 대협이란 말씀이오?”

전풍개는 희미하게 웃었다.

“노부가 바로 전풍개다. 네 사부가 노부의 이야기를 하더냐?”

“그렇소. 사부께선 항상 노선배를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셨소.”

흑의청년은 강호에서 마검으로 널리 알려진 일검혈견휴 조일평이었다.
원래 조일평의 사부인 황성고검 나력지는 젊은 시절에 질풍검 전풍개와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
전풍개가 나력지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았다.
전풍개는 무공에 대한 재질이 뛰어난 나력지를 친동생처럼 대했으며, 나력지 또한 몇 번인가 그를 찾아와서 검도에 대한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조일평은 천하의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이었으나, 자신의 사부가 형님처럼 모셨던 전풍개의 앞에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즉시 전풍개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조일평이 선배님을 뵙니다.”

“흐흐… 천방지축인 줄 알았더니 제법 예의를 아는 놈이로군. 네 사부는 잘 있느냐?”

“사부께선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노선배가 다시 강호에 나타나신 것을 알면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전풍개는 잠시 아련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만난 지도 벌써 이십 년이 훨씬 넘었군.”

그의 음성에서는 무언지 모를 씁쓸한 비감(悲感)이 담겨 있었다.
한동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전풍개는 이내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네 사부의 행방을 알게 되었으니 노부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서로 살아 있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

이내 전풍개는 진산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너는 제법 쓸 만한 친구를 두었구나.”

진산월은 의외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별로 쓸 만하지 않습니다.”

뜻밖의 말에 전풍개는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는 서로의 일에 간섭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피차간에 쓸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 사이입니다.”

처음에 전풍개는 진산월이 농담을 하는 줄 알았으나 그가 담담한 음성으로 말하자 그의 말이 단순한 허언(虛言)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솔직히 그는 나력지의 제자인 조일평 정도라면 종남파를 재건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여 반가운 마음이 있었는데, 진산월이 그의 그런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단숨에 일축(一蹴)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진산월은 조일평에게 다짐까지 받으려 했다.

“일평, 그건 자네도 분명히 알겠지? 아무리 사 년만에 만났다고 해도 내가 하는 일에 끼여들려는 건 용납하지 않겠네.”

조일평은 의외로 조금도 화를 내거나 거부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네.”

이어 그는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이제 자네도 보았으니 그만 가야겠군. 다음에 다시 만나면 술이라도 한잔 나누도록 하지.”

“배웅하지 않겠네. 잘 가게.”

조일평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한차례 손을 휘젓더니 전풍개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주저하지 않고 몸을 돌려 걸어갔다.
전풍개는 어이가 없는지 아연한 표정으로 멍하니 멀어져 가는 조일평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란 것은 전풍개 뿐이 아니었다.
전흠과 송천기도 설마 조일평이 사 년만에 만난 친구와 인사 몇 마디만 하고는 휑하니 돌아가버리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는 모습들이었다.
지금의 종남파의 초지는 그야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상황이었다.
비록 본산을 되찾았다고는 하나 아직도 막강한 세력을 자랑하는 초가보와의 본격적인 일전(一戰)은 시작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럴 때 조일평 같은 절세고수가 도와 준다면 커다란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모처럼 찾아온 친구를 이대로 돌려보낸다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설마 그들은 도움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란 말인가?
하나 진산월의 생각은 달랐다.
귀하고 소중한 친구이기 때문에 어렵고 위험할 게 뻔한 자신의 일에 끼여들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진산월은 그저 벗으로만 사귀기를 원했지, 그것으로 굴레를 씌워 상대를 위험에 빠뜨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친구는 친구일 뿐이다.
우정(友情)이 소중한 만큼 그 우정을 깰 만한 어떠한 일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단지 진산월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친구이기 때문에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친구이기 때문에 기꺼이 자신을 위험 속으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진실한 우정 앞에서 위험의 유무(有無) 따위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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