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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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1화


제113장. 풍수광권(風手狂拳)

달도 뜨지 않은 짙은 어둠이 사위(四圍)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밤이었다. 진산월은 인적이 끊긴 서안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야경꾼의 딱딱이 소리만 아니었다면 주위는 그야말로 완벽한 어둠과 침묵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얼마쯤 가니 길이 점점 좁아지면서 허름한 담벼락이 줄지어 모습을 드러냈다. 길을 계속 갈수록 담벼락은 군데군데가 허물어지고 더러워졌으며, 심한 악취까지 풍기고 있었다. 진산월은 좁은 골목을 이리저리 걷다가 갑자기 반쯤 허물어진 담장을 훌쩍 뛰어넘었다.

담장 안은 풀밭이 무성한 널찍한 공터였다. 예전에는 그래도 제법 호화로운 장원(莊園)이었음이 분명해 보였는데, 지금은 여기저기에 부서진 건물의 파편들이 널려 있어 황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구멍이 뻥뻥 뚫리고 거무스름한 자국이 사방에 나 있는 전각 몇 채가 흉물스런 모습으로 서 있는 광경이 보는 사람을 을씨년스럽게 했다.

진산월이 그중 한 채의 전각을 향해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소리도 없이 수풀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툭 튀어나왔다. 그는 머리가 봉두난발처럼 헝클어지고 눈빛이 게슴츠레한 중년의 거지였는데, 진산월의 위아래를 대충 훑어보더니 아직 잠이 덜 깬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댁은 누군데 야밤에 잠도 자지 않고 남의 집을 어슬렁거리는 거요?”

진산월은 묵묵히 그를 쓸어보더니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풍수(??)를 보러 왔소.”

‘풍수’ 란 미친 늙은이란 뜻이었다. 삼경(三更)이 가까워 오는 심야에 불쑥 담벼락을 넘어 들어와서는 미친 늙은이를 찾다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중년거지의 반응이었다.

중년거지는 한동안 진산월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히죽 웃으며 느릿느릿 그를 향해 다가왔다.

“미안하지만 잘못 찾아온 것 같소. 여기에는 머리가 이상한 늙은이 따위는 없소.”

입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평스럽게 말을 하면서도 그는 발을 내딛는 자세 그대로 진산월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다. 분명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동작이었은데 그의 몸은 어느새 허공을 날아 진산월의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종호(宗昊)!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게.”

중년거지의 신형이 한차례 흔들리더니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휘익!

그와 함께 한 줄기 세찬 바람이 장내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갔다. 중년인이 보여 준 한 수는 언뜻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도 실제로는 상승(上乘)의 공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동작이었다. 방금 불어 닥친 경풍(勁風)만 보아도 조금 전의 중년거지의 몸놀림이 얼마나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었다.

하나 진산월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중년거지는 한 번 더 그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더니 갑자기 머리카락을 벅벅 긁었다.

“노인네가 망령이 들었나, 야밤에 잠도 자지 않고 있었군.”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휑하니 몸을 돌렸다.

“따라오시구려. 풍수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댁을 만나고 싶어하는 정신 나간 노인네가 있기는 있나 보오.”

중년거지는 진산월이 따라오는지를 확인도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가장 왼쪽의 전각으로 다가갔다. 그 전각은 무너지지 않은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벽의 대부분이 허물어져 있었고, 불에 그슬린 기둥 몇 개가 간신히 지붕을 받치고 있어 바람이라도 세차게 불면 들어갈 엄두도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중년거지는 전각 앞에 오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턱으로 안을 가리켰다.

“들어가 보시오. 나는 여기서 못다 한 잠이나 보충하겠소.”

이어 진산월이 보든 말든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더니 이내 기둥에 등을 기댄 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진산월은 그를 지나쳐 전각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악취가 제일 먼저 그를 반겼다. 다행히 전각 안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는 그런대로 쓸 만했다. 비록 바닥에는 깨진 벽 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천장 한쪽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기는 했으나, 그래도 지붕이 뚫려 있는 곳도 없었고 무엇보다 한쪽에 작은 화로(火爐)가 있어 실내 전체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화로에서 가까운 구석에는 때가 꼬질꼬질한 거적이 깔려 있었는데, 그 거적 위에 한 명의 늙은이가 앉은 채 안으로 들어오는 진산월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참으로 초라한 몰골의 늙은이였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카락은 풀어 헤쳐져 어깨까지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내보이는 얼굴은 마치 원숭이를 보는 것처럼 유난히 작고 붉은 기가 감돌았다. 게다가 체구 또한 왜소하기 이를 데 없어서 넝마 조각 같은 옷 속에 파묻힌 듯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눈빛 또한 흐리멍덩해서 아무리 보아도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늙은이는 탁한 눈으로 자신의 앞에 우뚝 서 있는 진산월을 한참동안이나 올려다보고 있더니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나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우라지게도 크구나.”

아닌게 아니라 가뜩이나 키가 큰 진산월이 늙은이의 작고 왜소한 체구 앞에 서 있으니 늙은이 입장에서는 눈이라도 마주치려면 고개를 잔뜩 쳐들고 봐야 할 상황이었다. 진산월은 말없이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늙은이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웬만하면 눈높이를 맞추는 게 어떻겠나? 쳐다보고 있으려니 영 고개가 뻣뻣해지는군.”

진산월은 주저하지 않고 먼지가 풀풀 날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은 키도 차이가 나서 늙은이보다 머리통 하나는 족히 컸으나, 그래도 조금 전보다는 한결 나은지 늙은이는 다시 히죽 웃었다.

“이제 좀 제대로 보이는군. 자네가 어제 사람을 시켜 이 늙은이를 보자고 했나?”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이의 잔주름이 가득한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어지간히 말하기 싫어하는 친구로군. 어제 웬 젊은 여자와 함께 온 젊은이도 할말만 하고는 휑하니 가버리더니 자네는 그보다 더 하군 그래. 그 친구, 한쪽 팔을 못 쓰는 사람치고는 제법 좋은 자세를 가지고 있더군.”

늙은이가 말한 젊은이는 소지산이었다. 어제 오전에 진산월은 소지산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으며, 그 결과를 알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웃고 있는 늙은이의 두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그와 함께 탁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에서 한 줄기 예리한 신광(神光)이 흘러 나왔다.

“옥취개 송결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고 들었네.”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불쑥 입을 열었다.

“조사한 내용을 알려 주시오.”

늙은이는 조금 전과는 달리 날카로운 눈으로 진산월의 무표정한 얼굴을 응시하더니 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칼자루를 쥔 행세를 톡톡히 하는군. 노부보고 먼저 불라는 거지? 휴우… 젊은 사람이 정말 야박하군 그래.”

말과는 다리 늙은이는 별로 서운해하는 기색도 없이 느릿느릿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송천기란 자는 강호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일세. 정확한 나이나 출신(出身)은 불명(不明)이고, 작년까지만 해도 대응표국(大鷹驃局)에서 일급표두(一級驃頭)로 일을 했다네. 색혈비라는 암기를 이용한 비도술(飛刀術)이 장기이며, 친한 사람으로는 함께 표두를 했던 추성(鄒星)이라는 자가 있네.”

“…!”

“결혼을 하지 않아 특별한 가족은 없으며, 추성의 집에서 함께 기거를 하고 있네. 작년 가을에 대응표국을 그만두었고, 보름 후에 추성도 대응표국을 나와 둘이 함께 다른 사업을 모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더군. 성격은 차분하고 머리고 제법 비상한 것 같으나 뚜렷하게 남들의 이목을 끌 만한 큰일을 할 실력은 안 된다고 알려져 있네.”

하루 반나절 만에 조사한 것치고는 상당히 자세하고 치밀했다. 하나 진산월은 별로 만족하지 않는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가 대응표국을 나오게 된 이유가 무엇이오?”

“그게 좀 명확지 않은 구석이 있네.”

늙은이의 두 눈이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만큼 살짝 찡그려졌다.

“송천기는 칠 년 전에 처음 표사(驃士)로 들어가서 삼 년 만에 표두까지 올라간 인물일세. 대응표국에서는 나름대로 그에게 적지 않은 기대를 한 모양인데, 이상하게도 최근 들어 그가 속해 있던 표행(驃行) 중 몇 개에 사고가 일어났네. 그런 일이 계속되자 당연히 대응표국에서 그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지. 그 때문인지 스스로 대응표국을 그만두었다고 하더군.”

“그런 일이라면 표국에서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 아니오?”

“그런데 그 문제된 표행들이 하나같이 사람은 별로 다치지 않고 표물(驃物)들만 분실해서 많은 사람들의 의혹을 샀던 모양일세. 대응표국에서는 표행에 참여했던 자들 중 누군가와 외부세력과 밀통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고 하네.”

“그 누군가가 송천기란 말이오?”

늙은이는 싱겁게 웃었다.

“그거야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아무튼 그런 식으로 의심스런 표행이 몇 개 있었는데, 송천기가 대부분의 표행에 끼여 있어서 그에게 의혹이 집중되었던 모양일세.”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추성도 그 표행헤 함께 참여했었소?”

“매번 같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네. 추성이란 자는 송천기와 유달리 친분이 두터웠던 것 외에는 그다지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었네. 하지만 송천기가 그만두자 그도 부담을 느꼈는지 얼마 후에 대응표국을 나오고 말았네.”

“대응표국을 나온 후의 그들의 행적은 어떻소?”

“별로 특별한 것이 없네. 그들은 몇 가지 사업을 벌이려고 시도는 한 모양인데, 모아 놓은 돈도 그리 많지 않고 인맥(人脈)도 보잘 것 없어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기만 했던 모양일세.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들의 행동에 조금 변동이 생겼다고 하네.”

“…”

“그들은 낮에는 집에서 잠을 자거나 빈둥거리고 밤만 되면 어디론가로 사라졌다고 하더군. 그들이 밤에 어디를 다녔는지는 묻지 말게. 그건 아무도 모르니까. 아무튼 최근 들어 두 사람이 무언가에 몹시 열중해 있었던 건 사실일 모양일세.”

그 말을 끝으로 늙은이는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이 그를 빤히 쳐다보자 늙은이는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뭘 그런 눈으로 보나? 그게 전부일세. 그 다음에는 느닷없이 웬 한 쪽 팔밖에 못 쓰는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이 불쑥 쳐들어와서는 ‘송결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려 줄 테니 송천기와 그 주변인물을 조사해 주시오.’라고 지껄이고는 쏜살같이 사라져 버리더니 남들 다 곤힌 자는 야밤에 키만 껑충하게 큰 말라깽이가 홀연히 찾아온 걸세.”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더니 다시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말해 주시오. 그들이 이씨세가와 무언가 다툼이 있었소?”

늙은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씨세가? 그런 얘기는 들은 바 없네. 한 가지 분명한 건 며칠 전부터 이 일대에서 그들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걸세. 지난 며칠간 누구도 그들을 본 사람이 없네.”

늙은이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그와 함께 예의 그 기이한 신광이 다시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이제는 자네 차례일세. 송결을 죽인 자는 누구인가?”

진산월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쌍쌍인랑이오.”

늙은이의 번갯불 같은 안광이 진산월의 무표정한 얼굴에 화살처럼 꽂혔다.

“쌍쌍인랑이라면 능히 송결을 죽일 실력이 있겠지. 그런데 그들이 왜 송결을 죽였나?”

“그건 나도 모르겠소.”

늙은이는 그 말의 진위(眞僞)를 파악하려는 듯 진산월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그 사실을 알고 있나?”

“쌍쌍인랑은 송결을 살해한 후 마침 내가 있는 곳으로 왔소.”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일 수 없게 되었소.”

늙은이의 눈빛이 조금 굳어졌다.

“자네의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주루의 후원에 그들의 시신을 묻어 두었소.”

“그곳이 어딘가?”

진산월이 정산의 주루가 있는 위치를 말해 주자 늙은이의 눈빛이 처음처럼 흐리멍덩하게 변했다. 늙은이는 갑자기 두 다리를 쭈욱 뻗더니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나이를 먹으니 겨울밤을 지새기가 힘이 드는군. 뼈마디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니 말이야.”

그는 난데없이 엉뚱한 소리를 했으나 진산월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입구에서 졸고 있던 종호라는 자가 비호같이 정산의 주루로 달려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늙은이는 다만 그가 주루로 갔다올 때까지 시간을 끌 필요가 있었을 뿐이다. 늙은이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한 가지만 더 말해 주게. 노부가 이곳에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사람을 보냈나?”

“이곳이 이미 십여 년 전부터 개방의 비밀장소였다는 것은 서안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오. 오의단의 고수가 살해당했다면 당연히 오의단의 수뇌급 인물이 조사를 나왔을 텐데, 서안 일대에서 그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은 그다지 많지 않소.”

늙은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오래된 폐원(閉院)이어서 남들의 이목을 숨기기 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안 되겠군. 아무래도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던 모양이야.”

늙은이는 개방에서도 총단 직속의 세 개 비밀조직 중 하나인 오의단의 서열 삼 위 고수인 풍수 인시망(印視望)이었다.

오의단의 조직은 인원이 그리 많지 않았으나 하나같이 절정고수들로만 이루어져 있어, 강호의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오의단의 고수들은 오의단주(汚衣團主) 외에는 모두 서열이 정해져 있었는데, 인시망은 단주 휘하의 마흔여덟 명 고수들 중 세 번째 위치에 있었다.

서열 이 위인 탈혼주개(奪魂酒?) 손등(孫騰)이 개방에서도 일곱 명밖에는 없는 장로(長老)의 신분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개방 내에서 인시망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인시망은 풍수라는 외호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하고 심기(心機)가 깊은 인물로 알려져 있었으며, 무공 실력은 누구도 정확히 알 수 없을 정도로 고강하다고 소문나 있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개방 총단을 떠나지 않던 인시망이 직접 온 것으로 보아 개방에서는 이번의 옥취개 송결의 사망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송결은 서문연상을 뒤쫓던 쌍쌍인랑을 막다가 그들의 손에 쓰려졌는데, 그후에 개방에서 그의 시체를 수습해 갔다고 한다. 송결은 비록 오의단 내에서의 서열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개방의 장안 분타주인 소방방의 변사(變死)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가 참변을 당했기 때문에 오의단에서도 이번 일을 예의 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리를 주무르고 있던 인시망의 시선의 입구를 향했다. 차가운 바람과 함께 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인시망은 들어온 사람의 종호임을 확인하고는 그에게 물었다.

“확인했나?”

종호는 힐끔 진산월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시체 같은 건 없었소.”

“아무 흔적도 없었나?”

“시체를 묻은 듯한 구덩이는 있었지만, 그 구덩이가 시체를 묻은 것이라는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소.”

인시망의 시선이 진산월에게 향했다.

“그렇다는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누군가가 시체를 파내 간 모양이오.”

인시망의 주름진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그런 짓을 하겠나?”

“그거야 내가 알 수 없는 일이지.”

“허허… 대답 한번 편하군 그래.”

인시망은 너털웃음을 짓더니 돌연 탁한 눈으로 진산월을 빤히 주시했다.

“자네는 송결을 살해한 자들이 쌍쌍인랑이며, 그들을 자네 손으로 쓰러뜨렸다고 했네. 그런데 그 말을 증명할 만한 어떠한 것도 없으니 자네 말을 어찌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군.”

쌍쌍인랑의 시체들이 없어졌다는 것은 진산월로서도 다소 뜻밖의 일이었다. 하나 그는 그 점에 대해서는 별로 의문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쌍쌍인랑이 동중산의 짐작대로 취미사 혈겁의 흉수와 관련이 있다면, 그들 조직에서 쌍쌍인랑의 흔적을 추적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주루의 후원에 묻어 두었던 쌍쌍인랑의 시신이 발견될 가능성은 다분히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그후에도 추적을 계속하고 있는지의 여부였다. 진산월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해야 할 말은 모두 했소.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당신들의 자유지만, 내게 그걸 확인시켜 줄 의무까지 있는 것 같지는 않구려.”

인시망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지며 가뜩이나 주름살 많고 붉은 빛이 감돌던 얼굴이 마치 늙은 원숭이의 그것처럼 변했다.

“허허…. 자네는 정말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는군. 강호의 일이 자네 생각대로 그렇게 호락호락하기만 하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나?”

진산월의 등뒤에서 한 줄기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진산월은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종호라는 자가 자신을 향해 살기를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인시망은 다리를 몇 번 더 주무르더니 느릿느릿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노부가 처음에 선뜻 자네의 말대로 정보를 제공해 준 것은 자네가 혹시라도 엉뚱한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충분히 그 대가를 받아낼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네. 이제 자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네. 첫째는 쌍쌍인랑이 송결을 해쳤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는 것일세. 물론 지금 당장 말일세.”

진산월은 흥미가 이는 듯 물었다.

“둘째는 뭐요?”

인시망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노부를 희롱한 대가로 이곳에서 당분간 노부의 시중을 들어야 하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산월의 등뒤에서 무언가 예리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진산월이 슬쩍 옆으로 움직이자마자 하나의 손이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공간을 무서운 속도로 헤집고 지나갔다. 손의 주인은 종호였다. 종호는 진산월이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자신의 수공(手功)을 가볍게 피하자 얼굴 가득 냉랭한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이 정도는 되어야 어울려 볼 맛이 나지.”

진산월은 여전히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인시망을 주시했다.

“좋은 거래를 하고 싶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되었군. 하지만 당신들이 한 번만 더 나를 공격하면 나도 출수하겠소.”

“자네가 노부를 멋대로 부려먹은 배짱만큼이나 실력도 좋았으면 좋겠군.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우리의 적(敵)이라는 뚜렷한 물증(物證)이 없는 한 자네를 죽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

등뒤에서 종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봐, 거만한 친구. 언제까지 상대를 앞에 두고 등을 돌리고 있을 셈인가?”

진산월은 그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진산월의 몸이 뒤로 돌아선 순간, 지금까지 전혀 움직일 것 같지 않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던 인시망이 갑자기 진산월을 향해 덮쳐 왔다. 동시에 종호의 몸도 진산월의 앞으로 바짝 육박해 들어왔다. 두 사람의 공격은 마치 사전(事前)에 치밀하게 계획하기라도 한 듯 완벽한 배합을 이루고 있었다.

인시망의 주름진 손은 갈퀴처럼 오므라진 채 진산월의 뒷목덜미를 잡아 왔고, 종호의 굳게 쥐어진 주먹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왼쪽 옆구리 부분을 향해 날아들었다. 전후(前後)로 가해진 이들의 합공(合攻)은 예상하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그 속도와 방위가 가공할 정도여서 누구도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뒤쪽의 공격에 신경을 썼다가는 갈비뼈가 부러져 나갈 판이고, 옆구리를 피하는 데 주력했다가는 꼼짝없이 목덜미를 제압당하고 말 것이다. 진산월의 몸이 한차례 흔들렸다. 다음 순간, 막 진산월의 목덜미를 움켜쥐려던 인시망은 무언가 차갑고 예리한 것이 자신의 손목을 베어 오는 것을 느꼈다. 그 감촉이 어찌나 싸늘하던지 마치 오른손이 손목 아래로 얼음구덩이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헛!”

인시망은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리며 황급히 내뻗었던 손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종호의 사정은 그보다 더욱 다급했다. 종호는 진산월이 몸을 돌리는 순간에 맞춰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에 자신의 공격이 성공하리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주먹을 채 반도 내뻗기 전에 그는 자신의 앞가슴이 느닷없이 나타난 정체불명의 검광(劍光)에 훤히 노출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혀 낌새조차 없었던 검광이 어떻게 이토록 갑작스럽게 나타날 수 있었는지를 알아차릴 겨를도 없이 종호는 주먹을 거두며 사력을 다해 몸을 뒤로 젖혔다.

팟!

한 가닥 검광이 그의 앞가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며 가슴팍 부근 옷자락이 잘려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종호는 모골이 송연해져서 뒤로 젖힌 몸을 그대로 바닥에 눕혀 두 바퀴나 구른 다음에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바닥에서 벌떡 일어서는 그의 얼굴은 조금 전과는 달리 핼쑥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옷자락이 베어져 훤히 드러난 자신의 가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여전히 처음의 위치에 우뚝 서 있었다.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언제 뽑아 들었는지 그의 오른손에 싸늘한 검광을 뿌리는 하나의 고색창연한 장검이 쥐어져 있다는 것뿐이었다. 장검에서 흘러 나오는 우유빛 검광이 보는 이의 가슴에 섬뜩함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진산월은 종호를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인시망에게 향해 있었다. 인시망의 주름진 얼굴에 한 줄기 당혹 어린 빛이 떠올랐다.

“정말 무서운 쾌검(快劍)이로군. 강호에서 이토록 빠른 검법의 소유자는 흔치 않은데, 자네는 대체 누군가?”

진산월은 묵묵히 수중에 들고 있던 장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날카로운 검광을 뿌리던 검이 소리도 없이 검집 속으로 사라지는 광경은 왠지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였다. 언제 검을 뽑았냐는 듯 두 팔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채 묵묵히 인시망을 주시하고 있는 진산월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에는 반드시 피를 보게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소.”

인시망은 진산월의 두 눈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씁쓸하게 웃었다.

“자네 같은 사람과 확실치도 않은 일로 피를 보기는 싫네. 오늘은 노부가 당한 것으로 하지. 그런데 자네의 이름이라도 말해 줄 수 없겠나?”

“직접 알아보시오.”

인시망의 주름진 얼굴이 구겨졌다.

“정말 냉정한 친구로군. 한 가지만 더 말해 주게. 쌍쌍인랑이 송결을 죽였다면 그건 아마도 송결이 그들이 노리고 있는 누군가를 보호하려 했기 때문일걸세. 그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나?”

“그것도 직접 알아보도록 하시오.”

진산월은 짤막한 말만을 남겨 놓은 채 주저 없이 몸을 돌려 앞으로 걸어나갔다. 종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를 막아서려 했으나, 인시망의 눈짓을 받고는 어쩔 수 없이 길을 비켜 주었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진산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인시망과 종호의 얼굴에는 각기 다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종호는 경악과 노화가 들끓는 듯 굳은 얼굴에 때때로 성난 눈빛을 뿌리고 있었으나, 인시망은 무언가 깊은 상념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종호는 참지 못하고 불쑥 입을 열었다.

“왜 저자를 그냥 보내는 거요? 그건 당초의 계획과는 틀린 게 아니오?”

인시망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게 좋네. 저자의 정체를 알기 전에는 무리를 할 필요가 없지.”

“우리가 저자를 당해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오?”

“그거야 직접 겨루어 볼 때까진 모르는 일이지. 하지만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지 않나?”

종호는 여전히 못마땅한 모습이었으나 더 이상 인시망을 추궁하지는 않았다.

종호는 강호에서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오의단 내에서는 광권(狂拳)이라는 별호로 통하고 있었다. 일단 손을 쓰면 자신의 생사(生死)를 도외시하고 미친 듯이 주먹을 휘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오의단 내에서 그의 서열은 열두 번째였다. 오의단의 전체 인원이 마흔여덟 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높은 지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제지한 사람이 인시망이 아니었다면 종호의 성격으로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광권 종호가 두 번이나 헛손질을 하고도 상대를 그냥 보냈다고 한다면 오의단의 누구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종호는 생각에 골몰해 있는 인시망을 쳐다보며 퉁명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그자가 누구인지 전혀 짐작 가는 사람이 없소?”

인시망은 날카로운 눈으로 한차례 그를 힐끔거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없네.”

“저 정도 고수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는 없지 않소?”

“물론 그렇지. 그래서 몇 가지 추측을 해보았네.”

“그게 뭐요?”

“우선 그자는 서안 일대에서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살아온 자가 분명하네. 그렇지 않고서는 이곳이 우리의 거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테니 말일세.”

“그럴듯한 말이오. 둘째는?”

“둘째로 그는 지금까지 강호에 전혀 이름이 알려진 적이 없는 인물이라는 걸세.”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요?”

인시망은 희마하게 웃었다.

“그처럼 특이한 용모에 놀라운 검술을 쓰는 자라면 진작에 남들이 주목을 받았을 걸세. 적어도 본방(本幇)의 이목에 노출되지 않았을 리 없지.”

“셋째도 있소?”

“셋째로 그는 뜨내기가 아니라 명가(名家)의 후손이라는 걸세.”

종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오히려 그자가 떠돌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자의 검은 상당히 오랜 역사를 지닌 명검(名劍)임이 분명하네. 게다가 그자가 검을 뽑아 든 자세에는 무언지 모를 기품 같은 것이 느껴지네. 틀림없이 유구한 전통을 지닌 명문세가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자야. 그렇지 않으면 그런 절도 있는 자세가 나오지 않는 법일세.”

종호는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는 듯 했으나 이내 인시망의 말에 수긍을 했다. 인시망은 비록 엉뚱한 행동을 곧잘 해서 남들에게 미친 늙은이라고 불리고 있기는 했으나, 누구보다도 두뇌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강호의 경험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을 보는 안목에 있어서는 개방 내에서도 몇 손가락에 꼽힐 터였다.

인시망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 사실들을 종합해 본다면 미심쩍긴 해도 의심이 가는 인물이 있기는 하지.”

종호는 황급히 물었다.

“그가 누구요?”

인시망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닐세. 좀더 정확한 자료가 필요해.”

“하지만 그자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는데 어디 가서 그에 대한 자료를 구한단 말이오?”

인시망은 이내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지.”

“그게 어디요?”

인시망의 시선은 진산월이 사라진 방향의 짙은 어둠을 향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는 송천기가 이씨세가와 다툼이 없었느냐고 물었네. 그건 다시 말해서 그가 송천기에 대해 알려는 이유가 이씨세가와 관련이 있음을 말하는 것일세.”

종호의 안광이 번쩍 빛났다.

“그렇다면…”

인시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틀림없이 이씨세가로 갔을 걸세. 그러니 그곳에 가 본다면 그에 대해 좀더 정확한 정보를 파악할 수 있을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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