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5화
제117장. 대응표국(大鷹驃局)
대응표국은 서안의 동서(東西)를 가로지르는 동대가(東大街)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응표국이 생긴 지는 백여 년이나 되었고, 그동안 숱한 고비를 넘긴 끝에 당금에 와서 적어도 섬서성 일대에서는 제일 크고 번창한 표국이 되었다. 당금의 국주(局主)는 일도풍뢰(一刀風雷) 단리정천(段里頂天)으로, 그는 섬서성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름난 도객(刀客)이었다. 그의 휘하에는 세 명의 총표두(總驃頭)와 열두 명의 일급 표두, 그리고 삼십 명에 가까운 일반 표두들이 있었고, 표사와 쟁자수(爭刺手)들까지 합치면 대응표국의 총인원은 오백 명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일개의 표국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거대한 세력이었다. 절정고수의 수가 조금만 더 많았다면 초가보나 이씨세가와도 능히 자웅(雌雄)을 겨루어 볼 만 했으나, 그들 중 단리정천과 세 명의 총표두 외에는 내세울 만한 뛰어난 고수가 별로 없다는 것이 대응표국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단리정천은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절정고수를 포섭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실력 있는 고수를 찾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더구나 간혹 뛰어난 고수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누구도 선뜻 표국으로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야망이 있는 사람들은 대응표국보다는 최근 들어 무섭게 세를 확장하고 있는 초가보에 들어가기를 더 원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강호를 자유롭게 주유(周遊)하는 자신들의 습성을 쉽게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런 단리정천에게 화산파와 초가보의 세력 다툼은 위기이자 좋은 기회였다. 자칫하면 두 거대문파가 격돌하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존립 자체가 위태로울 수도 있지만, 잘만 하면 오히려 대응표국의 오랜 숙원(宿願)을 해결하고 표국의 안녕을 꾀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화산파에서 넌지시 손을 내밀어 왔을 때 단리정천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그들의 손을 마주잡았던 것이다. 화산파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부족한 절정고수의 수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특별히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화산파가 뒤를 봐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응표국의 앞날은 탄탄한 반석(盤石) 위에 놓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단리정천은 그렇게 생각했다.
침상에서 일어났을 때, 아침 햇살이 눈을 찔렀다. 단리정천은 눈살을 찌푸리기는커녕 오히려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다는 묘한 만족감이 몸을 개운하게 했다. 오늘은 그에게는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오늘 대응표국은 화산파와 정식으로 결맹(結盟)을 맺게 되는 것이다. 화산파에서 대응표국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초가보에서도 사람을 보내 와서 잠시 혼란이 있었지만, 이제 모든 사항을 결정하고 일의 마무리에 접어들게 된 것이다. 서안 일대의 상권을 확실히 보장해 주고 앞으로 일체의 운송(運送)을 대응표국을 통해서마나 하겠다는 초가보의 제의에 귀가 솔깃하긴 했으나, 먼저 손을 내민 화산파를 뿌리칠 만큼 유혹적이지는 않았다. 더구나 백 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하는 대응표국의 입장에선 이제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신흥방파인 초가보 보다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화산파와의 제휴가 더욱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다.
단리정천이 아침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차(茶)를 즐기고 있을 때, 한 사람이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체구가 당당하고 안광이 날카로운 사십대의 중년인이었다. 중년인은 흑색 무복을 입었고, 허리춤에는 열여덟 개의 단도(短刀)들이 꽂혀 있는 칼집을 차고 있었다. 그 흑의중년인은 대응표국에서 세 명밖에는 없는 총표두 중 한 사람이자 단리정천의 의제(義弟)인 철수비도(鐵手飛刀) 방수립(房修立)이었다. 방수립은 한 쌍의 육장(肉掌)과 십팔무극비도(十八無極飛刀)로 관중 일대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뛰어난 고수였다. 특히 그는 두뇌가 명석하고 성격이 진중(鎭重)해서 단리정천이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공언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단리정천이 묻자 방수립은 굵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밖에 누군가가 찾아왔습니다.”
단리정천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대응표국은 서안에서 제일 크고 번화한 표국이므로 아침부터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사소한 일 때문에 방수립이 자신을 찾아올 리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단리정천은 의아함과 호기심을 느꼈다.
“찾아온 자가 누구인가?”
방수립의 얼굴에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이상야릇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표정을 본 단리정천은 마음속 의구심이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방수립은 무언가 난처한 일을 당했거나 황당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곧잘 그런 표정을 짓곤 했던 것이다. 방수립은 말없이 손에 들고 있는 노란색 배첩을 단리정천에게 내밀었다. 단리정천이 펼쳐보니 배첩 안에는 단 한 줄의 문구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 대종남(大終南) 이십일대(二十一代) 장문인(掌門人) 진산월(陳山月). >
단리정천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그 밑의 두 눈에서 한차례 신광이 번뜩였다.
“종남파의 장문인?”
“일각(一刻) 정도 전에 소 집사(蕭執事)가 제게 곤란한 손님이 찾아왔다고 하더군요. 나가 보니 이런 배첩을 내밀었습니다.”
단리정천은 뜻밖의 일에 놀란 듯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다시 물었다.
“몇 명이나 왔나?”
“혼잡니다.”
“혼자? 그자가 진짜 종남파의 장문인인지는 확인해 보았나?”
방수립은 다시 약간 당혹한 표정을 지었다.
“저로서는 무어라고 말히기 힘들군요.”
단리정천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방수립은 매사에 일처리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단리정천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방수립이 상대의 정체도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자신에게 보고를 하다니, 단리정천의 의혹을 느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자를 직접 만나지 않았단 말인가?”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자의 행색이 너무 기괴해서 선뜻 일파(一派)의 장문인이라고 믿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았습니다.”
단리정천은 더욱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행색이 기괴하다니?”
“제가 말씀드리는 것보다는 직접 보시는 게 더 이해하시기 쉬울 겁니다.”
“신분이 확실치 않다면 굳이 내가 만날 필요가 있을까?”
방수립은 뜻밖에도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있습니다.”
“왜 그런가?”
“그자는 상당한 수준의 고수입니다.”
방수립은 입이 무겁고 쓸데없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성미였다. 그가 스스로의 입으로 상당한 고수라고 말할 정도면 그건 적어도 강호상(江湖上)에서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일류고수 이상의 실력을 지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 고수가 찾아왔다면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만나 볼 필요가 있었다. 단리정천은 턱밑에 탐스럽게 나 있는 검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을 중얼거렸다.
“그런 정도의 고수라면 진짜 종남파의 장문인일 확률이 높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그자가 찾아온 것은 혹시 일전의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이번에도 방수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난 몇 년간 종남파는 본국(本局)에 단 한차례의 표물(驃物)도 맡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일감이 생겨서 찾아왔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단리정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가시게 됐군. 그나저나 그자가 어떻게 그 일을 알게 되었을까?”
그 말에는 방수립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내심 짐작가는 인물이 있었으나, 절대적인 자신이 없기에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않은 것이다. 이처럼 방수립은 신중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단리정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직접 만나 볼 수밖에 없겠군. 그런데 이렇게 이른 아침에 찾아 오다니, 그자는 도대체 얼마나 일찍 종남산에서 내려온 거야?”
단리정천의 나이는 올해 오십오 세. 그의 부친은 철담호한(鐵膽豪漢)으로 알려진 뇌혼도(雷魂刀) 단리광(段里廣)이었으며,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에 대응표국의 주인이 되었다. 그로부터 십팔 년 동안 단리정천의 지휘 아래 대응표국은 최고의 성세(盛世)를 누렸으며, 그 공은 누가 뭐래도 단리정천의 것이었다.
단리정천의 성격은 냉정하고 치밀하다고 알려져 있었다. 특히 사태를 보는 안목이 탁월해서 좀처럼 방향을 잘못 잡거나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없다고 했다. 그의 외모는 성격만큼이나 깔끔하고 단정해서 언뜻 보기에는 칼바람을 먹고 사는 무인(武人)이 아니라 학사(學士)를 연상케 했다. 머리는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겨 하나로 묶었고, 턱에는 탐스런 검은 수염을 길렀으며, 혈색 좋은 얼굴은 아직 탄력을 잃지 않았다. 질 좋은 청색 장포를 걸친 몸은 훤칠했고, 자세 또한 바르고 곧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원시원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보도(寶刀)만 아니었다면 돈 많은 상인(商人)이나 유생(儒生)이라고 해도 어색하지 않을 풍모였다. 그가 차고 있는 보도는 단리가(段里家)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전신보(家傳神寶)로써, 대응신도(大鷹神刀)라 했다. 대응표국이란 이름도 이 보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평상시라면 표국에 찾아온 손님을 만나는 데 대응신도를 착용할 필요가 없었으나, 오늘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겠다는 방수립의 제안에 따라 가지고 나온 것이다. 단리정천이 방수립을 대동하고 응접실로 들어서니 훤칠한 키에 앙상하게 마른 괴인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괴인을 보는 순간 단리정천은 방수립이 말한 기괴한 행색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단리정천은 아직 눈앞의 이 괴인처럼 앙상하게 마른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앉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키가 무척 큰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일어선다면 위태로울 정도로 말라 보일 것이 분명했다. 훌쭉한 뺨에 움푹 파인 칼자국이 두드러져 보이는 얼굴은 왠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적(孤寂)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하나 단리정천이 무엇보다도 인상적으로 생각한 것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내비치는 그의 두 눈이었다. 마치 고여 있는 호수처럼 완벽하게 정지(靜止)되어 있는 눈. 그 눈을 보는 순간, 단리정천은 상대가 단순히 무공이 뛰어난 고수 정도가 아니라 무척이나 상대하기 까다로운 실력의 소유자임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정말 종남파에 대한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단리정천은 며칠 전부터 서안 일대를 뒤흔들고 있는 소문을 기억해 내고는 내심 침음했다. 육 개월 전에 초가보에 의해 거의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던 종남파가 다시 재건되었다는 소식은 단리정천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사건의 중심에 오래 전에 실종되었던 종남파의 장문인이 있으며, 그 장문인이 초가보의 절정고수들을 연파하여 강호인들을 놀라게 했다는 소식도 들은 적이 있었다. 하나 그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소문 이상의 가치는 없다고 일축해 버렸다. 강호의 소문은 왕왕 와전(訛傳)되기 마련이며, 이번에도 종남파가 자신들의 본산을 차지하고 있는 초가보를 물리친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겠지만 그 안의 내막은 알려진 것과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마 초가보에서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몇몇 일류고수들을 보냈고, 그들 중 일부가 뜻밖의 공격을 받아 격퇴되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리정천이 그렇게 생각한 것에는 나름대로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무공이란 원래 단시일 내에 속성(速成)하기 힘든 것이며, 특히 종남파 같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파의 무공일수록 빠른 시일 내에 대성(大成)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강호에는 속성으로 익힐 수 있는 무공들이 제법 있긴 하지만, 장문인의 신분이라면 아무리 다급해도 다른 문파의 무공을 익힐 리가 없었다. 만에 하나 그런 식으로 무공이 높아진다 해도 그것은 결국 종남파의 몰락을 재촉하는 길밖에는 되지 않았다. 자신들의 무공으로 스스로 서지 못한 문파는 이미 그 존립(存立)에 아무런 의미를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리정천은 종남파의 장문인이 다시 돌아온 것은 사실일지라도 그 무공 자체는 많이 과장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인물을 보자 그는 자신의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단리정천은 수정처럼 깊게 가라앉아 있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괴인의 앞으로 성큼 다가가더니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안녕하시오, 나는 대응표국을 맡고 있는 단리정천이라 하오.”
괴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고 보니 단리정천이 처음에 예상한 대로 무척이나 큰 키였다. 단리정천과 방수립도 작은 키는 아닌데, 그들보다 반뼘은 족히 더 커 보였다.
“종남의 진산월이오.”
“진 장문인이셨구려. 반갑소.”
단리정천은 진산월을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그의 이름은 몇 번 들은 적이 있었다. 사 년 전에 진산월이 종남파의 새로운 장문인으로 취임했을 때, 대응표국에도 방문해 달라는 초청장이 날아온 적이 있었다. 물론 단리정천은 그 초대에 응하지 않았다. 이미 세력이 기울 대로 기울어서 거의 명맥이 꺼져 가는 문파의 장문인 취임식에 참석할 만큼 자신이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리정천 뿐 아니라 당시에 초청장을 받은 서안 일대의 유력자들 중 실제로 종남파를 찾아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한때는 대응표국과 종남파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단리정천의 부친인 단리광과 종남파의 전전대 장문인인 천치검 하원지는 굉장히 돈독한 사이였다. 하나 하원지가 허무하게 죽고 단리광마저 세상을 떠난 후 대응표국과 종남파의 사이는 점차로 소원(疏遠)해지더니 나중에는 거의 왕래가 없게 되었다.
지금의 단리정천에게 종남파란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고 특별히 알고 싶지도 않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오직 하나, 화산파와의 결맹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쓸데없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분란(紛亂)이 일어날 소지를 아예 없애기 위함이었다.
세 사람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었다. 곧 시비가 와서 차를 따르고 나가자 그제서야 단리정천은 진산월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께서 이번에 많은 어려움을 뚫고 종남의 본산을 찾으셨다고 들었소. 늦게나마 축하드리오.”
“별말씀을.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오.”
단리정천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진 장문인의 나이로 보아 앞으로 종남파가 과거의 성세를 되찾는 것은 시간문제 아니겠소? 그보다 문파를 정비하느라 바쁘실 텐데 본국에는 무슨 일로 오시었소?”
진산월의 시선이 단리정천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담담한 듯 하면서도 차갑고 냉정한 시선이었다.
“대응표국에서 본파의 인물을 도와 주셨다는 말을 듣고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려고 찾아왔소.”
단리정천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귀파의 인물을 돕다니…”
“얼마 전에 초가보에 쫓기던 내 사제 한 사람을 표행을 하던 대응표국의 표사들이 구해서 지켜 주었다고 들었소. 뒤늦게나마 충심으로 감사드리오.”
진산월이 정중하게 포권까지 하자 단리정천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아예 발뼘을 하거나 다른 이유를 댈 여지도 없이 사건을 기정사실화해 버리는 진산월의 모습에 내심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 단리정천은 사람을 상대하는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인물인지라 속마음을 전혀 내색하자 않은 채 오히려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소? 금시초문이구려. 방 노제, 혹시 그 일에 대해 들은 바가 있나?”
방수립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 그와 비슷한 내용을 보고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법 시일이 경과된 일이라 자세한 것은 기억나지 않는군요.”
단리정천은 짐짓 호통을 쳤다.
“그런 중요한 일이 있으면 당연히 네게 알렸어야 할 거 아닌가?”
“죄송합니다. 당시에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일을 자네에게 보고한 사람이 누구인가?”
방수립은 잠시 생각하더니 한 사람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비화수(飛花手) 오량(伍梁)입니다.”
“당장 가서 그를 불러오게.”
“알겠습니다.”
방수립이 고개를 조아리고 밖으로 나가자 그제서야 단리정천은 정색을 하고 진산월을 쳐다보았다.
“미안하오. 진 장문인의 사제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전혀 몰랐소. 요새 본국에 워낙 일감이 몰려들어 다들 정신없이 움직이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소.”
진산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단리정천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모습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무언(無言)의 시위 같기도 했다. 어쨌든 단리정천의 입장에서는 썩 기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리 상대가 일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아들뻘 밖에 되지 않는 나이에 종남파 자체도 이제 겨우 멸문을 간신히 면한 보잘 것 없는 문파가 아닌가? 하나 단리정천은 냉정하고 치밀한 성격답게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담담한 음성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진 장문인의 사제가 그런 일을 당했다니 안타까운 일이오. 듣자하니 당시 초가보의 습격으로 종남파의 모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하던데 다른 사람들의 행방은 알고 있소?”
듣기에 따라서는 대단히 무례한 질문일 수도 있었으나, 진산월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대부분은 본파로 돌아왔소.”
단리정천은 짐짓 탄성을 터뜨렸다.
“참으로 천만다행한 일이오. 역시 오랜 전통을 지닌 명문정파는 결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선인(先人)들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구려. 그런데 진 장문인은 앞으로 초가보를 어떻게 상대할 생각이오?”
단리정천의 물음은 요즘 서안 일대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의문이었다. 종남파가 비록 본산을 되찾았다고는 하나 초가보가 건재하는 한 언제 다시 예전과 같은 위험에 빠지게 될지 몰랐다. 그들은 이미 둘 중 하나가 없어져야만 다른 하나가 살아 남는 숙명(宿命)적인 관계가 되었다. 하나 누가 보기에도 두 문파의 세력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무림인들은 종남파가 자신들을 도와 줄 확실한 지원 세력을 구하지 못한다면 조만간에 다시 초가보에 의해서 처참한 멸문의 길로 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단리정천은 진산월이 어떤 대답을 할지 자못 흥미로운 모습이었다. 허나 진산월의 말은 그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본파의 철칙(鐵則)과 방식대로 상대할 거요.”
“철칙은 무엇이고, 방식은 무엇이오?”
“본파의 철칙은 본파의 문제는 본파 스스로 해결한다는 것이오. 그리고 본파의 방식은 곧 강호(江湖)의 방식과 같소.”
“강호의 방식이라면?”
“피에는 피로, 이빨에는 이빨로.”
별로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단리정천은 무언지 모를 섬뜩함을 느꼈다. 단리정천은 자신도 모르게 진산월의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강퍅할 정도로 마른 얼굴에 훌쭉한 뺨, 그리고 깊게 가라앉은 두 눈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그 얼굴을 보자 단리정천은 마음속으로 한 가시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자는 정말로 자신들의 힘만으로 초가보와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내려는구나.’
그것은 너무도 무모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으나 그렇다고 제삼자(第三者)가 나서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잠시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그 침묵은 방안으로 들어온 두 사람에 의해 깨어졌다. 조금 전에 나갔던 방수립이 다른 한 명의 장한을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그 장한은 날렵한 체구를 지닌 삼십대 중반의 사나이였는데, 눈빛이 날카롭고 얼굴이 갸름해서 날렵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비화수 오량이라는 인물로, 대응표국에서 열두 명밖에 없는 일급 표두 중 한 사람이었다. 오량은 방으로 들어온 즉시 진산월을 힐끗 쳐다보더니 이내 단리정천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부르셨습니까?”
“어서 오게.”
단리정천은 두 사람을 자리에 앉게 한 후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방 총표두에게 사정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자네를 부른 건 한 가지 일을 물어 보기 위함일세. 얼마 전에 혹시 표행을 나갔다가 종남파의 고수를 만난 적이 있나?”
오량은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머리를 끄덕였다.
“두세 달 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표행 도중에 만난 것은 아니고, 조금 특이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해 보게.”
이어진 오량의 이야기는 진산월이 송천기에에 들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낙양에서 표물이 들어와서 초가보로 운반 도중 표물 안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나서 표물을 열어보니 그 안에 피투성이가 된 의식불명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량의 말을 들은 단리정천은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표물 속에 들어 있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나?”
“운이 좋게도 제 밑에 있는 표두들 중 한 명이 얼굴을 알고 있는 자였습니다.”
“그가 누구인가?”
오량의 시선이 다시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종남파의 고수인 소벽력 응계성이라 했습니다.”
진산월은 여전히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반대로 단리정천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내게 알리지 않았나?”
“죄송합니다. 저는 며칠 후에 바로 다른 표행을 떠났고, 다른 사람들도 각기 표행에 참가하느라 미처 자세한 보고를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음. 그렇다면 응 소협에 대한 사후처리는 어떻게 했나?”
“당시 응 소협은 부상이 심하고 의식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의원을 불러 치료토록 했는데, 비록 위급한 상황은 넘겼으나 계속 의식을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습니다. 그후에 제가 장성(長城) 쪽으로 표행을 갔다와 보니 응 소협은 이미 표국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표국을 떠났다고?”
“의식이 돌아오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는 어딘가로 갔다고 하더군요. 주위 사람에게 물어 보니 그를 붙잡아 둘 특별할 이유가 없어서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리정천은 난처한 얼굴로 진산월을 돌아보았다.
“허, 일이 공교롭게 됐구려. 진 장문인의 사제는 이미 오래 전에 본국을 떠난 것 같은데, 아직 종남파로 돌아오지 않았단 말이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는 오지 않았소.”
“그렇다면 어디로 간 것인지 우리도 알 수 없구려. 별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오.”
진산월은 그 말에는 아무 대꾸도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오량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 표두께 몇 가지 물어 볼 말이 있소.”
오량은 방수립에게서 진산월에 대해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그를 향해 포권을 했다.
“진 장문인께선 서슴지 말고 물어 보십시오. 제가 아는 대로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먼저 내 사제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말해 주겠소?”
“예. 당시 저희는 낙양에서 운송한 표물을 초가보까지 운반하는 일을 맡았는데, 서안에서 백여 리쯤 떨어진 남전(藍田) 부근을 지날 때 표사 중 한 사람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표물 속에서 사람의 신음 소리 같은 것이 들리고 이상한 피비린내가 난다고 말입니다. 표물을 열어보니 그 안에 응 소협이 의식불명인 채로 누워 있었습니다.”
“당시 내 사제의 상태는 어떠했소?”
“부상이 상당히 심각했습니다. 전신에 크고 작은 상처가 많았는데, 특히 옆구리를 관통한 검상(劍傷) 때문에 피를 많이 흘려 위중한 상태였습니다. 누군가가 임시로 지혈(止血)은 한 모양인데, 그래도 계속 피가 흘러 나오고 있어서 며칠만 더 지체했다면 생명이 위험했을 겁니다.”
“…”
“응 소협을 발견한 후 저희는 표물의 최종 목적지인 초가보로 가지 않고 일단 총국(總局)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서 열흘 정도 응 소협의 상처를 치료했는데, 응 소협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지 못하고 저는 다른 표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진산월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오량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오 표두께서 그를 위해 애써 주신 것에 감사드리오.”
오량은 진산월의 행동에 놀란 듯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몰락해 버린 문파라고 해도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명문정파의 장문인이 일개 표두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아닙니다. 강호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원래 도리를 지킨다는 것이 가장 힘든 법이오.”
진산월의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말에 오량은 머쓱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진산월의 말마따나 오량이 응계성을 발견하고 초가보로 바로 가지 않은 것은 결코 수월한 선택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라면 응계성이 종남파의 인물임을 알게 되면 귀찮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모르는 척 다시 표물상자에 담아 당초 목적지인 초가보에 인계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특별히 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나 오량은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응계성을 치료했을 뿐 아니라 표행의 방향을 돌려 대응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종남파의 고수를 숙적인 초가보로 보낸다면 어떠한 일을 당할지 뻔한 상태에서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림인의 도리라고 하지만 요즘같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러한 도리를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진산월은 날카로운 첫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순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오량을 한동안 가만히 바라보다가 다시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오 표두께선 내 사제와 직접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겠구려.”
“그렇습니다.”
“표물의 주인이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겠소?”
그 말에 오량은 단리정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리정천이 오량 대신 입을 열었다.
“본국에서는 거래자의 신분은 철저하게 비밀로 하고 있소. 그건 우리뿐 아니라 어느 표국이라도 마찬가지이니 진 장문인께선 양해해 주기 바라오.”
진산월도 그 점에 대해서는 깊이 추긍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전혀 엉뚱한 질문을 했다.
“듣자하니 대응표국에는 모두 다섯 개의 지국(支局)이 있고, 그 모두가 섬서성과 하남성에 있다고 하던데 사실이오?”
단리정천은 그가 왜 이런 것을 묻는지 그의 의도를 몰라 일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으나 특별한 비밀도 아니기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렇소. 본국의 지국은 하남성에 낙양 외에도 개봉(開封)지국이 있고, 섬서성에 각기 동관(潼關)과 보계(寶鷄), 연안(延安)에 지국이 설치되어 있소.”
“그중에서도 낙양지국은 그 규모가 웬만한 표국보다 크고 직국주는 낙양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권법(拳法)의 고수로 알고 있소.”
“그렇소. 낙양지국주인 반룡권(盤龍拳) 노벽풍(路劈風)은 내가 제일 신임하고 있는 세 사람 중 하나로, 수석총표두의 지위를 맡고 있소.”
“그 노 총표두는 원래부터 낙양 출신으로, 심사가 공명정대할 뿐 아니라 고향을 무척 사랑해서 좀처럼 낙양 인근을 벗어나는 일이 없다고 들었소.”
단리정천의 눈가에 떠오른 의혹의 빛이 조금 더 짙어졌다.
“진 장문인이 본국의 노 총표두에게 그토록 관심이 많을 줄은 미처 몰랐소. 노 총표두는 몰론 보기 드문 충직한 성품의 소유자이며 낙양의 일거리도 만만치 않게 많아서 지국을 떠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소.”
진산월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고 음성 또한 변함이 없었다. 하나 그의 다음 말을 듣자 단리정천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오늘 이곳에 올 때 표국의 입구에서 한 사람을 보았소. 무척 우람한 체구에 얼굴이 대추처럼 붉고 수염을 가득 기른 호한(豪漢)이었는데, 몇 명의 수하들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더군. 혹시 그자가 누군인지 알고 있소?”
단리정천의 얼굴에 자신도 모르게 쓴웃음이 떠올랐다.
“진 장문인의 눈은 정말 날카롭구려. 진 장문인의 짐작대로 그가 바로 노벽풍이오. 오늘 본국에 일이 있어서 오대지국(五大支局)의 지국주들을 모두 소환했소이다.”
진산월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강호에서 다른 문파의 중요한 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것은 금기사항 중의 하나였다. 진산월은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없는지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대응표국을 빠져 나갔다. 단리정천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오량을 향해 말했다.
“자네도 바쁠 텐데 이만 가 보게.”
“알겠습니다.”
오량마저 밖으로 나가자 실내에는 단리정천과 방수립만이 남게 되었다. 갑자기 단리정천이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무얼 말입니까?”
“그자가 납득한 것 같나?”
방수립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신중한 표정이 되었다.
“글쎄요. 장담할 수 없겠습니다. 속마음을 알기가 무척 어려운 자입니다.”
단리정천은 피식 웃었다.
“그럴 걸세. 그자의 별호가 무엇이었는지 아나?”
“무엇입니까?”
“삼절무적. 몇 년 전에 한때 섬서와 하남을 중심으로 조금 알려졌던 이름이지. 심기와 배짱, 말솜씨가 뛰어나다고 하여 붙여진 별호일세.”
방수립은 고래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로는 보이지 않던데요.”
“나도 소문으로만 들었지. 그런데 그동안 조금 바뀐 모양이야. 말은 줄어들고 무공은 부쩍 늘었군. 하지만 사람이 바뀌었다고 심기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
“그렇군요. 아무래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 자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지.”
“그나저나 화산파에서 왜 그런 쓸데없는 제의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번거로운 일도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거야 모르지. 그들이 결맹 조건으로 그런 걸 내세운 이유가 있을 테지만, 우리로서는 약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하고라도 반드시 진행해야 할 일일세.”
방수립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꼭 그들과 결맹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들 힘만으로 잘해 왔지 않습니까?”
단리정천의 눈이 화살처럼 그의 얼굴에 꽂혔다. 그는 정광(精光)이 번뜩이는 눈으로 방수립을 쳐다보다가 단호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자(强者)만이 살아 남는 게 무림일세. 만약 스스로의 힘으로 강자가 될 수 없다면 남의 힘을 빌려서라도 강자가 되어야만 하네.”
방수립은 한동안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강호에서 살아가는 방법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