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2권 검기충천(劍氣沖天)편 : 8화
제120장. 질풍노도(疾風怒濤)
단리정천의 입가에는 평소와는 완연히 다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오늘 대응표국은 정식으로 당금 강호의 최고 세력 중 하나인 화산파와 결맹(結盟)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맹식의 입회인으로 서안 일대의 유력자 세 사람이 참석했다. 오늘을 기해 대응표국은 적어도 섬서성에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방파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결맹식을 위해서 화산파에서는 두 명의 장로와 다섯 명의 일대 제자, 그리고 한 명의 집법을 파견했으며 이러한 대규모의 파견은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지금 단리정천의 거처인 풍뢰각(風雷閣)의 대청에는 이십 명에 가까운 인물들이 자리해 있었고, 그들 중 고수 아닌 자가 없었다. 대응표국에서는 국주인 단리정천을 비롯하여 철수비도 방수립, 반룡권 노벽풍, 혈령도(血翎刀) 강소호(姜小虎) 등 세 명의 총표두와 여섯 명의 일급표두들이 참석했고, 화산파에서는 십대장로 중의 난매신검 해정설과 검군(劍君) 남사일(藍射日), 집법인 신산 곡수, 그리고 청평검객 천개방과 남연 백수함을 비롯한 다섯 명의 일대제자들이 와 있었다.
입회인들의 신분 또한 단리정천을 흡족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서안의 최고 거부인 손노태야와 화월루의 주인인 화대부인이 참석했을 뿐 아니라 십여 년 동안이나 칩거해 있던 금륜장의 장주인 금륜존자 고소명 또한 실로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에서도 고소명은 단리정천의 오랜 친구로, 초관이 죽을 때까지는 결코 강호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을 깨고 어려운 걸음을 했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그를 쳐다보는 단리정천의 두 눈에는 고마움과 함께 흐뭇한 기색이 가득 담겨 있었다.
결맹식은 단출하게 끝이 났다. 대응표국과 화산파가 서로 결맹을 약속한 증서(證書)를 교환하고 예물을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다. 대신 결맹식이 끝난 후 베풀어진 주연(酒宴)은 나름대로 성대한 것이었다.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녀나 가희(歌姬)들을 부르지는 않았으나 대신 술과 음식만큼은 화대부인의 도움을 받아 특별히 최고급으로 장만을 했다.
넓은 대청의 제일 상석(上席)에는 대응표국의 국주인 단리정천과 화산파의 두 장로가 앉아 있었고, 그 옆으로 세 명의 입회인들과 철수비도 방수립, 신산 곡수가 차례로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 일곱 사람은 대응표국과 화산파뿐 아니라 서안 일대의 유력한 세력가들이었다.
특히 신산 곡수는 이번 결맹식을 성사시킨 주인공이기도 했다. 대응표국에 처음 결맹을 제안한 사람도 그였고, 직접 단리정천을 만나 결맹에 관한 제반 사항들을 의논한 사람도 그였다. 지위는 화산파의 두 장로가 훨씬 높을지 몰라도 이번 일의 실질적인 책임자는 그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단리정천은 화산파의 두 장로와 술잔을 나눈 후 특별히 그에게 술을 따라 주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했다.
“이번에 곡 집법이 애를 많이 썼네. 앞으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말하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도와주겠네.”
곡수는 조용하게 미소지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국주께 아주 영리하고 재질이 뛰어난 손자분이 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허허… 떠들기 좋아하는 자들이 헛소리한 것을 들은 모양이군. 이제 겨우 아홉 살짜리 꼬마가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나겠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있겠습니까?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다섯 살 때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떼고 일곱 살 때 스스로 시(詩)를 짓기 시작했다면 천재(天才)라고 할 수 있지요. 게다가 무학(武學)에 대한 재질도 탁월해서 벌써부터 미래의 강북제일기재(江北第一奇才)라고 하더군요.”
“허허…”
단리정천은 난처한 듯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얼굴 한구석에는 흐뭇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첫째 아들은 천부적으로 몸이 허약했고, 둘째는 성격이 급하고 거칠어서 진작에 그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그래서 그는 표국을 키우는 데는 그런데로 성공했을지 몰라도 자식농사만큼은 완전히 실패했다고 씁쓸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첫째의 아들이 어려서부터 문무(文武)에 모두 탁월한 재주를 발휘하여 그를 기쁘게 했던 것이다. 그 아이의 이름은 단리상(段里翔)이라 했는데, 그에 대한 단리정천의 사랑은 끔찍할 정도였다.
단리정천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손자를 칭찬하는 곡수의 말에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졌으나, 역시 노련한 인물답게 한 줄기 의구심을 느꼈다. 곡수는 신산이란 별호대로 지략이 뛰어나고 심기가 깊은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단지 입에 발린 칭찬을 하기 위해서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곡수는 단리정천의 그런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이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가 굳이 단리 국주의 손자분 이야기를 한 것은 그 소문을 들은 본파의 남 장로님께서 몹시 관심을 기울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에 단리정천의 시선이 자신도 모르게 바로 옆에 앉아 있는 남사일에게로 향했다.
“그게 정말이오, 남 대협?”
남사일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오면서 그 아이에 대한 말을 많이 들었소. 괜찮다면 내가 그 아이를 한번 보고 싶은데 국주의 의향은 어떠시오?”
단리정천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다 뿐이오? 그런데 그 아이가 남 대협의 눈에 들지 모르겠구려.”
단리정천의 얼굴에는 기쁜 표정이 가득했다. 검군 남사일은 비단 화산파의 장로일 뿐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강호 무림의 절정검객이었다. 그는 성격이 고아(高雅)하고 인물됨이 준수해서 젊었을 적에는 많은 여인들의 흠모를 받았고 나이를 먹어서는 후배와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다. 검법 실력은 화산파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였고, 특히 화산파의 양의무극검법(兩儀無極劍法)을 대성하여 능히 검선(劍仙)이라 할 만 했다.
남사일이 눈여겨보겠다는 것은 곧 제자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뜻이니, 단리정천으로서는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는 희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남사일은 고고한 성품만큼이나 사람을 보는 눈도 까다로워서 아직까지 제자는 단 두 명만을 두었을 뿐이고, 그들은 모두 강호의 이름난 검객이 되었다.
옆에서 이들의 말을 듣고 있던 철수비도 방수립이 눈치 빠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가 상아(翔兒)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오, 그래 주겠나?”
단리정천이 반색을 하자 방수립은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황급히 대청을 벗어났다. 단리정천은 자신의 손자인 단리상의 재질에 대해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남사일이 그 아이를 보게 되면 제자로 받아들일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기재가 뛰어난 단리상을 누구의 문하(門下)로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단리정천으로서는 그야말로 앓던 이를 빼는 것처럼 통쾌하고 기꺼운 마음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절로 커진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 남 대협. 한 잔 받으시오.”
그가 남사일에게 술을 따라 주고 있을 때였다. 대청을 나갔던 방수립이 다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단리정천은 그 광경을 보고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방 노제, 왜 벌써 돌아왔나? 상아가 자고 있나?”
방수립의 얼굴에는 묘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방수립이 아무 말도 못하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자 단리정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그러나? 무슨 일이 있나?”
방수립은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누가 찾아왔습니다.”
단리정천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는가? 찾아온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내일 다시 오라고 하게.”
방수립이 무어라고 말하기도 전에 한 사람이 불쑥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모습을 본 순간, 장내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껑충하게 큰 키에 앙상하게 마른 몸, 유난히 고적한 눈빛에 왼쪽 뺨에는 칼자국이 나 있는 괴인의 모습은 보는 이를 주눅들게 하기에 족했다.
천개방과 백수함은 그 괴인이 자신들이 일전에 만났던 정체 모를 신비의 고수임을 알고 눈을 크게 치켜 떴고, 단리정천은 낭패스런 모습이었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괴인에게서 풍겨 나오는 날카로운 예기를 느끼고 놀라움과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서로 수군거리며 괴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평상시의 모습을 회복한 단리정천이었다.
“진 장문인께서 이 야심한 시각에 무슨 일이시오?”
진산월은 아무 말 없이 주위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무언지 모를 섬뜩함을 느껴야만 했다. 그들 중 평상시의 안색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화산파의 두 장로를 비롯해서 서너 명에 불과했다.
진산월은 특히 화산파의 인물들을 주목했다. 두기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진산월은 이런 상황에서 그를 만나지 않은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진산월의 시선은 제일 마지막으로 단리정천에게 고정되었다. 단리정천의 얼굴에 한 줄기 노여움의 빛이 떠올랐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기별도 없이 불쑥 이곳에 들어오다니 아무리 일파의 장문인이라고 해도 너무 무례한 게 아니오?”
진산월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단리정천의 눈에서 싸늘한 한광(寒光)이 줄기줄기 뿜어 나왔다.
“종남파의 이름을 믿고 본국을 우습게 본 것이라면 착각도 보통 큰 착각이 아니라는 걸 말해 주고 싶군. 오늘은 본국에 중요한 일이 있으니 그만 돌아가시오. 하지만 오늘의 무례는 가까운 시일 내에 반드시 따져볼 것이오.”
종남파라는 말에 화산파의 고수들은 모두 귀가 번쩍 뜨이는지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그들은 최근에 새롭게 부활했다는 종남파의 장문인이 설마 이토록 괴상한 몰골의 사나이일 줄은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진산월의 입이 열리며 차갑고 냉정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한 가지만 말해 주면 이대로 돌아갈 뿐 아니라 오늘 일에 대해서도 정중히 사과를 하겠소.”
“그게 무엇이오?”
진산월은 단리정천의 두 눈을 빤히 응시했다.
“응계성을 어디로 옮겼소?”
단리정천은 순간적으로 움찔하다가 이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옮기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오전에 말했다시피 응 소협은 자기 스스로…”
“내 말을 못 알아듣는군.”
진산월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하나 그 무표정한 얼굴에서 흘러 나오는 무심한 음성을 듣자 단리정천은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싸늘해졌다.
“나는 당신에게 부탁을 하는 게 아니라 요구를 하는 거요. 내 사제를 내놓으시오. 그러면 지금까지의 일은 불문(不問)에 붙여 주겠소.”
단리정천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한 모습이다가 이내 얼굴이 붉게 상기되며 성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라고?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거요?”
진산월은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단리정천이 계속 엉뚱한 말을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는 수밖에 없었다. 피에는 피로, 이빨에는 이빨로 대항하는 것이 강호의 철칙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속이고 응계성을 감금한 이상 그들은 종남파의 적(敵)일 뿐이었다.
진산월은 주저 없이 용영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진산월이 갑자기 우윳빛 검광을 뿌리는 용영검을 뽑아 들자 장내의 공기가 급격히 식어지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리 성격이 급해도 그렇지, 지금 이곳에는 대응표국과 화산파의 고수들이 스무 명 가까이 자리하고 있었다. 천하에 다시없는 고수라 해도 단신(單身)으로 이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곳은 대응표국의 한복판이 아닌가? 제정신이 아닌 다음에야 야밤에 홀로 대응표국에 뛰어들어 수십 명의 절정고수들 앞에서 검을 뽑아 들고 시위를 할 리가 없었다.
단리정천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가만히 진산월을 주시하다가 이내 두 눈에서 신광을 번뜩이며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보자보자 하니까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겨우 시시한 종남파의 장문인 따위가 감히 본국을 우롱하려 하다니. 방 노제, 저자에게 본국이 호락호락한 곳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주게.”
방수립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대응표국의 다른 표두들에게 눈짓을 했다. 이미 술자리는 더 이상 진행될 상황이 아니었다. 대청에 있던 여섯 명의 일급표두들이 하나둘씩 진산월을 에워쌈에 따라 살벌한 기운이 장내를 뒤흔들고 있었다. 진산월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여섯 명의 일급표두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단리정천을 쳐다보았다. 언뜻 그의 왼쪽 뺨에 나 있는 상처가 꿈틀거리며 차갑고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종남파를 건드린 대가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이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그를 에워싼 채로 다가오고 있던 여섯 명의 일급표두들은 사실 자신들이 전부 진산월을 향해 덤벼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상대가 일파의 장문인이고 최근에 서안 일대를 뒤흔들었던 인물이라고 해도 자신들 중 두세 명만 나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진산월이 자신들을 향해 몸을 날렸을 때 그들은 상대의 무모함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 눈부신 검광이 폭죽처럼 피어오르며 그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마치 느닷없는 검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뜻밖의 사태에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전력을 다해 병기를 휘둘렀다.
파파파팍!
삽시간에 세찬 경기와 구름 같은 검풍(劍風)이 장내를 휩쓸어버렸다. 쌍섬창(雙閃槍) 진충(秦沖)은 짧은 두 자루의 용호단창(龍虎短槍)에 나름대로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그 실력 또한 뛰어났다. 그래서 대응표국에 들어온 이후 불과 삼 년 만에 일급표두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절친한 친구인 무영표(無影豹) 설황(薛愰) 또한 단사모(短蛇矛)의 고수였다.
두 사람의 병기는 모두 접근전에 유리한 것이었으며, 그래서 진충과 설황은 우리 둘이 합치면 접근전에서는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전력을 다해 상대의 검광을 뚫으려고 했다. 하나 채 단창을 절반도 휘두르기 전에 진충은 가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고 입을 딱 벌린 채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그는 가슴이 쩌억 갈라진 채 전신에 경련을 일으키다가 숨이 끊어졌다. 설황의 최후는 그보다 더욱 비참했다. 그는 비록 자신의 가슴을 향해 날아오는 첫 번째 검광을 피할 수 있었으나, 미처 몸을 가누기도 전에 뒤이어 날아오는 두 번째 검광에 옆구리를 잘렸다. 그의 신형이 휘청거리는 순간, 어느새 다가온 세 번째 검광이 그의 목덜미를 그대로 가르고 지나갔다. 설황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목에서 피분수를 뿜으며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단숨에 두 명의 고수를 베어넘기고도 검광은 여전히 다른 네 명을 향해 폭풍노도와 같은 기세로 휘몰아쳐 갔다. 네 사람은 안색이 시커멓게 변한 채 사력을 다해 맞섰으나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검광의 움직임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이토록 무서운 검법이 있다니…’
경악과 공포가 그들의 전신을 지배할 때 처절한 비명 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크아악!”
“아악!”
순식간에 다시 두 명의 표두들이 허물어지듯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멈춰라!”
참지 못한 방수립이 다급한 외침을 내지르며 장내로 뛰어들었으나 이미 나머지 두 명의 표두들도 허리가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에 나뒹군 다음이었다. 갑자기 주위가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중인들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두 눈을 부릅뜬 채 진산월을 쳐다보고 있었다. 특히 단리정천과 방수립을 비롯한 대응표국의 인물들은 거의 망연자실한 모습들이었다.
그야말로 숨 몇 번 내쉴 만한 짧은 순간에 대응표국의 일급표두 여섯 명이 처참한 몰골로 비명횡사해 버린 것이다.
“이… 이런 악독한…”
단리정천의 입에서 고함인지 신음인지 모를 음서이 새어 나왔다. 처음의 경악이 가시자 터질 듯한 분노가 그의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태워 버렸다.
어떻게 모은 고수들인가? 가뜩이나 일류고수들의 수가 부족하여 온갖 정성을 기울여 모은 열두 명의 일급표두들 중 절반이 눈깜박할 새 죽어 버렸으니 단리정천은 솟구치는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나 그가 다음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진산월은 어느새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방수립과 반룡권, 노벽풍, 혈령도 강소호 등 세 명의 총표두들이 일제히 진산월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산월은 주저 없이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미 그는 오늘 크게 살계(殺戒)를 어기기로 결심했으며, 일단 마음을 정한 이상 행동이나 손속에 추호의 사정도 보려 하지 않았다. 방수립 등 세 명의 총표두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급표두들 중 절반이 죽은 이상 대응표국과 종남파는 이미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원한을 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진산월을 향해 덤벼드는 방수립의 양손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반 자 길이의 비도(飛刀)가 세 개씩 쥐어져 있었다. 바로 그의 명성을 떨치게 했던 무극비도(無極飛刀)를 뽑아 든 것이다.
예전 같으면 아무리 막강한 상대를 만나도 무극비도를 손에 쥐고 있으면 전혀 두렵지 않았다.
하나 지금 그는 마음 한구석으로 씁쓸한 탄식을 토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너무 성급했던 것일까?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는 어쩌면 절대로 적으로 삼으면 안 될 자를 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하나 생각은 생각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는 자신의 앞으로 구름처럼 자욱하게 펼쳐지는 검의 그림자를 보며 가볍게 진저리를 쳤다.
‘대체 이게 무슨 검법이기에 이토록 가공스런 변화를 일으킨단 말인가?’
그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양손을 가슴 앞으로 끌어올려 십자로 교차시켰다가 세차게 뿌려댔다.
쐐애액!
섬뜩한 파공음과 함께 그의 손에 쥐어져 있던 여섯 개의 무극비도들이 검영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노벽풍 또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풍차처럼 마구 휘둘렀다. 그에 따라 시퍼런 강기벽(?氣壁)이 형성되더니 이내 검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노벽풍이 회심의 절기로 생각하는 반룡강기(盤龍?氣)를 뿜어낸 것이다.
이 반룡강기와 노룡구권(怒龍九拳)으로 노벽풍은 대응표국의 낙양지국주 자리를 차지했고, 하남성 전역에 자신의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노벽풍의 반룡강기는 방수립의 무극비도와 비슷한 시기에 발출되었기나 이내 속도가 빨라지더니 무극비도보다 먼저 검영에 부딪혔다.
파아아…
폭음이 터지리라는 당초의 예상과는 달리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고 반룡강기는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수십 개의 검영에 부딪히자 커다란 벽을 형성했던 반룡강기가 잘게 쪼개져 버린 것이다. 그 바람에 주위 사방이 쪼개진 강기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엉망이 되어 버렸다.
그 순간, 방수립이 발출한 여섯 개의 무극비도는 처음과는 달리 점차로 빨라지더니 엄청난 속도로 검영을 뚫고 들어갔다.
그들의 연수합격(連手合擊)은 능히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먼저 노벽풍의 반룡강기가 상대의 공세를 허문 다음 속도를 조절한 방수립의 무극비도가 그 틈을 노리고 상대를 공격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까지 이러한 연수를 네 번밖에 하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자신들 개개인보다 고강한 네 명의 고수들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과연, 방수립의 무극비도들은 반룡강기에 부딪혀 급격히 약해진 검영을 뚫고 진산월의 상반신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짓쳐 갔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그들의 뒤에 서 있던 혈령도 강소호가 시뻘건 핏빛 혈도(血刀)를 들고 무극비도의 뒤로 바짝 날아들었다.
진산월의 손에 들린 용영검이 한차례 흔들렸다.
그러자 귀청 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그토록 가공할 속도로 날아들던 여섯 개의 무극비도들이 모두 박살이 난 채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따땅!
그 부서진 파편들 중 일부는 무극비도를 바짝 따라오던 강소호에게로 날아갔다. 어쩔 수 없이 강소호는 몸을 비틀며 파편들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진산월이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그었다.
쫘악!
마치 허공이 반으로 갈라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뒤로 물러섰던 강소호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혈령도를 휘둘렀으나 칼과 함께 그대로 몸이 두 쪽이 나버렸다.
“크아아악!”
끔찍하리만치 커다란 비명과 함께 질펀한 피비린내가 화악 풍겨왔다. 진산월이 펼친 것은 천하삼십육검 중의 천하수조라는 초식이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초식이었으나, 장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에는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검초로 보였다. 강소호의 비명 소리가 채 중인들의 귓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진산월의 신형은 어느새 허공을 날아 방수립과 노벽풍에게로 날아가고 있었다.
“거… 검귀(劍鬼)로구나!”
방수립과 노벽풍이 모두 안색이 시퍼렇게 변한 채 뒤로 물러났다. 자신들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진산월의 검법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것이다.
하나 진산월의 검은 그들이 순순히 물러나게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안개처럼 자욱한 검영이 그들을 휘감아 갔다. 그것은 그들이 물러나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랐다. 다급해진 두 사람은 전력을 다해 검영을 벗어나려 했다.
한쪽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단리정천 또한 노호성을 지르며 단숨에 허공을 날아 검영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놈!”
그의 손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대응신도가 굳게 쥐어져 있었다.
까깡!
단리정천의 도법은 과연 놀라워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던 방수립과 노벽풍을 그 살인적인 검영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하나 그 덕분에 단리정천은 진산월이 펼쳐낸 검영의 한복판에 떨어지게 되었다. 일단 검영 속에 빠지자 단리정천은 전신이 차가운 빙굴(氷窟)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한기를 느끼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바깥에서 보던 것보다는 진산월의 검기가 훨씬 더 가공스럽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하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고 대응신도를 두 손으로 움켜잡은 채 질풍처럼 사십팔도(四十八刀)를 휘둘렀다.
그와 함께 은은한 뇌정(雷霆) 소리가 들렸다.
우우웅…
단리정천의 독보적인 성명절기인 풍뢰도법(風雷刀法) 중의 운한풍뢰(雲漢風雷)가 펼쳐진 것이다.
단리정천의 도법이 전개되면 전개될수록 뇌정 소리도 점점 커졌고, 그에 따라 상상도 못할 무거운 압력이 주위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이 풍뢰도법은 도법 자체 내에 기이한 암경(暗勁)을 지니고 있어 궁극에 이르면 칼로 베지 않더라도 도법 내의 암경만으로 상대를 질식시킬 수 있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하나 진산월은 그러한 압력을 조금도 받지 않는지 처음과 같은 표정을 유지한 채 검을 앞으로 쭈욱 내밀었다.
그러자 그토록 무성누 기세로 다가들던 단리정천의 도영 한가운데가 뻥 뚫리며 시퍼렇게 굳어진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단리정천은 상대의 가벼운 듯한 일검에 엄밀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운한풍뢰 초식이 너무도 쉽게 뚫리자 벼락 같은 노호성을 내지르며 풍뢰도법의 다른 절초들을 거푸 펼쳐냈다.
“이야압!”
우르르릉!
대청이 송두리째 뒤흔들릴 정도로 굉량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십여 초가 번개같이 지나갔다. 대청은 이미 처음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폐허처럼 변해 있었다.
수십 명을 수용할 정도로 넓지 않았다면 진작에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단리정천은 처음에는 팽팽하게 맞서는 듯했으나, 진산월의 검이 움직일수록 조금씩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무시무시한 도풍(刀風) 속을 무풍지대처럼 파고들어오는 상대의 검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설마 이놈이 쌍염라와 전괴를 단신으로 죽였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인가?’
그는 그동안 자신의 귀에 숱하게 들려오던 진산월과 종남파에 대한 소문을 전적으로 믿지 않고 있었으나, 막상 진산월과 싸우게 되자 두려운 마음이 덜컥 들었다.
상대는 전력을 기울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자신은 벌써 전신이 땀투성이가 되어서 조금씩 숨결이 가빠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라면 앞으로 삼십 초를 넘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단리정천이 몰리는 것을 알았는지 방수립과 노벽풍이 서로 시선을 마주치더니 조금씩 격전장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평상시라면 단리정천의 신분을 생각해서 합공(合攻)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앞뒤를 가릴 겨를이 없었다.
자칫하면 대응표국 자체가 허무하게 종말을 맞이할지도 몰랐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 때문임을 생각하면 너무도 어이없고 허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갑자기 진산월의 검이 조금 전과 비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지기 시작했다. 몸이 움직이는 속도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초식이 변화하는 속도만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신속해졌다.
그 바람에 가뜩이나 몰리고 있던 단리정천의 상황이 심각할 정도로 급박해졌다.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방수립과 노벽풍이 진산월의 양옆에서 번개같이 다가들었다.
방수립은 어느새 다시 여섯 개의 무극비도를 발출했고, 노벽풍은 노령구권 중의 절초를 펼쳐 진산월의 옆구리를 노렸다. 단리정천 또한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풍뢰도법 중의 최절초인 구주풍뢰(九州風雷)를 펼쳐냈다.
꽈르릉!
세 명의 절정고수들의 합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딱 벌리게 할 정도로 가공스러웠다.
하나 그 순간 진산월의 검은 허공을 미끄러지듯 유연하게 움직이며 수십 개의 검영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 검영들은 허공으로 비산했다가 순식간에 서로 뭉치더니 여섯 개의 검광으로 변해 단리정천과 방수립 등을 향해 폭사되었다.
바로 절세무적의 유운검봉이 펼쳐진 것이다.
꽈꽝!
검광과 도풍이 마주쳤는데 어이없게도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 폭음 속에 두 개의 비명 소리가 묻혀 버렸다.
“으아악…!”
세찬 경풍이 사방을 휩쓰는 가운데 드러나는 전경은 중인들을 경악케 하기에 족한 것이었다.
두 주먹만으로 달려들었던 노벽풍은 양팔이 잘려진 채 피바다 속에 쓰러져 있었고, 방수립 또한 부서진 무극비도의 파편이 전신에 박힌 채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단리정천은 앞가슴이 피범벅이 되어 비틀거리며 계속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었는지 한바탕 검은 피를 게워냈다.
“으웩!”
진산월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상태였다. 그의 왼쪽 소맷자락에는 비도가 지나간 구멍이 선명히 뚫려 있었고, 허리 부근의 옷자락도 잘려져 약간의 선혈이 내비치고 있었다.
하나 중인들이 놀랄 사이도 없이 진산월은 다시 몸을 날려 단리정천을 향해 돌진해 갔다.
단리정천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있다가 진산월이 자신에게 덤벼들자 얼굴이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그로서는 지금 서 있기도 벅찬 상태였으니 상대의 일검도 받아낼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하나의 검광이 진산월의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그 검광이 날아드는 속도는 그야말로 기경(奇驚)스러울 정도여서 알고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진산월은 용영검을 휘둘러 검광을 막았다.
깡!
불똥이 튀기며 장내에 잠시 적막감이 감돌았다.
진산월은 돌진하던 몸을 멈추고 검광이 날아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난매신검 해정설이 검을 든 채로 침중한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