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4화
제126장. 십인십색(十人十色)
종남파의 본산에 가까워질 때까지 응계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진산월을 쳐다보며 퉁명스런 음성으로 물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을 했던 거요?”
진산월의 대답은 간단했다.
“본파의 무공을 열심히 닦았다.”
응계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걸 물은 게 아니란 걸 알지 않소? 삼년 동안 소식 한 장 없다가 불쑥 나타난 장문사형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수가 되어 있었소. 유운비수(流雲飛手)로 그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오. 나로서는 대체 장문사형이 어떻게 그런 고수가 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단 말이오.”
“내 대답대로다. 너도 열심히 수련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수련이라면 나도 어지간히 했었소. 설마 장문사형이 사라진 동안 내가 빈둥거리며 놀고 있었다고 생각했단 말이오?”
응계성이 게으르거나 나태한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진산월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응계성은 화급한 성격만큼이나 호승심이 강해서 자신이 다른 사형제에게 뒤처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있는 소지산은 물론이고, 매상에게도 뒤지지 않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심지어는 가끔 진산월에게도 투쟁심을 보여서 주위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그런 응계성이니 만큼 지난 삼년 간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해왔는지는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그는 종남파의 재건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강호의 이름난 고수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언젠가 돌아올 진산월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불철주야 무공수련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의복면인의 암습에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진산월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말았으니 지금 응계성이 느끼고 있는 참담함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진산월은 그런 응계성의 심정을 충분히 짐작하고 있기 때문에 가만히 그를 응시하고 있다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인연이 닿아서 선대(先代)의 유진(遺眞)을 얻을 수 있었다. 너보다는 내가 운이 좋았던 거지.”
응계성은 상처투성이 얼굴에 피식 미소를 떠올렸다.
“그런 식으로 나를 위로할 필요는 없소. 장문사형의 변해 버린 물골만 보아도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까. 운이라면 그런 꼴을 당하고도 죽지 않은 내가 더 좋을 거요.”
응계성의 얼굴에 한 줄기 감회 어린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튼 이제 비로소 본파도 어디에 뒤지지 않는 절정고수를 가지게 되었구려.”
단 한 명의 절정고수라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그동안 얼마나 갈망해 왔던가? 무너져 가는 문파의 마지막 끝자락에 서서 자신의 미약한 힘을 원망하며 지내온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은 단순히 응계성이 감상(感傷)적인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두운 산길을 조금 더 올라가자 완만한 곡선을 그린 산모퉁이가 나타났다. 산모퉁이를 돈 응계성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하염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비록 주위는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래도 응계성은 똑똑하게 볼 수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울창한 수림 사이에 그림처럼 자리 잡고 있는 고풍스런 전각들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전각 하나하나마다 그리운 추억이 담겨져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곳을 그리며 뜬눈으로 지새운 밤은 셀 수도 없을 것이다. 영영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한 생각에 잠에서 깨어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응계성은 심약(心弱)한 사람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마음속의 격동을 멈추기 어려웠다.
그때 하나의 손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응계성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 손의 임자가 진산월임을 알 수 있었다. 그 손에서 따뜻한 기운이 흘러나와 그의 몸과 마음을 적셔 주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가늘게 떨리고 있는 응계성의 어깨를 부드럽게 안으며 조용하면서도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려가자. 모두들 기다리고 있다.”
응계성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끝내 고개를 돌려 진산월을 쳐다보지 않았다. 진산월 또한 그의 표정을 살피려 하지 않았다. 어떤 일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법이다.
응계성을 본 방취아는 아무 말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누가 죽기라도 했느냐? 울기는 왜 울어?”
응계성은 못마땅한지 눈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으나 방취아는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생사(生死)도 알지 못했던 응계성이 살아돌아왔다는 기쁨과 박박 깎은 머리에 다리를 절고 있는 그의 비참한 모습이 뒤섞여 그녀는 눈물짓게 한 것이다.
응계성은 더 이상 그녀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그의 시선으로 한쪽에 뚱하니 서 있는 소지산의 모습이 들어왔다. 소지산은 큰 병을 앓은 사람처럼 창백하고 핼쑥한 낯빛이었으나 응계성과 시선이 마주치자 하얀 이를 드러내며 그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구나. 몸이 나으면 일전에 못다한 승부를 겨뤄 보자.”
응계성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관(棺) 속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온 것 같은 꼴로 나와 승부가 될 것 같으냐?”
“해보기 전에는 모르지.”
“흥! 말솜씨가 제법 늘었군. 그동안 어디 가서 말하는 법이라도 배워 온 모양이구나?”
소지산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응계성 또한 그와는 더 말을 나누기 싫다는 듯 휑하니 몸을 돌려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전흠이 인상을 찡그리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저자들은 사형제가 아니라 철천지원수간 같군. 어째 이놈의 문파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놈이 한 놈도 없는지 모르겠구나.’
그때 진산월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번에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수고했다.”
전흠은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더니 냉소를 날렸다.
“장문인이라면 장문인 노릇 좀 제대로 하시오. 문파에 외적(外敵)이 쳐들어왔는데 장문인이란 자는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이게 정상적인 문파라고 할 수 있겠소?”
어지간한 사람이라도 문하제자에게 이런 식의 말을 들었다면 얼굴이 시뻘겋게 상기되었을 것이다. 하나 진산월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맞는 말이다. 조심하도록 하지.”
전흠은 진산월이 자신의 말에 순순히 수긍할 줄 미처 몰랐는지 오히려 약간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일파(一派)의 장문인이라면 그에 따르는 위엄과 권위가 있어야 했다. 비록 자신이 순간적인 분기(憤氣)를 참지 못하고 심한 말을 했으나, 말을 내뱉고도 장문인에게 너무 함부로 말을 연 것이 아닌가 하여 속으로 불안했던 참이었다.
전풍개가 부상으로 침상에 누워 있기에 망정이지, 전풍개가 있는 자리였다면 감히 이런 식의 말을 꺼낼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전흠은 어이가 없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해서 진산월을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그런데 진산월은 그의 어깨를 한차례 툭 치더니 이내 몸을 돌려 소지산에게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네. 멍청한 거야, 아니면 성격이 좋은 거야?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도 않단 말야?’
그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진산월의 뒷등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소지산에게 다가가서 그의 왼쪽 팔을 살짝 만져 보았다.
“팔은 어떠냐?”
“조금씩 감각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한 달 안으로 다시 예전처럼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기간을 열흘 이내로 줄일 수 있겠느냐?”
소지산은 진산월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진산월은 조용한 음성으로 말을 덧붙였다.
“초가보가 한 달씩이나 기다려 주지는 않을 것이다.”
소지산은 거의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노력하겠습니다.”
진산월도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소지산은 말수가 적은 만큼이나 자신이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의 노력하겠다는 짧은 말 속에는 그만의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는 셈이었다.
소지산의 시선은 저 멀리에 한쪽 다리를 질질 끌며 위태롭게 걷고 있는 응계성에게로 향했다.
“계성은 이번에 혹독하게 당한 모양이군요.”
“그래, 살아 있는 게 다행이었지.”
“계성을 저런 꼴로 만든 자는 누굽니까?”
진산월은 응계성에게 들은 이야기를 짤막하게 해주었다.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소지산은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더니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석가장이 초가보와 선이 닿아 있다는 이야기군요.”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석가장의 누군가라는 말이지.”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석가장의 십이지공자들은 도선출재 때문에 각기 천하의 이름난 문파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러니 그들 중 초가보와 연줄이 있는 인물이 있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느냐? 계성이 찾아간 자가 하필이면 그쪽의 인물이라는 것이 문제지.”
“우연치고는 아주 지독한 불운이군요.”
진산월은 그 말에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혼잣말처럼 내뱉은 중얼거림이 소지산의 귀에 들려왔다.
“단순한 불운으로만 그치면 좋을 텐데…”
소지산은 고개를 돌려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진산월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으나 소지산은 그의 눈에서 한 줄기 근심 어린 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산월은 대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일까?
진산월은 이내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갈 노인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태진각에 있을 겁니다. 요새는 거의 거기에서 나오지 않더군요.”
진산월은 어찌된 사정인지 짐작 가는 것이 있었다. 태진각은 유소응과 방호의 숙소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갈 노인은 아마도 유소응 때문에 하루의 대부분을 그곳에 머무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갈 노인에게 계성의 치료를 부탁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렇다.”
소지산의 얼굴에 씁쓸한 웃음이 떠올랐다.
“요새 갈 노인의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험한 소리를 들을 각오를 하셔야 할 겁니다.”
“그거야 늘 상 듣는 소리지.”
진산월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여 태진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지산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진산월을 보자마자 갈 노인은 펄쩍 뛰어오르며 마구 소리를 질러대는 것이었다.
“이 사기꾼 같은 놈아! 한 놈만 치료해 주면 된다며? 사람을 부려 먹어도 정도가 있지 이건 아예 줄줄이 다친 놈들 천지인 곳에 노부를 팽개쳐 놓고 네놈은 어디 가서 놀다 와? 그러고도 네놈이 한 문파를 책임지는 장문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
아닌게 아니라 종남파는 초가보의 두 번째 공격을 물리치느라 대부분의 고수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왼쪽 팔을 크게 다친 전풍개와 나월의 수라삭에 가슴이 베인 송천기의 상처가 특히 심해서 갈 노인은 그들을 치료하느라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지금도 갈 노인은 환약을 만드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진산월은 그의 욕설에 가까운 호통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그가 만들고 있는 환약을 쳐다보았다.
“내가 듣기로는 그들의 상처가 대부분 외상(外傷)이라고 하는데, 그 환약은 어디에 쓰려고 만드는 거요?”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다시 진산월에게 무어라고 소리치려던 갈 노인이 웬일인지 찔끔하며 말을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다 쓸 데가 있으니까 만드는 거다. 노부가 말하면 네놈이 알아듣기나 하느냐?”
“말해 보시오, 알아들을지도 모르니.”
진산월이 추궁할수록 갈 노인의 얼굴에 당황스러런 표정이 떠올랐다.
“일 없다. 이건 노부의 몇 안 되는 밑천인데 네놈에게 알려 줄 것 같으냐? 아무튼 그건 그렇고…”
갈 노인은 진산월이 환약에 대해 계속 물을 것이 두려운지 재빨리 화제를 바꾸었다.
“이번에 말을 들으니 웬 다리병신과 같이 왔다고 하던데, 설마 노부에게 그놈 다리까지 고쳐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는 미리 엄푸를 놓았으나, 진산월은 오히려 반색을 했다.
“갈 노인은 정말 눈치가 빨라서 말하기가 편하구려. 내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거요?”
갈 노인은 멍청스런 표정이 되었다가 다시 불같이 화를 내었다.
“이런 순 날도둑놈 같으니라고… 절대로 안 한다! 내가 왜 그런 생고생을 해야 한단 말이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부드러웠던 진산월의 표정이 갑자기 냉엄해졌다.
“정말 안 하겠소?”
갈 노인은 마구 도리질을 했다.
“절대로 안 한다. 아니, 못한다. 지금까지 내가 한 일만으로 네놈들이 평생 노부를 먹여 살려도 부족하다.”
진산월은 물끄러미 갈 노인을 쳐다보더니 의외로 순순히 몸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알겠소.”
진산월이 예상보다도 맥없이 물러나자 갈 노인은 오히려 의아한 생각이 들었는지 황급히 물었다.
“어딜 가는 거냐?”
진산월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짤막하게 말했다.
“며칠 만나지 못한 내 제자 아이를 만나러 가오.”
유소응의 이야기가 나오자 갈 노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소응, 그 아이는 물론 잘 있다. 내가 얼마나 신경 써서 그 아이를 돌보고 있는 줄 아느냐?”
“고마운 일이오.”
진산월이 고분고분 대답하며 밖으로 나가자 갈 노인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저놈이 왜 저러지? 저렇게 만만하게 물러날 놈이 아닌데… 혹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갈 노인은 안색이 변한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진산월이 나간 쪽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사부님을 뵈옵니다.”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유소응의 태도는 나이답지 않게 의젓한 것이었다. 진산월은 그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에 힘이 넘치는 것이 갈 노인이 제법 신경을 쓴 것 같구나. 태을신공은 잘 익히고 있느냐?”
확실히 유소응의 눈빛은 며칠 전에 비해 한결 맑고 초롱했으며,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얼굴은 혈색이 좋아 보였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힘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몸도 가벼워 보여서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추레하고 비리비리한 아이와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예. 소 사숙께서 도와주시는 덕분에 운공(運功)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태을신공은 비록 공격적인 면에서는 미흡한 감이 있지만, 몸을 보호하고 체질을 개선시키는 데는 탁월한 효능이 있다. 뛰어난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초가 탄탄해야 하니 지루하더라도 하루에 한 시진(時辰)씩은 꼭 태을신공을 연마하도록 해라.”
“명심하겠습니다.”
유소응은 열한 살의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격이 진중(鎭重)하고 입이 무거웠다. 여타의 천재들처럼 번뜩이는 재지는 별로 보이지 않았으나, 대신에 끈기가 있고 성실하며 무엇보다도 집중력이 뛰어나서 진산월은 내심 흡족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거친 초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서인지 기본적인 체력도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단순히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그 나이 또래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탁월해 보였다. 갈 노인이 유소응에게 무척 신경을 쓰더니 적지 않은 영약(靈藥)을 먹인 모양이었다. 조금 전에 만들고 있던 환약들도 유소응을 위한 것이 분명했다. 그때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갈 노인이 뛰어들었다. 진산월은 질책하는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무슨 일이오?”
갈 노인은 진산월과 유소응을 번갈아 보다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니… 소응이 잘 있나 궁금해서…”
“갈 노인이 비록 무림의 선배라고 하나 사부와 제자가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함부로 뛰어든 것은 너무 성급하고 무례한 일이 아닐 수 없소. 특별한 용건이 없다면 자리를 비켜 주시오.”
그의 음성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갈 노인에게는 세상 어떤 호통보다 준엄한 것으로 들렸다. 갈 노인은 움찔하여 조금 기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노부가 잠시 실수를 한 것 같군.”
그는 나가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몸을 돌려 진산월을 바라보았다. 차가운 표정의 진산월이 냉엄한 눈빛으로 보고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위압감이 들어서 갈 노인은 순간적으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기랄, 어린놈이 무게 잡기는…’
그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재빨리 입을 열었다.
“자네의 조금 전 제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네. 그러니 혹시라도 소응에게 엉뚱한 말은 말도록 하게.”
반색하리라는 갈 노인의 기대와는 달리 진산월은 전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 일은 갈 노인의 마음대로 하시오. 그리고 엉뚱한 말이라니… 내가 왜 소응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오?”
갈 노인은 예상과는 다른 진산월의 반응에 초조한 생각이 들었다.
‘이 녀석이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네. 그야 소응에게 노부에 대한 험담을 하거나 노부를 따르지 말라는 등의 말은 하지 말라는 거지, 이 나무기둥 같은 놈아!’
갈 노인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겉으로는 부드럽게 웃었다.
“허허… 그래, 내가 말을 잘못했네. 자네가 어린아이에게 엉뚱한 말을 할 리가 없지. 그럼 잘 해결된 것으로 믿고 나는 이만 가 보겠네. 사제지간에 하던 이야기를 마저 나누도록 하게.”
갈 노인은 진산월이 더 무어라고 입을 열 것이 두려운지 재빨리 밖으로 나가 버렸다. 진산월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이 닫히자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흐음,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괴팍하다고 해야 할지…”
유소응은 흑백(黑白)이 분명한 눈으로 진산월을 보고 있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갈 할아버지에게는 제 나이 또래의 손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몇 년 전에 사고가 나서 죽었다고 하더군요.”
뜻밖의 말에 진산월은 유소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유소응은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그때 갈 할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치료하러 가느라 집을 비웠기 때문에 손을 써 보지도 못하고 손자를 잃게 된 것을 무척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걸 꺼리게 되었고, 결국은 집을 떠나 세상을 떠돌다가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
“갈 할아버지는 저를 보면 죽은 손자가 생각난다며 저를 친손자 대하듯 하고 계십니다. 저로서는 부담스럽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분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그분의 말씀에 고분고분 따르고 있는 중입니다.”
참응로 나이답지 않은 차분하고 사려 깊은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가만히 유소응을 바라보고 있더니 그의 조그만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남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때로는 그 배려가 그 사람을 더욱 힘들게 만들 때도 있는 법이다.”
유소응은 진산월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갈 노인이 너를 친손자처럼 대하는 심정은 충분히 알겠다. 하지만 갈 노인이 너를 친손자의 대용품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나중에라도 너와 자신의 친손자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갈 노인이 과연 그런 사실을 용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는구나.”
유소응의 어깨가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을 하며 유소응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런 식의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유소응이었다. 단지 친손자를 잃은 슬픔을 자신으로 인해 치유하고 있는 것 같은 갈 노인이 안쓰러워서 그가 하라는 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진산월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선의(善意)가 나중에는 오히려 갈 노인에게 더욱 큰 상처를 줄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진산월은 유소응의 작은 얼굴이 고민에 잠겨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무조건 그의 말을 따르기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다. 네가 그의 친손자가 아닌 전혀 별개의 인간이라는 것을 그에게 인식시켜 주어야 한다. 그 후에도 그가 너를 아끼고 관심을 기울여 준다면 그때 비로소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유소응은 한참 동안이나 진지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진산월을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의 생각이 짧았습니다. 앞으로 처신에 좀 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진산월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바람에 뺨에 있는 상처가 꿈틀거려 다소 거칠고 사나운 모습이 되었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네 잘못이 아니니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인간관계란 비록 선의에서 시작한 일도 잘못된 길로 빠질 때가 있다는 것만 알아두기 바란다.”
“예.”
“오늘부터는 본파의 무공 중 가장 기초가 되는 장괘장권구식을 수련하도록 하자.”
유소응의 얼굴에 한 줄기 기쁜 빛이 떠올랐다. 원래 진산월은 당분간 유소응에게 초식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운기토납법과 태을신공만을 집중적으로 익히도록 할 생각이었다. 하나 갈 노인 덕분에 유소응의 기초 체력이 놀랍도록 좋아져 당초 예상보다 빨리 본격적인 무공수련을 시작시키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진산월이 유소응에게 장괘장권구식의 기본 구결을 전수해 주고 밖으로 나오자 멀지 않은 곳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던 갈 노인이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나와 이야기 좀 하세.”
웬일인지 그를 대하는 갈 노인의 말투와 표정이 완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내 사제의 다리는 살펴보았소?”
“부러진 뼈가 잘못 붙은 정도인데, 고치는 건 어렵지 않네. 몸의 다른 상처들도 대단할 게 없으니 걱정 말게. 그건 그렇고…”
갈 노인은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리다 힘겹게 입을 열었다.
“소응에게 들으니 그 아이도 얼마 전에 할아버지를 잃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말인데… 그 아이를 내 의손(義孫)으로 삼으려 하는데 승낙해 주지 않겠나?”
갈 노인의 얼굴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너무 경직되어 있어서 보기 안쓰러울 정도였다. 진산월은 갈망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갈 노인을 향해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건 나보다는 본인에게 물어봐야 할 문제 같소. 그 아이의 의향은 물어보았소?”
“아무래도 사부인 자네의 의사를 먼저 알아보는 게 순리(順理) 같아서… 그 아이에게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네.”
항상 거친 말만 입에 달고 살던 갈 노인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운 말이었다. 진산월은 갑자기 아무런 대꾸도 없이 갈 노인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냉정하게 가라앉아 있는 그 눈빛을 받자 갈 노인은 심중으로 위축되는 것을 느꼈으나 이내 반발심도 생겨났다.
‘소응이 아니었다면 노부가 네놈 따위에게 이렇게 굽실거릴 것 같으냐?’
갈 노인이 속으로 투덜거릴 때 진산월의 조용한 음성이 들려왔다.
“소응이 순수한 한인(漢人) 혈통이 아닌 건 알고 있소?”
갈 노인은 진산월의 뜻하지 않은 질문에 다소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어머니가 몽고인(蒙古人)이라고 하더군.”
“그렇소.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친가(親家)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적지 않은 수모를 당해야만 했소.”
갈 노인은 미처 그 사실은 알지 못했는지 안색이 조금 변했다.
“그런 일이 있었나? 하나 나는 그 아이의 출생 신분이 어쨌든 신경 쓰지 않고 잘 보살펴 줄 자신이 있네.”
“물론 갈 노인이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을 사람이란 것은 알고 있소. 문제는 소응, 그 아이요.”
갈 노인은 화들짝 놀랐다.
“그 아이가 어때서?”
“소응은 심지(心志)가 굳은 아이요. 친할아버지에게 혹독한 일을 당했으면 서도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친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소. 하지만 그 뿐이오.”
“그게 무슨 말인가?”
“비록 원망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애착을 가지거나 간절히 원하는 마음도 없다는 말이오. 갈 노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요. 그 아이가 갈 노인을 잘 따르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갈 노인을 혈육(血肉)처럼 느끼거나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오.”
갈 노인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럼 그 아이가 무엇 때문에 노부를 따른단 말인가?”
“두 가지 중 하나요. 그렇게 하는 것이 주위에 피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나, 아니면 갈 노인이 실망하는 것을 보기 싫기 때문일 거요.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고.”
갈 노인은 얼굴이 연신 울그락불그락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어느새 그의 말투까지 예전처럼 거칠게 변해 버렸다. 하나 진산월은 조금도 표정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갈 노인을 쳐다보았다.
“내 말이 사실이오. 그러니 이런 상태에서 설사 그 아이가 승낙하여 갈 노인의 의손이 된다 할지라도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정분이 있을 리 없소. 갈 노인의 생각이야 어쨌든 그 아이는 그냥 번거로운 일을 피하기 위해 갈 노인의 말을 따를 뿐이니, 그런 상태로 두 사람이 원하는 행복을 얻을 수 있겠소?”
갈 노인은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네놈이 그 아이를 나에게 빼앗길까 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고 있구나. 내가 그 아이를 얼마나 아끼는데 그런 망발을 지껄이는 거냐?”
진산월의 눈에서 번쩍하는 섬광이 피어올랐다. 그 눈빛은 이내 평상시로 돌아왔지만, 그 순간 갈 노인은 전신이 빙굴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서늘함을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몸을 가늘게 떨었다. 진산월은 얼굴 근육을 실룩거리고 있는 갈 노인을 주시하며 나직하면서도 분명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아이는 누구의 대용품도 아니고, 애완용도 될 수 없소. 갈 노인이 진정으로 그 아이를 위한다면 지금과 같은 상태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할 거요.”
갈 노인의 얼굴이 격하게 떨렸다.
“누가 대용품이고 누가 애완용이란 말이냐? 네놈이 어디서 헛소리를 듣고 함부로 추측하는 게 아니냐?”
“그 아이는 열한 살이고, 절반은 몽고인의 피가 흐르고 있으며, 절정고수가 되어 누구도 자신을 구박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꿈으로 삼고 있소. 친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가지고 있는 것은 외할아버지의 유품(遺品)인 날카로운 단도 하나뿐이며, 친할아버지와는 등을 진 상태요. 참을성이 강하고 과묵하며, 좀처럼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뱉는 법이 없소. 이 아이가 과연 갈 노인의 친손자와 얼마나 닮았다고 생각하시오?”
갈 노인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무어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나는… 나는…”
그는 몇 번이나 말을 하려고 했으나 끝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이내 허물어지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그는 자신의 백발이 성성한 머리를 두 팔로 감싸안고는 한참 동안이나 꼼짝도 않고 있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 아이는 너무 귀여웠다네. 영특했고, 어른을 공경할 줄 알았지. 세 살 때 글을 배운 후로는 내 뒤를 따라다니며 약초의 이름을 줄줄 외워 주위를 놀라게 했다네.”
갈 노인의 음성은 갈라 터져 있어 제대로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곱 살 때 처음 무공을 가르쳤는데, 반년도 되지 않아 열 살 이하에서는 상대가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나지. 정말 천부의 기재(奇才)였고, 가문의 자랑이었지. 그 아이가 커 가는 것을 보는 게 늘그막의 유일한 기쁨이었네. 그런데…”
갈 노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그런데 내가 집을 비운 사이에 말에서 떨어져 머리를 다치고 말았네. 비록 상처가 치명적이기는 했으나 내가 있었다면 고쳤을 거야. 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고쳤지. 그런데 그때 나는 자리에 없었네. 엉뚱한 놈들을 치료한답시고 막상 내 손자가 나를 절실히 필요로 할 때 그 자리에 있지 못했네…. 그건… 그건 정말 너무도 잔인한 일이었어. 그때 그 아이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네.”
갈 노인의 음성은 너무도 처절해서 흐느낌과도 같았다. 진산월은 조용히 물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이오?”
“청광(靑光), 제갈청광(諸葛靑光). 이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는 아이였지.”
“좋은 이름이군. 하나 소응은 결코 그 아이가 될 수 없을 거요.”
갈 노인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은 채 코를 훌쩍거렸다.
“나도 알고 있네. 소응은 청광과 많이 다르지. 소응은 청광처럼 고상하지도 않고 준수하지도 않네. 청광은 무척이나 쾌활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아이였는데 소응은 너무 침착하고 조용해서 어떨 때는 음침해 보이기까지 하네. 하지만 그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꼭 청광을 보는 것 같다네. 이상하게도 별로 닮지 않았는데도 소응을 보면 청광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생각이 든단 말이야.”
“그런 생각은 두 사람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거요.”
갈 노인은 점차 마음속의 격동이 가라앉는지 흐느낌을 멈추고 약간은 씁쓸하고 약간은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텅 빈 허공을 응시하던 갈 노인의 시선이 느릿느릿 진산월에게로 향했다. 진산월은 마치 천신(天神)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묵묵히 갈 노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 노인은 그에게 물었다.
“노부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당분간은 소응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시오. 그 아이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파악한 후 그래도 그 아이가 마음에 들거든 그때 그 아이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시오.”
갈 노인은 그의 말을 잠시 곱씹어 보다가 천천히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확실히 이번 일은 노부가 성급했었던 것 같군. 소응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치 무언가에 씌운 사람 같았어.”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 난 갈 노인은 다시 처음의 그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청광과 다르기는 하지만 소응, 그 아이도 무척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네. 노부가 단순히 청광의 대용품으로 그 아이를 귀여워한 것은 아니었어. 그 아이의 체질은 무공을 익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것일세. 뼈가 단단하고 근육은 부드러우며 골격이 잘 잡혀 있지. 틀림없이 나중에 좋은 재목이 될 거야.”
“…!”
갈 노인의 시선이 다시 진산월에게 향했다. 조금 전과는 다른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선이었다.
“자네가 잘 알아서 하겠지만, 너무 성급하게 그 아이에게 무얼 가르치려고 생각하지 말게. 기초만 탄탄히 잡히면 그 아이의 발전은 무궁무진할 거야.”
“알겠소.”
“그 아이를 의손으로 삼는 것은 좀더 시일을 두고 생각해 보겠네.”
갈 노인은 손을 한차례 휘젓더니 이내 휭하니 몸을 돌려 걸어갔다. 진산월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자신도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진산월이 방으로 들어섰을 때 방화는 침상에 등을 기댄 채 반쯤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어서 오십시오.”
진산월은 침대 앞에 있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너도 이쪽에 앉거라.”
방화는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진산월의 앞에 앉았다. 진산월은 방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방화는 무심코 진산월을 쳐다보다가 진산월이 강철도 뚫을 것 같은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빤히 주시하자 이내 얼굴이 붉어지더니 안절부절 못하기 시작했다. 진산월의 응시는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방화의 체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어깨는 좁았고, 몸도 가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의외로 양팔은 체구에 비해 긴 편이었다. 이런 체형은 검을 익히기에 적합한 것이었다. 이목구비는 상당히 준수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의기소침해 있어 뛰어난 용모를 가리고 있었다. 지금도 방화는 진산월의 눈을 감히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군 채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한동안 그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직도 본파에 입문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느냐?”
방화는 고개를 떨구고 있다가 귀가 번쩍 뜨이더니 고개를 쳐들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후회는 하지 않겠느냐?”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겁니다.”
“그럼 됐다. 내일 네 입문식(入門式)을 열도록 하겠다.”
방화의 얼굴에 기쁜 빛이 떠올랐다.
“그럼 제가 정식으로 종남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방화는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원래는 이달 보름에 하려고 했으나 어차피 너를 받아들일 것이라면 굳이 그때까지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오늘은 푹 쉬면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도록 해라.”
진산월이 생각을 바꾼 것은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었다. 앞으로 한 달간은 종남파의 존망(存亡)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한 시기에 문파의 제자도 아니고 남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있느니 보다는 문파 제자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좀더 쉽게 종남파에 동화(同化)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진산월은 방화의 신분에 대해서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방화가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밝히기 전에는 묻지 않을 생각이었다. 중요한 것은 방화 자신이며, 그의 결심과 각오가 얼마나 다부지냐에 따라 앞으로 그가 종남파에 잘 적응해 나갈 수 있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진산월이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응계성과 추성은 실로 오랜만에 감격적인 해후(邂逅)를 했다. 추성은 응계성은 황폐해진 모습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고, 응계성 또한 이곳에서 고향 친구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맹렬하게 끌어안았다. 하나 이내 몸을 떼더니 응계성이 추성의 턱에 주먹을 날리는 것이었다.
“이 망할 녀석, 오려면 진작 오지 하필이면 내가 이런 꼴일 때 찾아올 게 뭐냐?”
추성은 그에게 얻어맞은 턱을 어루만지더니 자신도 주먹을 쳐들었으나 응계성의 상처투성이 얼굴을 보고는 차마 주먹을 뻗지 못하고 슬쩍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밀기만 했다.
“그러는 네놈은 자리가 잡히면 연락을 준다더니 그동안 서신(書信) 한 장 보내지 않고 뭐 했느냐? 내가 네 소식을 알려고 얼마나 강호를 헤메고 다녔는지 아느냐?”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연락하려고. 그나저나 본파에는 언제 온 거냐?”
추성은 응계성이 아직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었다.
“네놈을 수소문해서 물어물어 찾아왔다. 며칠 더 머물렀다가 그래도 네놈이 안 나타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응계성은 눈을 부릅떴다.
“고향으로 돌아가다니… 네놈 성격에 행여 그러겠다. 아무튼 잘 왔다. 마침 본파에 일손이 부족하니 도와줘라. 네가 원한다면 본파에 입문할 수도 있다. 장문사형에게는 내가 말할 테니 걱정 말아라.”
웬일인지 추성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입문은 싫다.”
응계성은 움찔 놀라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다른 문파에 이미 가입을 했느냐?”
“그건 아니다. 다만 지금 입문한다면 네놈보다 한 배(輩)가 뒤져서 네놈을 사숙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런 꼴을 어떻게 본단 말이냐?”
응계성의 상처투성이 얼굴에 모처럼 미소가 떠올랐다.
“별걱정을 다 하는구나. 네놈에게 사숙 소리 안 들을 테니 걱정 말고 입문해라. 비록 제자는 몇 명 안 되어도 우리에겐 꿈이 있다. 게다가 못 믿을지 몰라도 장문사형은 보기 드문 절정고수다.”
응계성은 진산월이 자신을 구출한 것이 추성의 도움 때문임을 전혀 알지 못하고 그를 설득하려 했다. 추성은 그 점을 굳이 밝힐 생각이 없는지 그냥 웃으며 고개를 흔들 뿐이었다.
“아무튼 네놈 아래로 들어가는 건 싫다. 그냥 종남파의 손님으로 있으면 안 되겠느냐?”
응계성도 죽마고우인 추성이 자신의 아래 항렬로 들어오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던지 더 이상 강권하지는 않고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이더니 이내 손뼉을 쳤다.
“그래, 예전에는 본파에서도 빈객(賓客)을 두었던 경우가 있었던 것 같다. 장문사형을 졸라서라도 네놈을 반드시 빈객으로 둘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아닌게 아니라 전전대에 하원지가 장문인이었을 때는 종남파에도 몇 명의 빈객들이 있었다. 인간성이 좋고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하원지였는지라, 그와 친한 무림의 명숙들이 종남파를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하나 하원지가 죽고 종남파가 과거의 명성을 잃은 다음에는 아무도 종남파를 찾지 않아서 더 이상의 빈객이 생기지 않았다.
응계성은 용케도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내고는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좋아했다. 항상 거칠고 투박하기만 했던 응계성은 추성을 만나자 순박하고 활기찬 청년으로 바뀐 듯 했다.
나중에야 응계성은 자신의 구출되는 데 추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추성의 의형인 송천기가 종남파의 위기를 구하다 심각한 부상까지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말을 들은 즉시 응계성은 추성에게 달려가 다시 그의 턱으로 주먹을 날렸다. 그리고 그때는 추성도 먼젓번처럼 참지 않고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이나 툭탁거리며 싸웠으나 그 싸움의 승패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