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6화
제128장. 허허실실(虛虛實實)
이동정과 정소소 등이 이씨세가를 찾아간 것은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어 갈 무렵이었다. 원래는 이동정과 정소소, 금교교의 세 사람만이 가려 했으나, 누산산이 애원하다시피 매달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녀까지 포함하여 일행은 모두 네 사람이 되었다. 이존휘는 반가운 얼굴로 그들 일행을 맞았다.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대로 고맙다는 인사조차 못하고 헤어져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이존휘의 태도는 정중하면서도 품위를 잃지 않은 것이어서 여인이라면 누구나가 호감을 느낄 만했다. 게다가 인물도 준수하고 장안제일공자라 불릴 만큼 신분 또한 대단하니 웬만한 여인이라면 그를 보고 방심(芳心)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정소소와 금교교는 남자를 보는 눈이 누구보다도 높았고,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구분하는 인물들이라 이존휘의 그러한 매력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문제는 누산산이었다. 그녀는 이존휘를 처음 볼 때부터 눈을 반짝이며 그의 이목구비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꼭 죄인(罪人)을 앞에 두고 조사하는 신문관 같아서 이동정 등은 그녀가 혹시라도 실수를 할까 봐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분명한 사실이 밝혀지기 전에는 이존휘를 적으로 돌리면 안 되었다. 단순한 의심만을 가지고 몰아세우기에는 이존휘는 강호상에서의 비중과 지위가 너무도 막중한 인물이었다. 다행히 누산산은 이존휘를 뚫어지게 주시만 할 뿐 섣불리 입을 열거나 그에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이동정은 누산산이 고양이 눈을 하고 이존휘를 계속 살펴보는 모습을 보고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래서야 우리가 당신을 의심하고 있소 하고 밝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무래도 그녀를 데리고 오는 것이 아니었어.’
이존휘도 누산산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그녀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분 소저는 처음 뵙는군요. 방명을 알 수 있을까요?”
누산산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태연히 그의 시선을 마주보았다.
“내 이름은 누산산이에요.”
“아, 천봉팔선자 중에서도 지혜롭고 아름답기로 유명한 옥봉 누 소저셨구려. 몰라 뵈어 죄송하오.”
이존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누산산도 마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러다 중심을 잃었는지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앗?”
이동정이 부축하려 할 때는 이미 그녀는 이존휘 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다. 이존휘는 포권을 하느라 몸을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미 그녀의 몸은 그의 머리 쪽에 거의 닿아 있었다. 갑자기 이존휘의 신형이 길쭉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이존휘의 몸은 어느새 누산산을 지나 옆으로 일 장 이동해 있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공스런 신법이었다. 하나 그때는 이미 누산산의 손이 그의 이마에 매어져 있는 영웅건(英雄巾)을 벗겨낸 후였다. 누산산은 중심을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는 것처럼 손을 움직여 이존휘의 머리에 있는 영웅건을 잡아챘던 것이다.
중인들이 모두 뜻밖의 사태에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벌리고 있을 때 누산산은 영웅건을 손에 들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존휘의 이마를 주시했다. 하나 이내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영웅건이 벗겨진 이존휘의 이마는 머리카락 몇 가닥만 흘러내리고 있을 뿐, 푸른 힘줄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반듯한 이마 때문인지 영웅건을 벗은 이존휘의 모습은 더욱 준수하고 헌앙(軒昻)해 보였다.
이존휘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더리 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누산산을 바라보았다.
“다치지는 않으셨소?”
누산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배시시 웃었다.
“아! 미안해요. 내가 이 공자를 보고 넋을 놓고 있느라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군요.”
젊은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치고는 민망한 말이었으나, 그녀는 태연히 내뱉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에 들고 있는 영웅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이걸 벗으니 더 나아 보이는군요.”
이존휘는 그녀의 손에서 영웅건을 받아 다시 이마에 매었다.
“그렇소? 하지만 오랫동안의 습관 때문인지 매고 있는 것이 더 편하구려.”
두 사람 사이의 일은 우연한 사고로 치부되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버렸다. 하나 이존휘가 방을 나간 후 금교교는 누산산에게 다가와 그녀의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이 여우야?”
누산산은 밉지 않게 웃었다.
“재미있잖아요. 항상 고고하고 허점 없어 보이는 이존휘가 얄미워서 그랬어요.”
“그게 말이 되느냐? 그런 사고를 치려고 그렇게 따라오겠다고 우긴 거냐?”
금교교가 매섭게 꾸짖자 누산산은 찔끔하더니 재빨리 입을 열었다.
“사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꼭 확인해 봐야 했단 말이에요.”
이어 그녀는 산해루에서 노해광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금교교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탈혼검을 익힌 자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생긴다는 말은 나도 언뜻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다. 노해광이란 사람은 무공에 대한 견식이 풍부한 모양이구나. 하지만…”
그녀는 다시 엄격한 눈으로 누산산을 응시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상의를 해야지 그런 식으로 너 혼자 엉뚱한 일을 벌이면 어떻게 하느냐? 이존휘가 그냥 웃으며 넘겼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와 원치 않는 다툼이 벌어질 뻔하지 않았느냐?”
누산산은 기가 꺾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에게 말해도 무슨 수로 이존휘의 머리에서 영웅건을 벗기겠어요? 내가 말해 보았자 언니가 허락할 리도 없고… 이럴 때는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게 좋단 말이에요.”
금교교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지르고 보는 게 좋다니… 그런 맹랑한 말이 어디 있느냐?”
누산산은 혀를 낼름거리고는 정소소의 뒤로 살짝 몸을 숨겼다.
금교교는 그런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더 화를 낼 생각도 못하고 자신도 피식 웃고 말았다.
“어쨌든 이존휘가 탈혼검을 익히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건 소득이로군. 그렇다면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의 흉수가 아니란 말인가?”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이동정이 재빠르게 말했다.
“아직은 속단할 수 없소. 취미사 혈겁의 흉수가 반드시 탈혼검의 주인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오. 설사 그가 직접 손을 쓴 게 아니라 할지라도 흉수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수도 있소.”
하나 금교교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건이 점점 미궁(迷宮)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아 불안하네요. 만약 이존휘마저 취미사 혈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어디 가서 흉수를 찾아야 하는지 막막한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같소. 아직 우리가 알고 있는 건 이존휘가 탈혼검을 익히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니 말이오. 게다가 위중설의 죽음에 그가 관여했는지를 파악하는 일도 취미사 혈겁의 흉수를 찾는 일 못지않게 중요하오.”
“그렇군요. 그런데 어떤 식으로 이존휘를 조사할 생각이죠? 그가 만약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라면 그 가면을 벗기기가 수월치 않을 것 같은데…”
“이존휘는 냉정하고 치밀한 성격이라 좀처럼 허점을 드러내지 않고 있소. 하지만 바로 이 완벽함이 그의 약점이 될 수도 있소.”
금교교는 물론이고 정소소와 누산산도 흥미로운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완벽한 게 약점이 될 수 있다니?”
“이존휘는 자기 자신에게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치의 허점이나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있소. 그러니 그가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 실수를 메우기 위해서 무리한 일을 벌이려 할 거요.”
금교교는 순간적으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이존휘가 무슨 실수를 했다는 거죠? 아직은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동정은 희미하게 웃었다.
“누가 그가 실수를 했다고 했소? 그가 자신이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그제서야 금교교는 그가 말하는 바를 알아차렸다.
“당신 말은 이존휘가 무언가 실수를 했고, 그것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이존휘가 생각하게끔 하라는 것이군요.”
“그렇소. 이존휘는 처음에는 자신이 실수를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겠지만, 우리가 계속 그의 실수를 기정사실화하면 그도 믿지 않을 수 없을 거요. 그리고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움직이다 보면 무언가 다른 실수나 허점이 나오게 될 거요.”
이동정의 계획은 아주 교묘한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수법이었다.
완벽하여 실수를 찾아보기 힘든 이존휘로 하여금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다고 착각하게 하여 진짜 실수를 유발하게 한다는 것이다.
실수가 없는데도 실수가 있다고 믿는 순간,
그의 완벽함은 이미 깨어지고 마는 것이다.
금교교는 이동정의 계획이 지금 상황에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이동정의 얼굴을 주시했다.
“좋은 생각이군요. 그런데 이존휘에게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다고 믿게 할 거죠?”
이동정은 이미 생각해 놓은 것이 있는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그건 아무래도 정 소저께서 수고해 주셔야 할 것 같소.”
이어 그는 자신의 생각을 자세하게 밝히기 시작했다.
이존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서 거울을 바라보고 우뚝 섰다.
그런 다음 천천히 영웅건을 풀었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매끄러운 이마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펴보더니 조용히 미소지었다.
“약은 생각을 했군. 이런 식으로 내게서 탈혼검의 흔적을 발견하려고 하다니.”
그는 이마가 훤히 드러나 있는 자신의 얼굴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밤이 길면 꿈이 많은 법이라더니 옛말이 틀린 게 없군. 그래도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접근해 올 줄은 몰랐는 걸. 좀더 세련된 방법을 쓸 줄 알았는데 내가 그녀들을 너무 높게 보았나?”
그때 문이 소리 없이 열리며 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짙은 홍의로 전신을 감싼 이십대 중반의 여인이었다. 이존휘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거울 속에 비치는 홍의여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홍의여인은 거울 속에서 이존휘와 시선이 마주치자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기다렸나요?”
이존휘의 얼굴에는 예의 부드럽고 매력적인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 것 같소?”
홍의여인이 얼굴에 떠올라 있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풍만한 몸매에 유난히 새하얀 살결을 지닌 여인이 웃고 있는 모습은 보는 이를 뇌쇄시킬 만큼 육감적이었다. 더구나 그녀가 입고 있는 홍의는 그녀의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 그녀의 몸의 굴곡을 완연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왕이면 두근거리는 분위기라도 있으면 더욱 좋잖아요.”
“일을 앞에 두고 분위기를 찾다니 당신답지 않구려.”
홍의여인은 살짝 눈웃음을 쳤다.
“그게 모두 당신 때문이 아니겠어요?”
보는 사람이 아찔할 만큼 짜릿한 미소였으나, 이존휘는 별반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공연히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지 말고 용건이나 말하시오.”
홍의여인은 밉지 않게 그를 흘겨보았다.
“내게는 관심도 없으면서. 아무래도 이미 한물간 나보다는 천봉선자들이 더 마음에 들겠죠?”
그녀가 이존휘의 마음을 흔들 요랑이었다면 일단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천봉선자를 말아 나오자 이존휘의 눈빛이 급격히 차가워졌던 것이다.
“그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좋겠소.”
그녀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는지 이내 정색을 했다.
“알았어요.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신목령에서는 오대천왕 중의 두 사람과 십이사자 중 다섯 명이 왔어요.”
“오천왕 중 누가 온 거요?”
“낙화수사 조옥린과 혈수존자 오욕백이라고 하더군요. 다섯 명의 사자들도 말할까요?”
“그들 중 백자목(白紫木)과 한시몽(寒始夢)이 있소?”
그녀는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오지 않은 것 같군요.”
“그러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오. 십이사자들 중 신경 써야 할 자들은 그들 둘 뿐이니까.”
“나도 그들 이름은 들었어요. 그들이 바로 신목령주가 가장 아낀다는 대제자(大弟子)와 막내제자죠?”
“그렇소. 운자추가 삼년 전에 갑자기 사라진 지금, 십이사자들 중 진짜 실력 있는 인물들은 그들 두 사람밖에 없소. 그들이 오지 않았다면 신목령주가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기 때문일거요.”
홍의여인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됐죠.”
“천봉궁에서는 누구를 보냈소?”
“총관인 차복승이 팔대신장(八大神將) 중의 두 사람을 끌고 직접 궁을 나왔어요.”
이존휘의 눈이 번쩍 빛났다.
“단봉공주는 움직이지 않았소?”
“그런 기미는 없더군요. 그녀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이존휘는 힐끔 그녀를 쳐다보더니 이내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관심이 있다마다. 그녀가 움직여야 봉황인(鳳凰人)을 불러낼 수 있을 테니까.”
홍의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봉황인이 무엇이죠? 사람인가요? 아니면 물건인가요?”
갑자기 이존휘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거울 속으로 그와 시선이 마주친 홍의미녀는 그의 눈빛을 보고는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이존휘의 눈빛은 차갑다 못해 은근한 살기까지 내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존휘는 그런 눈으로 한참 동안이나 홍의미녀를 쏘아보더니 들릴 듯 말 듯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봉황인에 대한 의문은 잊는 것이 좋소. 지나친 호기심은 몸에 해로운 법이니 말이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이존후의 눈빛이 서서히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제서야 그녀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화제를 바꾸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당초 계획대로 밀고 나갈 생각이에요?”
이존휘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그녀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천봉선자 세 사람은 오늘 이곳에 묵을 거요. 그러니 일을 차질없이 진행시키기에는 더할 수 없이 좋은 조건이오. 내일 시작하도록 하시오.”
“그렇게 할게요.”
그녀는 조금 전의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곳에 더 머물러 있기가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곧 그에게 인사를 하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이존휘는 방을 벗어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가 천천히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눈에서는 연신 기광(奇光)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이존휘가 아침 인사를 위해 천봉선자들이 묵고 있는 이씨세가의 후원으로 갔을 때 정소소와 금교교 등은 이미 일어나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잘 주무셨소?”
이존휘의 의례적인 물음에 금교교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주 편안한 잠자리였어요. 요새 계속 시끄러운 객잔에만 머물다가 이곳으로 오니 조용하고 아늑해서 절로 피로가 풀리는 것 같군요.”
“마음에 드셨다닌 다행이오. 언제까지라도 좋으니 편하신 대로 머물다 가셨으면 하오.”
금교교는 곱게 웃었다.
“호호…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주위에서 무어라고 수군거릴지 뻔하니 더 있지는 못하겠군요.”
“금 소저 같은 분이 주위의 시선에 그토록 민감하실 줄은 몰랐소. 우리만 떳떳하면 남들이 무어라 하건 무슨 상관이 있겠소?”
“일부러 남들의 오해를 자청(自請)할 필요는 없지요. 그보다 이 공자께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이존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능력이 닿는 일이라면 기꺼이 들어드리겠소.”
금교교가 옆에 있는 정소소를 가리켰다.
“사실은 큰언니께서 이곳으로 오시면서 한 가지 흥미 있는 일을 보았다고 하더군요. 그 일에 대해 이 공자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이존휘의 얼굴에 호기심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별말이 없던 정소소가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서안으로 오기 위해 공왕령(公王嶺)을 지날 때였어요. 나는 공왕령 정상에서 아주 이상한 일행을 보게 되었어요.”
그때 정소소는 두청청과 함께 금교교 등을 만나러 서안으로 가던 중이었다. 공왕령은 서안의 동쪽으로 백여 리쯤 떨어진 곳에 있는 제법 높은 고개로, 경사가 완만하고 근처에 강이 흐르고 있어 경치가 좋기로 유명했다. 공왕령의 정상 부근에는 주루가 여러 개 있었다. 공왕령에는 관도(官道)가 지나가기 때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서 주루도 영업이 곧잘 되었다. 그중에서도 망경루(望京樓)는 서안에까지 알려진 유명한 주루였다. 망경루가 위치한 공왕령의 고갯마루에서 서안이 아득하게 보였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정소소와 두청청은 식사를 하기 위해 망경루에 들어갔다. 그때는 조금 늦은 오후인지라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망경루도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다. 두 사람은 창문가에 있는 탁자로 가서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고는 잠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공왕령 부근에는 커다란 마을이 없기 때문에 망경루의 손님들은 대부분이 서안을 오가는 상인(商人)들이나 유람객들이었다. 지금은 아직 추운 겨울날이라 유람객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고 대부분이 봇짐을 진 장사치들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히히힝!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멀리서 한 떼의 인마(人馬)들이 나타났다. 그것은 상당한 대규모의 상단(商團)이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마차만도 다섯 대나 되었고, 마차를 호위하는 무사들의 수도 언뜻 보기에 스물이 넘었다. 거기에 마차를 몰고 있는 마부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족히 서른은 되는 인원이었다. 공왕령을 넘는 무림들 중에서도 이 정도의 규모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 때문인지 일대의 주루들이 모두 호들갑을 떨었으나, 그들 일행은 곧장 이곳에서 제일 큰 망경루로 향했다. 망경루의 점원들이 모두 나가서 그들을 맞고 말들을 묶느라 한바탕 소동에 가까운 법석을 떨고 나서야 그들 일행이 주루 안으로 들어왔다. 대부분은 두 눈에 정광(精光)이 번뜩이고 손에는 병장기를 소유한 무사들이었고, 오직 한 사람만이 호화로운 금의(錦衣)를 입은 상인이었다. 하나 정소소는 한눈에 그 금의인이 상당한 무공을 지닌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얼굴에 살집이 좋은 인상이어서 전형적인 장사꾼으로 보였으나, 싱거운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두 눈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뒷짐을 진 채 무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작 또한 차분하면서도 절도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소소가 주시한 것은 그의 양손이었다. 그가 지시를 하기 위해 무심코 손을 쳐들었을 때 드러난 손바닥에는 군살이 잔뜩 박여 있을 뿐 아니라 손바닥 전체가 잘게 갈라져 있었다. 아마도 철사장(鐵砂掌) 종류의 무공을 익히고 있음이 분명했다. 호위무사들 뿐 아니라 주인인 듯한 금포인까지 무림인이라면 결국 이들은 상단이 아닌 무림의 어떤 방파(幇派)의 일원자들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정소소는 식사를 하면서도 그들 일행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녀는 곧 몇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스무 명이 넘는 무사들 중 절반이 식사를 하지 않고 마차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마차에 귀중품들이 있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함일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지나치게 많은 인원들이 호위하고 있었다. 이곳 공왕령은 언덕을 올라오는 길이 관도 하나뿐이어서 망경루에 앉아 있으면 주위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마차를 지키는 데 이토록 신경을 곤두세우다니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금포인과 무사들의 관계가 단순히 상단의 주인과 호위무사 같지 않았다. 특히 금포인의 가벼운 손짓에도 무사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무림방파에서 우두머리가 수하(手下)들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종소소는 결정적으로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호위무사들 중 하나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휘장을 잠깐 열었을 때 그녀는 마차 안에 있는 물건들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창문가에 있던데다 그녀의 안력이 워낙 예리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물건들을 보는 순간, 좀처럼 침착함을 잃지 않던 정소소도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경호성을 터뜨릴 뻔했다. 마차 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물건들은 나무로 만든 길쭉한 관(棺)이었던 것이다. 이토록 많은 인원들이 삼엄하게 호위하고 있는 이유가 관을 운반하기 위해서란 말인가? 더구나 관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마차 안에만도 적어도 네 개의 관이 있었다. 다섯 대의 마차에 모두 관이 있다고 가정해 본다면 스무 개가 넘는 관이 있는 셈이었다.
‘저 마차들에 있는 물건들이 모두 관이라면, 이들은 이 많은 관들을 어디에 쓰려고 운반하는 걸까?’
그 관들 속에 시체가 있다는 생각은 일부러라도 하지 않았다. 스무 개가 넘는 시체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바로 옆에 있다는 것은 아무리 담대하고 강호 경험이 풍부한 그녀도 별로 내키지 않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들에 대해 의혹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붙잡고 꼬치꼬치 물어볼 수는 없었다. 강호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무림방파의 일에 끼어든다는 것은 일종의 금기(禁忌)를 깨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마차를 몰아 공왕령을 떠날 때까지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공왕령을 내려와서 다시 동생들을 만날 때까지 나는 그들에 대해서는 잠시 잊고 있었어요. 그런데 동생들과 이야기하는 도중 얼마 전에 자은사에 보관하고 있던 시신 스물두 구가 감쪽같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되었죠.”
정소소는 말을 계속하여 이존휘의 표정을 계속 주시했다. 이존휘는 처음에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가 정소소가 공왕령에서 기이한 마차 행렬을 보았다고 할 때부터 미소가 지워지더니 그녀가 마차 속에서 관을 발견했다는 말이 나올 즈음에는 무척 심각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동생도 내 말을 듣고 무척이나 놀라더군요. 스물두 구의 시신이 없어진 지 며칠 되지 않아 스무 개가 넘는 관을 운반하는 행렬을 본다는 건 무척이나 공교로운 일이에요. 우리는 필시 이 일들이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어요. 이 공자의 생각은 어떠세요?”
이존휘는 여전히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 소저의 말씀대로라면 확실히 그 마차들이 수상하구려. 정 소저께서 그 마차를 공왕령에서 보신 것이 정확히 언제쯤이었소?”
“오 일 전이에요.”
“그렇다면 자은사에서 시신들이 없어진 지 삼 일 후요. 시기적으로나 상황으로 보아 그들이 시신들을 훔친 자들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오.”
“그래서 이 공자의 도움이 필요해요.”
이존휘는 진지한 얼굴로 정소소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시오. 그런 일이라면 발벗고 나서서 도와드리겠소.”
“아무래도 이 일대는 우리보다는 이 공자께서 더 잘 파악하고 계실 거예요. 비록 오 일 전이라고 하지만 그들 일행은 적은 숫자가 아니니 그들의 행적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이존휘는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오 일이라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그들이 공왕령을 지났다면 행적을 쫓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오. 지금 당장 사람을 보내 그들을 추적하도록 하겠소.”
“부탁드리겠어요.”
이존휘는 그동안 미궁 속에만 있던 취미사 혈겁의 범인에 대한 실마리를 잡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한지 그녀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곧 방을 벗어났다. 그가 방을 나가자 정소소는 이동정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가 과연 속아 넘어갈까요?”
이동정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럴 거요.”
정소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렇게 자신하죠? 이존휘가 실제로 흉수라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에게 관을 운반하게 했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아니, 있소.”
뜻밖의 대답에 정소소는 물론이고 금교교와 누산산이 놀란 눈으로 이동정을 쳐다보았다. 이동정은 세 미녀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도 별로 표정이 변하지 않은 채 침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오 일 전에 확실히 그런 마차 행렬이 공왕령을 지나간 적이 있소. 그리고 마차 속에는 관들이 실려 있었소.”
“그게 정말이에요?”
“그렇소.”
정소소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빛났다.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군요. 당신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어요?”
“당시 마차 일행을 접대했던 망경루의 점원에게서 들었소. 그자는 마차 속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여 호위무사들이 모두 식사를 하는 사이에 살짝 마차 속을 들여다보았다고 하오.”
장소소는 흠칫 놀랐다.
“그럼 망경루에까지 당신의 부하가 잠입해 있었다는 말이에요?”
“그렇소.”
정소소는 새삼스런 눈으로 이동정을 바라보았다.
“성숙해(星宿海)의 별들은 천하에 널리 퍼져 있어 비추지 못하는 곳이 없다더니 과연 대단하군요.”
이동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과찬이시오. 사실은 취미사 혈겁이 벌어진 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서안으로 통하는 관도 주위의 주루에 사람들을 파견했는데, 다행히 운이 좋게도 그중 하나에 걸려든 거요.”
옆에서 이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누산산이 불쑥 끼어들었다.
“성숙해가 뭐지요? 청해성(靑海省)에 있는 지명을 가리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 말을 받은 건 금교교였다.
“성숙해는 번신봉황 이 대협께서 만드신 무림최고의 정보조직(情報組織)이다.”
누산산은 신기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런 조직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지요?”
“성숙해는 순전히 정보(情報)를 습득하고 분석하는 일만을 전문적으로 하기 때문에 순수한 무인집단(武人集團)이라고 하기 어렵다. 더구나 그 일의 특성상 기밀엄수(機密嚴守)를 최우선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무림에서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금교교의 설명을 듣고도 누산산은 성숙해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모습이었다. 하나 정소소는 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듯 이동정을 향해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왜 그들을 추적하지 않았나요?”
이동정의 얼굴에 모처럼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조금 전에 정 소저께서 이존휘에게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상황이오. 망경루의 점원은 그 일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일반적인 경로로 보고를 해왔소. 그래서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사 일이나 지난 후였소.”
“그렇다면 당신은…”
“나는 어제 처음으로 보고를 받았소. 뒤늦게 땅을 쳤지만 이미 늦은 일이라 어쩔 수가 없었지.”
장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쉽군요.”
“그렇소. 자은사에서 사신들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중시해서 보안에 신경을 썼는데, 그 때문에 하부조직에까지 이번 일의 자세한 진행 상황이 알려지지 않게 되었소. 이번에 이런 허점을 발견하게 되어 이와 같은 일이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만간 조직을 재편성할 생각이오.”
정소소는 성숙해의 내부사정보다는 앞으로의 일이 더욱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존휘가 의심하지 않을 확률이 높군요.”
“그렇소. 그는 아마도 마차 행렬의 책임자인 금포인이 너무 방심했다고 생각하겠지.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의 흉수라면 틀림없이 그 금포인에게 문책을 가할 거요.”
“그것만으로는 이존휘가 흉수라는 증거를 잡을 수가 없잖아요.”
“이존휘가 흉수라면 흔적을 없애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망경루에 손을 쓸 거요.”
“살인멸구(殺人滅口)할 거란 말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런 극단적인 방법말고도 망경루에 금포인 일행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는 방법은 많이 있소. 아무튼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 반드시 손을 쓸거요. 만에 하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추적할지도 모르는 말이오.”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요?”
이동정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다면 이존휘는 금포인 일행을 추적하는 데 전력을 기울일 테니 우리는 힘들이지 않고 그들을 쫓을 수 있지 않겠소?”
정소소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더니 이동정을 흘겨보았다.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는 손해가 없군요.”
“하하… 솔직히 서안 일대에서 이씨세가만큼 발이 넓고 세력이 강한 곳은 없소. 사정을 해서라도 그들의 힘을 빌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않소? 게다가 이존휘가 취미사 혈겁의 흉수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 일석이조(一石二鳥) 아니겠소?”
“당신은 어제 그 보고를 받았을 때부터 일을 이렇게 진행시키기로 마음 먹은 거죠?”
이동정은 정색을 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무슨 천재라고 그런 걸 다 계획하겠소? 그저 이존휘에게 무언가 꼬투리를 잡아야 하는데, 떠오르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이용한 거요.”
정소소는 그의 말을 전혀 믿는 표정이 아니었으나, 그를 더 추궁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절묘한 계획이군요.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 놓았으니 내 입으로 말해 놓고도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거짓인지 헷갈릴 정도예요.”
이동정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원래 사람을 속이려면 아홉 개의 진실 속에 하나의 거짓이 있어야 하오. 그렇지 않다면 이존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않소.”
“어쨌든 이제는 기다리는 일밖에 남지 않았군요.”
“우선은 사람을 보내 망경루를 감시해야 하오. 망경루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진다면 이존휘가 바로 우리가 찾는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는 거요.”
“이제야 겨우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본 느낌이군요. 아무쪼록 이번 일을 계기로 모든 어둠이 걷히고 하루빨리 진상을 파악했으면 좋겠군요.”
하나 그녀의 희망은 무참히 깨어져 버렸다. 그녀들이 이씨세가를 나와 숙소로 돌아왔을 때,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싸늘하게 식어 버린 비봉 유화화의 시신이었다. 유화화의 가슴에는 시뻘건 색의 장인(掌印) 하나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