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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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천하 13권 미궁생로(迷宮生路)편 : 8화


제130장. 쌍검쟁패(雙劍爭覇)

다음 날 아침, 진산월은 갈 노인에게 심한 잔소리를 듣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손이 이 모양이 됐느냐?”

갈 노인은 밤사이에 더욱 부어오른 진산월의 손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기분이 울적하여 뒷산에 올라가 바위를 후려쳤더니 이렇게 되었소.”

갈 노인은 그를 잔뜩 노려보았다.

“노부가 바보인 줄 아느냐? 이건 바위를 친 게 아니라 무언가 강력한 무공에 부딪힌 흔적이다. 손바닥에 있는 실핏줄이 모두 터져 나가고 뼈마디가 으스러졌는데 무슨 헛소리냐?”

“그래서 고칠 수 없다는 거요?”

“누가 고칠 수 없다고 했느냐? 그래도 근육이 상하지 않아 손병신이 되는 꼴은 면할 수 있겠다. 그런데 너희 종남파 놈들은 어째서 이렇게 돌아가면서 노부를 부려먹는단 말이냐? 내가 네놈들 종이냐?”

갈 노인은 진산월의 손을 우악스럽게 치료했다. 진산월은 상당한 통증을 느낄 텐데도 갈 노인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신음 한 번 내지르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치료가 끝나자 그제서야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과연 대단한 솜씨요. 손이 편해지면서 금방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구려.”

“어림없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손으로 무공을 펼치려면 열흘은 걸릴 거다. 그 전에 멋대로 무공을 사용했다가는 상처가 도져서 영영 팔병신이 되고 마니 알아서 행동해라.”

“고맙소.”

갈 노인은 진산월의 얼굴을 한참이나 쏘아보더니 이내 인상을 찡그렸다.

“네놈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나오다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 그나저나 어느 놈하고 싸웠기에 이런 부상을 당했느냐? 보아하니 엄청난 위력을 지닌 장공의 고수인 것 같은데…”

진산월은 담담하게 말했다.

“오욕백이오.”

갈 노인의 눈이 쭉 찢어지더니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혈수존자 오욕백? 그게 정말이냐?”

“그렇소.”

갈 노인은 그의 말의 진위(眞僞)를 파악하려는 듯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다시 물었다.

“그가 왜 너와 싸웠단 말이냐?”

“예전에 그의 제자와 사소한 다툼이 있었소.”

갈 노인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가 제자의 복수를 하려고 너를 찾아왔단 말이냐? 오욕백에게 제자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진산월은 말없이 빙긋 웃기만 했다. 갈 노인은 다시 물었다.

“오욕백은 어떻게 되었느냐?”

“죽지는 않았을 거요.”

짤막한 대답이었으나 갈 노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진산월의 말 속에는 오욕백이 자신에게 패했다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갈 노인은 한동안 새삼스러운 눈으로 진산월을 응시하더니 딱딱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놈, 정말 대단하구니. 혈수존자 오욕백과 싸워 그를 물리치다니… 오욕백의 혈라인은 정말 무서운 절기다. 그 장공에 격중되면 어떠한 호신강기로도 견뎌낼 수 없지. 그런데 검은 사용하지 않은 거냐?”

“그의 혈라인이 하도 대단하다고 하길래 위력을 알아볼 겸 처음에는 장력으로 맞서 보았소. 그래서 왼손이 이런 꼴이 된 거요.”

“이런 미친놈…”

“걱정 마시오. 장력으로는 그보다 뒤진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검을 사용했으니까.”

“그래서 몇 초만에 그를 물리쳤느냐?”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소. 아무래도 그는 나이를 먹어 예전보다 몸이 둔해진 모양이오.”

갈 노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멀거니 그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고 말았다.

“오욕백을 나이 먹은 늙은이 취급하는 놈은 세상천지에 너밖에 없을 거다. 아무튼 오욕백과 장력을 겨루어 이 정도밖에 다치지 않았다니 네놈도 어지간하구나.”

“좋은 경험이었소. 아직은 가야 할 길이 멀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으니까.”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도 나직해서 거의 알아듣기 힘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장문사형, 이곳에 계셨군요.”

문이 열리며 소지산이 안으로 들어왔다. 소지산은 여전히 텁수룩한 머리에 부스스한 모습이었으나, 웬일인지 얼굴 한구석에 당혹스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진산월은 소지산의 이런 모습을 좀처럼 보지 못했기에 의아하여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녀가 다시 왔습니다.”

“그녀라니?”

소지산은 난처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서문연상 말입니다.”

진산월도 그 말을 듣고는 어리둥절함과 의아함을 동시에 느꼈다. 검보의 고수들을 따라 아버지에게 간 그녀가 며칠 되지도 않아 다시 찾아왔다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진산월이 밖으로 나가 보니 과연 서문연상이 예의 화사한 미소를 지은 채 종남파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특히 장승표를 붙잡고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다.

“호호… 혼자서 그 많은 음식들을 다 먹었단 말이에요?”

장승표는 털북숭이 얼굴로 툴툴거렸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그 음식들 만드느라 고생한 걸 생각하면 눈물이 다 난다. 그걸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들 몇 젓가락 먹고는 더 먹을 생각을 안 하니 결국 나 혼자 해결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호호… 그게 아니라 남 주기 아까워서 자기가 다 먹어치운거 아니에요?”

장승표는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말이냐? 술이라면 몰라도 난 음식탐은 없는 사람이다.”

“어련하려구요. 그나저나 그때 내가 있었으면 나라도 열심히 먹었을 텐데 아쉽네요.”

갑자기 그녀는 장승표에게 바짝 다가붙었다.

“그러지 말고 우리 그런 잔치 한 번 더 해요.”

장승표는 질겁을 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그리고 아무 때나 잔치를 하느냐? 이유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이유야 만들면 되죠. 정 없으면 내가 다시 돌아온 기념으로 해도 되잖아요.”

그녀는 쉴새없이 종알거리다가 뒤늦게 진산월을 발견하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진산월은 그녀에게 다가가서 진중한 음성으로 물었다.

“무슨 일로 다시 온 거요?”

서문연상은 새침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나는 이곳에 오면 안 되나요?”

“내가 묻는 이유는 소저가 더 잘 알거요. 영존(令尊)도 소저가 이곳에 온 걸 알고 계시오?”

그녀는 샐쭉해진 모습으로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흥! 내가 움직일 때마다 부모님께 허락받아야 하는 한두 살 먹은 어린애인 줄 알아요? 아버지는 몰론 알고 계시죠.”

“그런데도 영존이 허락했단 말이오?”

“그건 알 거 없어요. 그런데 내가 이곳에 온 게 그렇게 못마땅해요? 왜 시시콜콜하게 그런 걸 따지는 거예요?”

진산월은 가급적 솔직하게 말했다.

“소저가 이곳에 다시 온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오.”

갑자기 서문연상의 얼굴에 진지한 표정이 떠올랐다.

“진 장문인에게 한 가지 청(請)이 있어서 왔어요.”

“그게 무엇이오?”

“꼭 들어줘야 해요.”

그녀의 억지스런 말에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이 실소를 흘렸다. 하나 서문연상은 나름대로 무척이나 심각한지 표정이 전혀 풀어지지 않았다.

“진 장문인이 꼭 내 청을 들어주리라 믿고 말하겠어요.”

진산월은 갑자기 그녀의 다음 말을 듣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입에서 폭탄선언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종남파에 입문(入門)하려고 왔어요. 내 입문을 허락해 주세요.”

중인들은 모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문이라니? 당당한 강북삼보의 하나인 검보의 보주를 아버지로 둔 여자가 무엇이 아쉬워 꺼져 가는 종남파에 입문을 하려 한단 말인가? 장승표는 그녀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인가 싶어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으나, 그녀의 눈은 어느 때보다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진산월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진산월은 잠시 침음하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 본파에 입문하려는 거요?”

그녀는 열기 띤 음성으로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종남파를 일으키고 싶어요. 당신들이 꿈을 이루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요.”

진산월은 그녀의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았다. 그녀는 두 눈에 열정을 가득 담은 채 기대에 찬 얼굴로 진산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침내 진산월은 입을 열었다.

“안 되오.”

그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안 된다는 거예요?”

“소저는 본파를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모르고 있소. 소저가 우리들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모르지만 소저가 생각하는 것과 현실은 엄연한 괴리(乖離)가 있소.”

“나도 충분히 알고 있어요. 초가보에서 호시탐탐 당신들을 노리고 있고, 언제든지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거도요. 그래도 난 당신들과 함께 할 거예요.”

“꿈이란 옆에서 지켜보며 도와주는 게 아니라 같이 꾸는 것에 더 의미가 있는 거요.”

“내 이야기가 그거예요.”

그녀가 뜨거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나도 당신들과 그 꿈을 함께 꾸고 싶단 말이에요!”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장승표만이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연신 히죽거리며 웃고 있을 뿐이었다. 정적은 전흠의 음성으로 깨어졌다.

“더 말할 것도 없군. 받아들입시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절했다가는 칼을 물고 자살할지도 모르는 일 아니오?”

서문연상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래요? 그리고 자살하려면 다른 좋은 방법도 많으데 하필이면 왜 칼을 물고 죽어요? 그게 얼마나 아픈데.”

전흠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도 있겠지. 아무튼 난 당신 편이오. 아니, 본파에 입문한다면 사질녀(師姪女)가 되니까 말을 놓아도 되겠군. 난 네 편이다. 그러니 내 말에 토 달리 마라.”

그녀는 전혀 기죽지 않은 음성으로 쏘아붙였다.

“아직 결정된 건 아니니 미리부터 윗사람 흉내 낼 필요 없어요. 그리고 당신의 자살 취향은 칼 물고 죽는 건가 보죠? 참, 취향 한번 독특하네요.”

전흠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본파에 들어오고 싶다는 건지 들어오기 싫다는 건지 모르겠군.”

장내의 분위기가 한층 부드러워졌다. 소지산의 옆에 있던 방취아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당신도 한 마디 하세요.”

소지산은 고개를 저었다.

“장문사형이 알아서 할 거야.”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녀를 받고 안 받고는 장문사형이 결정할 문제지. 그런데 당신은 그녀를 받아들이고 싶은가 보지?”

“그래요, 귀엽잖아요. 남자들만 잔뜩 있는 문파에 귀엽고 예쁜 여제자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뜻밖이군. 나는 당신이 그녀를 못마땅해하는 줄 알았는데…”

방취아는 그를 밉지 않게 흘겨보았다.

“그거야 그녀가 하도 천방지축인데다 당신과 장문사형이 자꾸 그녀를 나와 비교하니까 그런 거죠. 아무튼 난 찬성이에요.”

소지산의 얼굴에도 모처럼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장문사형이 결정할 문제라니까.”

진산월도 마음을 정했는지 서문연상을 향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소저의 결심이 그렇다면 한 가지만 더 물어보겠소.”

서문연상은 바짝 긴장한 얼굴이었다.

“말하세요.”

“본파는 필연적으로 초가보와 대립해야만 하오. 그런데 초가보는 소저의 가문인 검보와 삼보동맹으로 연결되어 있소. 만약의 경우 본파와 검보가 대결하게 된다면 소저는 그때도 본파를 위해 검보에 검을 겨눌 수 있겠소?”

처음으로 서문연상의 얼굴에 망설임의 빛이 떠올랐다. 하나 그 빛은 이내 사라지고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예요. 하지만 그 전에 그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에요.”

그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진산월도 더 이상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알았소. 소저의 입문을 허락하겠소.”

서문연상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렇다면 저에 대한 호칭부터 바꾸셔야죠, 장문인.”

진산월은 즉시 그녀의 말대로 했다.

“알았다. 우선은 사문의 어른들에게 인사부터 하도록 해라.”

서문연상은 방긋방긋 웃으며 제일 먼저 방취아 앞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머리를 조아렸다.

“서문연상이 사고(師姑)를 뵙니다.”

방취아는 내심 흐뭇한 생각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쌀쌀맞은 표정을 유지했다.

“본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으니 그 전통에 누(累)가 되지 않도록 매사에 언행(言行)을 각별히 조심하도록 해라.”

‘칫, 잔소리는…’

서문연상은 속으로는 혀를 낼름거리면서도 얌전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고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그녀가 방취아에게 제일 먼저 인사를 한 것은 그녀가 같은 여자이기에 상대하는 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녀만 자기편으로 만든다면 다른 남자들은 얼마든지 요리할 자신이 있었다. 이어 그녀는 소지산과 동중산에게도 인사를 했다. 전흠은 이제나 저네나 하고 기다렸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좀처럼 그에게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유소응을 붙잡고 재갈거리고 있었다.

“얘, 내가 이제 사저(師姐)가 됐다. 그러니 사저라고 불러 봐.”

유소응이 멀뚱한 눈으로 쳐다보고만 있자 그녀는 쌍심지를 돋우며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남자가 치사하게 아직도 옛날 일을 가지고 삐친 거니? 빨리 사저라고 불러. 안 그러면 장문인에게 말해서 혼내 줄 테다.”

옆에서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갈 노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망할 계집애야, 소응이 너보다 입문이 훨씬 빠른데 사저는 무슨 서저냐? 그리고 아직 입문식도 안 한 주제에 벌써부터 윗사람 행세를 하려고 하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서문연상은 아니꼬운 눈으로 그를 꼬나보았다.

“할아버지는 종남파 사람도 아니면서 왜 남의 일에 끼어들어요? 그리고 나이가 있는데 내가 어린애한데 사형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이에요?”

소지산이 슬며시 진산월에게 다가와서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호칭 문제는 장문사형께서 정리해 주셔야겠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몇 사람이 입문하다 보니 서열을 정하는 데 난맥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중산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소 사숙 말씀이 맞습니다. 저야 입문이 가장 빨라 상관이 없지만 소응보다 늦게 들어온 방화와 연상에게는 무조건 소응을 사형으로 대우하라고 하기 가 어렵습니다. 그들의 입문 날짜가 며칠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더욱 그렇습니다.”

듣고 보니 확실히 방화와 서문연상은 유소응보다 겨우 며칠 늦게 입문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이 차이가 적지 않으니 사형이란 소리가 쉽게 나올 리 없었다. 하나 진산월은 의외로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본파의 서열은 입문 순서에 준한다. 그것은 본파의 전통에 관계된 것이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예외를 둘 수 없다.”

방화는 별반 표정이 없는데 서문연상은 잔뜩 불만에 가득 찬 모습이었다.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럼 소응뿐만 아니라 저 방가에게도 사형이라고 불러야 한단 말이에요?”

진산월의 눈빛이 엄격해졌다.

“규율은 지켜져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규율을 정한 아무런 의미도 없다. 너는 현재 본파의 제일 마지막 제자이고,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너의 사형이 된다.”

서문연상은 볼이 퉁퉁 부었으나 진산월의 엄한 눈빛을 받고는 감히 무어라고 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이건 너무해. 소응이야 장난삼아 사형이라고 부른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나이도 비슷한 저 방가 녀석을 어떻게 사형이라고 부르란 말이야?’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서 다시 진산월에게 사정해 보려 했으나 비쩍 마른 진산월의 강퍅한 얼굴을 보자 나오려던 소리가 쑥 들어가 버렸다.

‘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장문인에게 말하느니 이해심 넓은 내가 그냥 참자. 방화, 그 녀석이 나에게 사형 대우를 받으려 한다면 아주 뜨거운 맛을 보여 줘야겠다. 그러면 감히 사형 행세를 못하겠지.’

그녀는 속으로 결심하며 방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마침 방화도 그녀를 보고 있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서 얼굴을 붉힌 채 황급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는 갑자기 기분이 풀어졌다.

‘저 백면서생(白面書生) 같은 녀석이 나를 당해낼 리 없지. 호칭은 사형이라고 부르면서 사실은 사제처럼 부려먹으면 그것도 재미있겠는데…. 호호…’

그녀가 혼자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을 때 진산월과 동중산은 좀 더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가 이곳으로 온 걸 안 이상 조만간에 검보에서 다시 사람을 보내 올 겁니다. 그때 검보와 뜻하지 않은 충돌이 일어날까 봐 걱정이 되는군요.”

동중산의 말에 진산월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녀를 받아들일 때부터 이미 각오한 일이다.”

“아무쪼록 검보의 보주가 소문처럼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아니기를 바라야겠군요.”

진산월은 의외로 고개를 저었다.

“검보의 보주가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서문연상은 이미 본파의 제자가 되었고, 문하제자를 보호하는 것은 문파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검보에서 어떻게 나오건 우리는 우리의 본분(本分)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

동중산은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명심하겠습니다.”

동중산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그날 오후가 되기 전에 다시 검보의 인물들이 종남파를 찾아왔던 것이다. 하나 찾아온 인물은 동중산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검보의 보주인 서문장천이 단지 사공언과 위소룡만을 대동하고 직접 종남파를 방문했던 것이다.


서문장천의 첫 인상은 잘 벼려진 한 자루의 예리한 신검(神劍)을 보는 것 같았다. 훤칠한 키에 유난히 긴 두 팔이 그러했고, 단정하고 곧은 자세와 물 흐르듯 유연한 몸놀림이 그러했다. 특히 조용한 가운데 서늘한 빛을 뿌리는 그의 두 눈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런 인상을 강하게 들게 했다. 서문장천은 그러한 눈으로 진산월의 전신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장내에는 서문장천을 비롯한 검보의 인물들 외에 진산월과 소지산, 그리고 전흠과 서문연상이 있을 뿐이었다. 서문연상은 한쪽에 앉아서 잔뜩 주눅이 든 얼굴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서문연상을 제외하면 양파의 인물들이 인원수나 문파에서 차지하는 비중들이 비슷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서문장천은 서문연상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처음 진산월을 대면할 때부터 그의 눈길은 계속 진산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서문연상 때문이 아니라 진산월을 만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한 따가운 주목을 받고도 진산월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서문장천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진 장문인을 만나게 되어 반갑소. 나의 못난 여식(女息)을 잘 돌보아 주고 있다는 말은 들었소.”

“문파 제자를 돌보는 건 장문인의 당연한 의무요.”

서문장천의 눈빛이 조금 더 강렬해졌다.

“제자라… 상아가 종남파에 입문을 했소?”

“그렇소.”

서문장천은 무언가 상념에 잠긴 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그 아이도 어린아이가 아니니 아무리 내가 아버지라고 해도 모든 걸 결정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아쉬운 건 사실이오. 진 장문인도 나중에 자식을 키워 보면 내 마음을 알 거요.”

“충분히 짐작하고 있소.”

“그래서 말인데… 아버지로서 한 가지 요구쯤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오.”

“말씀하시오.”

서문장천은 진산월을 똑바로 응시했다.

“진 장문인이 그 아이의 사부가 될 자격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소.”

종남파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하나 진산월은 여전히 담담한 음성으로 물었다.

“만약 내가 자격이 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그녀의 결정에 관여하지 않겠소.”

“만약 자격이 되지 않는다면?”

“그녀가 무어라고 해도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겠소.”

서문연상은 따라가지 않겠다고 소리치려 했으나 장내의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감히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진산월은 다시 물었다.

“어떤 식으로 내 자격을 시험해 볼 거요?”

서문장천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하나 그것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것이었다.

“진 장문인이 요즘 보기 드문 검법의 소유자라고 들었소. 나도 마침 평생 동안 검을 벗삼아 살아온 사람이오. 서로의 검학(劍學)을 비교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오.”

진산월은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너무도 수월하게 절정고수들간의 비무(比武)가 결정되었다. 한 쪽은 이미 오랫동안 강호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리고 있었으며 강북에서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의 주인인 절세의 검객. 그리고 다른 한 쪽은 혜성과 같이 나타나 강북무림을 뒤흔들고 있는 희대의 풍운아(風雲兒)! 전혀 뜻하지 않은 곳에서 두 절대고수의 겨룸이 시작되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남파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모두 비무장으로 나왔다. 부상을 치유하느라 좀처럼 밖으로 나오지 않던 전풍개 또한 모처럼 비무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전풍개는 전흠에게서 자세한 사정을 들었는지 진산월을 쳐다보는 표정이 다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제자를 받기 위해서 비무를 하다니 처음 들어보는 해괴한 이야기군. 너는 대체 생각이 있는 거냐?”

진산월의 반응은 담담했다.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전풍개의 시선이 한쪽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는 서문연상을 슬쩍 훑었다.

“저 여자아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녀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본적인 도리(道理) 이야기입니다. 문파 제자를 위해서 장문인이라면 기꺼이 나서야 한다는 것이 도리이고, 그 도리를 지키는 것만으로도 이번 일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전히 말은 잘하는구나. 그런데 자신은 있는 거냐?”

만에 하나 진산월이 서문장천의 비무에서 패한다면 문파 제자를 지키지 못했다는 치욕을 당해야 할 뿐 아니라 초가보와의 결전을 앞에 둔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의 자신감과 의욕을 꺾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몰랐다. 전풍개의 물음에 진산월은 조용히 미소지을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나 그 미소를 보자 전풍개는 갑자기 불안했던 생각이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꼈다. 전풍개는 묵묵히 그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려 주고는 한쪽으로 물러났다. 그때 이번에는 서문연상이 쭈뼛거리며 진산월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몇 번이나 망설이더니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아버님이 이렇게 나오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네가 미안해야 할 일이 아니다.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저… 한 가지 부탁 말씀을 드려도 될지…”

평상시의 발랄하고 할말 못할 말 가리지 않던 그녀로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조심스런 모습이었다. 진산월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네 아버지가 죽거나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서문연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사실 진산월이 무공을 펼치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아 왔기 때문에 아버지가 그와의 비무에서 크게 다칠까 봐 못내 불안했던 것이다. 그녀는 진산월이 손을 쓰기만 하면 상대가 제대로 대항도 하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무공 실력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속으로 두려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본 진산월의 싸움은 모두 일방적인 학살(虐殺)과 다름이 없었다.

진산월과 서문장천은 태화전의 앞에 있는 넓은 공터에서 서로 마주본 채 우뚝 서 있었다. 구경하는 사람은 불과 십여 명. 강호를 진동시키는 절대고수들의 싸움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촐한 인원이었으나 장내의 누구도 아쉽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 싸움은 명성(名聲)을 날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명예(名藝)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서문장천은 아버지로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고, 진산월은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지켜보는 사람 따위야 아주 없어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절정검객이 검을 들고 마주서자 장내의 공기는 아연 긴장되었다.

먼저 공격한 사람은 서문장천이었다.
강호에서의 명성이나 나이를 생각한담녀 다소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서문장천이 진산월을 경시하지 않고 있으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승리하고야 말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서문장천의 검은 물 흐르듯 유연하게 허공을 압축하여 진산월의 앞가슴 쪽으로 다가왔다.
검의 대가(大家)다운 멋진 솜씨였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일검(一劍) 같았으나, 그 순간 진산월은 자신의 상반신에 있는 대부분의 급소가 그 검의 영향권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느 쪽으로 피하든 서문장천의 검세(劍勢)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진산월은 성큼 앞으로 한걸음 내디디며 수중의 용영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그다지 빠른 동작 같지 않았는데도 먼저 발출한 서문장천의 검과 진산월의 검은 허공에서 정면으로 부딪쳤다.
하나 막 검과 검이 충돌하려는 순간, 서문장천의 검이 미묘한 변화를 일으켜며 진산월의 손목 쪽으로 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그 변초(變招)의 신속함은 가히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진산월은 슬쩍 오른손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용영검으로 자신의 가슴을 보호했다.
그러자 서문장천의 검이 다시 변화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아래에서 위로 검날이 솟구치며 검끝이 요동치듯 마구 흔들리는 것이다.
그 흔들리는 검날이 어디로 향해 날아들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진산월은 주저 없이 용영검을 앞으로 쭈욱 내뻗었다.
그러자 웬일인지 서문장천이 검을 거두며 뒤로 한걸음 물러서는 것이었다.
하나 서문장천은 이내 앞으로 돌진해 들어오며 재차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이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시작하더니 이내 수십 가닥의 검영(劍影)을 뿌려냈다.

우우웅!

마치 벌떼가 몰려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얼마나 검이 빨리 움직이기에 이런 소리가 들린단 말인가?
진산월은 물러서지 않고 검을 내민 상태로 가볍게 한차례 흔들었다.

팡!

마치 북이 찢어지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중인들은 그들이 다시 격돌하리라고 생각했으나 웬걸?
서문장천이 검을 거두는 것이 아닌가?
이어 그는 지금까지의 오연하던 모습과는 달리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하는 것이었다.

“딸아이를 잘 부탁하오.”

진산월 또한 용영검을 검집에 집어넣고는 마주 포권을 했다.

“귀한 따님을 보내 주어 감사하오.”

“너무 버릇없이 키운 자식이라 걱정되지만 진 장문인을 믿고 이만 돌아 가겠소.”

이어 서문장천은 초조한 표정으로 한쪽에 서 있던 서문연상을 손으로 불렀다.

“이리 오너라.”

서문연상이 다가오자 서문장천은 엄격하면서도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네 생각을 존중해 달라고 했지? 부모에게 그런 말을 할 때는 그만한 책임 또한 주어진 것이다.”

“아버지…”

“네가 이곳에서 보았다는 꿈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실현도리 수 있기를 바라겠다. 대신 언제고 꼭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서문연상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리며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아버지… 고마워요.”

“내가 너에게 듣고 싶은 것은 고맙다는 말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이다.”

“최선을… 다하겠어요.”

서문장천은 한차례 더 각별한 눈으로 그녀를 보더니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이어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두 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종남파를 떠나갔다.

멀어지는 서문장천의 뒷모습을 보는 중인들의 심정은 각양각색이었다.
서문연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운 뺨을 눈물로 적셨으며, 장승표와 갈 노인은 갑작스럽게 돌아선 서문장천의 의중을 몰라 어리둥절
한 얼굴이었다.
방취아는 서문연상을 위로해 주었고, 동중산은 이번 서문장천의 방문이 종남파의 앞길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전흠 또한 서문장천이 순순히 물러난 것이 이상한지 전풍개를 향해 물었다.

“싱거운 대결이군요. 서문장천의 실력도 소문보다 별로 대단할 게 없네요.”

전풍개는 칼날같이 예리한 시선으로 전흠을 쏘아보았다.

“바보 같은 놈, 눈은 크게 뜨고 입은 적게 열라는 노부의 말을 벌써 잊었느냐? 네놈은 설마 조금 전의 그들의 싸움이 시시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전흠은 찔끔하여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조금 전에 그들이 각가 몇 초씩을 사용했는지 말해 보아라.”

전흠을 쩔쩔맸다.

“서문장천이 삼 초(三招)를 사용했고… 장문인도 그 정도를…”

“이런 밥통 같은 놈!”

전풍개는 사정없이 전흠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퍽!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니 장님과 다를 게 뭐냐? 장식품으로 달고 다닐 거라면 아예 뽑아 버리도록 해라!”

전흠은 아프다는 내색도 하지 못하고 바짝 언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전풍개는 화를 낼 때는 그야말로 무서워서 그의 부친조차도 무릎을 꿇고 꼼짝도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전풍개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전흠을 쏘아보더니 소지산과 방취아 등을 손짓해 불렀다.

“너희들도 이리 와서 들어라. 조금 전에 서문장천은 모두 아홉 초를 사용했고, 장문인은 여섯 초를 썼다.”

모두들 전흠의 의견과 별로 다르지 않았기에 전풍개의 말을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대결은 그리 빨라 보이지도 않았고, 싸우는 시간도 길지 않아서 아무리 잘못 보았더라도 한두 초의 차이가 날 줄 알았건만, 전풍개의 말이 사실이라면 거의 삼분의 이의 변화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말이 아닌가? 전풍개는 중인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화를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 서문장천이 펼친 것은 평범한 개창망월(開窓望月)의 초식이었다. 하나 그 안에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두 가지 변화가 더 숨어 있었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다만 진산월만이 홀로 떨어져서 무언가 상념에 잠긴 듯한 모습이었다.

“초식 자체는 개창망월이었지만 그의 검로(劍路)에는 비류낙안(飛流落雁)의 묘법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검이 그토록 유연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처음에 개창망월로 시작한 초식은 중간에 이르러 팔방풍우(八方風雨)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평범한 개창망월임에도 불구하고 장문인의 상반신 전체를 위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렸다.

“아!”

“이 세 초식들은 각각으로는 별볼일 없는 것들이지만 세 초식이 융합되면서 그야말로 천하의 절초(絶招)에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이 한 수만 보아도 서문장천의 검에 대한 조예가 얼마나 넓고 깊은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멍청한 놈은 그것도 모르고 별로 대단할 게 없다고 떠들어대고 있으니…”

전흠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장문인은 횡단운산(橫斷雲山)의 수법으로 맞서 갔다. 이것은 아주 효율적인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개창망월과 팔방풍우가 주로 종(從)으로 변하는 초식들이기 때문에 횡(橫)으로 변하는 초식으로 맞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법이다. 뿐만 아니라 장문인의 횡단운산에는 또 다른 변화가 숨어 있었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그때 장문인의 검날이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여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횡단운산 속에 사월삼성(斜月三星)의 변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문장천이 어떤 방향으로 공격해 오더라도 횡단운산으로 막고 사월삼성으로 반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너희들 중에는 눈이 날카로운 자가 있을 리 없겠지.”

이번에는 소지산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들에 부끄러운 빛이 떠올랐다. 전풍개가 말하지 않았다면 누구도 진산월의 검초에 그러한 변화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전풍개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을 계속했다.

“두 사람의 검이 서로 마주치려 할 때 서문장천의 검이 다시 변화를 부렸다. 팔방풍우의 초식에서 갑자기 독사출동(毒蛇出洞)으로 바꾸어 장문인의 오른손을 노렸던 것이다. 여기에도 또 다시 두 개의 무서운 변화가 숨어 있었다.”

“…”

“단순히 손목만을 노린 독사출동이 곧이어 봉황삼점두(鳳凰三點頭)의 식으로 바뀌어 장문인의 우측 요혈 세 군데를 노리고 들어왔다. 이러한 변화는 그야말로 쾌속하고 날카로워서 보고 있던 나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장문인은 너무도 수월하게 이어룡으로 그 초식들을 피하더구나. 솔직히 그때 노부도 그의 반응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서문장천의 진짜 무서운 점이 이때 나타났다.”

중인들은 마치 할아버지에게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어린아이들처럼 눈을 빛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단순히 봉황삼점두인 줄 알았던 초식이 장문인이 피하자마자 어느새 사실환허(似實還虛)로 바뀌어 오히려 장문인의 가슴팍으로 날아드는 것이다. 그 검초의 허실(虛實)은 나로서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아마도 당금 무림에서 그 연환검초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전풍개는 한쪽에서 상념에 잠겨 있는 진산월을 힐끔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장문인은 피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다가서며 소지천남(笑指天南)의 식으로 서문장천의 목을 찔러 갔다. 이 초식을 보자 서문장천은 즉시 검을 거두고 뒤로 물러났다. 그 이유를 아느냐?”

전풍개의 지적을 받자 전흠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손은 감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런 한심한 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적어도 장문인은 너보다 몇 배는 더 현명했다. 그의 소지천남은 그런 상황에서 허실을 예측하기 힘든 서문장천의 사실환허를 파해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초식이었다. 더구나 소지천남의 바로 뒤에는 금강서벽(金剛舒壁)의 변화가 숨어 있었기 때문에 서문장천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물러서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서문장천이 물러서지 않고 계속 사실환허로 맞섰다면 결과가 어찌되었을 것 같으냐?”

전흠은 오늘 완전히 체면을 구기는 날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전풍개는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도 않았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랬다면 서문장천은 장문인의 검에 목이 꿰뚫리고, 장문인은 팔 쪽에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전흠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렇습니까?”

“소지천남은 사실환허의 허(虛)를 노린 것이다. 상대의 검초를 무시하고 곧장 날아들기 때문에 피하지 않는다면 목에 격중되고 만다. 그에 비해 금강서벽은 사실환허의 실(實)을 노린 것이다. 서문장천의 공세가 진짜로 변해 날아들었다면 비록 약간의 부상은 입겠지만 몸의 중심 부분은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알았기에 서문장천은 주저하지 않고 사실환허를 거두고 뒤로 물러난 것이다.”

중인들은 그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짧은 순간에 벌어진 그들의 동작에 이와 같은 놀라운 초식의 운용과 치열한 심기의 다툼이 담겨 있을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진짜 중요한 장면은 바로 다음에 일어났다. 뒤로 물러난 듯하던 서문장천이 다시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그때 그가 사용한 초식이 무엇인지 알아봤겠지?”

전풍개가 날카롭게 물어 오자 전흠은 움찔하여 급히 대답했다.

“풍차급전(風車急轉)입니다.”

“그래도 아주 쓸모없는 눈은 아니었군. 바로 그렇다. 하나 그는 이번에도 풍차급전 속에 다시 두 가지의 무서운 변화를 숨기고 있었다. 상대의 검을 자신 쪽으로 빨아들이는 고검원인(孤劍遠引)과 상대의 공격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이화접목(梨花接木)의 수법이 그것이다. 이 두 초식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의 풍차급전은 노부도 일찍이 보지 못했던 무시무시한 살인초식이 되고 말았다.”

전풍개는 자신의 무공에 굉장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강호의 경험이 누구보다도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까지 말하는 모습은 그를 오랫동안 지켜보았던 전흠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너는 서문장천이 풍차급전을 펼칠 때 그 기이한 소리를 들었겠지?”

“벌떼가 우는 듯한 음향 말입니까?”

“그렇다. 그 소리는 고검원인의 끌어들이는 힘과 이화접목의 배출하는 힘이 그의 검에서 동시에 흘러나왔기에 발출된 것이다. 그 소리만 들어도 그 당시 서문장천이 펼친 초식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담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전흠은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지금 전풍개의 말을 들으니 당시 기이한 음향을 발하며 날아드는 서문장천의 검이 자기로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검이 자신을 향해 날아온다는 상상만으로도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그런데도 진산월은 너무도 간단하게 그 검초를 막아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장문인은 그에 맞서 영풍불죽(迎風拂竹)의 초식을 펼쳐냈다. 하나 단순한 영풍불죽이라면 결코 서문장천의 그 무서운 일검을 막아낼 수 없다는 것은 이제 너희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장문인은 평범한 영풍불죽에 또 다른 변화를 가미하여 완벽한 수비초식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천전 만권(千纏萬捲)이다.”

그의 마지막 말에 전흠의 입에서 괴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엑? 그건 장괘장권구식의 초식이잖습니까?”

“그렇다. 장문인이 서문장천의 절초를 막기 위해 사용한 것이 바로 너희들이 우습게 생각하는 장괘장권구식의 초식 중 하나다. 장괘장권구식은 항상 손으로만 펼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너 같은 밥통은 결코 생각도 할 수 없는 절묘한 초식 운용(運用)이라고 할 수 있지.”

전흠의 얼굴이 구겨졌으나, 그는 창피함보다는 의아함이 더 짙은지 재차 물었다.

“천전만권이 영풍불죽과 합쳐져서 어떤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소손은 도통 모르겠습니다.”

“노부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 천전만권은 장괘장권구식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다양하고 투로가 복잡한 초식이 아니냐?”

“그렇지요.”

“반면에 영풍불죽은 검이 마구 요동을 치는 가운데 정작 노리는 곳은 오직 하나뿐이어서 보기에 비하면 무척이나 경쾌한 초식이다. 그런데 두 초식이 합쳐지자 영풍불죽의 경쾌함과 천전만권의 변화무쌍함이 결합하여 서문장천의 가공할 일검을 능히 막아낸 것이다. 밀고 당기는 고검원인과 이화접목은 천전만권의 변화로 막아내고, 빠르게 휘돌아쳐 오는 풍차급전은 영풍불죽으로 급소를 찔러대니 서문장천으로서도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에 난 폭음은 두 사람의 검이 부딪친 것이 아니라 천전만권에 막힌 고검원인과 이화접복의 변화가 서로 상충(相衝)하여 발생한 것이다.”

이어 전풍개는 한숨인지 탄식인지 모를 음성을 토해냈다.

“결국 그들은 서로간에 단 한 번도 검을 정면으로 부딪치치 않고 평범한 초식들만을 사용해 실력을 겨루었다. 각기 세 번의 공격과 세 번의 수비를 하였으며, 세 번의 공격에 서문장천은 각기 삼 초식씩 아홉 초식을 사용했고, 장문인은 각기 이 초식씩 여섯 초를 써서 그 공격을 파해(破解) 시켰다. 이것이 조금 전에 너희들이 보았던 그 별볼일 없어 보이는 싸움의 내막이다.”

전흠은 더 이상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모양이었다. 대신에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매섭게 번뜩이고 있었다.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그의 심중에 있는 자존심을 자극한 것이다. 서문장천이야 워낙 유명한 고수이니 그렇다 쳐도 자신과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진산월이 그와 같은 경지에 올랐다는 것은 그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더구나 자신은 뻔히 눈앞에서 보고도 그들의 싸움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지 않은가? 수치심과 호승심이 결합하여 그의 마음은 거센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전풍개는 전흠의 그런 심정을 알았는지 그를 쳐다보며 가만히 속으로 미소지었다.

‘녀석, 네 재질은 나쁘지 않다. 좌절하거나 방심하지 않고 계속 매진하다면 언젠가는 너도 그들처럼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사랑하는 자신의 손자에게서 진산월에게로 서서히 이동되었다. 묵묵히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는 진산월을 응시하는 전풍개의 시선에는 솔직한 감탄과 기대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전풍개는 진산월의 무공이 자신의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벅찬 심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항상 실망과 좌절 속에 지내던 종남파가 이제야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자신이 비웃었던 진산월의 꿈은 단순히 헛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풍개의 눈에는 그 꿈을 따라 욱일승천(旭日昇天)하고 있는 종남파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이제는 나도 기꺼이 그 꿈을 따라가겠다.’

전풍개는 마음속으로 소리치며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웃음을 가득 떠올렸다.


“조금 전의 싸움을 어떻게 보았나?”

돌아오는 길에 서문장천이 묻자 사공언은 손에 든 작은 섭선으로 입을 가리며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변변치 않은 제 실력으로는 감히 두 분의 무공을 추측할 수도 없었습니다.”

서문장천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정광(精光)이 번뜩이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 나이에 저와 같은 수준의 무공을 익힌 자는 모용 공자뿐일 것이네. 나도 하마터면 참지 못하고 신왕검형(神王劍形)을 사용할 뻔했으니까.”

그 말에 사공언은 흠칫하는 기색이었다. 신왕검형은 서문장천의 최고절학으로, 서문장천은 필생(必生)의 대적(大敵)이 아니면 절대로 그 무공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왔다.

“그 정도였습니까?”

서문장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을 수정해야겠네.”

사공언은 이미 그의 마음에 변화가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는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말씀하십시오.”

“일단 본보의 인물들은 초가보에서 모두 철수하도록 하게.”

“삼보회동을 깨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지 않네. 다만 초가보와 종남파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일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이네.”

“장문인이 비록 대단한 고수라고 해도 그 인원으로 초가보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다고 보십니까?”

언뜻 서문장천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너무 희미하여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어쨌든 미소는 미소였다.

“강호란 미묘한 곳이지. 일단 기세(氣勢)를 타게 되면 강호에 처음 나온 애송이도 오랫동안 명성을 쌓은 일류고수를 이길 수 있다네. 실력과 경험, 모든 것이 뒤처져도 말이지. 그게 바로 시운(時運)이라는 걸세.”

“…!”

“나는 관상을 조금 볼 줄 아는데, 종남파의 그 젊은 친구는 운이 강한 사람일세. 좀처럼 보기 힘든 실력에 운까지 좋은 친구가 초가보에 꺾여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날 거라고는 별로 믿겨지지 않는군.”

“그렇다면…”

“그들간의 승패(勝敗)를 속단할 수 없겠지. 그럴 필요도 없고. 다만 우리는 일이 좀 더 명확해질 때까지 뒤로 물러서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네.”

사공언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아가씨는…”

서문장천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신광이 조금 더 강해졌다. 서문장천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혼잣말처럼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아이도 운이 강하길 기대해야지. 자신의 입으로 꿈을 쫓아간다고 했으니 어떤 결과를 맞이하든 그 아이도 후회는 없을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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