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8화

랜덤 이미지

군림천하 14권 종남재림(終南再臨)편 : 8화


제141장. 종남혈사(終南血事)

중인들이 무너져 내린 동굴 입구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하고 있을 때였다.

“흐흐… 이제야 겨우 초가보의 떨거지들을 만나게 되었군.”

날카로운 웃음소리와 함께 몇 개의 인영이 그들의 앞에 떨어져 내렸다. 초일산은 황급히 그들을 돌아보았다. 나타난 인영들은 남녀노소(男女老少)가 고루 섞여 있는 여섯 명의 인물들이었다. 그들 중 가장 연장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매서워서 언뜻 보기에도 성정(性情)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그 노인과 시선이 마주치자 초일산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절대 내 하수(下手)가 아니구나.’

그 노인 외에도 한 사람의 중년인과 세 명의 젊은 청년, 그리고 한 명의 여인이 그들을 반원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초일산은 묻지 않아도 그들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종남파로구나!”

그의 탄성과도 같은 외침에 노인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렇다. 종남파의 어르신들이다. 네가 바로 한 쌍의 마환으로 제법 재주를 부린다는 초일산이라는 늙은이겠지?”

초일산의 표정은 무겁게 굳어졌다.

“그렇다. 너는 나월을 죽였다는 전풍개로구나?”

“흐흐… 노부가 바로 전풍개다.”

초일산은 상대의 정체를 알자 재빨리 형세를 분석했다. 상대의 숫자는 모두 여섯, 이쪽은 일곱이다. 하나 이쪽의 한 명은 손에 부상을 입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인 상태였다. 그렇다면 수적인 우세는 없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개개인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가 관건인데…

‘전풍개는 내가 상대하면 된다. 저 중년인도 범상치 않아 보이긴 하지만 구소기가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초일산의 시선이 전풍개와 중년인을 제외한 네 명의 남녀들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여인은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남자들은 이십대 중후반의 청년들로 특별한 인상을 풍기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 저들 중 신검무적은 없는 것 같군. 그렇다면 위민과 하북십호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일단 자신들이 결코 불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자 초일산은 이내 여유를 되찾고 입가에 엷은 미소를 떠올렸다.

“굳이 찾아갈 것도 없이 스스로 우리 앞에 나타나 목을 내밀다니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용감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전풍개! 이십 년 전에 그런 꼴을 당했으면 부끄러운 줄 알고 계속 숨어 있을 것이지 무슨 낯짝으로 다시 강호에 기어 나왔느냐?”

그이 조롱에도 전풍개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직 복수(復讐)의 일념(一念)으로 살아온 그가 말 몇 마디에 이성을 잃을 리는 없었다. 대신에 그의 얼굴에도 냉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초일산, 그 입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테니 목을 길게 빼고 기대하고 있거라.”

초일산은 전풍개의 웃음에 왠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명성이나 무공이 결코 그보다 못하지 않다는 자신감이 있으면서도 전풍개의 기세에 조금씩 눌리고 있는 것이다. 초일산은 양손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렸다.

“듣기와는 달리 큰소리가 대단하군. 하지만 강호에서는 큰소리만 가지고 행세할 수 없다.”

스릉!

미약한 음향과 함께 그의 양손에 노랗고 하얀 두 개의 쌍환(雙環)이 쥐어졌다. 바로 그의 독보적인 병기인 금은쌍환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 가지만 묻자. 동중산,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전풍개의 입가에 알 듯 모를 듯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물론 동굴 속에 있겠지. 그와 상당히 오랫동안 정담(情談)을 나누었으면서도 아직 몰랐단 말이냐?”

초일산은 그가 자신을 놀리는 줄 알고 눈빛이 차갑게 굳어졌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 없다고 느낀 초일산은 금은쌍환을 뽑아 든 채 전풍개를 향해 느릿느릿 다가가기 시작했다.

구소기 또한 자신의 독문절기인 혈영무극신공을 잔뜩 끌어올린 채 등뒤에 메고 있던 적수괴(赤手拐)를 뽑아 들었다. 그의 적수괴는 넉 자 길이에 끝에는 사람의 손 모양이 달려 있는 붉은 색 병기로, 기괴하고 독랄하여 상대하기가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었다.

위민을 비롯한 하북십호의 남은 다섯 사람은 이미 각자의 병기를 꺼내 든 채 언제든지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일행 중의 절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마음속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솟구쳐 있는 상태였다.

초일산이 금은쌍환을 양손에 나누어 쥔 채 전풍개를 향해 다가서는 광경을 보자마자 위민과 하북오호들은 노성을 지르며 앞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우와아!”

“죽어라!”

원래 하북십호는 서로 친형제간은 아니었지만 동료들간의 우에는 친형제 못지않게 두터웠다. 개개인의 무공은 상당히 차이가 났지만 항상 몰려다녔기 때문에 강호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첫째인 위민과 둘째인 장태방, 다섯째인 하뢰동(夏賴東)의 무공은 절정고수라 불려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다행히 그들 세 사람은 모두 무사했기 때문에 현재 남아 있는 하북오호의 전력은 상당한 것이었다.

위민이 달려든 사람은 체구가 단단하고 표정이 거만한 청년이었다. 위민은 처음 봤을 때부터 청년의 어딘지 사람을 깔보는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대뜸 그를 상대로 지목하고 달려든 것이다.

전흠은 위민이 다른 사람은 다 놔둔 채 자신을 향해 살기를 펄펄 흘리며 다가오자 입꼬리에 냉랭한 미소를 떠올렸다.

“풋. 내가 제일 만만해 보인단 말이지?”

전흠은 차갑게 웃으며 피하지 않고 위민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채 검을 뽑기도 전에 위민의 도(刀)가 먼저 날아들었다. 위민이 도를 발출하는 속도는 전흠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도 상당한 힘이 실려 있어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나 전흠은 오히려 크게 호기(豪氣)가 동한 듯 낭랑한 웃음을 터뜨리며 정면으로 맞서 갔다.

파파팟!

삽시간에 두 사람 주위는 시퍼런 도기(刀氣)와 눈부신 검영(劍影)으로 뒤덮여 버렸다.

이것이 바로 후대(後代)에까지 널리 알려져 모든 무림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던 종남혈사(終南血事)의 서막(序幕)임을 당시에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들이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있을 때 전풍개와 초일산도 서서히 싸움에 접어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오랫동안 강호에서 명성을 날린 인물들로, 서로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전풍개는 종남파의 최고고수인 종남삼검의 일인이었고, 초일산 또한 실질적인 오대호법의 제일인자로 불려 손색이 없는 절세고수였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전풍개였다. 전풍개는 상대를 앞에 두고 시간을 끌거나 무게를 잡는 것을 제일 싫어했다. 일단 싸우기로 작정한 이상 불필요한 말이나 행동은 최대한 배제한 채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만 전력을 기울이는 것이 그의 방식이다. 지금도 전풍개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초일산이 채 몸을 멈추기도 전에 그에게 득달같이 달려들며 출수를 했다.

파파파팍!

일단 그의 검이 움직이자 삽시간에 초일산의 주위는 살벌한 검광에 가려져 몸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초일산은 설마 전풍개가 이처럼 대뜸 손을 써 올 줄은 몰랐는지 약간 당황한 표정이었으나 경험이 풍부한 인물답게 이내 금은쌍환을 휘두르며 그에게 맞서갔다.

그의 금은쌍환은 색깔만 다를 뿐 모양은 똑같이 생겼다. 크기는 어린아이의 머리통만한데, 보통 때는 어깨 부근에 끼워져 있다가 그가 팔을 늘어뜨리면 자연히 아래로 내려와 그의 손아귀에 쥐어지는 것이다. 재질은 몇 종(種)의 금속을 섞어 만든 특수한 합금(合金)으로, 단단하기가 금강석과 같아서 어떠한 병기와 부딪쳐도 파괴되지 않았다. 초일산은 모두 십사 초로 된 칠칠항마환(七七降魔環)이라 불리는 절학으로 무림에 명성을 떨쳤으며, 특히 금은쌍환 두 개로 각기 다른 초식을 동시에 뿜어낼 수 있다고 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했다. 양손으로 각기 다른 초식을 발출할 수 있는 사람이 강호에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초일산처럼 양손의 초식이 판이하게 다른 성질을 띤 경우는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오른손에 들린 금환(金環)으로 펼치는 초식은 대부분이 무겁고 막강한 힘을 담고 있었고, 반면에 은환(銀環)에서는 빠르고 영묘(靈妙)한 초식들이 펼쳐졌다. 그래서 그와 싸우는 사람은 무겁고 빠른 두 초식을 동시에 마주쳐야만 했다. 그것은 서로 판이한 성격의 무림 고수 두 명을 함께 상대하는 듯한 어려움을 가져다주었다.

그에 비하면 전풍개의 검법은 어디까지나 빠르고 날카로운 성라검법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고 있었다. 좀더 빠르고 좀더 강하게 검법을 펼치는 것이 전풍개가 추구하는 검의 방향이었다. 이십 년이 넘는 오랜 시간 동안의 각고(刻苦) 끝에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상대와 마주치든 흔들림 없이 자신의 검을 펼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아마 전풍개가 아닌 다름 사람이 초일산을 상대했다면 현란하고 변화무쌍한 쌍환의 위력에 눌려 본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하고 낭패를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초일산으로서는 그야말로 자신의 상극(相剋)을 만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십여 초를 나누었다. 그동안 두 사람의 병기는 한번도 서로 부딪치지 않았다. 일부러 피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만큼 상대방을 의식한 채 신속하게 몸을 움직였던 것이다. 그러던 한 순간, 그들의 병기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깡!

고막을 후벼 파는 듯한 굉량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한 사람의 신형이 비틀거리고 뒤로 물러났다. 물러난 사람은 초일산이었다. 놀랍게도 위력이 강맹한 금환으로 마주쳤는데도 전풍개의 검에 실린 경력을 완전히 감당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윽…’

초일산이 눈을 찡그리며 두 걸음 뒤로 물러났을 때, 전풍개는 마치 한 마리 매처럼 허공을 압축해서 그의 정면으로 돌진해 들어오고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머리에 두 눈을 시퍼렇게 번뜩인 채 맹렬히 달려드는 전풍개의 모습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야말로 질풍검이라는 본래의 별호가 절로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초일산은 어쩔 수 없이 비스듬히 세 걸음을 다시 후퇴해야만 했다. 하나 그것을 기점으로 그는 전풍개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장내에서 그들의 싸움 못지않게 치열한 것은 구소기와 노해광의 격전이었다. 초일산이 전풍개에게 먼저 달려간 후 구소기는 자신의 체면상 종남파의 인물들 중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은 중년인을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구소기는 자신이 어렵지 않게 상대를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종남파에서 장문인을 제외하고는 전풍개 정도만이 위협적인 고수라는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막상 손을 나누어 보자 상대는 결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구소기의 적수괴 공력은 그야말로 대단해서 오대산 일대에서는 아무도 감히 십 초 이상을 받아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이 평범하게 생긴 중년인은 무려 이십 초 동안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자신에게 맞서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노해광의 형편이 좋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의 내공력(內功力)은 구소기보다 뒤떨어지기 때문에 병기가 정면으로 부딪치는 상황을 최대한 조심하다 보니 몇 배나 힘이 들었다. 게다가 가끔씩 왼손으로 날리는 구소기의 장력에는 혈영무극강기의 가공할 기운이 담겨 있어 자칫하다가는 커다란 낭패를 당하게 될 확률이 높았다.

그에 비하면 그가 장기로 삼는 천하삼십육검은 날카롭기는 했으나 어딘지 모르게 강맹한 맛이 부족했다. 노해광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천하삼십육검과 장괘장권구식만을 수련해 왔다. 두 무공은 종남파의 무공들 중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며, 입문해서 제일 처음 배우는 무공들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처럼 여타의 무공에 눈을 돌리지 않고 그 두 가지 무공에 매달린 것은 나름대로의 심사숙고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종남파에 입문할 당시에는 종남파의 뛰어난 절기들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아 있는 무공이라고 해봐야 십여 개 남짓에 불과했다. 그는 그 무공들을 아무리 익혀 봤자 강호의 절정고수로 행세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어설프게 여러 가지 무공을 익히느니 아예 한 가지 무공만이라도 완벽하게 터득하자고 결심한 것이다. 그 결정의 이면에는 자신보다 뒤늦게 입문한 백동일의 영향이 컸다. 노해광은 자신의 재질이 백동일에게 뒤처진다고 생각하고 백동일이 여러 가지 무공을 섭렵하는 동안 천하삼십육검 한 가지만을 집요하게 연마했다. 백동일과 똑같이 해서는 결코 그를 능가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적어도 천하삼십육검에 관한 한은 종남파에서도 그를 능가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나 얼마 전에 그는 천하삼십육검의 새로운 경지를 보게 되었다. 바로 진산월이 백동일을 향해 펼치는 광경을 본 것이다. 그때 노해광은 자신이 완벽하게 익혔다고 생각한 천하삼십육검이 얼마나 어설프고 모자란 것이었는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진산월의 천하삼십육검은 그로서는 생각도 못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 찬연한 검로(劍路)의 흐름과 완벽을 넘어선 아름다운 초식의 배합, 그리고 유성(流星)처럼 빠르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

그것은 노해광에게는 새로운 세계로의 개안(開眼)이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반나절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노해광은 당시의 진산월이 펼쳤던 천하삼십육검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검은 평소보다 더욱 예리하고 섬세하게 움직였다. 자신과는 명성에서 비교도 할 수 없는 절정고수인 혈제 구소기를 맞아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맞설 수 있었던 것도 천하삼십육검의 경지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기 때문이었다.

천하삼십육검은 절대로 별볼일없는 검법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펼친다면 어떤 검법에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는 절정의 검법이었다. 이러한 확신이 노해광의 가슴을 가득 메우고 있엇다.

두 사람의 싸움은 어느 한쪽의 특별한 우세도 없이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무공과 무공, 병기와 병기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 그들에 비하면 하북십호와 종남파의 일대제자들간의 격전은 그야말로 피가 난무하고 고함과 욕설이 오가는 살벌한 것이었다.

가장 먼저 피를 본 사람은 하북십호 중의 둘째인 광호 장태방이었다. 장태방의 상대는 소지산이었는데, 장태방은 화급한 성격답게 그를 경시하여 수비를 도외시한 채 무작정 공격만을 일삼다가 왼팔에 커다란 검상(劍傷)을 입고 말았다.

“으아아…!”

비명인지 고함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른 장태방은 두 눈을 시뻘겋게 충혈시킨 채 미친 듯이 소지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 선불맞은 멧돼지 같은 모습은 마음이 약한 사람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로 광폭한 것이었다.

“이놈! 죽여 버릴 테다!”

장태방은 목이 터져라 욕설을 퍼부으며 소지산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팟!

소지산의 장검이 빛살처럼 움직이며 다시 장태방의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하나 장태방은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은 채 불문곡직하고 소지산에게 다가들어 마침내 그의 코앞까지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소지산은 설마 상대가 이토록 무식한 방법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는지 안색이 약간 굳어졌다. 장태방은 옆구리를 희생한 대가로 소지산의 지근(至近) 거리까지 접근해서 오른손으로 그의 관자놀이를 세차게 강타했다. 소지산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으나 장태방의 손이 왼쪽 이마를 스치는 바람에 이마의 피부가 벗겨져 얼굴 왼쪽이 피투성이가 됐다. 장태방은 재차 오른손을 날려 소지산의 가슴팍을 후려쳐 갔다. 하나 그 순간, 소지산의 몸이 한차례 휘청거리더니 한 줄기 무서운 검광이 장태방의 목덜미를 그대로 찔러 들어가는 것이었다.

팍!

“끄윽!”

장태방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목에는 어느새 소지산의 장검이 깊숙이 꽂혀 있었다.

장태방은 눈을 부릅뜬 채 소지산을 노려보고 있더니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소지산은 비록 낙하구구검 중의 절초인 경홍섬전(驚虹閃電)으로 장태방을 쓰러뜨릴 수 있었으나, 장태방이 마지막으로 내갈긴 장력에 가슴을 격중당하고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으웩!”

한바탕의 검은 피를 토해내고서야 비로서 그의 안색이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바로 그때 그의 옆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으아악!”

소지산이 흠칫 놀라 돌아보니 하북십호 중의 세 번째 실력자인 하뢰동이 응계성의 검에 가슴이 갈라진 채 피를 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하나 응계성 또한 부상을 당했는지 연신 휘청거리고 있었다. 소지산은 황급히 응계성에게 다가갔다.

“괜찮느냐?”

응계성은 억지로 웃어 보였으나 소지산은 이내 그의 왼쪽 다리가 힘없이 덜렁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한눈에 보아도 다리가 부러졌음을 알 수 있었다.

응계성의 합류는 종남파 고수들 중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당연히 침상에 누워 있는 줄 알았던 그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종남파 고수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해야만 했다. 어찌된 일이냐는 중인들의 물음에 응계성은 제갈 노인이 영약(靈藥)을 선사해 몸이 예상보다 빨리 쾌유될 수 있었다며 활짝 웃었다. 소지산은 그의 말이 조금 미심쩍기는 했으나 그의 표정이 너무 밝은데다 단 한 사람의 힘도 절실했던 참이라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고 지나가고 말았다.

소지산은 응계성의 상처를 살펴보고는 표정이 무거워졌다. 단순히 부러진 줄만 알았었는데 왼쪽의 무릎뼈가 완전히 으스러져 있었던 것이다. 원래 왼쪽 다리는 얼마 전에 수술을 한 부위여서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아무래도 오른쪽 다리보다는 움직임이 떨어져서 상대의 공격에 정통으로 가격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무릎뼈가 으스러졌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정상으로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

응계성은 다리가 부러진 통증을 참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는… 괜찮다. 그보다 사매를…”

소지산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방취아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방취아는 지금 거의 쓰러지기 직전에 처해 있었다. 그녀를 공격하는 사람은 두 명이나 되었다. 원래 그녀의 상대는 하북십호 중에서 비교적 무공이 떨어지는 태산호(太山虎) 공효(孔曉)였다. 그와 일 대 일로 싸울 때만 해도 그녀는 비연신법과 천둔장법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그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손에 부상을 당해 싸움에 끼어들지 못하고 한쪽에 서 있던 하북십호 중의 한 사람인 서표(徐杓)가 그녀를 급습한 것이다. 서표는 부상당한 오른손 대신 왼손에 기형의 장검을 쥐고 있었는데, 그 검초가 악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에 미처 그의 암습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그녀는 하마터면 그대로 공격을 당하고 쓰러질 뻔했다. 간신히 그의 암습을 피했으나, 옆구리가 검에 스쳐 두 치 가량의 상처가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두 사람의 합공(合攻)에 시달려 일방적으로 몰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녀가 아직도 쓰러지지 않고 버틴 것은 순전히 그녀의 신법이 두 사람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녀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몸이 조금씩 느려졌고, 그 바람에 그녀는 더욱 위태로운 지경에 몰리고 있었다.

소지산이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막 공효의 주먹을 어깨에 격중당하고 연신 휘청거리며 다섯 걸음이나 물러나고 있었다. 그녀가 채 중심을 잡기도 전에 이번에는 서표가 그녀의 머리 위로 다가오며 장검을 휘둘렀다.

방취아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몸을 마구 회전시켰다. 더 이상 피하기 힘들자 천둔장법 중의 절초인 선전건곤(旋轉乾坤)을 펼쳐 정면으로 맞서 나간 것이다.

파파팡!

그녀가 번개같이 회전하며 내갈긴 십여 장에 공효는 삼 장(三掌)이나 격중당했고, 서표도 일 장(一掌)을 얻어맞았다. 하나 그 덕분에 그녀는 다시 어깨에 서표의 일검을 격중당했다.

“악!”

장력을 맞은 두 사람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버티는 데 비해 그녀는 짤막한 외침을 토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내공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상황은 정반대였을 것이나, 지금이 그녀가 할 수 있는 한계치였다. 두 명의 장한은 안광을 무섭게 번뜩이며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향해 덮쳐 갔다. 바로 그 순간, 기이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쏴쏴쏴쏴…

무심코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던 두 사람의 얼굴이 시커멓게 굳어졌다. 수십 개의 눈부신 검영이 폭포수처럼 자신들에게 퍼부어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일대장관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낙하구구검 중의 절초인 천강은홍(天降銀虹)임을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음을 직감한 그들은 사력을 다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가장 강한 무공으로 맞서 갔다.

파아아…

“크윽!”

“아악!”

답답한 신음과 비명성이 연거푸 터져 나오며 피비가 허공을 자욱이 수놓았다.
공효는 이마가 두 쪽이 난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나뒹굴었고, 서표 또한 가슴과 옆구리가 피범벅이 된 채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고 있었다.
소지산도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했다. 방취아의 위급함을 알고 단숨에 칠 장을 날아와 검초를 펼치느라 무리했기 때문에 그의 안색은 백지장처럼 핼쑥해져 있었다. 게다가 서표가 펼친 검기 중 한 가닥이 옆구리를 스쳐 그곳에서도 핏물이 뿜어 나왔다.
서표는 휘청거리면서도 용케도 쓰러지지 않고 왼손에 든 장검을 휘두르려 했다. 하나 그때 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흘러나왔다.

“아악!”

소지산이 놀라 보니 서표의 옆구리에는 어느새 하나의 옥수(玉手)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 손의 주인은 조금 전까짐나 해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방취아였다.

“네… 네년이…”

서표는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검을 들어올리다 그대로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졌다. 방취아 또한 사력을 다해 그를 쓰러뜨렸는지라 기운이 모두 떨어져 바닥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취아!”

소지산이 황급히 그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방취아는 그를 올려보며 힘없이 웃었다.

“난 괜찮아요. 그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소지산은 그녀가 몇 군데 부상을 입기는 했으나 부상보다는 너무나 지쳤기 때문에 쓰러진 것임을 알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목소리가 밝아졌다.

“전 사조와 초일산의 싸움은 전 사조께서 일방적으로 유리하시군. 초일산은 앞으로 얼마 버티지 못할 거야. 그리고 노 사숙도 의외로 선전(善戰)하시고 있어.”

“응 사형은요?”

소지산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상대를 쓰러뜨렸지만 왼쪽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어.”

그녀는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방긋 웃었다.

“걱정 말아요. 웬만한 부상이면 제갈 노인이 단숨에 치료해 줄 거예요.”

하나 소지산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아무리 제갈외가 천하에 다시없는 신의라 해도 무릎뼈가 으스러진 사람을 어떻게 치유한단 말인가?
그녀는 미처 그의 표정을 완전히 살피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그 재수 없는 자식은?”

소지산은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깨닫고 피식 웃고 말았다.

“직접 봐.”

방취아는 소지산이 턱으로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싸늘한 코웃음을 날렸다.

“흥.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아직도 상대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다니… 정말 입만 살아 있다니까.”

“그의 상대는 하북십호의 우두머리인 위민이야. 위민은 하북성 내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무서운 고수여서 나라고 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을 거야.”

“그건 옛날 얘기지요. 지금의 사형은 충분히 그를 감당할 수 있어요.”

소지산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옛날이었다면 내가 아예 상대도 되지 못했겠지. 지금이니까 그래도 싸워 볼 수 있다고 말한 거야.”

방취아는 도리질을 했다.

“못 믿겠어요. 누가 뭐래도 사형은 정말 무서운 고수가 됐어요. 방금 전에도 하북십호 두 사람을 일검에 쓰러뜨렸잖아요.”

“그거야 그자들이 사매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틈을 노렸기 때문이지.”

방취아는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게 자기 무공에 자신감이 없어요? 내가 고수가 됐다고 하면 그런 줄 아세요.”

소지산은 대꾸할 말이 없어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방취아는 자신이 조금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그런데 낙 사형과 정 사형, 동 사질은 왜 아직 안 오는 거예요? 설마 그들에게 당한 건…”

“정 사제와 동 사질은 몰라도 일방이 함께 있는 이상 그들은 무사할 거야.”

“낙 사형이 정말 그 정도의 고수가 됐어요?”

“그래, 내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이번에는 방취아도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대신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것이었다.

“정말 기쁘군요. 항상 사곰나 치고 속만 썩이던 낙 사형이 이제 한 명의 어엿한 무림 고수가 됐다니…”

“낙 사제는 머지않아 강호에서 명성을 날리는 절정고수가 될 거야.”

“당신도 그렇게 될 수 있어요.”

소지산은 빙긋 웃었다.

“물론이지.”

두 남녀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흥. 남들은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격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곳까지 와서 사랑 타령을 하고 있다니 너무들 한다고 생각지 않소?”

두 사람은 흠칫 놀라 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만면에 피곤한 빛이 가득한 전흠이 피가 잔뜩 묻은 검을 든 채 서 있었다.
소지산은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위민의 목 잘린 시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친 곳은 없소?”

전흠은 말없이 왼쪽 어깨를 으쓱거렸다.
소지산이 보니 그의 어깨에 칼자국이 선명히 나 있었다.
소지산이 황급히 상처를 보려 하자 전흠은 몸을 비켜섰다.

“지혈(止血)은 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마지막 순간에 그놈이 발악적으로 공격하는 바람에 일도(一刀)를 맞고 말았소.”

소지산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시체들이 쓰러져 있는 가운데, 장내에는 두 쌍의 격전이 아직도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 두 격전이야말로 오늘 일의 승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싸움들이었다.

한쪽은 전풍개와 초일산, 다른 한쪽은 노해광과 구소기.

전풍개와 초일산의 싸움은 이미 승패가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대등하게 맞섰던 초일산은 전풍개의 용맹스런 공격에 기세가 꺾여 지금은 수비를 하는 데만 급급할 뿐,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승부를 가리는 단순한 싸움이었담녀 초일산은 진작에 패배를 인정하고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하나 아쉽게도 오늘 싸움은 둘 중 한 사람이 쓰러져야만 끝나는 것이었다.

노해광과 구소기의 대결은 그보다는 조금 더 양상이 복잡했다.
두 사람은 오십 초가 넘도록 백중세(伯仲勢)를 유지했으나, 백 초가 지나자 공력이 부족한 노해광이 조금씩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그래서 소지산과 전흠은 자연히 그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다가갔다.

구소기가 노해광을 몰아붙이는 와중에도 이것을 알아차렸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당당한 종남파의 고수들이 설마 한 사람을 합공하려는 건 아니겠지?”

전흠은 피식 웃었다.

“이자들은 꼭 자기들이 불리할 때만 본파를 치켜세운다니까. 당당하지 않아도 좋으니 우리는 합공을 해야겠소.”

구소기의 안색이 푸르뎅뎅해졌다.

“네놈은 정파의 자존심도 없단 말이냐?”

전흠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존심? 그런 건 개에게나 줘버리라고 하시오. 난 자존심보다 먼저 살아야겠으니까 당신이나 자존심을 지키다가 저승으로 가도록 하구려.”

전흠이 당장에라도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 듯 하자 구소기의 얼굴에 다급한 표정이 떠올랐다.
오대산에서 제왕처럼 살아온 구소기로서는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 믿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초가보의 정중한 초빙을 받고 오대산을 떠날 때만 해도 자신이 이런 풋내 나는 애송이에게 공갈 협박을 당하는 신세가 될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하나 아무리 분통이 터져도 상황이 바뀔 리는 없었다.

그런데 전흠이 막 구소기를 향해 달려들려 할 때였다.

“이놈! 이미 늦었다!”

싸늘한 폭갈과 함께 난데없이 세찬 경풍이 전흠에게로 휘몰아쳤다.
전흠은 막 앞으로 나서려다 어디선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가공할 압력이 휘몰아쳐 오자 대경실색하여 황급히 옆으로 몸을 피했다.

콰앙!

무언가 희끗한 것이 놀라운 속도로 지나가며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서 있던 자리가 움푹 꺼져 들어갔다.
그 꺼진 자리를 보자 전흠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른의 팔뚝만한 두께에 한 자가 넘는 웅덩이가 일렬로 그어진 것이다.
그것이 하마터면 자신의 몸 위로 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누구라도 오금이 저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와 함께 장내에는 어느새 팔구 명의 인물들이 우뚝 서 있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