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15권 서안지란(西安之亂)편 : 1화
제145장. 암운승기(暗雲升起)
바람이 유난히 심하게 부는 날이었다. 모관(毛官)은 창문가에 턱을 괴고 앉은 채 인적이 드문 거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제법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동대가(東大街)는 거친 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날씨 탓인지 지나가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관은 휩쓸려 올라간 먼지 때문에 누렇게 보이는 하늘을 우두커니 올려다보고 있다가 문득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다가각… 다가각….
짙은 먼지바람을 뚫고 한 떼의 인마(人馬)가 달려오고 있었다. 잠시 후 말 울음소리가 나더니 몇 명의 인물들이 주루로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하나같이 머리에 죽립(竹笠)을 눌러쓰고 피풍의를 걸치고 있었다.
“바람 한번 지독하게 부는군.”
그들 중 가장 체구가 건장한 죽립인이 나직하게 투덜거리며 죽립을 벗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다부진 인상의 삼십대 장한의 모습이 드러났다. 네 사람은 차례로 죽립을 벗고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는 주루 안을 둘러보더니 중앙의 탁자로 가서 앉았다. 그들 중 세 사람은 남자였고, 한 사람은 여자였는데, 처음에 죽립을 벗은 삼십대 장한 외에는 모두 이십대 초중반의 젊은 사람들이었다. 그중에서도 홍일점인 여자는 얼굴이 하얗고 입술이 붉은 요염한 인상의 미녀였다. 그들은 간단한 음식을 주문한 후 주루 안을 둘러보더니 이내 자신들끼리 나직한 소리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모관은 그들 중 가장 나이 많은 삼십대 장한의 얼굴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장한이 그의 시선을 느낀 듯 힐끔 돌아보았을 때 모관은 어느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린 후였다. 장한은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모관을 응시했으나 모관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는 사람이에요?”
여자가 나직한 소리로 묻자 장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내가 잘못 본 모양이다. 그나저나 날씨가 너무 험해서 예상보다 많이 늦어졌구나. 식사를 마치고 바로 출발해야겠다.”
“산(山)을 내려올 땜나 해도 파란 하늘이 보였는데, 불과 반나절 만에 엉망이 되었네요. 모처럼 서안의 봄기운을 느껴보고 싶었는데 아쉽군요.”
“하늘을 보아하니 적어도 내일까지는 계속 이런 날씨일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일이 끝나면 며칠 서안에 머물러 있을 예정이니 너무 서운해할 필요 없다.”
여자 옆에 앉아 있는 이십대 초반의 얼굴이 길쭉하고 턱이 조금 튀어나온 청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 일이 쉽게 끝날까요? 두 분 사백(師伯)께서 함께 움직이셨는데도 별다른 성과가 없었지 않습니까?”
장한이 나직하면서도 단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라졌다. 우선 오리무중(五里霧中)이던 사건의 진상도 상당히 밝혀졌고, 본파 뿐 아니라 몇 개 문파가 힘을 합치기로 했으니 어쩌면 의외로 빨리 결판이 날지 모른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이 늘었다고 봐야 하니 매사에 더욱 각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다른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들이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주방에서 점소이가 요리들을 가지고 나왔다. 네 사람은 별다른 말이 없이 조용히 식사를 했는데, 그래서인지 전체적인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데 그들이 막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였다. 머리에 커다란 두건을 뒤집어쓴 비쩍 마른 체구의 사내 하나가 허겁지겁 주루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세찬 바람 속을 뚫고 온 탓인지 그의 두건과 어깨에는 뿌연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사내는 두건을 벗지도 않고 주루 안을 둘러보더니 빈 자리로 가서 털썩 주저앉으며 소리쳤다.
“여기 술 한 병 빨리 가져오너라. 안주는 필요 없다!”
주루 안의 사람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쳐다보았다. 사내는 무엇이 그리도 급한지 연신 탁자를 두들기며 점소이에게 술을 가져오라고 성화를 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경박스럽고 사납던지 점소이는 물론이고, 주루의 주인도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그때 주루 한쪽에서 느닷없는 폭갈이 터져 나왔다.
“젠장! 조용히 밥 한 끼 먹고 가렸더니 이놈의 주루에서는 그것도 안 된단 말인가? 웬 정신 나간 놈이 어르신 식사하는데 소란을 부린단 말이냐?”
그 고함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삽시간에 주루 안이 쥐죽은듯 조용해졌다. 심지어는 두건을 쓴 사내조차 입을 다물고 폭갈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엄청난 고함 소리에 어울리는 우람한 체구의 황의인이 고리눈을 부릅뜬 채 우뚝 서 있었다. 황의인의 등뒤에 검은 수실을 매단 칼의 손잡이가 삐져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무림인(武林人)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두건을 쓴 사내는 황의인의 덩치에 조금 움찔하는 것 같았으나 이내 큰 소리로 물었다.
“어르신이라니, 누가 어르신이란 말이오?”
황의인은 자신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로 나다.”
두건을 쓴 사내는 멀거니 황의인을 쳐다보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저렇게 큰 사람이 아직도 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니… 당신 같은 사람은 어르신이 아니라 철부지라고 해야 하는 거요.”
황의인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리며 눈에서 사나운 안광이 흘러나왔다.
“내가 철부지라고?”
“그렇소. 나서야 할 일과 그러지 못할 일을 분간하지 못하고,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않고 무조건 욕설부터 내뱉으니 그게 철부지가 아니고 뭐겠소?”
“네놈이 누군데 이 어르신이 네놈 일에 나서지 못한단 말이냐?”
사내는 두건을 깊게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의 태반을 가리고 있었는데, 두건 밑으로 보이는 아래턱에는 짧은 수염에 덮인 얄팍한 입술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소?”
황의인은 사내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표정이 험악하게 변하며 음성이 한층 더 거칠어졌다.
“솔직히 네놈이 누구이며 어디서 뭐 하는 놈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이 어르신에게 함부로 입을 놀린 대가는 받아야겠다.”
황의인이 금시라도 주먹을 휘두르며 달려들 듯 하자 사내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잠깐, 당신은 혹시 이런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소?”
황의인은 막 몸을 움직이려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얼 말이냐?”
“수욕정이풍부지(樹慾靜而風不止 :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계속 부니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이오.”
황의인의 입가에 냉랭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놈은 가만히 있는데 이 어르신이 일부러 네놈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는 말이냐?”
“그렇소. 그리고 또 이런 말도 떠오르는구려. ‘일일지구부지외호(一日之狗不知畏虎 :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 라는….”
사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의인이 얼굴을 시뻘겋게 상기시키며 노한 고함과 함께 달려들었다.
“이 빌어먹을 놈이 누구를 개에게 비유하는 거야?”
황의인의 주먹은 덩치만큼이나 큰 데다 울퉁불퉁한 굳은 살이 박여 있어 정통으로 맞으면 뼈가 부서질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의 주먹이 날아드는 속도는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빨라서 중인들이 무언가 누런 것이 희끗거린다고 느낀 순간에 황의인의 주먹은 어느새 두건을 쓴 사내의 콧등 앞에 거의 도달해 있었다. 두건을 쓴 사내가 금시라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것 같았는지 여기저기서 짤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앗?”
두건을 쓴 사내는 용케도 두 팔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막았다.
퍽!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황의인의 주먹이 두건을 쓴 사내의 얼굴을 감싼 팔뚝을 세차게 가격했다. 비록 팔뚝으로 막기는 했으나 충격이 작지 않았는지 두건을 쓴 사내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마침 공교롭게도 두건을 쓴 사내의 뒤쪽은 막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고 있던 네 명의 남녀가 있는 자리였다. 네 명의 남녀 중 한 사람이 무심코 손을 내밀어 자신들 쪽으로 다가오는 두건을 쓴 사내의 등을 부축하려 했다. 한데 그때 그들 중 가장 연장자인 장한이 안색이 변한 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라!”
장한은 뒷걸음질치고 있는 두건을 쓴 사내의 동작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것이다. 하나 그때는 이미 두건을 쓴 사내의 몸이 어느새 손을 내밀었던 청년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음!”
답답한 신음 소리와 함께 두건을 쓴 사내를 부축하려 했던 청년이 허리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났다. 청년의 품속에 파묻히다시피 했던 두건을 쓴 사내의 팔꿈치가 청년의 명치를 가격했던 것이다. 청년의 반응 또한 놀라울 정도였다. 장한의 고함 소리를 듣자마자 그는 즉시 전력을 다해 몸을 뒤로 빼려 했다. 덕분에 두건을 쓴 사내의 기습적인 공격은 청년에게 약간의 고통만을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하나 청년이 채 몸을 완전히 피하기도 전에 두건을 쓴 사내의 왼쪽 어깨가 불쑥 솟구쳐 오르더니 청년의 아래턱을 그대로 강타해 버렸다.
쾅!
“크윽!”
그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동작이어서 청년은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중인들이 놀랄 겨를도 없이 두건을 쓴 사내의 신형은 어느새 빙글 돌아 청년의 옆에 서 있던 다른 두 사람의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그야말로 질풍과도 같은 공세의 연속이었다.
두 남녀는 뜻밖의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양쪽으로 빠르게 갈라서며 장검의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그 침착한 대응만 보아도 그들이 명가(名家)에서 제대로 훈련받은 자들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황은 그들의 예상보다 훨씬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신경이 온통 두건을 쓴 사내에게 집중된 사이에 처음에 두건을 쓴 사내를 공격했던 황의인이 어느새 소리도 없이 두 남녀의 뒤쪽으로 날아 들고 있었던 것이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신속하고 유연한 몸놀림이었다. 때마침 고함을 질렀던 장한이 황의인을 향해 장력(掌力)을 날리지 않았다면 두 남녀는 영문도 모르고 황의인의 손에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장한은 사정이 다급한 것을 보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앞으로 성큼 나서며 오른손을 쭈욱 내뻗었다. 그와 함께 푸르스름한 장력이 날카로운 기운을 동반하고 황의인의 옆구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황의인은 막 두 남녀의 등을 가격하려다 황급히 옆으로 몸을 움직이며 주먹을 휘둘렀다.
쾅!
장한이 내뿜은 장력과 황의인의 주먹이 마주치며 요란한 굉음이 주루를 뒤흔들었다. 날카로운 경기가 사방으로 휘몰아치고 부서진 탁자의 파편들이 여기저기로 비산(飛散)되는 가운데, 황의인이 장력의 여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명령장(冥靈掌)이구나!”
황의인은 탄성인지 신음성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더니 이내 눈을 번쩍이며 재차 장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조금 전의 손해를 만회하려는 듯 그의 주먹은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강력하게 날아왔다. 장한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황의인의 주먹을 보고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마치 두 가닥의 뇌전(雷電)이 날아드는 듯한 맹렬한 기세를 느꼈던 것이다.
‘이건 무슨 권법(拳法)인데 이토록 빠르고 날카로운 것일까? 아미(峨嵋)의 파운권(破雲拳)도 아니고, 항산(恒山) 벽운관(碧雲觀)의 벽라권(碧羅拳)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도(魔道)의 섬뢰권(閃雷拳)도 아닌 것 같은데 정말 놀라운 권법이구나.’
장한은 상대의 무공이 결코 자신의 아래가 아님을 깨닫고 두 눈에 신광을 번뜩이며 빠르게 삼 장(三掌)을 내갈겼다.
파파팡!
마치 북을 두드리는 듯한 음향이 거푸 터져 나오며 황의인의 상반신이 몇 차례나 휘청거렸다. 반면에 장한은 술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서고 말았다.
장한은 물론이고 그들의 격전을 지켜보고 있던 두 명의 남녀 또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모습들이었다. 장한은 그들 사문(師門)의 오십 명이 넘는 일대제자들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였다. 비록 그의 장기가 검법이라고 해도 이토록 쉽게 열세를 보였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두 남녀 중 여인이 바닥에 쓰러진 청년을 돌보는 동안 다른 청년이 황의인과 두건을 쓴 사내를 번갈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제 보니 너희들은 한 패였구나. 너희들은 누구인데 감히 우리를 습격한 것이냐?”
황의인이 냉랭하게 웃었다.
“흐흐… 곧 죽을 놈이 그런 건 알아서 무얼 하겠느냐?”
청년이 분노하여 무어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두건을 쓴 사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향해 덤벼들었다. 청년은 이미 마음속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주저하지 않고 옆구리에 차고 있는 장검을 뽑아 들었다.
창!
요란한 검명(劍鳴)과 함께 살벌한 검광이 흘러나오자 주루 안에 있던 손님들이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몸을 피했다. 두건을 쓴 사내는 장검을 뽑아 든 청년을 향해 허깨비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다가서며 오른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희뿌연 장영(掌影)이 청년의 앞가슴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청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은 채 수중의 장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그의 검이 묘하게 흔들리며 세 송이의 매화 문양을 만들어 냈다. 누군가가 그 광경을 보았는지 커다란 탄성을 토해냈다.
“매화검법이다! 저 사람은 화산파의 고수다!”
그 말에 허겁지겁 몸을 피하기에 바빴던 중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청년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만큼 화산파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나 장내의 상황은 중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의당 두건을 쓴 사내를 손쉽게 쓰러뜨릴 줄 알았던 화산파의 젊은 고수가 오히려 쩔쩔매며 연신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이다. 두건을 쓴 사내는 그다지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지 않은데도 그가 장력을 날릴 때마다 화산파의 젊은 고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펼치던 검법을 황급히 거두어 들이고는 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그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청년의 위급함을 알아차린 장한이 그를 도우려 할 때 황의인이 어느 사이에 장한의 앞을 가로막으며 음산하게 웃었다.
“흐흐… 우리 사이의 일도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남의 일에 참견해서야 되겠나?”
장한은 무서운 눈으로 황의인을 쏘아보다가 부상자를 돌보고 있는 젊은 여인에게 짤막하게 말했다.
“현 사제(玄師弟)를 도와주거라.”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상자를 한쪽에 잘 뉘어 놓은 후 곧 장검을 뽑아 들고 두건을 쓴 사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협공을 하자 처음에는 조금 효과가 있는 듯 했다. 하나 두건을 쓴 사내가 양손을 괴이하게 흔들며 장력을 날리자 다시 두 사람의 검법에 파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젊은 여인은 두건을 쓴 사내가 장력을 날릴 때마다 현 사제가 쩔쩔매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에 내심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그의 장력을 대하게 되자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두건을 쓴 사내의 장력은 매화검법이 변화할 곳을 미리 선점(先占)하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계속 검법을 시전하다가는 오히려 장력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피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두건을 쓴 사내의 장력에는 괴이한 힘이 담겨 있어 피하면 피할수록 전신이 마치 거미줄에 걸릴 것처럼 점점 더 몸을 움직이기가 힘이 들어졌다.
‘정말 이상하구나. 매화검법의 검로(劍路)를 알고 있기 전에는 이럴 수가 없는데…. 더구나 이 장력은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괴이한 기운을 담고 있단 말인가?’
여인의 이름은 종요설(鍾姚雪). 화산파의 일대제자 중 여인은 모두 일곱 명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미모가 뛰어나고 재질이 탁월해서 화산파 뿐 아니라 많은 무림인들의 호감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 일곱 명의 여제자들을 화산칠연(華山七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종요설은 그들 중에서도 미모가 탁월할 뿐 아니라 심기(心機)가 뛰어나고 몸이 빨라서 옥비연(玉飛燕)이라는 별호로 널리 알려진 여인이었다.
종요설과 함께 두건을 쓴 사내를 상대하는 청년은 같은 일대제자 중 한 사람인 현일건(玄日建)이었고, 제일 처음 두건을 쓴 사내의 암습에 턱을 가격당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하중광(賀中光)이었다. 그리고 황의인과 대치해 있는 장한은 화산파의 일대제자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뛰어난 고수로, 추풍검객(追風劍客) 고장명(高長命)이라 했다.
고장명은 화산파의 명숙(名宿)인 담로검 매장원이 가장 아끼는 제자로서, 그 실력은 화산파 제일의 기재(奇才)인 화산독응 유장령에 버금간다고까지 알려져 있었다. 화산파의 일대제자는 무려 오십이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헌앙한 기상과 탁월한 재질을 지닌 인재들이거니와, 그들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무공을 지닌 여섯 사람을 화산육수(華山六秀)라 했다. 고장명 또한 당연히 화산육수 중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고장명은 종요설이 가세했는데도 여전히 그들이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자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황의인을 향해 천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슨 일로 우리를 공격했는지 모르지만, 일단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단단히 각오해야 할 거요.”
황의인은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었다.
“하하하…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소위 명문정파(名門正派)라고 하는 놈들의 군자연(君子然)하는 모습은 보면 볼수록 구역질이 난단 말이야.”
화산파의 제자가 언제 이런 심한 말을 들어 보았겠는가? 하나 고장명은 조금도 화를 내거나 흥분하지 않고 느릿느릿 옆구리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차분한 행동에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강한 자신감과 오랫동안 터득한 수련의 깊이가 담겨 있었다. 황의인도 겉으로는 험한 소리를 내뱉었으나 막상 고장명이 검을 뽑아 들고 자신을 향해 우뚝 서자 한 줄기의 날카로운 예기를 느끼고 속으로 침음했다.
‘확실히 화산육수라는 이름이 허언(虛言)은 아니로군. 하나 아무리 날뛰어 봤자 명년 오늘이 네 제삿날이 되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황의인의 오른손이 등뒤로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손에는 차가운 도광(刀光)을 뿌리는 칼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의 칼은 여타의 것보다 길이는 더 짧은 반면에 훨씬 두꺼웠다. 게다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도신(刀身)이 거무스름한 빛으로 번뜩이고 있어서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들었다.
“흐흐… 어디 화산파에서 자랑한다는 추풍검객의 솜씨 좀 볼까?”
황의인은 괴소를 흘리며 앞으로 성큼 다가서더니 수중의 칼을 사납게 휘둘렀다.
팟! 팟!
마치 도끼로 장작을 쪼개는 듯한 음향과 함께 몇 가닥의 시커먼 도기가 고장명의 상반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 도기의 날카로움은 상상 이상이었다. 고장명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반보(半步) 앞으로 움직이며 수중의 장검을 앞으로 쭈욱 내뻗었다. 그러자 매화 문양의 검화(劍花) 한 송이가 툭 튀어나왔다. 그 문양이 어찌나 선명했던지 진짜 매화를 보는 것 같았다. 매화 문양의 검화는 검은 도기 속을 거침없이 뚫고 들어갔다. 황의인은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의 목덜미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매화 한 송이를 보고 있다가 벽력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수중의 칼을 세차게 휘둘렀다.
“제법이구나! 하나 화산파가 매화검법으로 행세하던 때는 이미 지나 버렸다!”
까깡!
귀청이 떨어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매화 한 송이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고장명은 그 자리에 반 걸음 내딛는 동작 그대로 우뚝 서 있었는데, 문득 고개를 떨구어 자신의 옆구리를 내려다 보았다. 그의 옆구리 부분 옷자락이 도기에 잘려져 맨살이 훤히 드러나 보였다. 다행히 살이 베어지거나 피를 보이지는 않았으나, 화산파에서도 손꼽히는 고수인 그가 단 한 번의 격돌만에 옷자락이 잘렸다는 것은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장명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황의인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날카로운 섬광 같은 것이 번뜩이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어떻게 매염일선(梅艶一旋)의 파해식(破解式)을 알고 있소?”
“매화검법이 뭐가 대단하다고 파해식 운운한단 말이냐? 이번에는 내 칼 맛 좀 봐라!”
황의인의 칼이 마치 빛살 같은 도기를 뿌리며 고장명의 앞가슴 쪽으로 날아왔다. 고장명은 이번에도 역시 매화검법 중의 절초인 매화노방과 매영당당(梅影撞撞)을 거푸 펼치며 맞서 갔다.
원래 이 두 초식은 각기 따로 펼쳐도 위력적이지만 지금처럼 연환(連環)하게 되면 그 위력이 배가 되어 누구라도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고장명은 황의인의 도영이 자신의 검초 사이를 교묘하게 뚫고 오른쪽 어깨 쪽으로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을 살짝 찌푸렸다. 이 두 초식은 변초(變招)가 다양한 만큼 오른팔로 중심을 잡아 주지 않으면 검초가 뒤엉키는 수가 있다. 그래서 오른팔의 움직임이 아무래도 민활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데 황의인은 이런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 한치의 주저도 없이 그의 오른쪽 어깨를 노리고 있으니 고장명으로서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서너 초를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이 다시 떨어졌을 때 고장명은 몸에 두 군데의 상처를 입게 되었다. 비록 그리 크지 않은 상처였으나, 매화검법의 절초들을 펼쳤는데도 상대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것은 화산파의 일대제자로서 치욕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황의인은 옷자락만 몇 군데 잘려졌을 뿐, 전혀 부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으하하! 매화검법으로는 안 된다니까.”
황의인이 광소를 터뜨리며 더욱 사납게 고장명을 몰아쳤다. 그 순간, 갑자기 고장명의 검법이 판이한 변화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의 변화무쌍하면서도 경쾌한 검초에서 무겁고 진중한 검초로 바뀐 것이다. 황의인은 순간적인 변화에 당황하여 금세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원래 고장명과 황의인의 본신(本身) 실력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단지 황의인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매화검법의 검로를 환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고장명이 밀렸을 뿐이었다. 그런데 고장명이 매화검법과는 전혀 상반된 검법을 펼치자 황의인은 순간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것이다. 고장명의 검초는 현천검결(玄天劍訣)이라는 것으로, 비록 매화검법처럼 영묘(靈妙)하지는 않았으나, 검초 하나하나에 막중한 힘이 담겨 있을 뿐 아니라 한층 더 날카롭고 살벌해서 황의인은 더욱 막기가 힘이 들었다.
파파파팍!
예리한 검풍(劍風)이 사방을 휘몰아치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황의인이 쩔쩔매며 연신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벌써 두세 군데의 핏줄기가 내비치고 있어 금시라도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고장명의 뒤로 빠르게 다가오며 강력한 일 장(一掌)을 내갈겼다. 그 인영의 동작이 너무도 갑작스럽고 표홀해서 고장명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장력(掌力)이 그의 등 뒤 지척까지 도달해 있었다. 고장명은 피할 수 없음을 직감하고 화산파의 독보적인 절학(絶學)인 태청강기(太淸氣)를 끌어올림과 동시에 번개같이 몸을 선회시키며 검을 수평으로 그어댔다.
꽈앙!
“으윽!”
요란한 폭음과 짤막한 신음성이 거푸 터져 나왔다.
“고 사형!”
조용설의 놀람에 찬 경악성이 유달리 크게 들리는 가운데 고장명은 술 취한 사람처럼 정신없이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서고 있었다.
쿵! 쿵!
그가 물러설 때마다 주루의 바닥이 금시라도 무너질 듯 마구 흔들렸다. 그것만 보아도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지를 누구라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고장명의 앞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머리를 치렁치렁하게 산발한 괴인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산발괴인은 허름한 흑포를 입고 있었는데, 어깨를 덮고 있는 검은 머리카락과 어울려 음산한 분위기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산발괴인은 살짝 잘려진 자신의 앞가슴 옷자락을 힐끗 내려다보고는 이내 낮게 가라앉은 음성을 내뱉었다.
“내 마라장(摩羅掌)을 맨몸으로 받아내다니 태청강기가 칠 성(七成) 이상이구나. 더구나 마지막의 일섬수요(一閃須曜)는 제법 괜찮았다.”
고장명은 비록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내부의 심맥(心脈)이 동요하고 진기가 들끓어 입을 열기만 해도 핏물이 뿜어 나올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산발괴인의 말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라장? 그럼 당신은….”
고장명이 채 말을 맺기도 전에 산발괴인이 양쪽 어깨를 기이하게 흔들며 그를 향해 다가왔다. 두 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상체만을 이용하는 그 괴이한 동작을 보자 고장명의 입에서는 억눌린 듯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암향부영(暗香浮影)…!”
암향부영은 마도(魔道)의 수많은 신법(身法) 중에서도 기묘하기로 이름 높은 절정(絶頂)의 무공이었다. 이 신법은 두 어깨의 미묘한 움직임만으로 신형을 이동시키기 때문에 어디로 움직일지 알아차리기도 힘들 뿐더러 빠르고 영묘(靈妙)하기가 가히 강호일절(江湖一絶)이라 할 만 했다. 고장명 또한 적지 않은 강호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나, 암향부영을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암향부영 특유의 동작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었다면 결코 한 눈에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산발괴인은 순식간에 허깨비처럼 허공을 날아 고장명의 우측으로 다가왔다. 고장명은 들끓는 기혈을 억누르며 산발괴인의 왼쪽 어깨를 향해 번개 같은 일검(一劍)을 내질렀다. 그가 사용한 초식은 현천검결 중의 일검경천(一劍驚天)이라는 것으로, 십이 초(十二招)로 된 현천검결 중에서도 가장 빠르고 날카로운 초식이었다. 산발괴인이 다시 한차례 어깨를 떨자 그의 신형이 마치 줄에 끌린 인형(人形)처럼 미끄러지듯 옆으로 이동했다. 고장명이 내뻗은 검광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산발괴인의 몸은 어느새 고장명의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야말로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한 몸놀림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허공을 갈랐던 고장명의 검이 갑자기 급선회하며 산발괴인의 관자놀이를 찔러 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그야말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한 수여서 지켜보고 있던 황의인이 자신도 모르게 짤막한 비명을 내지를 정도였다.
“앗? 조심….”
이 초식이야말로 현천검결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무상도두(無常倒頭)였다. 이것은 내뻗었던 손을 순간적으로 역수(逆手)로 잡아 되찔러 오기 때문에 아무리 강호 경험이 풍부한 고수라도 영문도 모르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팟!
눈부신 검광이 폭죽처럼 장내에 피어올랐다가 사라졌다.
중인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장내를 주시했다.
산발괴인과 고장명은 마치 부둥켜안은 듯한 자세로 바짝 붙어 있었다.
언뜻 산발괴인의 머리를 고장명의 장검이 관통한 듯 보여서 몇몇 사람들이 놀란 탄성을 토해냈다. 하나 그 탄성은 이내 경악성으로 변해 버렸다.
“저… 저런….”
산발괴인의 머리를 관통한 것 같았던 장검은 아슬아슬하게 산발괴인의 옆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반면에 산발괴인의 오른손은 정확하게 고장명의 옆구리에 틀어박혀 있었던 것이다. 고장명은 시뻘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산발괴인을 쏘아보았다.
“너… 현천검결의 검로를 알고 있었구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산발괴인의 무섭도록 차갑고 냉정한 안광이 번뜩거렸다.
“무상도두는 비록 절묘한 구석이 있지만, 변화가 단순해서 미리 알고 있다면 오히려 역습하기에 딱 알맞은 초식이지.”
고장명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현천검결은 화산파에서도 익힌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비전검학(秘傳劍學)이었다. 매화검법과는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지만, 매화검법만큼 외부에 많이 노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뛰어난 위력을 발휘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산발괴인이 어떻게 현천검결의 검로를 파악하고 있단 말인가? 더구나 초식 하나하나의 장단점까지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은 현천검결을 직접 익히지 않은 이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체 산발괴인은 화산파에서도 몇몇 장로와 일대제자들만이 알고 있는 현천검결의 검로를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리고 황의인은 어떻게 매화검법의 파해법을 알고 있단 말인가? 거듭되는 의혹이 고장명의 머리를 어지럽혔으나 그의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산발괴인이 옆구리에 박혀 있는 오른손을 비트는 순간, 고장명은 내장이 갈가리 쪼개지는 듯한 통증에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고 말았다.
“크아악!”
막 정신을 잃기 직전, 고장명의 뇌리 속으로 한 가지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혹시 본파의 누군가가 이들에게 알려 준 것이 아닐까?’
그 생각의 여파를 미처 깨닫기도 전에 그는 그대로 허물어지듯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고장명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텁수룩한 수명을 기른 삼십대 후반의 중년인이었다. 고장명은 그 중년인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왼쪽 옆구리를 작살에 꿰뚫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인상을 찡그렸다.
“으윽!”
중년인이 황급히 그의 몸을 진정시켰다.
“아직 움직이지 마시오. 급한 대로 상처를 꿰매기는 했는데, 잘못 움직였다가 꿰맨 부위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정말 대책이 없게 되오.”
중년인의 말이 아니더라도 고장명은 자신이 살아난 것이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산발괴인의 손에 옆구리가 거의 관통당하다시피 했는데 죽지 않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고장명은 중년인을 올려보며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요….”
중년인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빙긋 웃었다.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서도 믿음을 주는 웃음이었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다행히 고 대협을 그들 손에서 빼내 올 수 있었소. 운(運)이 좋았소.”
“다른 사람들은….”
중년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두 사람은 구할 수 있었는데, 한 사람은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소.”
“그게… 누구요?”
“현 소협이오. 고 대협을 빼내 오는 데 주력하느라 잠시 지체한 사이에 일이 그렇게 되고 말았소.”
고장명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현일건은 같은 화산파의 일대제자일 뿐 아니라 사부도 같아서 유달리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사부인 담로검 매장원에게는 모두 다섯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이번에 그들 중 네 명이 서안으로 왔다가 현일건이 참변을 당한 것이다. 고장명은 다시 힘겹게 물었다.
“다른 두 사람은?”
“종 소저와 하 소협은 지금 옆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소. 다행히 종 소저는 큰 부상이 없고, 하 소협도 턱뼈에 금이 가기는 했으나 몇 달 요양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요.”
고장명의 시선이 중년인에게 고정되었다.
“귀하를 주루에서 보았던 것 같은데….”
중년인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고 대협의 눈썰미는 대단하구려. 나는 고 대협 일행이 오기 전부터 주루에 있었소.”
“…!”
“원래는 고 대협 일행을 지켜보기만 하고 혹시라도 위기에 처하게 되면 그때 도와줄 생각을 했었소. 그런데 상황이 내 예상보다 훨씬 다급하게 진행되어 대응할 시간을 놓치고 말았소. 일이 이렇게 악화된 것은 방심한 내 탓이 크오. 그 점에 대해 사과드리오.”
고장명의 창백한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자신도 산발괴인에게 그토록 허무하게 쓰러지리라고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화산파에서도 내노라하는 고수인 추풍검객이 설마 단 이 초만에 당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렇다면 귀하는 우리가 습격당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이오? 아니, 그보다 귀하의 정체는 어떻게 되오?”
고장명의 거듭된 질문에 중년인은 자신의 머리를 탁 쳤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그리고 보니 아직 내가 누구인지 이름도 밝히지 않았구려. 나는 모관이라 하오.”
중년인은 다시 활짝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개방 오의단의 철심수사(鐵心秀士)가 바로 나요.”
그의 이름을 듣자 고장명은 깜짝 놀랐다.
“귀하가 바로 개방의 지낭(智囊)이라는 철심수라란 말이오?”
“하하… 지낭이라니 당치 않소. 그저 남들보다 잔꾀에 좀더 밝을 뿐이오.”
중년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으나, 철심수사 모관은 강호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비단 개방의 최정예인 오의단의 절정고수일 뿐 아니라, 두뇌가 뛰어나고 심기(心機)가 탁월하여 절대로 손해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무공 실력은 비록 오의단의 최고 고수인 탈혼주개 손등이나 풍수 인시망에 미치지 못했으나, 그 철저한 수단과 뛰어난 심계로 오의단에서도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인물로 손꼽히고 있었다.
고장명은 자신을 구해 준 인물이 오의단의 고수임을 알게 되자 가뜩이나 구름 같던 의혹이 더욱 증폭되었다.
“모 대협은 우리가 그곳에서 암습당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소? 아니, 그보다 우리를 암습했던 그자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오?”
조금 전까지도 미소를 짓고 있던 모관의 얼굴에 갑자기 진중(鎭重)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말을 하기 전에 우선 고 대협께 먼저 몇 가지 물어볼 것이 있소. 고 대협께서 서안으로 온 것은 사문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오?”
고장명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특별히 숨길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고 대협께 지시를 내린 사람은 누구요?”
“사부님께 직접 명을 받았소.”
“담로검 매 대협 말씀이오?”
“그렇소.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오?”
모관은 한결 신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번에 암습을 당한 사람은 고 대협 뿐이 아니오. 서안으로 오고 있던 소림사(少林寺)의 일행도 암습을 당했고, 본방(本幇)의 고수 몇 사람도 횡액을 면치 못했소.”
고장명은 흠칫 놀랐다.
“소림과 개방의 고수들이 이미 암습을 당했다니…. 그자들이 대체 누구인데 감히 구파일방(九派一幇)의 고수들을 노린단 말이오?”
그의 음성에는 구대문파(九大門派)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자부심이 담겨 있었다.
모관은 씁쓸하게 웃었다.
“강호에는 기인이사(奇人異士)가 구름처럼 많고 도처에 잠룡(潛龍)들이 숨어 있는데 어찌 그들 중 구파일방에 대항할 자가 없겠소? 이번에 서안으로 온 구파일방의 고수들 중 이미 열 명이 넘는 인물들이 처참하게 살해당했소. 그렇게 본다면 네 사람 중 한 명의 피해자만 발생한 고 대협 일행은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할 거요.”
고장명은 입을 벌리고 있다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이오?”
“고 대협이 서안에 온 것도 아마 취미사 혈겁에 대한 합동조사(合同調査)를 하자는 천봉궁의 밀서(密書)를 받았기 때문일 거요.”
“맞소. 사부님께서 우리들에게 곡 집법(谷執法)을 찾아가 도우라고 말씀하셨소.”
“그렇다면 귀파에서는 이번 일의 총책임자를 신산 곡 대협으로 결정한 거요?”
“그렇지는 않소. 내일 중으로 본파의 장로 한 분이 오실 거요. 우리는 미리 가사 그분의 도착을 준비하기로 되어 있었소.”
고장명은 잠깐 멈칫거리다 다시 말을 이었다.
“모 대협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얼마 전에 본파에서 서안에 파견한 제자들의 다수가 부상을 당해 이곳에 있는 본파의 인력이 조금 부족한 형편이었소.”
그 일이라면 모관도 물론 잘 알고 있었다.
서안의 대응표국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 섬서성은 물론이고 강호 전체를 경동(驚動)시키고 있었다.
더구나 그 후에 벌어진 종남혈사(終南血事)는 그야말로 전 무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일대사건이 아니었던가?
모관은 고장명에게 자신이 주루에서 그들을 기다리게 된 연유를 설명해 주었다.
“원래 취미사 혈겁에 대한 흉수(兇手)의 정체는 그야말로 오리무중이어서 피해자인 소림사와 귀파는 물론이고 분타주를 잃은 본방에서도 속만 끓이고 있었소. 그런데 천봉궁의 총관인 차복승이 흉수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했으니 이달 보름까지 서안에 모여서 함께 취미사 혈겁을 조사하자는 연락을 해와서 본방에서는 급히 몇 명의 고수들을 급파하게 되었소. 소림사와 귀파에서도 마찬가지 상황이었을 거요.”
“그렇소. 일단 우리가 선발대로 왔지만, 내일 오실 장로님과 고수들이 이번 일에 대한 본파의 주력(主力)이 될 거요.”
“소림사에서도 사건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팔대신승 중의 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하여 여덟 명의 고수들을 서안으로 보냈소. 그런데 그들이 서안으로 왔을 때 습격을 당해 그들 중 절반이 비명횡사하고 말았소.”
고장명은 소림사의 고수들이 네 명이나 살해당했다는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팔대신승 중 어느 분이 오셨소?”
“신명승(神明僧) 대원선사(大元禪師)요. 그분이 나한당(羅漢堂)의 고수 세 명과 정자배 네 명을 인솔하여 왔는데, 정자배 네 사람이 모두 변(變)을 당했소.”
신명승 대원이라면 팔대신승 중의 막내이나 두뇌가 비상하고 학식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뒤이어 본방에서 파견한 순의단(巡衣團) 고수 다섯 사람이 실종되었고, 그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보낸 남전분타(藍田分舵)의 제자 네 사람도 함께 사라졌소. 결국 그들은 서안 외곽에서 모두 시체로 발견되었소.”
고장명은 계속되는 모관의 말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개방의 순의단이라면 오의단, 청의단(淸衣團)과 함께 삼대비밀조직 중 하나로 소속 인원들이 하나같이 신법(身法)이 뛰어나고 재주가 비상한 고수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개방에서 서안으로 파견할 정도면 순의단에서도 손꼽히는 고수들이었을 텐데 그들이 모두 몰살했다니 직접 모관의 입으로 듣지 않았다면 쉽게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서안 근처에 있던 오의단의 고수들이 모두 출동해서 외곽에서 서안으로 오는 요충지에 잠복해 있었던 거요. 소림사와 본방이 당했다면 귀파도 결코 무사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고 귀파에서 서안으로 오는 길목을 집중적으로 지켰는데, 다행히 내가 있는 곳으로 고 대협 일행이 오게 되었소.”
고장명은 멍하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이를 갈아 붙이며 물었다.
“대체 그들이 누구인데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단 말이오?”
“그들의 정체는 아직 밝혀진 것이 없소. 다만 습격한 자가 한두 명이 아니고 그 움직임이 체계적인 것으로 보아 그들의 배후에는 커다란 조직이 있고, 그들 개개인의 무공이 모두 일류 이상이라는 게 지금까지 알려진 전부요. 또 한 가지….”
모관의 두 눈에 기광이 번뜩거렸다.
“그들이 구파일방의 무공에 대한 파해법(破解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고 있소. 소림을 습격했던 괴한들도 소림 무공의 단점을 소상하게 꿰뚫고 있었기에 피해가 더욱 컸다는 대원대사의 말씀이 있었소. 아쉽게도 본방의 고수들은 모두 변을 당해 본방의 무공에 대한 파해법을 그들이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주루에서 보았을 때 귀파의 무공도….”
고장명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비슷한 일을 당했소.”
“그러리라 짐작했소. 그렇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들의 무공이 뛰어나다 해도 고 대협께서 그토록 허무하게 그들 손에 쓰러지지는 않았을 거요.”
고장명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들 중 머리를 산발한 괴인은 마라장과 암향부영 신법을 사용했소. 암향부영은 몰라도 마라장이라면….”
“마라장은 서역(西域)의 밀교(密敎)에서 파생된 무공이오.”
“그렇소. 그러니 그들이 혹시….”
의외로 모관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서역의 무공을 썼다고 그들이 서장(西藏)에서 왔다고는 할 수 없소. 그자 외에 다른 자들은 모두 중원의 무공을 썼고, 외모 또한 서역인이 아니었소.”
“그렇다면 그들의 정체가 대체 무어란 말이오?”
“아직은 그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무어라고 단언할 수 없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취미사 혈겁의 흉수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오. 그렇지 않았다면 소림사와 본방, 귀파가 그런 일을 당한 것을 설명할 수 없소.”
“그들이 우리가 서안으로 올 것을 어떻게 알았단 말이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 조만간 천봉궁의 총관을 찾아가 물어 볼 생각이오. 비밀이 누설되었다면 모두 네 곳뿐이니까.”
고장명은 모관의 말 속에 숨은 뜻을 알아차리고 가슴이 무거워졌다. 모관이 말한 네 곳이란 다시 말해서 소림사와 개방, 화산파, 그리고 이번 일을 주관한 천봉궁이었다. 그 네 곳 외에는 이번 모임을 아는 곳이 없으니 당연한 의혹이었다. 그렇다면 네 곳 중 과연 어느 곳에서 비밀이 누설되었단 말인가? 고장명은 감히 그 이상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화산파에서 누설되지 않았기만을 빌었을 뿐이다.
한 동안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상념에 잠겨 있었다. 수많은 의혹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으나 어느 것 하나 뚜렷한 설명이 나오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고장명은 마음속으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왠지 취미사 혈겁의 실마리가 풀리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복합해질 것 같은 불안한 생각이 드는구려.”
모관은 총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정말 궁금하오. 대체 지금 서안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