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천하 2권 용문풍운(龍門風雲) 편 : 2화
제13장. 도선출재(挑選出財)
“영존(令尊)은 만나 뵈었소?”
석지명이 자리에 앉자 상원건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석지명의 얼굴에 한 줄기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 뵙지 못했습니다.”
상원건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영존께서 다른 곳에라도 가신거요?”
“집에 계십니다.”
“그런데 왜…”
상원건은 더 물으려다 석지명의 표정이 약간 굳어진 것을 보고는 더 묻지 않았다. 석지명은 잠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이내 멋적게 웃었다.
“사실은 아버님께 손님이 와 계셔서 조금 기다리다 돌아왔습니다.”
상원건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료.”
하나 그의 마음속으로는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르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중요한 손님이기에 몇 달만에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만나지 않는단 말인가? 그리고 단순히 손님 때문이라면 석지명은 왜 그토록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이상한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명색이 석가장의 십이지공자 중 하나인 석지명이 호위무사도 없이 무공도 모르는 하인 두 사람과 길을 떠난 것 부터가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모처럼만에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석가장의 대문은 열리지도 않고 작은 쪽문 하나만 달랑 열렸을 뿐 아니라, 하종요 외에는 달리 그를 환영하려고 나온 사람도 없었다. 대문에서 석지명의 거처인 이곳 청운각에 올 때까지 다른 하인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청운각 자체내에도 흔히 있을 법한 시비(侍婢)조차 없었다. 석지명이 석가장의 공자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지 않았다면 그를 귀찮은 식객(食客)중 하나라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부친을 만나러 가서 한 시진 가까이나 기다렸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석지명은 석가장 내에서 홀대를 받고 있거나, 그 지위가 그들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미약한 것임이 분명했다. 상원건은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들었으나 석지명이 곤란해 할 것 같아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이 누각은 아주 정갈하면서도 깔끔해서 평소 석공자의 성격이 얼마나 고아(高雅)한지 여실히 알 수 있겠구료. 그런데 석공자는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소?”
석지명은 가볍게 웃었다.
“벌써 하다니요. 제 위로도 아직 다섯 명이나 순서가 있는걸요.”
그 말에 상원건은 호기심이 일었다.
“그렇소? 그렇다면 십이지공자 중에서 혼인을 한 분은 오직 두 사람 뿐이란 말이오?”
“예. 첫째 형과 둘째 형만이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석지명의 나이는 대략 보아도 스물 두세살 정도 되어 보였다. 그렇다면 그위의 다섯 명의 형들은 적게는 스물 세 살에서 많게는 서른이 넘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십대 초반이면 결혼을 하여 일가(一家)를 이루는게 일반적인 경향인 것을 생각한다면 늦어도 한참 늦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늦게 결혼을 하는 이유라도 있소?”
“본가에서는 서른이 넘기 전에는 혼인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가법(家法)으로 정해져 있지요.”
석지명의 말에 상원건은 더욱더 흥미가 일어났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소?”
석지명의 입가에 한 줄기 고소가 떠올랐다.
“그 가법은 저의 증조모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석지명은 그렇게만 말하고 더 이상은 자세한 언급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나 그 말만 듣고도 상원건은 이내 그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석지명의 증조모라면 바로 그 철혈(鐵血)의 여장부(女丈夫)라 불리우는 철혈홍안이었다. 철혈홍안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인에게 빼앗긴 처절한 과거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석동의 나이가 대략 서른 전후 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혹시 철혈홍안은 남자는 서른이 넘어야 비로소 다른 여인에게 한눈을 팔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그런 가법을 만든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가혹한 가법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법을 만들었다 해도, 개인적인 불행을 잊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인생에 제약을 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상원건은 석지명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화제를 돌린다고 한 것이 오히려 그를 더 난처하게 만든 모양이군.’
그때 갑자기 문밖이 소란해지더니 한 사람이 대청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여덟 째, 돌아왔느냐?”
커다란 소리로 외치며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 들어온 인물은 체구가 우람한 남의인이었다. 남의인이 입고 있는 것은 최고급의 짙은 남색 비단옷이었는데, 황금 색 용(龍) 문양이 새겨져 있어 옷자락이 펄럭일 때마다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게 했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이라면 그 용 문양이 진짜 순금사(純金絲)로 짜여진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단 옷에 수놓아진 순금의 용! 정말 호화스럽고 진귀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의인의 나이는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부리부리한 눈에 큼직한 코, 그리고 당당한 체구를 지니고 있어 한 눈에 보기에도 호쾌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 남의 청년은 대청안에 의외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잠깐 움찔했으나 이내 껄걸 웃으며 석지명에게로 다가갔다.
“으하하… 몇 달 안본 사이에 제법 남자다운 티가 나는구나. 그래, 구경은 잘 하고 왔느냐?”
석지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가운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잘 다녀왔습니다. 형님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남의 청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웃었다.
“나야 항상 건강하지. 그게 내 유일한 자랑거리 아니냐? 하하하…”
이어 그는 주위의 중인들을 슬쩍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 분들은 네 손님들이냐?”
“그렇습니다.”
석지명은 중인들에게 남의 청년을 소개시켜 주었다.
“제 다섯째 형님이십니다.”
남의 청년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한 차례 중인들을 훑어보다가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석광호(石廣昊)라고 합니다.”
일행 중 가장 연장자인 상원건이 먼저 인사를 했다.
“반갑소. 농서의 상원건이오.”
남의 청년은 눈을 번쩍 빛내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감숙성의 이름난 고수인 비룡객 상대협이셨군요. 상대협께서 난주(蘭州)에서 대막칠취(大漠七鷲)와 싸워 그들을 물리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상원건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건 벌써 몇 년 전일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별로 대단한 일도 아니었는데 부끄럽기 그지 없구료.”
“하하… 상대협은 너무 겸손하시군요. 대막칠취는 대막(大漠) 지방에서는 염라대왕보다도 무서운 존재인 대막신응(大漠神鷹)의 제자들로, 오랫동안 악명을 날리던 놈들 아닙니까? 그들을 제거한 상대협의 행동은 일대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원건은 그가 자꾸 자신을 치켜 세워주자 어색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가 대막칠취를 물리친 것은 사실이었으나, 당시에 하마터면 오히려 그들에게 쓰러질 뻔한 위험천만의 대결이었다.
더구나 대막칠취를 모두 제거한 것도 아니고, 그들 중 세 명만을 간신히 쓰러뜨렸을 뿐이었다. 살아남은 네 명의 대막칠취는 복수를 맹세하며 도망쳤는데, 그 뒤로 어찌된 일인지 삼 년이 넘도록 전혀 소식이 없어 상원건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상원건은 씁쓸하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운이 좋았을 뿐이오. 그보다 석공자께선 오래된 그 일을 자세히도 알고 계시는구료.”
석지명이 옆에서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제 다섯 째 형님은 장성(長城) 일대의 일은 환하게 궤뚫고 계십니다. 평소에도 그쪽에 관심이 많으시죠.”
석광호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그보다 어서 다른 분들을 소개시켜 주어라.”
석광호는 석지명의 손님 중 한 사람이 유명한 고수인 상원건임을 알자 다른 사람들의 신분도 몹시 궁금한 듯 했다. 석지명은 진산월과 일행들을 가리켰다.
“이 분은 종남파의 당대 장문인이시고, 다른 분들은 모두 진 장문인의 사제(師弟)들이십니다.”
종남파라는 말에 석광호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종남파?”
그 음성에는 묘한 빛이 담겨 있었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일어나 그를 향해 가볍게 포권을 했다.
“진산월입니다.”
“아… 안녕하십니까?”
석광호는 허겁지겁 인사를 했으나 표정이 영 어색하고 이상했다. 석지명은 그것을 눈치채고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마지막으로 상소홍을 소개시켜 주었다.
“저 분은 상대협의 따님이신 상소홍 소저이십니다.”
상소홍과의 인사가 끝나자 석광호는 조금 전의 어색함을 떨쳐버리려는 듯 밝게 웃으며 포권을 했다.
“하하… 오늘 여러 고인(高人)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습니다. 모처럼 본가에 오셨으니 편히 쉬었다가 가시기 바랍니다.”
이어 그는 석지명에게 힐끗 눈짓을 하고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석지명은 중인들에게 양해의 말을 구하고는 그를 따라 나갔다. 중인들은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입맛이 영 씁쓸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상원건을 대할 때와 자신들을 대할 때의 석광호의 태도가 너무도 달라진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한 두 번 당하는 일도 아니었지만, 당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문제는 앞으로도 이와 같은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무림의 세가도 아닌 석가장에서도 이러니 나중에 소림사의 대집회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을 지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 아닌가? 장내의 분위기가 무거워질 때 진산월이 문득 낙일방을 쳐다 보며 물었다.
“일방. 낙양에서 제일 볼만한 곳이 어디냐?”
낙일방은 약간 어리둥절해 있다가 이내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동쪽에 있는 백마사(白馬寺)도 볼만 하고 복선사나 관림(關林)도 괜찮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궐용문(伊闕龍門)이 최고지요. 거기는 정말 별의 별 동굴이 다 있을 뿐만 아니라 해질 무렵에 보는 이수(伊水)강변의 황혼은 정말 그림같아요.”
그 말을 할 때의 낙일방의 표정은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두 뺨이 밝그스름해서 마치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진산월은 담담하게 웃었다.
“그럼 잠시 후에 용문 구경이나 하러 가자.”
낙일방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에요?”
“나도 이 기회에 말로만 듣던 용문석굴(龍門石窟)을 보고 싶구나.”
낙일방은 신이 나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어린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헤헤… 정말 잘됐어요. 그러면 길 안내는 내가 할께요. 여기서 십 여리쯤 남쪽으로 내려가면 되요.”
다른 사람들도 조금 전의 울적했던 기분을 잊은 듯 모두 설레는 표정으로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낙양의 남쪽에 위치한 이궐용문(伊闕龍門)은 예로부터 천하의 명승(名勝)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곳은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 때부터 세워진 수많은 석굴(石窟)들이 뚫려 있었고, 황하를 흐르는 이수(伊水)가 굽이쳐 흐르는 곳이어서 그 경치가 실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궐용문의 이름만 들었지 대부분은 아직 한 번도 구경하지 못한 상태였다. 때문에 진산월의 말에 들뜬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조금 전만 해도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금시라도 폭발할 듯 했던 응계성 마저도 어느 새 화가 풀어져 연신 낙일방을 향해 이궐용문에 대해 꼬치꼬치 묻고 있었다. 상원건은 진산호가 간단한 말 몇마디로 좌중의 분위기를 바꾸자 새삼 그에 대해 감탄하는 마음이 일었다.
‘저 자는 겉으로는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의외로 상당히 세심한 구석이 있구나.’
상원건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나 그동안 진산월 일행과 합류하면서 그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들은 개성이 강하고 강호 경험이 별로 없어 뜻밖의 실수도 곧잘 했으나, 나름대로 장점도 지닌 좋은 인재들이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그들이 장문인인 진산월의 말에 절대 복종을 한다는 것이었다. 성격이 급하고 참을성이 별로 없는 낙일방이나, 화가 나면 물불을 가릴 줄 모르는 난폭한 성격의 응계성 조차도 진산월의 말이라면 별다른 거부감없이 순순히 따르고는 했다. 처음에는 상원건도 그런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희미하게나마 그들 사이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에게 있어 진산월은 단순한 문파의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진산월은 그들의 맏형이며, 안내자였고, 스승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진산월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처럼 강한 성격의 젊은 청년들이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순한 양처럼 고분고분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원건은 그런 점에 있어서 진산월에게 진정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이 먼저 남을 믿지 못하면 절대로 남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문파의 제자들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받는 장문인이란 부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이 이궐용문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을 때 다시 문이 열리며 하인 한 사람이 커다란 쟁반에 다기(茶器)와 함께 차(茶)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것을 보고 상원건은 마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차를 내온다는 것은 그들을 정식으로 손님으로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그들이 청운각에 들어온지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차가 나오지 않아서 상원건은 내심으로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진산월 등은 아직 다른집에 정식으로 초대받은 적이 없어서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손님이 왔는데도 차를 내오지 않거나 식사 때가 되어도 음식이 장만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축객(逐客)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비록 상당한 시간이 흐르긴 했으나 차를 내오는 것으로 보아 석가장에서는 어쨌든 그들을 손님으로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그들이 석가장의 공자인 석지명의 초대를 받고 왔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푸대접이었으나, 그것은 다시 말하면 석지명의 석가장 내에서의 신분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차를 가져온 하인은 낙수 강변에서 석지명을 수행했던 두 명의 하인 중 한 사람이었다. 대개 차는 시비(侍婢)들이 가져오는 법인지라 남자 하인이 차를 따르는 풍경은 다소 생경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청운각에는 시비가 한 사람도 없는게 분명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아직까지 단 한 명의 시비도 눈에 띄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차 맛은 훌륭한 것이었다. 차의 색깔은 청갈색의 은은한 광택이 있었고, 진한 향기가 그윽하게 코 끝에 와 닿았다. 상원건은 차를 한 모금 입안에 머금고는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차맛을 음미하다가 눈을 뜨며 말했다.
“좋은 오룡차(烏龍茶)로군.”
낙일방은 자기도 몇 모금 홀짝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맛도 조금 색다른데 이름도 특이하군요. 차 이름이 검은 용(烏龍)이라니…”
상원건은 빙그레 웃으면서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것에는 유래가 있네. 복건성(福建省)의 구석진 차밭에 몇 그루의 차나무가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그중 한 나무의 뿌리 근처에 새카만 뱀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네. 그런데 그 뱀이 있는 나무에서 딴 차의 맛과 향기가 가장 좋았지. 그래서 까마귀처럼 검은 뱀의 차라는 의미에서 오룡차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일세.”
“그래요? 그거 참 신기하군요. 검은 뱀에 무슨 색다른 효능이라도 있었나 보죠?”
“하하… 그럴 리 있나? 내가 말한 건 어디까지나 전설(傳說)에 불과한 것이고, 사실은 차를 만들다가 갑자기 검은 뱀이 나타나서 사람들이 놀라 도망갔다 잠시 후 돌아와 보니 차에서 아주 독특한 맛이 나게 되었다고 하네. 그래서 오룡차가 탄생된 거지.”
낙일방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건 아무래도 검은 뱀의 몸에서 특이한 냄새가 배어 나와서…”
정해가 피식 웃으면서 끼어들었다.
“일방. 넌 자꾸 검은 뱀에 기이한 효능이라도 있다고 믿고 싶은 모양인데, 사실은 사람들이 도망간 사이에 차가 발효되어 맛이 조금 변한 것에 불과하다.”
낙일방의 얼굴에 한 줄기 실망의 빛이 떠올랐다.
“그럼 차맛이 변한 것은 검은 뱀과는 전혀 상관없잖아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없지. 어쨌든 검은 뱀을 피하려다 그런 맛이 난 것이니…”
“아무튼 검은 뱀 하고 차맛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거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정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낙일방은 인상을 찡그렸다.
“에이, 난 또…”
“하하… 왜 검은 뱀에 무슨 신비한 비밀이라도 숨어 있는 줄 알았느냐?”
낙일방은 입을 삐쭉거린 채 무심코 찻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의외로 청아하면서도 맑고 영롱한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닌가? 낙일방이 찻잔을 유심히 바라보니 은은하면서도 하얀 빛을 띤 고급 자기였다. 흥미를 느낀 낙일방이 한 차례 더 찻잔을 두드리려 하자 정해가 가볍게 그를 말렸다.
“그만해라. 그러다 값비싼 자기가 깨지기라도 하면 어쩌겠느냐?”
“이게 비싼 거라구요?”
“보아하니 경덕진(景德鎭)에서 나온 백자(白磁) 같은데, 그거 하나 값이면 네가 일 년은 벌어야 할거다.”
낙일방의 입이 딱 벌여졌다.
“와! 엄청나군요. 그런데 꼭 이런 비싼 찻잔으로 차를 마셔야만 차맛이 좋아지나요?”
“단순히 비싼 게 문제가 아니라 질이 좋고 우아한 찻잔일수록 차의 색깔을 잘 내주고 신선한 향기를 오래 보존할 수 있어서 좋은 것이다.”
낙일방은 열심히 정해의 말을 듣고 있다가 눈을 반짝거렸다.
“찻잔에 그런 묘용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그럼 이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찻잔이겠군요.”
정해는 고개를 흔들었다.
“찻잔 중에 가장 좋은 것은 강소성(江蘇省) 의흥(宜興)의 자사(紫砂)도기로 만든 것이다. 그건 진짜 귀해서 같은 무게의 금(金)이나 옥(玉)보다도 더 비싸지.”
“아니… 그걸로 차를 마시면 불로장생(不老長生)이라도 합니까? 왜 그렇게 비싸요?”
“나도 들은 이야기인데, 그 찻잔은 사용하면 할수록 색상이 윤택해지고 찻물이 향기롭고 순해질 뿐 아니라, 몇 년이 지나도 그 안의 찻물 색깔과 맛이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한다.”
낙일방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별로 믿어지지 않는데요?”
“그 정도로 효능이 좋고 차맛이 오래 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 설마 진짜 몇 년씩 괜찮을 리 있겠느냐?”
“그렇지요? 헤헤… 아무튼 정사형은 정말 아는 게 많군요. 어쩌면 뭐든지 그렇게 다 알고 있는 거죠?”
“너도 나처럼 하루에 두 시진 이상씩 책을 읽으면 된다.”
두 시진 씩이나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에 낙일방은 찔끔하더니 이내 싱글벙글거리며 웃었다.
“난 그냥 지금처럼 살래요. 모르는 게 있으면 정사형이 다 알려줄 텐데요.”
정해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럼 내가 언제까지나 네 뒤만 따라다니며 네가 모르는 걸 알려주란 말이냐?”
“사형은 안 따라 다녀도 돼요. 내가 따라다닐 테니까요. 헤헤…”
정해는 밉지 않게 웃는 낙일방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녀석. 그렇게 약은 척 하다가는 언제고 한 번 된통 당할 날이 있을 거다.”
그때 다시 석지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석지명은 매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중인들을 향해 사과의 인사를 했다.
“죄송합니다. 형님과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습니다.”
진산월은 괜찮다는 듯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석지명이 자리에 앉자 진산월은 그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석지명이 차를 몇 모금 마시자 그제서야 진산월은 지나가는 말처럼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다섯째 형님은 아호가 어떻게 되십니까?”
석지명은 진산월이 석광호에 대해 물어보자 약간 의아했으나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운룡(雲龍)입니다.”
운룡이란 구름 속의 용을 말한다.
“무척 낭만적이고 멋진 이름이군요.”
석지명은 나직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그 이름이 지어진 내력을 아신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하실 겁니다.”
이어 그는 석광호가 어려서 운룡이라고 불리우게 된 사정을 이야기했다. 석광호는 어려서부터 항상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재주를 숨기지 않았다. 때로는 너무 잘난 척을 해서 남들의 반감을 산 적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석곤은 그에게 구름 속의 용처럼 은인자중(隱忍自重)하라는 의미에서 운룡이라는 아명을 붙여 주었던 것이다.
십이지공자의 대부분은 이런 식으로 실제 성격과는 정반대의 아호를 가지고 있었다. 십이지공자의 둘째인 석철욱(石鐵旭)의 아호는 지우(遲牛)인데, 그것은 석철환의 성격이 너무 급해서 느린 소처럼 매사에 일을 천천히 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항상 병약했던 일곱째 석대회(石大晦)는 명마(名馬)로 유명한 호(胡)나라의 말처럼 튼튼하게 자라는 뜻에서 호마(胡馬)라는 이름이 붙었고, 행동이 굼뜨고 둔한 넷째 석조린(石晁麟)은 교활한 토끼처럼 약삭빠르라는 뜻에서 교토(狡兎)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석지명이 십이지공자의 아호에 대한 내력을 이야기해 주자 중인들은 모두 흥미로운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 상원건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는 진산월이 갑자기 석지명을 향해 먼저 이야기를 건넨 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진산월은 좀처럼 남들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쉽게 경동(驚動)하지도 않았고, 실없는 농담이나 의미 없는 허언(虛言)을 내뱉지도 않았다.
그런 진산월이 석지명에게 먼저 말을 건넨 것은 무언가 곡절이 있음에 분명했다. 그리고 상원건의 짐작은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석지명이 십이지공자의 아명에 대한 이야기를 대충 끝내자 진산월이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으로 슬쩍 입을 열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석가장의 자식교육은 무척 엄해서 도선출재(挑選出財)라는 특이한 규칙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 말을 듣자 석지명의 얼굴에 한 줄기 낭패스런 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상원건 또한 그제서야 진산월의 의중을 알아차리고 하마터면 대소를 터뜨릴 뻔 했다.
‘헛! 도선출재라… 과연 만만한 인물이 아니군.’
석지명은 한 차례 어색한 헛기침을 토해내고는 이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로 대단한건 아닙니다. 본가 나름대로의 자녀 양육법이라고나 할까요.”
진산월은 입가에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석지명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제가 듣기로는 굉장히 독특하고 엄격한 적자생존(適者生存)법이라고 하더군요. 그 도선출재의 관문을 넘지 못하고 석가장에서 방출된 사람들도 꽤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진산월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석지명도 더 이상 시치미를 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석지명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진장문인께서 그런 사실까지 알고 계시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군요. 확실히 본가에는 도선출재라는 다소 가혹한 규칙이 있습니다.”
낙일방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불쑥 물었다.
“도선출재라는게 대체 무엇입니까?” 석지명은 차를 몇 모금 마신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본가에서는 자식이 스무 살을 넘으면 투자할 대상을 자신이 직접 고르게 합니다.”
낙일방은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그게 뭐가 가혹합니까?”
“오 년 동안 투자를 해서 원금(元金)의 세 배 이상을 벌지 못하면 본가의 자식으로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자식으로 인정해 주지 않다니요?”
“본가의 재산(財産)을 전혀 배분 받을 수 없을 뿐더러,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게 됩니다. 한 마디로 이름만 석씨로 남을 뿐, 엄밀한 의미에서 석가장의 후예라고 할 수 없게 되는 거지요.”
낙일방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금시초문 인 듯 눈을 크게 떴다. 오 년 동안 원금을 세 배 이상 벌지 못하면 자식 취급을 하지 않다니 실로 듣도 보도 못한 기문(奇聞)이 아닌가? 더구나 이제 스무 살의 청년에게 세 배 이상 벌 수 있는 투자대상을 고르라는 것은 너무나 까다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중인들은 그제서야 도선출재가 가혹한 적자생존의 법칙이라는 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정해가 약간 망설이다가 석지명을 바라보며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혹시 석공자께서는 도선출재의 관문을 지나셨습니까?”
석지명은 조금 울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못 지났습니다. 솔직히 저는 투자할 대상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그제서야 상원건은 석지명이 왜 그토록 석가장 내에서 별다른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석지명은 아직 도선출재의 관문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마땅히 누려야할 석가장 후손으로서의 권리와 혜택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상원건은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급히 물었다.
“십이지공자 중 다른 분들의 상황은 어떤지 말해줄 수 있겠소?”
석지명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말이 나왔는데 무엇을 숨기겠습니까? 사실 제 위의 형님들은 이미 대부분이 도선출재를 통과한 상태입니다. 제 밑으로 네 명의 동생들과 저만 남았지요.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직 투자대상도 찾지 못한 사람은 저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 석공자께서 강호를 유람한 것은 단순히 명승고적을 구경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투자대상을 물색하기 위함이었구료.”
“과연 상대협의 눈은 날카우십니다.”
상원건은 넌지시 물어보았다.
“투자할 대상은 찾았소?”
석지명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강북(江北)의 대소(大小) 삼십여 개 문파를 둘러 보았는데 마땅한 곳이 없더군요.”
상원건이 안광을 번쩍 빛냈다.
“그렇다면 무림의 문파라도 상관없단 말이오?”
“아직 모르셨군요. 도선출재의 대상은 무림의 문파로 한정됩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거지요.”
“그랬구료. 석공자는 달리 마음에 둔 문파라도 있소?”
석지명은 왠지 잠시 머뭇거렸다. 그는 힐끗 진산월을 쳐다보다가 이내 맥없이 고개를 저았다.
“몇 군데 생각한 곳이 있기는 한데 막상 알아보니 별로 전망이 보이지 않더군요. 그리고 가능성이 농후한 곳은 이미 형님들이 선점(先占)을 하셔서… 다음 달 쯤에 다섯째 형을 따라 장성 부근으로 나가 볼까 합니다.”
“장성 부근이라면 삼월보(三月堡)가 가장 유명한데 그곳은 접촉해 보셨소?”
석지명의 얼굴에 고소가 떠올랐다.
“그곳은 이미 다섯째 형님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랬구료. 산서(山西)의 오대파(五臺派)는 오랜 전통이 있어서 상당한 저력을 지니고 있는데 그곳은 어떻소?”
“제 동생 중 한 명이 얼마 전에 오대파와 계약을 했다고 하더군요.”
상원건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손뼉을 탁 쳤다.
“장성에서 제법 멀기는 하지만 멀리 대막 일대를 석권한 대막철기맹(大漠鐵騎盟)이라면 충분히 공자에게 커다란 도움이 될 수 있을거요.”
석지명은 잠시 침묵했다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상대협께서 신경을 써주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대막철기맹이라면 막내의 외조부 댁이라 제가 끼어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상원건은 내심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석지명이 지금 상당히 다급한 처지에 몰려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장성 부근에 문파가 어찌 그 세 곳 뿐이랴만, 그들과 다른 문파와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지라 쉽게 추천할 수가 없었다. 그때 문득 상원건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막내의 외조부라면… 석공자의 외조부도 되지 않겠는가?’
그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 석지명은 약간 씁쓸한 음성으로 말을 계속했다.
“제게는 모두 네 분의 어머님이 계신데, 유독 저의 어머님만이 무림세가(武林世家)의 출신(出身)이 아니십니다. 다섯째 형님은 어려서부터 워낙 바깥에 나다니는걸 좋아해서 어렵지 않게 삼월보와 끈이 닿았지만… 저는 거의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던지라 문득 나이가 차서 주위를 돌아보니 쓸만한 곳은 모두 남들이 차지해 버려 투자할 상대를 쉽게 찾을 수 없더군요.”
석곤에게 네 명의 부인이 있다는 것은 상원건도 금시초문이었다. 하나 석곤같은 거부(巨富)라면 명문세가 뿐만 아니라 강호의 유력한 문파에서도 앞을 다투어 사돈을 삼으려고 할 게 뻔한지라 네 명이라는 숫자도 그리 많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다섯째 형님과 석공자는 같은 어머님이시오?”
“그렇습니다. 열두 명의 형제 중 우리 두 사람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친
형제라고 할 수가 있지요.”
상원건은 그제야 사정을 알겠다는 듯 동정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사정이 딱하게 됐구려. 장성 일대는 내 고향인 농서와 가까워서 대충 소식을 알고 있소. 그곳은 삼월보의 세력이 워낙 강해서 여타 다른 세력들은 거의 삼월보에 흡수당했던지 아니면 겨우 명맥만을 이어갈 정도요. 아마 형님이 도와주신다고 해도 쓸만한 문파를 찾기란 쉽지 않을거요.”
상원건의 말마따나 삼월보는 장성 부근에서는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무림에서는 그들을 강호에서 오랫동안 명성을 날리고 있는 하북(河北)의 검보(劍堡)와 요즘 무섭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섬서(陝西)의 초가보(焦家堡)와 함께 강북삼보(江北三堡)로 부르고 있는 실정이었다.
잠시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낙일방은 아까서부터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입이 근질거렸으나 그때마다 정해의 눈짓을 받고는 억지로 눌러참고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정해 뿐 아니었다. 응계성도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게 분명했다. 단지 태연한 사람은 장문인인 진산월과 실내에서도 죽립을 눌러 쓰고 있는 임영옥 뿐이었다. 임영옥은 아직 상중(喪中)인지라 가급적이면 죽립과 삼베로 짠 각반을 벗지 않았다. 상원건은 종남파 제자들의 얼굴에 초조한 표정이 떠올라 있는 것을 보고는 그들의 속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상원건 또한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석가장의 후원을 받는다면 종남파의 앞으로 행로(行路)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의 일이었다. 하나 그것은 절대로 강권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 남에게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상원건은 속으로 쓴웃음을 짓고 있으면서도 석지명에게 종남파가 어떠냐고 추천하지 못하고 있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석지명이었다. 석지명은 몇 차례 헛기침을 토하며 진산월을 향해 무어라고 입을 열려다 망설이고는 했다. 하나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힘겹게 입을 열고야 말았다.
“진 장문인.”
진산월은 담담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십시오.”
석지명은 다시 머뭇거리다가 딱딱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제가 여러분들을 본가에 초대한 것은 도선출재의 대상으로 종남파를 숙고(熟考)해 보기 위해서 였습니다.”
진산월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아연 긴장한 빛이 떠올랐다. 특히 낙일방은 옆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석지명의 입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간절히 묻고 싶었던 말을 지금 석지명이 하고 있으니 그가 미칠 듯이 흥분하고 초조해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진산월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시선으로 석지명을 응시했다.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석지명은 눈을 크게 뜨고 새삼스러운 듯 진산월을 응시하다가 멋적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셨군요. 그렇다면 더욱 창피막심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저는 석 달간이나 하남과 섬서성 일대를 돌아다니다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돌아오던 중 집에서 멀지 않은 낙수에서 여러분들을 만나서 이게 혹시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인연(因緣)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산월은 묵묵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그때 저는 반쯤 자포자기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습니다. 표현이 이상했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종남파라는 이름은 그동안 제가 듣기에는…”
석지명은 다음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한 표정으로 머뭇거렸다. 진산월이 빙긋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예전에는 그래도 명문(名門)이었으나 지금은 몰락해가는 문파라고 들었겠지요.”
석지명은 그가 자기 입으로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는지 움찔하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것보다 조금 더 심한 소리였습니다. 하하…”
낙일방은 내심 불만에 가득 차서 무어라고 반박을 하고 싶었으나 정해가 옆구리를 쿡 찌르는 바람에 간신히 눌러 참았다. 하나 그는 입을 툭 내민 채 속으로 마구 투덜거렸다.
‘제기랄… 그것보다 더 심한 소리라구? 마음놓고 떠들라고 해. 머지않아 본파의 이름이 강호에 휘날릴 때 그런 말 한 놈들 얼굴을 꼭 보고 말테니…’
석지명은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듯 이내 웃음을 거두고는 한결 진지해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소문도 있고해서 저로서도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선은 여러분들을 잠시 본가에 모신 후 천천히 생각을 정리해 보려고 했던 거지요.”
진산월은 조용히 그의 말을 듣고 있다가 침착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걸 보니 마음의 결정을 내린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석지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중인들은 바짝 긴장하여 그의 입에서 다음에 무슨 말이 나올지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상원건조차도 마치 자기 일처럼 흥분되었으니 다른 사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석지명은 중인들의 초조함은 아랑곳 없다는 듯 다시 한 모금의 차를 마신 후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다섯 째 형과 상의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을 굳혔습니다. 이개월만 두고 보기로 말입니다.”
뜻밖의 말에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낙일방은 그가 거절하면 어쩌나하고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 이 말을 듣자 도저히 참지 못하고 정해의 제지를 무릅쓰고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두고 보겠다니…”
정해가 황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으나 낙일방은 그를 뿌리치며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더욱 크게 소리질렀다.
“놔요, 정사형도 들었잖아요? 좋으면 좋은거고 아니면 아닌 거지 두고 보겠다니… 우리가 무슨 물건입니까?”
“일방. 그렇게 소리치지 마라!”
“정사형은 항상 너무 고분고분해서 탈이에요. 이런 일을 당하고도 화를 내지 않으면 남들이 무시한단 말입니다.”
“일방!”
정해가 제발 그만하라는 듯 그의 어깨를 붙잡아 반강제적으로 의자에 끌어앉혔다. 낙일방은 한 차례 더 발작하려다 진산월이 자신을 바라보자 간신히 폭발하려는 화를 눌러 참았다. 진산월은 눈짓으로 낙일방을 제지하고는 담담한 눈으로 석지명을 돌아보았다.
“이개월만 두고 본다는 말뜻은 무엇입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여러분들은 이제 곧 소림사로 가실 거지요?”
“그렇습니다.”
“듣자하니 이번의 소림사 대집회는 강호무림에서 근래에 볼 수 없었던 성대한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번 집회에서 종남파가 어떠한 활약을 할지 지켜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
“그동안 저는 다섯 째 형과 함께 아직 가보지 못한 장성 일대를 둘러보고 오려 합니다. 그래서 두 달 동안 지켜보겠다고 한 것입니다.”
석지명의 말에 중인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을 지켰다. 이것은 그야말로 종남파로서는 치욕스럽다고 해도 좋을 제안이었다. 종남파에 투자할지 안할지 일종(一種)의 시험을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는가? 만약 종남파가 이번 소림사의 집회에서 별다른 활약이 없거나, 석지명이 장성 일대에서 마음에 드는 다른 문파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종남파로서는 닭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은 체면을 존중하고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명문정파의 후손이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종남파 제자들의 얼굴은 대부분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낙일방은 물론이고 응계성 또한 참지 못하고 금시라도 분노를 폭발할 것만 같았다. 낙일방과 응계성이 감히 발작하지 않은 것은 석지명의 체면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그들의 앞에 진산월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나 어찌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석지명의 말마따나 종남파는 강호상에서 유명무실한 존재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그런 상대를 단지 우연히 지나가다 한 번 만났을 뿐인 석지명이 선뜻 자신의 일생을 걸 투자대상으로 골라주길 바란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이 아닐 수 없었다. 석지명은 중인들이 분노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은 듯 오직 진산월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떻습니까? 제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진산월은 한동안 묵묵히 석지명의 시선을 마주보고 있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장문사형!”
낙일방이 솟구치는 분노와 설움을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나 진산월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하며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달후에 석공자의 결정을 기다리겠습니다. 석공자께서도 나중에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가급적 많은 곳을 알아보시기 바랍니다.”
석지명은 기이한 빛이 번뜩이는 눈으로 진산월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찻잔에 남은 찻물을 단숨에 들이 마시고는 진산월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했다.
“두 달 후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